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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위인들]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 역사 한국의 위대한 인물
등록일 :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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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권덕규는 1891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여 1949년 행방불명된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호는 예류, 한별이라고 불리며, 술을 좋아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당대의 기인으로 유명하였다.
태그
한글보급
한글학자
역사학자
권덕규

이칭ㅣ애류,   본관ㅣ김포,   생몰년도ㅣ1890년~1950년 ,   시대구분ㅣ근현대

 

 

1)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우리역사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선 권덕규

 

권덕규는 1891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여 1949년 행방불명된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호는 애류(崖溜), 한별 등이 있다. 그는 191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들어가 주시경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910년대 조선광문회에 참가하여 많은 한국의 고서를 접하며 역사에 대해서도 식견을 키웠다. 1920년 모교인 휘문학교의 조선어교사로 부임한 이래, 모교를 비롯하여 중앙학교·중동학교(1935년 경) 등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쳤다.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도 참가하였고, 1923년에는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를 발간하였다.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조선어철자위원회’ 위원,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편찬위원 등 일제강점기 한글 연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병기 등과 함께 한글社를 조직하여 잡지 『한글』을 발간하기도 하고, 조선어 강습회 개최, 경성방송국 조선어 강좌를 진행하는 등 한글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1930년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 ‘조선어문공로자’ 9인 중에 최현배, 이윤재 등과 함께 선정되기도 하였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위해 공헌한 조선어학회 위원 18인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글 연구와 더불어 그는 역사 연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역사서 중 하나인 『조선유기(朝鮮留記)』(1924년), 『조선유기(중)』(1926년), 『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1929년)을 저술하였다. 그는 특히 우리 민족의 문화를 단군 이래의 ‘신교(神敎)’가 도도히 흘러온 역사로 바라보았다. 그는 민족의식을 강조하며 민족사를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결국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신병으로 불구속 입건되어 이듬해 4월 기소중지가 되었다. 광복이 되자 국어 강습을 시작하고『조선사』, 『을지문덕』을 간행하였다. 1949년 반신불수로 건강이 좋지 않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2) 일대의 기인, 권덕규의 한글과 우리 역사 연구

 

권덕규는 수많은 글을 발표한 학자이며 교육자이지만, 그 못지않게 당대의 기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일화는 1920~130년대 각종 잡지에 심심찮게 단골손님으로 등장할 정도였다. 그는 1920년 동아일보에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棒)’, 즉 ‘가짜 명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자주정신을 잃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여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여 학교가 끝나면 선술집으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 집 판 돈을 술값으로 다 날리기도 하고 술 한 잔 걸치고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코를 골고 잠을 드는 등 유명한 일화가 많다. 거침없고 고집이 세지만 과오는 솔직하게 인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권덕규의 성향 속에서 한글 연구와 역사 연구는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밑바탕에는 독실한 대종교도로서의 역사관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0년 대종교도가 된 것으로 보이며, 1920년대 대종교 청년회 활동을 비롯하여 관련 강연을 활발히 하였다. 권덕규는 「조선어 연구의 필요」(동아일보, 1922.4.1)에서 자신의 연구 단계를 3단계로 설정하였는데, 첫째 ‘실용’, 둘째 ‘과학’, 셋째 ‘응용’이었다. 즉 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는 방법에 대한 연구 단계,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단계, 고대의 언어, 문자, 문학 등을 통해 인문 발달의 과정을 탐구하는 응용의 단계이다. 그의 한글 및 역사 연구에는 주시경의 가르침과 최남선을 통한 고문헌에 대한 접근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중국과 차별되는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유구성을 강조하며 우리 민족 문화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은 훈민정음 이전에 조선의 고유문자가 있었고, 세종은 이를 정리하여 한글을 반포하였다는 논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권덕규는 믿고 따르던 최남선의 변절과 아끼던 아들의 사망 등으로 큰마음의 상처를 받고 학문적 의욕을 잃어갔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역사 연구도 이런 한글 연구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는 한국사의 범주를 만주로까지 확대하고 민족의 범주를 넓히고 단군, 부여, 고구려, 발해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민족의 우월성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유기』(1924), 『조선유기(중)』(1926)를 간행하였다. 제목에 쓰인 『유기』는 사라진 고구려의 역사서 『유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를 읽기 쉽게 간추려 1929년 『조선유기략』을 발간하였는데, 문일평은 이 책에 대해서 “현금(現今) 중등 정도의 교과용으로 아주 편의”(조선일보. 1929년 10월 3일)라고 호평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다시 광복 후 빛을 보았다. 광복 후 그동안 억압받았던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은 컸다. 이때 권덕규의 『조선유기』를 한 책으로 엮은 『조선사』는 광복 직후 최현배의 『우리말본』과 더불어 대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권덕규의 『조선사』는 1998년 한국출판연구소가 꼽은 ‘건국이후 베스트셀러 50선’에서 당당히 1950년의 베스트셀러로 꼽힐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3) 사라진 고구려의 역사서 󰡔유기󰡕를 잇다.

 

여기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무료로 온라인(원문)보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조선유기』(1924), 『조선유기(중)』(1926)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제목에 쓰인 『유기』는 사라진 고구려의 역사서 『유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권덕규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두 책 다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저(著)’라는 표제 위에 ‘한별 지은 조선유기’라고 적었다. 그의 한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각각 발행되었지만,『조선유기』(1924), 『조선유기(중)』(1926), 이 둘을 합쳐야 비로소 완전한 『조선유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1929년 발간된 『조선유기략』의 본편이자 광복 후 베스트셀러인 『조선사』이다. 권덕규가 1924년 발행한 『조선유기』에는 제1편 상고사, 제2편 중고사로 구성되어, 조선의 종족과 단군부터 고려시대까지 서술하였다. 특별히 상권이라고 표기는 하지 않았으나 1926년 『조선유기(중)』이 발간되었으므로 편의상 1924년 『조선유기』를 『조선유기(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유기(중)』에서는 제3편 근세사로서 조선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조선유기』는 상고사(총 8장), 중고사(1장), 근세사(1장), 3편으로 나눠져 있다. 제1편 상고사는 제1장 조선의 지리와 종족, 제2장 단군시대, 제3장 부여시대, 제4장 삼국시대, 제5장 삼국의 발전, 제6장 삼국의 전성시기, 제7장 삼국과 외국의 교섭, 제8장 남북조로 구성되었다. 제2편 중고사는 제9장 고려시대, 제3편 근세사는 제10장 조선시대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체제는 『조선유기』를 알기 쉽게 풀어쓴 『조선유기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유기략』은 상고사, 중고사, 근고사, 근세사로 구성되었는데, 삼국시대, 남북국시대가 중고사로, 고려시대가 근고사로, 조선시대가 근세사로 구분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권덕규는 한국사를 단군 조선에서 시작되어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하고 그 지역의 종족을 아우른 역사를 그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숙신, 부여, 한(韓)의 역사를 세 계통으로 나눠 발해뿐만 아니라 청까지 단군의 후예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부여와 한의 계통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 조선이 1500년 이상 지속하였으며 단군이라는 명칭은 역대 임금의 명칭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1920년대 이른바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종종 보이는 것이다.

 

“朝鮮은 東大洋(곳 太平洋) 西北에 在하니 東은 大海를 連하고 南은 耽羅(涉羅, 곳 濟州島)에 至하고 北은 黑水(곳 黑龍江)를 過하고 西는 金阿林(곳 興安嶺)을 越하야 沙漠에 盡하고 다시 南으로 黃河 近傍에 亘하니 太白山(今 白頭山)北, 松花江沿岸이 그 中央이니라. 天이 이 朝鮮域을 劃하고 人種을 祖産하니 이는 上古六大文明創開者의 一人인 桓곳天族이라 或이 퉁그쓰(通古斯)種族이라하니 軀幹이 碩大하고 그 性이 英明勇莊하며 慈仁淳淑하야 大人 또는 善人, 君子의 名을 得하고 弓術에 長함으로 弓大人을 意한 夷의 稱이 有하니라”
『조선유기』 

이 책에 다룰 조선의 범위를 제시하고 있는데, 한반도 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 북쪽 일대를 포괄한 아주 광범위한 영역임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 조선의 문명을 만든 이가 바로 ‘상고 육대 문명 창개자’라며 자부심에 찬 서술을 하고 있다. 
“조선은 동대양(즉 태평양) 서북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하고 남으로는 탐라(삽라, 곧 제주도)에 이른다. 북은 흑수(즉 흑룡강)를 지나고 서는 금아림(곧 흥안령)을 넘어 사막에 이르고 다시 남으로는 황하 근방에 걸친다.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북쪽, 송화강 연안이 그 중앙이다. 하늘이 이 조선의 영역을 긋고 인종을 낳으니 이는 상고 육대 문명을 창시한 사람들의 일인인 환(桓), 즉 천족이다. 혹은 퉁구스 종족이라 하니, 체구는 크고 그 성품은 똑똑하고 밝고 용감하고 씩씩하며, 인자하고 순수하여, 대인, 또는 선인, 군자라고 불리며, 궁술에 능함으로 궁대인(弓大人)을 뜻하는 이(夷)라는 명칭이 있다.”

 

“新羅가 麗濟를 平하고 浿江以南의 地를 領有하고 句麗故地에는 渤海가 興起하야 二百三十年間 東方史上에 主人이 되니 이곳 南北朝라 이 南北朝가 가장 큰 版圖를 가지고 가장 높은 文化를 가져 큰 色彩를 우리에게 끼쳤나니 南北朝는 果然五千年史上에 盛代라 할지니라”
『조선유기』
 

권덕규의 발해 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덕규는 신라와 발해를 남조, 북조로 보고, 이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이후 서술에서도 발해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평정하고 패강 이남 땅을 차지하고 고구려 옛 땅에는 발해가 흥기하여 이백삼십년간 동방 역사의 주인이 되니, 이것이 즉 남북조다. 이 남북조가 가장 큰 판도를 가지고 가장 높은 문화를 가져 큰 색채를 우리에게 끼쳤으니, 남북조는 참으로 오천년 역사상 번성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朝鮮은 古來로 國文이 自有하니 神誌秘詞는 그 여하를 知치못하나…世宗二十五年에 正音廳을 禁中에 設하고…舊來의 文字를 整理演撰하야 字母二十八字를 定하야…國民에게 頒布하니 이곳 訓民正音(혹 諺文이라 함)이라. 世界文字가운데에 가장 新式의 것으로 東洋의 唯一한 알페뻬트式 文字로 그 精巧함이 文字史上에 特絶한 바ㅣ러라”
『조선유기』
 

권덕규의 우리글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우리글이 있었으며, 세종은 이를 정리하여 세상에 반포한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은 고래로 국문이 있었으니 신지비사는 그것이 어떤가는 알지 못하나…세종 25년에 정음청을 궁중에 두고…구래의 문자를 정리하고 연구하고 골라 자모 28자를 정하여…국민에게 반포하니 이것이 즉 훈민정음(즉 언문이라 함)이라.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신식의 것으로 동양의 알파벳식 문자로 그 정교함이 문자의 역사상 특별히 뛰어난 것이다.”

 

 

 

참고문헌

 

권덕규(1924). 『朝鮮留記』. 경성: 尙文館.
권덕규(1926). 『朝鮮留記』(중). 경성: 尙文館. 
권덕규(1929). 『朝鮮留記略』. 경성: 尙文館. 
권덕규(1929) 정재승 역(2009). 『조선유기략』. 서울: 우리역사연구재단.
조동걸(2010). 『한국근대사학사』. 서울: 역사공간
박걸순(1998). 『한국근대사학사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정민지(2013). 權悳奎의 『朝鮮史』에 나타난 한국사 인식. 『역사교육연구』, 17. 7~46.
이현희(2012). 權悳奎의 생애와 그의 국어학적 업적에 대한 한 연구. 『규장각』, 41. 87~156.
하재영(2010). 애류 권덕규의 생애와 국어 연구. 『어문논총』, 52. 29~59.
권덕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4년 11월 28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870
조선유기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4년 11월 28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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