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인물탐구  

 

 도서관에는 언제나 마술이 펼쳐진다. 마술사가 와서 마술을 하는 걸까? 여기서 ‘도서관 마술’이란 사람들이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찾을 때 금방 발견하게 되는 신기한 일을 말한다. 이 마술은 바로 도서에 대한 분류법 덕분에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문헌 분류 덕분에 우리는 도서관에 들어가 거대한 장서 속에서 각자 원하는 책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도서관에는 여러 가지 문헌 분류가 쓰이고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분류법은 DDC(Dewey Decimal Classification)이다. 이러한 십진분류법을 만든 사람이 바로 ‘멜빌 듀이(Melvil Dewey)’이다.

  국내외 사서와 문헌정보학도 중에서 멜빌 듀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흔히 ‘도서관 문헌 분류의 창안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일생을 건 관심은 성인교육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 사회에서 ‘근대 도서관직의 아버지(Father of Modern Librarianship)’이자 ‘도서관학의 개척자(Pioneer of Library Economy)’이다.

 

금욕적, 도덕적인 생활 방식을 몸에 익힌 어린 시절

  이제 그의 인생역정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그는 1851년 12월 10일 미국 뉴욕 주의 서북쪽 끝, 제퍼슨 카운티(Jefferson County)의 아담스 센터(Adams Center)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의 도서관, 십진분류법, 도서관학의 아버지’인 박봉석보다 반세기 전에 출생하였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분류법의 창안, 도서관협회의 조직, 도서관 학교의 설립 등 공통점이 많다.

  듀이의 본명은 ‘Melville Louis Kossuth Dewey’이다.1) 그는 평생 동안 영어 철자법의 개혁(간소화)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차원에서 대학을 졸업한 직후 자신의 이름에서 ‘le’를 빼고 ‘Melvil’이라고 하기 시작했고, 또 한동안은 그의 성도 ‘Dui’로 적었다.2) 그가 태어난 고장은 적극적인 복음주의 침례교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천박함, 유행, 카드놀이, 춤, 신성모독, 노예제도, 흡연 등을 반대하였다. 듀이의 부모는 그에게 음주와 흡연을 멀리하는 금욕적 생활, 교회나 가정에서 도덕적 개혁을 추구하는 생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생활, 겸손함 등을 가르쳤다.

  1867년 4월, 16세에 그는 뉴욕 주의 교사자격증 오리엔테이션 참가를 계기로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교육이야말로 정신을 개혁하는 가장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해 12월부터 중등학교인 헝거포드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1868년 겨울, 교실에서 불이 났을 때 많은 책을 옮기려다 심한 감기에 걸려 2년을 더 살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시간의 효율적인 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 그의 건강은 회복되어 1870년 앰허스트대학(Amherst College)에 진학하였다. 이처럼 성실하고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부모 밑에서 익힌 금욕적인 생활 방식, 어린 시절에 경험한 죽음의 문턱 등은 그의 사회적 공헌을 향한 신념, 개척자적인 추진력, 실용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앰허스트대학의 도서관 사서로 십진분류법 창안

  듀이가 앰허스트대학에서 2학년을 마칠 즈음에 그의 일생을 바쳐 추구할 만한 소명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첫째, 미터법에 의한 도량형의 단일화, 둘째, 언어에 있어 ‘규칙성’에 의한 영어 철자법 개혁, 셋째, 속기법 사용, 넷째, 교육(성인을 위한 평생교육)이다. 특히 그는 사람들이 좋은 독서를 통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무료 공공도서관(Free Public Library)을 통한 가정교육’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72년 10월 그는 앰허스트도서관에서 학생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그는 도서관에 관한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읽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1874년 7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분류법의 골격을 마련하였다. 그의 분류법 창안은 도서관 업무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고 이는 또한 사서직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졸업 후 그는 앰허스트대학의 도서관 사서로서 약 2년을 더 근무하였다. 1876년에는 십진분류법이 공포되었고, 그는 앰허스트대학 도서관 소장 장서를 자신이 만든 십진분류법에 의해 새롭게 배가하였다. 앰허스트대학 시절은 듀이가 일생동안 도서관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결정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876년, 그는 교육자료 회사 설립자 긴(Edwin Ginn)과 함께 일하기 위해 도서관을 그만두고 보스톤으로 이주하였다.

  듀이가 이사한 보스톤은 미국에서 가장 좋은 교육 시스템과 도서관을 가지고 있어서 소위 ‘세계적인 큰일’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76년 10월에 개최된 필라델피아의 ‘미국독립백년제 기념박람회’에 참가한 104명(여자 13명 포함)의 도서관인들과 함께 ‘미국도서관협회(American Library Association)’를 창설하였다. 그 활동 방향은 도서관학 이론의 정립보다는 도서관의 실제적 운영을 개선하는 데 두었다. 윈저(Justin Winsor)를 회장으로 하고 듀이는 서기장인 동시에 재무관으로 선출되었다. 듀이는 14년 뒤 1890년에 회장이 될 때까지 무보수로 서기장직을 맡았다. 듀이는 ALA의 모토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독자들을 위한 최선의 독서(The best reading for the largest number at the least expense)”라고 정하였다.

  듀이는 1876년에 또한 도서관 관련 최초의 잡지로 《American Library Journal》을 창간하였다. 이 저널은 당시 ALA 기관지 역할을 하였고, 2년 뒤 《Library Journal》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20세기 초(1907년)부터 ALA는 자체의 기관지를 독자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했고, 《Library Journal》은 ALA와 관련이 없어진 후에도 미국과 전 세계의 도서관 이슈들에 대해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연속간행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도서관 학교를 설립

  듀이는 1877년 9월 첫 번째 ALA 연례회의 후, 영국도서관협회(Library Association)를 결성하게 될 영국사서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런던행 배를 탔다. 그는 그곳에서 웰슬리대학(Wellesley College) 최초의 사서인 애니 갓프리(Annie Godfrey)를 만났고, 1878년 10월 19일에 결혼하였다. 애니는 1850년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듀이와 마찬가지로 교육과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서 듀이의 개혁 의지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3) 그는 또한 도서관 비품의 표준화를 추진하였으며, 실제로 1881년에는 도서관 비품 회사인 ‘라이브러리 뷰로(Library Bureau)’를 설립하였다. 그는 이후 28년 동안 이 회사의 경영에 관여하였다.

  1883년 그는 ‘미터법 보급회의’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컬럼비아대학 학장 바너드의 요청으로 컬럼비아대학의 도서관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그는 인건비 예산을 대폭 늘려, 우수한 도서관 직원을 채용하였다. 특히 여성 사서를 채용함으로써 적은 임금으로 높은 수준의 직원을 채용하는 새로운 고용 행태를 창출하였으나, 여성을 채용하거나 입학시킨 사례가 없는 컬럼비아대학 이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컬럼비아 대학 재직 시절에 듀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최초로 1887년 1월 ‘도서관 학교(The School of Library Economy)’를 설립하였다. 당시 컬럼비아대학은 도서관 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듀이는 자신의 독단으로 도서관 학교에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였고, 이 때문에 대학 이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최초의 도서관 학교는 도서관 직원 양성을 목표로 매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내용을 교수하였다.

  1889년 도서관장직을 사직함으로써 그는 그동안 갈등을 빚던 컬럼비아대학을 떠났다. 그 이유는 그가 대학의 내규를 어겼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컬럼비아대학이 대학(College)에서 대학교(University)로 힘들게 옮겨가는 과정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가 주재해 온 도서관 학교는 뉴욕 주 올바니(Albany)로 이전되었다. 같은 해 그는 뉴욕주립도서관장으로 취임하여 1906년 1월까지 그 주의 도서관을 재조직하고 발전시켰다.

  1890년에 그는 ALA 회장이 되었고, 1891년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런데 후임 회장이 공금횡령으로 물러나자 위기에 빠진 ALA를 구하고 시카고세계박람회에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1892년에 재선되었다.

 

공공도서관을 통한 생애교육으로 이상 사회를 만들고자

  듀이는 평생 동안 ‘공공도서관을 통한 생애교육’으로 사회가 이상적인 세상으로 변할 것으로 생각했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895년 사서, 교사 등과 같은 중류층을 위한 회원제 클럽인 ‘레이크 플레시드(Lake Placid)’를 창설하였으며 클럽 운영을 위해 ‘레이크 플레시드 회사(Lake Placid Company)’를 설립하였다. 그는 1905년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고 레이클 플레시드 클럽 사업에 전념하였다.

  듀이는 1931년 80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별세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정신을 기념하여 ‘Melvil Dewey Library and Media Center’가 설립되었다. 또한 ALA는 1953년부터 매년 도서관 경영, 훈련, 편목, 분류 등 도서관 분야의 발전에 공헌한 개인이나 기관에게 ‘Melvil Dewey Medal’을 수여하고 있다.

  듀이는 자신이 꿈꾸는 교육의 세계를 무료 공공도서관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일생 동안 그는 독단적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지만, 강인한 의지와 추진력을 가지고 미국 도서관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이러한 업적들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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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oclc.org/dewey/resources/biography/ (Cited 2007. 5. 21)
2) 박명규ㆍ이성숙, “도서관학의 개척자, 듀이”, 이병목 기획ㆍ감수, 고인철 외저,『위대한 도서관사상가들』(한울, 2005),
    176-177쪽.
3) 위의 책, 154쪽. 

    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