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재 순 ㅣ국립중앙도서관 사서, 현 동경대학 문헌정보학 박사과정 재학

세계 어느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도서관의 역사는 대부분 왕실문고 혹은 왕립도서관으로부터 출발한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세계 최대, 최고(最古)의 도서관으로 알려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립도서관이었다. 우리나라 또한 고려 성종시대의 비서각(秘書閣)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시대의 집현전 등은 왕실도서관의 역할을 한 도서관의 선구적 기구였다. 특히, 정조대왕 때 설치된 규장각은 국왕의 어제 및 어필을 보관하는 역할과 함께 왕립도서관으로서 한국의 근세 도서관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 설치되었던 규장각은 그 후 구한말,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과 그 영욕을 함께 해 왔다. 1990년 9월,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 건물로 이전한 규장각은 조선시대 자료의 보고(寶庫)로서, 또한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기반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규장의'奎'는 28宿의 하나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인'奎宿'에서 따 온 것인데, 중국에서는 황제의 어필을'규장'이라고 하였다 한다. 따라서 규장각이란'국왕의 어필(御筆)을 보관한 건물'이라는 뜻이다. 규장각의 역사는 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로 규장각의 창설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규장각은 정조의 구상으로 갑자기 창설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숙종 때부터 존재했던 시설이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미 15세기 중엽 세조 재위시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게 된 것은 숙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숙종은 역대 선왕들의 어제 및 어필을 보관하기 위해서 종친 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시에 조그마한 각(閣)을 별도로 건립하였는데, 그 각에는 숙종의 어필인'규장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정조 5년 숙종의 친필 현판을 주합루(宙合樓: 역대 선왕들의 물품을 보관하던 어제 존각을 규장각으로 바꿈)로 옮겨 달면서 규장각은 정조의 근시(近侍)기구로서 본격적인 기능을 하게 되었다.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 현판은 이 숙종의 현판을 저본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학술기관이자 정치기구로서 기능하던 규장각은 정조의 붕어와 더불어 그 정치적 기능은 약화되고 학술 및 도서관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즉위하면서 서양문물 관련서적을 구입하고 1900년대 초에는 홍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 집옥재(集玉齋), 지방 사고(史庫)의 도서들이 규장각 도서로 이관되어 10만여 권의 장서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국보급 자료들을 규장각이 관리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규장각이 폐지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 참사관 분실이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게 되었고, 1920년대 말에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개교와 더불어 규장각 도서는 서울대학교로 이관된다. 한국전쟁 발발시에는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국보급 도서 8천 책 이상이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대피되기도 하였다. 당시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던 백낙준 박사가 트럭 8대를 긴급 동원해서 그 중 5대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남은 3대를 국립도서관으로 보냈었다고 한다. 이는 장관으로서의 책무도 있었겠지만, 도서관과 귀중본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기에 취해진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백낙준 박사는 미국 유학 시절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도서관학을 한 학기 이수한 적도 있으며 미국국회도서관에서 자료정리를 한 경력도 갖고 있는 분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창경궁 장서각에 보관 중이던 적상산본 실록을 북한이 가져가는 등 적지 않은 손실도 있었으나 데부분의 규장각도서는 1954년에 서울로 무사히 귀환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서울대학교 규장각'은 1992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분리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고도서 17만 5천여책, 고문서 5만여점, 책판 및 기타 1만 8천여 장 등의 국학자료가 소장되어 있으며, 6종 7,076책이 국보로, 8종 28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규장각은 국내외 연구자는 물론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 모두에게 개방되고 있으며, 현재 규장각을 찾는 이용자수(전시실 관람자 포함)는 연간 2만 6천여 명, 이용 책수는 약 12만 책에 이른다고 한다.

성격이나 규모는 다르지만, 왕립도서관으로서 학문을 적극 장려했던 왕이 있었고 당대의 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모여들었던 도서관이라는 점에서, 기원전 3세기 말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떠오른다. 한동안 화제를 모았던 고대 최초의 도서관, 찬란히 빛나던 옛 영광을 오늘에 재현시키고자 추진되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부흥 프로젝트도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도서관 건립에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가장 많은 기부금을 선뜻 냈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와 함께, 작년 10월에 개관을 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들, 가령 1년=365일 계산법이라든가, 갈릴레오보다 앞선 지동설, 유레카로 유명한 순금 계산법 등등이 과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모인 학자들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신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계의 도서관으로서 그리고 세계 석학들이 모이는 도서관이자 연구소로서 기능했던 과거의 영광이 오늘날에도 되살아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중해 연안의 아랍어권을 중심으로 한 대도서관으로서 발전할 것임에는 틀림없으리라.

마찬가지로,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던 산실로서, 정조대왕 때 찬란하게 꽃피었던 규장각의 영광을 오늘에 되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도서관 기능과 국학 연구 기능, 박물관 기능과 사회교육 기능을 겸한,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학기관으로서 규장각의 발전을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