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기모노를 입은 여인

최 순 희(작가)*

 

나는 팔십 년대의 십 년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립 도서관에서 일했다. 대학원 졸업 논문도 대학 도서관에 관한 것이어서, 나는 당연히 졸업하면 대학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구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학 중 파트타임으로 일한 시립 도서관의 흑인 관장은 나를 적극 그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녀의 권유에 의하면 대학 도서관에는 ‘도서’만 있지만 공공 도서관에는 ‘도서’와 ‘사람’이 함께 있는데, 나야말로 그 둘을 동시에 다루기에 적합한 기질이란 것이다. 칭찬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의 진로는 결정되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내가 번역을 하고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녀의 말대로 공공 도서관에서 온갖 다양한 종류의 도서와 다양한 부류와 계층의 사람들과 접한 경험 덕도 큰 것 같다.

십 년 동안 나는 좀더 풍부한 자료와 지적 자극이 많은 곳을 찾아 발돋움을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는 웬만한 대학 도서관 못지 않게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여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보 검색 업무를 해내야 하는 곳으로 가 있었다. 그러나 제가끔 다채로운 경험이 되어준 그 모든 곳을 통틀어 감미롭게 음습한 한 낡은 분관에서 일하던 시절이 내겐 가장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몇 십 년 전에 지어졌다는 그 도서관은 시내 중심가에 인접한 아름다운 공원에 있었다. 갓 지어질 당시에는 백인 동네였을 터이나 그때는 이미 가까이에 한인타운과 멕시코 타운이 들어 서 있어, 다양한 인종의 샐러드볼 같은 ‘천사의 도시’의 특성이 더욱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그 무렵은 첫아이가 서너 살이 되었을 때라 나는 자연히 어린이 책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아동 업무를 맡아볼 기회가 오자, 그쪽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채 열정과 관심만으로 덤벼들고 말았다. 아동문학이라면 <빨강머리 앤>이나 <작은아씨들> 정도밖에 알지 못하던 내게 동화를 향한 늦사랑은 그렇게 왔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인근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을 도서관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해 줄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만돌린과 우크렐레를 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연동화가도 왔었고, 핼리 혜성의 재출현을 기다리던 무렵에는 혜성 박사도 어렵사리 모셔왔다. 도서관 옆 공원에서 연 태권도 시범과 연날리기 대회, 또 재즈 음악회 등도 모두 잊혀지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내게 각별한 의미로 남은 것이 종이 접기 시간이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가까워지면서 주변 환경의 다양성을 살려 ‘지구촌의 밤’을 기획한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종이 접기를 통해 일본을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이미 아프리카의 밤과 인도의 밤을 통해 이들 지역의 동화집과 역사책이 서가에 남아나지 않는 터였다. 수소문 끝에 종이 접기와 동화 구연을 통해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자원봉사자 노부부를 소개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풍성한 자료를 들고 일본 옷을 입고 나타난 그들은 내게도 기모노를 한 벌 가져와 입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정서로 기모노를 입다니, 참으로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3세라곤 해도 우리의 근세사를 전혀 모를 리는 없겠으나, 할아버지 나라의 문화에 심취한 미국인일 뿐인 그들이 내 미묘한 감정을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고심 끝에 갈등을 털어놓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단지 분위기를 돋구는 소도구로써 권하는 것이니 영 거북하면 물론 안 입어도 좋다고. 하지만 ‘지구촌의 밤’을 구상한 그 열린 마음으로 오히려 일부러 더 입을 수는 없겠느냐고.

인도의 밤 때는 자청해서 사리를 구해 입기도 한 나였다. 과연 기모노는 안 되겠다고 고집하는 것만이 옳을까?

결국 부인이 나를 모델로 설명해 가며 기모노를 입히는 과정을 프로그램의 첫 순서로 넣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날 밤의 기억은 붉은 꽃무늬 기모노 속에 어색한 듯 웃고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어쩌다 앨범 속에서 단발머리에 기모노를 입은 젊은 일본 여인 같은 내 모습을 만날 때면 “‘지구촌의 밤’을 구상하던 그 마음으로……” 하던 노부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일 월드컵 대회 열기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이웃 일본. 나 역시 그 날의 기모노 하나로 모든 것을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역시 입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 경남 고성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 대학교(USC)에서 도서정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로스엔젤레스 시립 도서관에서 십 년간 사서로 근무하다 귀국, 1991년부터 수필 쓰기와 번역을 병행해 왔다. 번역서로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로마의 일인자』외 다수가 있다. 2001년 제33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불온한 날씨』로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