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닫기

이 콘텐츠는 flash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콘텐츠를 보려면 flash player(무료)가 필요합니다.

녹두장군의 깃발아래 모였던 사람들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저한테 주어진 주제가 <녹두장군의 깃발 아래 모였던 사람들>해서 상당히 전투적인 주제를 저한테 주어져 가지고 이게 전투적인 강의 내용을 해야 되나, 고민을 했는데 오히려 더 평화의 강의를 하게끔. 오히려 문화사적인.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마 이 책에서 보지 못했던 그 어느 책에서도 듣지 못했던 그런 내용을 많이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한마디로 카피를 하면 뭐라고 할까? 고민하면서 썼다, 지웠다 하면서 최종적으로 제가 하나의 문구, 명제를 만든 것이 동학농민혁명은 ‘사람다움과 하늘마음의 씨앗을 역사에 심다’라는 문구를 하나 잡아봤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이라든가 역사적인 가치라든가 이 시대의 의미,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접근을 했을 때 이 한마디 문구에 다 축약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왜 모여들었는가. 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는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무엇을 지향했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제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움이고 그리고 사람다운 사회, 사람다운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가야 할 길이고 더 나아가서 21세기 4차 혁명시대에, AI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부분은 뭔가. 저는 영성(靈性)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4차 혁명시대에 인류사회가 지향해야 될 부분은 영적인 그 진화를 해야 되는 단계로 발돋움을 하고 그런 면에서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어떤 마음을 우리 역사 속에 심은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고 아직도 살아있는 미래 가치가 아닌가, 그렇게 단정해서 이야기를 하거든요.

올해 제가 동학농민혁명 외에 개인적으로 노년, 인문학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향하는 나이 듦은, 아주 멋진 나이 듦은 ‘spiritual aging’해서 영적인 노화를 저는 개인적으로 주장을 하거든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은 뭐 생산적인 노화다, 창조적인 나이 듦이다. 이런 여러 말씀을 들어보셨을 텐데 저 같은 경우 그 중에서도 아직은 많은 학자들이 주장은 안 하고 있지만 100세 시대에 바람직한 노년의 삶, 바람직한 노화의 방향은 영적인 노화가 아닌가. 이것이 4차 혁명시대, AI시대에 부합되는 그런 어떤 노화의 방향이고 가치의 방향이 아닌가. 그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인내천, 그런 동학사상을 주목할 이유가 충분히 시대사적으로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먼저 이 그림은 제가 사실 몇 년 전에 그린 건데, 그래서 이번에도 이것을 삽입해서 말씀을 드릴까 말까 하다가 역시 아직까지는 유효한 그림이라고 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주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장기, 동태적이고 그 맥락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서툴러요. 그런데 진정한 역사 이해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죠. 역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장기, 동태적인 흐름 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갑오년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해석할 수가 있는 것 같거든요. 현재 여러분들이 어디에 서 있습니까? 2019년 이 지점에 서 있죠?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의식적인 그 부조는 결국은 서구 문화, 서구 사상의 틀 속에서 삶을 영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금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의 저변에는 유교문화가 자리 잡고 있고 더 심층으로 들어가면 종교를 떠나서 불교 문화적인 요소가 자리를 잡고 있고 더 깊게 우리의 어떤 무의식 세계, 삶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기층문화(基層文化). 그야말로 고조선시대부터 면면이 이어져온 이 기층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서구문화 중심의 의식적인 삶 속에 살다 보니까 이런 어떤 역사적인 맥락을 읽어내는데 있어서도 이런 어떤 큰 대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2019년이지만 우리는 이 유교적인 지형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여러모로 댈 수가 있죠. 예를 들어서 우리 사회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공인한테 도덕적인 가치를 요구하죠. 왜 그럴까? 이것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지됐던 선비 정신의 그 맥락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사실 국가주의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국가주의적인 경향도 조선시대에 유교의 어떤 충효(忠孝) 논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죠. 이것은 중세시대에 유교 국가였던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베트남에서도 그걸 찾을 수가 있고, 중국에서도 찾을 수가 있고, 북한에서도 찾을 수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흐름들이, 유교적 흐름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쳤다고 그래서, 한강의 기적을 거쳤다고 그래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단절되면서도 면면이 이어져온 측면이 있다라는 이야기죠. 또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교육열이 높습니다. 중국도 그렇고 베트남도 마찬가지죠.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교육열이 높을까? 유교 사이에서 최고의 키워드는 뭡니까? 딱 한 자를 꼽으라면, 한자로. 충? 효? 인? 그럼 제가 하나 질문을 드릴게요.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님의 말씀을 모아서 낸 책이 뭡니까? <논어>죠? <논어>의 첫 글자가 뭡니까? 왜 그랬을까요? 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맨 앞에 놨을까요? 아무리 인도 좋고, 충도 좋고, 효도 좋지만 배움 없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의미가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스스로 배우고 때로 막히면 선배님을, 스승님을 찾아가서 습(習)해야 된다, 배워야 한다. 배움을 청해야 된다. 바로 이거죠. 바로 그 ‘학이시습지’ 이 덕목이 공자 이래 동아시아에서 특히 유교적인 가치가 강조됐던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런 배움의 철학, 배움의 가치가 하나의 생활화되면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미친다라고 볼 수가 있겠죠.

물론 최근 들어와서 많이 해체되고 있는 관혼상제(冠婚喪祭) 같은 경우에도, 최근 2~3년 사이에 언론이 주도적으로 해 가지고 명절 해체라든가 이런 현상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관혼상제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한 현재적인, 불교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특히 뭐 거북이 상징하는 거라든가, 탑이 상징하는 거라든가 바로 그렇죠. 기층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층문화 중에서도 가장 면면하게 지금도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뭡니까? 서울에서는 경험할 수 없지만 아직도 시골 구석구석 가면 마을마다 행해지고 있는 이 고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는 문화적 의례행위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절집에서도 쫓아내지 못하는 그곳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산신신앙이죠. 우리 신앙의 모태는 산신신앙입니다. 전국 국토의 73%가 산이고 고조선 이래 산에 기대서 삶을 영유해 왔고 산에 기대서 문화를 일궈왔기 때문에 철저히 산신 신앙, 산간 문화가 우리의 기층문화에 골자를 이루죠.

몇 년 전에 학생들 안내해 가지고 삼악산, 춘천 삼악산에 갔는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겁니다. 뭔가 해서 가봤더니 돌무더기에 돌 하나씩 올려놓는 겁니다. 물론 그 학생들 종교는 다 다양하죠. 종교는 없는 사람 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제가 느꼈습니다. 바로 저것이다. 바로 저것이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그 마음이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산에 가셨을 때, 어디 갔을 때 돌무더기가 있으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싫지는 않죠? 그리고 또 적극적인 분은 돌이라도 하나 올려놓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이 돌탑을 쌓는 마음. 이것이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마음이고 그 기원은 고조선까지, 단군신화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3000년 전에 뿌려놓은 그 산신의 마음씨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거든요, 우리 마음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 틀 안에 갇힘으로써 실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삶의 숨결을 인식을 못하는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죠. 그런 면에서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깊고 넓습니다. 흔히들 동학은 ‘유불선(儒彿仙) 합일(合一)’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유불선 합일’이라는 이야기는 결국 이런 모든 총체적인 의식과 지향성과 가치가 내제된 것이 동학이라는 의미죠. 특히 동학은 기본적으로 유학 속에서 나온 겁니다. 성리학 속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는 성리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리학 속에서 동학이 나온 걸 상당히 소극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제가 10여 년 전부터 동학이 유불선 합일이고 동학은 분명히 그 어떤 뿌리가 있을 텐데 그 진정한 뿌리가 뭔가? 유불선 중에서도 어느 부분이 동학에 더 영향을 많이 미쳤는가? 수훈체제 위에 더 많이 영향을 미쳤는가라고 알기 위해서 제 전공을 넘어서 가지고 성리학 공부를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해 오고 있거든요? 성리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제 무릎을 칩니다. ‘아니, 성리학에 이런 가치가 있어?’ 아니 성리학 속에 이렇게 시대를 초월한, 아직도 이 시대에 살아있는 성리학적 가치와 그 지향성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리학, 낡고 썩은 사상으로 치부하죠. 성리학자들이 오히려 조선왕조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생각을 하죠.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 놓은 식민지 사관에 우리가 빠져서 그걸 극복한다고, 극복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 식민지 사관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 결과 조선왕조가 멸망한 것은 일본의 침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고리타분한 성리학자들이 시대적 변화를 수용을 못해서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 해 가지고 그 책임을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넘김으로써 결국 20세기를 이전 과거와 전통과 단절시키는. 그래서 한국인의 어떤 조선인들의 의식을 불구로 만드는 그런 어떤 덫에 아직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학의 어떤 여러 의례라든가 이런 걸 보면 당시 기층 민중 사이에 여러 의례라든가 신앙형태가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총체적으로 이해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나라 성리학은 심학(心學)이 발전했죠? 마음의 학문으로써 성리학이 특히 우리나라는 발전했습니다. 성리학이 여러 파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심학이 발전했습니다. 왜 조선 선비들이 왜 마음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밤잠을 설쳤을까? 그 영향은 뭘까? 고려왕조 500년 불교의 나라였던 그 불교의 영향이 조선 성리학자로 하여금, 선비들로 하여금 인간의 그 마음 문제를 천착(穿鑿)하게끔 만든 배경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 없는 성리학은 불가능하죠. 성리학이라는 것은 공자님이 말씀하신 원시 유학과 불교와 도교가 합해져서 성리학이 만들어진 겁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가져왔고, 도교에서는 자연을 가져와서 기존의 유학을 접목시켜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주자성리학의 기본적인 가닥이거든요. 불교를 알면 성리학이 쉬워지고 도교를 알면 더더욱 성리학이 쉬워지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심학으로 발전한 요인도 이 불교와 성리학이 만나면서, 유학이 만나면서 그런 결과를 빚어냈고 이것이 19세기에 들어와서 수훈에 의해서 평등을 발견한 것이죠.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라는 그 논리를 발견하면서 조금 더 평등한 진보적인 그런 어떤 성리학 체계로 만들어낸 것이 동학이 아니냐, 그렇게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거대한 변화 속에서 나온 동학농민혁명이기 때문에, 이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년으로 끝난 게 아니라 그 이후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쳐 왔죠. 지난 127년 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함께 해 왔습니다. 그 결과가 올해 이제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거라고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조금 더 거시적이고 장기, 동태적으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접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조금 더 큰 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올해 5월 11일에 광화문에서 거행이 됐죠? 광화문에서 됐던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때 기념 영상으로 튼 겁니다. 이것은 현 정부, 문체부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현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좀 반영이 됐겠죠?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 가면 이게 나옵니다. 현재 나비가 붙어 있는데 현재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죠? 주로 중, 고등학생들이 붙여놓은 겁니다. 이따 끝날 때쯤 더 자세히 한번 열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래서 녹두장군이, 농학농민군이 꿈 꾼 세상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그것이 이루어졌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런 어떤 실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그런 어떤 접근이 있을 때 보다 의미 있는 동학농민혁명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역사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과거만 있지 미래는 없다라는 이야기죠. 지나치게 역사 이해가, 역사 교육이 과거 중심이다 보니까 미래와 단절이 됨으로써 여러분들이 읽으셨을 겁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가 진정한 대화가 참된 역사이다라고 하지만 미래가 없는데 어떻게 과거 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까? 따라서 그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미래에 대한 질문, 미래에 대한 어떤 의문을 과거의 역사 사실과 연결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 역시 단지 갑오년은, 1년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진행형의, 그리고 미래 가치를 담아내야 할 그런 부분이라는 것을 공감을 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은 여러분들이 쓰신 독후감을 보니까 뭐 상당히 열심히들 쓰셔 가지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실 텐데, 결국은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1860년에 수훈체제에 의해서 동학이 만들어지죠. 그리고 2년 뒤에 전라, 경상, 충청도에서 72개의 고을에서 군현 단위로 민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1876년에 개항이 일어나고 이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 속에서 1880년에 들어와서 서서히 동학의 불씨가 발화가 됩니다. 어디에서? 강원도 산골. 영월, 정선 이쪽 지역에서. 점점 동학이 남쪽으로 확산이 됩니다. 그러자 이제 해월(海月) 최시형이 동학을 더 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동학 교단의 중심지를 강원도 산골에서 충청도로 옮겨야 된다고 해서 1881년에 단양으로, 영월에서 단양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1885년에 충북 보은으로 동학 교단 중심지를 옮기고 그러자 이제 1880년대 후반에 가면 동학이 충청도 일대에 다 확산이 됩니다. 그리고 1890년대 들어와서는 전라도까지 동학이 확산이 돼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전봉준이라든가 김개남, 손화중이 동학에 들어오죠. 그러면서 1890년대 초반이 되면 거의 전국이 동학에 물드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죠. 그런 상황 속에서 1893년에 보은집회가 열리고 이것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죠. 그리고 1년 뒤에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고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지 두 달 뒤에 고창 무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을 합니다. 그래서 3월부터 8월까지 1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9월부터 2차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는 일련의 과정이 전개가 되죠.

이 과정에서 이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죠. 그래서 갑오년 1월 10일에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이것이 실패하면서 3월 20일에 무장기포가 일어납니다. 4월 27일에 결국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에 결국 5월 8일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습니다. 그리고 전라감사 김학진과 정부를 대표하는 그런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전봉준 사이에 전라감영에서 전주회담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전주회담에서 53개 군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다음에 집강소 통치가 이루어져가죠. 그 다음에 9월 10일에 전봉준이 결국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삼례에서 기포(起泡)를 하게 되고 충청북도 청산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도 기포를 하게 되면서 10월 13일에 남북 연합을 하게 되고 우금치, 공주 우금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이 우금치전투를 하기 전에 전봉준이 자기 부하를 세어보니까 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금치전투 끝나고 남아있는 부하를 세어보니까 500명이래요. 나머지 9,500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금치 마루에 다 죽어갔겠죠. 뭐 몇 명이야 그냥 중간에 도망갔는지 모르지만 거의 죽어갔을 겁니다.

그 다음 11월 13일에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3,000명이 청주로 진입을 해서 청주성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전라도에 있었던 동학농민군은 두 길을 택하죠. 한 길은 전봉준 부대가 이끌고 논산을 거쳐 가지고 공주로 해서 서울로 공격해 들어가는 거고, 또 한 길은 김개남이 남원에서 출발해 가지고 전주를 거쳐 금산을 거쳐서 대전을 거쳐서 청주를 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전략이었습니다.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인정을 안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봉준하고 김개남이 논산에서 만나서 모종의 전략회의를 한 것으로 저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두 길로 나누어서 서울 공격을 감행한 것은 공주에서 충청감영(監營)이 있었고, 청주에는 충청도 군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충청병영(兵營)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주감영과 그 다음에 청주병영을 동시에 치지 않고서는 동학농민군의 후방을, 안전을 기약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두 대장이 두 길로 나누어서 서울 공격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물론 두 전투, 동학농민군이 깨지면서 11월 1일에 김개남이 체포되고 2일에 전봉준이 체포되면서 이제 결국 동학농민군은 서서히 막을 내려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죠. 이 과정에서 이제 핵심적인 인물이 이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 뭐 여러분들이 잘 아실 거고. 서장옥 같은 경우는 아주 신비적인 인물인데 갑오년 이전에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그런데 자료가 별로 없어 가지고 서장옥은 상당히 베일에 쌓여 있는 그런 인물로 평가가 되죠.

그 다음에 최제우, 최시형은 동학 1대, 2대 교주 역할을 했고요. 이번에는 역사 기록화를 가지고 동학농민혁명이 어떻게 전개가 됐는가를 이미지로 전달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이런 그림을 통해서 이해하시는 것도 또 재미있는 측면이 있어 가지고. 특히 이제 이것은 고창군의 의뢰를 받아서 제가 직접 작업을 해서 더 애정이 가서 강의할 때 종종 사용을 합니다.

‘미륵 배꼽에서 비결(?訣)을 꺼내다.’ 이것은 선운사 뒤에 있는 마애불, 미륵불이죠? 아주 신비적인 마애불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1892년에 이 미륵불 배꼽에서 비결을 꺼냈는데 비결을 꺼내면 조선왕조가 멸망한다는 그런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비결을 꺼내면서 결국 이런 소문이 일반 사이에 쫙 퍼져 나가죠. 그러면 일반 농민들은 어떤 자극을 받습니까? ‘이야, 그거 꺼냈대. 이제는 뭐야? 조선왕조 멸망하는 거 아니야? 이제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는 거 아니야? 그럼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해서 정씨왕조가 만들어지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뭔가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되고 꿈을 꾸게 되죠.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죠.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는 아직도 미스터리이지만 이와 같은 소문이 전라도 일대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전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충분히 우리가 미루어서 짐작을 할 수가 있죠. 1월 10일에 고부에서 민란을 일으켰던 전봉준이 무참하게 깨지죠. 그리고 전봉준은 생각합니다. 군현 당위에서, 당시는 군과 현으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이 경계 안에서 아무리 우리가 뭘 해 봤자 낡고 썩은 이 폐정을 개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가 힘을 합해야 된다. 여러 군현이 힘을 합해서 정부를 상대로 해서 싸워야 된다. 그러면 정부를 향해서 싸워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러면 조직이 필요하다. 어떤 조직? 보니까 동학 조직입니다. 그래서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던 손화중을 전봉준이 찾아가서 밤새 설득을 합니다. 우리 같이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 당신도 보다시피 민초들이 너무 신음하지 않느냐. 뭔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되지 않느냐. 해서 결국 손화중도 동요를 합니다.

그래서 고창에서 3월 20일에 결국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이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의 1차적인 목표는 전주성을 점령하는 거였죠. 그래서 이제 결국 동학농민군이 대열을 갖춰서 전주성을 향해서 갑니다. 3월 20일에 봉기를 해서 전주성을 향해 가서 결국 가다가 이제 무장 객사 앞에서 펼치는 저항의 축제가 열리는데 이것은 아마 분명히 6일에 가실 겁니다. 4월 27일에 전주성을 무혈입성을 합니다. 지금도 전주성에 남아 있는 풍남문이죠. 호남 제1성, 전주성의 남문. 주 출입문, 정문인 그 풍남문을 거쳐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안으로 들어가죠. 그래서 이제 아까 말씀드렸듯이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서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이 합의를 하고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해서 집강소 시대가 열리는데 여러분들이 학교 때, 학교 다니실 때 배웠던 것하고 지금의 집강소 이해는 조금 많이 다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학교 다니셨을 때는 집강소가 마치 혁명기구인 것처럼 공부들을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제 연구에 의해서 그게 아니고 집강소는 그 관민 합작기구이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거버넌스(governance) 체제이죠. 그리고 집강소의 주요 기능은 혁명 사업을 하는 기구가 아니고 기본적으로 치안 질서를 바로 잡는 게 주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부랑자를 단속한다든가 무기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한다든가 아니면 관에서 빼앗긴 무기를 반납한다든가 뭐 이런 역할을 주로 하면서 폐정을 개혁을 해 나가는. 그래서 어디까지나 관과 민이 서로 협조를 해서 전라도 사회를 안정시키고 또 개혁을 하는 그런 어떤 기구로, 이제는 거의 이것이 정설화됐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제가 일본군이 어떻게 경복궁을 점령했는가는 아마 제가 가장 먼저 그걸 리얼하게 이해를 했을 텐데 이때 어디 있었느냐 하면 제가 국사편찬위원회를 다닐 때였습니다. 군사편찬위원회를 다니면서 했던 작업이 주한일본 공사관 기록을 번역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갑오년에 일본 공사관에서 남긴 기록. 유리 원판에 막 써 가지고 아주 일본 고어를 잘 아시는 할아버지들 모셔다가 그 작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이 일본공사관 기록을 계속 번역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일본공사가 대원군을 어떻게 설득했는가. 한 3페이지에 걸쳐서 이게 나오는 거야. 눈물겹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일본공사는 대원군을 앞세워 가지고 경복궁을 점령하고자 시도합니다. 왜?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사람은 바로 대원군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들 사이에서도 인기투표를 하면 제1위가 대원군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을 하더라도 조선 민초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하나의 전략 수단으로서 대원군을 끌고 들어간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설득하느냐면 너 며느리 미워하지 않느냐. 만약 우리와 협조를 하면 진정으로, 진심으로 조선 정부를 개혁할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을 너한테 줄 것이다. 민비를 비롯한 민 씨 척족들 너무 못되지 않았느냐? 그래서 우리와 같이 힘을 합하자. 여기에 대원군이 넘어갑니다. 물론 일본 입장은 대원군을 일시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설득을 해서 앞세운 것이죠.

그래서 결국 이제 대원군도 그런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가지고 결국 보다시피 이렇게 새벽에, 6월 22일 새벽에 경복궁 광화문을 침입해서 경복궁을 점령하게 되죠. 이렇게 점령한 일본은 조선 군대를 무장 해제시킵니다, 경복궁을 지키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수도사령부 군대를 다 해산시키는 것이죠. 그래 놓고 이제 심지어 조선 대신들도 경복궁을 출입하려면 일본공사의 허락을 받을 정도로. 이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된 겁니다. 그럼 그 갑오개혁이 정상적으로 추진됐겠어요? 결국 일본의 입맛에 맞는 그런 내용대로 갈 수밖에 없었겠죠.

이렇게 일본하고 청일전쟁에서도 어느 정도 승리를 해 나가자 이제는 더 이상 대원군이 필요 없죠. 그래서 8월 중순 이후에 서서히 대원군을 권력에서 밀어냅니다. 밀어내면서 이제 대원군 측근들이 동학농민군과 어떻게 연합해서 뭔가 해보려는 움직임이 8월 하순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이 보낸 밀사가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전봉준을 만나서 설득을 하죠. 그래서 이제 9월 10일에 삼례, 전주 삼례에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전봉준이고, 이 사람이 손화중이고 김개남이고. 전라도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하면 전봉준, 그 다음에 김개남, 손화중 이 3명을 꼽죠. 이들이 삼례에서 대책 회의를 엽니다. 그래서 서울 공격을 하기로 결정을 해서 준비에 들어가죠.

이런 상황 속에서 자체적으로 전력의 한계를 느끼고 충청도에 있었던 최시형한테 우리 연합해 가지고 서울 침공을 하자고 제안을 하고 이 제안에 대해서 9월 18일에 결국은 해월 최시형이 승낙을 합니다. 그리고 전국 동학교도들한테 기병하라고, 무기를 들고 봉기하라고 통문을 보내면서 9월 말부터 10월 초에 전국에 있는 동학도들이 봉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구단 소속 동학농민군이 보은에서 청산을 거쳐 가지고 대전을 거쳐서 논산에 가가지고 10월 14일에 전봉준 부대와 합류를 하게 되죠. 그리고 11월 9일에 이렇게 우금치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동학농민군이 패할 수밖에 없죠. 당연한 겁니다. 결국은 12월 2일에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가 돼 가지고 나주 감옥에 갇혔다가 서울 전옥서(典獄署)로 이송이 되죠. 그러면서 이제 동학농민혁명은 서서히 막을 내려갑니다. 전봉준 재판 문서 보면 전봉준이 결국 이런 시를 남기죠. <운명>이라는 시를.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하나 운거영웅부자모(運去英雄不自謀)라.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이니 애국단심수유지(愛國丹心誰有知)라. 그래서 결국 안타까운 전봉준의 어떤 마음이 한 편, <운명>이라는 시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一片丹心) 그 누가 알리. 아마 전봉준은 외롭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니까.

동학농민혁명 특정한 사실이라든가 인물에 대한 이해보다는 큰 관점에서 한번 정리를 해 들어가시는 게 더 많은 공부가 되시고 더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너무 지엽적인 데에 매몰되다 보니까 오히려 큰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거든요. 반면에 또 역사학자들은 자기 전공 외에는 대부분 큰 흐름 정도만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그 흐름 속에 개별 역사적인 사건이라든가 인물들을 또 꿰어 맞추면 거의 자기가 자기 관점대로 재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당히 전문가다운 이야기를 또 할 수 있죠.

따라서 역사에 대한 이해는 결국 그런 어떤 장기, 동태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게 상당히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정의하라고 하면 역사는 파동이 있는 흐름이다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딱 정리를 하거든요. 그래서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흐름을 이해하는 것. 조금 더 한 발자국 들어가면 파동이 있는 흐름. 기승전결(起承轉結),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리듬감 있는, 출렁이는 역동적인 그런 흐름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역사 공부하는 데는 상당히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깃발을 내걸다가 위에 잘려 나갔는데 이 아래에 있는 내용은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이라고 처음에 동학농민군이 그 무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때 선언문입니다. 우리가 왜 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그런 어떤 뜻, 지향이 이 선언문에 잘 담겨 있거든요.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아주 명문장입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는가를 알 수 있고. 그래서 보면 ‘지금 의로운 깃발을 내걸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것을 맹세하였다.’ 그래서 의로운 깃발을 내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깃발을 드는 게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는 것을 상징을 하는 거라.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게 과연 뭔가. 그래서 죽창이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걸로 많이 알고 있었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오히려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것은 그 깃발 문화입니다. 아마 시골에서 태어나고 시골에서 성장하신 분들은 왜 농민들을 상징하는 게 깃발인가, 왜 동학농민군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깃발을 앞세워 가지고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는가를 잘 아실 겁니다.

결국은 농민의 마음, 농심(農心)을 상징하는 것은 뭡니까? 농자는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이라는 농기죠? 물론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는 것은 농본주의에 입각한 이념적인 슬로건이지만 이것이 100년, 200년 흐르면서 농민의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그래서 농민의 마음을 표현하는, 농심을 표현하는 그런 문화 상징은 결국은 깃발이죠. 그 대표적인 깃발이 결국은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고 쓴 깃발이라고 볼 수가 있고 그래서 둘의 싸움 할 때, 농기 싸움 할 때 결국은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고 하는 깃발을 서로 뺏는 마을이 이기는 기 싸움도 많이들 하잖아요. 특히 전라도 부안 일대에서는 기 싸움이 상당히 격렬하게, 마을 간의 싸움이죠, 격렬하게 진행됐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가장 문화적 코드는 결국은 깃발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오늘날 우리 시위문화에서 어김없이 깃발이 등장하잖아요. 시위 현장은 늘 깃발이 펄럭입니다. 왜 그랬을까? 그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농기(?旗)가 그 기원을 이룬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그냥 뭐 우리나라 시위 문화의 한 표현이다, 상징이라고만 이해를 했는데 동학농민군의 어떤 문화 상징을 연구하다 보니까 아하, 이거구나! 왜 우리나라 시위 문화에 깃발이 등장을 하는가?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 뿌리는, 직접적인 뿌리는 동학농민군에 있고 더 깊은 뿌리를 들어가면 바로 마을에 농기가 그 기원을 이루고 있다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을 대표하는, 대장이 들었던 그 깃발은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라고 쓴 이 깃발이 대장기이고 그 다음에 보제중생(普濟衆生)이라든가 안민창덕(安民昌德) 또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이런 깃발은 동학농민군의 어떤 이념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 있죠. 그래서 보제중생 같은 경우 널리 중생들을 구제하겠다. 안민창덕,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덕을 펼치겠다. 광제창생, 널리 창생들, 백성들, 민초들을 구제하겠다. 이게 이제 동학농민군의 슬로건, 이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인(仁)자, 이런 깃발도 있습니다. 만약 ‘인’자라고 쓰인 깃발을 막 흔들었어, 전투 장면에서. 그러면 이게 어떤 신호입니까? 오방색, ‘인’자는 동서남북 중에 어느 방위를 상징합니까? 동쪽이죠? 따라서 ‘인’자 깃발 들면 뭐라고 하는 의미예요? 동쪽으로 이동하라는 의미죠? 동쪽으로 이동하라고. 뭐 그런 깃발도 있었고 그 다음에 ‘00포’, ‘00접’이라는 깃발도 있었습니다.

당시 동학농민군 조직은 포접(包接) 단위였습니다. 그러니까 10명 안팎의 접이 있고 그 접이 또 50개에 모여서 하나의 포가 이루어집니다. 이 포접은 연원제(淵源制)이기 때문에 사람 중심으로 이게 네트워크 돼 있는 그런 체제에 있기 때문에 엄청난 동원 능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 전통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동원이 됐던 것이 이런 동학의 포접 조직이 동원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래서 00포라는 것은 00포에 속한 그룹이죠. 그래서 00포 깃발 들면 흩어졌다가도 자기 소속을 찾아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00포라고 쓴 깃발을 보고 소속을 찾아가는 그런 역할을 했던 깃발입니다.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 중에 하나는 깃발이었습니다. 그냥 동학농민군이 가면 수백 개, 수천 개의 흰 깃발이 막 나부끼고 하니까 그 성대함에 가슴이 서늘했다. 뭐 이런 일본 측의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화승총 소리는 딱!딱! 소리가 나서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바람이 불 때 깃발이 촤악 나부끼면 오히려 일본군이 움츠리는 그런 어떤 전략적인 무기 역할도 했다고 하죠.

그 다음에 동학농민군이 어떤 사람들이 됐는가. 당시 유생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대충 압니다. 도(道)에 들어가면 양반과 동등하게 되었다. 동학도에 들어가면. 그렇기 때문에 상놈이 일제히 동학에 들어갔다. 또는 양반 중에 지각이 없는 자가 한꺼번에 동학에 들어갔다. 양반들도 이제 앞다투어서 동학농민군에 들어갔다는 얘기죠. 또 빈민 중에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일제히 동학에 들어갔다. 동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힘은 두 가지 힘입니다. 하나는 신분 평등, 그 다음에 두 번째 힘은 유무상자(有無相資)라고 콩 한 쪽도 나눠 먹자는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동학에 들어가면 부자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하는 유무상자 정신이 있어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동학에 들어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죠.

당시 동학농민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동학농민군의 복장은 어떤 모습이었고 한번 잠시 10초 동안 생각해 보십시오. 대충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복? 당연히 한복이겠죠? 각반? 당연하게 각반 했을 것이고. 결국은 이런 모습이었죠. 남루한 옷, 색깔은 당연히 흰색이었겠죠. 각반도 했고 신발은 당연히 짚신을 신고 있었고. 무기는 당연히 죽창이 아니고 화승총입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것은 죽창이 아니었느냐, 생각하시는데 아니었다는 게 결론이 나죠. 이것은 5월경에 전라도에서 당시에는 카메라가 없었으니까 모사한 겁니다. 그린 겁니다. 거의 정확한 동학농민군의 모습이었다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모습을 통해서 당시, 다만 이제 전봉준 같은 대장은 이렇게 말을 타고 움직였고. 이것은 전봉준이 사용하던, 동학농민군 본부에서 사용하던 인장이었습니다. 저는 이걸 해석을 못했는데 처음으로 제가 이 책에서 정확하게 그 의미를 밝혀냈죠.

어떤 뜻입니까? 제중(濟衆). 이거 읽으실 수 있죠? 의소. 결국 ‘제’ 구제한다. ‘중’ 민중을, 대중을. 민중을 구제하는 의로운 곳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이 뭘 지향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죠. 그래서 이와 같은 동학 주문이 갑오년에 마을마다, 낮이면 날마다 밤마다 울려 펴졌고 지금도 천도교의 핵심 주문입니다. 천도교 가면 21자 주문, 또는 13자 주문으로 이제 쓰이는데 이것은 수훈 때부터 사용했던 주문이죠. 똑같은 논리입니다. 기독교 같은 경우에 할렐루야, 주 예수님이여. 뭐 이런 거하고 그 다음에 불교 같은 경우에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이런 주문이나 이쪽 동학에서 이와 같은 주문을 하는 거나.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제가 대충 하면 천도교에서 이런 식으로 합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그래서 지기금지, 바로 지금 이때. 원위대강, 간절히 그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니다. 시천주, 마음속에 하늘님을 모심으로서 조화정, 모든 것일 뜻대로 이루어져 가지고 영세불망, 영원토록 잊지 못할 모든 일이 다 제대로 풀리게 해 달라고 하는 어떤 기도문의 일종이죠.

그럼 당시 동학농민군은 이 기도문을 어떻게 했을까? 몰라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여튼 이와 같은 기도문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는 점.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힘을 얻게 되죠, 희망을 갖게 되죠. 그러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에 나설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가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아니 그 무지렁이 농민들이, 아니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나설 수 있었느냐. 바로 그런, 이런 것들이, 이런 요소들이, 펄럭이는 깃발들이. 이런 주문 소리가, 기도 소리가 그들을 싸움터에 동원을 시킨 것이죠.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동학농민군들이 무기를 드는데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동학농민군의 주 무기는 죽창이었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80년대에 자꾸 죽창가가 불리면서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것이 죽창으로 생각하는데 죽창 가지고 어떻게 싸움을, 죽고 사는 싸움판에 나오겠습니까? 화승총이 주 무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월 20일에 있었던 목천 세성산전투 때 동학농민군한테 노익한 물품을 보면 목천 세성산전투, 세성산은 어디에 있느냐면 독립기념관 앞산입니다. 이 독립기념관 앞 산 옆에 세조 때 한명회 묘소가 있고 그 한명회 묘소 바로 옆에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생가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개울을 하나 건너면 유관순 생가가 있고, 유관순 생가에서 조금 더 가면 김양식 생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살고 있습니다. 시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기념관 앞에 있는 목천 세성산전투 때 노익한 물품을 보면 바로 조총 140자루, 창 288자루 등등 해 가지고 죽창은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 어떤 철제 무기를 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다른 ‘세장연록(歲藏年錄)’이라는 기록을 보면 큰 깃발을 세우고, 또는 총과 창을 지니고, 또는 횃불을 들고 이런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사용했던 무기가 무엇이었는가. 그 다음에 이 시기에 동학농민군이 불렀던 노래는 무엇인가. 우리 시위 현장 보면 늘 노래를 하잖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노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런 운동의 현장에서는. 그래서 기록에 보면 당시 1863년에 수운이 지었다는 검가, 칼 노래, 칼춤이 춰졌다는 기록이 단편적으로 보였는데 그래서 이것이 가장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노래, 춤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운 최제우가 이제 경주에 단속이 심하니까 남원으로 가서 남원 뒤에 있는 계룡산에서 은자원에 가서 검과 칼 노래를 지었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이것도 어떻게 불렸는가는 잘 모르는데 대충 ‘시호시호 이내시호’ 저는 내용이 상당히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보면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以乃時呼). 이 때다, 이 때다, 바로 이 때다.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다시는 못 올 이 때이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만 년에 한번 태어난 대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時乎)로다’ 5만 년에 한번 올 바로 이 때이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새로운 세상을 개벽시킬 그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랴’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입고’ 무수장삼은 이제 싸움하러 나갈 때 입는 그 장의죠.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저 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天地) 일신(一身)으로 비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時乎時乎)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얼마나 대장부다운 표현입니까?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萬古名壯) 어디 있냐 장부당...’ 자꾸 노래가 되려고 그러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以乃身命) 좋을시고’ 그래서 가사 내용이 상당히 좋아서 제가 자주 거론을 합니다.

그래서 이게 1928년인가? 경기도에서 채록(採錄)된 적은 있는데 전라도 쪽에서는 오히려 이게 채록된 게 없어서 다만 전라도 같은 경우에는 육자배기(六字─調)조로 불렀다고 하는데 그 육자배기조로 이것을 어떻게 불렀는가, 그걸 복원을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거든요. 그 다음에 이제 풍물을 치다. 그래서 또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건 바로 풍물이었습니다. 당연하겠죠? 왜냐하면 농민 문화가 시위 문화로 발전해 들어가는 거니까 당시 마을 문화, 농민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풍물이었잖아요.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모였다 하면, 동학농민군이 행군한다하면 바로 풍물을 치고 움직여 나갔던 것이 여러 기록에서 드러납니다.

그 다음에 특히 이 시기에 광대들이, 천민 집단의 광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합니다. 그래서 손화중이라든가 김개남 밑에는 한 천 명, 2천 명의 천민 부대가 만들어져서 이들이 상당히 과격한 그런 어떤 행동을 보이고 하죠. 왜냐하면 이와 같은 천민들 같은 경우에는 물불 안 가리잖아요. 그리고 그들이 꿈에 그리던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상당히 전투력을 발휘를 많이 하죠. 당시 광대들이 전라도에 4만 명, 경기도에는 5만 명, 전라도에는 4만 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광대 같은 경우에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예술인 집단이죠. 요즘 예술인 집단이 당시 광대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드디어 신분해방이 되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서둘러 제일 먼저 결의를 본 법령이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국회에서 하듯이, 법령의 신분 해방과 관련한 내용들입니다. 대부분 6월 말에 제정이 되죠. 그리고 이렇게 제정한 다음에 정부에서 전국에 바로 공문을 보내서 빨리 신분이 혁파됐다, 해방됐다라는 것을 한글로 번역을 해서 한글 대자보를 붙여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하라, 이런 공문을 각 지방에 내려 보냅니다. 그러면 당시 정부에서 왜 서둘러서 신분이 해방됐다는 것을 한글 대자보로 붙이도록 했겠어요? 결국 잠재우려고, 무마용으로 서둘러서 한 것이죠. 그렇지만 별 대자보 효과가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과격하게, 격렬하게 동학농민군이 활동을 하는 걸 볼 수 있죠.

어쨌거나 법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와중인 6월 말에 신분이 해방이 됩니다. 이들 광대들은 관청에 종속돼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인이 됐습니다. 이제는 자기 능력을 가지고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 된 건 좋은데 이제는 자기 능력을 가지고 먹고 살아야 돼요. 그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연주 솜씨라든가 또는 노래 솜씨를 가지고 살아가야 되죠? 그러면서 이제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국악 장르가 ‘병창(竝唱)’입니다. 가야금 병창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왜냐하면 연주만 하면 사람들 안 모여들잖아요. 연주만 하면 뭔가 좀 이게 그렇죠? 그래서 이제 가야금도 연주하고, 소리도 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거죠. 그 다음에 이와 같은 병창, 그 다음 ‘산조(散調)’. 대금 산조라든가 가야금 산조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유행을 하게 됩니다. 왜 산조가 유행을 하게 되느냐면 당시에는 악보가 없으니까, 악보가 없고 작기의 어떤 직관적인 능력을 가지고 또는 스승한테 배운 그런 악보를 가지고 머릿속으로 이걸 하니까. 이것이 30분도 좋고, 1시간도 좋고 계속 늘어지는 연주법을 택할 수 없게 없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농학농민혁명 이후에 산조가 확산이 돼 가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종종 들었던 그런 병창이나, 국악 병창이나 산조가 언제 기원했느냐, 왜 기원했느냐는 바로 동학농민혁명 때 신분이 해방이 되면서. 물론 이전에 그런 단초(端初)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으로 신분이 해방되면서 이런 자유 연주가들이, 자유 소리꾼들이 먹고사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만들어 낸 새로운 장르다, 이렇게 아시면 정리가 되실 겁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역사의 불꽃, 저항의 축제 행열‘이라고 해서 동학농민군의 행렬은 하나의 어떤 비장한 각오를 하고 침울한 통정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하나의 축제 행렬로써 움직여나갔다는 것을 여러 기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고요.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가 알았을 때 조금 더 문학적인 상상력이 자극이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제 나름대로 9월 이후 전국에서 일어났던 10대 전투를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던 10월 20일에 목천 세성산전투라든가 10월 28일 홍주성전투라든가. 홍주성은 내포, 동학농민군이 엄청나게 격려를 했었죠. 그 다음에 11월 26일 태인전투는 전봉준 부대가 한 마지막 전투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끝으로 전봉준이 부대를 해산하죠. 부대를 해산하고 순창으로 피신을 했다가 체포가 되고. 그 다음에 11월 20일에 나주성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점령하지 못한 성입니다. 나주성. 2주 전에 나주에 갔더니 이렇게 동학농민군을 막아냈다는 토평비(討平碑)가 성 안에 지금도 잘 보존이 돼 있더라고요.

이거는 작년에 제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사하면서 확인하고 지금 이 편지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특별 전시가 되거든요? 이거는 제본하고 그 동생, 이광팔이 형 광화한테 받은 편지입니다. 그래서 광화는 나주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이제는 군 자금이 부족하고 떨어지니까 형편이 넉넉했던 자기 동생한테 우리가 지금 급하다. 빨리 우리 좀 도와 달라.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번역을 한 거거든요. 그래서 내용을 보면 우리가 왜구와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 하네. 그러나 형편이 극히 어려워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네. 그러면서 빨리 필요한 재물을 도와달라고 자기 동생한테 편지를 보내서 지원 요청을 했거든요. 지금 이광화는 나주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2월 하순에 화순 도곡에서 당시 36세 나이로 죽습니다.

또 재미난 편지가 있는데 이것은 나주 감옥에 갇혀 있었던 아들이 어머니한테 보낸 겁니다. 제발 저 좀 감옥에서 꺼내 주십시오. 이런 구구절절한, 모진 고문에 지금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옷은 다 남루가 되어 가지고 엄동설한에 떨고 있으니 빨리 좀 구원해 달라고. 그래서 당시에도 뇌물이 잘 통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돈 300여 냥이 오면 어진 사람을 만나서 살 묘책이 있다. 그러니까 300냥만 뇌물을 바치면 몰래 간수가 빼줄 수 있었던 모양이죠. 그러니 300냥하고 감옥에서 풀려나면 노자가 필요하잖아요. 노자하고 그 다음에 지금 옷이 다 뭐 감옥에서 헐벗어 있으니까 의복, 보신, 토시 같은 것을 빨리 보내달라고. 그래서 이 사람은 그 어머니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만들어 가지고 보내서 꺼내줍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뒤 그 후유증으로 곧 죽습니다. 그래서 이런 편지가 남아 있다는 거, 참 놀랍죠? 저도 얼마 전에 이걸 대하고서 아, 이게 역사이구나. 이게 역사이고 이게 살아있는 역사이구나. 그래서 이 실물이 여러분 답사 가실 때 가셔서 아마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또는 동학농민혁명 와중에 여러 동요가 퍼져 나가죠. 그래서 이런 어떤 시위 문화와 노래, 동요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갑오새 갑오새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간다.’ 뭐 여러분들이 다 아시고 때로는 부르셨을 겁니다. 또는 ‘새야 새야 팔왕새야 무엇하러 나왔냐 댓솔닙 푸릇푸릇 봄철인가 가였더니 백설이 펄펄 휘나리니 저 건너 양생녹죽(養生綠竹)이 나를 속였네.’ 허무하게 동학농민혁명이 끝나면서 나온 동요죠. 그래서 팔왕새를.. ‘전’자를 파자 하면 ‘팔왕’이 돼 보이죠? 한자 전(全)자를 앞에 하고 밑에 왕자를 떼어내면 팔왕이 되잖아, 팔왕. 그래서 팔왕새는 전봉준을, 녹두장군을 상징하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녹두장군이 나와 가지고 활동할 때는 댓닙 솔닙 푸릇푸릇 봄철인가 했더니 웬 걸? 백설이 펄펄, 흰 눈이 펄펄 휘날려 가지고 다 무상하게 끝났다라는 그 안타까움을 나타내죠. 또는 뭐 새야 새야 팔왕새야 전주녹읍 녹두새야. 이런 다양한 동요가 울려 퍼지는데 결국은 최종적으로 대표적인 동요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일 것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이 노래를 모르시는 분이 없으실 겁니다. 이 노래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형한테? 언니한테?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아니면 학교에서? 학교에서? 학교에서 배운 사람 없을 겁니다. 저는 어릴 적에 형, 누나들한테 배웠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해요. 여름날, 그때 여름날이었는데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모깃불 피워놓고 옥수수 까먹으면서 그것도 엄청 귀하잖아요, 옥수수도. 그래서 하나, 하나씩 따 가지고 먹잖아요. 이때 이제 누나들이 가르쳐준 것 같아. 그래서 파랑새가 전봉준을 상징하느니, 청군을 상징하느니 막 이렇게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정답이 없었죠. 뭐 서로 주장하는 사람이 정답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노래였죠. 원래 이 노래는 황현이 쓴 ?오하기문(梧下紀聞)?에 의하면 새 쫓는 소리였습니다. 아이들이 철종 때, 정조 때부터 불렸다고 합니다. 새 쫓는 소리로. 이것이, 새 쫓는 소리가 결국은 그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나쁜 사람들을 내쫓는, 서문에 제가 이걸 썼죠. 그래서 지역마다 약간 좀 내용과 음조가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다 동일하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 경우에 아까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한국인의 마음을 꼽으라면 돌탑을 쌓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노래 두 개를 꼽으라고 하면 첫 번째, ‘아리랑’. 그리고 두 번째는 저는 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꼽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약간 의견을 달리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두 개를 꼽으라면 이 두 개를 너무 한국적인 노래로 꼽고 싶습니다. 이렇게 1960년대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안타깝게 실패하면서 우리가 일본의 어떤 식민지 지배를 받고, 남북이 분단되는 그리고 아직도 갈 길이 먼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그런 어떤 민초들,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해 준 마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1980년대 들어오면서 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는 안 불리죠. 거의 주전으로 전해지는 것은 80년대 들어와서 끊겨 나갑니다. 대신에 이 동학농민혁명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동요를 통해서 표현된 게 아니라 민중가요를 통해서 동학농민혁명이 노래가 됩니다. 80년대 들어와서. 그래서 80년대에 이제 그런 어떤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도서관 보상금제도을 모티브로 한 그런 노래들이 많이 만들어져 나가죠.

예를 들어서 그 대표적인 노래가 김남주 시인이 쓴 ‘죽창가‘라는, 얼마 전에 조국이 죽창가를 해 가지고 언론에 해서 여러분들도 많이 기억을.. 이 죽창가라든가, 이게 이제 80년대 초에 불리기 시작해서 그 다음에 ’녹두꽃‘이라는 노래가 많이 80년대, 90년대에 불렸죠. 또는 1980년대 연출가 권호성이 작곡해서 불린 노래이고 1994년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입니다. 이때 기념 뮤지컬로 ’들꽃‘이라는, <들풀>이라는 뮤지컬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동학농민가인데 영상을 보면 그때 제가 전북 교육청에서 만든 교재도 이렇게 화면에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 영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래된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동학농민가도 대표적으로 80~90년대에 만들어진 그런 노래이고. 아마 마지막 만들어진 노래는 1989년에 문승현 작사, 작곡해서 노찾사에 김삼연이 부른 아마 ’이 산하에‘라는 그 노래일 겁니다. 이것이 제가 알기로는 80년대 동학농민혁명을 노래한 그런 어떤 가요로써 약간 민중가요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죠. 아마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뭐 시간이 되면 일일이 들어보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실제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으로 끝났지만 역사 사건으로서는 갑오년에 끝났지만 실제 한국인의 마음속에서는 그 이후에도 면면이 살아서 역사의 수원지, 역사의 어떤 등불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그리고 새로운 그런 어떤 평화를 갈구할 때 동학농민혁명을 되돌아보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불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누구? 이건 너무 근접하니까 쉽게 알 수 있겠죠? 이건 뭘 상징하는 겁니까? 4.19를 상징하는 거죠? 이 분은 누구? 이 분은 단재 선생이시죠. 그래서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은 지난 근·현대 100년, 120년 동안 면면이 우리의 역사와 함께 했죠.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끊임없이 잉태하고 낳았습니다. 누구? 전봉준이죠. 너무 못생겼는데, 엄청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걸 만들면서 너무 안 닮게 만든 것 같아서. 실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어떤 뿌리의, 수원지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한국 민주주의 뿌리라는, 뿌리였다라는 게 인정이 돼서 결국은 올해 5월 11일, 황토현, 동학농민군이 처음 최초로 승리한 날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을 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까지 제정되는 일련의 과정은 1994년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분수령 역할을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1994년 무렵에 학술적인 연구도 엄청나게 했고 그 다음에 이 시기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사료를 엄청나게 모았습니다. 그러자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가 됐고요. 그러면서 이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난, 또는 동학혁명 차원에서 농민혁명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이 됩니다. 현재 제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조사위원장을 맡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후손들, 주로 증손자인데 후손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지금 계속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2018년에 전봉준 동상을 건립하자는 그런 운동이 벌어져서 정부의 지원금 전혀 안 받고 그냥 순수 민간 기금만 모아 가지고 작년, 올 초에 결국 종로에다가 전봉준 동상을 세웠습니다. 여기 아시는 분? 영풍문고 종각 건너편. 영풍문고 그 옆에 있습니다. 거기가 그 전에 전운서 자리였죠? 그래서 중대 범죄자들이 수감되던 감옥, 전운서가 있었던 자리 바로 영풍문고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결국 전봉준 동상을 세웠죠. 결국 이렇게 이제 체포돼 가지고 압송돼 와서 125년 만에 이렇게 동상으로 전환이 됐죠. 의미 있는 이념이라든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해석을 떠나서 어쨌거나 우리 근·현대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일련의 어떤 흐름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동학농민군이 꿈꾼 세상은 이루어졌을까? 동학농민이 꿈꾼 세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먼저 과연 동학농민군이 꿈꾼 세상은 무언가? 녹두장군이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답이 먼저 내려져야 될 것이고, 그 답이 나오면 그럼 그것이 과연 완료형인지, 현재 진행형인지를 판가름을 할 수가 있을 텐데 제가 보는 관점에 있어서는 동학농민혁명은 지난 100년 동안 국가 차원의 어떤 민주화, 국가 차원의 근대화를 하는데 하나의 밑거름역할을 했다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럼 앞으로는 뭐냐? 이제 앞으로는 국가 중심이 아니라 개인 중심의 사람다움, 개인 중심의 공정과 평화의 세계를 열어가는 역사적인 밑거름으로 이제는 쓰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1980~1990년대에 동학농민혁명의 역할이라든가 평가, 또는 어떤 콘텐츠가 21세기에는 조금 더 생활 속으로, 또는 국가에서 어떤 개인 속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삶의 개벽이 있는, 영적 개벽이 있는, 생명 개벽이 있는 그래서 지난 19세기, 20세기는 사회적인 개벽이 이룩하는데 동학농민혁명이 그 역할을 했다면 21세기에는 사람 개인 하나, 하나의 생명 개벽이 이루어지는 그런 방향으로 하나의 역사적 밑거름이 되면 좋겠다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0세 시대, 노년의 시대가 앞으로 열리는데 그 영적 노화를 하는 것과 맞물려서 이런 어떤 생명 개벽이 하나의 바탕이 된다면 조금 더 진화된 노년의 시대로 우리가 21세기를 맞이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개인적으로는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메모를 한번 해 보십시오. 과연 동학농민군이 꿈꾼 아름다운 세상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래서 현재 포스터를 보면 뭐 행복한 세상. 모두 다 행복한 세상이를 됐으면 좋겠다. 어떤 아이가 쓴 것 같아요.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 또는 대한민국 만세라고 한 친구도 있고. 그 다음에 통일된 남북이 됐으면 좋겠다. 또 여기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또는 한 민족, 한 나라, 통일된 조국이 됐으면 좋겠다. 뭐 이런.. 그래서 행복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상당히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올해 3.1운동이 100주년인데 당시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 독립만세를 외쳤잖아요. 독립에 대한 해석을 조금 더 다른 차원에서 해야 될 필요성이 있지 않은가.

저는 3.1운동의 그 뿌리는 동학농민혁명에 있다라고 자신을 하거든요. 그러려면 3.1운동 때 외쳤던 독립 만세에서 그 독립의 개념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전에 어느 학술회의장에서 그런 주장을 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독립’은 단순하게 일본의 지배로부터의 그 독립이 아니라 진정한 부자유로부터의 독립입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독립을 그들은 외쳤던 겁니다. 진정한 자유를, 자유를 주장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이라는 차원에만 가두어 두다 보니까 3.1운동 때 외쳤던 그 독립 만세. 그 독립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3.1운동 때 독립의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해서 우리가 재해석을 한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어떤 가치들이, 지향성들이 3.1운동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해방 이후에 여러 어떤 통일 조국을 만들기 위한 여러 형태로써 다양하게 분출돼 나왔다는 것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충북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회장도 맡고 있는데 매년 청주성전투가 있었던 무신천 옆에 장승을 계속 매년 세워 나갑니다. 그래서 올해도 장승에 새길 문구를 공모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도 올려보고, 일반 회원들한테도 공모를 했더니 대부분 의견들이 비슷비슷하더라고요. 과연 이것이 동학농민군이, 녹두장군이 꿈꿨던 그 세상의 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르죠.

예를 들어서 하늘 같은 세상, 함께 여는 세상이라든가. 또는 하늘이 섬기는 사람, 또는 사람이 섬기는 그런 어떤 하늘이 됐으면 좋겠다. 또는 꽃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나부터. 또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 어화둥둥 그 좋은 세상. 그래서 이것이 이제 올해 채택이 돼 가지고 올해 그 장승을 세우고 이걸 거기다가 문구를 새겼습니다. 또는 뭐 사람은 하늘 담고, 하늘은 사람을 품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한다면 과연 동학농민군이, 그리고 녹두장군이 꿈꿨던 세상이 너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저한테 질문을 한다면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그냥 그렇게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 제 강의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