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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백마강 역사 기행

오늘 말씀 드리는 것은 여행 중에서도 백마강입니다. 아마 저도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백마강을 갔던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많은 어르신 중에서 수학여행을 백마강 가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전 그 시절에는 거기 황포 돛대 띄워가지고 유람하고 오는 그런 코스를 대부분 경험하신 분들이 많을 테고 또 그 이후에도 이러 저러한 이유로 백마강에 가보신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가는 곳은 물론 추석 쇠고 나서 직접 그곳에 우리가 여행을 가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글을 통해서, 상상을 통해서 한번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위쪽 오른쪽 상단에 공주시청이라고 되어 있는 곳, 저기가 그 위에 한자로 공산성(公山城)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형을 보면 금강 상류 지역이죠. 제일 우측에서부터 물이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급격히 꺾이면서 남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제일 꼭대기 부근, 저기가 공산이라고 할 때 ‘공’자, ‘공변된다’고 할 때 공자 모양하고 비슷하게 생겼죠? 그래서 저 산을 공산이라고 하고 저 성을 쌓은 것을 공산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쪽에 웅진, 바로 곰나루라고 하는 곳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백제는 처음 건국할 때 지금 위례, 신도시 있는 그쪽에 수도가 있었고 그 영역이 오늘날 봉은사 있는 경기고등학교 있는 그곳까지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 사당도 거기에 있었고. 그곳까지, 그리고 건너편 아차산, 그리고 하남 일대가 원래 초기 백제의 수도였고. 그 다음 두 번째로 내려온 곳이 바로 공주이고. 마지막에 도읍(都邑)했던 것이 아래쪽에 있는 부여,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공산성에서부터 부여, 공주에서 부여까지 내려오는 것이 사실은 백제 3분의 2의 역사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여기에서 물길을 따라서 여기 보면 곰나루가 있고. 옛 글에 보면 계 해(蟹)자 써서 해포, 가다포, 목포, 중림담, 유탄, 반탄 이런 것들이 쭉 나오는데 대략 지금 이런 정도의 위치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면 둥그뫼라고 하는 둥그스름한 산이 있어서 여기에 원산정이라는 것이 있었고. 쭉 내려오면 여기에는 왕진, 왕나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오면 천정대 위치가 여기에 있는데 잘못 표기되어 있네요. 천정대, 그 밑에 조룡대, 낙화암, 고란사, 자운대 이런 것들이 다 백제 말기에, 특히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의자왕과 관련된 유적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석탄이라고 하는 곳은 고려 말에 이존오라고 하는 분이 살던 곳이고 또 이곳에 가면 조선 중기에 ‘백강 이경여’라고 하시는 분이 또 살던 유적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백제의 유적지이면서 고려, 조선대를 이어서 뛰어난 인물들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어울러서 이번 시간에 공부해 볼 지역이 바로 공주에서부터 이곳 부여까지를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이 일대는 백제의 유적지이기는 하지만 문헌에서 이 일대에 대해서 분명한 기록으로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지가 않습니다. 대략 고려 말, 그러니까 1349년 고려 말 정도입니다. 저때 이곡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한산이씨’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한국사 배우실 때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고려 귀족 집단으로부터 고려 말에 이르면 실무 능력을 갖춘 지방 하급 관리 출신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데 전형적인 그 집안입니다. 이곡은 한산 지방의 아전(衙前)을 하였고 그 아들이 ‘목원 이색’이라는 분인데 그분도 바로 그러한 위치에서부터 출발을 해서 세상이 어수선할 때는 불행하게도 꼭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이 잘되는 것 같아요. 바로 이곡과 그 아들 이색이 그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원, 몽골 제국으로 가서 거기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을 하고 요즘으로 치면 미국 가서 박사 학위 받아오는 그런 거죠. 그렇게 해서 그 능력으로 바로 2대 만에 지방 하급 공무원에서부터 2대 만에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까지 오르는 집안입니다. 조선 시대 때 가장 명문가 중에 한 집안이 바로 이 ‘한산이씨’ 이 집안입니다. 대단히 많은 학자, 문인, 그리고 애국적인 그런 인물들을 배출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바로 백마강에 대한 본격적인 글이 바로 이곡이라고 하는 분이 1349년 음력 5월에 백마강을 따라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낙화암, 조룡대, 천정대, 호암사 이런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꾸준한 기록이 있지만 굉장히 자세하게 이 일대에 대한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17세기 무렵, 고령신씨 신혼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 집안은 오늘날 양평에 그 후손들이 많이 사는 집안입니다. 아주 젊은 시절에, 그러니까 1648년에 갔는데 1624년생이니까 25살 때 한창 나이 때 갔습니다. 그래서 신혼이 바로 공주에서부터 백마강까지 여행한 기행문을 보면 젊은 애답게 술 먹고 즐겁게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인물, 이동표. 본관이 진보이니까 바로 퇴계 이황의 후손에 해당되는 인물입니다. 경상도 예천 사람인데 이분은 1673년에 갔으니까 우리 나이로 30살. 역시 백마강을 이분도 젊은 시절에 갔습니다. 그렇지만 신혼은 좀 더 낭만적으로 가고 이동표는 조금 더 학구적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신혼과 이동표, 이 사람들이 백마강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글을 남겼는가를 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나란히 보입니다.

이 글은 첫 번째 우리가 봤던 신유라고 하는 사람의 글입니다. 밑에 유근이라고 하는 게 좀 잘못됐네요. 글을 보면 ‘금강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부여에 이르러서 나머지 90리가 바로 백마강이다.’ 그러니까 백마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여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승용차로 여행을 하지만 예전에는 말을 탔고,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배입니다. 배가 사실은 가장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강을 따라 이동을 많이 합니다. 지방을 내려간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영남, 호남을 내려간다고 했을 때 기본적인 것은 충주까지는 바로 남한강, 물길 거슬러서 충주까지 가서 거기에서부터 영남, 호남 이렇게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다시 낙동강 줄기로 갈아타고 금강 줄기로 갈아타고 그런 식으로 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탔던 배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배를 띄우는데 배 안에 정자를 세워 놓은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선실이 갖추어진 것인데 그것을 그냥 선실이 아니라 정자를 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아주 꼼꼼하게 잘 만들었는데 단청(丹靑)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정자에다가 병풍을 설치하고 요즘으로 치면 작은 오케스트라를 두고 또 기녀들, 이런 사람들 악공과 기녀를 두고 갑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그 아버지가 고향인 양수리로 내려갈 때 그때도 거의 똑같습니다. 대체로 이럴 때는 과거 시험 합격했거나 아니면 아버지나 이런 분들이 그 지역에 사또가 되어 가니까 기분 좋은 상태에서 갑니다. 그래서 재력이 상당히 많이 필요한 것이 여행인데, 그래서 이런 배를 갖추어서 가게 되고 이와 같이 풍악을 갖추어서 떠나게 됩니다.

여기 보면 이름이 상당히 많죠? 그래서 가수 두 사람, 거문고 연주하는 사람 한 사람, 북 치는 고수 하나, 장구 치는 한 사람, 또 춤추는 무희 두 사람, 피리 부는 아이. 상당히 부수 인력이 꽤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기들이 탄 배가 아니고 앞쪽 배에도 또 상당한 사람들을 싣습니다. 예를 들면 대동강에 평양감사 노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배가 3척입니다. 그러니까 관찰사 일행이 관람선으로 사용하는 배, 하나는 무대로써 해당되는 배, 하나는 준비하는 배. 그러니까 평양에서 선유놀음 한번 하면 집이 몇 채씩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때 이 집안에서 아버지가 관찰사로 갑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가능합니다. 근데 또 재미난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묘하게 이와 같은 것은 누선이라고 하는데, 누각배. 정자를 올려놓은 배들이 한강이라든가 혹은 영산강, 낙동강 이런 데 누선이 있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데 묘하게 공주에서 백마강 사이에 노는 사람들은 꼭 이 누각배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한강에서 그런 배를 띄웠다가는 너무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것 같고, 경상도나 이런 데는 물자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 같고. 비교적 물자도 많고 또 서울에서 일정한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호화롭게 이와 같이 배를 띄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또 백성들이 볼까 싶어가지고 병풍까지 탁 치고 이렇게 갑니다. 근데 여기 글에 보면 그렇죠. 병풍을 나중에 치우게 하면서 ‘무엇 때문에 우리가 강산을 가려야 되냐.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놀자.’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이때 지은 시에 보면 높은 정자에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금성탕지(金城湯池), 아주 웅장한 공주 도읍을 이야기하고 이곳에서 놀면 소동파가 적벽에서 노는 것 같은데 바로 그 적벽에 해당되는 것이 창벽이다. 창벽은 공주에서 조금 상류 쪽에 있는 절벽 지역입니다. 그리고 중국 고대 유량이라는 사람이 남루라고 하는 곳에서 뛰어난 작품을 지었는데 우리는 그 남루가 아니라 바로 북루라고 하는 것은 공주감영(監營) 북쪽에 누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최고의 적벽부가 나온 적벽은 우리 공주에는 창벽이 있고, 또 남루가 유명한데 우리 공주는 바로 북루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은 강호에 있으면 유유자적하게 하겠는데 하늘은 강물로 하여금 풍류를 떨치게 한다. 조각구름은 시를 재촉하는 비를 보내어 맑은 술을 들고 중앙절 날 유람하도록 우리를 돕는다.’라고 하는 시를 유근이라고 하는 분이 짓는데 이분이 바로 공주에 있는 공북루라고 하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 누각을 새로 중수(重修)하면서 이런 것을 짓습니다.

이것이 대략 18세기 무렵에 그려진 규장각에 있는 공주 지도입니다. 여기에 보면 쌍수산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쌍수산성은 공산산성, ‘이바지할 공(供)’자 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 보면 북쪽에 이렇게 성곽이 있고 여기에 건물들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누각이 아까 이야기한 북루입니다. 여기에 보면 ‘웅진제소’, 이거 글자가 ‘제’자로 되어 있는데 ‘바 소(所)’자입니다. 웅진 곰나루 제소, 제사 지내는 곳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곳이 조선시대 때 아주 우리나라의 강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여기가 곰나루라고 해서 바로 물이 이렇게 흘러가니까 이게 ‘공’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도를 바탕으로 해서 그 다음 신혼이라는 사람의 글을 보면 이렇습니다. ‘10여 리를 가니 곰나루에 이르렀다. 곧 백제가 남으로 이곳에 천도(遷都)하였다가 성왕 때 처음으로 부여 남쪽 나루로 옮겼다. 그러니 고도의 유적지이다. 멀리 가시덤불 속에 몇 칸 사당이 보이는데 강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라고 했는데 아까 그 지도에서 본 웅진제소라고 하는 곳이 저곳입니다. 강물이 더욱 맑고 모래가 희다. 맑고 깊으며 시원하여 실로 가을 같다. 벼랑의 꽃과 물가의 버들이 전경을 곱게 해 준다. 모두들 정말 아름답다고 칭찬한다. 여기에서 대략 수십 보, 미터 개념하고 비슷합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가니까 해포라고 하는 곳이 나오고 또 조금 더 내려가니 가다탄이 나오고 조금 있으니까 치마바위 나오고 중림담, 그리고 유탄, 그 다음 조포. 이런 것을 쭉 꺾어서 10리를 가니까 반탄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반탄이 오늘날 반탄면으로 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간 이동표는 ‘강을 따라 성을 끼고 백마강 아래로 내려갔다. 바위에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눈길 가득 안개와 물결 너머 붉은 빛, 푸른빛이 서로 어른거린다. 강 가운데 돛을 펼치니 속세를 벗어난 듯 시원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공주를 떠나 부여로 가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15리쯤 가니까 원산이라고 하는 곳이 나왔다. 둥그뫼, 산이 둥그렇게 생긴 곳입니다. ‘나는 막 취하여 자다가 남들이 ’원산이다.‘ 해서 놀라 일어나 보니 원산이 마치 큰 종을 엎어놓은 것 같았다.’ 산마루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도사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입니다. 아주 경찰서장 급 되는 높은 직입니다. ‘여러 사람들 하고 그 위에서 멋대로 놀고 있었다. 나도 걸어 올라가 곱게 치장한 여인들과 놀았다. 이윽고 서산의 해가 세 발 정도 남았기에 다시 배에 올랐다. 석양이 산에 걸려 있어 강물 빛과 나무 그늘이며 들판에 일렁거렸다. 강 너머 멀고 가까운 마을 집에 저녁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남으로 부여와 석성, 한산의 경계가 바라다 보였다. 바다와 구름이 하늘에 접해 있는데 강변의 바위 벼랑은 한낮의 썰물이 빠져나가 마르지 않았다. 동쪽으로는 인가가 있는데 10여 호 정도다. 빈 터에는 보리 싹이 무성하여 푸른빛이 일렁거린다. 나무하는 아이, 개울의 계집아이가 그 사이에 왕래를 한다.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지금도 이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전형적인 농촌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둥그뫼라고 하는 원산에 정자가 있는데 박의립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운 건물입니다.

이 박의립이라는 사람을 ?조선왕조실록?이나 이런 데 찾아보면 거의 안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박의립’ 치면 딱 나옵니다. 이 사람이 여기 정자 세웠기 때문입니다. 큰일을 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하나 세웠고 그 정자가 후손에 의해서 유지되다가 중도에 무너졌지만 그 후손들이 가꾸어서 문화재로써의 기능을 하니까 정말 별로 한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남기게 되는 거죠. 사람이 무엇으로 이름을 남기는가 하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제가 좀 조사를 해 봐야 될 집안 같은데 의외로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가 지금도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빈 산에 사람은 없고 물은 흐르는데 꽃은 피어있다. 추사가 좋아하는 그런 글이죠. 약간의 불교적인 그런 맛이 있죠. 이것은 바로 소동파가 한 말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아마 추사의 글이 여기에 걸려 있으면 추사의 집이 예산이니까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이 집안과 아마 교류가 있어서 여기에 걸려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기에서부터 다시 부여 쪽으로 내려갑니다. ‘20리를 가서 왕진, 왕나루에 정박했다. 왕나루라고 하는 것은 백제 때 매번 여러 신하들이 용주를 타고 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놀았다.’ 용주라고 하는 것은 임금이 타는 배를 용주라고 하는데 실제 용을 장식해서 붙여놓은 그런 으리으리한 배입니다. 그러니까 백제가 실제 남아있는 유물이라든가 이런 것을 보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강성했던 나라인 것 같습니다. 이 용주를 띄우고 부여의 북쪽, 그러니까 공주하고 그 사이에 왕진이라고 하는 곳이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왕이 놀았다고 해서 왕나루이고, 또 부여 아래쪽에 대왕포라고 하는 곳도 있는데 거기도 역시 백제 왕이 놀던 곳이라고 해서 대왕포. 또 그 밑에 가면 주자포라고 하는 곳도 있는데 주자포는 아마 의자왕이 도망가던 포구다, 이런 명칭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명에 보면 백제 왕과 관련된 것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술 좋아하는 신혼은 계속 술 취해서 그냥 배 타고 놀러갑니다. 그러다 술독이 비었는데 하필 이웃 고을에 있던 도사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술과 음식을 들고 가서 실컷 마시고 고꾸라져서 누워서 이 사람은 구경을 거의 못하고 그냥 자면서 가게 됩니다.

신혼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다시 갑니다. 그 다음 해 봄에 다시 또 가고, 또 돌아올 때 한 번 더 들릅니다. 후회를 하죠. ‘내가 내려갈 때 꼼꼼하게 맨 정신으로 봤어야 됐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창강서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황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모시는 서원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데 ‘황신’이라는 분은 일본에도 여러 차례 간 외교관으로서 큰 역할을 했던 그런 인물이기도 합니다. 배를 타고 쭉 내려가면서 하류를 바라보니까, 글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부가 불을 들고 강을 가로 질러 가는데 환하기가 유성과 같다.’ 그러니까 예전에도 지금보다도 훨씬 거기에, 강에 배들의 왕래가 많았는데 그 배들에 불을 굉장히 환하게 밝혀놓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흥이 일어 노를 두드리면서 내려갔다. 이에 판옥(板屋) 위에 등불, 청사초롱 같은 그런 등롱(燈籠)을 갖추어 놓으니까 촛불이 강물 속에 비춰 가지고 어둑하게 깜빡거린다.’ 그러니까 예전 분들이 놀 때 그냥 놀지 않고 분위기 연출을 잘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겨울에 매화 구경을 한다. 여러분들은 매화 구경할 때 그냥 가서 매화 보고 말죠? 예전에는 매화를 한겨울에 보기 위해서 화분에 매화를 키웁니다. 그래서 한겨울, 눈이 내릴 때 인공으로 꽃을 피웁니다. 그러니까 방 안에, 뜨뜻한 데에 갖다 놓고 다시 매화감실(梅花龕室)이라는 휘장을 쳐서 우풍에 안 들어오게 하고 더욱 물도 부어주고 아주 고생스럽게 해서 매화꽃을 딱 피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냥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화 뒤쪽에, 요즘으로 치면 거울을 병풍처럼 둘러놓습니다. 그리고 그 앞쪽에 지금은 크리스털이지만 예전에는 크리스털이 없으니까 사발에 얼음을 얼리는데 다 얼리는 것이 아니고 예전에 마루에 놔두면 금방 얼죠. 바깥쪽만 얼게 해서 속에 있는 물과 그릇을 빼고 나면 그릇 모양의, 지금 크리스털 잔 모양의 얼음이 나오죠. 그러면 그 안에 촛불을 딱 켜 가지고 조명으로 비춥니다. 그렇게 해서 매화를 봅니다. 여름에 연꽃 구경도 그런 식으로 합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장치를 해서 보고 또 가을날 국화 구경을 한다. 그러면 국화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스크린처럼 벽을 깨끗하게 비우고 국화 화분을 드문드문 둡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촛불을 두면 촛불하고 국화하고 가까운 쪽은 여기까지 비추면 그림자가 연하고, 또 촛불에서 멀고 벽에서 가까운 쪽에는 그림자가 진하겠죠? 그러면 여러 국화 화분들이 어우러져서 벽에 비추는 것은 수묵화, 그림을 보듯이 연출이 되죠. 그냥 국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배 타고 놀러갈 때도 연출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촛불이 바람을 맞아 지탱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아예 촛불을 끄고 깜깜한 가운데 갔다. 만경창파(萬頃蒼波)에 삐거덕거리는 노 소리만 들렸다.’ 이것도 참 운치가 있겠죠? 불빛 하나 없는 가운데, 깜깜한 가운데 지나가는 거죠. 강 남쪽, 북쪽 언덕 위에 안개와 노을이 비추는 그 너머에 마을에서 밝혀놓은 불빛들이 점점이 보인다. 요즘도 보면 상해라든가 이런 데 가면 야경이 아름답죠. 마치 야경을 배를 타고 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어부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들리고 강의 치세(治世)라든가 바위의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은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다. 그저 하늘의 별만 보고 갔다. 한참 침상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 배가 절로 물을 따라 조용히 내려가다가 갑자기 강 가운데 물 위에 바위에 끼어버렸다.’ 우리나라 배는, 배라고 하면 배가 V자형으로 이렇게 돼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배는 V자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닥이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뚝방을 쳐 가지고 수량(水量)이 많습니다만 예전에는 수량이 일정하지가 않기 때문에 배를 V자형 배는 띄울 수가 없습니다. 팔당 가는 그런 쪽만 하더라도 팔당이 있는 거기가 예전에 배가 못 지나가던 곳입니다. 거기 여울이고 물이 얕아서. 그런 곳 지나갈 때는 사람들이 다 내려서 배를 끌고 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여기에 배가 걸려 가지고 끌고 가는 그런 형편입니다. 재미난 것은 임진왜란 때 우리 배가 일본의 해군을 맞아서 잘 싸웠던 이유 중에 하나도 우리 배가 바로 바닥이 평평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배는 파도를 넘으려면 V자형이 돼야 됩니다. 우리 배는 대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 연안 지역을 가야 되기 때문에 배가 다 납작한 배입니다. 그런데 V자형으로 된 배는 회전을 하려면 이렇게 돌아야 되는데 바닥이 납작한 우리 배는 그냥 그 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합니다. 학익진(鶴翼陣)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단순하죠. 우리 배는 크고 일본 배는 가볍습니다. 우리 배는 느리고 일본 배는 훨씬 빠르죠. 우리는 배를 소나무를 가지고 만드니까 튼튼하고, 일본 배는 삼나무를 가지고 만드니까 가볍지만 조금 약합니다. 그러니까 작전이라는 게 별 거 없습니다. 공격하는 척하다가 도망을 칩니다. 그러면 일본 배가 막 따라오죠. 막 따라오다가 보면 우리가 배를 반대편으로 딱 돌려가지고 옆으로 펼치는 그게 학익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일본 배들이 안쪽으로 쓱 들어오고 우리가 옆으로만 퍼지면 다 포위가 되는 거죠. 바로 360도, 180도 회전이 쉽기 때문에 우리가 쓸 수 있는 그런 작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갈 때 보면 늘 이렇게 바다의 여울에 끌려가지고 고생하는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바로 배가 껴 가지고 이제 움직여야 되는데 아주 옴짝달싹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있는데 한참 지나 가지고 다리 강의 반이나 잠겨 있는데 마침 어부들이 지나가니까 그들 시켜서 배를 둘러메고 가게 합니다. 어부들의 배는 조그마하니까 여울을 쉽게 가니까 여기는 아까 보면 악공들하고, 가수들하고, 사람들이 타고 술도 싣고 많이 실었으니까 배가 쉽게 갈 수가 없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그렇게 해서 고란사를 가까이 가게 됩니다. 지은 시에 이렇습니다. ‘막 뜬 달빛 아래 꿈결 속에 고란사로 가니 바람은 선창에 서늘한데 횃불은 가물가물. 여린 노 젓는 소리에 취해 잠에서 깨니 하늘 가득한 안개가 앞 여울에 어둑하네.’ 예전에는 시를 짓는 것이 그냥 일기 쓰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그냥 감상을 이렇게 적습니다. 그리고 여울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배가 매우 빨리 달렸다. 여기서부터 유속이 급해지는 거죠. ‘강 언덕 위 아스라한 곳에 높은 봉우리가 깎아지는 듯 병풍처럼 서 있는데 그 벼랑이 점점 낮아지더니 강 가운데로 푹 꺼졌다. 그 아래 너럭바위가 반 정도 바닥에 박혀 있었다. 바로 저것이 조룡대다.’ 용을 낚은 데라는 곳이죠. 바로 낙화암 아래에 있는 바위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천고의 역사를 상상케 한다. 사공이 뱃머리에서 고란사 승려를 불러 횃불을 들고 나오라고 했다.’ 조명이 없으니까 깜깜한데 조룡대 배를 타고 소리를 질러가지고 고란사 승려들에게 가마 메고 나오게 하는 겁니다. 예전 선비들은 지금 승용차 타는 것 같이 몇 걸음 걷지 않습니다. 늘 가마를 탑니다. 그 가마 메는 사람들이 다 승려들입니다. 그래서 산악용 가마들이 발달을 합니다. 그것을 ‘남여(籃與)’라고 하는데 대나무를 가지고 두 사람이 메고 갑니다. 그런 것은 지금 중국이나 이런 데에 가보면 고산지대 갈 때 돈 얼마 주면 두 사람이 어깨에 탁 메고 가죠. 그것을 <태산이 높다하되>라는 유명한 시조를 지은 양사언이라는 사람이 금강산에 계속 오래 살았는데 금강산 승려들이 제일 싫어하던 사람이 양사언이라고 하죠. 왜냐하면 양사언이 바로 남여라고 하는 산악용 가마를 발명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횃불 들고 가마 들고 돌길 따라 내려오게 됩니다. ‘숲의 나무가 어둑한데 불빛이 어디선가 어른 어른거려서 인간세상 같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신혼은 같은 시간대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초저녁이 되어서 술 먹고 깨보니까 등불이 깜빡거리는데 불화(佛?)가 가물거렸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술 깨서 보니까 고란사에 벌써 와 있었던 겁니다. 취중에 어디 온지도 모르고 간 거죠. 그래서 ‘지금 여기 어디지?’ 하니까 고란사에 누워 있었다는 거죠. 아마 하인들이 둘러업고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정대, 조용대 이런 거 봐야 되는데 했더니 ‘벌써 다 지나가버렸는데요.’ 이렇게 된 거죠. ‘조금 있으니 주인이 부축을 받고 취해서 들어오기에 도사를 발로 차가지고 깨워서 또 술 마셨다. 어찌해서 시골뜨기들이 좌중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있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나쁘게 한다.’ 저가 술 먹고 자 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 다음에 여기가 고란사는 ‘높을 고(高)’자를 쓰기도 하고 ‘언덕 고(皐)’자를 쓰기도 합니다. 고란사는 굉장히 유명한 절인데 의외로 기록에 나오는 것은 1236년에 처음 나옵니다. 물론 이것이 백제의 절이라고 하고 특히 백제 때 여기에 난초가 났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해서 고란사를 세웠다, 기록에는 이렇게 있습니다만 실제 문헌에 나온 것은 고려시대에 고란사라는 절이 보입니다. 그런데 난초가 난다고 해서 왜 절을 세우느냐? 난초가 굉장히 흔한데, 이렇게 생각하실 경우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난초가 없습니다. 난초에 대한 것은 중국 고대 초나라에 구란이라는 사람이 임금으로부터 의심을 받아서 중국 강남으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억울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쓴 글에 보면 ‘난초를 허리에 찬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들 집에 난초 다 키울 텐데 난초를 어떻게 찰까? 궁금하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난초가 아니고 난화입니다. ‘꽃 화(華)’ 자를 쓰고. 난초라고 하는 것은 난화는 화분에 대공에서부터 바로 잎이 나죠? 그런데 난초라고 하는 것은 대공이 이렇게 쭉 올라와서 꽤 자란 다음에 그 위에서 잎이 쭉쭉 나옵니다. 그리고 난초가 꽃이 폈을 때 은은한 향이 나기는 합니다만 평상시에 꽃이 안 필 때는 잎에서 전혀 향이 안 나죠? 그런데 난초는, 중국 난초는 줄기하고 잎에서도 납니다. 그래서 중국 고대에 바로 그 난초 줄기와 잎을 명주 주머니에 싸 가지고 향수 대용으로 들고 다니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난초가 없으니까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진짜 난초를 구해올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재미난 것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문인들이 외교 사절로 중국에 가면 제일 많이 찾아가는 곳이 첫 번째는 서점입니다. 책을 파는 곳에 가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두 번째 많이 가는 곳이 꽃집입니다. 꽃 파는 집에 가서 화분에 꽃을 사오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수 많은 꽃들, 예를 들면 수선화와 같은 경우가 19세기 초반기에 중국으로부터 알음알음 가져와서 우리나라에 자라게 된 것이고. 요즘 꽃이 많이 피어있는 능소화, 분홍색 담벼락에 붙어있는 능소화도 19세기 중엽 정도에 중국에서부터 가져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도 꽃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 꽃집에 가서 좋은 꽃이 있으면 사오게 됩니다. 난초도 그렇게 사오는데, 사와서 조선에서 키워보면 다 가짜라는 겁니다. 조금 키워 보니까 다 맥문동이라는 거죠. 맥문동하고 진짜 난초가 거의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난초 감별법이라고 해서 물에 띄웠을 때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이야기가 많을 정도로 난초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난초가 고란사에 있다고 한 것이 이미 백제시대부터도 대단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이런 절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란사 모습은 조금 이따가 사진으로, 지금 이것으로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이윤영이라고 하는 18세기 문인인데, 그의 친구인 이인상, 이 사람도 이름난 화가입니다. 나란히 고란사를 찾고 거기에서 유람을 하면서 그림으로 그린 겁니다. 여기에 배를 타고 있는데 아마 이 사람들이 자기들 그림을 그린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조룡대입니다. 바위 속에 이렇게 물 속에 튀어나와 있는 것이 조룡대이고 여기가, 이것이 고란사입니다. 지금도 고란사 가려면 지금은 이 위쪽, 이게 부소산성인데 부소산성에서부터 내려와서 이렇게 가기도 하고 이 밑에서 이렇게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낙화암입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지금도 아찔할 정도죠. 배를 탈 때는 대부분 여기에서, 고란사 아래에서 배를 타고 아래쪽으로 한 바퀴 쭉 도는 코스가 백마강 유람 코스로 보면 됩니다. 이제 고란사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갔다. 승려에게 인도하게 해서 절에 이르렀다. 절은 강가에 그다지 멀지 않다. 바위가 높다랗게 끊어져 있는데 처음에는 바위틈을 깎아 절을 세웠다. 절이 8~9칸 정도인데 방은 있지만 요사채는 없다.’ 그러니까 워낙 좁은 곳이니까 그냥 감실만 두었던 거죠. 지금은 요사채도 만들어져 있죠. ‘기둥 바깥 작은 섬돌은 겨우 타고 가던 말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하다. 큰 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구불구불 반쯤 말라 죽어있다. 수명이 언제 끝난지 모르겠다.’ 아마 이 나무는 죽고 그 후손들이 지금 숲을 이루고 있을 겁니다. ‘절 또한 백제 이전에’, 물론 백제 이전에는 없겠죠. 백제 때 불교가 들어왔으니까. ‘백제 때 들어온 건데 세 차례 중수를 하였다. 큰 나무는 모두 예전 백제 때 것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이런 기록을 통해서 증명을 해야 되는 일인데 지금 고란사 기둥이 정확히 언제 것인지는 잘 모르고 있죠. 이 고란사가 있는 이곳에서 이명한이라고 하는 17세기 문인이 쓴 시가 바로 이 백마강의 한시 중에 최고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어디 어디에 높은 누와 대가 있는가? 천 겹의 저녁 산에 강물은 서쪽으로 흐르네. 용이 죽고 꽃이 진 것 그 옛날의 일인데도 인간들은 부질없이 시름을 그치지 않는다.’ 용이 죽었다는 것은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서 죽은 것. 꽃이 진 것은 낙화암, 궁녀들이 몸을 던진 것.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고란사 보고 또 술판을 신혼은 벌입니다. ‘정오가 되었다. 장난으로 뭐라고 하느냐면, 황음무도하니 의자왕의 비웃음을 받겠다.’ 의자왕이 술 먹다가 나라가 망했는데 우리는 의자왕보다 더 많이 노는 거 아닌가 반성을 하죠. 그리고 ‘배를 돌리게 해서 조룡대로 가서 정박했다. 고란사를 둘러보니 구름 속에 아스라했다. 금빛 푸른빛 단청이 손에 잡힐 듯하였다. 내가 취해서 어제 고란사를 찾아간 것을 갑자기 잊어버렸다. 고란사는 난초 한 떨기가 누와 바위 사이에 자라는데 우리나라에는 난초가 이곳에만 있기 때문에 그래서 고란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대체로 고란사에 대해서 써놓은 글들은 비슷합니다. ‘백마강 강가의 언덕 벼랑에 매달려 주춧돌을 세웠고 그 앞에 비단처럼 아름다운 강이 들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바로 의자왕이 난초가 자란다고 해서 절을 세웠다.’ 대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난초가 어떤 사람은 하나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몇 줄기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가도 몇 포기가 있다고 되어 있죠. 그리고 당시 백제의 노래가 이곳에 있는데 ?언덕에 난초가 자라네?. ?산에 꽃이 있네?. 산유화 고유란 이런 백제 노래가 이 당시까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 잊히고 전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에 동루에 올랐는데 이 동루는 바로 고란사 위쪽에 부여읍성에 있는 동루입니다. ‘절은 강 왼편 언덕에 있다. 왼편 언덕은 남쪽이다. 그 산 이름은 부소산이다. 바위가 높이가 수십 길인데 강물 속으로 꽂혀 들어간다. 바위 위에 기둥을 세워 누를 만들었는데 누 위에 층층 높은 바위가 있어 지붕을 누른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굴러 떨어질 듯하다. 누 앞에 난간이 곧바로 끝없는 강물 앞에 있는데 내려다보면 물 위에 바로 침을 뱉을 수 있다. 난간 너머 바위 꼭대기는 겨우 몇 걸음 정도 되는데 백혼무인(伯昏無人)과 같은 아주 힘 센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지금 부소산성에서 조금 내려오면 현대식 누각이 있습니다. 지금 가 봐도 아주 아찔합니다. 벽에는 민재인이라는 사람의 ?백마강부?, 백마강을 쓴 것 중에 제일 명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신들이 조선 문학이 어떤 것이 있을까 해서 한번 내놔 보라고 했을 때 바로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내어놓았을 만큼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 후에 작가들이 뭐 그렇게 대단한가, 내가 더 좋은 작품을 짓겠노라. 큰소리 뻥뻥 쳤는데 실제로 잘 안 되었다는 거죠. 재미난 구절이 가운데 부분에 ‘군왕이 나서서 노니 강의 꽃들이 웃으며 맞았네.’ 해서 바로 화려함을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낙화암에 올라갔습니다. 절 뒤쪽의 작은 암자를 향해서 위로 봤다. 바위를 만났는데 평평해서 앉아 다리를 쉬게 했다가 또 술 좀 먹고 암자에 내려갔다.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서 고란사 위에 있다. 지금은 이 암자가 없습니다. 암자 터조차 발견할 수가 없는데 백제 부여 연구하시는 분들이 이쪽 암자 터도 좀 찾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지금 그곳에 가보면 정지원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불상이 거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마 암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가면 정림사 절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절은 없어졌는데 여기에 5층 석탑이 있습니다. 이 5층 석탑이 지금 사라진 황룡사탑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또 석가탑하고도 굉장히 닮아있는 바로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탑으로 알려져 있는 탑인데 그 탑 아래에다가 바로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그 밑에다가 자기들의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대략 BC 7세기 무렵입니다. BC 7세기 무렵에 글씨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중국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라든가 이런 서예가들이 평재비에 관심을 굉장히 가지고 조선시대 때 탁본(拓本)을 굉장히 많이 했던 탑이 이겁니다. 물론 그 글씨는 중국 문인의 글씨를 거기에 세워 놓은 겁니다. 이 지도는 18세기에 나온 부여 지도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금강 상류부터 쭉 내려와서 이렇게 물이 아래로 해서 내려가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 여기가 ‘천정대’라고 하는 곳, 기억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룡대, 부소산, 고란사, 낙화암 여기를 이제 백마강이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백마강은 바로 부여를 감싸서 흐르는 곳이 백마강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부산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쭉 내려오면 이 밑에 대왕포, 여기에 ‘왕’자가 ‘날 일(日)’ 변에 ‘임금 왕(王)’자. 왕성하다고 하는 뜻인데 인왕산이라고 할 때도 이 왕자를 씁니다. 한때 지금 인왕산은 ‘임금 왕(王)’자를 쓰는데 ‘날 일(日)’ 변이 원래 없는데 일본을 상징하기 위해서 거기에 ‘날 일(日)’자를 붙여놓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임금 왕(王)’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자라고 하는 것이 원래는 가장 단순한 글자에서부터 뜻이 분화되어 가지고 부수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임금 왕(王)’자만 써놓고도 임금이라는 뜻도 있고, 왕성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럼 어떤 때는 임금이고, 어떤 때는 왕성하다는 뜻인가, 헷갈리니까 그 뜻을 분화시키기 위해서 왕성하다고 할 때는 ‘날 일(日)’자를 붙여줍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이라고 할 때 ‘혼’ 자, ‘계집 녀(女)’ 변에 오른편에 ‘어두울 혼(昏)’자가 있습니다. 원래는 ‘어두울 혼(昏)’자만 써놓고도 어둡다는 뜻도 있고, 결혼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헷갈리니까 결혼이라고 할 때 ‘혼’자에는 ‘계집 녀(女)’자를 부수로 붙여 넣게 되는 겁니다. 부수라고 하는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뜻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길 도(道)’자도 그렇습니다. ‘길 도(道)’자를 써놨는데 길이라는 뜻도 있고 또 이끌어낸다는 뜻도 있습니다. 인도한다고 할 때. 지금 인도한다고 할 때는 ‘길 도(道)’자 밑에 ‘마디 촌(寸)’자를 붙여서 뜻을 분화시켜 놓습니다. 심지어 중국에는 없는데 우리나라에는 있는 글자도 있습니다. ‘길 도(道)’자 밑에 ‘입 구(口)’자가 들어가 있는 게 있습니다. 왜 ‘길 도(道)’자 밑에 ‘입 구(口)’자가 있는가. 그거는 길이 아니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언론 보도할 때도 ‘도’자도 ‘길 도(道)’자를 씁니다. 길이 아니고 이거는 보도한다는, 말한다는 뜻일 때는 ‘입 구(口)’자를 붙여 넣습니다. 근데 중국 사전에 보면 ‘입 구(口)’자 들어가 있는 ‘길 도(道)’자는 없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에서 쓸 때 분화하기 위해서 이런 것들도 꽤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일대를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낙화암, 바로 꽃이 떨어졌다고 하는 낙화암이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것이 아까 본 고려 말 ‘이곡’이라고 하는 분의 글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바로 ‘소정방이 백제를 치는데 부여가 그때 백제의 수도였다. 포위를 당하여 상황이 급박해지자 군신들이 궁녀들을 놓아놓고 도망을 치니까 궁녀들은 의리상 당나라 군사들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해서 바로 그 바위에서 투신을 했다고 해서 낙화암이라고 한다.’ 하는 말이 여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삼국유사? 같은 기록에도 보면 낙화암이 아니라 타사암(墮死巖), ‘떨어질 타(墮)’자, ‘죽을 사(死)’자 해서 타사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의자왕이 궁녀들하고 함께 떨어져 죽었다, 이렇게 잘못 믿은 예도 있습니다. 의자왕은 당나라에 잡혀갔죠. 여기에서 몸을 던진 사람은 궁녀밖에는 사실은 없었던 거죠. 그리고 고려 말에 ‘석탄’이라고 하는 곳에 살았던 ‘이존오’라고 하는 사람이 글에 보면 ‘낙화암 아래 강물은 넓은데 천년 세월 흰 구름만 유유히 흐른다.’ 이렇게 있고 또 ?세종실록지리지?, 유명한 책이죠. 여기에 보면 낙화암 대신에 낙화대라고 해서 절벽이라는 뜻의 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를 가서 거기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데 거기에 금강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있고 거기도 절벽 지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낙화암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부여와 영월, 두 곳에 있습니다. 아마 영월 동강, 서강 들어봤을 텐데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 거기에 낙화암이 있습니다. ‘고란사 서쪽 수십 보 되는 곳을 따라 내려가니까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몇 길이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높다랗게 험악하여 하늘로 옥이 세워진 듯하다. 오래된 소나무 위에 막 핀 꽃이 물결 아래에 어른거린다. 의자왕이 후궁들과 술에 빠져 지내다가 소정방의 군사가 온다는 말을 갑작스럽게 듣자 후궁들이 달아나서 바위에서 떨어져서 죽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습니다. 풍경이 아름다우면 나라를 망하게 한다,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중국 오나라, 초나라 여기는 못 가봤지만 들어보니까 멋지더라. 바로 중국에서 경치 아름다운 곳에는 나라가 망하더라, 했는데 바로 이곳이 경치가 아름다워서 의자왕이 정치를 하지 않고 놀아서 그래서 망국의 한을 품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 어떤 사람이 여기에 배를 대고 예전 빼어난 땅 생각하니 음란하여 나라는 망했지만 강산이 아름다우니까 의자왕을 탓할 것 없다. 의자왕 편들어준 겁니다. 의자왕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느냐.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안 놀고 어떻게 하겠느냐 했다는 거죠.

‘걸어서 낙화암 앞에 이르렀다. 낙화암은 높이가 수백 길인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늙은 바위 사이에 왜송 수십 그루가 있고 그 아래 바위가 높다랗게 끊어져 있는데 지형이 기울어져 목숨을 결단한 사람이 아니라면 갈 수가 없다.’ 소정방 장군이 강 입구에 내려올 때 의자왕이 궁녀들과 바위에서 잔치를 하고 있었는데 김유신 공이 백마를 물에 빠뜨려 용을 낚은 후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형세로 대군이 건너오자 잔치에서 모시던 궁녀들이 떨어져서 꽃잎처럼 흩날렸기 때문에 그래서 낙화암이라고 한다. 이때 이제 또 풍류가 생기는 것이 ‘사또, 바로 부여 현감의 배가 도착했다. 그래서 이제 좌정하고 담소를 나누다가 술 한잔 먹고 배를 탔다.’ 이때 사또는 남궁옥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아주 글씨도 잘 쓰고 사람 됨됨이가 쾌활한데다가 요즘으로 치면 개그를 잘해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꽤 잘했던 사람 같습니다. ‘배에다가 술을 싣고 조룡대 아래 강물을 따라 낙화암으로 내려갔다. 바위의 빼어남이 높은 절벽에서 보는 것보다 수십, 수백 보였다.’ 그러니까 대부분 높은 곳에 가서 보면 더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낙화암은 배를 타고 가서 봐야지만 보입니다. ‘기괴한 형상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이때 진달래가 막 지고 철쭉꽃이 어지럽게 피어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바람이 불어와 낙화암 꽃에 부딪혀 뱃머리에 둥둥 떠내려간다.’ 그니까 낙화암 봄에 가야 되는 것 같아요. 그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낙화암 분위기하고 맞습니다. 그래서 ‘홍춘경’이라는 사람이 시에서 보면 아주 재미난 표현을 했죠. ‘낙화암 바위 위에 꽃은 아직 남아 있으니 당시에 비바람조차도 다 떨어뜨리지 못했나 보다.’ 이 구절을 꼭 지나가는 사람들이 읊조리고 지나갔다고 되어 있죠. 재미난 건 보면 매번 관리들이 바로 낙화암 밑에서 뱃놀이할 때 승려들을 시켜서 낙화암 꼭대기에 올라가 횃불을 묶어서 강으로 던지게 하는데 불빛이 허공에서부터 훨훨 날아 내려와 마치 꽃잎 모습으로 떨어진다.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볼 축제의 아이템이겠죠. 지금 진주에 유등놀이하는 것이나 또 하회마을 부용대에도 비슷하게 하죠. 사실 여기에도 밤에 적당한 크기의 꽃 모양의 등불을 떨어뜨리면 그것이 또 아주 장관이 되겠죠. 예전 사람들도 이렇게 놀았던 거죠. 마침 낮인데다가 승려들한테 너무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좀 착한 사람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대로 승려들을 굉장히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러니까 산을 가게 되면 기본적으로 음식 대야지, 가마 메야 되지. 그래서 금강산 승려들이 풍속이 가장 사나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마를 메고 어디, 어디에 가자고 그러면 제일 경치 좋은데 가자고 하면 승려들이 비슷한 데 갖다 놓고 여기가 거기라고 해서 거기에 백탑동이라고 하는 금강산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바위가 탑 모양으로 생긴, 탑이 한 100개 정도 늘어서 있는 계곡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금강산은 가봤습니다만 제가 갔을 때는 눈이 너무 많이 와 가지고 온천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가게 되면 백탑동이 최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승려들이 거기까지 가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탑 모양 바위 몇 개 있는 비슷한 데 그냥 데려다 놓고 와 버립니다. 그래서 실제 조선시대 문인 중에 진짜 백탑동을 본 사람이 몇 명이겠느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보면 바위, 폭포 중에서 와폭(臥瀑)이 있습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45도로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와폭이 있는데 꼭 거기를 가면 ‘발연폭포'라고 하는 곳인데 양반 사대부들이 승려를 시켜서 거기에 물 썰매를 타게 시킵니다. 그럼 승려들이 발가벗고 위에서부터 물 썰매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을 구경거리로 삼습니다. 그런데 물이 조금 적으면 안전한데, 늘 물이 적을 수는 없고 홍수가 나서 물이 콸콸 내려오는데도 아주 무자비한 양반들은 무조건 중들 시켜서 타라고 해서 목숨을 잃는 그런 예도 있었다고 하죠.

‘개울을 따라 10리 되는 곳에 멀리 바위 언덕 같은 것이 보였다. 물이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는데 바위가 있어서 자온대라고 한다. 높이가 낙화암에 견줄 정도인데 위에 10여 인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의자왕 때 왕이 장차 이곳에 오르려 할 때 바위가 갑자기 저절로 따뜻해졌다.’ 그래서 자온이 ’스스로 자(自), 자, ‘따뜻할 온(溫)’자. ‘그리고 왕이 가고 나면 다시 그 바위가 따뜻해졌다.’ 그거를 본 신혼이 이야기를 하죠. ‘이거는 간신이 장난친 거다. 저절로 바위가 따뜻해질 리가 있는가. 그래서 간신이 왕이 놀러 나온다고 하면 재빨리 가서 바위 밑에 숯을 피워서 바위를 따뜻하게 해서 해놓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죠. 여기 나오는 것처럼 ’스스로 자(自), 자, ‘따뜻할 온(溫)’자. 바로 낙화암 건너편에 있습니다. 왕흥사라고 하는 곳에 예불 드리러 갈 때 했는데 그 바위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돌석이라고 되어 있는데 온돌 바위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숯을 밑에 피워서 온돌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이 온돌이 중국에는 온돌이었고, 우리나라에만 온돌이 있고 한데. 온돌에 대한 것도 우리가 좀 오해를 하고 있어요. 어느 집에나 다 온돌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온돌이 만들어진 것은 오래 되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집에 보급된 것은 굉장히 늦어서 한 18세기 중엽 정도 가야 되는 것 같아요.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집에서 방과 마루의 비율이 방이 1이라면 마루가 2였는데 18세기 무렵 되면 거꾸로 방이 2, 마루가 1이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사적 공간 개념이 생긴 것 같아요. 방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온돌입니다. 그래서 18세기 무렵까지도 글을 보면 연세 많은 분들이 기거하는 곳에만 온돌이 있지, 나머지는 다 온돌이 없습니다. 제주도 사는 분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어릴 때 난방 하는 집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죠. 그러니까 온돌도 대궐에나 이런 데에만 사실은 온돌이 있었습니다. 지금 점심을 일부러 안 먹는 사람은 있겠지만 별 일 없으면 점심을 다 먹죠. 점심 다 먹은 것 같은데 18세기 이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 기록을 보면 어떠냐 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한 40리 가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40~50리 가서 저녁을 먹었다. 끝입니다. 점심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영편?이라고 하는 18세기 글을 보면 아주 개탄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사치한지 점심을 다 먹는다, 그렇게 합니다. 점심도 그때 처음 일반화되는 겁니다.

이동표는 역시 자운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운대를 바라보면서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자운대는 높이가 수십 길인데 강을 면한 바위가 특이하게 생겼다. 간신이 바위 곁에 집을 지어놓고 가장 총애를 받았다. 궁궐에 연줄을 두어 왕이 이 바위에 노닐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면 먼저 숯불로 바위를 데우고 그 위에 자리를 깔았다. 왕이 종일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온기가 온돌방 같아서 마침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게 바로 자운대라는 거죠. 바위 곁에 해창(海倉), ‘바다 창고’라는 뜻입니다. ‘주민이 근 수십 호 정도 된다. 비가 심하게 뿌려 배에서 내려 올라가볼 수가 없었다. 바위틈에 배를 매어놓고 실컷 구경했다. 그 아래가 대왕포다. 만경창파가 넘실거리고 큰 들판이 아스라한데 강 언덕에는 고목과 푸른 숲이 많다. 대왕포 역시 백제 왕이 놀던 곳인데 시골 사람들 말이 논밭 사이에 지금도 종이나 창, 이런 것이 나오더라.’ 18세기, 17세기 무렵까지는 꽤 유물이 나왔던 것 같죠. 역사책에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고 하는 안정복의 고려 역사를 기록한 책에 보면 ‘왕위에 오른 지 날이 오래 되자 즐거움에 탐닉해서 군신과 함께 사자하의 북포에 놀이를 가서 연회를 베풀었다. 양쪽 언덕은 기암괴석이 뒤엉켜 있고 그 사이에 기화이초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왕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극에 달하면 비파를 타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따라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대왕포라고 했다. 왕궁에 여러 후궁들이 대왕포의 암석 위로 도망가 떨어져 죽으니 낙화암이라고 했다.’ ?동사강목?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지금 대왕포는, 이걸 보면 대왕포는 바로 낙화암 앞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지명을 보면 대왕포가 훨씬 더 하류 지역에 있습니다. 지도에도 그렇게, 조선시대 지도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대왕포는 낙화암 앞에 있는 포구가 낙화암인데 후대에 대왕포의 위치가 옮겨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다음에 백제의 유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는 조선시대 때 ‘백강 이경여’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집안은 ‘전주이씨’인데 학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집안이기도 합니다. 이 집안은 원래 송시열, 이런 사람들하고 함께 서인(西人)이었는데 그 이후에 당파가 갈라져서 노론(老論)은 조금 수구적인 계열이고 소론(少論)은 젊은 사람들이 개혁을 하려고 했던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갈라졌는데 이 집안은 소론 쪽으로 갔던 집안이고 안동김씨와 함께 전주이씨 이 집안이 조선시대에 학자들이 가장 많이 나온 두 집안 중에 하나입니다. 이경여의 아우가 이경석이라는 분이 있고, 이경석과 송시열이 아주 사이가 나빠져서 노소분기(老少分岐)가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후손들 중에 실학자들이 대거 나오는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썼던 이영익이라든가 이충익, 이긍익 이런 사람들. 또 서예사에서 유명한 이광사. 그리고 시인으로 이름난 이광여. 또 거기에 이진금 해서 ‘팔광육진(八匡六眞)’이라고 해서 14명이 사촌정도 되는 14명이 다 요즘으로 치면 고시에 합격되는 엄청난 집안입니다. 그러다가 이 집안이 영조 즉위 이후에 정치에서 완전히 밀려나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서 대부분 유배지에서 죽게 되고. 그래서 그 후손들이 강화도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조용히 학문을 익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시원이라는 분이 나와서 그때 벼슬을 하면서 강화유수로 있었는데 그때 바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그때 강화도 지키다가 패전하게 되자 자폭해서 책임을 진 그런 분들도 나오는 집안입니다. 이 집안의 중요한 유적 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바로 그 위치가 ‘뜰 부(浮)’자가 있는 부산이라는 곳인데 자온대, 그리고 옆에 수북정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란사하고 건너편에 있습니다. 이곳도 원래 부산, 여기도 의자왕. 그러니까 여기에 경치 좋고 놀 만한 데는 다 의자왕이 놀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걸 보면 의자왕 전에는 왕이 없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죠. 물론 역사 기록에 보면 의자왕이 젊은 시절에는 굉장히 정치를 잘해서 신하들이 겁을 먹고 그렇게 했다고 하죠. 그런데 여기에 부산사라는 절이 있어서 낙화암에 못지않지만 실제 지금도 여기는 별로 찾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전주이씨 이 집안이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 손자가 ‘이이명’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바로 당쟁이 극에 달할 때 이른바 이 집안은 이때까지 노론입니다. 노론 사대신이라고 해서 노론의 핵심 집안입니다. 그래서 이 집안에서 만든 집 이름이 ‘청은당’ 맑은 은자의 삶을 지향하는 그런 겁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 할아버지 이경여가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해서 젊은 시절 한강 상류를 오가면서 살다가 1629년 병자호란 일어나기 전에 이곳에 거처하면서 호서의 빼어남을 사랑하고 이곳을 노년에 거주지로 삼았다.’ 그래서 조정에 계신 50년 동안 이곳에 주로 머물렀고 특히 1637년, 바로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의 세상이 된 때부터는 아예 이곳에만 계속 살았다. ‘백제가 망한 이래로 천여 년 동안 나그네들이 매일 이곳을 지나지만 여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 이경여 공은 바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딱 보고 즐거워해서 그 다음 관찰사에서 물러난 후에 바로 여기에 집을 경영했다. 청은당은 세 칸인데 평이한 제도다. 그런데 하인들이 간수를 못해서 무너졌다가 바로 내가 중수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청은당 집이 무너지고 나중에 부산서원이라고 하는 곳이 들어섰습니다. 지금도 이곳이 있는데 상당히 퇴락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재미난 것은 우암 송시열과 닮은꼴의 공간입니다. 바로 속리산 화양동에 가면 우암 송시열이 대명의리(對明義理), 그것을 구현한 공간인데 이곳도 똑같은 공간입니다. 환문암, 대재각 이런 집을 지었는데 대재각, 환문암 이런 것은 그 밑에 보면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 지극한 원통함이 마음에 있다.’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바로 북벌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가 된 게 저겁니다. 우리가 청을, 청과의 전쟁을 해야 되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효종이 일찍 죽으면서 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런 뜻을 기리는 공간으로 여기에 삼았습니다. 그 아들, 아까 글을 썼던 이이명이라는 분이 정치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학자로서 새롭게 조명을 해야 될 분입니다. 아까 온돌 이야기 했습니다만 대궐에 온돌을 올바른 체계로 만든 사람이 바로 이경여라고 하는 분이고, 이이명이라는 분이고 그 밑에 이희지, 이기지, ‘갈 지(之)’자 돌림의 ‘지’자가 있는데 이분들이 나중에 다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이분들이 젊은 시절에는 중국과 일본, 이런 것을 국제적인 감각을 갖추고 굉장히 중요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대재각, 환문암 이런 데는 보면 운한대 이런 것이 했는데 다 주자의 정신, 주자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그런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김흥국이라는 사람은 바로 인목대비 폐비 후에 물 북쪽에 있는 정자라는 뜻에서 수북정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17세기 초반 문인들의 문집에 굉장히 자주 나오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공간을 아는 사람은 아마 전국에 0.1%도 안 될 정도로 부여에 사시는 분들도 거의 모르는, 잊힌 공간입니다.

다시 백제로 돌아가면 조룡대, 천정대 두 곳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혼이라는 사람이 글을 쓰면서 의심을 품게 됩니다. ‘조룡대는 고란사 상류 쪽에 있다. 높이가 4~5자 정도의 얕은 물가에 바위가 있다. 그 위에 용을 잡아당긴 흔적과 소정방의 채찍 자국도 있고, 도끼 자국도 있다. 그래서 소정방이 용을 잡았던 곳이다라고 해서 조룡대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전하는 말로는 소정방이 왔을 때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백제를 수호하는 신룡이 장난을 부려서 못 가게 되어서 백마, 흰 말을 미끼로 삼아서 용을 잡았다. 그곳이 마한이라는 곳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백마강을 배로 노닐면서 반드시 보고 가고. 그런데 원래 이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신혼이나 이런 사람들이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고란사가 있고 낙화암이 있고 그 위에 부소산성이 있고 거기에 백제의 서울이 있는데 그 앞에 백마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당나라 군사가 서해에서 오려면 백마강을 건너 가지고 부여로 들어가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룡대는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면 백마강을 건너서 있다는 겁니다. 강을 다 건너 놓고 왜 갑자기 용을 잡느냐는 거죠. 용을 잡으려면 강을 건너기 전에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조룡대가 저기에 있으면 안 되고 강 건너기 전, 서쪽에 있어야 되는데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신혼이라는 사람은 유추를 이렇게 합니다. 원래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던 것은 부여의 훨씬 서남쪽인데 거기에 조룡대가 있었다. 그런데 놀러온 사람들이 자꾸 조룡대 가자고 하니까 너무 머니까 그냥 그 바로 밑에 있는 바위 하나 있으니까 여기가 조룡대다, 이렇게 신혼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신혼이 이렇게 하죠. 소정방이 아니라 김유신이 용과 싸운 곳이다. 그런 전설도 있습니다. 김유신이 용과 혈전을 벌였다. 이것도 이상하죠? 김유신이 왔으면 동쪽에서 왔을 테니까 뒤로 쳐들어가면 되죠. 그런데 이것을 후대 신이한 일로 만들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김유신 발자국을 여기에 타놓은 것이다. 진짜 백마강은 바로 부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여에서 훨씬 하류 쪽에 있는 것이고. 그리고 조룡대도 그곳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신혼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0리 되는 곳에 배를 끌어 강 왼편 호암산 아래에 정박했다. 강 왼편이라 한 곳은 북쪽에서 강물이 흘러내리는 쪽에서 보면 오른편이 된다. 바위 형태가 병풍처럼 되어 있어서 기이하다. 그런데 그것이 자운대하고 비슷하다. 백제 때 재상(宰相)을 임명할 때 이름이 든 함을 바위 위에 올려놓으면 잠시 후 도장 흔적이 임명할 만한 사람 위에 찍힌다고 해서 천정대다.’ 했을 때 ‘천정’은 뭐냐 하면 ‘하늘 천(天)’자, ‘정치 정(政)’자입니다. 하늘이 정치하는 곳. 여기는 뭐냐 하면 바로 고란사 건너편에 바위가 있는데 그 왕이 그 밑에 와 가지고 기도를 하면 그 천정대 바위 위에 글자가 저절로 쫙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이번에 재상으로 임명하라. 그 글씨가 딱 나타나는 거죠.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도 또 이야기를 하죠. 바로 ‘천정대’라고 하는 곳이 있는 것은 호암산, 여기에 가면 바위에 범 발자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명은 이렇게 합니다. 백제시대에 하늘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할 때는 그 사람 이름을 써서 천정대 위에 올려놓고 군신이 조복(朝服) 차림에 호를 쥐고 북쪽 강 안에 모래톱 위에 줄지어 엎드리고 있으면 하늘이 그 이름 위에 낙점을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정승을 한다. 이곡의 글입니다.

재미난 것은 고려시대 때 글하고 조선시대 글이 확 달라집니다. 이곡은 백제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하늘이 점지를 했는가? 그리고 아까 자운대. 왜 저절로 바위가 따뜻해졌는가. 아주 초기 전설을, 기록을 찾아보면 다 기이한 현상으로 설명을 해 놓습니다. 그 기이한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백제왕의 권능, 백제왕이 이렇게 신성하기 때문에 백제왕이 앉으면 바위가 따뜻해지고. 백제왕이 이름을 올려놓으면 하늘이 점지를 한다. 결국 백제라는 나라는 하늘이 점지하고 하늘이 도와주고. 그리고 백마강 신룡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백제를 보호해 주는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이다. 바로 신과 하늘이 도와주는 나라가 백제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데 조선시대에 가보면 어떻게 하든지 백제는 엉망인 나라가 돼야 됩니다. 신의 나라하고 하늘이 도운 나라가 아니라 모든 것이 백제 의자왕, 나라를 망친 망국의 임금. 의자왕을 욕하는 쪽으로 전설 자체가 변화를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자운대 같은 경우도 간신이 숯을 피워서 따뜻하게 한 것이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천정대도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 백제는 하늘이 점지해 준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가게 되는 거죠.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런 것에서도 여전히 보면 조선 초이기 때문에 이런 데에 보면 아예 임금과 신하가 함께 제기하고 누구를 재상으로 할까요? 올려놓으면 바로 하느님이 금자를 가지고 낙점을 딱 했다고 해서 조선 초기까지는 이런 것이 민간에서 믿어지다가 이제 백제가 나쁜 나라가 되면서부터 점점 나쁜 쪽으로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 다음 글을 보면 ‘강은 천정대 아래에서 휘돌아 아래로 흘러 기벌포를 지나는데 소정방 장군이 주둔한 곳이 바로 기벌포이다. 강물이 빙 돌아 조룡대를 지나 고란사 앞에 이르면 물이 고여 깊은 소가 되고 다시 남으로 낙화암 아래를 지난다. 서남으로 부산사에 이르게 되고 다시 동남으로 흘러 백제 고성, 부소산성을 지나 빙 돌아 흘러간다. 부소사는 강물이 빙글 돌아 흐르는 가운데 섬처럼 생겼다. 고란사는 부소산 위 낙화암 북쪽에 있다. 북으로 천정대와 통하는데 천정대는..’ 여기도 이제 간신으로 바뀌어 버리죠. ‘의자왕 때 간신이 일을 꾸며 왕의 배가 대 아래에 이르는 것을 보면 먼저 자기가 정목(政目)을 만들어서 아무개를 아무개로 임명한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사람을 시켜 신선처럼 기이한 갓과 복장을 하고 대 위에 앉아 가지고 종이를 잡고 정목을.. 그러니까 임용, 누구를 임용할지 명단을 베껴나가는데 왕이 오는 것을 보면 딱 숨어버렸다.’ 그런데 미리 가 있던 사람 보면 그 위에 신선들이 와 가지고 정말 정치를 논의하는 것처럼 연출을 했다. 그래서 그게 천정대이다. 그러니까 백제와 조선 초만 하더라도 이것은 신의 나라, 하늘의 뜻을 가진 나라인데 점점 이와 같이 인간의 간사함이 들어가는 쪽, 이렇게 하는 거죠. 대략 이야기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자, 그러면 강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