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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슬픔이 수원화성의 환호로

남한산성과 화성, 사실 비교할 수 있는.. 둘 다 세계문화유산이죠? 남한산성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됐고 그 이전에 처음 1997년도에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됐는데 성곽 중에서는 지금 유이하게 지금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그런 성곽이죠. 화성은 이제 우리나라 성의 총결판으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것이고 남한산성은 산성마을, 여기에 포인트를 두고 이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거죠. 그리고 남한산성은 특징이 전쟁을 한번 겪었다는 특징이 있고 화성은 전쟁이 없었어요. 화성은 전쟁이 한 번도 없었고 남한산성은 우리가 가장 치욕적인 병자호란을 겪은 이런 곳이죠. 그래서 오늘은 남한산성과 화성, 화성 중심으로 하겠는데 남한산성도 한번 쭉 알아보는 이런 강의가 되겠습니다.

우리나라 외세와의 싸움이 고조선부터인데 전쟁을 하려면 전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게 뭘까요? 그 나라의 국력. 국력이 굉장히 중요한데 부(富)죠, 부.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요? 전쟁의 요소로서. 무기가 있어야죠. 무기가 굉장히 중요하죠, 무기. 그렇죠? 중요한 것은 또 이 단결력이에요, 단결력. 단결심이 없으면 이게 같이 뭉치지 않으면 적을 방어하는데 내분이 일어나거나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의 고구려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고조선도 끝에 내분으로 전부 전쟁에 지는데.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네? 뭐요? 병력? 이제 그게 다 여기에 국력에 병력도 들어가고 또? 이것도 있죠? 장수의 전략, 전술. 전략, 전술이 굉장히 중요하죠.

이거를 전부, 그러니까 적의 의미도 알고 얘네들의 속셈이 뭐냐. 속셈, 속셈이 뭐냐. 이걸 알아야 전략, 전술을 세우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전략전술을 세우려면 뭐가 중요할 것 같아요? 적을 알아야 된다는 것이 뭐죠? 정보예요, 정보.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또 옛날 말로? 세작(細作)? 아, 세작이 뭐죠? 아, 그렇죠. 간첩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이게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그러잖아요, 옛날에. 지피지기, 이거 간첩도 여기에 들어가는 거죠. 적을 알아야 전략과 전술을 세워서 이게 무슨 의도로 얘네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하러 오는지. 근데 이러한 것들이 다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저는 봐요. 이 이외에 더 있겠죠? 더 있을 수 있는데 날씨도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동안. 제갈량은 뭐 하늘에 비가 올 거다, 바람 불 거다. 이런 것까지 다 알고 전쟁도 했고 일본, 원나라 때 일본을 쳐들어갔는데 걔네들도 태풍이 불었어. 그래서 졌어요. 전부 그때 이런 요인들이 있는데 쭉 한번 훑어보겠어요.

우리나라 전쟁에 보면 외세와의 싸움이 가장 큰 게 고조선이 근 3천 년 가까이 오다가 B.C.108년에 한나라의 왕검성전투에서 지게 되죠, 이 때. 그래서 고조선이 멸망을 하는데 이렇게 돼서 북쪽에는 고구려, 부여, 옥저 이런 것들이 생기고 남쪽에는 소위 진국, 진국이 발전해서 삼한으로 가는 이런 식으로 나라가 갈라지는데 갈라지면서 나중에 결국은 삼국시대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삼국이 연립을 하면서 이때 되면 거의 전쟁이에요, 정복 전쟁. 그래서 우리나라의 ‘성’이라는 것이, ‘성’. 옛날에 고구려어로 ‘홀(忽)’이에요, 홀. 홀이 뭐냐 하면 고구려어인데 이게 뭐냐 하면 성을 뜻하기도 하고 또는 고을을 뜻해요, 고을. 홀. 이건 뭐하면 성에서 평지에서 살다가 산성, 성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성에서 살았어, 전쟁 시기에는 거의. 뭐 3천 명, 대표적인 게 소위 남한산성이죠? 남한산성이 그 안에 한 5천 명 이상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이 고구려어로 홀, 홀이라는 것은 성과 고을이라는 이런 뜻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이 때 고구려, 대표적인 게 소위 수나라가 들어오는데 이때 살수대첩(薩水大捷), 이게 전략전술이죠. 물로다가 전부 이기고 하는데 고구려가 이때 그래서 수나라가 쳐들어와서 여기에서 전쟁에 지면서 그냥 멸망을 해 버렸어요, 나라 자체가. 무리하게 쳐들어온 거죠.

그 다음에 이제 당과의 전쟁이 고구려는 이게 뭐냐 하면 특히 이 쪽, 북쪽을 중국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큰 나라들과 계속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어요. 백제는, 백제는 신라하고의 전쟁이 굉장히 많았고 그리고 고구려하고도 싸움이 많았고. 신라가 가장 굉장히 복잡한 나라예요. 이 나라는 뭐냐 하면 고구려의 침략도 받고, 이쪽 말갈족. 특히 외구의 침입이 굉장히 많았어요, 삼국시대에. 그래서 신라가 보면 성 쌓는 기술도 상당히 발달돼 있고 특히 고구려는 성의, 성곽의 나라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고구려. 근데 당과의 수없는 전쟁을 하다가 결국은 신라와 당이 합쳐서 고구려가 멸망을 하는데 그 이후에 고려 때도 거란족이 또 침입을 하죠? 거란족이 침입해서 이 때 서희의 외교로 이걸 이겼다고 그러고. 2차 침입이 있는데 이때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이건 전략과 전술로써 이긴 대표적인 전쟁이고 그 이후에 몽골군이 쳐들어오는데 원나라에 쳐들어와요.

그 이후에 이걸 보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다 통일한 다음에 우리나라에서 조선을 쳐들어온다는 얘기가 있어서 보내죠, 일본에. 일본에 보내서 정사(正使)가 황인길, 부사는 김성일. 서인, 동인으로 마침 또 당파가 달라요. 그래서 와서 뭐라고 그랬어요? 황인길은 쳐들어온다, 김성일은 쳐들어오지 않는다. 이게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얘기를 했어요. 완전히 다른. 동인, 서인으로 나뉜 그것도 있지만 어쨌든 그래서 침략을 하는데 대규모 침략, 이때는 뭐예요? 이때는 무기가 조총, 조총이라는 이 무기가 처음.. 거기에 완전히 당한 거예요, 조총에. 이게 뭐냐 하면 일본은 벌써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네덜란드 이쪽하고 교류를 하면서 조총을, 이 조총이 상당히 중요한 무기로써 처음에 풍비박산, 초전에. 나중에 이제 의병으로 이게 이기게 되는데 어쨌든 이때 벌써 평양에 도착해서 평양성이 함락이 돼요. 그런데 명나라가 파병을 해 가지고 협동작전으로 평양성 탈환, 이 작전이 굉장했던 전쟁이에요. 평양성 전투 때 식량이 떨어져서 사람 고기를 먹었다라는 실록에 그런 기록까지 지금 있어요. 상당한 전투인데 이게 어쨌든 이때 이겨요.

그리고 의병들, 특히 우리나라가 이겼던 것이 주로 산성을 의지해서 산성에서 주로 이기는데 대표적인 승리한 곳이 수원의 독산성. 이번에 독산성은 답사, 이게 아마 답사도 같이 가시나요, 전부? 제가 수원은 그때 답사도 제가 안내를 할 건데 수원에 ‘독산성’이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냐면 평지에 살다가 평지성이 있어요, 평지성. 그러다가 전쟁이 나면 청야, 청야수성(淸野守成) 또는 견벽수성(堅璧守成)해 가지고 이게 청야, 전부 불 지르고 짊어지고 산성으로 가요, 산성으로. 이 산성으로 가서 농성, 이때는 ‘농성(籠城)’이라고 그래요, 농성. 데모할 때 그 농성이 바로 이 농성이에요. 그래서 얘네들이 지치거나 퇴로를 차단을 해서 보급로를 차단해 가지고 얘네들을 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쟁 방식이 우리나라는 산, 왜냐하면 산성의 나라예요. 산이 70% 이상이기 때문에 산성의 나라가 이게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전쟁 방식이에요. 그래서 독산성에 가면 독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이때 이겨서 이때 이긴 걸 바탕으로 해서 그 다음에 행주대첩. 행주대첩이 굉장히 중요한, 바로 한양 옆에 있는 행주대첩에서 이기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됐던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와 수원의 독산성전투예요. 그런데 이제 임진왜란 이후에 정유재란으로 또 오죠. 그래서 보면 이때도 판옥선(板屋船)이 굉장히 중요한 배예요. 해전에서 항상 이기는 게 판옥선이라는 것은 노 젓는 그게 밑에 있고, 2층에 싸우는 병사들이 2층에 있는. 2층으로 돼 있어서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일본 배와 부딪치면 일본 배가 판판이 그냥 깨지는 굉장히 중요한 무기 중에 하나,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판옥선이. 거북선도 중요했고. 그래서 이게 거북선, 총통(銃筒). 이렇게 해서 유격전으로 해서 이 전쟁이 끝나죠. 이 7년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는 거의 뭐, 논밭이 전부 반 이상이 다 폐허가 됐어요. 그래서 이 임진왜란, 이 부분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뒤집어엎은 전쟁이에요. 사회가 변하는, 새롭게.

그 다음에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는데 벌써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을 세워 가지고 누르하치가, 그런데 이 광해군 때는 명나라에서 도와달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강홍립 장군이 13,000명을 지원해 가지고 지원하는데 광해군이 얘기를 하죠. 하다가 질 것 같으면 항복을 해라. 이게 외교술이 바로 저기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인조하고. 광해군은 이걸 보니까 후금이 이길 것 같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항복을 해도 된다라는 밀약을 하고 가서 근데 졌어요, 이때. 명나라가 져 가지고 강홍립이 같이 이때 강홍립이 항복을 하죠, 조선군이. 그러니까 이러한 국제적 정세 속에서 청나라가 지금 서서히 부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청나라가 명을 견제하기 위해서 명과 우리나라 조선이 굉장히 가까우니까 이쪽 후방을 저기하기 위해서 계속 우리나라한테 형제의 맹약(盟約)을 맺자. 이런 식으로 오는데 이거를 거부를 하죠. 이때 이것을 어떻게 했어야 되나요? 이게.. 실력이 없어. 없는데 이게 계속 싸우자고 하는 거죠, 실력은 없으면서. 이걸 뭐라고 그래요? 외화내빈(外華內貧), 외화내빈 그렇죠? 허장성세(虛張聲勢). 실력이 있어야지, 실력이. 그냥 무조건 의지만 가지고 싸움 할 수 없는 건데 이때 하여튼 이렇게.. 그래서 쳐내려 와요. 강홍립을 길잡이로 해서.

그리고 바로 중요한 것이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에 이괄을 소외시키면서 평안도 절도사로 보내면서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잖아. 그래서 평안도 군대가 다 박살이 난 상태. 이런 상태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그냥 신속하게 한양을 점령하는 이런.. 그래서 한양을 점령하는데 인조는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려다가 강화도는 정비, 왕비니 이런 몇몇 저기만 들어가고 자기는 그리로 들어가다 실패를 했어요. 그런데 청나라가 그거를 간파를 한 거예요.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거기 퇴로를 막았어. 그래서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거예요. 남한산성에서도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몰래 빠져나와서 가려다가 실패했어요. 겨울이라 눈도 미끄럽고 막 날씨도 춥고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갇혀버렸어요, 여기 남한산성에. 산성이라는 것이 뭐가 중요하죠? 산성이 꼭 필요한 게 뭘까요? 식량, 물, 또? 밥 해 먹으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땔감, 그렇죠. 땔감. 땔감 한 권 드려야 되겠다. 산성은 식량, 물.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독산성, 수원에 있는 독산성을 뭐라고 그래요? ‘세마대(洗馬臺)’라고 그래요, 세마대. ‘세수할 세(洗)’자에 ‘마’, ‘말 마(馬)’자. 왜냐하면 왜병과 싸우는데 물이 많은 것으로 착각하기 위해서 말을 쌀을 부어 가지고 멀리에서 보면 이게 물. 물로 목욕을 시켰다, 쌀로. 그래서 세마대라고 그래요, 거기를 일명. 뭐냐 하면 물이 풍부해야 돼, 물이.

그리고 여기가 뭐냐 하면 독산성은 이 ‘독’자가 뭐냐 하면 ‘대머리 독(禿)’이에요, 대머리. 대머리 독자. 왜 대머리 독자예요? 뭐냐 하면 산성은 안에는 나무가 많아 보이지만 사주 경계를 위해서 안에, 바깥에 나무가 하나도 없어요. 이게 대머리 독자, 독산성. 독산성이에요, 대머리. 그리고 산성의 필수조건은 적이 막 들어올 때, 쳐들어올 때 숨을 곳이 없어야 돼요. 기습전을 하기 위해서 막 오다가 탁 숨는 이게 없어야, 평편해야 돼요. 그게 아주 필수적인 게 그런 조건을 가져야 되는 것이 산성인데, 어쨌든 이게, 이런 조건 속에서 남한산성을 포위하죠? 이때 30만이, 30만이 탄천 그쪽에서 하는데 12월에 다시 들어와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때 그래서 침략, 12월에 침략을 하는데 왕비 등은 강화도로 갔고 12월 14일 인조는 강화도 피신에 실패를 했어요. 그래서 소현세자, 이런 사람들이 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서 남한산성 포위를 했어요. 여기에서 승리한 전투가 수원의 광교산, 김준용 장군의 광교산 전투가 있어. 승리한 전투도 있는데 어쨌든 광교산, 수원에 있는 광교산에서 보면 남한산성이 다 보이는 이런..

그러다가 이때 13,000명, 성내는. 그리고 50일 정도 유지할 식량이 있었는데 이때 말들이 많죠. 어떤 주화파(主和派), 척화파(斥和派). 주전론, 척화파 막 해서 서로 논쟁들을 해.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래서 여기 남한산성을 보면 어떻게 돼 있냐면 이쪽이 지금 수어장대(守禦將臺), 장대가 이쪽 북쪽이에요. 북쪽이고, 잘 안 보이네? 북문, 이쪽에 수어장대. 장대가 뭐냐 하면 장수가 지휘하는 지휘소를 장대라고 그래요, 장대. 수어장대, 수어청. 수어청의 장수가 지휘하는 곳을 수어장대. 수원에 가시면 화성장대(華城將臺). 화성장대는 정조대왕이 거기에서 직접 지휘. 그리고 정조대왕이 이때 임금이 되고 3년 만에 여기를 가요. 여기를 가서 군사훈련을 해. 수어장대에서 직접 훈련을 해요, 군사 훈련을. 여기를 왜 자주들 가냐 하면 영릉을 가는 거예요, 영릉. 북벌을 한다고 영릉. 영릉에 누구죠? 효종의 능인데 효종의 유지를 이어받는다고 해서 숙종, 영조, 정조가 여기를.. 그래서 어디로 가냐 하면 광나루 있죠? 광나루해서 지나서 남한산성에서 자고. 자고 그 다음 날 여주로 가서 참배를 하고 또 와서 여기에서 모든.. 그래서 여기가 항상 뭐가 생기는 거예요?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행궁(行宮).

지금 대표적인 행궁이 피난 가는 행궁으로써 위급할 시에 가는 행궁이 바로 남한산성에 있는 행궁. 거기는 그래서 좌전(左殿), 신주(神主), 이런 걸 다 모시기 위한 그런 시설들이 다 있는 거고. 아버지 묘 참배하러 가는 행궁이 지금 화성행궁. 수원에 있는 화성행궁. 또 행궁이 뭐가 있겠어요? 이거 외에. 그렇죠. 병 치료하거나 눈병이나 피부병을 치료하러 가는 온양행궁(溫陽行宮). 그리고 태조도 이성계도 저쪽 고향, 거기에 또 행궁이 있었어요. 행궁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특히 대표적인 것은 전쟁에 대비한 행궁이 있고 행궁은 북한산성에도 있었어요. 북한산성. 그리고 이 때 보면 남한산성을 옛날에 선조나 인조 이 양반들은 전부 백제 온조(溫祚)가 만들었다고 인식을 했어요, 전부. 근데 지금 파 보니까, 발굴을 해 보니까 백제의 유적이 안 나와. 안 나와요, 지금. 그러니까 뭐로 나와요? 책에 썼는데 신라 때 주장성에 신라의 건물 터만 나오고 우리가 아직 발견을 못한 건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으나 어쨌든 옛날 분들은 다, 왕들은 다 여기가 백제의 성이라고 인식들을 하고 있었어요, 전부. 그래서 꿈에도 나타나고. 온조왕이 나타나서 그래서 숭렬전도 만들고 그러는데 어쨌든 이게 옛날부터 계속 백제의 성으로. 그러니까 어떻게 인식했냐면 백제의 도읍이라고 인식을 했어요. 남한산성, 북한산성도. 북한산성도 백제의 도읍지라고 지금 얘기를 하는데 백제라고 그러면 지금 어디로 결론이 나고 있죠? 어디요? 위례. 위례가 어디예요? 풍납동. 풍납동으로 지금.. 춘궁리 남한산성 쪽으로 추정을 했다가 지금 발굴해 보니까 풍납동 거기가 지금 왕궁 터로 일단 얘기가 지금 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는 보면 이 연주봉, 그리고 이게 본 원성이에요, 원성. 원성인데 이게 나중에 여기 숙종 때 이런 때 보면 벌봉, 이게 함봉. 여기까지 이제 성곽을 짓고 다 하는데 여기 이제 승영사찰, 절들도 만들고 여러 가지. 그리고 여기 행궁이 있으면서 행궁 바깥에 관아지(官衙址)가 전부 또 만들어져요. 남아 있는 게 연무관, 그런 것들이 다 관아지들인데 이 때 문제가 뭐냐 하면 병자호란 때 여기, 여기. 여기 산이 또 하나 있어요. 이게 한 500m가 좀 넘어. 여기에서 여기가, 이 행궁이 보여요.

남한산성의 단점은 여기를 점령하면 다 훤히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무기, 이 무기가 이 당시에 무슨 무기가 무서웠겠어요? 포, 무슨 포? 화포 중에 무슨 포? 쏘는 거, 그거. 원나라, 저기 명나라가 청하고 싸울 때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처음에 대패한 전쟁이 홍이포(紅夷砲)예요, 홍이포. 홍이포가 ‘홍이’가 뭐냐. ‘붉을 홍(紅)’자, ‘오랑캐 이(夷)’자. 홍이포, 이게 뭐야? 네덜란드인들이 쏘는 포라고 그래서 홍이포를 만드는데 명나라가 먼저 만들었어, 그거를. 이게 명나라하고 청하고 싸울 때 홍이포가 굉장한.. 한 4km을 날아. 날아가서 성벽을 때리면 다 부서지는 거예요. <안시성>이라는 영화 혹시 보셨어요? 대표적인 고구려 때 대표적인 전투가 안시성전투예요. 고구려와 저쪽하고 싸울 때 보면 당나라하고 싸울 때 안시성에서 3천 명 내지 5천 명이 10만 대군과 싸워서 이기는 거예요, 그게. 엄청난 단결력이죠? 그거는. 근데 그 바로 위에 있는 만주에 가면 백암성이라고 있어요, 백암성. 백암성은 손대음이라는 사람이 항복했어. 이 성곽이 암만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라고 그래도 안에서 문 열어주면 끝이에요. 안시성전투가 아주 유명한 거예요, 이게. 여기도 지금 어떻게 할 건지, 이런 문제인데 여기.. 청나라가 여기 있고 여기 망월봉이라고 그러나요? 낭벽대라는 것이 여기 있는데 여기에서 그냥 행궁으로 지금 막 쏘고, 대포를 쏘는 거야.

근데 우리나라가 이때 대포가 없어. 대포라고 그래요? 불랑기포(佛狼機砲) 정도. 불랑기포라는 것이 이만한 정도인데 홍이포는 엄청 커, 한2m가 넘어요. 이거를 펑펑 쏘니까 행궁, 행궁이 막 기둥이 흔들리고 사람이 맞아서 죽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굉장히 벌벌 떨었다. 이게 실록에 지금 기록이 돼 있는데 어쨌든 이 망월, 망월봉. 근데 지금은 여기 검단산이라고 돼 있어요. 검단산이 이쪽에도 검단산이 높은 산이 있는데 여기도 지금 검단산이라고 그래요, 이 산도. 근데 실록에 보면 남격대의 망월봉에서 포를 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그래서 이게 굉장히 중요한 산이에요. 여기에 근데 남한산성은 단점이 이거예요. 여기를 점령당하면 이리로 그냥 막 포를 쏴대니까 이런 문제점이 있었던 거예요. 이제 옛날 고지도이고, 이것도 뭐 이쪽에 연주대, 연주봉, 여기가 벌봉, 함봉 이런 식으로 지금 돼 있죠. 여기가 옹성(甕城)이에요, 옹성. 남쪽 옹성. 이 옹성이라는 것은 ‘독 옹(甕)’자를 쓰는데 독을 반으로 자른 모양의 성을 옹성이라고 그래요. 옹성은 뭐냐 하면 성곽, 성문. 참 성문이 이렇게, 성문이 있으면 이 성문을 어떻게 그리나? 하여튼 성문이 있으면 여기 이렇게 바깥에 둘러싸는 그 성벽을 옹성이라고 그래요, 옹성. 독 안에 든 쥐. 그러니까 적이 이 성문을 공격하기 전에 여기에서 한 번 더 걸러주고 이 성문을 들어오게끔 하는 것이 옹성인데 여기는 근데 여기를 왜 옹성이라고 그러는지 하여튼 여기 고유명사가 기록에는 옹성으로 돼 있어요. 제1옹성, 제2옹성, 제3옹성.

그런데 여기는 주로 뭐냐 하면 나중에 여기에서 포를, 포를 쏘는 구멍이 있어요. 여기 지금 다른 건데 수원 같은 경우에는 이 장안문이 전부 옹성에 있어요. 문이 있으면 여기 바깥에 숭례문은 옹성이 있나요? 없어요. 동대문은? 네? 있죠. 신설동 방향으로 이렇게 옹성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한 쪽이 터진 옹성. 그래서 편문식 옹성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화성에 가면 장안문, 팔달문에 이렇게 이 앞쪽에 이렇게 되면서 문이 여기 있어요, 여기 가운데. 그래서 이걸 중앙문식 옹성. 중앙문식 옹성. 이래서 옹성이라고 그러는데 하여튼 똑같은 옹성인데 지금 남한산성에는 이 부분을, 이 부분을 지금 옹성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게. 달라요. 옹성의 모양이. 이게 남한산성이 언제 수축(修築)이 되냐면 인조 때. 인조 때 보면 처음에 다시 만들어요, 성곽을. 이게 신라 때 성곽인데 그 이후에 그리고 병자호란이 끝나고 또 그때 수축을 해.

그리고 그 이후에 또 누가 만드느냐면 숙종 때. 숙종 때 이걸 또 성곽, 이 부분이 숙종 때 만들어요. 이쪽 외곽에. 그리고 이후에 또 영조가 여기를 또 해요. 왜냐하면 전부 북벌 의지를 나타내는 거예요, 이게 전부. 그러다가 정조가 임금이 된 지 3년 만에 여기를 먼저 가. 영릉을 먼저 가는데 여기 가서 그 영릉을 갈 때 모습을 보면 광나루에서 뭐를 타고 가요? 한강 건널 때. 네? 배다리? 이때는 배다리 안 놨어. 배다리는 언제 놓느냐면 사도세자 이장할 때. 1789년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배다리 설계해서 그때부터 놓는 거야, 1789년. 이 때는 1778년, 79년 이때예요. 이때 광나루 건널 때는 배가 한 1,000척이 건너가는 거야, 이게. 광나루에서. 건널 때 임금이 타는 그 배를 그래서 뭐라고 그래요? 임금, 임금 대표적인 상징하는 게 뭐예요? 어용(御用). 그렇죠. 용주(龍舟)라고 그래요, 용주. 어주가 아니고 용주. 그래서 임금이 타는 배가 딱 있고 이걸 호위하는 배들이 딱 주위에 있으면서 한강을 전부 건너가는 게 이때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정조 초기에는 배다리를 아직 안 놨어. 이 배다리는 정조가 처음 놓은 게 아니에요, 전부 배다리.

이번에 참 을묘년, 지금 화성 능행차 하는 게 조금 있으면 10월 초에 하는데 서울에서는 뭐를 하죠? 돈암문부터 해 가지고 남대문 거쳐서 배다리 놓는 걸 해요. 가서 시흥행궁에서 하룻밤 자고 또 수원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1789년 사도세자 이장할 때 뚝섬에다가 배다리를 한번 놨고, 뚝섬 쪽. 왜냐? 사도세자의 묘가 시립대학교 그 뒤에 산 배봉산에 초라하게 있었는데 거기에서 이쪽으로 이장하자면 뚝섬에서 이쪽으로 해서 압구정동으로 해서, 청담동으로 해서 과천으로, 남태령 넘어서 과천에서 하룻밤 자고 그래서 수원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이장하는데 처음 그래서 수원 가는 능행차 길이 과천을 통해서 가, 남태령.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 때는 저리로, 안양 쪽. 시흥, 금천으로 가, 금천. 그쪽으로 해서 가는 게 지금 이번에 하는 능행차의 핵심 행사들이에요, 전부. 그래서 이 배다리를 놓고 정조가 이때 갈 때 한 천 개 정도의 배가 건너야 되는데 배다리를 한강이 막히는 거예요, 그러면. 한 며칠 설치하고 철거하고 하는데 한 한 달. 한 달 걸려요, 한 달. 그래서 한 달 동안 한강이 막혀. 그리고 옛날에는 노들섬이 없었어요. 용산에서 노량진 갈 때 막바로 다리를 놓는 거예요. 지금 이게 보가 생겨서 이렇게 물이 많지, 옛날에는 물 없을 때는 넓은 게 아니에요, 한강이.

한강이 또 언제 이게 확 바뀌었을까요? 1925년도 을축년 홍수. 을축년 홍수가 이게 엄청난 홍수예요, 이게. 그래서 수로가 처음에는 지금 롯데에 있는데, 거기 뭐죠? 석촌호수. 그쪽으로 흘렀었어요, 이게 한강이. 을축년 홍수 때 위로 지금 바뀐 거예요, 물길이. 그래서 그 흔적이 석촌호수로 지금 남아있는 거고 거기에 대표적인 장이 뭐였죠? 송파장. 이 송파장이 완전 대파, 완전히 싹 없어졌어, 그냥. 그 송파장 자체가. 1925년 을축년 홍수가 엄청난 홍수였던 거예요, 이게. 그래서 정조가 여기 와서 군사훈련 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이 남한산성은 주장성(晝長城)이라고 해서 신라시대에 처음 쌓았다고 지금 일단 학계에서는 정리가 됐고 이후에 인조가 여기다가 수축을 했고. 그 이후에 숙종 대, 영조 대, 그리고 정조가 이때 지금 보면 성곽에 벽돌로, 벽돌을 여기에 수원화성에서 최초로 사용한 게 아니고 남한산성에서 벽돌로 전부 고쳐요. 그래서 남한산성 가면 이게 지금 언제, 인조 대 건지, 숙종 대 건지, 정조 대 건지 이것을 구분을 해야 되고, 돌이. 이게 다양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수축이 됐기 때문에. 화성도 그래요. 화성도 가시면 정조 시대에 돌이 그냥 남아 있고. 그러다가 일제시대 때 고친 것도 있고. 대대적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가 되고 일제시대 때 거의 다 파괴가 됐는데 이것이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에 다 복원이 돼요. 그래서 거기도 보면 화성을 도실 때 정조 대 벽돌, 그리고 그 이후의 벽돌, 그리고 최초에 1970년대의 벽돌. 이게 전부 달라, 돌도 달라요. 그래서 이런 것을 같이 봐야 의미를 가지고 볼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이제 이번에 남한산성과 화성을 답사하면서 볼 수 있는 거예요.

화성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보면 1762년 임오년에, 임오년. 임오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그래요. 임오화변.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임오년이에요. 사도세자가 죽으면서 사도세자가 죽는 이유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후계자, 소위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이들이 서로 후계자를 누구로 하느냐에 대한 싸움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 성격. 영조의 성격과 이게 대립, 사도세자 이 부분이. 그래서 이러한 속에서 사도세자가 죽는데 그때 사도세자가 27, 아 28. 정조가 11살이에요. 11살이면 죽음을 알 나이예요, 그렇죠? 5살, 6살 때는 잘 몰라요. 옆에 보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5살 된 애들 잘 몰라요, 죽음을. 막 뛰어놀고 그래요. 그런데 11살은 알죠. 초등학생 3학년, 4학년이나 죽음에 대해서 알아요. 이때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정조가. 이 죽음, 아버지 죽는 모습도 봤고. 이것이 이제 평생 가는 건데 근데 영조가 이때 두 가지 처분을 내려요.

이 처분이 굉장히 문제가.. 첫 번째 처분은 절대 네 아버지 사도세자 추존(追尊), 추숭(追崇)을 하지 마라. 그건 뭐예요? 추존, 추숭은 죽은 후에 왕으로 올리는 걸 추존, 추숭. 그리고 신하가 나중에 죽은 후에 더 벼슬이 올라가는 걸 뭐라고 그러죠? 추증(追贈). 신하들은 추증. 왕은 추존, 추숭. 너 이거 하지 마라, 절대. 아주 엄명을 내렸어요. 이걸 어기면 불충(不忠)이에요, 불충. 아버지, 할아버지지만 왕이니까. 불충이죠? 두 번째로 1764년에 어떤 처분을 내리느냐면 족보를 바꿔 버려요. 누구의 족보?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 효장세자가 10살에 죽었어요. 배다른 형인데 10살에 죽었어. 그래서 정조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요, 족보를 바꿔. 이거 엄청난 거예요. 봉건시대에 족보를 바꾼다는 것은 그냥 법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야, 법적으로. 또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어머니가 아니에요. 그래서 왕이 되면서 첫 번째 하는 말이, 사도세자가 하는 말이 있잖아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아들이다. 예는 예대로 굉장히 중요하고 엄격한 것이지만. 엄격해, 그래서 어떻게 해요? 효장세자를 왕으로 올리죠? 이게 뭐예요? 진종, 왕으로 올려. 근데 정작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는 못 올려, 그렇죠? 예는 엄격한 것이지만 정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걸 할 수가 없어, 그렇죠? 이게 통탄할 일이지. 가슴속으로만 가지고 있고 이걸 어떻게 할 것인지 계속 기회를 엿보다가 이게 안 돼. 기회가 안 돼. 그래서 역사에는 하나의 계기들이 굉장히 중요해요, 계기가. 왕이 돼서, 그래서 정조도 주색 뭐 이런 걸 굉장히 싫어했다고 그러는데 어쨌든 후계자를 만들어야 돼요. 후계자를 만들어야 되니까 처음에 효의왕후가 애가 없어요. 정실부인이.

두 번째 홍국영의 여동생이 원빈으로 들어왔는데 1년이 안 돼서 죽었어요. 세 번째 화빈 윤씨가 또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또 1년이 안 돼서 죽어. 근데 화빈 윤씨의 몸종이었던 의빈 성씨한테 애가 많이 생겨요. 3명이나 생기는데 근데 3명 중에 의빈, 이게 몸종이 이쪽에서 많이 나와, 그렇요? 사도세자도 어머니가 영빈 이씨가 선희궁이라고 6살에 궁궐에 들어온 아주 천한 저기예요. 또 영조도, 그렇죠? 무수리, 숙빈 최씨. 그쪽의 아들이고 여기도 의빈 성씨가 처음에 낳은 딸이 1년도 안 돼서 죽었고. 두 번째가 문효세자예요, 문효세자. 문효세자가 5살이야. 한 2살인가 3살에 세자 책봉을 해요. 워낙 굉장히 씨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없는 거죠. 근데 문효세자가 1786년에 홍역으로 사망해, 죽어. 그래서 조성한 원이 효창, 효창공원이에요. 효창. 효창원. 원래 문효세자의 저기예요, 거기가. 일제시대 때 서삼릉으로 이장을 해 가지고, 거기 가면 서삼릉 가면 문효세자 거기 보면 정조가 직접 쓴 비석이 있어요. 얼마나 애통하고 쉽지 않았죠, 이 죽음이. 근데 같은 해에 의빈 성씨가 임신한 상태에서 또 죽어. 그러니까 이런 우환이 생기면 옛날에는 뭐 어떻게 했을까요? 굿을 하거나, 그렇죠? 또 뭐 절에 가거나 하여튼. 정조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묘, 아버지 묘에 대한 불심을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이 때 바로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예요, 이게. 옮기는 데.

그래서 명당을 찾아라. 명당 찾아라. 그래서 찾은 게 바로 수원이에요. 수원인데 이게 그냥 명당이 아니고 수원은 원래 이렇게 보셔야 돼요. 지금 수원시, 여기 화성시, 여기 오산시. 이게 옛날에 다 수원이에요, 전부. 전부 수원이고 수원의 중심지는, 중심지는 네? 정조가 옮기기 전. 여기 융릉. 지금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 거기 중심지예요. 거기가 읍치(邑治)라고 그래요, 읍치. 치소(治)가 있는 곳을 읍치라고 하는데 지금으로 얘기하면 시티 홀(city hall), 영어로. 여기가 수원의 원래 읍치는 여기예요, 융릉. 그런데 여기가 어떤 곳이냐 하면, 왜 여기가 선택됐느냐면 선조가 죽었을 때 북인이었던 기자헌이 선조를 여기다가 묻으려고 그랬어요, 여기다가. 명당이라고 해서. 근데 이게 무산이 됐어요.

두 번째 효종이 죽었을 때 윤선도, 고산 윤선도 아시죠? 윤선도가 여기가 최고 명당이라고 해서 지목을 해서 땅까지 막 팠어요. 땅까지 팠는데 누가 반대를 했어요. 누가 했을까요, 그 당시에? 여기는 남인의.. 네? 송시열. 송시열 하나 드리겠습니다. 당시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아니야, 여기는 명당 아니야.” 막 논쟁을 해요, 서로. 모든 이론을 막 동원해 가지고 여기가 앞으로 굉장히 대번진(大藩鎭)이 될 것이다. 대도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막 이론이 대판 붙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보면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고 있잖아요? 예송논쟁 복제 3년 옷 입을 것이냐, 장례식에. 그래서 자의대비가 계모가 효종이 죽었는데 이거 3년 입어야 된다, 1년 입어야 된다. 이거 가지고 대판 붙었죠? 그렇죠? 그 바로 직전에 이거예요. 이게 직전에 여기가 명당이다, 아니다 가지고 대판 붙었어요, 대판. 송시열하고. 이 분이 졌어요. 져서 땅 파다가 덮었어, 다시. 그러니까 여기가 명당이라고 그러는 걸 지금 다.. 근데 고산 윤선도 선생이 고산유고(孤山遺稿)에 거기에 산릉의(山陵議)라는 부분에 뭐라고 써놨느냐면 ‘수원의 호장(戶長)의 뒷산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명당이다’라고 써 놨어요. 천재일우라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또는 천 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명당이다. 이게 윤선도가 정조보다 한 150년 전 분인데 고산유고를 정조가 읽은 거예요, 책을. 그래서 명당을 찾아라. 해서 4개의 후보지를 올리는데 임영대군 묘, 그리고 저쪽 여주에 있는 홍제동 뭐 등등 해서 네 군데를 올리는데 정조가 딱 여기를 찍은 거예요.

이런 그 역사가 있는. 그리고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반계 유형원, 반계 유형원은 정조보다 130년 전에 살았던 분인데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뭐라고 써 놨느냐면 ‘수원의 읍치(邑治)는 넓고 평편한 북쪽으로 옮겨야 된다.’ 읍치를, 그건 뭐예요? 어떤 의미일까요? 반계 유형원 선생을 실학의 비조라고 그러죠, 실학의. 이건 뭐냐 하만 옛날에 읍치는 좁고 막히고 외적을 방어하기 좋은데 이렇게 읍치를 뒀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넓고 평편하고 물산이 모이는,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겨야 된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반계 유형원 선생이 그런 글을 반계수록에 써 놨어. 정조가 이것도 봤어. 이 글도. 그러니까 130년 전에 마치 사도세자 묫자리를, 명당을 150년 전에 벌써 딱 찍어서 예언하듯이 지금 잡아줬고 도시 옮기는 것까지 반계 유형원 선생이 벌써 다 지정을 해 줘서 그래서 두 개를 다 충족을 시켜줬어요. 그래서 이걸 음택풍수(陰宅風水)라고 그래요, 음택. 묫자리를 잡는 걸 음택풍수. 집자리나 도시를 자리 잡는 것을 양택풍수(陽宅風水)라고 하는데 이 두 개를 다 충족시켜 준 거예요. 그래서 윤선도의 소리에 의해서 아버지는 최고의 명당 이리로 옮기고, 그러면 거기에 있던 관청, 상가, 민가 이거를 그대로 들어서 지금의 팔달산. 아까 말씀하신 팔달산 동쪽으로 싹 옮기는 거야, 이때. 1789년도에 사도세자 묘도 이장을 하고 그리고 동시에 여기 있던 수원의 읍치를 통 관청, 상가, 민가 다 통틀어서 이쪽으로 옮기는. 두 가지를 같이 한. 그래서 여기가 새로운 계획된 신도시. 계획된 신도시로서의 역할을 여기가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도시가 옮겨진 거예요.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됐죠. 부인이 죽고. 이러한 것들이 영조도 보면 사도세자를 42살에 낳았어. 42살에 낳은 아들이야, 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면 이게 막 정치적 알력관계. 특히 문제가 어떻게 생기냐면 처음에는 혜경궁 홍씨가 며느리로 들어와서 풍산 홍씨가 외척세력으로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조가 66세 때 첫 번째 부인이 죽고 두 번째 부인 누구죠? 정순왕후, 15살짜리. 경주 김씨가 왕비로 들어와. 계비죠, 계비. 계비로 들어와서 이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가 아주 굉장한 알력관계에 있어요. 그래서 서울에 풍산 홍씨는 안국동에 살아서 북한당(北限黨,) 경주 김씨는 이쪽, 충무로. 거기 충무로를 뭐라고 그러죠? 진고개라고 그래요, 진고개. 진고개 신사라고 그래, 진고개. 질어, 질어. 그래서 명동이라고 바뀌었지만 일제시대 때, 거기가 니현이에요, 이현. 남한당(南漢黨)이라고 그랬어. 남쪽에 산다고 그래서. 남한당, 북한당. 그래서 남한당, 북한당도 아니고 불한당(不汗黨)이었어요, 거기를. 그건 뭐냐 하면 그 불한당이 아니고 여기도 못 끼고, 저기도 못 끼는 백이 없는 놈, 백이 없는 놈을 불한당이라고 그래. 이 알력이 대단했어요.

그래서 여기에 사도세자 죽이는 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경주 김씨들. 김기주, 이 세력들.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영조의 딸이 있어, 딸. 사도세자의 여동생 화완옹주. 화완옹주가 딸을 하나 낳고 애를 못 낳고 죽었어. 아니 죽지 않았어. 죽고 않고 양자를 들였어. 양자가 정후겸이에요, 정후겸. 정후겸이가 이게, 이게 또 여기 사도세자 죽이는 데 또 일조를 해요. 다 이 세력들이 플러스 돼서, 특히 그리고 노론 쪽에 홍계희, 홍계능, 윤극 이런 사람들이 전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같은 세력들이 되는데 두 가지 일로 사도세자가 죽어요.

뭘로 죽느냐면 첫 번째, 적대세력인 윤극의 청지기가 고변(告變)을 해.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해서. 뭐 평양 가서 논 거, 기생 데리고 논 거. 뭐 스님을 궁궐 안으로 들였다. 등등 해 가지고 그걸 고변이라고 하는데 이거를 해서 정조가, 영조가 이것을 알게 돼. 사도세자의 비행을. 그리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두 번째가 영빈 이씨예요, 영빈 이씨. 이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의 어머니죠? 어머니가 대처분을 내리소서. 그래서 직접 처분을 내려라. 이 두 가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일어난 것이 이 두 가지예요. 그래서 대처분을, 영조가 거의 돌죠, 돌아. 그래서 자결하라고 그러는데 자결하려는데 신하들이 말려서 여기 뒤주에서 죽게 되는데 이러한 세력들이 쭉 있어. 그리고 영조는 낳기만 하면 전부 딸이에요, 딸. 옛날에 이 딸이 굉장히 문제죠. 왕실에서는 더하죠, 후계자가 없는 거야. 일반 가정도 당시 아들 없으면 큰일 났어요, 그렇죠? 19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도 아들 낳으려고 굉장히들.. 지금 딸, 아들 구별 없이 이렇게 된 지가 얼마 안 됐어요, 시대가. 그렇죠? 낳으면 전부 딸이에요, 전부. 영조가.

그래서 1남 하여튼 9녀인가 그래. 전부 딸. 그래서 굉장히 귀하게 낳은 아들인데 이 아들을 죽이고 52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되는데 성격도 또 달라. 완전히 달라. 영조는 꼼꼼하고 민첩하고 재빠르고, 사도세자는 과묵하고 장대하고 이렇게 하면서 아예 성격이 다른데 계속 핍박을 하죠. 계속 핍박을 하니까 사도세자가 막 돌아. 특히 대리청정(代理聽政) 할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취품(取稟)이라고 그래요, 취품. 웃어른한테 여쭈어서 결정하는 것을 취품이라고 그러는데 이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영조한테 물어 봐. 그걸 왜 물어 봐, 이 자식아? 네가. 네가 알아서 하지. 근데 또 어떤 때는 또 해서 취품 안 해. 안 묻고 해. 그러면 이것도 안 묻고 또 하냐, 너? 그래서 그러니까 뭐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면 네 탓이다. 전부 핍박을 하니까 이게 어떻게, 진퇴양난이죠? 너무 그러니까 자식들에게 핍박하시면 안 돼. 굉장히 골치 아파서 애증의 관계까지 간. 그래서 이게 사도세자가 보면 기복이 심해, 아주. 그래서 언제 열 받아요? 아버지 얘기만 들으면 열 받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생겨? 의대증이 생겨, 의대증. 의대증은 뭐예요? 옷을 찢어발겨. 왜 찢어발겨요? 네? 열불 나서 찢는다? 그게 아니고 영조를 보러 가려면 다 정장을 하고 가야 돼. 그러니까 옷을 입고 딱 정장을 하는데 열도 난 거죠. 그러니까 탁 가기 싫은 거야. 그래서 막 찢어발겨서 그게 찢어발긴 옷이 궤짝으로 이렇게 궤짝에 산 같이 쌓였다. 이게 읍혈록, 혜경궁 홍씨 한중록(閑中錄)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지금. 막 헤까닥 하면 잔치, 매일 잔치하고. 소위 이제 막 매일 술 먹고 놀고. 이쪽으로 비뚤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애들 잘 하셔야 돼. 이게 잘 부추겨서 너는 잘한다, 잘한다. 해야지 막 못한다고 그러면 이게 어디까지.. 애증관계가 되면 골치 아파요, 그렇죠? 그런 분들 많아, 그렇죠? 막 핍박을 해 가지고 너 왜 이렇게 못하냐? 하면 이게 굉장히 골치 아파지거든. 그래서 나중에 어디까지 가? 칼 가지고 막 죽이기도 하죠? 자기가 낳은 인, 진, 찬. 서자가 3명인데 인, 진, 찬. 정조 말고 인, 진, 찬. 이 찬의 어머니, 빙애. 빙애를 죽여 버려요.

그리고 또 무슨 일이 벌어져? 칼 들고 에잇! 죽여 버린다. 누구를? 영조를. 일반 가정에서는 그냥 살인이지만 여기는 뭐예요? 역모예요, 역모. 그래서 지금 역적으로 죽은 거예요, 지금. 사도세자는.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리겠다. 이게 이제 막.. 근데 그 상태가 항상 그런 상태가 아니었고 대리청정 할 때는 아주 정상적인,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굉장히 정상적으로 처리를 했는데 어쨌든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대처분을 영빈 이씨가 하는 이유도 세손을 보존을 하는 것은 바로 종사를 보존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은 죽어도 손자, 손자가 있기 때문에 이걸.. 근데 다행히 영조가 역적의 아들로 보지를 않았고, 정조를 그냥 동궁(東宮)으로 인정을 했고. 왕위를 이어받게 했기 때문에 거기까지 예상을 사실 못했어요. 거기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죠, 영조가.

이거 바꿀 수도 있는 건데 바꿀 사람이 마땅히 없지, 또. 왜냐하면 서자들, 사도세자 서자들 되게 싫어했어. 그러니까 인, 진, 찬. 다 거기는 또 역모 사건으로 다 죽고 그래서 나중에 왕이 되는 사람 있죠? 서자 중에, 증손자가. 그게 누구죠? 소위 강화도령이라는 철종, 철종. 이게 그러니까 굉장히 비극적인 일들이 막 벌어지고 본인도, 본인도 정조가 왕이 돼서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하면서 이게 이런.. 근데 또 하나의 계기가 생겨요. 1789년도에 묘를 옮기고 도시 다 옮겼는데 다음 해, 1790년도에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았어. 이게 또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예요, 90년. 그래서 조선조 때 성인이 몇 살이죠? 15세. 15세인데 15세이면 순조가 성인이 되는 1804년. 이게 갑자년이야, 갑자년. 이 갑자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왕위를 물려주고 본인이 상왕으로서 와서 살 곳, 수원. 이게 천도가 아니고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왕위를 물려주고 본인이 상왕으로서 와서 살 곳을 상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전까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도설이 상당한 학계에서 천도설이 인정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이제 다 폐기됐어요, 천도설은. 수도를 옮긴다. 그런데 노론 일부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죠. 왜 저렇게 큰 성을 짓고 막 그러니까 이게 천도, 수도를 옮기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된 거예요. 갑자년지설(甲子年之設)이라고 해서 1804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본인이 와서 살 곳을 상정하니까 뭘 해? 여기다가? 성곽을 5.7km에 달하는 성곽을 짓는 거예요. 왜냐하면 행궁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 그래서 이 화성, 화성이 태어난 거예요, 화성이. 이게 다 이유가 나름대로 있는 거고. 그런데 1800년에 49살에 그냥 돌아가셨어요.

왕위를 물려주고 뭘 하려고 그랬어? 순조로 하여금 뭐를 하려고 그래? 상왕으로서 추존, 사도세자를 왕으로 올리는 일을 하려고 그런 거야, 이게. 그래서 본인은 못하니까 자기 아들로 하여금 왕으로 올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거죠. 그래서 이때, 이때가 또 뭐냐 하면 1795년. 이때가 혜경궁 홍씨가 칠순이에요, 칠순. 칠순 이때 마침 이때 다 모여서 하려고 그랬는데,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이게 이루어지지 않고 그냥 돌아가신 거죠, 1800년도에. 그래서 이 추숭은 1899년에 고종에 의해서 왕이 돼요. 그래서 뭐예요? 장헌세자에서 왕이니까 고종 때는 뭘로 해? 장종. 장조, 왕으로 됐어. 그리고 현륭원에서 뭐로 됐어? 륭능. 능으로 됐어. 계급사회니까 무덤도 계급이 있는 거야. 능(陵), 원(園), 묘(墓). 집도 계급이 있죠?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쭉 내려오고. 정실부인한테 난 딸은 뭐라고 그래? 공주. 그 밑에, 옹주. 사도세자의 저기, 정조의 누이동생은 군주. 아 군주 밑에는 뭐죠? 현주. 군, 현. 이런 식으로 아마 지은 것 같은데 공주(公主), 옹주(翁主), 군주(郡主), 현주(縣主). 그래서 정조의 능행차(陵行次) 보면 거기 보면 청선군주라고 쓰여요, 군주. 아버지가 왕이 안 됐기 때문에 군주라고 그래, 군주. 계급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장헌세자, 사도세자만이 처음에 수은묘. 왕, 정조가 뭐라고 그래? 영우원으로 올라갔다가 이장하면서 현륭원. 그래서 묘, 원, 나중에 능. 그리고 장조. 또 어디까지 올라갔어요? 고종 때 우리나라 제도가 바뀌죠? 황제의 제도로. 그래서 사도세자는 지금 의황제 이렇게 해 가지고 비석 보면, 고종 때 세운 비석 답사 가시면 정조 때 세운 비석이 있고, 왼쪽에. 이쪽에 고종이 세운 비석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황제, 황제. 그래서 다 가지고. 황제부터, 왕, 장조부터 다 가지고 있는 게 사도세자만 유일하게 그런 예예요, 갈. 여기도 그렇고. 묘, 원, 능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사도세자. 그래서 이게 새로운 신도시가 여기에 이제 만들어지는 거예요.

정조대왕이 하여튼 천신만고 끝에 25살에 왕이 됐어요. 1776년. 이게 정조가 그래서 처음에, 처음에 그래서 왕이 돼서 하는 게 뭐냐 하면 규장각을 만든 거예요. 이 규장각은 뭐냐 하면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라고 해서 규장각에서 자기 신하들을 재교육시키는 이런 기능도 하지만 여기는 연구기관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국학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사람을 어떻게 키우느냐가 핵심. 그래서 규장각에서 처음 또 하는 게 뭐냐 하면 그 다음 해에 중국으로 가서 중국 국경에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백과사전을, 만 권짜리인데 그것도 천신만고 끝에 5천 권을 겨우 구해 가지고 그거를 수레에 싣고 북경에서 한양까지 가지고 오는 거예요. 대단한 거예요, 그게. 당시 수레로 은을 주죠, 당시에? 지금도 우리 한국 돈 안 받죠, 중국에서? 은, 은을 줘야 돼요. 우리 엽전 안 돼, 통용 안 되는 거예요, 그렇죠? 은을 주고 사 가지고 와서 거기에 보면 그 책에 ?고금도서집성?이라는 백과사전에는 모든 제도, 뭐 문물, 도르래의 원리, 성곽 이런 게 다 들어있어요. 그리고 거기 그 이외에 ?무비지(武備誌)?라는 책, ?기기도설(奇器圖說)?이라는 책 등등 해서 거기다가 비치해 놓고 공부시킨 거예요, 전부.

그리고 두 번째 하는 것이 장용위(壯勇衛)를 만들었다가 장용영(壯勇營)이라는 군대. 이 군대를 만드는데, 친위 군대를 만드는 거죠. 친위군대 군인을 만드는 것은 군사적 목적도 있지만 그것은 뭐 일부 학자들이 전부 훈련도감 등 5군영(五軍營)이 전부 노론 중심의 군영이기 때문에 자기의 새로운 장용영을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장용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군대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 예산, 예산. 조선시대 때는 호조에서 일원화돼서 예산을 세운 게 아니에요. 지금 기획예산처에서 다 일원화해서 예산도 세우고 하지만 당시에는 선혜청(宣惠廳), 뭐 비변사(備邊司), 균역청(均役廳) 해서 다 별도의 예산들이에요, 다. 그리고 5군영도 별도 예산을 가지고 있고.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나라가 혼란스러우니까 삼정의 문란, 그렇죠? 전, 결세(結稅), 결세를 받고 또 군세(軍稅)를 받고, 군역(軍役). 이것들을 받아야 되는데 세 번째가 주 수입이 뭐였겠어요? 당시 조선시대에 주 수입이? 주 수입원. 환곡(還穀). 책에 없네. 이 환곡이에요, 환곡.

환곡은 좋은 의미에서 출발했는데 없을 때 빌려주고 이게 다시 거둬들이고 하는 이런 건데 이게 이자가 10%예요, 10%. 고리대, 고리대. 10%인데 줄 때는 싹 이만큼 주고, 받을 때는 이렇게.. 조선시대 때 최고의 문제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얘기했던 것이 이거를 일정하게 하자. 자, 곡, 말 이런 걸 전부 일정하게. 다 지방마다 다 달라. 그러니까 악독한 관리가 오면 작은 걸로, 작은 되로 주고 받을 때는 큰 되로 받고. 이게 지금 아주 심각한 거예요. 이게 고리대가 돼 버렸어. 나라의 수입원이 거의 환곡이야. 삼정의 문란이라는 게 이게 뭔가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세금제도가 공정하게 돼야 되고 또 자가 굉장히 중요해, 자. 척도. 척도가 뭐예요? 자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만한 자로 때리고, 돈 없는 사람은 이런 몽둥이로 때려. 그러니까 다산 선생이 그 얘기를 한 거예요. 형을 고르게 하자, 전부. 이게 굉장히 중요한.. 그리고 되가, 되로 하는 게 문제가 뭐겠어요? 부피, 부피. kg이 아니고 부피니까 다 속일 수 있는 거야, 부피는. 옛날에 되, 되질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직업이. 그 사람들이 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데 한 말이 딱 돼. 탁탁 때리면 밑으로 쭉쭉 떨어지는 거예요, 이게. 이런 거 지금 제대로 해야 된다라고, 해야 되는데. 그리고 또 kg도 문제예요, kg도. 옛날에 뭐 부정하게 했어요?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게 뭐죠? 모래 집어넣잖아요. 또 심하면 물을 뿌려. 물 먹인 소 있잖아요. 이런 것들을 공정하게 해야 되는데 그래서 정조가 즉위하면서 이런 세금 문제. 그래서 이 세금을 장용영으로 해서 수어청(守禦廳) 이쪽 것을 슬슬 뺏어오는 와중에 정조가 돌아가셔서.

그래 가지고 정순왕후가 즉위하면서 제일 먼저 혁파(革罷)하는 게 뭐예요? 장용영 없애 버려요. 돈줄, 돈줄. 그렇게 크게 운용되지는 않았지만 한 1년에 25만 냥, 뭐 이런 식으로. 25만 냥 하면 이게 지금.. 잘 모르시죠? 감이 잘 안 잡히시죠? 냥. 냥(兩), 전(錢), 푼(分)이에요. 조선시대 때 냥, 전, 푼. 분이라고 쓰고 푼이라고 읽는데 동전 한 개가 1푼, 그렇죠? 엽전 하나가. 10개가 1전, 100개가 냥. 냥, 전, 푼. 십진법이에요, 이거. 그래서 엽전 15냥이면 어마어마한 거예요, 지금. 15개 꾸린, 100개 꾸러미 15개면. 그래서 이게 보면 냥, 전, 푼인데 이게 또 어떻게 만들어? 동전 하나 만드는데 들어갈 양이 10g인가 20g이 들어가야 되는데 이걸 얇게 만들어서 두 개를 만들어. 이런 일들이 막 벌어져요. 하여튼 그래서 정조가 했던 것이 이제 바로 이런 거예요. 규장각을 만들고 그리고 신하들이 당시 신하들이 북경을 갔다 오면 문화적 충격이 두 개예요. 항상 얘기하는 게 무슨 얘기를 하겠어, 북경 갔다 와서? 심양이나 북경 갔다 와 가지고 하는 게, 뭐가 눈에 들어올까? 문화적 충격이 벽돌집이에요, 벽돌집. 벽돌로 막 뭐를 만들었어. 그거 사용해야 됩니다.

두 번째, 수레바퀴. 이거 사용해야 됩니다. 이거 계속 건의들을 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것들이 여기 지금 반영되는 거예요, 화성에. 벽돌 등등 수레를 만들고 하는 것들이 화성을 지을 때 이런 배경들이 있어. 이게 바로 외국 문물의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죠, 여기가. 그래서 처음에 다산 정약용 선생한테 기본 설계를 맡겨. 기본 설계를 맡겨서 대강의 계획서를 올려. 올렸는데 정조가 뭐를 하냐면 ?기기도설?을 주면서 연구해 봐. 다산 선생이 머리가 좋으니까 문과적 머리뿐만이 아니고 이과적인 머리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계를 발명해야 되잖아. 그래서 ?기기도설?을 주고 연구를 해 봐. 근데 ?기기도설?에는 도르래의 원리밖에 없어, 도르래. 거기다가 뭐를 갖다 붙인 거야? 거중기는? 중간에 활차(滑車)라는 게, 밧줄을 한 번 감아. 감는 게 활차를 거기다가 중간에 넣고 그건 뭐냐 하면 이걸 당길 때 탁 한번 멈춰도 한번 감았기 때문에 멈춰서 설 수가 있어. 그 다음에 그 밑에는 또 뭐예요? 잡아당기는 물레의 원리. 잡아당기는 거. 이거를 다 결합시켜서 거중기를 발명한 거야.

거중기가 다산의 발명품이고 또 뭐를 발명했어요? 수레, 수레. 수레도 대표적인 게 유형거(遊衡車)라고 그래. 유형거라는 수레인데 이거는 뭐냐 하면 놀 유(遊)자, 뜰 유(遊)자, 형, 저울 형(衡), 거는 차죠. 유형거를 발명했는데 이거는 좌우로 움직이는 수레예요. 이건 어떤 때에 쓰냐 하면 유형거는 돌이 있으면 뿌리에다가 이걸 탁 박고 조금씩 올려서 어느 정도 올라오면 좌우로 움직이니까 이쪽 맨 끝을 누르면 뜨는 거죠. 그래서 이게 화성 지을 때 대표적인 기기가 뭐냐 하면 거중기와 유형거가 사용된 거예요. 그래서 다산 선생이 직접 참여는 안 했지만 기본적 설계를 해서 그거를 채택을 해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책에 보면 정조의 어제,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라고 해서 정조가 만든 걸로 돼 있어요, 계획서를. 근데 그거는 다산 선생이 한 거야. 다산 선생은 문집에다가 내가 이거 했다라고 다 써 놨어, 거기다가. 그래서 심화를 그러니까 화성성역을 전부 계획을 본인이 있다라고 지금 돼 있는데 다산의 계획서에 의해서 시작이 돼요. 그래서 화성을 지을 때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났어. 수빈 박씨가 낳아서 1793년에 어떤 조치를 취하냐면 첫 번째 행정구역을 광주 땅을 이리로 갖다 붙여요, 전부. 그래서 지금 수원의 북쪽, 조원동, 파장동 그쪽 지역은 원래 광주 땅인데 이쪽 수원에 갖다 붙였어요. 세금 관계 이런 것들이 다 수원으로 풍부하게 하기 위한 조치.

두 번째로는 뭐를 하냐면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이 지역을 이쪽 수원, 화성시, 오산 여기, 여기가 수원이었는데 수원부. 이 수원부인데 승격을 시켜, 화성유수부로. 유수부, 유수부라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강화유수부, 개성유수부, 광주유수부. 그래서 서남 쪽에 하나의 요충지를 만들기 위해서 화성유수부로 승격을 시켜요. 그래서 이름이 바뀌어요. 수원에서 화성으로. 그런데 1949년도에 수원이 시가 될 때 그래서 여기가 원래 화성시가 돼야 되고 여기가 수원군이 돼야 됐는데 뒤바뀌었어요, 지금. 화성은 뭐냐 하면 격이 굉장히 높은 거야. 화성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조선조 제2의 도시를 구상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여기를 본인이 가서 살 곳이니까 상업도 발전시키고 여러 가지 도시만 만든 게 아니라 생산기반시설을 만들어요. 생산기반시설은 뭐야? 저수지. 그래서 지금 농촌진흥청에 있었던 서울대 농대에 있었던 서호 이런 것들이 다 당시에 정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도시기반시설, 생산기반시설, 이런 것들이 다 정조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를 염두에 두고 이 성곽을 쌓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의 계획된 신도시가 여기에서 만들어지는데 이때 총괄하는 분이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 선생. 평강 채씨. 그래서 이게 전부 당시에 노론이 거의 다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데 남인들 중심으로, 봐요. 묫자리 잡은 윤선도도 남인. 도시 옮기는 의견을 낸 유형원 선생 남인, 총책임자 채제공 선생 남인. 다산 정약용 선생 남인. 전부 남인, 남인들. 남인들을 이쪽으로 등용을 해서 노론도 견제하는 의미가 있지만 하여튼 이런 남인들을 등용하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이 채제공 선생이 당시에 정조의, 정조가 임금이 되는데 가장 일등공신이 누구냐면 홍국영, 그리고 정민식, 김종수 이런 전부 다 노론들이야, 노론들. 거기에 플러스 이 채제공 선생이 남인으로서 여기에 기여를 하는데 채제공 선생이 총책임자예요. 그래서 화성유수부로 승격을 시키고 초대 유수를 누구를 시키느냐면 좌의정을 역임한 이 채제공 선생을 초대 유수로 시켜요. 이건 뭐냐 하면 총리급이 지금으로 말하면 총리급은 수원시장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엄청난, 완전히 달라요. 수원유수는 최고. 여기에 있다 가면 항상 영전해서 가는 자리이고, 여기가. 그래서 화성유수로 와서 모든 준비를 하다가 나중에 조심태로, 소론 무장이었던 조심태를 수원시장으로 임명하고 채제공 선생이 총책임자로서 화성 건설 총 책임지는 거예요. 조심태도 소론계인데 여기는 무장이죠. 무장은 뭐예요? 각 지역을 다니면서 성곽을 쌓던 그런 경험이 있는 소론 무장, 실무에 아주 밝아. 이 조심태 선생을 수원시장을 시켜서 이제 이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2년 9개월 만에 완성이 되는데 처음에는 계획을 10년 계획. 10년 계획인데 2년 9개월 만에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왜냐하면 정조의 의지와 총책임자가 지금 채제공이야, 그렇죠? 막 공문만 내려가면 지방에서 막 그냥 신속하게 다 오는 거예요, 물자가. 기술자도 마찬가지이고. 전국에서 다 기술자를 뽑아서 올려서 대표적인 게 이때 중요한 기술자가 누구겠어요? 목수. 그 다음에, 석공. 아, 그렇죠. 돌 뜨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돌. 또 미장이 뭐 해서 쫙 해서 특히 승려들. 승려들이 이런 건축에 뛰어나서 유명한 승려들이 와서 여기 건축들을 하는데 이게 총책임자가 채제공 선생.

그래서 이 화성은 처음에 계획을 여기는 팔달산을 주산으로 해서, 서울은 어떻게 됐죠? 처음에 도시를 만들 때 중심이 뭐예요? 봉건시대, 조선시대 때는 중심이? 그렇죠, 왕. 왕이 어디 있어? 궁궐. 그러니까 한양을 만들 때 중심이 어디예요? 경복궁이에요, 그렇죠?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리고 풍수지리에 의해서 앞에는 안산. 안산이 뭐죠? 주로 남산이라고도 하는데, 남산. 그리고 뒤는? 주산(主山), 주산. 주산이 뭐예요? 백악산. 좌청룡, 타락산, 타락산 또는 낙산. 우백호, 인왕산. 그리고 뭐가 흘러가? 가운데로. 한강이 아니죠. 한강은 성 밖이죠. 청계천. 청계천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기본, 그래서 궁궐 중심으로 도시가 만들어지는데 화성은 여기 행궁이 먼저 들어섰어, 그렇죠? 1789년도에 만들어지고 여기에 이제 성곽을 쌓으려고 보니까 여기가 주산이 여기가 되는 거예요, 여기가. 백악산이죠? 팔달산. 이게 주산이 되고 여기가 자연 구릉이 이렇게 만들어져요, 자연 구릉. 이거를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그래서 이게 안산의 역할을 해요. 그리고 여기는 좌청룡우백호가 아니고 여기가 용두암이에요, 용두암. 용머리. 용. 그리고 여기가 거북산이라는 게 있었어, 거북산. 그래서 용과 거북이가 서로 마주하는 아주 상서로운 곳이다라고 해서 풍수지리에서 여기 수원화성은 이렇게 지어진 거예요.

서울하고, 한양하고는 약간 달라요. 이렇게 해서 여기에 궁궐을 중심으로 사거리를 만들고 여기 종각이에요, 종각. 수원에도 종각이 있어, 종각. 그래서 종로가 있어요, 종로. 서울만 있는 게 아니고 종각이 남한산성에도 종각 있어. 있죠? 그래서 이게 수원이 이제 사거리에서 행궁을 중심으로 여기 상가, 상가, 민가 막 들어서고 이 바깥에는 저수지 만들어서 농업기반시설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게 화성이에요. 그래서 5.7km에 달하는. 그래서 당시에 모든 기술자 전국에서 다 불러서 여기에 투입시키고 물자도 다 전국에서 오는 거야. 그래서 나무는 쓰이는 돌은 이 자체에서 수원에서 자체에서 돌산이 있어서 거기에서 조달을 했는데 나무 굉장히 중요하죠? 나무는 어디에서 와요? 안면도, 장상곶, 그리고 금화지구, 강원도. 여기에서 다 와. 또 어디로 와, 근데 오면? 그렇죠. 한강, 또 어디로 와? 육지로 안 와요. 전부 배로 와요, 배로. 그래서 강화도 이쪽으로 다 집결해서 그리고 전라도 이쪽에서 오는 거는 안산 쪽. 안산 쪽에 지금 시화호 있죠? 막혀 있는데 그쪽으로 들어와서 구포라는 나루가 있었어. 수원하고 한 8km 떨어져 있어. 그리로 다 들어와. 모든 재료가 다 배로 해서 들어와, 99%. 이게 특징이에요, 다. 배로 들어오는 것과 또 뭐예요? 이 당시에 특징은 돈을 준 거야, 돈. 한양성을 지을 때는 태종 때 뭐 이때 세종 때 각 도에서 5천 명, 6천 명. 어떤 때는 막 10만 명씩 해서 30만씩 해서 농번기를 피해서 와서 한양성을 지었어.

근데 이 시대가 바뀌었어. 영, 정조 이때 시대를 뭐라고 그래? 역사학계에서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또는 자본주의적 맹아(盲啞)의 시대라고 그래. 그래서 이때는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시대로 변한 거예요. 다 돈을 준 거예요. 임금 다 주고 다 재료 살 때도 다 돈 주고. 그래서 철 같은 것은 상주에서 주로 올라와요, 상주. 상주에서 문경새재 넘어 가지고 남한강 쪽으로 해서 이렇게 올라 와.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죠? 겨울에는 얼어붙어. 또 가물어. 그러면 배를 못 띄워. 그래서 큰 배를 못 띄우고 조그마한 배로 막. 이때 보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니까 돈 빨리 보내라. 공문서에 보면. 돈 빨리 보내시오. 재료 뭐 떨어졌습니다. 빨리 이거 해야 됩니다. 이런 공문들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책이 있는데 이게 ?화성성역의궤?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화성을 짓고 화성이라는 것은 성곽 하나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도시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도시기반시설, 생산기반시설 이거 범위를 성곽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는데 이 도시를 만들고 책으로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게 유일한 거예요, 전 세계에서.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그래서 거기에는 설계도면, 그리고 동원된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술자 이름들 다 있고. 저 같이 키가 작거나 이름이 없으면 뭐라고 그래? ‘이자근노미‘. 그래서 한자로 ‘놈 자(者)‘자. 이자, 몇 근할 때 근 자, 늙은 노자, 미. 자근노미. 큰 사람은 대노미. 숫노미, 악바리. 별 이름이 다 있어.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옛날에 이름 없는 사람들 많았어요, 그렇죠? 시골에서 저기들 부를 때 언년이라고 부르죠, 언년이. 언년이가 뭐예요? 어떤 년이야, 어떤 년. 그렇죠? 그래서 여기도 보면 어인노미가 있어, 어인노미. 그러니까 이게 보면 국어, 국어 연구하는 데도 성역의궤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보면 거기 설계도면, 동원된 사람들, 각 지방 어디에서 와 가지고 며칠을 일해서 어느 곳에서 일해서 얼마를 줬다까지 다 기록돼 있고. 그리고 왔다 갔다 모든 자료, 재료는 어느 지역에서. 석회 같은 것은 황해도에서 많이 왔어요. 황해도에서 오면 이게 전부해서 배로 다 들어오는 거야, 전부. 돈을 주고 사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 성과급제를 해서 성과급제도 정조하고 다산하고 머리를 맞대. 이거 어떻게 일을 효과적으로 시킬까. 어떻게 시킬까를 고민, 고민하다가 일당을 주면 안 되죠? 일당 주고 소위 어떻게 해? 농땡이, 농땡이치면 안 되니까. 월급 안 돼, 그거. 구간을 정해. 딱딱 구간을 정해서 일한 만큼. 거리, 짐 수, 짐의 크기에 따라서 주는 거예요, 전부. 그래서 정조하고 다산하고 그걸 계속 아, 이거 어떻게 일을 시키게끔 고민들을 하는 거예요. 시대가 변한 거야, 지금. 성과급제라는 건 돈을 준다는 것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강제로 채찍으로 때려서 강제로 일을 못 시켜. 그러니까 상품 화폐 경제, 자본주의적 맹아가 이때 일어났기 때문에. 그게 분명하게, 극명하게 지금 묘사된 소설이 있죠, 그 당시에? 유명한 소설, 한문 소설이지만. 도서관 와서 그걸 봐야 돼요. 박지원의, 셰익스피어는 아는데 박지원은 몰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열하일기?뿐만이 아니고 소설 많잖아요. ?허생전?, ?양반전?, ?호질?. 뭐 이런 게 다 박지원 선생의 저기예요. 그 당시 시대상을 아주 리얼하게 쓴 책이에요. 근데 그거를 우리가 번역은 요즘 많이 돼 있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그게 번역된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몰라. 셰익스피어는 신나게 봤죠? 그렇죠? 셰익스피어보다 더 뛰어난, 아주 대단한 작가인데 박지원을 몰라, 그렇죠? 도서관에 박지원 책 많이 놔야 돼요. 거기에 보면 그거 있잖아요. 이제 시대가 바뀐 거야. 그래서 뭐야? 지붕은 새는데, 비는 줄줄 새는데 책만 읽고 있으니까 부인이 바가지 긁죠? 책을 읽으면 돈이 나와, 뭐가 나와? 그래서 돈 벌어 오라고. 변 부자한테 뭐 해 가지고 융자 받아서 매점매석해서 버는 거지만 그런 거, 뭐 등등. 양반도 한번 사봤어. 사서 해 보니까 되게.. 이거 못할 짓이야. 양반 대물리는 거. 뭐 등등 이게 이 시대상이에요, 바로. 이 시대가 그런 시대예요, 지금. 그니까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시대로 변하는 것이 바로 굉장히 중요한 거.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과학 문명이 들어오는 시대야, 이 시대가. 그래서 그동안은 뭐예요? 세상을 어떻게 봤어요? 그래서 이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이거를 과학이라고 그래, 과학. 옛날에는 현상만 보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가죠? 그게 본질이에요? 아니죠. 지구가 도는 거죠, 지구가. 근데 그게 옛날 사람들은 이걸 아, 동에서 서로 가니까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이렇게 도는 구나라고 생각을 했어, 그렇죠? 아닌 거예요. 과학지식이, 과학의 지식이 사람의 인식을 어떻게 변화하느냐가 이게. 천론(天論),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어. 그래서 여기에 뭐가 있어? 중국이 그래서 자기네들을 ‘중국’이라고도 하고 또는 ‘중화’라고 그래. 자기네들 중심이라고 그랬어. 근데 땅 덩어리가 중국만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보니까. 이 시대 되니까 막 지도가 들어와서 보니까 어? 중국보다 더 큰 나라도 있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지구가 둥글구나. 축구공 같이 생겼구나. 축구공에는 중심이 어디 있죠? 축구공은 다 중심이에요, 서 있는 곳이. 그래서 우리 이게 중국에서는 동방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를. 아니야. 이제 우리도 중심이 됐어. 주체가 될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인 거예요, 다. 공, 공.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게.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다라는 이런 인식의 변화들이 이때 생겨.

이 당시에 홍대용 같은 사람은 이것뿐만이 아니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만. 둥글다는 것은 다산 선생이 자기 본인 이러, 이러해서 둥글다라는 것을 쓴 게 있어요. 둥글다라는 것 증명하기 쉽지 않아, 그렇죠? 이론적으로. 바닷가에서 배가 들어오는 걸 보고 안다, 등등 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바다에 없는 육지 사람들은 잘 안 되는 거죠. 근데 둥근데 홍대용 같은 분은 뭐까지 알았어? 돈다, 돈다. 돈다를 알아, 돈다. 막 돌아. 지금 이거 몇 km로 돌고 있어요, 지금? 근 시속 1,600km로 돌고 있는 거야, 이게 지금. 이때 생각하면 이게 둥글면 안 돼. 여기다 놓으면 떨어져야 돼. 돌면 어떻게 돼? 날아가서 떨어져야 돼. 과학지식이, 자연과학지식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본질을 알아야 되는 거야. 어쨌든 이런 과학적인.

그래서 여기는 행궁 중심으로 북에서 내려오는 수원천이 가운데로 흘러가고 여기 주산. 그래서 여기는 평지. 평지산, 평지성, 산성. 그래서 평산성이라고 그래요, 여기를. 평산성이라고 하고 여기는 읍치, 읍성. 읍성과 대치되는 말이 뭐죠? 읍성은 도성이에요. 도성하고 도성 이외에는 다 읍성이라고 그래. 그리고 이게 왕이 살면 왕성, 또 궁궐 이렇게 되는데 여기는 읍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근데 정조가 1804년도에 여기 내려 왔으면 좀 달라져요. ‘행’자가 빠져, 행. 행궁이 아니고 화성궁. 화성행궁이 아니고 이렇게 되는데 이게 이뤄지지가 않은 거죠. 그래서 여기 보면 사대문, 이 사대문이 규모가 이 두 문, 이게 정문이에요. 북정문. 왜냐하면 왕이 서울에서 북쪽에서 오기 때문에 화성은 이게 정문이에요. 그리고 이 규모가 숭례문보다 조금 더 크다고 그래. 그러니까 이게 지금 엄청난, 문을 저는 평양, 개성 뭐 어디 다 가봤는데 이렇게 큰 문이 없어요. 이게 지금 최고의 문, 최대의 문이야. 최대의. 이게 하나의 상징이에요.

근데 이게 이렇게 또 읍성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지금. 전주, 대구 뭐 경주 다 없어졌어요. 일제시대 때 읍성철거령 때문에 다 없어졌는데 지금 남아있는 게 낙안읍성, 고창읍성, 또 뭐야, 해미읍성. 이런 조그마한 정도만 있고 남한산성도 문이 있고 문 이외에 주로 있는 게 뭐예요? 앞문, 앞문. 앞문하고 옹성. 이 정도 있고 다른 시설물이 별로 없어. 그런데 이 화성은 여기에 50여개의 방어시설물이 전부 다 들어와요. 100m 마다. 이 100m는 왜? 왜 100m 마다 이게 건물들이 쫙 방어시설이 있어? 옛날 총의 유효사거리가 60~70m라 적을 사격권 내에 두기 위해서 100m 마다 전부 이런 방어시설물을 지은 거야. 한양성은 뭐만 있어? 사대문하고 소문 4개. 그리고 수구문. 그쪽에 한두 개 있고. 한양성은 그럼 사대문과 소문 그 정도 수준인데 여기는 사대문, 그리고 여기 문을 보호하는 옹성(甕城), 이건 적대(敵臺). 적대도 문을 보호하는 방어 시설물이에요. 그리고 여기 공심돈(空心墩). 이 공심돈이 속이 비었다고 그래서 공심돈인데 이게 중국의 성지예요, 중국의. ?무비지?, 뭐 이런 것들이 전부 ?기효신서? 이런 것들이 명나라 때 만든 국방병서인데 이게 뭐냐 하면 왜구가 중국의 동쪽에 엄청나게 쳐들어 와가지고 노략질을 하니까 중국 장군들이 병서를 만들었어. 성곽을 만들려면 이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 ?무비지?, ?기효신서? 이런 책인데 이 책이, 책에 있는데 보면 성곽에 관련된 게 공심돈, 중국의 대표적인 방어시설물이에요. 공심돈 여기, 그리고 다른 성에는 없어요, 공심돈. 그리고 대포 쏘는 포루. 또 뭐가 있어요? 망 보는 포루. 그리고 이건 치(雉)야, 치. 치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게 화성에서는 이렇게 성벽이 있으면 이렇게 튀어나오는 것을 치라고 그래. ‘꿩 치(雉)’자. 전면과 좌우 측면에서 방어하는 방어시설물인데 이게 고구려 성지에 아주 가장 뛰어난 방어시설물 중에 하나예요. 이것이 이제 중국에 가서 중국식으로 바뀌고 그러는데 고구려성에는 이게 다 치가 있어, 다. 치가 굉장히 중요한 거야, 돌출돼 있는 부분. 화성은 전부 돌출돼 있어, 전부. 이 방어시설물들. 이 시설물이 전부 성곽에서 바깥으로 나와 있어.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야, 화성에서는.

그래서 이 화성의 특징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데 특징은 그래서 종합성이에요, 종합성. 화성은 모든 성지에, 정조가 중국에서 책도 들여오지만 우리나라 성을 다 그려오게 해. 우리나라에 있는 성 다 그려 가지고 와라. 그래서 우리나라 성지의 장점, 중국 성지의 장점이 여기에 다 녹아있는 거야, 다. 녹아있는 거고 또 두 번째로 이게 다 다양성이야, 다양성. 우리나라 지붕이 모든 한옥의 지붕이 다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모지붕, 합각지붕, 팔자, 그리고 우진가, 사모지붕, 뭐 육모지붕 해 가지고 모든 지붕이 다 여기. 그래서 다양성을 보셔야 돼, 화성 답사 가시려면.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성과급제를 시행했고 이 ?화성성역의궤?는 말할 것도 없어요. 기록물을 남겼다라는 것은 이건 핵심, 이 포인트가 이제 기록물. 그리고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 때도 뭐를 남겼어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을, 의궤를 만든 거야, 의궤.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거기에 보면 와서 했던 사람, 왔다 간 사람들 이름. 그리고 했던 행사들의 모든 그림들. 특히 음식. 음식을 뭘 해서 드렸는데 음식에 들어간 재료들이 다 있어. 그니까 궁중문화와 서민문화를 다 알 수 있는 것이 이 ?원행을묘정리의궤?예요. 그래서 수원화성과 연관된 의궤 중에서도 ?화성성역의궤?와, ?화성성역의궤?는 성곽을 지은 모든 기록이고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인데 회갑 잔치에 우리 당시에 궁중문화, 그리고 서민들의 문화. 이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다 기록돼 있는 굉장히 중요한 책이 지금 두 개가 남아있는 거죠. 그리고 과학성, 화성에 있어서는 과학 기기들이 다 동원이 됐고 이 총의 유효사거리에 의해서 이런 것들이 지금 만들어지고 이런 수문, 수문이 또 두 개가 있어요. 이 수문의 예. 그리고 방화수류정, 각루, 여러 가지 용도의 방어시설물이 여기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이고. 인문학 지금 이 시간에 이런 역사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런 공부다라고 생각하시고 수고들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