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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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정유재란

제가 오늘 말씀드릴 부분은 한 여섯 가지 정도인데요. 거의 다 서로 상관성이 있어요. 상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 6개 정도를 제가 말씀을 드리고요. 제가 개관이라고 얘기를 했는데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전쟁을 좀 나눠서 본다. 그런 경우 별로 많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실제로 조선과 일본의 전쟁. 명칭에 대해서 바로 뒤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오랫동안 전쟁을 했는데, 7년 전쟁이라는 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세 기간의 성격이 좀 달라요, 전쟁의 성격이. 그래서 전쟁을 제대로 정확하게 보려면 한 세 가지 기간. 세 기간으로 좀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겹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1차 침략기입니다.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이 부산진을 공격을 시작하죠. 그리고 나서 1593년 4월까지입니다. 이때는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렸다가 명군이 참전하고 평양성 전투 이후에 한양을 탈환하는, 이때까지 1년 정도. 이때까지에 굉장히 관심이 많이 기울어졌고요. 보통 임진왜란 그러면 거의 여기를 얘기하죠. 그래서 그 이후에 얘기들은 조금은 무관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드라마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고요. 그러면 가장 긴 기간은 사실은 강화교섭기예요. 1593년 5월부터 1597년 6월까지 지리한 강화교섭이 이뤄집니다. 이 강화교섭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전쟁의 주역인 조선은 배제된 상황에서 명과 일본 간에 강화교섭이 이루어졌죠. 그리고 지리한 강화교섭이 이루어 졌는데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죠.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습니다. 물론 조선도, 조선 정부도 황신을 탐적사로 파견해서 당시 일본의 정세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황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죠. 가장 긴 기간은 사실은 강화교섭 기간이 가장 길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다음 기간이 사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2차 침략기입니다. 1597년 7월 사실 칠천량 해전에서부터 아마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실 때까지 기간. 이때가 2차 침략기고요. 그걸 흔히 사람들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뒤에서 전쟁의 명칭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지만 정유재란이라는 것은 사실 암묵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부르고 있는 거죠. 현재는 가장 많이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일단 1, 2차 침략을 한번. 강화교섭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명과 일본 간에 이루어졌고 조선은 배제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조선이 주역이었던 1차 침략의 전쟁과 관련된 걸 두 전쟁과 한번 비교해 본다면 1차 침략기 같은 경우는 일본군이 115,000여 명 정도가 참전을 했고요. 그 중에 수군이 한 7,200여 명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2차 침략 때 일본군이 늘어나요. 육군은 조금 늘어났죠. 그런데 수군은 많이 늘어납니다. 배 정도 가까이 늘어나요. 40% 이상 늘어납니다. 그런데 약간 늘어난 거에다가 사실은 강화교섭 때 일본군이 다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에요. 한 2,000명 정도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거든요. 조선에 주둔했던 2,000명이 합쳐진다면 1차 침략기보다 2차 침략 때 들어온 일본군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니까 오히려 일본도 2차 침략 때 더 강하게 조선을 좀 몰아붙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양상은 명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은 1차 침략기에 약 43,000명이 들어오는데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조승훈이 총병(摠兵)달고 갔다가 말도 안 되니까 바로 돌아가고 다시 오고 그러면서 북병이 왔다 남병이 왔다 하는 과정 속에서 육군이 한 43,000명이 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2차 침략기 때 51,100명으로 늘어나요. 8,000여 명이 늘어나죠.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명군에는 수군이 참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2차 침략 때는 수군이 13,200여 명 정도 들어옵니다. 그만큼 명도 2차 침략 때도 강한 전투력을 보내야만 했던 그런 급박한 상황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군을 보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뒤에서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명군이 1차 침략 때는 어때요? 바다를 이순신 장군이, 조선이 지키고 있었죠. 그러니까 수군을 파견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2차 침략 때는 조선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이 궤멸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수군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가 예뻐서라기보다는 사실 명은 자국의 안전 확보를 위해서 2차 침략기 때는 수군을 파견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수군의 총대장이 진린이라는 사람이었고 처음에 이순신과는 조금 사이가 안 좋았지만 나중에는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됐죠. 수군이 참전했다는 겁니다.

조선은 이게 참 그래요. “도대체 역사학자들은 뭘 하느냐?” 라고 물어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 1차 침략 때 조선에 참전한 군대가 몇 명인지, 2차 침략 때 참전한 군인이 몇 명인지는 정확한 숫자를 사실은 모릅니다. 정확하게는 카운트가 안 돼요. 그런데 “그러면 너네 뭐 해?”라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혼란스러웠잖아요. 그리고 또 의병이라는 존재도 있고 그래서 정확하게 카운트하기는 힘들어요.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보시면 알겠지만 일본도 그렇고 명도 그렇고 2차 침략 때 군대가 증원됐죠. 그렇다면 조선군도 아마 2차 침략기 때 더 증원됐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조선의 방어체제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조선의 방어체제가 원래는 진관(鎭管) 체제였어요. 조선 초기에는. 그런데 왜구가 쳐들어오면서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바뀝니다. 그런데 제승방략 체제랑 진관 체제를 제가 여기서 설명드려도 잘 이해가 안 되실 거예요, 좀 복잡해요. 복잡한데 가장 쉽게 생각하실 수 있다면 그거인 것 같아요, 저는. 학생들한테도 얘기할 때도 그런데 제승방략 체제가 농구로 치면 지역방어예요. 진관 체제는 맨투맨(man-to-man)이라고 생각하시면 제일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뭐냐면 여러분 그거 기억나시죠?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서울에 있는 신립이 내려갔죠. 신립이 내려가서 충주에서 싸우잖아요. 이게 제승방략 체제예요. 뭐냐면 적이 쳐들어오면 그 지역, 충청도면 충청도 병사들이 한 군데 모여요. 그러면 서울에 있는 장수가 가서 그 군사를 지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어떤 면에서 유리하냐면 왜구를 막을 때는 이게 유리해요. 왜냐하면 왜구라는 존재는 아시다시피 소규모 부대가 와서 치고 빠지고 히트 앤드 런(Hit and Run)이잖아요. 그런데 충청도에 있다가 전라도로 넘어가잖아요. 그러면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전라도로 와서 저걸 못 막아요. 추격하다가 전라도로 넘어갈 수 없어요. 이거 있잖아요. 자기 지역 이게 있어서.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또 전라도에서 막다가 경기도로 가면 또 안 돼요. 그래서 중앙의 장수가 지역에 관계없이 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게 제승방략 체제인데 이게 안 좋은 게 뭐냐면 전면전에서는 안 좋아요. 왜냐하면 마찬가지예요. 신립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전면전일 때는 전라도가 무너지면 경기도에서 막아줘야 되고 경상도에서 막아줘야 되잖아요, 전면전일 때는요. 그런데 전면전일 때는 진관 체제가 유리한데 일본군이 쳐들어올 때는 우리가 제승방략 체제였기 때문에 전쟁 초반에 속절없이 밀렸던 겁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유성룡이 방어 체제를 다시 진관 체제로 바꿔요. 그래서 2차 침략 때는 조선의 방어 체제는 제승방략을 버리고 진관 체제였다. 전면전을 하기 유리한 체제였다는 거고 또 하나 2차 침략 때 조선군이 강했던 이유는 전쟁 중에 절강병법(浙江兵法)이라는 것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이 절강병법을 흔히 남병법이라고도 얘기를 하는데 중국이라는 나라는 굉장히 크잖아요, 땅 덩어리가요. 그래서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의 병법이 달라요. 북쪽 지역은 주로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한 병법을 가지고 있고요. 남쪽은 왜구를 막기 위한 병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명군이 파견했던 것은 북병이었고, 그래서 지죠. 그래서 다시 명에서는 남병을 보내요. 그런데 이 남병들이 쓰는 병법을 절강병법이라고 합니다. 이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책에 나오거든요. 이걸 유성룡이 기효신서라는 책을 가지고 와서 번역을 시키죠. 그래서 절강병법에 의해서 군사들이 트레이닝을 한 거예요. 우리가 훈련도감(訓錬都監)이라든지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 이 삼수병 이것도 사실은 중국의 남병 절강병법을 활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2차 침략 때는 조선군이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됐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전쟁의 치열함은 2차 침략 때가 더 심해요. 일단 참전한, 서로 싸우는 군사의 수도 훨씬 늘어났고, 1차 침략에 비해서. 또 전력이 어느 정도 대등했기 때문에 전투 자체에서 더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의 명칭을 한번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이건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 치열한 논쟁 중에 있습니다. 확실한 건요. 이제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아직까지 관습적으로 습관적으로 그냥 임진왜란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정식 학계에서는 이제 임진왜란이라는 용어는 버린 것 같아요. 교과서에서도 아마 이제 임진전쟁으로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선 시대는 정유재란. 1차 침략과 2차 침략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전쟁을 아예 통틀어서, 통으로 묶어서 제일 많이 했던 것은 임진지화(壬辰之禍)입니다. 그 다음에 대충 말씀 들었는데 저보다 연세들이 많으시다 그래서 당연히 한자는 어느 정도 익숙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처음 나왔던 한자가 아닌 경우는 제가 생략을 했거든요. 그 다음에 임진란, 왜란, 병란 다 이제 아시는 한자일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임진지변(壬辰之變)이라는 말도 쓰더라고요. 주로 조선시대 사서를 보면서. 사서랑 개인문집을 통해서 본 한자들입니다. 전쟁을 이렇게 많이 부르고요. 또는 임진지란(壬辰之乱) 또는 임진지왜적 이렇게 많이 씁니다. 이거 딱 보시면 알아요. 임진왜란 가리키는 거구나 아는데 저도 대학원 석사 때 까지만 해도 몰랐던 용어입니다. 용사지변(龍蛇之變), 용사대란, 용사병산, 임계변란, 임사지란. 보시면 아마 여러분들도 제가 말씀 안 드리면 이거 조선시대 책 보다가 어디를 얘기하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런데 이게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또 다른 한자 용어들이 이런 용어들입니다. 뭐냐면 임진년에 ‘진(辰)’은 용을 뜻하고요. 계사년은 뱀을 뜻하죠. 그래서 용사라는 얘기들이 들어가는 거예요. ‘용’자와 ‘사’자를 넣어서 ‘임’자와 합치기도 하고 해서 용사지변, 용사대란, 용사병산, 임계병란, 임사지란 이런 식으로 쓰더라는 겁니다. 보면 전부 다 ‘변(變)’ 아니면 ‘란(乱)’이죠. ‘변’ 아니면 ‘란’입니다. 이거에 대해서 뒤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고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조선시대에는 1592년의 전쟁과 1597년의 전쟁을 구분하지 않았다. 하나로 묶어서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조선시대는 이랬는데 요즘은 어떤가 보면 영어문화권에서는 Hideyoshi's invasion of Korea.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해석하면 이렇게 되겠죠. 아니면 Korean war 이렇게 합니다. 한국전쟁. 이렇게 나오면 헷갈리죠. 1950년 북한이 우리나라 남칙했던 전쟁과 조금 헷갈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게 하여튼 참 웃겨요. 영어라는 게 굉장히 그런데 한국전쟁을요, 남북전쟁이라고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남북전쟁하면 어떤 전쟁이 생각이 납니까? 미국에서 이거 생각나죠? 링컨 있을 때, 그런데 또 미국 입장에서 보면 남쪽이랑 북쪽이랑 싸웠으면 남북전쟁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죠. 그런데 가장 많이 쓰는 거는 이 두 가지 용어를 많이 씁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이 영어문화권에서는. 그런데 우리 한국 학계에서는 요즘에는 한국 논문을 외국인들도 읽기 때문에 논문 맨 뒤에 요약문을 써요. 그 요약문을 반드시 영어로 쓰거나 일본과 관계된 논문이면 일본어로 쓰거나 그렇게 해요. 그래서 제가 우리 학생들한테 영어공부 해야 된다. 한국사 해도 영어 공부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국내 학계에서는 이걸 어떻게 영어로 표기하느냐. Japan's invasion of Joseon in 1592. 1592년 일본의 조선침략.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게 참 어떻게 표현이 안 되니까 이렇게 했겠죠. 풀어서 쓰는 것 같은데 또는 Hideyoshi invasion. 히데요시의 침략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또는 임진왜란을 그냥 우리나라 임진왜란을 그대로 쓰는 거예요. imjin- 이렇게 해서 imjinwoeran.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렇게 표기를 하게 되면 왜란이라는 게 몰라요, 뭘 뜻하는지. 임진이라는 것도 서양인들은 간지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몰라요. 굉장히 안 좋은 표현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전혀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The imjin war도 마찬가지예요. war는 알겠는데 imjin은 뭐냐 이런 거죠. 주로 많이 쓰는 표현은 첫 번째 좀 깁니다만 Japan's invasion of Joseon in 1592. 제일 많이 씁니다. 이걸 보면 어때요? 제가 이걸 말씀드리는 이유가 뭐냐면 그만큼 우리 일본이랑 했던 전쟁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임진왜화(壬辰倭禍), 원조항일전쟁(援朝抗日戰爭), 어왜전쟁(禦倭戰爭)을 하는데 대표적인 것만 가져온 거고요. 제일 많이 쓰는 게 ‘원(援)’자 들어간 것. ‘도울 원(援)’자 들어가는 이것. ‘도울 원(援)’자를 많이 써요. 왜 그러냐면 그래 놓고 나서 얘기하는 게 “니네 우리가 도와줬으니까 니네도 우리한테 갚아야 돼.” 그래서 광해군 때 계속 명에서 군대 파견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때 주로 광해군, 인조 이때 많이 쓰는 말이 ‘원(援)’자를 많이 썼어요. 그러니까 보답을 기대하는 거죠. 우리가 도와줬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원(援)’자를 많이 씁니다. 원조조선적, 이렇게도 하고요. ‘도울 원(援)’자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실 주된 국가는 조선이랑 일본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일본은 어떻게 했느냐. 일본어 잘 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에키라는 게 사실 전쟁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잖아요. 그래서 당시 천황의 연호라든지 이런 걸 써서 분로쿠노에키, 게이초노에키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분노쿠노에키는 1592년에 조선침략을 얘기하는 거고요. 게이초노에키는 1597년의 침략을 얘기합니다. 합쳐서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우리보다 더 분명히 1차 침략과 2차 침략을 나눠서 얘기해요, 일본 학회에서는. 우리는 그냥 통으로 하는 경향이 좀 강하지만 일본은 나눠서 가더라는 겁니다.

북한은 사회주의국가는 좋은 게 하나 있죠. 하자 그러면 그냥 끝나죠. 일단 토론은 하지만 그렇게 하자 그러면 끝납니다. 제가 대학 때 정말 부러웠던 게 학부 시절에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이 다 번역이 안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은 번역이 다 되어 있더라고요. 니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번역할 수 있을까 했는데 학교 도서관에 북한의 실록이 들어왔거든요. 정말 놀랐습니다. 탁 펴니까 첫 페이지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몇 년 몇월 며칠 김일성 주석 동지의 뭐에 의하여 번역함. 한번 얘기하면 그냥 가는 거죠, 일사불란하게. 그냥 북한은 고민 없습니다. 임진조국전쟁입니다. 임진년에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라고 해서 이순신이라든지 장수, 유성룡이라는 문신 이런 역할들은 다 배제하고 주로 민(民들)이 조국을 지켜 냈다 거기에 주안점을 맞춰서 용어가 통일되어 있습니다. 임진조국전쟁. 다른 표현 안 씁니다. 이게 편할 수도 있겠지만 좀 이상하죠? 뭔가 좀 학문이라는 건 정(正)이 있고 반(反)이 있고 합쳐지면서 정반합(正反合)의 뭐 이게 있어야 되는데 이렇게 갑니다. 우리나라는 굉장히 많아요. 학자들끼리 조금씩 표현하는 게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이게 오히려 우리나라가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장 많이 쓰는 용어는 역시 ‘임진왜란’이에요. 그리고 1970년대 ‘임진전란(壬辰戰亂)’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왜 ‘왜란’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하냐면 ‘왜란’이라는 용어가 고려시대까지 없어요. 왜란이 언제 들어오느냐면 세종실록에 처음 나와요. 그리고 제가 이거는 박사 학위 논문 때도 쓴 말인데, 우리 삼포왜란(三浦倭亂) 얘기하고 을묘왜란(乙卯倭亂) 얘기하고 그러잖아요. 그거는 ‘왜란’이 맞아요. 그런데 1592년, 1597년은 조선의 정규군과 일본의 정규군이 붙었거든요? 싸운 전쟁이에요. 이걸 왜란이라고 표현하는 게 좀 그렇기도 하지만 이게 더 창피한건 왜구가 소요를 일으켰는데 왕이 도망간다? 저는 이게 되게 창피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래서 왜란이라는 말은 좀 쓰지 말자, 학자들은 거의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지금 국사 교과서에도 ‘임진전쟁’으로 바뀌었고요. 그런데 어쨌든 아직까지 그런데 ‘왜란’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임진왜란’이라는 반성에서 1970년대 ‘임진전란’이라는 말이 이제 등장을 했고요. 임진, 정유, 외화 나왔고.

그 다음에 임진왜란, ‘임진’이라는 말이 이게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도 조금 불편해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간지를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60년 마다 돌아오는데 이것이 과연 1592년, 1597년의 전쟁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이건 의문이다라고 해서 나온 게 ‘7년전쟁’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아까 보셨지만 이것에 대한 반론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7년 동안 계속 전쟁한 게 아니다. 강화 교섭을 한 4년 이상 했죠.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7년 전쟁’ 이겠느냐. 신라가 고대 국가를 통일할 때 전쟁은 한 200년 전쟁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겠죠. 이런 문제가 있어서 또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그러면 보다 명확하게 하죠. 조선과 일본이 7년 동안 한 전쟁이다라고 해서 ‘조일 7년 전쟁’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왔죠. 여기 지금 명이라는 나라가 참전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아마 페이퍼에 써 놓은 기억이 나는데요, 명군 내에는 용병들이 있어요. 그 용병 중에는 포르투갈 군사도 있습니다. ‘해귀’라고 해서 흑인 군사도 참전하고 그랬거든요. 이거는 국제전인데, 당시에 국제전인데 조일 전쟁 이렇게 하니까 국제 전쟁적인 성격을 또 명확하게 할 수 없다, 그거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게 또 ‘동북아시아 3국 전쟁’ 이런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통으로 놓고는 그런데, 통으로 놓고는 많은 고민을 했는데요. 우리가 오늘 주로 살펴볼 정유재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고민을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로 ‘정유재란’ 또는 ‘정유재전쟁’까지 많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1592년에 일본의 침략, 또는 그 7년 동안의 전쟁에 대한 명칭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아마 정유재란에 대해서도 명칭에 대한 어떤 활발한 토론이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정유재란까지 명칭에 대한 토론이 진행될 단계는 아니다, 우리 학계가.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이번 국립중앙도서관에서의 이 수업도 마찬가지인데 요즘 와서는 1차 침략과 2차 침략을 우리나라에서도 구분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두 전쟁의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좀 명확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왜란’으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 문제가 있다. 정규군끼리 벌인 전쟁이고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게 ‘왜(倭)’라는 나라가 7세기 되면 사라지거든요? 이게 국호가 일본으로 바뀌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걔네들을 섬 오랑캐, ‘도이’라고 하다가 일본이 원래 작죠. 일본이 원래 저희보다 작아요. 그래서 왜구라고 할 때 ‘왜’자가 왜소하다는 ‘왜(矮)’자, 작다는 것을 난쟁이라는 뜻에서 비하해서 부른 얘기거든요. 그래서 일본이 메이지유신 때 하려고 했던 게 뭡니까? 탈아론, 아시아에서 벗어나자. 그래서 체격부터 벗어나자. 그래서 그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밀가루를 먹기 시작한 거잖아요. 뭐 더 잘 아시겠지만, 저보다. 그래서 나온 것들이 뭐 돈가스, 그렇죠? 이런 거죠. 하이라이스, 카레라이스 이런 건데 그래서 그러면 뭐냐 하면 우리가 ‘왜(矮)’라고 비하했는데 중국은 우리를 뭐라고 했습니까? ‘순이’, 말 잘 듣는 오랑캐, 그렇죠? 또는 ‘동이’, 동쪽 오랑캐. 뭐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학계에서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이’라는 표현을 쓰면 우리 별로 기분이 좋지 않겠죠? 그래서 마찬가지로 ‘왜(矮)’라는 표현을 쓰지 말자,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베트남 같은 경우는 ‘교지’, 중국은 중화사상에 의해서 자기들을 가운데에 두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동쪽에 있으니까 ‘동이’, 그렇죠? 그리고 베트남은 발가락 끝, 그래서 ‘교지’ 뭐 이런 식으로 표현했는데 이런 표현은 이제 중국 학계에서도 자꾸 자제하려고 하는데 전통 중화사상이 부활하면서 자꾸 쓴단 말이에요. 그니까 우리라도 쓰지 말자, 이런 얘기들이 지금 많이 나오고 있죠. 그래서 ‘왜란’이라는 표현은 좀 자제하자. 그래서 지금 국사책에서는 아마 ‘임진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간지를 쓰는 것이 맞겠느냐. 그래서 ‘조일전쟁’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 같아요. 그런데 ‘조일전쟁’으로 하니까 또 어떤 문제가 있냐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국제전이라는 성격을 명확하게 못하는 것도 있지만 1592년의 전쟁과 1597년의 전쟁을 하나로, 통으로 묶어버리는 이런 문제가 생기죠. 그래서 뭐 대안이라면 ‘조일전쟁’이라고 부르고 1차 침략, 2차 침략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떤가, 이런 얘기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계가 굉장히 활발하게 지금 토론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 ‘정유왜란’이라는 용어는 이제는 아마 생명력을 다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조금 더 객관적인 용어가 등장해야 되겠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오늘 살펴 볼 정유재란에 대한 용어 정리도 어느 정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제 ‘동아시아 3북 전쟁’ 이런 얘기를 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명군이죠. 명군의 참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요. 기분 나쁘지만 명의 참전이 조선이 위기를 넘기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에요.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 보면요, 명에 대한 칭송을 하면서도 명을 굉장히 욕해요. 유명한 유행어죠, 조선시대에. ‘일본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얼레빗’이라는 게 넓은 빗이죠. 일본군은 약탈을 해 가도 대충하는데 명군은 약탈해 가면 다 가지고 간다. 정경운의 「고대일록(孤臺日錄)」 보면 한숨 쉬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평생 쓴 지팡이까지 가지고 갔다라는 거예요. 군인들이 그 지팡이 뭐 하는데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한탄하는 얘기가 나오죠. 그런데 뭐 그렇지만 우리가 국가를 계속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을 줬던 건 사실이니까, 살펴보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1차 침략과 2차 침략의 조금, 참전의 과정이 조금은 달랐다. 조금은 달랐다라는 겁니다. 처음에 조선이 명에 원병 요청을 했을 때, 원병 요청 하는 것 자체를 망설였어요. 왜 그러냐면 성리학에서는요, 이런 원칙이 하나 있어요. 외교 원칙인데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라는 게 있습니다,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남의 신하는 외교권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조선이 명과 사대관계를 맺었잖아요. 조선은 독자적으로 외교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조선은 어땠습니까? 일본에 통신사도 파견하고 그랬잖아요. 이 사실을 알리면 혹시 명에게 오해를 사지 않을까라고 해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숨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도와달라고 얘기하려면 그동안의 속사정을 다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망설였던 거예요. 그러다가 너무 위급하니까 결국에는 명에게 SOS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명이 참전을 한 달 정도 걸리죠, 참전을 하는데 있어서 결정하는데. 왜냐, 이때 ‘조선향도론’이라는 것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조선향도론’이라는 게 뭐냐 하면 명의 복건성이라는 곳이 일본의 사츠마와 직교역을 했어요. 그래서 명의 상인들이 일본의 사츠마에 많이 가 있었고요. 또 일본인들이 복건성 쪽으로도 많이 가고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런데 1590년, 경인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히데요시가 조선이 ‘복속사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조선이 복속했다. 항복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다고 소문을 내서 이 사실을 명나라 사람들이 들었어요, 사츠마에 있는. 그러고 나서 히데요시가 다음에 낸 소문은 이제 조선이 향도가 돼서, ‘향도(嚮導)’라는 게 길을 안내한다는 뜻이거든요. 조선이 길을 안내해서 명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이게 ‘조선향도론’입니다. 그랬더니 사츠마에 있던 진신이라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서, 명나라 상인이었거든요. 편지를 써서 복건성에 보내요. 조선이 향도가 돼서 명을 침략할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허이후라고 해서 일본의 다이묘, 영주의 의장이었던 사람이 또 이 사람들 명나라 사람이잖아요, 이 사람도 편지를 써서 명나라에 보내요. 명에 같은 내용의 편지가 두 통 왔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죠? 그런데 ‘류큐’, 지금의 오키나와죠. 오키나와는 당시 명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었거든요. ‘류큐’의 왕자 상령(尙寧)이라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자기의 사대의 대상인 명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까 편지를 썼어요. 류큐의 왕자도 그 편지를 보냈어요. 같은 내용의 편지가 세 통이 왔습니다. 명에서는 어때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겠죠, 조선을. 그래서 최세신과 임세록이라는 사람을 파견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합니다. 물어봐요. 그니까 조선이 깜짝 놀란 거죠. 그래서 다시 김흥남이라든지 이런 사람을 보내서 그것은 헛소문이다라는 것을 밝혔어요.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이 쳐들어왔고 선조가 평양까지 피난하고 이러니까 명나라에서는 두 가지를 의심합니다, SOS를 요청하니까. 첫 번째는 이게 ‘조선향도론’이 현실화됐는데 지금 조선이 거짓말 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왜 거짓말한다고 생각을 하느냐면 이거는 명나라 황제가 한 말에서 분명히 나타나죠, 명실록에 나옵니다. 조선의 전신이 고구려인데 고구려 얼마나 센 나라이냐. 그런데 조선이 이렇게 빨리 도망 와? 보름도 안 돼서? 이거 거짓말이야.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래서 조선을 의심했기 때문에 구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던 겁니다. 구원군은 파견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다가 여러 가지 상황들을 정리한 다음에 최종적으로 명에서도 이제 보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뭐냐 하면 피난 온 선조가 정말 조선의 국왕이 맞느냐라는 것을 확인해 봐요. 혹시 우리가 속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전에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선조를 만난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을 보내요. 최세신과 임세록이라는 사람을 보냅니다. 명나라 사신이 와서 보고 어, 그때 봤던 선조가 맞네? 피난 온 선조가 맞네? 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구원군을 파견하는 거예요. 그래서 1차 침략 때 한 달 이상이 걸렸던 겁니다. 명나라에서 구원군을 파견하는 데에.

또 부랴부랴 파견한 것은 그 이유가 있어요. 바로 평양성입니다, 평양성. 제가 한 2년 전인가요? 역사 저널에서 평양성전투 가지고 한번 했는데 제가 그걸 하자고 그랬거든요? 왜 그랬냐면 이게 평양이라는 그때,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우리가 중국이 자국의 마지노선으로 생각하는 게 평양이에요. 안전선의 마지막입니다. 명나라가 참전을 결정한 게 언제냐면 일본군이 평양성을 함락한 날이에요. 그날 참전 결정하거든요. 그런데 똑같은 일이 있어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언제 참전하냐면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딱 진입하니까 바로 중공군이 참전합니다. 그 얘기는 중국의 마지막 안전선은 평양이다라는 거예요, 평양. 그래서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국제관계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있어야지만 자본주의와 자기 사회주의 사이의 어떤 울타리가 있는 거잖아요. 마지막 안전선은 아마 평양일 것이다라고 생각이 되는데 굉장히 재미있어요. 또 뭐냐 하면 명나라 군대가 1차 원군을 파견했다가, 처음에 막 계속 전투를 하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평양성 탈환한 다음에 어때요? 강화로 돌았어요. 왜냐, 우리 국가의 안전선을 확보했으니까 더 이상 중국군이 피 흘리면서 싸울 이유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 평양이라는 데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피디랑 한번 술 마시다가 평양성 한번 합시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하게 된 건데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가 지금 평양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 조금은 무관심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어쨌든 평양이 딱 함락된 순간 바로 명나라는 참전 결정을 하고 최세신, 임세록 보내서 선조 얼굴 확인하고 바로 원군 보낸 거예요. 그래서 한 달 정도 걸렸던 겁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수군은 파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서 명나라에 올 일이 없어요. 다만 2차 침략 때는 어때요? 조선군이 조선에 수군이 없으니까 바로 올 수 있죠? 그래서 수군을 파견하는 겁니다. 뭐냐, 명나라 군의 참전 목적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들이 얘기했던 말이죠,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겁니다. 히데요시는 뭐라고 그랬냐면 최종 목적은 명으로의 공격이라고 그랬어요. 그렇다면 어차피 명이랑 전쟁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전쟁 어디에서 끝내야 돼요? 조선에서 끝내야 돼요. 자국에서 전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전쟁을 끝내야 돼요. 그래서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원군을 파견했던 겁니다, 1차 침략. 2차 침략도 마찬가지예요. 파견한 목적의 자국의 안전 확보입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은 1차 침략과 다르게 바로 보내요. 왜냐하면 조선의 향도론이 허구인 게 이미 밝혀졌고요, 그렇죠? 그러니까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바로, 전쟁 발발과 동시에 참전을 했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히데요시, 명나라 황제의 칙사가 히데요시를 만났는데 히데요시가 거절했잖아요. 자기의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바로 참전을 결정한 겁니다. 황제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즉각적으로 파견했다. 약간 시기의 차이만 있지 거의 비슷해요. 참전하게 된 배경은 비슷하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아까 말씀드렸듯이 수군 파견한 것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완전히 궤멸되잖아요. 그러니까 일본군의 수군이 바로 중국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에 전쟁터를 어디로, 조선에서 끝내야 되거든요, 명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수군을 파견하는 겁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의 수군을 파견했다라는 거고요. 2차 침략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의 참전은 자국의 안전 확보였다. 우리가, 조선이 예뻐서 이런 게 아니라 자국의 안전 확보죠. 보통 우리 많은 사람들이 알기로는 중국이 우리나라를 ‘동이’라고만 부른다고 하는데 자존심 상하지만 ‘동이’만큼 많이 나오는 얘기가요, ‘순이’예요, ‘순이’. ‘순할 순(順)’자. 뭐냐 하면 말 잘 듣는 오랑캐. 여진족은 어때요? 가끔가다가 덤비기도 하고, 그렇죠? 일본도 왜구, 노략질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는 말 잘 듣죠, 그래서 ‘순이’, ‘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랑캐 땅에서 끝내야 돼, 말 잘 듣는 오랑캐 땅에서 끝내는 게 좋다. 그래서 참전했다 이렇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전쟁의 전개 양상은 지금 말씀드릴 것은 1차 침략은 제외하고요, 2차 침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길기 때문에 1차 침략까지 쭉 말씀드리면 길기 때문에 아주 대략적으로만 말씀드릴게요. 일단 일본군이 1차 침략 때 아쉬워했던 게 전라도 지역을 확보하지 못했다라는 거죠. 일본군이 1차 침략 때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해서예요. 두 번째는 바다의 제해권을 뺏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곡창지대가 전라도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전쟁을 하려면 군수품 보급이 굉장히 중요해요. 전쟁사 하시는, 보통 일반인들이 전쟁사와 관련된 책을 읽을 때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는데 만약에 10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전투 군사는 한 66만 명이에요. 3분의 1은 뭐냐 하면 수송 병력이에요. 그만큼 수송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죠. 보급, 수송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할 때 일본과의, 일본 국내 전쟁의 연장선에서 생각을 해요. 일본은 어떻게 되냐면 한 다이묘가 지면, 항복하면 어때요? 그 지역은 다 항복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거기 물자도 쓸 수 있고요, 그 지역의 노동력을 쓸 수 있고 다 쓸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우리나라는 좀 달랐죠. 장군 하나 죽이면 A장군 죽이면 B장군이 뛰쳐나오고, 그렇죠? B장군 죽이면 또 의병장이 나오고 그러죠. 이게 좀 다른, 그래서 보급 문제 때문에 그런데 그 보급을 확보하려면 뭐냐, 곡창지대를 확보해야 된다. 두 번째, 짊어지고 가는 건 한계가 있죠. 바로 배를, 해상 교통을 이용해야 되는데 해상 교통은 이순신 때문에 막히죠. 곡창지대는 전라도로, 진주성전투 이후에 전라도로 못 들어갔잖아요, 이렇게 막히죠. 그래서 히데요시가 2차 침략 때 첫 번째 내린 명령은 전라도를 확보해라, 전라도를 확보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그리고 이 바다, 해상 교통을 제해권을 장악해야 되기 때문에 정유재란의 시작이 칠천량 해전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원군이 거느렸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그러고 나서 바로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1차 침략 때는 어때요?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와서 일사분란하게 14일 만에, 15일 만에 도성으로 쭉 올라오잖아요. 왜? 걔네들은 하나 잡으면, 한 다이묘가 항복하면 전쟁 끝나는 거거든요. 그런데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라도를 확보해야 됐던 거예요. 그래서 전라도부터 먼저 들어갑니다. 또 하나, 전쟁의 목적 자체가 달랐죠. 1차 침략 때는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고 나서 명으로까지 진출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피로인(被擄人) 이 2차 침략 때 많았던 이유도 이거인데 두 번째는 뭐냐 하면, 2차 침략 때는 뭐냐 하면 이제 싸워 보니까 명도 있고, 조선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더라는 말이에요, 해보니까. 그래서 어때요? 조선의 완전 점령은 포기하고 서울 이남의 4도 할양(割讓)이 목적이에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4개를 일본이. 일본이 제안을 하죠. ‘이 4개는 우리가 가질게, 위는 명나라가 가져.’ 이 얘기를 이미 합니다. 그런데 이미 재미있는 게 역사가 그래서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얘기가 러일전쟁 때, 청일전쟁 때 또 등장해요. 청일전쟁 때는 일본이 청나라한테 얘기하죠, ‘38선 윗부분 너희가 가져라, 우리는 남쪽 가질게.’ 러일전쟁 때는 또 러시아가 그러죠. ‘야 일본, 우리 싸우지 말고 너희 남쪽 가져, 우리 북쪽 가질게.’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해상 세력과 대륙 세력이 만나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선교사, 19세기에 우리나라의 선교사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쓴 책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은자의 나라 한국」인가요? 거기에 보면, 그 구절 보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표현을 이렇게 잘할 수 있느냐. 우리나라를 가지고 뭐라고 그랬냐면요, ‘중국과 일본이라는 맷돌 사이에 낀 기름 진 어떤 곡식’,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둘이 갈아먹으려고 서로 막 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지금이랑도 너무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아, 정말 시적인 표현이다. 자존심 상하면서도, 우리 보고... 자존심 상하면서도 굉장히 그 양반이 그때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본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그래서 이제 전라도 쪽을 확보해서 4도 할양이 목적이었으니까 위로 올라갈 필요 없는 거예요. 곡창지대를 가지고 장기 농성을 해야 되죠. 그래서 이제 전라도 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남원성을, 남원 쪽으로 진출하는 거예요. 육군은 남원 쪽으로 가고. 그래서 이제 명나라 군대가 남원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가죠. 그런데 일본군에게 격퇴당합니다. 그래서 만인총(萬人塚)이 남원에 있죠, 치열한 전쟁 때문에.

그러고 나서 전라도 지역을 일본군이 확보한 다음에 북상을 해요. 1차 침략 때처럼 막 치고 올라온 게 아니었다라는 거죠. 일본군이 1차 침략 때 실패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의병이라는 존재 때문이었거든요. 일본군은 의병이 없어요. 정규군끼리 싸워서 이기면 그냥 그 지역은 다 항복하는 건데 아니, 저게 뭐죠? 관찰사 주변 왔더니 갑자기 전직 누가 와가지고 막 뛰쳐나와서 싸운단 말이에요. 그리고 일본의 기록에 보면 그래요. 일본군이 100명이 모이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고 그래요. 뒤에서 보시겠지만 우리나라의 55.2%가 우리나라 국토의 55.2%가 일본군이 점령을 하거든요. 그 이야기는 44.8%는 일본군이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왜냐하면 일본군이 전쟁을 할 때, 이건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점을 장악하는 거예요. 거점과 거점을 장악하면 그 가운데는 어때요? 일본군이 오지도 않아요. 그러면 이쪽에서, 왜냐하면 정규군이 다 없으니까 괜찮은데, 일본은 괜찮아야 되는데 우리는 어때요? 거점과 거점 이런 데는 의병이 활약하거든요? 그러니까 100명이 모이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이제 1차 침략 때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전라도를 완전히 확보한 다음에야 이제 북상을 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 있는데 1597년 9월 7일입니다. 이거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데요, 직산이에요. 천안 조금 넘어서요. 직산전투에서 명군이 일본군을 박살냅니다. 그래서 일본군이 북상을 포기해요. 이 전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저때 직산 전선이 무너졌다면 일본군은 계속 더 올라왔을 거예요. 별로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직산전투의 중요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러고 나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했잖아요. 그런데 일본군을 완전 축출하기 위해서, 명나라 군대도 싸워 보니까 일본이 세단 말이에요. 그래서 조선이랑 연합 작전을 폅니다. 조·명연합군, 연합 작전을 펼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번에 가볼 울산성을 공격합니다. 도산성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울산성 공격에 실패를 해요. 실패합니다. 이때 불쌍한 뭐죠? 항해, 누구죠? 항해한 분이 이제 죽었죠. 항해한 분이.. 아마 이번에 울산성을 제가 답사 때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가서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울산성이 성처럼 생겨 가지고 멀리서 보면 갑자기 이렇게 뚝 떨어져 있는데 섬처럼 이렇게 올라와 있어요. 그래서 ‘섬 도(島)’자 써서 도산성이라고도 하죠. 울산성에서 실패했고. 그래서 명군과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펼칩니다, 사로병. 네 군데로 한 군데, 성 하나, 하나 공격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사로병진 작전을 펼치죠. 또 사로병진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아까 직산전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직산전투 이후에 일본군이요 북상을 포기해요. 그리고 장기 항전의 자세로 들어갑니다. 이제 우리나라 남쪽 곳곳에 있는 왜성이라는 거죠. 자기들이 필요로 한, 자기들이 거주하기 위한 왜성을 놓고, 울산성 가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왜성의 특징이 어때요?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있죠, 여차하면 탈출할 수도 있고. 왜 그러냐면 직산성 전투에서 9월 7일이죠. 9월 7일인데 8월 18일인가 아마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문이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해요. 어쨌든 일본군도 어때요? 히데요시가 죽었다고 하면 전쟁 끝나잖아요. 돌아갈 수 있죠. 그래서 왜성을 쌓고 장기 항전하는 거예요. 돌아갈 생각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전국의 왜성에 떨어져 있으니까 명나라 군이, 조·명연합군이 이제는 밀어내야죠. 바다 바깥으로 밀어내면 전쟁 끝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로병진 작전, 네 군데로 밀어내는데 육지에서 세 군데, 바다에서 하나. 그래서 사로병진 작전이라는 것을 펼칩니다.

우리가 이번에 가볼 울산성, 사천성, 순천성 이 세 군데입니다. 보면 경상도 쪽에 두 개이고, 전라도 쪽에 하나잖아요. 하나인데 재미있는 게 있죠? 순천성도 뭐냐 하면 울산성 군대랑 같이 합류해서 또 철수를 합니다. 그니까 경상도가 더 가깝잖아요, 일본으로 가는 건요. 경상도 쪽에 왜성이 있어요. 그 이후에 얘기들은 잘 아시죠? 일본군은 계속 지키려고만 했고 계속 우리는 공격하는데 응대해 주지 않는다든지. 그런데 이 사로병진 작전 중에 수군을 빼고는 다 실패해요. 육군은 다 집니다. 다 지고 수군만 이기는데 한 가지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선조도 오해였죠. 조선인들도 오해했던 건데 일본은 바다 국가이니까, 섬나라이니까 수군이 강하고 우리나라는 육지이니까 육군이 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조선의 수군이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전선, 판옥선(板屋船)이라는 전선의 우수성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본의 수군은요, 전투 부대가 아니에요. 걔네는 수송 부대예요. 그래서 일본군이 전쟁을 하잖아요. 그러면 일본의 수군은 뭐죠? 식량을 나르고 군대를 나르는 거지 수군끼리 싸우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수군은 어때요? 전투 부대거든요. 물론 수군 자체가 강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래서 일본은 사실은 수군이 약해요. 그래서 전선 자체도 그래요. 우리나라는 판옥선이라는 건 U자형으로 돼서 전투를 하기 위한 부대이고요, 일본의 배는 첨조선이라고 해서 V자예요. 이게 뭐냐 하면 스피드예요. 뒤집어지기는 쉽지만 빨리 가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수송은 뭐예요, 스피드거든요. 그래서 달랐던 거예요. 그래서 일본의 수군이 우리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수군이 일본군보다 강한 것도 있고요.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수군은 한 번도 안 져요. 한 번도 안 졌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는 항상 중국은요, 수륙 양면에서 들어와요. 그런데 우리가 평양 앞에서 고조선의 수군이 한나라 수군 박살내요. 수나라, 당나라도 전부 다 수중 연합작전을 폈는데 고구려 수군이 다 박살내요. 그런데 우리는 전부 다 이제 육지 쪽만 계속 주목하고 있죠.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원래 강한 것도 있고 또 하나는 일본의 수군이 원래 약하더라는 것도 있다는 겁니다.

1598년 5월부터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합니다. 히데요시가 이제, 히데요시는 8월 18일에..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는데 이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문이 먼저 돌아요. 그래서 막 장기 항전에 들었었고 5월부터는 철수를 시작합니다. 8월 19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을 하고 나서 전면적 철수 작전을 펼칩니다. 이때 조·명수군은 해상 봉쇄 작전을 펼칩니다. 아시다시피 진린이 풀어주자고 그러는데 이순신이 “안 돼!” 그래 가지고 봉쇄 작전에 들어서죠.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합니다. 적의 총탄을 맞고 노량해전 때 보면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은 장면인데요, 뭐 이거는 지금 시간이 안 돼서 말씀 못 드리겠는데 이순신 장군이 자살했다, 아니다. 은둔했다, 전사했다.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전사한 게 맞는 것 같고요. 어쨌든 이제 이순신 장군의 전사 이후 11월 27일에 이후에 일본군이 계속 철수하기 시작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전쟁이 4월 14일에 1592년 4월 14일에 시작됐다면 전쟁이 끝난 건 언제냐, 정확하게 날짜는 1598년 11월 27일에 일본군의 마지막 부대가, 마지막 군인이 부산에서 출발합니다. 정확하게 전쟁이 끝난 날짜는 1598년 11월 27일이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2차 침략 때 굉장히 도드라진 현상이 ‘피로인(被擄人)‘ 문제입니다. 피로인이라는 말이 조금 낯선 분도 계실 거예요. 역사 저널에서도 담당 PD님이 그냥 ‘포로’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얘기를 했는데 제가 이제 계속 ‘피로인’으로 가야 된다고 얘기를 했죠. 이게 왜냐하면 사실 사전적 의미 자체가 달라요. 포로는 제가 이제 국어사전에 있는 것을 대충 요약해서 썼는데 교전 상대국의 점령지에서 전쟁과 관련된 적대 행위를 한 자, 무장 군인, 전쟁 수행과 직접 연관 있거나 군사 조직에 관여된 자를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민간인이라고 하더라도 정보요원으로 활동했거나 이러면 포로가 돼요. 그런데 아무런,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포로라고 그럴 수는 없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피로인은 뭐냐 하면, 민간인이에요. 그니까 전쟁과 관련 없는데 끌려간 사람을 피로인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포로라는 개념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일본에 끌려간 10여만 명의 조선인들은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포로가 아니라 피로인으로 가는 것이 맞다라는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피로인이라는 용어를 두 번의 전쟁에서 쓰는 것 같아요.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번 쓰고요, 그 다음에 청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죠. 청과의 전쟁에서도 이 피로인 이야기를 씁니다. 사실은 피로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래도 일본이 여진족보다는 나았어요. 일본은 돌려주기도 해요. 보내주기도 합니다. 보내주기도 했는데 여진족은 안 보내줬죠. 안 보내주고 어떻게 하냐면 팔아먹었죠. 속환(贖還)이라고 해서 돈을 받고 돌려주거나 아니면 일본은 탈출하면요 끝이었어요. 그런데 여진족은 탈출하면 조선 안에까지 찾아왔어요. 그니까 이제 자꾸 사회문제가 되고 이랬었죠. 그래서 피로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이 여진족보다 좀 나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들을 끌고 갔다. 민간인을 끌고 갔다. 그래서 피로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라는 겁니다.

피로인의 숫자가 몇 명이냐. 지금 일본에서는, 이거 학자들마다 다 달라요. 그런데 이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카운트를 하는지. 기록이 없는데. 몇몇, 갈 때마다 신고서 쓰고 간 것도 아니죠. 저 갑니다, 끌려갑니다라고 쓴 것도 아니라서 모르는데 지금 경향은 조선은 자꾸, 우리나라는 자꾸 늘리려는 경향. 많이 끌려갔다, 많이 납치됐다라고 얘기하는 경향이고 일본은 자꾸 줄이려고 하는 경향이에요. 그런데 대체적인 일본의 학자들은 2만 명에서 3만 명으로 봅니다. 사실 2~3만 명도요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당시 한양의 인구가 우리가 10만 명 정도로 추정을 하거든요? 그니까 그러면 한양 도성에 10만 명 정도가 있었는데 한 3만 명이면 30%가 끌려갔다는 얘기죠. 도성의 30%가 끌려갔다는 얘기입니다,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그런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40만 명 말씀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한양 도성의 4배가 되는 인구가 끌려갔다는 얘기인데 제가 보기에 가장 객관적인 것은 한 10만 명 내외가 아닌가 싶고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 한국에 있는 학자들의 50% 이상은 10만 명 내외로 보고 있습니다. 이 10만 명이라면 결국에 당시 한양 도성의 인구를 통째로 떠서 일본에 가져간 거예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가 끌려갔다. 이 사람들은 전쟁과 무관하기 때문에 피로인이라고 불러야 된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1차 침략과, 1차와 2차에 있어서 일본이 침략한 목적이 달랐다라는 거죠. 그렇다면 납치한 대상과 목적도 다르다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피로인의 납치 대상과 목적을 구분하자라는 건 제가 아마 구분한 건 제가 처음으로 논문을 썼던 것 같은데 뭐 우연한 기회에 얻은 사료들 때문에 구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1차 침략기 같은 경우는 보통 우리 학계에서는 2차 침략기에 납치를 많이 당했기 때문에 2차 침략기 쪽에만 관심이 있는데 1차 침략기 때 제가 확인해 보니까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납치를 했다라는 겁니다. 많이 데리고 간 게요, 조선의 양반가 여성이랑 환관(宦官)이에요. 양반집 여자와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을 주로 납치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이 사람들 쭉 추적해 보니까 제가, 이 사람들을 어디로 쓰려고 데려갔냐면 전부 다 귀족의, 일본에 끌고 가서 일본의 귀족 처소에 배치돼요.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예쁜 여자를 데리고 갔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에 보면 아주 그냥, 제가 이 구절을 읽고 나서 딱 느낌이 왔는데 ‘양반가 여성 중 미색이 뛰어난 자‘예요. 그냥 미색이 아니라 양반가 여성 중에 미색이 뛰어난. 그런데 이 여자들이 전부 다 귀족들의 처소에 끌려갔다라는 얘기는 교양 있는 여성들을 필요로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 교양 있는 여성들이 2세를 낳게 되면 또 애들도 교양 있게 잘 키우겠죠. 그러니까 아마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을 하고 계속 조선을 지배를 해야 되니까 아마 그런 어떤 향후를 내다보고, 향후 일본의 어떠한 통치 이런 것까지 내다봐서 양반가의 여성들을, 양반가의 여성 중에 예쁜 여성을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환관이에요, 환관. 환관. 아니 환관을 왜 납치해 갔을까 싶은데 이 환관들이 또 뭐냐 하면 일본에 아주 떵떵거리는 다이묘 집에 환관으로 배치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요, 제가 이런 말씀을 여기에서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환관이요,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 환관이 세계적이에요. 왜 그러냐면 고려시대도 보면요, 원나라가 공녀(貢女) 요구한 거 많이 아시죠? 그런데 공녀 얘기 때문에 묻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엄인(閹人)이라고 그래서 원나라에서도 환관을 데리고 가려고 그래요, 환관을. 환관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환관들이 아시다시피 궁궐에, 처소에 배치되잖아요. 그런데 환관이 여러분 아시다시피 성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시죠? 성 기능을 상실하는데 중국의 경우는 어떻게 해서 성 기능을 상실하냐면 대부분이 궁형(宮刑)을 당해요. 궁형이 뭔지 아시죠? 생식 능력을 상실시키는 형벌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다는 아니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환관들은 범죄자 출신인 경우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한나라 때도 ’십상시의 난‘, 이런 거 있잖아요. 환관들이 막 하는 게 있잖아요. 왜냐하면 사실 태생이 좀 그렇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범죄자들이 환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환관을 만들어요. 환관을 만듭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제가 일할 때도 있었는데 환관들이 집단 마을을 구성하고 있고, 비석도 있고 막 그래요. 여러분, 조선시대 환관들 결혼합니다. 결혼해요. 애도 있어요. 양자(養子)를 구해요. 양자를 얻어요. 그래서 이제 환관의 양자는 어렸을 때 성 기능을 상실시키는 거예요. 조금 더 깊이 있게 말씀드리면 일반인들은 성 기능을 상실시킨다고 그러면 자꾸 뭐라고 해야 되나, 거세 생각하시는데 그거 아니고요. 실 있죠? 실로 특정 부위를 묶어 놓으면 피가 안 통하거든요? 그러면 썩어서 떨어져요. 그러니까 큰 게 아니라 애들이 어렸을 때 양자를 들여서 이렇게 해서, 환관이 어렸을 때부터 양자를 들여서 환관을 만드는 거죠. 양자를 들여서. 그러니까 범죄자 출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것도 굉장히 많은데 기록에 보면 옛날에, 아마 어르신들 아시겠지만 애들 어릴 때 그냥 아랫도리 안 입히고 막 뛰어다니고 놀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막 뛰어다니면요, 애들이 뛰면 개도 뛰어요. 개도 막 뛰다 보니까 막 뭐가 흔들리고 확 물어가지고 이제 그런 경우도 있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환관이 된. 어렸을 때부터 양자가 돼서 교육을 받고 하다 보니까 환관의 질이 중국이랑 일본에 비해서 훨씬 뛰어나요. 그래서 몽골도 우리나라의 환관을 수입하려고 그랬고, 세조 때인가요? 세종 때인가, 우리 물소 뿔이 안 나요. 우리나라는 물소가 없잖아요. 활은, 각궁(角弓)은 물소 뿔로 만들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물소 뿔을 수입하려고 하는데 명나라에서는 물소 뿔을 안 주려고 그래요. 이거 가지고 무기 만드니까, 그렇죠? 그랬을 때 명나라에서 요구한 게 뭐죠? 너희가 환관 보내주면 우리는 물소 뿔 주겠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환관이 어느 정도 교양도 있고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 귀족들이 무식한 일본 환관이 아니라 조선의 환관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1차 침략 때에는 조선의 교양 있는 여성, 교양 있는 환관들을 납치했다. 왜냐하면 향후 조선을 지배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이제 두 번째가, 제가 이제 이걸 처음 아마 학계에서 발표한 것 같은데 유일한, 이것 때문에 제가 확신을 가졌던 거죠. 양반의 아들들을 데려가요. 양반의 아들들을 납치합니다. 권두문의 「호구록(虎口錄)」이라는 책에서도 제가 확인을 한 거죠, 우연히 확인한 건데 물어봐요. 양반의 아들들한테 “너 글자 알아?” 한문 아느냐는 거죠. 그래서 안다고 그러면 납치해 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여러분 아시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자무식(一字無識)인 거 아시죠? 자기 이름도 못 써요. 그런데 일본인은요, 메이지유신 때까지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인들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은 승려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외교 문서는 전부 다 스님들이 작성하는 거예요. 스님들이 작성하는 겁니다. 일본 애들은 문자를 몰라요, 한자를 못 씁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한자는 조선의 어린 양반의 아들들을, 어렸을 때 데려와야지 세뇌 교육이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얘들이 커서 조선에 보내서 계속 통치해서 지배하겠다는 생각에서 양반가의 어린 자녀들을, 글을 아는지를 물어본 다음에 데려갔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1차 침략의 목적이 보다 뚜렷한 거죠. 보다 향후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그 다음에 끌고 간 민(民)들은 뭐냐 하면 군사 훈련을 시켜요. 그래서 2차 침략 때 조선의 군인들 중에, 조선의 민들 중에 일본군으로 참전한 경우도 있어요. 특히 전인시가 보낸 글을 보게 되면 13,000명, 10,300명인가? 13,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군사 훈련 받고 있다. 왜? 향후 명으로까지 진출을 해야 되니까 부족한 군사력들을 계속 보충해야 되죠? 그러니까 1차 침략 때의 목적은 뭐다? 조선의 완전 점령과 명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납치했습니다. 그러니까 피로인이 있기는 있었지만 대규모는 아니에요. 2차 침략만큼 대규모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아주 조금만 데려갔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런데 대부분의 아주 많은 납치는 2차 침략 때입니다. 그래서 ‘무차별적 납치’라고 제가 표현을 해봤습니다. 왜 그러냐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4도 할양이 목적이죠? 그 얘기는 조선에 왔던 일본군 장수들은 전후(戰後)에 돌아가야 돼요. 자기 영지로. 그러니까 귀국 후에, 전후에 자신의 영지에 필요한 사람들을 납치해야 되는 거예요. 끌고 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2차 침략 때는 초반에는 죽이지 않고 납치하는 게 목적이에요. 납치하는 게 목적입니다.

또 하나, 이때 아마 안토니오 코레아 때문에 유명해진 건데 이때 노예 매매상들이, 일본군들이 또 뭐 하냐면 자기가 필요로 해서 납치하기도 하지만 정말 기술도 없고 그러면요, 노예 매매상들한테 팔아요. 돈을 주고. 그래서 그중에 이제 하나, 이탈리아에 갔던 안토니오 코레아라든지 이런 경우가 밝혀진 거잖아요, 이때 납치됐던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납치, 그러니까 판매도 합니다. 노예 매매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주 무차별적으로 납치합니다. 그래서 죽이지는 않고 자꾸 납치만 하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죠. 1인당, 군사 1인당 3명을 죽인 이후에는 납치가 된다. 우리 부대가 100명이면 300명을 죽이면 납치를 허용하겠다 이거예요. 왜냐하면 죽이지는 않고 납치만 하니까. 그니까 이거 확인을 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코와 귀를 베어서 보내라. 그래서 ‘귀 이(耳)’자, ‘코 비(鼻)’자 해서 이제 ‘이비총(耳鼻塚)’이죠, 이비총. 그래서 일본군들이 죽이지는 않고 코만 베는 경우도 있죠, 귀만 베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나온 얘기가 ‘이비 온다.’ 그러면 애들이 울다가 뚝 그쳐서 이게 애비가 됐다, 이비가 애비가 됐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뭐냐 하면 일본군의 잔인함을 얘기를 할 때 이거 뭐죠? 귀를 베고 코를 벴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이건 아주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혹시 「난중일기(亂中日記)」읽어보신 분 계신지 모르겠는데 이순신도요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면 일본군의 귀를 베서 항아리에다가 넣고 소금에 절여가지고 의주에 보내요. 왜냐하면 지금 사극에서 나오는 전쟁과 실제 전쟁은 좀 다릅니다. 진도 굉장히 안 나가요. 막 보면 사극에서 보면 적을 딱 죽이면 옆 사람이랑 막 칼싸움하잖아요? 그런 전쟁 없어요, 전근대에는. 적을 딱 죽이면요, 뒤로 빠져요. 그 시체를 가지고. 그리고 목을 잘라요. 그래서 이렇게 허리춤에 찹니다. 그게, 그러고 나서 그날 저녁에 결산을 해요. 그래서 군공(軍功)이라고 그래서 적의 수급을 하나 베면요, 천민은 양인이 돼요. 그런데 내가 죽여 놓고 다른 데 가서 싸우고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리고 벼슬이 있는 자는 승진할 수 있고 그렇죠. 그게 이제 나오잖아요. 군공, 군대에서 공을 세우면 그게 이제 조선 후기 신분제 문란의 이유가 되는 거죠. 천민의 적의 머리 두 개만 베면요, 관직이 한 5품까지 올라가고 그래요.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사람의 목이 잘 안 베어집니다. 그렇잖아요, 보세요. 살 있죠, 뼈 있죠, 근육 있죠. 프랑스가 공포정치 할 때 어때요? 사형은 많이 시켜야 되는데 시간은 없고 그래서 나온 게 단두대 아닙니까. 빨리 자르려고 툭 떨어뜨려 가지고 하잖아요. 안 돼요. 그래서 “나를 따르라!” 그러면 전부 군사들이 “잠깐만요,” 그러고 다 칼질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귀를 베고, 코를 베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에요. 조선의 군대도 그래요. 이순신 장군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도 나오지만 히데요시가 그러죠. 못 믿겠는 거죠, 정말 이렇게 죽였는지. 그래서 나온 게 사람의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이니까 귀 말고 코 베라. 그래서 처음에 귀 베다가 코를 베서 ‘이’와 ‘비’가 같이 있어서 ‘이비’, 이렇게 된 거죠. 히데요시는 그래서 그렇게 코와 귀를 베게 해놓고 가지고 오니까 보기는 봤는데 뭔가 찝찝했겠죠. 그래서 그걸 모아 가지고 교토에 가면 풍국신사 앞에 저렇게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승려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죠, 미미즈카. 저기는 제가 보니까 3년 전인가 4년 전에 우리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를 갔는데 한국인들 굉장히 많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데보다는 그래도 좀 경건한 자세를 가져서 그래도 좀 보기는 좋았는데 굉장히 아픈 곳, 우리 아픔이 있는 곳이에요. 우리 선조들의 귀와 코가 지금 묻혀 있는 거죠. 그런데 조선 후기 통신사가 파병될 때 자꾸 일본이 저쪽 앞을 지나가게 하려고 막 유도를 해요. 자기네들이 셌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겠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통신사 일행이랑 자꾸 마찰을 일으킨 그런 일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혹시 오사카나 교토 쪽 가실 일 있으시면 꼭 한번 들러보세요. 주변에 꽃집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저도 꽃 사는데 굉장히 애를 먹었는데 미리 좀 사서 가셔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꼭 한번 가셔서 그 아픔을 한번 생각을 해보시는 건 좋은데 다만 귀와 코를 벴다고 그래서 일본이 잔인한 것은 아니다. 이거는 전쟁에서 일상적인 모습이다. 조선의 군대도 그렇게 했다라는 겁니다. 그거는 오해인 것 같고요.

그러면 이제 끌려간, 1차 침략 때는 어떤 목적성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됐는데 2차 침략 때는 막 끌려가다 보니까 대우가 천차만별이에요. 천차만별인데 역시 이제 기술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잡역이에요. 이것저것 다 시켜요. 노동력으로만 활용을 하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잡역에 동원이 됩니다. 그 다음에 아까도 말씀드렸죠? 서양의 노예상들에 의해서 팔려나갔다. 이때 일본에는 네덜란드라든지, 포르투갈이라든지 이쪽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으니까 노예로 매매가 됐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도 사실은 신분제 사회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양반이라든지, 관료들은 우대해 주더라고요. 정희득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보면 영주가 옛날에 양반이었다고 그랬더니 찾아줍니다. 옛날에 부리던 노비를 찾아줘서 다시 붙여줘요. 여기에서도 노예 부리고 살라는 얘기죠. 양반과 관료들은 좀 우대해 주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서 강항도 굉장히 이걸 받아들이라고 그러죠. 일본에서는 기술자를 굉장히 우대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굉장히 우대합니다. 특히 이때 정말 우대를 받았던 게 도공들이에요, 도자기 하는 사람들. 일본은 이때 도자기를 못 구워요. 도자기 굽는 기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도 가면 어때요? 차가 굉장히 발달돼 있잖아요. 초콜릿이니, 뭐니 다 녹차 타서 먹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찻잔이 필요한데 도자기를 못 만들어요. 그래서 이 도자기를 판매하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 장수들이 도공 납치하는 데에 굉장히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박사 학위 논문 쓰면서 13군데인가 지역에 조선의 도예촌이 전후에 생겼습니다. 큰 도예촌이 한 13개 정도가 생길 정도로 도공들을 집단적으로, 아주 조직적으로 납치해 갔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때 엄청난 부를 이 사람들이, 그 다이묘들은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게 기반이 돼서 지금 일본은 최고의 도자기 국가가 되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영국의 도자기가 꽤나 유명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일본이 더 유명한 게 아닌가 싶어요. 뭐 그릇 가게 보면 전부 다 일본 그게 많은데 사실 그 뿌리는 이제 이때 끌려갔던 도공들에 의해서 일본의 도자기가 꼽혔다.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그래서 공인들이 조금 천대 받았잖아요, 기술자들이. 그래서 도자기 기술은 일본에게 우리가 역전 당했죠. 그게 이제 성리학의, ‘사농공상’이라는 게 저는 지금은 안 맞다고 생각하는데 ‘사(士)’가 제일 우대 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는 공부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대한다라는 거죠. 뿌린 대로 거두죠? 그렇죠? 거짓말 안 한다. 그 다음에 농(農)이에요. ‘공(工)’, 이거 만들어서 조금 속이죠? 그렇죠? 상인은 뭡니까? 아무 것도 안 하고 속이기만 하죠? 이런 논리 가지고 한 건데 일본은 이때 성리학적인 직업관이 아니기 때문에 기술자를 굉장히 우대합니다. 그래서 도공들이 엄청나게 우대를 받아요.

지금 그 흔적들이, 열 몇 가지인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집단촌이 있었다는데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건 이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아리타’라는 곳, 혹시 가보신 분 있나요? 저는 여기 두 번 갔거든요? 한 번은 혼자 갔고 작년에 우리 학생들 데리고 한 번 갔는데 이삼평이라는 조선인이요,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모셔집니다. 신사가 있어요. 그니까 조선인이지만 도자기 기술이 있으니까 신으로 모시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 위로 가면 저 비석이 있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도조’, ‘도자기의 조상’이라고 하더라고요. 도조 이삼평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우대 받았겠어요, 그렇죠? 다이묘가 너무 예뻐했겠죠, 경제적 이득 때문에. 그 다음에 이제 저게 뭐죠? 여기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심수관가(家)는. 사스마도기의 심수관가. 저기는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줘요. 뭐 지금 13대째인가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일본 이름 안 씁니다. 나는 심수관이에요. 일본 이름 있어요. 명함을 보니까 일본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두 개인 거죠. 심수관이라고 또 하더라고요, 심수관. 그래 가지고 지금 여기 사진이 작아서 그런데 이 끝에 보시면요, 이쪽에 보면 대한민국 뭐 명예대사관? 이렇게 붙여 놨어요. 자기가 한국인의 후손임을 아직까지 떳떳하게 밝히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기 심수관 그분을 뵈러 갔는데 사실 약속을 했죠. 제가 언제 우리 학생들 데리고 갈 테니까 한번 얘기 좀 해 주십시오 하고 갔는데 갔더니 이제 아드님이 맞아주시더라고요. 아드님도 연세가 저보다 많아요. 그런데 아버님이 지금 팔순이 넘으셔가지고 갑자기 기다리다가 몸이 안 좋아져서 응급실 가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뵙지는 못하고 둘러보고 왔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일본의, 일본에서는 저 두 도자기를 최고로 칩니다. 그리고 여기 지금 아리타는요, 아예 그 마을 전체가 도자기 마을이에요. 전체가 아예 도자기만 합니다. 이 두 개는 굉장히 유명하죠. 그래서 도공들 같은 경우에는 아주 최고의 대우를 받습니다. 납치당할 때는 끌려갔잖아요? 납치 갔는데 너무 대우가 좋으니까 조선에 놓고 온 게 있는 거예요, 도자기 만들 때. 그래서 그것 좀 가져 올게요 라고 해서 와서 다시 가지고 간 기록이 있더라고요, 일본에서. 그랬더니 “아 이것 좀 강제로 끌려간 것의 색깔이 흐려지지 않느냐 그래서 그 얘기는 하지 말자.” 그러시더라고요. 이 기술자들이 그렇게 우대를 받으니까 일본인으로 살아가려고 생각을 하게 됐겠죠. 그런 가운데에서 아직까지도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계승하고 있는 저기는 정말 저는 굉장히 참 감명 깊게 한번 가봤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일본에 가실 일이 있으면 한번 가시면 대한민국 명예대사관이라고 딱 붙여놨더라고요.

우리가 지금 정유재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전쟁이 끝이 있으니까 영향을 좀 보겠습니다. 전쟁의 영향을 아마 들어보신 것도 있겠지만 아마 못 들어보신 얘기들도 있을 것 같아서 전쟁의 영향을 좀 얘기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지금 이쪽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게 이거죠. 중국과 일본은 정권의 교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정권 교체가 없었다. 그래서 망했어야 된다, 뭐 이런 얘기도 많이 하는데 뭐 그건 확실하죠. 중국은 명에서 청으로의 정권 교체가 있었고 일본은 도요토미에서 도쿠가와 쪽으로 바꾼 후에 교체가 있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래서 이제 흔히 뭐 이때 얘기하는 게 조선은 이 땅 망했어야 된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도 있죠.

어쨌든 우리는 7년 동안 우리 국토는 전쟁터가 됐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조선의 전 국토, 지금 우리나라보다 넓죠. 우리나라는 남북의 허리가 잘렸으니까. 전 국토의 55.2%가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 얘기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머지는 한국, 조선인들이 거점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고요. 이런 게 심각하죠. 농지가, 농사를 안 지으면 황폐화되잖아요. 농사지을 수 없는 땅이 되죠. 조선의 3분의 1 이상의 땅이 황무지로 변했어요. 그 얘기는 농업생산력이 굉장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니까 전후에 굉장히 민들이 힘들었을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겠다라는 거죠. 여러분 아시다시피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의 궁궐이 불탔고요 종묘가 불탔습니다. 제가 라디오 방송에서 한번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민들이 왕이 피난 간 다음에 궁궐을 태웠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지금 일본의 기록 보면 좀 달라요. 다른 기록들이 있어요. 일본군이 딱 들어올 때 일본군이 이제 선조가 도망가고 일본군이 오잖아요. 그런데 와서 조선 궁궐의 화려함을 기록에 남긴 게 있어요. 케이넨의 일기에도 나오고 그래요. 그러면 궁궐이 남아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좀 들기도 해요. 그런데 기록이 상반되기 때문에, 우리 기록이랑 일본의 기록이 상반되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건 종묘는 일본군이 태우죠. 종묘는 일본군이 태웁니다. 종묘에 일본인 장수가 숙소를 정했는데 밤에 헛것이 보이는 거예요. 밤에 헛 게 보여서 여기 뭐 하는 데야? 그랬더니 조선 국왕의 신주를 모시던 곳이다, 그랬더니 “에이 재수 없어.” 그리고 태워버리죠. 그거는 뭐 일본의 기록에도 나오니까. 그런데 어쨌든 전쟁으로 인해서 궁궐과 종묘가 불이 탔다.

다음에 ‘능(陵)’. 사실 성리학에서는 ‘능’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왜냐하면 풍수지리의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 때문이거든요. 동기는 서로 응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조상을 좋은데 모셔야지 우리 자손에게 좋고 그런데 조상의 묘가 손상 됐다라는 건 어마어마한 불효죠. 불효인데 여기에서 멀지 않을 겁니다. 선릉과 정릉이 불탔습니다. 이거 그래서 복원하는 데에 굉장히 애먹어요. 그 옆에 뼈들이 정말로 중종의 뼈인지 아닌지 몰라 가지고 옛날에 나이 드신 분들, 중종 한번 보신 분들 데리고 가서 중종의 뼈가 맞겠느냐 확인하고 그러는데 아니 뼈를 보고 어떻게 알아요? 그렇죠? 국과수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그런데 막 그 정도로 조상의 이거를 추스르려고 노력하는 기록들이 있는데 그거 보면 안타깝더라고요. 선조실록의 그런 내용 보면 안타까워요. 막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그러고 그런 거 보면. 전사자와, 인명피해는 몰라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피로인은 10만 명 정도로 추정하지만 몇 명 죽었는지, 몇 명이 부상 입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굉장히 많았겠죠?

또 하나, 전후에 신분제가 동요되죠. 신분제가 동요되는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첫 번째, 군공입니다. 적의 머리를 베면 어때요, 신분이 상승할 수 있으니까. 그렇죠? 신분 상승될 수 있다라는 거. 그 다음에 공명첩(空名帖)도 마찬가지예요. 공명첩은 뭐로 하면 식량 확보를 위한 건데, ‘빌 공(空)’자입니다. 서울시장 자리에 이름을 비워놔요. 뭐 누구를 비워 놓고 서울시장에 임명함이라고 국왕이 도장 찍어줘요. 그런데 만약에 군량이 없는데 군량을 10만 석을 내면 거기에다가 이름 적어주는 거예요, A. 그러면 ‘A를 서울시장에 임명함’이 된 거죠. 그러니까 당시 공명첩을 받은 사람은 시장인 거예요. 그래서 시장이 여러 명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은 그냥 명예직인 거죠, 명예직. 그런데 어쨌든 노비도 뭐예요, 천민도 곡식을 바치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니까 신분제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라는 거고. 납속(納粟)도 마찬가지이죠. 속을 바치면, 식량을 바치면 신분이 상승될 수 있었고요.

또 하나, 장례원(掌隷院)이라고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관청이 있죠. 이게 전쟁 와중에 불탑니다. 그러니까 노비들이 노비가 아닌, 노비라는 사실을 노비가 아니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이 노비인 것을 어떻게 증거를 댈 수가 없는 거죠. 증거가 사라진 거죠. 〈추노〉라는 드라마에 보면 얼굴에다가 '노(奴)'자 새기고 그러잖아요. 그거는 아주 일시적인 현상이에요. 연산군 때만 그랬어요, 연산군 때만. 연산군 때만 그런 거고 그때 시대적 배경은 인조인데 인조 때는 그건 아니고요, 연산군 때 아주 잠깐 그랬던 거거든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노비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이 전쟁이 신분제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만들고요, 그 결과 18세기 신분제가 완전히 무너지는 거죠.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라는 겁니다. 이거는 지금 우리가 쉽게 말씀드리고 있지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당시로는.

이 부분을 잘 모르실 것 같아서 제가 조금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관왕묘(關王廟)가 설립이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관왕’은 누구인지 아시죠?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예요. 우리는 관우를 신으로 모시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관우를 신으로 모십니다. 제가 가봤더니 사당에 갔더니 신으로 모시는 사당에 갔더니 진짜 얼굴 빨갛게 해놓고요, 수염 길게 해놓고 관우를 신으로 모시더라고요. 그런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관우가 이제 무장이잖아요. ‘무(武)’를 상징하는 신인데 너희 왜 관우를 안 믿느냐. 그래서 우리 명나라 군대가 관우를 믿어야겠으니까 관왕묘를 설립해 달라는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조선이 명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전국에 관왕묘가 설립됩니다. 남묘, 동묘, 기타 등등이 있는데 지금 제일 많이 남아있는 게 동묘는 남아있어요. 전철역이 아마 동묘역일 거고요. 아마 그 재래시장도 있고 해서 많이들 가시는데 시장만 가고 동묘는 안 보시는 것 같더라고요. 동묘도 한번 가보세요, 여기도 입장료 없으니까. 예, 한번 가보시면, 저기가 동묘입니다. 그런데 이 동묘가 그 다음 이후에는요, 명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으레 저기를 가요. 그러니까 명나라 사신을 위한 사신 접대처가 되어 버려요. 그러고 끝났어야 되는데 그 이후에 조선의 국왕이 충성을 유도할 때 동묘를 데리고 갑니다. 특히 숙종, 영조, 정조 등이죠. 그래서 신하들을 데리고 동묘로 갑니다. 관우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자기 형, 주군을 만나기 위해서 조조가 그렇게 꼬셔도 문을 몇 개를 때려 부수고 형 만나러 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너네 관우 그러는데 너희 인마, 좀 정신 차려. 그래서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서 동묘를, 관왕묘를 활용했다. 그래서 ‘동묘사상’이라는 것이 이때 전쟁을 계기로 들어왔다라는 겁니다.

또 하나 「삼국지」의 대중화. 요즘은 좀 삼국지의 인기가 좀 준 것 같은데 대학에서 논술한다고 또 학생들이 열심히 「삼국지」도 읽고 그랬었죠. 우리나라에 「삼국지」가 처음 들어온 건 세종 때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별로 인기가 없어요, 일단 너무 길어요. 애들이 기니까 안 읽으려고 그래요. 그런데 실제로 길잖아요. 안 읽어요,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계기로 「삼국지」가 짧아져요. 첫 번째, 왜 그러냐면 너무 길잖아요. 최소한 5권, 10권이잖아요. 핵심적으로 관운장실기(關雲長實記), 조자룡실기(趙子龍實記) 해서 삼국지를 줄여서 한 사람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한 사람 것으로. 그러니까 일단 볼륨이 줄었으니까 좀 부담이 적죠. 또 하나 이때 왜 「삼국지」가 유행하느냐면 일단은 관왕묘를 통해서 관우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삼국지에 관심을 가지겠죠? 또 하나, 전쟁으로 어쨌든 간에 어때요. 사실 아까 말씀하셨는데 조일전쟁으로 인해서 가장 먼저 양반의 가치가 떨어져요. 왜냐하면 양반이 다 지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해 줄 줄 알았는데 전쟁 나니까 어땠어요? 다 도망가고 그랬잖아요. 양반의 권위가 떨어져요. 그래서 옛날에는 양반하면 최고였는데 어때요? 양반의 권위가 점점 떨어져서 양반이라는 말이 쉬워진 거예요. 아까 말했듯이 천민도 쌀 주면 양반 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싸울 때 어때요? ‘이 양반이, 저 양반이’ 그러는 거죠. 옛날에는 양반이라는 말을 못 썼는데 대놓고 ‘아니, 이 양반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니까 그런 믿었던 양반들에게 느낀 배신감. 그런데 「삼국지」 읽어보면 어때요? 대리만족하는 거예요. 이렇게 훌륭한 장수. 만약에 이때 조자룡이 상대한 게 일본군이었다면 참 우리 조선이 이겼을 텐데, 이런 대리만족. 그러면서 「삼국지」가 크게 인기를 끌었죠. 그리고 어때요, 무능한 군주. 비판 못하죠? 성리학 체제 하에서 왕에 대해서 욕하면 큰일 나잖아요. 대신 누가 욕해 주잖아요. 그거 읽으면서 대리만족하더라. 그래서 이때부터, 조일전쟁 이후부터 삼국지가 유행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온 겁니다. 우리에게 좀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일본 쪽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참 가슴 아픈 일인데요. 일본에 아까 말씀드렸듯이 글자 쓰는 사람 없다고 그랬잖아요. 얘네는 수학 못했어요. 그러면 손가락 가지고 막 수학 했던 애들인데 이때 일본군이 와서 보고 놀란 게 조선에는 주판이라는 게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조선의 주판을 일본이 가지고 갔는데 지금은 주판 제일 잘하는 나라가 일본이래요. 세계에서 톱이래요. 왜냐하면 저도 어렸을 때 주판을 해서, 주산을 해서 우리 애들 주산 좀 가르치려고 했는데 요즘 주산학원이 없어요. 주산이 참 좋은데, 애들한테. 그런데 일본은 아직까지 주산 꽤 하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달라집니다. 우리나라 주산은요,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아실 거예요. 저 어렸을 때 봤는데 밑에 5알, 위에 2알이에요. 옛날 주산이죠? 그런데 이걸 일본이 가지고 가서 십진법으로 바꿔요. 밑에 4개, 위에 1. 그래서 9, 밑에는 1. 위에는 5해서 9 돼서 9가 넘어가면 10이 돼서 십진법 주산으로 바꾸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조선의 주산이 아니라 세계의 주산은 일본의 십진법 주산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우리의 5알, 2알 짜리 전쟁 때 일본에 가서 이렇게 됐다. 이거 아시는 분들 별로 없으신 것 같아요. 이거는 많이들 아시더라고요. 고치시에 가면 당인두부라고 있습니다. 박호인이라는 사람이 진주성전투 때 전파했다는데 정확하게는 박호인의 군에 있는 병사에서 전파되는데요, 맞아요. 우리 당인두부, 왜냐하면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을 중국이랑 같이 봐서 ‘당’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당인두부가 전래된 것은 맞는데 이거는 사실인데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본에는 두부가 없었는데 이때 두부가 전해졌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일본은 연두부라고 해서 아시죠? 일본 가시면 아주 부드러운 두부 먹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두부가 한 30가지 된대요. 맛두부, 뭐 무슨 두부, 뭐.. 탄두부, 많대요. 그런데 일본은 딱딱한 두부가 없었는데 이렇게 당인두부 가서 드셔보시면 딱딱해요. 우리나라의 막두부에 가깝게. 그래서 연두부가 아닌 딱딱한 두부가, 조선의 딱딱한 두부가 전해진 거지 일본에 두부가 이때 전해진 건 아니에요. 그건 잘못 알고, 잘못 얘기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아까 도자기 얘기를 했으니까 이거는 넘어가고 이때 성리학이 수용됩니다, 일본에. 강항이 그런 얘기를 해요. 왜에 성리학을 막 전파하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러냐면 피로인들, 양반들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성리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이 성리학의 도리를 알면 앞으로는 조선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을 전파하거든요? 그래서 일본이 조선의 성리학을 받아들여서 국학을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이게 가슴 아픈 일이에요. 이 국학이 메이지시대에 조선침략론으로 변합니다. 요즘에 ‘정한론(征韓論)’이라는 용어를 잘 안 씁니다. 아까 전에 뭐 임진왜란이 맞느냐, 아니냐 이랬는데 왜냐하면 정한론이라는 게, ‘정(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정벌’ 할 때 ‘정(征)’이잖아요. 이거는 천자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에요. 그니까 이 ‘정한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일본의 덴노가 잘못된 한국을 바로 잡겠다는 얘기잖아요. 굉장히 우리 입장에서 기분 나쁜 얘기죠. 그래서 ‘정한론’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이제는 ‘조선침략론’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혹시라도 하실 일이 있으면 ‘정한론’이라는 용어를 좀 삼가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립니다. 국학이 또 그렇게 갔죠.

이때 일본이 우리나라 책을 많이 약탈해 갔습니다. 약탈해가니까 어때요? 책을 보관해야 되겠죠? 그래서 문고를 설치합니다, 각 지역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가장 도서관이 지역에 잘 돼 있는 데가 일본이래요. 일본 도서관의 모체가 바로 전쟁 때 약탈해 간 우리 책이 지금 현재 일본의 도서관을 만들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 얘네들은 활자도 없었는데 우리 활자를 가지고 가서 인쇄소를 발전시켰고, 그것이 이제 국학으로 이어지기도 했죠. 이거 뭐 도서관에 왔으니까 한번 말씀드릴게요. 문고판 서적 있죠? 조그마한 것. 그거 어느 나라에서 처음 만들었는지 아세요? 일본이에요, 일본. 일본입니다. 일본이 전쟁 나가서도 책 읽겠다고, 전쟁 나가서도 책 읽는데 책이 크니까 이게 어떻게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전투복 윗주머니에 넣을 만한 책을 하나 만든 거예요. 그걸 문고판으로 쏙 넣은 거죠. 그런데 이게 빅히트를 칩니다. 책 읽는 것도 좋지만 책을 여기다가 넣다 보니까 심장 있는 데거든요? 싸우다가 총알이 날아와서 관통되는 경우도 있지만 또 책이 막아주기도 해요. 그래서 막 군인들마다 전부 다 하나씩 다 꽂고 다니는 거죠. 어쨌든 책 읽는 문화가 많이 발달됐다라는 것이고. 일본의 아주 극우적인 역사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했던 말이 일본은 신의 나라이고, 신의 후예가 통치한다면 일본이 굉장히 강하다라고 얘기했던 아주 유명한 역사학자죠. 도쿠토미 소호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1592년, 그리고 1597년에 조선 침략을 뭐라고 표현했느냐면 ‘일본의 사치스러운 해외 유학이었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 얘기는 당시 조선의 발달된 많은 문물을 일본이 받아들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