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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외세 방어의 거점이 되다

강화도에 가면 강화산성에 남장대라는 곳이 있습니다. 강화 유스호스텔 있는데요. 그 뒤로 남장대에 올라가면 사실은 이 강화도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강화재단 대표이사를 하면서 손님이 오시면 강화도를 내려다보는데 가장 좋은 곳으로써 여기 남장대. 여러분들 강화 읍내에 차를 타고 들어오면 여기 11시 방향에 보면 큰 정자 같은 게 보입니다. 그게 남장대입니다. 장수들이 지휘했던 곳입니다. 거기서 보면 강화 시내가 그대로 보입니다. 여기가 이제 고려 궁지가 있는 곳이고 저 멀리가 바로 송악산이죠. 이북 땅이 바로 보이는 이런 곳입니다. 여기 남장대에서 보면 강화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입니다.

강화도. 오늘 제가 “외세 방어의 거점이 되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강화도는 대단히 강화라는 이름 자체. 제가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 보면 오늘 강의는 계속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8쪽에 보시면요. 강화도 개관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8쪽에 보면 명칭이라는데 강화(江華). 명칭의 유래라는 곳에 가면 강화를 상징하는 글을 제가 소개하는데 8쪽에 보면요. 명칭 유래라는데 보면 강화. 그 다음에 또 뭐냐 하면 혈구(穴口). 그 다음에 또 뭡니까? 해구(海口). 이렇게 나오죠. 혈구. 혈이라는 게 뭡니까? 가장 중요한 곳. 구멍. 혈구. 우리가 여러 가지 360개 경락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혈처(穴處)가 되는 거죠. 그렇죠? 대한민국에서 현재 조선시대 경복궁 있는 곳을 혈처라고 하죠. 가장 중요한 곳이다. 여기에 보면 혈구라고 하는 것은 이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하던 것입니다. 바로 혈처가 되는 입구가 된다. 그 다음에 해구라는 것도 바다의 입구이다. 그리고 밑에 보면 강화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강 아래에 있는 곳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이거는 물론 제가 민족문화 대가에 있었지만 저는 강화라고 하는데 ‘강’이라는 것은 ‘강’이라는 뜻이고 ‘화’라는 것은 ‘화려하다’는 뜻이죠. 중화민국할 때 ‘화’자. 그렇죠? 이거는 뭐냐 하면 이 ‘화’자는 ‘꽃 화(華)’자입니다. 꽃과 같은 뜻이 됩니다. 우리 조선시대 때 삼각산을, 북한산 삼각산을 꼭 꽃과 같다 해서 화산(華山)이라고 합니다. 그때 ‘화’자도 ‘화려할 화’자를 쓰는 거예요. 그리고 풍수지리에서 ‘화’라고 하는 것은 꽃이 되는 것이고 땅 가운데서 풍수지리에 꽃이 피는 곳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고려시대 때 묘청이라는 사람이 서경에 천도(遷都)를 하면서 대화공이라는 것을 짓습니다. “서경이 가장 길지다.” 태조 왕건이 그렇게 얘기했죠. 가장 길지이고 바로 거기에 꽃이 피는 장소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 그래서 큰 화려한 대화공이라고 지은 거예요. 강에 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 나중에 제가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만 여기 위에 임진강이 있죠. 임진강이 여기서 내려옵니다. 여기 위에 가면 오두산성이 여기 있죠. 그리고 여기 한강이 마주치죠. 그래서 여기 조강이 돼서 위에서 예성강이 내려옵니다. 세 개의 강이 한 곳에 모이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강의 중심, 강의 꽃. 최고의 꽃이다. 이 한반도에서 이 세 개의 강이 동시에 모이는 곳. 그리고 이 강이 여러분 알다시피 이쪽을 갑곶쪽으로 내려가고 일부는 이 바깥으로 나간다. 제가 그 전에 강화고려재단 대표이사 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이번에 보니까 남북 협상,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나서 남북이 공동으로 수역을 개발을 했는데요. 이쪽을 개발했는데 이쪽은 사실은 배가 다니면 최고의 관광지가 되는 거예요. 지금 모래가 너무 많이 쌓여있기 때문에 배가 못 다닙니다만 이쪽은 아주 중요한 혈처가 되는 곳이다. 지금은 아주 별 볼일 없는, 강화군 하면 아주 별 볼일 없는 인구 6만밖에 안 되는 군(郡)이지만 한반도 전체로 볼 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강화도가 바로 한반도의 배꼽입니다. 배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왜 지금 중요하지 않은가. 바로 분단이 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보면 여러분들 앞으로 가면 성천포가 있고 여기 가면 평화전망대라고 있습니다. 이제 만들어진지 개방된 지 군부대, 해병대 부대가 있다가 지금 개방이 돼서 평화전망대에 가면 바로 이 건너편에 개성 송악산까지 거리가 1.9km~2km밖에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고성에 가면 휴전선 가서 통일전망대 가면 휴전선 끼면서 남방한계선 2km, 북방한계선 2km. 우리가 가장 북한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 통상 4km 앞입니다. 그런데 이 강화도 평화전망대에 가면 바로 2km 앞에 개성 땅이 바로 보이는 거예요. 여기서 개성 시내까지는 18km밖에 안 돼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배 타고 갑곶 건너서 평화전망대 오는데 18km, 여기서 개성 가는 것이 18km. 아주 가까운 곳이에요. 그만큼 강화도는 대단히 지리학적으로 중요한. 이렇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수도를 개성에 정하거나 한양으로 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모든 물자가 이 한강을 통해서, 서해뱃길을 따라서 이리로 들어와서 개성으로 가거나 서울로 들어가요. 그런 점에서 강화도가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에요. 지금은 아주 잊혀진 지역이지만 강화도가 이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지금도 강화도 가까이에 여러분들 알다시피 바로 여기에서 조금만 더 밑으로 내려가면 영종도 지금 인천공항이 있습니다. 다 같이 붙어있어요, 지금도 대한민국을 들어오려면 인천공항이 가장 중요한 관문입니다. 인천공항을 거치지 않고는 사실 대한민국에, 물론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인천항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모든 물동량의 90% 이상이 인천공항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러면 고려, 조선시대 때 경주에 신라가 있기 전에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때는 이 뱃길. 이 갑곶을 통하는 이 뱃길이나 아니면 이쪽에서 교동으로 들어오는 뱃길이 오늘날 인천공항과 같은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이 조선으로 들어오려면 그때는 비행기가 없기 때문에 철도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바로 오늘 우리가, 제가 오늘 강의 제목을 ‘외세 방어의 거점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강화가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 하는 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현재 우리 강화도는요. 여러분들 여기 보면 여기 아주 반듯하게 돼서 6개 군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교동이고 여기 지금 교동 사이로 다리가 놔졌고 석모도 사이에도 다리가 놔져버렸어요. 여기 다 강화군인데. 그런데 사실은 왜 강화도가 외세 방어의 거점이냐면 현재 우리가 지도를 갖고 시뮬레이션을 합니다. 기법이 있어서, GPS를 갖고. 그러면 12세기 당시의 강화도도 이렇게 반듯 반듯 했을까. 절대로, 여기 지금 제가 지도를 얻어왔는데 당시 재단에서 온 지도인데 이 지도를 가만히 여러분들 보시면 그야말로 리아스식 해안. 아주 땅이 어긋나고 교차되어 있죠. 그리고 실제 12세기 당시를 지금 현재 바닷물하고 지도를 시뮬레이션 해보면, 현재 마니산이 있는 쪽은 따로 섬이 있습니다. 섬입니다, 섬. 마니산 쪽, 전등사 쪽. 쉽게 얘기하면 전등사 쪽은 섬이고 실제 이것도 섬이 아니냐. 지금 현재 평화전망대에 있는 양사면 이쪽도 사실은 하나의 섬이 아니냐. 그러면 이런 것이 그동안의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전형적인 개간지대입니다. 개간을 해서 전부 다 이걸 메꾸다 보니까 현재의 지도로 왔다. 이걸 잘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왜 고려 때 40년 간 여기가 수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이 강화도는 완전히 아메바같이 흐물흐물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그러니까 실제 학자들은 전등사 있는 이쪽 마니산 쪽은 분명히 하나의 섬으로 떨어져 있고 이쪽도 섬이 아니냐 지금 추정을 하는데. 이거 겨우 붙어있는데, 강화도 북단. 그러니까 그때는 고려시대 때만 하더라도,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거의 이거는 아메바 식으로 흐물흐물하게 되어 있다. 이거는 지금 현재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입니다.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그리고 바닷물이 나갔을 때 완전히 뻘이 되는 거죠. 현재로 밀물과 썰물 사이의 시간이 몇 시간인지 아십니까? 혹시 아시는 분 계세요? 6시간입니다. 그러면 이 사이 같이 6시간이면 충분히 공군이 폭격을 하면, 순식간에 6시간이면 충분히 폭격할 수 있죠. 그런데 몽고군이 들어왔을 때, 조선에 청나라 군사가 들어왔을 때, 6시간 안에 여기 상륙을 해서 처리하고 빨리 도망가지 못하면 이 섬에 완전히 갇혀버리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강화가 하나의 중요한 방어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밀물과 썰물이 서해안 쪽은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크단 말이죠. 이렇기 때문에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강화도는 지금 주변 한 바퀴 다 도는데 100km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밀물과 썰물이 있기 때문에 당시에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들어온다고 해도 전혀 이거는 전투를 할 수 없는. 물론 몽고 같이 세계 최강의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쳐들어갈 수 있지만 이런 점에서 상당히 강화가 천년의 요새가 될 수 있는 그런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요새는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만 지금 같이 3월 초까지는. 1월 달부터 구정이 지나고 나서 날이 풀리기 시작해서 3월 초까지는 소위 유빙(流氷)이라 해서 한강 북단에서 얼음들이 녹기 시작하면 유빙이 쭉 흘러들어옵니다. 강화도 앞바다 쪽으로. 이게 상당히 배한테는 가장, 요새 쇄빙선도 있지만, 과학이 발달해서. 이 유빙이 강화도를 막는 천년의 하나의 어떤 방어의 역할을 했다. 이런 점이 오늘 우리가 답사를 가게 됐을 때 이게 외세 방어의 거점이다 하는 지리적인 조건은 조수간만이 6시간 차이다. 그 6시간 안에 모든 것을 결정해야 된다. 지금 같으면 로켓을 쏜다든가 비행기를 폭격한다든가 6시간 언제든지 가능한 얘기예요. 그러나 말을 타고 들어가서 보병이 들어가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오는 데는 대단히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간척사업이 고려 때 최씨 정부 때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로 북쪽 지역. 이쪽 지역이 최씨 정부가 개척하고 그 다음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숙종 때 가서 개척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여기에 지금 들판이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만 이 들판이 전부 다 간척을 하면서 육지가 돼버린 것입니다.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는 걸 여러분이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마니산 쪽에서 본 강화도입니다만 이 사이에는 사실은 전부 다 옛날에는 바다였다. 이걸 전부 다 메워서 간척을 하다 보니까 이게 하나의 섬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를 보는데 역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과 인물도 중요하지만 역사지리라는 것. 애초에 역사학이라는 것은 역사지리학. 역사와 지리가 같이 붙어가는 거예요. 이 책은 이 자료는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이라는 것은 개성의 부. ‘달려갈 부’자, ‘원’은 도와주러 간다. 그래서 개성에 있는 군사들이 달려가서 ‘원’, 도와준다. 누굴 도와주냐. 강화도를 도와준다는 거예요. 바로 개성 군사들이 1866년 강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군이 쳐들어왔을 때 개성 군사들이 여기 강화에 와서 도왔던 일기 형식으로 지어진 책입니다. 이 원문이 한문이 있어서 어려운 것 같지만 다 번역이 잘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이 책을 소개한 것은 이 원자료가 바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있습니다. 이거는 제가 강화고려역사재단 제가 대표이사 할 때 일부 이거는 번역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이 자료를 허락을 맡아서 번역을 해서 이 책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이 책은 1866년 강화도 병인양요 때의 기록이다. 개성군의 종군기(從軍記)이다. 오늘 여기 답사자료집에는 병인양요가 1866년 10월 달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뒤에 설명 그거는 양력으로 표시한 거고 이 책은 음력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제가 이거는 9월 달로 한 거예요.

9월 6일날 프랑스군이 우리가 처음 답사를 가는 여기에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이틀 만에 강화를 함락을 하게 되고 그러자 9월 11일날 개성에서, 정부가 개성 군사들 빨리 오라. 개성하고 지척이에요, 강화도하고는요. 우리는 개성하면 아주 먼 땅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개성이 멀다 보니까 고려사도 아주 먼 것으로 생각하고 조선사는 아주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 자체가 잘못된 거란 말이에요. 개성의 군사들이 여기 편성이 돼요, 220명이. 그래서 여기 왔는데 이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고 나서 이 조선정부군이 양헌수군이라고 정족산성 전투라고 하죠. 전등사. 조선정부군이 바로 이 광성보 쪽으로 해서 바로 전등사 쪽을 점령합니다, 정족산성을. 이 점령하는 것이 10월 1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때야 개성군사가 와서 현재 연미정. 이번에 답사가게 되는 연미정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보면 10월 4일 날 개성군이 들어왔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그 다음 날 프랑스군이 철수해 버린 거예요. 정족산성에서 10월 1일 날 전투에서 패해버린 거예요. 이 사람들은 와서 군사편성은 한달 전에 편성이 됐는데 이미 조선후기에 얼마나 이게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수들이, 개성군 장수들이 먼저 바로 들어와야 될 거 아니에요, 강화도로. 대원군 별장에, 서울에 가서 인사하고 그 다음에 오는 거예요. 거기 가서 먼저 인사하고, 장수들이. 우리 이제 출동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9월 11일날 군대가 편성돼서 20일을 지체해서 넘어오는 거예요.

이게 지나고 나서 역사라는 게 참 무서운 거예요. 9월 6일날 들어왔는데 한 일주일 후에 9월 11일날 군대를 편성해 놓고 장수들이 당시 실권 권력자인 대원군한테 가서 인사하고 와서 군대가 들어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거 제가 보고 참 가슴 아픈 일인데 그러고 나서 10월 5일날 프랑스 군이 해산하니까 나머지 한 일주일동안 10월 5일에서 9일간은 강화도 복구 작업하고 강화도 경비하고 그러다가 10월 14일날 해산한 거예요. 그 해산하면 끝이지. 왜 이 책을 내느냐. 이러고 나서 이 기록은 그 다음 해 1월까지 1867년 1월까지 일기를 쓴 거예요. 왜 그러냐. 우리가 여기에 참전을 했으니까 조선 정부가 우리에게 포상을 주십시오. 이걸 하기 위해서 쓴 게 개성부원록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이것도 우리가 중요한 역사입니다. 정말 볼 것 없지만 이것이 조선 후기의 우리의 실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강화도에 와서 실제 한 10일 정도, 한 보름 정도밖에 안 왔지만 이 220명의 군대가 포상을 받기 위해서 이 일기를 쓴 걸 모아서 조선정부에 주는. 그래서 여기 8쪽에 보면요. 이때 1867년 1월에 개성군 치하를 위해서 조선정부에서 특별히 과거시험을 쳐서 이 사람들에게 무과(武科)를 막 남발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자기 전투를 과장하기 위해서 10월 달에 끝났는데 그 다음 1월 달까지 석 달을 더 연장했죠. 그뿐만 아니라 여기 보면 실제 이 일기는 1866년 이미 7월 달부터 이 전투가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오페르트라는 사람이 이 강화도에 들어온 기록까지 적어서 자기들의 전공을 과시하는 이런 현상이 이때만 있었을 것입니까? 우리가 이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여기 보면, 8쪽에 보면 오페르트라는 사람이 누구냐. 이 사람이 여러분 옛날 교과서 배울 때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람이에요. 이 양반이 대원군 묘를 파헤친 것은 세 번째. 1868년 병인양요 끝나고 나서 2년 후에 와서 남연군, 최고의 명당이라고 생각하고 대원군이 아버지 묘를 썼고 이것 다음으로 대원군도 권력을 잡았고 아들도 고종도 임금이 됐고 이렇게 됐습니다만 이 사람이 세 번째 팠지만 두 번째는 여기 해미연에서 서산에서 배를 타고 강화까지 와서 여기에서 측량을 했던 이런 사실이 여기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면 전투는 없어요. 그러나 그때 정황들이 자세히 보고되어 있는. 그런 점에서 이 자료를 제가 소문을 듣다가 그래도 우리가 번역을 해서 기록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어서 한 거예요.

강화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고려 때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쭉쭉 갑니다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강화는 천년의 요새였다. 이거는 전부 다 간척된 땅이다. 이게 다 옛날에는 바다였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고요. 왜 이것이 고려로 왔냐면 바로 1232년에 몽고 군사가 들어오니까 이 강화가 군이 됐고 여기를 강도(江都)라 했다. ‘도’라고 하는 것은 ‘강 도’ 잘못 읽으면 ‘강 도’가 ‘강도’가 되는 거예요. 칼 든 강도가 아니고 강이라는 것은 강화도. ‘도’라는 것은 도시할 때 ‘도’자는 옛날에는 지방에 다 성이 있습니다. 그걸 읍성이라고 하고 서울에 국왕이 거주하는 곳을 도성(都城)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강도’라고 하는 것은 강화에 있는 고려의 수도라는 것이에요. 강화의 고려 수도. 이걸 강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책을 읽다 보면 강도라는 얘기가 나와요. 강도. 강도라는 것은 어감이 그런 강도가 아니라 바로 강화의 도성이다. 그래서 1232년에 여기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 재미있는 것은요. 이 강화도에는 이름들이 그 강화도 고려궁지 뒤에 산이 바로 송악산이에요. 바로 개성에 만월대가 있고 뒷산이 송악산이죠. 고려궁지가 있는 송악산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대로 개성에 있는 흥왕사. 전부 다 그대로 안고 온 거예요. 여러분은 기억이 없지만 저는 1993년~94년에 비즈니스 컬러로 우연히 가다 보니까 유타주를 제가 가서 한 2년을 있었어요. 거기서 비즈니스 컬러로 가 있었는데 이게 지명들이 전부 다 구약성경. 요르단 강 전부 다 있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면 몰몬들이 청교도에서 쫓겨나서 동부에서 계속 도망 오다 보니까 계속 솔트레이크라는 호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성경에 나온 사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정착을 한 거예요. 이제 여기가 우리 사는 곳이다. 그래서 거기다 몰몬들은 전부 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도시 이름들을 다 쓴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강화도도 사실은 개성에 있는 중요한 사찰. 아까 장 사무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4월 7일부터 강화도에 소위 진달래 축제가 있습니다. 진달래 축제가 있는 산도 고려산이에요. 고려에서 가져왔다해서. 이런 식으로 해서 강화도는 작은 개성이다. 강화도는 물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강화도가 ‘강’자도 물이 많지만 또 뭐라 합니까? 강화를 심도(沁都)라고 합니다. ‘마음 심’자에다가 ‘물 수’자 삼수변을 붙이는 심도. ‘물이름 심’자입니다. 강화도를 또 다른 이름으로 심도라고 합니다. 물이 많다. 실제 강화도는 1년 농사지으면 3년을 먹고 삽니다. 이런 것이 강화도가 수도로서. 그리고 또 언제든지 강화도에서는 남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갈 수 있죠. 육지로 들어올 수 있는 이런 아주 천혜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분계선이 묶여서 아주 형편없는 도시가 돼버린 거란 말이에요. 도시가 아니라 군이란 말이에요. 인구 6만, 그것도 노인들이 대부분 많이 사는 곳입니다. 제가 있어 보면요. 그런 점에서 강화도는 그런 조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최씨 정부가 들어와서 강화도에 이렇게 성을 쌓고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도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보시는 거죠. 지금도 우리가 보면 강화산성들이, 지금부터 700년 전, 800년 전에 만들어진. 1300년대니까 600년 전의 성터들이 남아 있습니다. 도로공사를 하다 보니까 나오는 거예요. 성터들이 일부 발굴을 하고 있는. 똑같은 것이 고려는 아주 전쟁을 잘 하는 나라입니다. 성을 항상 3중성을 쌓았습니다. 3중성. 황성(皇城)이 돼서 개성 자체의 황궁을 쌓고 내성이래서 개성(開城) 시가지를 쌓고 그 다음에는 더 바깥에 나성(羅城)이라는 것을 쌓습니다. 3중성을 쌓았습니다. 항상 전쟁이 있으니까. 여러분들 조선시대에 전쟁 해 봐야 임진왜란 7년밖에 안 해요. 병인양요(丙寅洋擾) 한 달입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한 달이에요. 그런데 고려는 거란과 30년짜리 전쟁을 벌여요. 몽고와 여기서 30년 전쟁을 벌여요. 대단히 강한 나라예요. 이런 전쟁에 대한 것. 이런 것이 개성이 3중성을 만든다는 건데 역시 강화도도 개성과 똑같이 3중성을 만들고 있다.

현재 강화도에 고려궁지 여러분 가면 다 거기 가죠. 우리도 갑니다. 외규장각이기 때문에 가는데 사실은 이곳이 고려궁지로써는 조금 좁지 않느냐. 그런데 사실은 이 강화도 읍내에 있는 땅을 다 사들여서 발굴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들, 경주에 가면요. 지금 경주 시내에 가면, 제가 그쪽이 고향이거든요. 잘 알죠. 경주는 지금 경주역전 앞에 팔우정로터리있고 고분군. 대부분을 전부 다 사서 다 민간을 헐어버렸거든요. 그거 발굴이 시작되면 엄청나게 나온단 말이에요. 강화도도 사실은 반천리 이쪽을 전부 다 발굴했으면 싶은데 현재 이 자리가 과연 고려궁궐 자리냐. 다 역사가 이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얘기하면 웃지만 아마도 상당히 좀 좁다. 차라리 좀 서쪽 편에 강화여고가 있고 강화향교가 있습니다. 그쪽 자리가 오히려 고려궁궐 자리가 아니냐. 문화재청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거는 뭐 발굴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니까. 전부 다 보상을 해야 되니까 요새 함부로 못합니다.

이전 고려궁지. 여기 고려궁지 옆에 소위 외규장각이라 해서 여러분들에게 유명한 병인양요.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어디로 오냐 하면 정족산성에서 전투 벌이고 그 다음에 아까 강화를 점령하거든요. 점령해서 바로 외규장각이 있는데 규장각은 내규장각은 창덕궁에 있었죠. 지금 창덕궁에 있다가 일제시대 때 창경궁 옆으로 옮겼다가 그게 지금 서울대학교에 가 있죠. 서울대학도서가 아니에요. 규장각 도서예요. 그리고 외규장각은 지방에 있다. 이 강화도에 있는 거예요. 여기 있는 외규장각은 고려 왕실의 중요한 의회. 그 다음에 각종 족보. 이런 것이 여기 있는 거예요. 여기 조선시대 때 혹시 강화도를 보장처(保藏處)라 합니다. 보장처. 보장처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보’자는 ‘보호할 보’자에다가 밑에 ‘흙 토’자가 붙습니다. ‘보’하면 어떤 방어시설 이런 뜻입니다. 진보 할 때. ‘보장, 숨긴다. 만약에 전쟁이 나면 조선시대의 종묘에 있는 모든 신주(神主)들을 옮기는 것이 강화도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에요. 아까 얘기했지만 자연적인 조건이 좋으니까 그렇게 해서 보장처로 생각을 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왕까지 다 강화도로 온 거예요. 그 다음 9년 후에 병자호란 때는 왕비들하고 왔는데 길이 막혀서 못 가니까 왕이 어디로 갔습니까? 남한산성으로 간 거예요. 그만큼 중요한. 여기에 있던 외규장각이 전부 다 약탈당한 거예요. 그래서 외규장각 자료가 다시 복원이 되고 외규장각의 중요한 자료가 나옵니다. 그 얘기가 나중에 차차 해 드리겠습니다. 그 얘기는 여기 16쪽. 16쪽 외규장각과 외규장각 의궤(儀軌)라는 여기에 보면 바로 병인양요 때 이 사람들이 300편 이상 가져간 거예요. 가져가서, 지금 여기 가면 정말 귀중한 분이 박병선 씨라는 분이 이걸 갖다가 여기 보면, 1979년, 17쪽에 보면 앞에서 세 번째. 파리 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는 박병선 씨라는 사람이 사서로 있다가 여기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비로소 찾아낸 거예요. 우리가 가서 조선 정부가 왕실의 귀중한 도서가 갔는데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다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이런 역사가 우리가 지금도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얘기 못합니다. 이게 1866년에 가서 1979년. 그러니까 300년 동안 이게 어디 갔는지를 모르다가 우리 박병선 씨라는 사람이 프랑스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이 책을 찾아낸 거예요. 그래서 이 목록을 작성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갖고 우리가 할 때 이게 우리 거라고 하니까 그 다음에 프랑스가 요새 고속전철 떼제베(TGV)를 수출하기 위해서 한 권을 가져온 거예요. 앞으로 주겠다. 안 줘버리잖아요. 그렇게 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하다 보니까 외규장각뿐만 아니라 아마 최초의 금속활자였던 금속활자로 만든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도 프랑스에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제가 좀 우스개소리를 할까요? 여러분들 혹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다 지나가서 재작년에 했는데 지금도 아마 네이버에 들어가서 직지코드. 다빈치코드 하듯이 직지코드라는 것을 한번 쳐보면 한국의 금속활자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데 이것을 캐나다에 있는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식으로 해서 이 사람 주장은 뭐냐면 한국에 있는 금속활자가 거기에 있는데 그 다른 프랑스 아비뇽이라는 문서에 보면 구텐베르크가 만든 세계최초의 활자라고 하는 구텐베르크의 영향이 고려의 인쇄기술이 그쪽으로 넘어갔다. 이런 기록을 갖고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2017년 가을에 다빈치코드 식으로. 이런 것들이 다 보물코드가 다 가버린 거예요. 정말 아쉬운 그런 역사의 단계에 있는. 그리고 이때 이것만 가져간 게 아니라 정족산성 전투에서는 전등사에서는, 여러분 전등사에 뭐가 있습니까? 전등사에 있는 우리 역사 유적으로써 전등사 하면 상징되는 또 다른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소위 조선에서는 실록을 만들면 처음에는 서울에 놔두고 전주사고에 놔뒀다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결국 남잖아요.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고를 네 군데를 만들어서 분산한 거예요. 그중에서 전등사에 정족산사고라고 해서 4대사고지 중에 하나가 바로 전등사에 있는 거예요. 이때 정족산 전투 때 프랑스 군이 여기 와서 가져갔을 것이다. 상당히 자료를 가져가고 아마 그런 점에서도 강화도에는 상당히. 그리고 아까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병인양요와는 관계 없습니다만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일부가 봉은사에 있었다. 강남에 있는 원나라가 왔으니까, 강남에 있는 중국 승려가 와서 고려 때 봉은사에 있는 대장경을 가져갔다.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대장경도 강화도에 중요하지만 우리가 외세와 관련시켜서는 조선왕조실록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강화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의궤에서 강화도 궁궐들을 그림으로. 이런 게 의궤가 되는 거죠. 중요한 기록을 사진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그림으로 남기는. 이 의궤는 통상 우리가 행사를 하면 행사한 것을 전부 다 그림으로 남겨놓은 거예요. 지금 수원화성에 가보면요. 여러분 수원화성에 가보신 분들 계시죠? 수원화성에 가보면 그 행궁(行宮)에 들어가 보면 수원화성 행궁도 같은 것을 잘 의궤를 복원해서 거기다 붙여놨습니다. 아주 큽니다. 이런 의궤들이 있는데 컬러로 만든 것은 왕실에 있고 매판 6본을 만듭니다. 나머지 흑백으로 묵으로 한 것은 각 관청에 보관하는 이런 형태를 갖고 있다. 소위 강화도를 지키는 북쪽 산성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이거는 아주 강화도에서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습니다. 이걸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드냐 마느냐 하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이 성당은 보면 사찰 같죠. 천주성당. 이렇게 해서 건물도 우리 전통적인 건물입니다. 전통적인 건물에 영국성공회. 지금 영국성공회 건물은 조선일보 옆에 지금 있는데 고종의 길이라고 해서 새로 양보를 했습니다만 그 성공회성당이 1902년에 만들어진 것이 있습니다. 이거는 이 사람들이 와서 성공회성당을 조선일보 옆에 있는 것 같이 영국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전통에 맞춰서 지은 독특한 건물입니다. 사찰하고 똑같습니다. 일주문 들어가서 만드는. 독특한 건물들. 이런 것도 우리가 고려궁지에 가면 한번 볼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강화를 뭐라고 얘기하냐면 물의 도시다. 한반도의 배꼽과 같은 곳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또 하나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다. 강화에는 항상 그런 게 있어요. 고려와 근대의 역사를 갖고 얘기합니다만 저 위에 세계문화유산 들어가 있는 고인돌부터 시작해서 고대시대 유물부터 시작해서 근대, 현대까지. 지금 여러분 강화도에 가시면 강화도에는 크게 세 가지 산업이 있는데 소위 화문석, 지금 없어졌죠. 또 하나가 뭐냐면, 뭐예요? 직물업입니다. 직물업 있는데 그 직물업 옛날 공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강화도가 근대 산업의 현장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강화도에 다 가셨으니까 안 가신 분은 없는데 강화도에 갔을 때 문수산성 한번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이 문수산성은 강화도에 있습니까? 아니면 김포에 있습니까? 김포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문수산성을 여기 중요한 것으로 답사자료집에 넣어놨습니까? 여기 보면 7쪽에 보면 제일 먼저 답사코스에 문수산성이 들어갔다. 사실은 이 문수산성하고 맞은 편이 뭐죠? 갑곶이죠.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여기 보면 강화도 읍성은 저쪽에 있는데 이거는 뭘 얘기하냐 하면 사실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거예요. 갑곶하고 문수산성은 강화도 염하(鹽河)를 마주치고 서로가 마주보고 있죠. 서울 방어의 전진기지입니다. 문수산성은 강화도에 있지 않지만 바로 강을 사이에 두고 갑곶돈대가 서로 마주보면서 문수산성은 바로 서울을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사실 문수산성은 상당히 중요한. 그래서 이번에 답사가면 제일 먼저 차를 타고 문수산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강화에 이미 들어가기 전에 통진을 지나면서 보면 오른쪽 2시 방향에 보면 높은 산이 있는데 그게 바로 문수산성이 저기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앞에만 남아있는데 문수산성에 올라가면 바로 이 강화의 염하. 광성군이 초지진 염하가 한 눈에 보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강화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하나의 전진거점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문수산성.

아주 경치가 좋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강화도에 가면 순무나 그걸 먹으려고 가지 이거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병인양요 때 큰 전쟁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아까 얘기했지만 정족산성. 전등사에서의 전투. 양헌수군. 조선군이 포수를 데리고. 정규군도 아니고 포수들 데리고 싸운 거예요. 또 하나 전투가 문수산성 전투예요. 이거는 그때 쥐베르라고 프랑스군의 종군기자로 온 사람이 그린 거예요. 그때는 카메라가 없으니까. 이게 신미양요에 가면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미군들이 사진 찍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1866년 당시에는 사진이 없고 쥐베르라는 사람이 당시에 전투를 그린 겁니다. 바로 밑에서 연미정에서 전투가 있는 것이고. 이 사료는 상당히 귀한 사료인데 개성부원록에 제가 이걸 인용했는데 사실은 돈이 없어서 흑백사진을 사실 담았는데. 여기 실려있는데 LG재단에 명지대학에 가 있는 걸 사정사정해서 사진을 얻었는데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진인데 이 책 개성부원록에 들어가 있는 사진입니다. 바로 강화. 아까도 말했듯이 아까 남장대에서 강화도를 봤죠, 처음에. 그거 같이 역시 이쪽 강화산성에서 강화읍내를 본 쥐베르가 그린 그림입니다. 거의 뭐 지금하고 비슷한. 보시다시피 문수산성과 갑곶이 마주있는 거예요. 이거는 결과적으로 이 군대가 들어오면 서울로 들어갑니다, 서울로. 이걸 막기 위한 것이 바로 문수산성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강화도를 하나의 방어의 거점으로 생각할 때 반드시 강화도를 가면 제일 먼저 우리가 봐야 될 것이 바로 갑곶과 문수산성이다. 이거 아무도 안 봅니다.

여기 월미곶이라 하는 곳도 연미정이죠. 이 곶이라고 하는 게 하나의 군사기지인데요. 이것도 돈인데 우리 지금 월미도 있죠. 그리고 또 옛날 협궤열차 가면 거기 소래. 소래 거기도 월곶이 있지 않습니까? 방어진지가 옮겨가면서 이름을 그대로 갖고 가는 거예요. 마치 개성에 있는 도시 이름과 사찰이 강화도로 오듯이. 이런 점에서 이 강화도는, 유도라는 곳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옛날에 홍수가 났을 때 북한에 있는 소가 쓸려 내려와서 여기에서 그렇게 한 거죠. 바로 이게 보이는 거죠. 예전에는 바로 송정. 여기에서 몽고군사가 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성천포에서 이리로 들어오는 그런 길. 상당히 중요한 그런 루트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이번에 답사를 가는 곳은 주로 여기 갑곶. 이 밑에 광성보, 초지진 이리로 가는 거예요.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바로 프랑스군이 들어왔을 때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병인양요와 관련된 겁니다만 양헌수군. 사실은 양헌수가 정부의 임명을 받고 600명이 들어왔습니다만 다 정규군은 없고 포수들. 포수들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 포수들이 용감히 싸운 거예요 프랑스군을 격퇴한 거예요. 양헌수군들이 여기로 들어와서 정족산성이 바로 전등사 있는 곳에 주둔하고 그 다음 개성군은 이리로 바로 넘어와서 연미정 쪽으로. 월미곶하고 연미정 쪽으로 들어오는 이런 것이 이 책에서 일기를 토대로 해서 지도를 한번 그려본 거예요. 이게 소위 연미정이라고 하는. 거의 정말 연미정, 왜 이게 연미정이냐. 10쪽에 보면 연미정. 현재 정자의 이름으로 연미정, 제비꼬리다. 제비꼬리. 왜 제비꼬리냐?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여기 예성강과 한강이 흐르는 것이 마치 제비 뒤에 있는 꼬리. 두 꼬리 같이 보인다. 또 아니면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서 여기에 와서 조강 쪽으로 갑곶 쪽으로 흘러가고 하는 교동 쪽으로 흘러가는 이것도 제비꼬리 같다. 그래서 연미정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군사기지이고 이 연미정은요, 한 4~5년밖에 안 됐어요. 개방된 게. 그동안 해병대 기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는 사실 우리가 못 갔어요.

그래서 연미정은 불과 4~5년. 옛날 우리가 사학과 답사를 가듯이 여기는 못 갑니다. 해병대 군사 기지가 있기 때문에. 강화도에 중요한 방어기지들은 돈과 진보. 큰 진지는 보. 진. 그 다음 작은 것이 돈입니다. 강화도에는 53개의 돈대가 있습니다. 방어기지가 있고 그 다음에 진과 보가 12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1개의 진과 보에 4개 내지 5개의 돈이 마치 중대가 밑에 소대를 이루고 있듯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강화문화역사재단에서 이걸 세계문화유산에 해양관방유적(關防遺蹟). 우리가 관방유적하면 육상관방유적이 있습니다.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은 육상관방유적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다를 지키는 해양관방유적은 세계에서도 거의 유일합니다. 그래서 이걸 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 하는데 강화도에서는 여론이 마니산을 하자. 단군 제사 있는 곳. 아니면 강화도 성당을 하자. 그런데 저는 해양관광유적이 가장 적합한 것이다 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다가 사실은 실패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강화도만 독특하게도 돈과 진, 보, 돈대. 그러니까 우리가 가게 되는 광성보. 초지진은 큰 진지가 되는 거고 그 다음에 갑곶돈대는 작은 진지죠. 그런데 갑곶돈대는 실제 가 보면 초지진보다 훨씬 큽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강화전쟁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강화의 어떤. 그러니까 저는 강화도의 특징을 뭘로 볼 것인가.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역시 한반도를 지키는 하나의 방어의 거점이라는 이 점을 더 강조해라. 강화도에 가는 순무가 많이 난다, 무슨 새우젓이 많이 난다, 강화새우젓 외포리에 가서 전국 새우의 50%가 강화도에서 난다, 밴댕이가 이렇다. 요새 이렇습니다만 역시 강화도 하면 여기는 전쟁, 방어. 전쟁이라기보다는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가는 거점이다 이런 쪽에서 우리가 강화의 특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화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기 때문에 온갖 역사적인 성격이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역시 강화하면 이 점을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 연미정이고 바로 개성 군사가 이 강을 건너서 조해루라고 이리로 들어온 겁니다, 개성 군사가. 그래서 여기 있는데 여기 보면 황형장군묘. 창원 황씨. 사실 시조가 되는 황형장군. 조선 초기 때 4군을 개척하고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진압했던 이 사람에게 사실은. 그때는 문화재 개념이 없으니까 이 사람 땅으로 줘버린 거예요. 그래서 가보면 황형장군의 묘가 있고 이 창원 황씨가 강화도 쪽에 여러분도 알다시피 바로 이 동네에 이쪽 동네에 창원 황씨들이 많이 사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에 의해서 프랑스군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조선을 정벌해 달라는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황사영 백서사건에서 황사영이라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서 살았죠. 이 근래에는 황우여라고 인천에서 국회의원 나왔습니다만 원래 이쪽에 기반을 하고 있는. 그래서 창원 황씨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는 곳입니다만 바로 연미정 쪽이 지금도 황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강화도는 아주 독특합니다. 제가 살아보면 우스개소리로 성씨 중에서 제일 독한 사람. 앉으면 잔디도 안 나는 사람 그거 누구라 합니까? 경주 최씨죠. 경주 최씨 세 사람도 못 이기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지 압니까? 수원 최씨예요. 수원 최씨는 경주 최씨 세 사람도 수원 최씨 한 사람을 못 이긴대요. 그런데 수원 최씨를 이기는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해주 최씨입니다. 수원 최씨 세 사람이 해주 최씨 세 사람을 못 이겨요. 그런데 해주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개성 사람입니다. 개성 황씨입니다. 해주 최씨 세 사람이 개성 황씨 한 사람을 못 이겨요. 그런데 개성 황씨를 이기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지 압니까? 강화도 사람입니다. 강화도 사람은 개성 사람 세 사람 몫을 한다는 거예요. 강화도가 그만큼, 저는 이미 벌써 육지가 된 지가 60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이 사람들은 섬이라고 하는. 그만큼 강화도 사람들은 독특한. 이런 것이 아마 고려 때 세계최강국인 몽고군과 싸울 수 있었고 또 바로 병인양요, 그리고 5년 후에 있던 1871년 신미양요에서 이길 수 있는 그런 힘을 주는 길러주는 곳이 강화다. 강화에서 순무가, 제가 강화도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오래 산 게 아니라 자주 다녔으니까 강화에서 심은 순무에 맛이 나는데 김포만 가더라도 심으면 순무맛이 안 난다는 거예요. 독특한 이런 곳인데 나는 그래서 강화라는 곳이 바로 이런 측면을 갖고 있다.

연미정에 있는 정자. 세계문화유산은 원형을 잘 보존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가 보면, 제가 기가 막힌 게 세계문화유산 된다고 생각하는 게 이 연미정 밑에 가면 해병대 기지가 그대로 있어요. 돈대에 가면 군부대들이 많이 있어요. 이거는 뭐냐. 과거 고려 때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같이 병존하고 있다. 역사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이거는 세계문화유산 들어가면 확실히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 우스개소리로 세계문화유산이 되려고 지자체에서 많은 노력을 하는데요. 지금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되는데 더 결정적인 것은 지금 선정릉이 있잖아요. 선정릉이 있는데 사실은 그거는 원형이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어요. 호텔들이 들어서서 이래서 라마다 호텔하고. 그때 우리 학자들의 답변이 여기에 당시에는 5천만 원 이상이다. 5천만 원 이상 되는 땅을 그나마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는 게 우리에게 진정성이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사람들이 감동을 해서 가장 원형보존이 중요하다. 그런데 선정릉은 도심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가장 원형이 많이 파손된 거예요. 왕 중에 가장 중요한 왕이죠. 중종하고 성종이 묻혀있는 왕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많이 훼손됐잖아요.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니까. 그래서 안 된다고 할 때 오히려 이런 곳에 도심에도 이런 왕릉이 보존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여기도 돈대도 여러분 가보면 바로 밑에 해병대 기지가 있단 말이죠. 이런 것들이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군사방어기지로써 대단히 중요한 점이죠. 여러분들은 강화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강화라는 첫 번째 특징은 바로 관방(關防). 서울을 지키고 고려와 조선을 지키는 천년의 역사를 지키는 중요한 역사적인 거점이다. 그게 강화다. 강의 꽃이다. 여기 갑곶돈대거든요. 돈대치고는, 여러분 아까 돈대의 원형은 조금 전에 했지만 이 돈대는 이 정도 크기예요. 이런 게 돈이 53개가 있는 거예요. 강화도 성을 뺑 둘러서 100km예요. 그런데 이것도 갑곶돈이에요. 갑곶돈인데 갑곶돈대 상당히 큽니다. 우리가 가보면 전쟁기념관도 있고 포대부터 해서 강화도에 와서 차타고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곳이 바로 갑곶돈대란 말이에요. 이런 점에서 아주 경치도 좋은 곳이다. 왜 ‘갑’자가 나왔느냐. ‘갑을’할 때 ‘갑’자냐. 요새 ‘갑을’ 할 때 ‘갑’인데 몽고 군사가 왔을 때 여기서 이쪽에서 들어오면서 김포와 통진을 점령하고 나서 고려는 항복해라. 고려는 끝까지 항복을 안 하니까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나온 거예요. 몽고군사의 갑옷을 다 벗어서 여기에 던져도 그 갑옷을 밟고 너희들을 정벌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게 갑곶이라고, 갑이라는 글자가 나왔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격전지였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갑곶도 한번 보게 될 겁니다. 예전에는 다리가 놓기 전에는 50년대 까지만 해도 다리가 없었죠. 우리 선생님이 답사 갔을 때는 배 타고 거길 갔단 말이에요. 저희들 때는 신촌에서 아주 쉽게 바로 강화도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사실은 용두돈대(龍頭墩臺)인데, 광성보인데. 광성보 안에 돈이 있는 거예요. 이게 가장 큰 현재 남아있는. 이것만 한다고 우리가 도는데도 한 1시간 이상이 걸릴 겁니다. 점심 먹고 가서 여기 들어가는데 이게 소위 손돌목이라고 물살이 아주 빠르죠. 물소리가 나죠, 손돌목이라고 하는 곳이고. 여기 건너편이 또 덕진진이 있는. 아까 문수산성과 갑곶돈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면 여기 용두 돈대와 앞에 덕진진, 김포에 있는 덕진진이 이걸 세계문화유산으로 넣으려고 하니까 또 김포시하고 협력을 해야 되고 인천시에서 하지만 강화군은 거의 군수가 따로 있어서 이거는 또 인천광역시에 포함되지만 또 다른 행정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그래서 상당히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는데 행정적인 어려움이 사실 있었는데 결국 되지는 못 했습니다만, 이 용두돈대가 가장 경치는 뛰어난. 작년 연말에 tvn에서 미스터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아주 인기를 끌었죠. 한 40회 하는 미스터션샤인. 이게 바로 배경이 광성보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는. 그래서 이병헌이라는 사람이 한국인으로서 미군이 돼서 한국에 와서 하는 얘긴데 미스터션샤인에 나오는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 바로 신미양요. 광성보는, 병인양요 때는 이 위에 갑곶돈대까지 문수산성까지 들어오고 프랑스 일부 군대는 한강까지. 양화진까지 측량을 하러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대원군이 정신을 바싹 차려서 방어를 강화하다 보니까 이제는 전투가 신미양요 전투는 왜냐하면 미국도 1866년에 대동강으로 올라갔잖아요. 대동강에 갔다가 제너럴셔먼호가 상선입니다만 올라갔다가 박규수에게 불태워져버린단 말이에요. 아마 그게 1968년에 푸에블로호 사건에 미군 함선이 나포가 됐습니다만 1968년. 그리고 100년 전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타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1871년 5년 후에 이쪽으로 들어온 거란 말이에요. 들어왔을 때 바로 초지진과 광성보에서 이미 대원군이 준비를 하고 전투를 벌여버리는 그런 거죠. 여기 나온 것이 신미양요가 18쪽에 나옵니다. 신미양요에 관한 것. 1871년에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에 들어온 사건이다. 이런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서 읽어보시면 되고.

이제 하나 조금 설명을 더해 올라가면 15쪽에 보시면 제일 아랫 단락에 보면 최자라는 사람. 보안집이라는 책을 지었죠. 최씨 정권은요, 앞에 최씨 정권이 왜 오래 갔느냐? 철저하게 뛰어난 엘리트 문사(文師)를 자기 밑에 놔서 최씨 정권을 홍보하는 거예요. 이규보 같은 사람. 이일로 같은 사람. 마지막에 최자라는 사람이에요. 이 최자라는 사람이 여기에 보면 삼도부(三都賦). 세 개의 도성, 수도를 노래로 쓴 것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최자의 동문서에 있습니다만 무신진곡이 최자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고려에서도 서경, 그 다음 중국의 북경과 강화도를 읆은 시에요. 그중에서도 강화도 부분만, 여기 보면 강화도가 얼마나 요새였느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여기 15쪽 보면 물가에 언덕들이 잎처럼 가지처럼 붙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강화도가 지금같이 반듯한 섬이 아니고 아메바같이 이걸 표현을 어떻게 하냐면 물가에 언덕들이 잎처럼 가지처럼 서로 붙어있다. 해안선이 밀물 썰물 때문에. 그 가지와 잎에 붙어 올망졸망한 것들은 강과 바다의 상인 어부와 소금구이 집들이요. 그 아메바 같은 잎과 잎같은 사이에 민가들이 있더라. 그 꽃송이 꽃받침 같이 날아가는 듯 솟아오르는 것은 황실 궁궐, 공경, 사대부들의 저택이었다. 안으로는 마니산과 혈구산이 첩첩산이 운거하고 밖으로 동진상과 백마산이 요새처럼 물려있다.

지금은 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제가 강화에 있으면서 이런 제안을 한적이 있습니다. 인천공항에 오면 대기승객들이 상당히 많단 말이에요. 우리 대만이나 이런 데 가면 7시간씩 대기하면 대만 관광도 그 사이에 나가서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인천공항에 대기승객이 많이, 허브공항이니까 많이 오면 강화도를 헬기로 한번 투어를 하면 그러면 삼도부의 모습이 그대로 나는 있는 것 같은. 그렇게 했더니만 그게 성공하겠어요, 실패하겠어요? 안 되죠. 왜냐하면 군사기지들이 많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안 되고 그래서 저는 또 하나는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영종도 하고 강화도 하고 서로 인천대교같이 다리를 이어버리면 그게 훨씬 더 낫지 않느냐. 그리고 실제도 강화도에서도 승천포 쪽에서도 다리를 놔버리면 개성공단 가는 것이 훨씬 더 가깝습니다. 이쪽에서 파주에서 들어가는 것보다 바로 개성공단 옆이거든요. 그 정도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다 이거죠. 그런 모습이 저는 여기에 또 16쪽에서도 계속 됩니다만 여기 보면 16쪽에도 출입을 단속하면 동편에 갑화관(岬華關), 갑곶나루죠. 동쪽에 갑곶나루. 그리고 외빈을, 바깥손님을 보내는데는 북쪽에 있는 풍포관(楓浦館). 이게 바로 성천포입니다. 우리가 평화전망대있는 쪽. 그 위로 해서 바로 개성으로 가니까. 이렇게 강화도에 두 관문을 가지고 있죠. 두 화산의 봉우리가 문턱이 되고 두 효가 지도리가 되니 참으로 천하의 오구. 아주 깊숙한 곳이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거든요.

강화도가 지금 상당히 교통이 발달하고 항공기가 발달하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써는 상당히 중요한. 여러분 지금의 고속도로와 항공로가 옛날에는 물길과 뱃길입니다. 육지는 도로가 발달하지 못 하니까 뱃길이란 말이에요. 왜 고려가 500년을 가고 조선이 500년을 갔느냐. 전국의 물길을 장악했다. 조은로라는 것이 만들어졌어요. 전국에 있는 모든 조세가 서해안을 통해서 강화도를 통해서 개성이나 서울로 들어간다는 거죠.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죠. 그러면 경주가 통일신라가 돼서 경주가 한 150년~200년 밖에 유지하지 못한 것은 전국의 물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거예요. 동쪽에 치우쳐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수도가 개성이나 서울이 된다는 것은 전국에 모든 조세를 받아서 그것이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육지로 들어오는 것은 유일하게 남한강과 북한강을 통해서 양수리 쪽으로 해서 송파 쪽으로 들어오는 것. 강원도 쪽과 경북 내륙지역. 나머지 지역은 전부 다 남해와 서해를 통해서 강화도를 통해서 들어오는. 이러한 하나의 이점이 있다.

이게 참 오래 된 겁니다만 강화도. 일부러 이 사진을 박 대통령하고 찍었는데 저는 이 강화도에서 재단을 하면서 이 강화도가 만약에 70년대 박대통령이, 제가 박대통령의 어떤 호불호를 떠나서 박대통령이 이때 소위 유적지 정비사업. 경주뿐만 아니라 부여, 공주 쪽에 그때 이걸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만약에 이걸 하려 했으면 이거는 보상이고 지역. 강화도도 그나마 이때 이걸 강화도가 전적지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관광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아찔한 거예요, 사실은. 그런 점에서 바로 이 용두돈대입니다. 이때 1977년에 이게 준공이 되고 여러분 알다시피 1970년대 초반에 경주 쪽에서 불국사 쪽하고 신라문화유적 정비가 되고 그 다음에 또 부여, 공주. 익산까지. 세계문화유산을 하다 보니까 완전히 반대해요 사람들이. 재산권. 500m 이내. 문화재사적지구로 지정이 되면 500m 이내에는 일체 개발이 제한되니까. 돈 대주고 한 50몇 개 전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버리면 절단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이게 상당히 상징적인 그림이다. 이런 걸 제가 느끼게 되는 거죠. 그때 기록영화찍는 것을 대통령이 용두돈대 아까 얘기했지만 거기에서 기록사진을 찍는 이런 것들을 보면 상당히. 우리가 문화유산을 말은 잘 보존하자고 하지만 저는 이런 것들이 다시 세계문화유산하면 이것을 좀 개발해 놓으면 강화가 기가 막힌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여러분이 세계문화유산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국내 여행을 다닐 때는 국보, 보물을 많이 찾아갑니다. 국보가 많이 있는 곳을 찾아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는 국보, 보물이라는 것은 일국의 개념이고 이제는 세계가 하나의 글로벌이 되니까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우리 식으로 하면 세계의 국보와 보물을 지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나라는 현재 한 10여 군데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면 그 문화유산 때문에 해인사를 오고 경주남산을 가고 양동마을을 가고 하회마을을 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이 지정된다는 것은 좀 더 크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이런 점에서 강화는 여러분들에게 일단 특별히 좀 그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답사를 가면 이런 강화의 속살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지 않을까. 사실은 17쪽에 보면 강화산성은 우리가 가보지 못 합니다만 강화산성도 사실은 답사코스에 저는. 강화산성 자체는 강화도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고려 때 만들어진 거고 문수산성은 더 쉽게 얘기하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4대 군사도시라고 하는데 요새는 군사도시하면 철원이나 파주나 이런 것이 군사도시지만 조선시대에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 군사도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조선 초기에는 개성과 전주가 군사도시가 되는 거예요. 서해 쪽으로 들어오는 곳. 조선 후기가 되면 4군데가 지정되는데 제가 말씀드리고 난 다음에 여러분이 이걸 보시면 되는데, 집에 가서 보시면 되는데. 여기 보면 조선시대 강화구에서 이제는 수원과 경기도 광주와 그 다음에 개성과 강화도. 방위가 더 좁아졌죠. 서울을 지키기 위해서 4개의 군사도시가 소위 유수부(留守府)라고 합니다. 강화 유수부. 그런 식으로 해서. 그리고 또 해군기지가 경기만의 해군기지가 강화에도 있다가 교동에도 있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강화도가 일반적으로 뭐 고인돌이 있다든가 여러 가지 말씀을 합니다만, 전등사가 있다고 하지만 역시 하나의 방어의 도시. 군사의 도시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초지진은 그야말로 진이라고 하지만 돈이죠. 지금 이게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광성보를 보고 나면 시간이 안 된다고 제가 지난 가을에도 여기 갔는데 지금 여기는 수리하고 있어서 초지진. 여기 초지진에도 가보면 나무에는 미군들이 쏜 총탄 자국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광성보와 초지진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역사적인 유적을 보여주는. 18쪽 제일 마지막 단에 6월 달 강화해역 손돌목. 아까 용두돈대. 박대통령 사진 나온 용두돈대에 이르자 강화 연안 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서 조미(朝美)간에 최초로 군사적인 충돌이 벌어진 곳이 바로 광성보 지역이다. 광성보 안에 여러 가지 돈대들이 있는 것이죠. 이것을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한다. 이렇게 된 거죠. 그 다음 단락에 가면 평화협상이 결렬되자 이 초지진, 광성보를 공격하고 나서 그 다음에 협상을 하게 되고 그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약 일주일 후에 초지진 상륙작전을 단행했다. 이래서 상륙군 군부대를 10개의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 공병대로 공격을 했다. 여러분들 이때 미군이 조선 군사를 물리치고 나서 빼앗은 수자기(帥字旗). 미군들이 가져갔다가 되돌려 준 거죠. 그래서 우리가 갑곶돈대에 가면 전쟁박물관 가면 당시 조선 군사들의 지휘관이 썼던 수자기. 수자 라는 게 군사 수자, 운수 수자 하는 수자기가 있는 거죠.

이거는 참 가슴 아픈 얘긴데 당시에 미군이 찍은 사진인데 이게 초지진인데 아마도 사진은 이쪽 건너편이 쪼개서 찍은 것 같은 사진인데요. 미군들이 이걸 점령하고 나서 찍은 사진이 초지진. 초지돈대입니다. 본래는 초지돈대로 되어 있네요. 당시에 미국의 아시아함대. 콜로라도에서 배가 지금. 여기 18쪽에 보면 두 번째 단락에 보면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항외교에 의해서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서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했다. 이때 주청미국공사 로우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해군함정을 동원 조선 원정을 했다. 그래서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를 비롯해서 군함 5채, 수해병 1240명, 함재대포 85문 해서 아주 본격적으로 들어온 거죠.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는 사실은 큰 규모는 한 600명밖에 안 됩니다만 이거는 아주 강한 해군. 그때 개항. 미군들이 남긴 사진이 있으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초지돈대를 점령한 미군. 미군들이 초지돈대를 점령하고 나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미스터션샤인이라는 tvN. 지금도 아마 넷플릭스 같은 데 아직도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만 미스터션샤인에 보면 나옵니다만 희미하기는 희미합니다만 미군들이 초지진을 점령하고 나서 찍은 사진이죠. 이거는 사진이 있으니까 그때 강화도 상륙작전을 논의하던 유관급 장교들. 이 제복을 갖고 미스터션샤인에서 주인공이 옷을 입고 나온 거죠, 사진이 남아 있으니까. 이렇게 남아있는 그런 형태죠. 처음에 광성보를 점령하고 나서 항의하러 갈 때 우리 조선의 관리들의 모습이죠. 미군 배에 올라갔을 때 미군들이 찍은 사진이에요. 저는 미스터션샤인을 25회인가 40회인데 자세히 봤습니다. 이 당시 한말의 역사도 좀 느낄까 싶어서 보면 그때 그래도 저항을 했던 사람들은 도자기 만드는 도공의 자식들, 노비 자식들, 백정의 자식들. 이런 사람들이 끝까지 저항을 했다. 그런 기록이 나오는데 조금 영화니까 각색을 한 측면은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자식들이 의병으로 지원해 가는 과정. 그러면서 조선의 국왕과 친일파들이 부패해 가는 과정. 이런 것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 이런 옷을 입고 가서 미군과 협상하다 실패해 버리니까 초지진을 다시 미군이 쳐들어가는 거죠.

그 다음 덕진돈대라고 하는 곳은 이번에 답사를 가게 되면 그 김포 쪽에 용두돈대 맞은 편이 덕진진입니다. 세계문화유산 하려니까 유일하게 남은 게 문수산성도 김포 쪽이고 덕진진은 현재 행정구역상은 김포의 대명포구 있는 쪽에 덕진진이 있는데 그 미군이 이쪽 반대편에는 광성보를 점령하고 그 건너편 김포 쪽에 덕진진을 점령하고 미군들이 서있는, 점령한 사진을 여기 지금 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 1871년이면 한 120년 전, 130년 전. 이게 사실은 130년이 먼 시기가 아닌 거예요. 우리 지금 해방되고 나서 순식간에 60년, 70년이 흘렀지 않습니까? 120년, 130년. 저는 역사 공부를 하지만 이게 아찔아찔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거는 바로 가까이 있는. 고려시대 때 몽고하고 전쟁한 거는 정말 한 700~800년 전이니까 감각이 나지 않지만 역사가 과거의 얘기가 아니에요. 과거에 매달리는 게 아니에요. 이게 바로 지금 이에요 우리의 역사가. 이런 점에서 보면서 저는 미군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서 제가 마침 강화재단을 하다 보니까 이런 사진자료를 많이 모으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제 여기서 강의를 마무리했으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