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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의병, 반격의 물꼬를 트다

오늘 그 강의할 주제가 임진왜란 의병인데 바로 임진왜란하고 의병과 관련된 내용들, 1592년에 임진왜란 일어나잖아요. 정확하게는 1592년 음력이긴 하지만 4월 13일. 얼마 안 돼요. 그리고 우리 여기 좀 4월에는 좀 관련된 인물이 되게 많은데 임진왜란 4월 13일 발발. 우리 곽재우 장군이 의령을 최초로 일으킨 날이 4월 22일. 그리고 이제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일이 언제다? 4월 28일. 2010년에 바로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해서 '의병의 날'이 제정이 되었습니다. 2010년부터, 옛날에는 없었죠? 그렇죠? '의병의 날'은 6월 1일이다.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하고 또 우리가 6월이 가지는 의미가 있잖아요. 항상 6월 6일 현충일 호국보훈의 날. 그렇게 해서 2010년부터 의병의 날이 제정이 되었습니다. 좀 억울하시죠? 내가 학교 때 의병의 날 없었는데 대부분 그러시잖아요. 여기 있으신 분들, 없었는데 새로 생긴 날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공식적으로 1592년 4월 13일 발발하는데 여기에는 사실 원인이 있어요. 사실 먼저 우리 조선 내부의 원인을 살펴본다면 조선 건국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0년 동안에 너무 이제 큰 전쟁이 없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숭문천무(崇文賤武) 문은 숭상이 되고 무인에 대한 처우라든가 이런 데 대해서는 상당히 약했죠. 그러니까 요즘 표현으로 하면 새로 나온 똑똑한 사람들이 다 문과로 가 버리는 거예요. 무과 쪽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들은 기피해버리고 이러다 보니까 국방에 대한 어떤 약화 같은 이런 것들이 수반이 되었고, 또 이제 그 당시에 조선에서 이제 정말 추구했던 학문이 성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뭐 유교적인 뭐 예법이라든가 의리라든가 이런 거 주로 많이 따져요.

그리고 이제 특히 16세기 되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이걸 너무 철학적으로 여기에 몰두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 아마 학교 시절에도 이런 게 나와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뭐 사단이 뭐고 칠정이 뭐고 주리론(主理論)이다. 주기론(主氣論)이다. 이런 거 공부하신 적 있죠? 이거 보면 진짜 골치 아파 야 왜 저렇게 쓸데없는 거 가지고 뭐 저렇게 목숨 걸고 저렇게 했지? 실제 그런데 빠지다 보니까 정말 실질적으로 뭐 필요한 거 국방이라든가 이런 데 대한 그 관심이 훨씬 더 줄어들었다. 바로 우리 조선 내부의 원인이고요. 그리고 일본으로 이제 들어가면 일본은 그 당시에 전국시대라는 혼란기였어요. 우리 바로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그 직전에 전국시대 혼란기라서 자기들끼리 막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났어.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이 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래서 우리 예전에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 거예요. 바로 일본의 소설 '대망'이라는 소설을 보면 바로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뒤에 나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요런 일본의 어쨌든 전쟁 영웅들의 일대기를 다룬 고른 소설이 '대망'이란 소설이고 바로 이 시대가 이제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 전국시대를 처음으로 통일했던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우리 잘 알고 있는 풍신수길이죠.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을 하고 나니까 우리 조선에서도 어쨌든 신경 쓰이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분열되어서 싸우고 이럴 때는 덜 신경 쓰이는데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일본에서도 우리나라도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에요. 일본에서도 바로 이런 요구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제 최고 권력자가 왔는데 그 조선에서는 뭐 좀 뭐 요즘 표현으로 하면 인사하러 안 와? 뭐 이런 느낌. 그래서 조선에서 우리도 보면 미국에도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었잖아요. 트럼프 바뀌면 저 사람이 어떻게 어떤 스타일인가 이렇게 해서 우리도 역대 미국 대통령 바뀌면 방한을 가요. 저 사람 어떤 스타일인지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떤 스타일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파견됩니다.

그래서 이 조선에서 요즘으로 치면 아주 외교적 영향이 있을 수 있는 사람들. 이제 통신사 팀을 이제 뽑아서 보내는데 대표단의 핵심 인물이 세 명이에요. 처음에 정사(正使). 요즘으로 치면 대표 회장쯤 돼요. 대표단장 단장이라고 봅시다. 통신 정사. 그다음에 통신 부사(副使). 그 사람은 부단장 그다음에 서장관(書狀官)이라고 그래가지고 요즘으로 치면 사무총장 이렇게 세 명이 핵심이고 그 밑으로는 또 수행원들, 통신사는 뭐 거의 몇 백명이 구성이 돼요. 그중에는 뭐 요즘에 기자에 해당하는 화원(畫員)들. 그림 그리는 사람도 있고 통역관도 있고 심지어는 조선통신사 갔을 때는 곡예단도 있었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우리도 외국에 갔을 때 예전에 뭐 리틀엔젤레스 공연 하러 가고 막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런 공연단도 가요. 그렇게 해서 이 조선통신사가 이제 그 1년 전인 1590년 3월에 출발은 한양을 출발한 게 1990년 3월이에요. 가서 6개월 만에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 갑니다. 요즘 같으면 비행기 타면 2시간이면 가는데 그때는 한양에서 통신사 지금 그 코스가 지금 다 기록으로 나와요. 주요 코스가 저 한양에서 문경새재를 넘고요. 바로 대구 쪽으로 갑니다. 대구 쪽으로 가서 부산으로 가는데 지금 대구에 가시면은 대구에도 그 중심부 쪽 가면 ‘통신사가 그쳐 가는 길’ 이런 어떤 표지석 같은 게 남아있어요. 그 코스로 갔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그런 흔적들이 조금씩 조금씩 남아 있다. 그래서 부산에 가면 이제 부산에서는 말 타고는 못 갈 거 아니에요. 어떻게 간다? 배를 타고 간다.

그래서 부산에서 다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가서 대마도에서 다시 일본에 일지도로 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시모노세키 하관이라고 해요. 하관 시모노세키가 이제 한자로 하관(下關)이라고 써요. 그래서 여기 시모노세키의 하관의 ‘관(關)’자와 부산의 ‘부(釜)’자를 연결해 가지고 예전에 우리 그 일제 강점기부터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들어보셨나요? 그렇게 관부연락선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시모노세키에 도착을 하면 이제 육로가 되는 거야. 그러면 이게 바닷길을 통해,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육로 그 다음에 바닷길. 그러니까 일본 가 보신 분들은 그 시모노세키에서부터 해가지고 교토 가는데 보면 일본의 여기가 내해(內海)예요. 일본도 큰 섬이 네 개로 되어 있거든요. 그 시코쿠 섬, 규슈, 그다음에 저 혼슈 그 다음에 저기 위에 제일 위에 있는 홋카이도까지 그래서 이 시코쿠 섬 하고 이렇게 본토하고 둘러싸인 이 내해를 거쳐서 이때는 배를 타고 가요. 또 육지로 해 가지고 결국은 이제 교토까지 가는데 최종적으로 6개월 걸려서 1590년 9월에 일본의 교토에서 도착을 하는 거예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요. 그런데 이때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말 오만하게 대우를 합니다. 완전히 그냥 일단은 통신사 엄청 기다리게 해요. 우리도 보면 약속 잡아 놓고 막 기다리게 하고 이러면 엄청난 실례가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실제 이거 실화예요. 이런 기록도 있어요.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늦둥이를 봐 가지고 사신이 왔는데 그 어린아이를 안고 와요. 그런데 얘가 또 오줌을 싸네? 그러니까 막 이게 막 그러잖아요. 손님맞이 해놓고는 그냥 자기 어린애 하나 들고 와가지고서 걔가 오줌싸고 막 그러니까 그거 치우느라고 그러니까 이때 사실 제일 열 받아하는 사람이 사실은 김성일이에요. 우리 돌아가자. 이렇게 모욕받고 되겠냐? 그래서 어쨌든 그 우여곡절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면담을 했고 결국은 6개월 뒤인 1591년 3월에 이제 한양에 도착을 합니다. 귀국을 하죠. 그래서 귀국을 하고 나서 보고를 듣는데 바로 이제 엇갈린 보고였죠.

그 당시에 통신 정사로 갔던 사람이 황윤길이란 사람이고 통신 부사로 갔던 사람이 바로 우리 김성일이란 인물인데요. 그리고 또 한 명, 아까 세 명의 대표단이라고 그랬죠? 아까 세 명의 대표단, 정사, 부사 그리고 뭐라 그랬다? 바로 서장관으로 갔던 사람은 허성이라는 사람이에요. 허균의 형인데요. 여기서 왜 제가 허성까지 거론하냐 하면 사실 당 색으로 보면 황윤길의 서인, 김성일하고 허성은 동인이었어요. 조선 시대 당정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은 아시는 분 많을 건데 잠깐만 설명을 하면 선조 때 사림파(士林派)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하면서 관직은 한정되고 서로 관직에 등용되려는 사람은 많다 보니까 당파로 갈려요. 그때 처음에 이제 그 김효원이라는 사람하고 심의겸 일하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대립을 합니다. 인사권을 둘러싸고. 이때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동인, 심의겸의 집은 서울의 서쪽에 있다 해서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 이렇게 갈렸다는 거죠. 그래서 이때 동인은 주로 퇴계 이황 학파.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가 많고요. 서인은 누구의 제가 많았을까요? 바로 이 서인의 뿌리가 되는 학자가 바로 율곡 이이였다. 그래서 율곡 이이 제자들이 서인이 되었는데 사실은 이게 한동안은 이게 당파싸움에 소산이었다. 황윤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들어올 거 같으니까 반대 정파였던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근데 아까 말씀드린 거처럼 허성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쳐들어온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게 전혀 당파싸움하고 관계없이 단지 그 시대의 상황을 보는 논리였다. 그리고 사실 나중에 김성일은 그런 입장을 이야기해요. 자기도 쳐들어 올 거 같다고 생각을 했지만 황윤길하고 허성이 너무 막 쳐들어온다고 난리를 치니까 너무 이건 혼란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니 눈이 서목(鼠目)이었다. 서목이라는 말이 뭐죠? 쥐새끼 눈이었다. 서목이라서 감히 전쟁을 일으킬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조 입장에서는, 사실이 가장 책임을 져야 될 사람은 왕인 선조예요. 어쨌든 2:1인데도 김성일 말을 들으면 조금 편하잖아요. 전쟁 안 일어날 거 같으니까.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나중에는 완전히 김성희한테 거의 그냥 책임을 다 물어 버립니다. 그런 결과를 초래했고 원래 완전한 책임은 선조가 가장, 이 당시 어쨌든 통신사 세 명의 대표단 중에 두 명이나 쳐들어온다 그랬으면 뭔가 대비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 놓고는 쳐들어오니깐 김성일이 네가 말 잘 못했지. 이런 식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김성일은 그런 측면에서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직접 전장에 뛰어 들어가서 병력들 모으고 이러다가 결과적으로는 과로로 사망을 합니다. 그래서 이 김성일이라는 인물은 좀 다시 그런 면에서 한동안은 완전히 정세 파악을 잘못한 그런 인물로만 계속 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이거는 뭐 어쨌든 어떤 경우는 욕도 많이 얻어먹어요. 우리 할아버지를 그렇게 보지 말라. 예전에 제가 ‘역사저널 그날’ 출연하고 그랬을 때, 그래서 이런 게 한편으로 보면 의미도 있는데 또 어떤 경우는, 제가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말인데 너무 문중에 계신다고 우리 할아버지는 무조건 좋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인식을 버려야 된다. 어쨌든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거. 이거 자체도 의미가 있는 거다. 무조건 우리 할아버지고 우리 선조니까 이건 좋게 말해야 된다. 좀 그런 것만 잘 이제 객관성을 유지하면 오히려 그런 것을 유지하면서 뭐 그분이 뭐 관련된 자료라든가 유적지 같은 거 많잖아요. 이런 거를 자연스럽게 알리는 그런 게 저는 더 필요하다고 항상 일을 강조를 합니다.

어쨌든 선조의 잘못된 판단으로 정세 보고 이후에도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고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쳐들어오죠. 그래서 여기서 이제 아까 갔던 코스를 보시면 그 대마도를 지나 잇키섬으로 해서 육지의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이후에도 바닷길도 가고 육로로도 가고 해서 결국은 그 당시 수도는 일본의 여기 보시면 교토였어요. 도쿄는 나중에 일본이 도쿄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바로 도쿄까지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도 지금도 가보시면 그것도 교토 가보시면 많죠. 쿄토가 일본에서 되게 문화재가 많고요. 사실 지금도 교토 사람들은 도쿄 사람들을 참 우습게 압니다. 프라이드가 있는 거야. 우리가 원래 수도 사람이다. 너희들은 촌것이라고 하는 약간 이런 느낌 있어요. 우리도 보면은 한동안 개성 사람들이 한양 보기를 우습게 본 거예요. 너희들 완전 촌것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개성이 고려 시대에 수도였잖아요, 500년간. 그러다 보니까 훨씬 개성 사람들의 프라이드가 컸던 이런 모습이 여러 자료에도 확인이 되고 있고요.

그 제가 읽은 책 중에 박완서 작가가 쓴 책들 있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뭐 이런 책들 보시면 박완서 작가가 개성분이에요. 이분이 개성을 무대로 한 소설도 썼어요. ‘미망’이라는 소설도 썼는데 이것도 잘 적어 놓으셨다가 이따 도서관에 여기 아마 책 다 있을 거야 한번 보세요. 박완서 작가의 책들을 보면 개성지역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리고 개성 사람들이 상당히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게 비슷하다라는 거죠. 일본 교토 사람들이 도쿄에 대해서 훨씬 더 자부심을 느끼는 그런 모습하고 그래서 조선은 200년 동안 지속된 평화로 인해 군사체계가 해이해지고 성리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아까 뭐 사단칠정논쟁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이런 거 가지고 막 싸우고 이러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었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기록을 보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지는 형세였다. 이런 기록이 나와요. 이때 세상이 태평한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중앙과 지방이 안일에 젖었고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 원망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자자했다. 실제 이게 위기상황이니까 요즘으로 치면 병력들 징집하면 안 가는 거죠. 우리가 왜 가야 되는데? 이렇게 준비가 안 돼 있는 바로 그런 상황이었고 그래서 실제적으로 20만대군. 일본군의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 사람입니다. 일본 말로 하면 소서행장 그리고 또 한명의 주력 장군이 가토 기요마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일본의 두 장수도 사이가 안 좋아요. 고니니 유키나가하고 가토 기요마사도 막 수시로 티격태격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부산진 첨사 정발이 전사를 하고 그다음에 동래부사 송상현, 요즘으로 치면 부산 시장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그 당시에 동래 사람들을 이끌고 저항을 하다가 결국 전사를 하는데 이때 되게 감동적이었던 게 일본군 측에서 동래성을 포위하고 난 다음에 바로 이 당시에 나무 같은데 팻말 같은 걸 만들어 가지고 어떻게 썼는가 하면 ‘정명가도(征明假道)’ 이렇게 써서 동래성에다가 집어 던지는 거예요. ‘정명가도’라는 말은 뭐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운 말이에요.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 달라’ 이런 말이에요. 사실은 조선 침공의 목적이 있으면서도 그거를 어느 정도 약간 위장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는 명나라를 치러 간다. ‘정명가도’ 그렇게 썼는데 ‘가’는 빌릴 가(假)자. 여기에 대응을 해서 송상현이 쓴 말이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바로 나무로 만든 그 푯말에다가 대응을 해서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이렇게 썼다라는 거죠.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힘들다. 우리는 끝까지 저항하겠다.’ 이렇게 해서 저항을 하다가 전사를 했고 실제 기록에 보면 송상현 부사를 위해서 일본군 쪽에서도 감동을 받아 가지고 이 사람의 무덤을 만들어 줬다라는 이런 기록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컸던 패배가 4월 24일 신립 장군이에요. 워낙에 일본군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니까 조정은 당황을 하죠. 그리고 이때 조정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었던 장군이 누구냐면 신립 장군입니다. 그래서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그 당시 보면 뭐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다 붙여 가지고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라. 이런 명을 이제 내렸는데 원래 같았으면 이 문경새재 쪽으로 진영을 갖추어야 되는 게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 앞에 넓은 벌판을 전투 장소로 결정을 했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걸 두고 나중에 신립 장군이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어요. 결과적으로 대패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사실은 신립 장군 입장에 들어간다면 신립 장군도 나름대로 계산했던 게 뭐냐면 근데 원래 신립 장군 전공이 북방민족 전공이야. 여진족 토벌에 아주 공을 많이 세웠고 기마병을 활용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보였던 그런 인물이니까 우리도 그렇잖아요. 누가 어떤 전술을 쓰는데 자신이 잘하는 그런 전술로 싸우기를 원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 기마병을 데리고 투입을 하려면 문경새재 여기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어차피 문경새재로 들어갔던 일본군들도 다 충주 쪽으로 올 거다. 그러면 신립 장군의 생각은 넓은 들판에서 우리의 기마병들이 확 저들은 몰아붙이면 우리가 승산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제가 봤을 때는 신립 장군이 분명히 그 예전에 그 영화 아세요?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 아세요? 멜 깁슨 나오는 거. 그거 안 보셨을 텐데 그거를 그 느낌을 한 거야. 말들이 확 몰아붙이면 이긴다. 그리고 그때 사실은 그 당시에도 일본군이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해 왔다는 걸 알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립 장군은 그 조총은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니까 조총으로 저들이 조준을 하고 장전하는 그 기간에 우리가 그냥 말 타고 활 쏘고 칼로 덮쳐 버리면 승산이 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한 게 일단은 그날 비가 와가지고 습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면 말이 잘 달리려면 맨땅에 달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습한데 달리다 보니까 우리 조선군 기병의 말의 속도는 떨어진 데 비해서 일본군들이 연습을 워낙 많이 해 가지고 조총을 바로 쏘는, 장전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그랬잖아요. 3열로 딱 섭니다. 맨 앞에서 어떤 병사가 쏘고 나서 재빠르게 뒤에 가서 장전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조준.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조선군의 입장에서 보면 얘들이 정말 정말 그런 브레이크 타임 없이 계속 총알이 튀어나오는... 이해가 되시죠? 그렇게 되면서 완전 조선군이 괴멸을 해버려요. 그리고 이제 문경새재 같은 데서 진영을 구축했다면 약간 불리하면 후퇴를 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뒷면이 남한강이에요. 남한강. 후퇴를 해도...

그래서 여기가 왜 탄금대라고 불리냐 하면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보면 강이라든가 바다에서 이렇게 산이 우뚝 솟은 지형을 대라고 그러는 거예요. 우륵이 가야금을 탔던 대.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까 우리 보면 바다의 구름이 몰려오는 대 무슨 대? 해운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태종대, 그다음에 저기 보면 하조대 다 그런 지형이에요. 그러면 왜 우륵을 충주에다가 가야금을 타게 했을까? 제가 판단하기에는 진흥왕 때 가야가 신라 진흥왕 때 가야가 병합이 됩니다, 신라에. 그 신라 진흥왕 입장에선 가야를 정복했지만 우리는 가야 사람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잘 대우해준다. 똑같아요, 옛날에도. 우리도 북한에 황장엽 같은 사람 들어 오면 막 뭐 해주잖아요. 북한 엘리트가 남한에 와 가지고 그러면 뭔가 그 사람들 선전용으로 활용이 되는 거야. 똑같아요. 그러니까 진흥왕도 우륵과 같은 아주 능력 있는 가야금 연주자를... 이 충주라는 지역이 삼국시대에는 고려 백제 신라가 다 서로 영토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데서 가야금 띵띵 타고 그러면 ‘와 신라 괜찮은 나라네’ 이런 생각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탄금대가 요즘으로 치면 충주판 예술의 전당쯤 된다. 여기서 가야금 탔던 그런 역사가 있어 이름은 탄금대인데 다시 조선의 역사에서 바로 우리 신립 장군이, 신립 장군이 이곳에서 대패를 하면서 좀 그 부정적이긴 하지만, 오점으로 남았지만, 또 역사에서 이렇게 길이 기억되고 신립 장군은 결국은 탄금대 남한 강변에서 자결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계속 일본군에게 몰리니까 자결로 삶을 마감하고 대패, 결국은 패장인데 근데 우리도 보면 절묘한 것 중에 하나가 신립 장군도 엄청난 패장이고요, 냉정하게 따져 보면 우리 보면 근데 원균 장군은 엄청 욕 얻어먹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근데 이게 참 보면 애매한 거예요. 신립은 패장이라도 그렇게 욕 안 얻어먹고 왜 그럼 원균은 저렇게 욕 얻어먹냐? 제가 봤을 때 원균이 저렇게 욕 얻어먹는 데에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결국은 이순신 장군하고 라이벌 관계에 있었고 이러다 보니까 이순신 장군이 성웅으로 추송(追頌) 되는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그 악역이 있어야 된다라는 거죠. 드라마 같은데도 그렇지 않아요? 선한 역이 있으면 악한 역이 있듯이 사실 그래서 최근에 와서는 이 원균이 그렇게까지 나쁜 장군은 아니다라는 인식은 많아요. 어차피 조선의 그 해군 사령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했고 실제 원균도 칠천량해전이라는 전쟁터에서 전사를 한 인물이거든요. 그런 걸 보면 그렇게까지 정말 간신의 전형으로만 몰아붙이는 건 좀 문제가 있다. 이렇게 하는 거죠.

아까 말씀드린 신립하고도 똑같은 거죠. 우리도 그런 경우 많아요. 어떤 경우는 우리 스포츠 분야에도 막 나와요. 어떨 때 막 이렇게 그 정말 경기에서 졌을 때 약간 우호적으로 언론이 하면 ‘최선을 다했으나 안타까운 패배’ 뭐 이렇게 기사가 뜨고 또 어떨 때 뭐 이렇게 잘못 뭐 이렇게 좀 언론 이런데 하면 ‘봐라 저러니까 졌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떨 때는 보면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까운 뭐 이렇게 되고 그래서 이런 게 우리도 보면 역사에서 분명히 그런 잣대들이 있다. 신립 장군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대패에도 불구하고... 신립 장군이 뭐 패장, 간신 이런 말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이런 게 있다는 거죠.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여기 보면 일본군들이 빼곡하게 포위를 해 가지고 공격하는 그런 장면이고 여기 자세히 보시면 아까 말한, 나무로 만든 푯말 같은 게 있어요. ‘전사이가도난’이라는... 이런 그림에서 드러나는데 이 사람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인가 그래요. 도망가고 있잖아요. 벌써 지휘관 중의 한 명은 이런 식의 인물들이 결과적으로 계속 존재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결국은 관군들은 어쨌든 전략의 부재라든가 너무 준비가 없었고 또 이런 일부 지휘관의 도망이라든가 이런 걸로 무참하게 패배를 하고 결국은 선조가 4월 30일날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이에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조선이 정말 무너질 뻔했던 이 시기에 결국 조선을 구한 두 개의 경로라고 하면 바로 육지에서는 의병의 활약. 그러고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 이게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때 반격의 물꼬를 트게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였고요.

앞에서 소개했지만, 우리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고요. 전 재산을 털어서 요즘으로 치면 무기를 사고 군사들에게 식량 같은 걸 댔다. 요즘으로 치면 이런 표현을 많이 하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임. 최근에 와서 우리 한말 근대사에서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일제강점 시기에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가지고 우리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지금도 가면 고택 있어요. 지금 임청각을 다시 복원하기로 결정이 됐고요. 이 안동지역의 전 재산을 팔아 가지고 지금의 북간도, 서간도 지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이렇게 독립운동을 했고 우리 이회영 선생은 원래 집이 명동 쪽이었어요. 지금 저기 땅 그대로 뒀으면 엄청 부자가 됐을 거예요. 명동 지역에 있는 그 땅을 다 처분을 해 가지고 이회영 선생은 육형제가 전부 다 독립운동을 합니다. 독립운동을 해 가지고 해방 맞이했을 때는 거의 모든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이시영 선생만 해방 이후에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바로 해방의 그 사진에 딱 나오고요. 바로 이 우당기념관 지금 서울에 보시면 서촌 쪽에 통인시장 아시나요? 그리로 가시다 보면 우당기념관이 나와요. 우당기념관 가보신 분? 우당기념관도 꼭 한번 가 보세요. 되게 전시 잘해 놨어요.

그리고 지금 거기 이층엔가 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인 이종찬 예전에 국회의원 아시죠. 국가정보원장도 하시던... 그분 아직도 거기에 계세요. 그러니까 우리도 보면 연세 좀 드시고 이러면 말년은 그래서 내가 우리 조상들 뭐 이런 걸 잘 이제 기억하면서 그런 사업하면서 살겠다. 그런 분들 많아요. 그래서 이종찬 국회의원 지금 거기서 예전에도 관리하시는 분들한테 물어보니까 자주 나오신다고 그러더라고요. 거기 거처도 마련해 놓고. 그리고 이종찬 국회의원의 사촌 동생이 민주당 이종걸 국회의원. 이분이 민주당 대표 하셨잖아요. 원내대표인가 하셨죠? 이분이 바로 그쪽 집안이에요. 경주 이씨입니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항복 아시죠? 시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 후손이고 석주 이상룡 선생은 고성 이씨. 고성 이씨도 상당히 조선 초기까지 명문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이괄의 반란’ 아시죠? 이괄 이라는 인물을 배출해 가지고 조금 시달리다가 나중에 좀 부활했죠. 고성 이씨 중에 현대의 인물 중에 제일 유명하신 분은 국무총리까지 지냈던 이한동 국무총리라고 아세요? 이분이 바로 고성 이씨 출신입니다.

그래서 곽재우 장군이 전 재산을 털어서... 이때도 우리가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의병장들이 의병의 깃발을 꼽았을 때 누가 의병의 밑으로 들어오냐 하면 곽재우 같은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지주예요, 지주. 양반 지주란 말이죠. 그러면 그 밑에서 소작농, 그리고 노비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오는 거예요. 그런데 평소 내신 성적이 좋아야 된다는 거죠. 평소 그들한테 좀 잘해주고 이러면 우리도 그렇잖아요. 주인이 어려울 때, 이 노비들이 함께 힘을 모아주는데 뭐 평소에는 진짜 착취하고 못 되게 굴면 ‘저 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사실 이런 모습들이 예전에 사실 한국 전쟁기에도 이런 것은 다시 한번 재현됐어요. 사실은 그 전에 지주였지만 그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좀 잘해 주고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이 저 사람을 반동이라고 그래도 고발하지 않고 보호 많이 해 줬고 평소에 좀 막 착취하고 이런 사람들은 완전히 그때 막 또 당하고. 이런 약간은 비슷한 상황일 수도 있는데 결국 곽재우 장군도 평소 잘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 밑에 정말 많은 의병장이 몰렸고 거기에 이제 무기 나눠 주고,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홍의(紅衣)를 입었고, 왜 홍의를 입었는지는 조금 뒤에 영상자료로 보겠는데요. 그리고 5월 11일, 12일 제가 여기 꼭 집어 넣어라고 그래가지고 아마 예비 답사 갔을 건데, 여기 갈 겁니다. 정암진. 바로 이 곽재우 장군이 승전을 했던 이 전투. 바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길목에 있고 이게 소처럼 생긴 바위다 그래가지고 정암이에요, 정암. 소처럼 약간 생겼죠? 그리고 정암, 그리고 여기 나루. 여기 예전에는 물이 많이 지나갔으니까 배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고 이 정암진 전투에서 곽재우 장군이 대승을 거두는 바로 그러면서 정말 그 당시 홍의장군으로 불리면서 일본군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곽재우 장군의 모습과 의병들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영상자료 잠깐 보시고 진행하겠습니다.

나레이션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치닫고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서둘러 피난 길에 오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 하지만 조선에는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남아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일본군을 향해 기습 공격이 시작됐다. 매복해있던 조선인들의 등장에 일본군은 당황했고 치열한 접전 끝에 육지에서 쏘아 올린 첫 승전보. 일본군을 막아 낸 그들은 다름 아닌 조선의 백성 의병이었다.

최원정 MC : 조선 역사상 최대의 위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진짜 엄청난 기세로 밀고 올라왔는데 한양이 불과 20여일 만에 함락이 됐어요.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그렇죠. 4월 13일에 일본 선봉대 18,000명이 부산진을 침략하고 이 부산진이 3시간 만에 함락이 됩니다. 이 소식을 조정에서 안 것은 나흘 뒤, 즉 4월 17일이었거든요. 이쯤 되면 조정에서 손을 쓸 겨를이 없이 일본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상황이었죠. 이윤석(방송인) : 물론 이제 형세가 그렇게 급박하니까 임금이 피난을 갔을 수는 있겠지만 백성들한테는 임금이 부모와 같은 존재인데 전쟁이 나자마자 자식을 팽개치고 부모만 도망갔다, 이런 느낌도 들거든요. 류근(시인) : 당황하기는 왜군도 마찬가지였다는 거 아닙니까? 그네들 상식으로는 한양에 가서 포진하면 임금이 당연히 항복할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이미 도망치고 없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장기로 따지면 ‘장이야’ 하고 불렀는데 장이 포나 차처럼 막 이동하고 있는 거예요. 이윤석(방송인) : 아, 조선은 정말 왕이 빠르구나.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당시 선조 입장에서만 보면 도성을 버리고 파천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부산진 그대로 뚫리죠, 동래성 무너지죠. 그리고 사실 선조가 제일 믿었던 인물이 신립 장군인데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 치다가 거의 궤멸 당했다라는 이 소식을 듣고는 나라도 빨리 몸을 피해야겠다. 내가 일단 살아야 종묘사직도 보존되고 최원정 MC : 종묘사직은 지키겠다. 류근(시인) : 짐이 곧 국가다. 이런 얘기에요. 최원정 MC : 자, 이런 상황에서 이제 희망의 불꽃이 쏘아 올려지는데요. 바로 의병이 등장을 하는 거잖아요. 오늘 의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눌 분을 특별히 모셔봤습니다. 우리 교수님은 이메일 주소에 1592 숫자가 들어가져 있어요. 김강식 교수님 반갑습니다.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예, 반갑습니다. 류근(시인) : 잊지 말자 6.25, 상기하지 임진왜란. 뭐 그런 겁니까? 최원정 MC : 우리 앞서 화면에서 본 정암진 전투가 육지에서의 첫 승리인 거죠? 그게 바로 의병이 해낸 거예요.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임진왜란 때 의병이라는 것은 국가의 정규군, 강군이 아니고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가지고 싸운 비정규군이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정암진 전투가 왜 중요하냐면요. 경상도를 거쳐 가지고 일본군들이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서 지나가야 하는 첩경입니다. 지름길인데 일본의 안코쿠지 에케이라는 장수와 2,000면의 군사가 이쪽으로 진격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곽재우 장군이 그 정보를 알고 이쪽에서 기습 작전으로 방어를 하게 됩니다. 최원정 MC : 지금까지는 파죽지세였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에 일본군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당시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왜군들을 노루 쫓듯이 했다. 그리고 홍의장군이 있는 곳에는 조심해서 피해야 한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왜 홍의장군이라는 말이 나온 줄 아세요? 이윤석(방송인) : 빨간 옷을 입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빨간 옷을 입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이라는 인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명나라 황제에게 붉은 비단을 선물을 받아요.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킬 때 그 비단으로 철릭(天翼), 장군복을 입고 완전히 휘젓고 다녔죠. 그래서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홍의라는 것은 거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죠. 최원정 MC : 일부러 입고 오신 거예요?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전 사실 다들 일부러 입고 오실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저만 이렇게 튀네요. 류근(시인) : 오늘 복장은 홍의 소년 같아요.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감사합니다.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 유니폼도 붉은 유니폼이잖아요. 이걸 가지고도 한때 일부 사람들은 상대방을 자극한다. 그래서 우리가 붉은 유니폼 대신에 흰 유니폼을 입자고 그러는데 우리의 전의를 다지는.. 그러니까 그때도 비슷한 이치다라는 거죠. 이윤석(방송인) : 오 필승 곽재우! 최원정 MC : 자, 그럼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지도를 통해서 한번 볼까요? 교수님.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의병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함경도 쪽에는 정문부, 그리고 묘향산에서는 서산대사 같은 승려, 황해도에서는 이정암 같은 이런 분들이 일어났습니다. 류근(시인) : 이상하네요. 그런데, 벼슬아치들은 경기도와 수도권 일대에 가장 많았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쪽은 전혀 없네요. 혜택은 가장 많이 받았을 텐데.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실제 조선 시대 때 의병이라는 것은 지방에 있는 향촌 조직이 의병 조직으로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양반 지주들은 전호(佃戶), 가노(家奴), 노비 이런 사람들을 의병에 적극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친인척들이 다시 또 의병을 불러모으고 이렇게 해가지고 크게 조직화 되었는데 최원정 MC : 들불처럼 번져가는 게 보이네요. 이윤석(방송인) : 임금도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마당에 백성들이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기왕 일어날 거면 관군 쪽으로 들어가서 정규군대에 소속이 되는 게 조금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실제 아시겠습니다만 부산에 일본군이 4월 13일 상륙하고 나서 관군들은 대부분 다 궤멸되거나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럴 때 자기 지역을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자기 가족이 당하고 친척이 당하기 때문에 자기 고장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향촌을 지키는 향병, 의병이 항명 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기록에 보면 의병 활동이 가장 먼저 출발한 지역이 경상도라고 나와 있는데 맞습니까?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예, 그렇습니다.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지금은 우리가 경상도를 경상남도 북도 이렇게 구분하잖아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도, 우도인데 우도가 가장 왜적의 침입 루트가 되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지도에 나오는 고령이라든가 합천이라든가, 의령이라든가 다 경상우도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전라도 지역에서는 국왕에 대한 평소 신하들의 충성 이런 것들을 실험하기 위해서 김천일, 고경명 이런 분들이 건황을 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올라간 이런 형태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류근(시인) : 우리가 재미있는 게 관군에서 도망친 군인들도 있고 심지어 도적들까지 합세해가지고 의병에 힘을 보탰다고 해요. 그런데 조총 한번 구경 못 해본 일반 백성들인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믿을 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최원정 MC : 자, 이렇게 모두 한 마음으로 의병이 되었는데 전과는 어땠어요?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우도 쪽에 현풍, 그다음에 창녕, 영산, 이런 지역이 회복이 되고요. 그다음에 7월 이후가 되게 되면 오늘날 경북 안동지역 그다음에 상주, 경주 이런 쪽이 수복이 되어가지고 초기에 임진왜란 때 일본 군인들이 동로, 중로, 서로 이렇게 삼로로 진격을 했는데 그중에 중로, 대구와 밀양 루트만 겨우 유지되는 이런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의병들의 역할이 상당히 크고 공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윤석(방송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년 3월에 내가 가서 의병을 다 처단할 테니까 의병이 쳐들어와도 따라가지 말고 성을 지키고만 있어라.’ 건드리면 안 돼. 이렇게 겁을 낸 거죠. 류근(시인) :왜군들이 지금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고 있었는데 의병들이 뒷덜미를 딱 잡아채는 그런 형국이에요.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일본군 측의 전투 계산서에 없었던 변수가 바로 의병이에요.

드리마 [징비록] 中
고니시키 유키나가 : 뭐야?
부하 : 의병이 저리 저항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윤석(방송인) : 참 놀라운 게 거의 다 농사짓던 분들 아니에요? 군사 훈련도 제대로 못 받았을 텐데 상대는 최신식 무기잖아요. 조총이. 어떻게 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지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저희 학생들도 그렇게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번 물어봤어요. 학생들이 뭐라고 대답을 하는지 ‘의병이 일본군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죽창을 썼기 때문에, 일본군보다 체격이 컸기 때문에, 깡이 있었다, 절박했기 때문에, 제가 또 인상 깊은 답변이 뭐냐면 정신줄을 놓지 않은 유일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생존이라는 얘기죠. 최원정 MC : 임금도 관군도 다 정신줄을 놓고 있었는데 백성들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네요. 류근(시인) :저 답변한 친구는 정말 예사롭지 않은 친구인데요. 훌륭한 학생입니다.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제가 선생님입니다. 류근(시인) : 깡이 있었다. 그다음에 절박성 뭐 이런 게 있잖아요. 와 닿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멘탈이 중요하다고 본 거잖아요. 근데 저도 군대를 갔다 왔지만 사실 전쟁이라는 게 깡과 절박성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혹시 동네마다 극비리에 전수되어온 비밀무기 같은 게 있었나요?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전설의 무기 이런 거 류근(시인) : 비장의 무기, 이윤석(방송인) : 함정을 파거나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우물에 독약을 뿌린다든가 깡으로 싸우면 되지만 맨몸일 때는 나레이션 :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고? 최원정 MC : 여러분들이 모두 추측하고 계시잖아요. 뭔가 다른 비법이 없었을까? 깜짝 퀴즈를 지금부터 내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의병들이 쓰던 물건입니다. 과연 어떤 것들일지 한번 풀어 봐 주세요. 바가지? 그리고 그 아래는 뭐죠? 홍의, 추측을 해보세요. 각자 어디에 쓰인 물건일지 이윤석(방송인) : 이거 아니에요? 거지인 척하고 다가가서 빡! 최원정 MC : 저 함은 뭘 거 같으세요? 이윤석(방송인) : 함? 자 우리 오늘 결혼식이에요. 함 사세요 하고 갔다가 빡! 김강식(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홍의는 곽재우 장군이 일본군에게 교란 전술을 쓰기 위해서 자기 밑에 있던 여러 부하들에게 홍의를 입혀가지고 그러니까 일본군이 가는 데마다 이 홍의를 입은 장수들이 일어나니까 일본군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곽재우는 신이다. 신출귀몰하는 신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이 아주 공포심을 갖게 됩니다. 이윤석(방송인) : 홍길동이나 손오공 같은 사방에서 나타나는... 최원정 MC : 자, 문제는 저 까만 바가지가 뭘까요? 정말 이윤석 씨 말처럼 도망가는 걸까요?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김천일 장군하고 관련이 돼요.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김천일의 부인이에요. 이 사람이 상당히 비범한 사람이에요. 바가지를 만들고 난 다음에 이것을 검은 옻칠을 한 거예요. 까맣게 칠을 한 다음에 이걸 병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게 하고 그러고는 일본군 진영에는 정말 쇠로 만든 바가지를 갖다 놔요. 일본군들이 보고서는 이렇게 무거운 걸 보니까 조선군들이 하나씩 차고 다니는 거야. 저거를 가볍게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힘이 세구나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그렇죠. 이윤석(방송인) : 저같이 비리비리 해 보이는 사람이 하나씩 차고 다니니까 앗, 무서운 사람이구나 이렇게... 최원정 MC : 자 그러면 이 보물상자는 도대체 뭘까요? 류근(시인) : 저는 이게 정말 궁금합니다. 이 안에 보석같은 걸 넣어 놓고 있다가 그걸 막 뿌려요. 그럼 왜군들이 정신없이 그걸 막 잡으려고 할 때 위에서 돌을 막 던지고 해서 일거에 소탕해버리는 거예요. 최원정 MC : 먹고 살기 힘들었을 텐데 보석을 막 뿌렸을까요? 왜군한테? 이윤석(방송인) : 한번 열어보세요. 류근(시인) : 비었어요.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이렇게 비워둘 수밖에 없었던 게 여기에다가 벌떼를 집어넣었다가 열면 공격을 하도록... 이윤석(방송인) : 벌 폭탄, 생화학 무기죠. 최태성(서울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 : 조선 출신 벌이니까 열심히 싸웠을 거예요. 한편으로 이런 걸 보면서 짠하기도 하네요. 민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무기든지...

이 내용은 예전에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했던 내용들인데 재밌죠? 의병들이 이렇게 일어났다. 그래서 여기 오늘 아까 정암진, 곽재우 장군이 홍의를 입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아마 5월 10일 날 첫 코스로 의병박물관을 갈 겁니다. 의령 지역에 가서 곽재우 장군 유적지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이번에 또 가장 메인 현장 답사 중의 하나가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인데 남명의 외손녀 사위가 곽재우 장군이고 남명에게 병법을 배웠다. 그리고 남명 조식은 평소에도 칼을 차고 다닌 바로 그런 유학자였어요. 그래서 항상 대비를 하라. 그래서 성리학자이기는 하면서도 퇴계 이황과 함께 당대에는 영남학파 양대 산맥이었어요. 그런데도 퇴계 선생 같은 사람은 학문으로만 너무 치중했다면 남명은 유학자도 정말 필요한 경우는 칼을 쓸 수도 있어야 된다. 그렇게 해서 평소에 성성자라는 방울을 ‘경(敬)’의 상징으로, 그리고 ‘의(意)’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고 바로 이런 스승의 가르침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보여주는 게 임진왜란 때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다 의병장이고 아까 앞에서도 소개했죠? 의병들은 경상우도,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에서 제일 많이 일어났는데 바로 그 학문과 실천의 연원에 남명 조식이 있었다. 바로 이 남명 조식 선생을 보면 사회(士禍)의 시대를 살았고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고 1501년부터 1572년. 퇴계 이황 선생은 1501년부터 1570년까지요. 그래서 우리가 보면 훌륭하신 분들은 좀 태어나거나 돌아가셨을 때 되게 좀 깔끔하게 태어나시거나 돌아가시는 경향이 있다. 외우기 좋잖아, 1501년. 외우기 좋잖아요? 그리고 우리 그때도 제가 여기 강의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정조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시잖아요. 깔끔하게 돌아가시니까 외우기 좋잖아요. 나는 19세기는 안 건드려 뭐 이렇게 딱 되니까. 이 남명 조식도 아마 기억할 거예요. 1501년생, 퇴계 선생하고 동갑이다. 퇴계 선생보다는 두 살 더 살아요. 퇴계 선생은 1570년에 돌아가시고 남명 선생은 1572년에 돌아가시고 그 당시 영남학파 양대 산맥 좌퇴계 우남명.

자, 그럼 아까 경상좌도 경상우도 이렇게 분리된 거 보셨죠? 이거의 기준은 뭘까요? 바로 왕이 보시는 걸 기준으로 해서 왼쪽은 낙동강 왼쪽, 좌도. 오른쪽, 우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때 남명 조식 선생이 그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게 남명 조식 선생이 활약하던 시대에 명종 때 명종의 어머니가 우리 문정왕후 아시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습니다. 수렴청정. 발로 앞을 가리고 정치를 한다. 듣는다, 발을 드리운 정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수렴청정을 할 때 명종이 제대로 왕 역할을 못 하고 완전히 대리가 이제 뭐 요즘으로 치면 완전히 모든 국정을 주도해 나가니까 남명 조식이 이런 상소문을 올려요.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지가 오래됩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해간다. ‘자전(문전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안 과부에 지나지 않고...’ 과부한테 진짜 과부라고 하면 정말 기분 나쁩니다. 그렇죠? 바로 그 케이스에요.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이실 뿐이니...’ 완전히 명종을 고아라고 표현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천 가지 백 가지 천재와 억만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여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1555년에 단성, 지금의 진주 쪽으로 가면 단성이라는 지역이 있어요. 이 단성 현감을 맡았다가 사직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그 당시로 치면 엄천난 상소문을 올리는 거예요.

그 당시에 이제 뭐 문정왕후를 아주 비판하는 이런 뭐 왕 뒤에서 수렴청정하면서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국정농단 하지 말라. 이렇게 해서 이게 이 상소가 문제가 되면서 당시 처벌을 당합니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죄로 근데 이때도 대단했던 게 많은 응관들 요즘으로 치면 언론 같은데 신문기자들 뭐 이런 사람들이 막아줘요. ‘남명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촌사람이어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만 하다.’ ‘남명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 결국 이렇게 하면서 큰 죄는 받지 않았지만, 이 사람의 어떤 직선적이고 강직한 그런 기지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했지만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라는 딸랑딸랑하는 방울이에요, 이건. ‘경’은 수양을 위한 그런 상징이었고요. ‘의’는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칼하고도 연결돼요. 뭔가 잘못되고 그러면 칼로 확! 우리도 흔히 그런 말 하잖아요. 쑤셔야 된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실제 남명 조식은 이 칼에다가도 이렇게 새겼어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바깥으로 과다하게 끊는 것은 ‘의’다.’ 이렇게 해서 실제 남명 선생은 평소 제자들에게도 이 일본 애들이 저렇게 요즘 막 그 남해안 노략질도 많이 하고 이러는데 저런 거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런 식으로 요즘으로 치면 모의고사 같은 걸 쳐요. 서당 같은 데서, 그러면서 스승이 모범답안을 제시하는데 실제로 모범답안을 보면 정말 표현이 과격합니다. 저렇게 일본놈들이 공갈을 떨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 이렇게 우린 대응해야지 요즘으로 치면 햇볕 정책이 아니다라는 거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해야 된다는 거죠. 이런 것들을 계속 가르쳤고 결과적으로 그 당시에 사회 모순이 있으면 항상 나섰던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이 지역을 갈 건데 남명 조식의 서원이 지금 배양서원인 덕천서원. 그리고 이 세심정은 제자들을 가르쳤던 이 지역에 세운 정자입니다. 그래서 여기 덕천강이 흘러가는 그 모습도 나오고요. 바로 위쪽에 이제 지리산 자락이고 여기 진짜 자세히 보시면 제가 학생들한테 설명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래서 남명 조식이 시 분야에서도 아까 욕천(浴川)이라 그래 가지고 시냇물에 목욕하면서 여기 시 내용을 한번 보면 ‘온몸에 쌓인 40년간의 허물,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에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 이 시가 유학자 느낌이 안 나죠? 거의 검객 느낌이 나는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거죠. 이게 뭔가 뭐 세상에 뭐가 잘못되고 이러면 진짜 선비도 나서야 되는 거지 그거 뭐 그냥 뭐 세상에 타협하고 이래선 안 된다라는 이런 정말 과단한 모습이 바로 이 남명의 모습이었다. 욕천이라는 시입니다. 남명 조식의 학문의 산실은 바로 경상우도. 이번에 우리가 주로 가는 지역도 의령, 진주, 산청 다 경상우도 지역입니다. 1501년에 출생했고 아버지도 이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좌천될 만큼 조광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특히 남명 조식의 숙부는 아예 사화 때에 그 처형을 당할 정도로 정말 강직한 집안이었어요.

그런데 아까 곽재우도 그렇고 남명 조식 선생도 공통점이 관직에 나가지를 않아요. 정말 잘못되게 관직에 나가서 녹을 받느니 나는 그냥 떳떳하게 내가 하고 싶은 소리 하면서 그렇게 살겠다. 그러면 이런 사람도 관직 생활도 안 하는데 어떻게 살아가지? 이런 의문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시대 선비가 나름대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된다. 처가 덕을 잘 받아야 해요. 장가를 잘 가야 해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재산상속에서 자녀들이 똑같이 균분상속(均分相續)이라고 그래요. 똑같이 상속을 받으니까 재산이 그대로 이제 여자도 결혼하게 되면 재산이 많으니까. 그래서 보통 결혼을 하게 되면 처가살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곽재우 장군 같은 경우도 처가살이를 했고요. 곽재우 장군 처가가 엄청 잘 사는 집안이었어요. 그래서 아까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 우리 지금도 그렇지만 의병을 일으킬 때도 그냥 뭐 ‘야, 내 밑으로 모여’ 이러면 안 모여요. 요즘 같으면 숙식 제공, 고급 무기 제공. 이런 걸 붙여 놔야 많이 모여요. 똑같아요, 같이 모여도 숙식 제공, 밥도 뭐 퀄리티 보장 뭐 이렇게 되면 이제 확 몰리는 거죠. 그래서 남명 조식도 보시면 처가가 남평 조 씨인데 장인이 김해의 부호였어요. 그래서 남명 조식도 30살부터 48살까지 처가살이를 했고요. 그때 김해의 산해정이라는 곳에서 사셨고 지금은 이 지역을 가면요 완전히 요즘으로 치면 그냥 내륙 깊숙하게 들어가는데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다 근처였다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남명 조식은 바다 근처에 살다 보니까 왜구의 어떤 그 침략의 현장이라든가 이런 것도 많이 목격했다. 그런 것이 왜구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그런 배경으로 자리했고요.

또 안동권씨 성하고 족보 보시면 다 남녀가 차별 없이 순서대로 출생 순으로 기재되어 있어요. 우리가 예전에 조선 후기로 가면 족보에서 여자는 사라집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여자 이름이 다 나온다라는 거, 그리고 분재기(分財記) 같은 거, 이런 것도 보면 남녀 차별 없이 재산 상속이 똑같이 이루어졌던, 바로 이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되면 처가살이해도 그 처가의 재산 그대로 이어받을 수가 있었다. 우리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중에 바로 이 율곡 선생 남매분재기(男妹分財記)가 있는데 이게 바로 그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지금도 이 산해정이라는 그 건물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산에 이렇게 올라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전에는 이쪽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다. 김해. 그리고 이제 그 호도 예사롭지가 않아요. 우리가 보면 조선 시대 학자들의 호의 대부분은 자기 지역에 있는 큰 산이라든가 강이라든가 호수라든가, 바위. 소위 말하는 랜드마크를 호로 삼아요. 그래서 보면 율곡 이이 율곡은 우리가 흔히 강릉을 율곡의 고향으로 생각하는데 강릉은 고향이 아니죠. 누구 고향이다? 어머니 고향이에요. 아까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 이원수가 처가살이하면서 낳은 아들이 율곡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곡의 원래 고향은 파주예요. 경기도 파주. 밤나무골. 그래서 호가 율곡이 되는 거다. 그리고 연암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에 제비 바위라는 뜻이고 성호 이익이라는 인물의 호는 바로 안산 지금도 안산에 가면 성호기념관 있어요. 안산에 첨성촌(瞻星村)이라는 그 지역이 첨성촌이에요. 거기 큰 호수가 있어요. 첨성촌의 ‘성(星)’ 호수의 ‘호(湖)’ 그래서 호가 성호가 되었다. 다 지역이다. 다산 선생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전라도 강진으로 귀향 갔을 때 애를 많이 나서 다산이 아니라 그곳에 차밭이 있었다. 그래서 차가 많이 생산되는 산. 그런 뜻에서 다산(茶山)이다.

남명 선생은 전혀 그거하고 상관없이 남명이라는 호는 지역명이 아니에요. 아니 이거는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첫 장에 보면 남명은 대봉이 날아다니는 큰 바다라는 뜻이에요. 대봉 전설 속의 상스러운 새고 그 대봉이 날아다니는 큰 바다. 결과적으로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호로 삼았다는 건 남명이 그만큼 장자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남명 선생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뭐 장자라든가 병법이라든가 여러 가지 지리라든가 학문의 폭이 매우 다양해요. 그게 왜 그러냐면 성리학의 이론 이런 거는 너무 공부할 필요 없다. 이미 위의 스승들이 다 해 놨으니까 정리 다 끝났으니까 우리는 이거는 잘 실천만 하면 되는 거고 다른 다양한 학문들, 이런 것들도 우리가 실용적인 거라면 좀 습득을 하자. 그렇게 해서 남명이 병법도 공부를 했고 그러다 보니까 그것을 곽재우한테도 가르쳤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남명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산천재(山天齋)라고 나와요. 여기는 우리 답사 때 꼭 갈 건데요. 이 남명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했던 시조도 가끔씩 국어책에 나오는 데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남겼어라. 아회야 무릉이 어디메요.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이런 시조 공부하신 분 있죠? 여기서 두류산은 지리산을 말합니다. 바로 이 지리산 자락에서 그리고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등산했던 유람곡도 남겼어요.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고 해서 그리고 이 기록에 보면 이때는 기행문을 남긴 거고, 이미 그 전에 나는 열 번 이상 지리산을 답사했다 라고 기록에 나옵니다. 그 옛날 선비들은 이렇게 산을 많이 오르고 그 산에 오르는 경험을 기행문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남명 조식 선생하고 지리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산이다. 그래서 시대적 조건은 사화기, 지역적 조건은 경상우도. 실천성을 중시하고 다양한 학문을 포괄했던 바로 그런 학자였다.

그래서 이런 데서 그런 대목이 많이 나와요. 이것이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인데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데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서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남명 조식이 이때 되게 못마땅했던 게 그 당시 퇴계는 품성은 좋았던 거 같아요. 그 당시 나이 차이 30살 되는 제자급인 호남의 학자 기대승이라 인물하고 사단칠정 논쟁을 벌입니다. 이거 책에 많이 나오죠? ‘사단칠정 논쟁’ 그러니까 이 퇴계 선생이 정말 성격이 좋은 게 그때 계속 편지 오면, 이 기대승이라는 인물이 의문되는 내용을 적어오면 거기에 대해서 몇 년 동안 계속 주고받아요. 퇴계 이황은 정말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도 제가 약간 믿고 있는 구석이 남명 선생 같으면 ‘쓸데없는 그런 걸 연구하느니 그냥 실천해라.’ 이렇게 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남명은 바로 이런 게 정말 탁상공론 아니냐? 아니 뭐 자꾸 이런 거 해 가지고 생활이 필요도 없는 거 이런 거 왜 어르신께서 이런 거 자꾸 조장하느냐 그러면서 비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실천에 좀 더 힘을 써라.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딱 대비 되는데 태어난 해 똑같죠.

그런데 지역적 기반이 퇴계 선생은 경상좌도의 중심인 안동, 예안, 남명 선생은 경상우도인 합천, 진주 쪽이고 그리고 이제 ‘인’을 중시했다면 남명 선생은 ‘의’를 중시했고 퇴계 선생이 약간 바다 이미지라면, 이건 성호 이익이 그렇게 표현을 했어요. 남명 선생은 태산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당대까지도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있었는데 왜 그럼 우리는 이제까지 남명을 잘 몰랐냐 하면 퇴계 선생의 제자들은 어쨌든 남인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영남 이 지역에 완전히 퇴계 학파가 는 형성이 되었는데에 비해서 남명 선생의 학문을 이은 수제자가 정인홍인데 인조반정 때 처형당합니다. 그러면서 북인 학맥이 딱 끊겨버려요. 그래서 남명 조식의 존재가 한동안 잊혀져 있다가 한 80년대부터 사실은 남명 조식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사실 여기에는 저도 이분하고 관계가 있는데 남명 조식의 후손 중에 한 분이 부산교통이라고 버스회사 하시는 분이 있어요. 이분은 진짜 돈 벌어가지고 다 여기에 투자를 한 거예요. 선비문화원 저거 세울 때도 아마 거의 100억 가까이 투자를 하고 계속 이제 그 남명 선생과 관련된 무슨 사업이라면 야, 이런 분들 정말 대단해요. 그래서 지금도 아마 지금 아마 그분 연세가 90 가까이 되셨는데 지금도 정정하세요. 지리산 정기를 타셔가지고 그런지... 그런데 정말 이분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저도 예전에 좀 덜 바쁠 때는 1년에 한두 세 번, 제가 진주에 가서 회의 같은 게 있어요. 남명학연구원. 좀 뵀는데 요새는 좀 안 뵀는데요. 얼마 전에 신문에 크게 한번 나왔더라고요. 이런 분도 있다. 조선일보에 ‘누구가 만난 사람’ 이라고 해서 이거 보신 분 있어요? 바로 그분이에요. 조옥환 사장이라고 그런데 이분이 저도 언급해 놨더라고요. 뭐 이렇게 하는데 신동주 교수 어쩌구... 저도 갑자기 제 이름이 검색어 떠 가지고 보니까 이제 뭐 저도 막 그렇게 해 가지고... 뭐 하여간 좋아하셨어요. 제가 처음에 남명 조식으로 제가 석사 논문을 썼거든요. 그러니까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이게 퇴계한테 보낸 편지인데 ‘공은 서각을 불태우는 듯한 명철함이 있지만 저는 동이를 이고 있는 듯한 탄식이 있습니다.’ 이게 주목되는데 ‘저는 눈병까지 있어 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지못한데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밝은 눈을 가진 공께서 발운산(撥雲散)으로 눈을 밝게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 보면 발운산이 한약재에요. 그런데 이게 한자 그대로 보면 구름을 흐트러트리는 약재 뭐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조정에 있는 저 간신들 좀 다 몰아내 주십시오. 약간 이런 표현이에요. 우리도 요즘 그런 거 잘하잖아요. 패러디라고 그러나? 그러니까 퇴계 선생도 딱 그렇게 하잖아요. 당귀(當歸)도 우리 한약재에 쓰이는 표현인데 ‘나도 당귀를 찾는데’ 여기도 이중적이에요. 한약재 당귀도 있지만 ‘나도 돌아가고 싶다. 내가 원해서 관직 생활하는 거 아니다. 나 좀 이해해주십시오.’ 이렇게 정말 서로 선문답처럼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그래서 조선 시대 학자들이 주고받은 이런 편지들을 보면 되게 재미있어요. 다산 정약용도 아내가 보내온 치마폭에 편지를 써서 보낸 거 아시죠? 매화하고 새 그려가지고, 매조도(梅鳥圖)라고 하는데 그런 것도 있고, 박지원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낸다.’ 라고 한 그런 편지도 있어요. 내가 여기 시골에서 고추장 만들어서 보내니까 우리로 치면 택배 보내니까 잘 먹어라, 뭐 이런 거. 옛날 사람들도 이런 편지들을 보면 인간미를 느낀다고 할까?...

대학자로 알려진 박지원이니, 정약용이니 그래서 이 조식과 이황은 50년간 사화기를 경험했고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는데 남명 조식이 특히 더 위기로 인식을 해서 특히 왜구에 대해서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해서 되게 과격해요, 표현도. ‘눈을 부라리며 말하기를 반드시 네 모가지를 뽑아버리겠다고 하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공갈인 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얘들한테는 확실하게 우리가 대응을 해야 된다. 그래서 그런지 남명 문하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같은 의병장. 곽재우는 바로 남명 조식의 외손녀 사위라고 그랬죠?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최초의 의병장이고 이것을 기념해서 바로 2010년부터 ‘의병의 날’이 6월 1일로 제정이 되었고 그런데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왜 남명 조식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냐 하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데 퇴계 학파의 제자들은 대부분 남인. 남명 조식의 제자들은 대부분 북인이 되었는데 북인이 광해군 때 딱 한 번 권력을 잡았다가 인조반정으로 완전히 정치적으로 대부분 숙청이 되어버려요. 그러다 보니까 그 학문적 뿌리가 되는 남명 조식에 대해서도 많이 잊혀지게 되는 그런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남명 조식의 이런 모습들, 요즘 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죠? ‘경’과 ‘의’를 실천했고, 직언을 아끼지 않는 현실 비판자, 최후까지 국방을 걱정했고, 최대의 의병장을 배출했던 남명 조식의 정신은 유학자들은 무조건 성리학만을 한다라는 그런 이미지에서도 탈피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인물이다라는 거. 그리고 또 이번에 의병과 관련해서 남명 조식 유적지를 가기 때문에 남명 조식 선생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해봤고요.

아까 내용 이어서 전국적으로... 원래 경상도하고 전라도 쪽에서 먼저 일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서 충청도에서는 조헌, 영규, 그리고 함경도에 정문부라는 의병장이 있었고요. 사실 일본을 당황하게 한 것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승병들의 활약이에요. 일본도 나름대로 조선을 침략할 때 나름대로 계산을 다 하고 들어와요.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야 할지 아까도 말씀드렸죠? 의병은 일본의 공격 매뉴얼에 없었던 존재들이에요. 전국시대에 일본은 자기들끼리 한판 싸우고 왔어요. 일본군들이 초반에 왜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느냐 하면 이미 전투 한번 하고 왔다라는 거죠. J리그 한판 뛰고 온 거예요. 우리도 사실 베트남 전쟁에 갔을 때 한국군이 상당히 전투력이 뛰어났다고 그래요. 왜? 우리는 6.25 전쟁 때 실전을 해봤거든요. 사실 그런 게 되게 중요하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초반에는 승승장구했는데 일본군들이 전국시대에 싸울 때는 주로 사무라이들 무사 계급들끼리 싸워요. 농민들은 대부분 농사짓고 그래요. 그러니까 조선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조선의 농민들이 곡괭이 들고 뒤에서 치고 이러니까 당황하기 시작한 거예요. 자기들도 알아요 다 공부해요. 스님들은 살생유택(殺生有擇). 인자하고 그러니까 우리를 해치지 않겠지. 그런데 조선 스님은 달랐다라는 거예요. 막 날라다니면서 치고 이러니까 이건 뭐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 서산대사, 사명대사 저들은 뭐야? 매뉴얼에 없는 사람들인데... 우리도 약간 그럴 수 있지 않아요? 예를 들어가지고 느낌상으로는 신부님 그러면 신부님이 공격할 거라고는 별로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신부님이 뒤에서 때려봐요. 그러면 우리도 엄청 당황스러울 거 아니에요. 옛날에도 그런 느낌을 일본군이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게 사실 의병장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았다. 임진왜란 끝나고 나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이라고 해서 공을 논하는 과정에서 사실 전쟁에서 직접 싸우는 사람들을 선무공신(宣武功臣)이라고 해요. 선무공신은 18명이 임명된 데에 비해서 선조 따라서 피난 갔던 사람들을 공신을 우리가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고 하는데 86명. 거의 5배에요. 이게 결과적으로 보면 선조가 자신의 의지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승리한 가장 중요한 원인을 이순신 장군이나 의병들의 활약보다는 자기가 잘 피난 갔고, 명나라가 우리 조선을 도와주어서 그랬다.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사실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상황하고 상당히 닮아 있어요. 결국 우리가 해방을 가져온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열심히 싸우고 희생해서 그런 거보다는 미국이 일본을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서 그랬다. 우리도 그렇게 돼버렸잖아요. 그런 게 결과적으로 우리 시대에는 좀 더 냉철하게 잘 반성해 나가야 되는 부분이고 사실 김덕용이라는 호남 의병장은 이몽하고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가지고 결국 고문 끝에 처형당하고요. 곽재우 장군도 제대로 대접 못 받으니까 열 받아가지고 결국 현풍의 비슬산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나는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잃어버리겠다.’ 그렇게 호가 망우당(忘憂堂)이 되는 거예요. 바로 이런 모습들이 우리 시대에 우리가 잘 새겨봐야 되는 부분이고 의병의 활약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반격의 물꼬를 트게 한 게 바로 수군의 활약.

이순신 장군은 간략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이런 활약으로 일본군의 전략이 완전히 차질을 빚고, 육지에서는 승승장구 하면서 평양까지 갔는데 2진이 못 오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바닷길을 완전히 제패했고 거기서 특히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떨어트리게 한 전투가 바로 한산도대첩. 그리고 이 조선 수군의 승리에는 거북선과 판옥선으로 대표되는 배가 우위에 있었다. 일본 배보다 우리 거북선과 판옥선이 훨씬 더 튼튼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싸울 때 배와 배끼리 부딪히는데 이럴 때 훨씬 유리했고 이순신의 승리에는 인재를 알아보는 바로 류성룡과 같은 이런 인물의 한몫이 컸다라는 거. 그래서 여기 보시면 거북선, 판옥선에다가 지붕을 덮어씌운 게 거북선이에요. 그리고 거기다가 총포를 장전을 해가지고 일본군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거고, 일본군 얘네들이 상륙하는 것을 좋아해요. 배에 올라타서... 칼을 잘 쓰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여기다가 송곳을 박아 놓은 바로 이런 형태를 철갑선의 형태를 했던 게 거북선이고, 이순신 장군 유적지는 전라도 쪽 명량 쪽으로 가는 것도 좋고요. 여수 이런 쪽 전라도 쪽도 괜찮고 통영 쪽으로 해가지고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이렇게 답사를 가는 것도 정말 괜찮은 지역이죠. 현장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명나라가 결국은 참전을 해가지고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이 평양성 탈환은 6.25 전쟁으로 보면 인천상륙작전이랑 비슷한 거예요. 완전히 전쟁의 양상이 바뀌고 그래서 이 1593년 3월. 행주대첩의 승리로 일본군들이 완전히 서울에서 물러가지만, 완전히 철수하지는 않고 왜성을 쌓아요. 그 대표적인 울산 왜성하고 서생포 왜성. 그리고 순천에도 왜성이 있는 거 아세요? 순천 왜성. 이번에 순천 왜성도 가셨나요? 순천 왜성도 바로 일본군들의 진영이 잘 남아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왜성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7월에 제가 추천드립니다. 아마 6월에 강의를 하고 7월 둘째 주 토요일 날 울산, 서생포 왜성. 여기를 메인으로 해가지고 답사를 갈 겁니다.

일본에서도 여기는 연구하러 와요. 왜냐하면 16세기 일본의 성의 양식이 여기에 가장 잘 남아있다는 거죠. 울산 왜성, 서생포 왜성에. 그래서 일본 쪽에서도 많이 연구하러 오는 곳이 바로 이 서생포 왜성이다. 그리고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이 1년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가 3~4년간 강화회담. 명과 일본과의 사이에서 강화회담을 하다가 이게 결렬되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7년 1월에 다시 재침을 한 게 정유년이어서 정유재란이라고 하죠. 그리고 이때 이순신 장군이 요시라라는 일본군의 2중 간첩의 작전으로 인해서 결국은 왕명을 어겼다고 해서 결국은 감옥에 투옥되고 겨울 풀려나서 백의종군했던 이 시절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는데 칠천량해전에서 대패를 하고 원균도 역시 이때 전사를 해요.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를 하면서 조선 수군에서 거의 남은 배가 없었는데 원균 휘하에 배설이라는 경상우수사(慶尙右水師)가 몰래 12척의 배를 빼돌려가지고 이게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재기하는...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재기할 때 남긴 유명한 말이 있죠. 뭐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거죠. 그래서 바로 이순신 장군의 그런 극적인 승리로 명량에서의 승리, 이게 또 기반이 되어가지고 일본군들이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는데 이 철수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다가 전사한 해전이 바로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었죠.

그래서 정말 영웅답게 마지막 전투에서 결국은 전사를 했던 이순신 장군. 그래서 임진왜란의 영향은 조선의 국토 황폐, 그리고 문화재 손실. 특히 궁궐이 이때 다 소실이 되었고요. 그리고 국제 관계에서는 명나라가 힘이 약해지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등장하면서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고 약간 얄밉긴 하지만 일본은 이때도 틈새시장을 이용해서 조선의 기술자들. 도공이라든가 성리학자들, 활자공 이런 사람들을 많이 일본에 끌고 가서 일본의 문화를 높이게 됩니다. 요즘 같으면 반도체 전문가들, 하이테크 기술자들 이런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간 거죠. 이런 변화가 있었던 게 바로 임진왜란의 영향이다. 그래서 오늘 제가 주 테마로 의병을 중심으로 해서 임진왜란에서의 의병의 활약이라든가 또 의병의 정신적 연원이 되는 인물, 남명 조식에 대해서 강의를 했고 이제 2주 정도 숨 고르기를 한 다음에 이 지역을 답사를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