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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임진왜란과 남도

오늘은 사전 강의로 제 전공과 관련되는 충무공 이순신. 과연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하여 알고 계신 게 맞는지 틀리는지 거기에 대해서 한 1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요. 나머지 뒤에 1시간은 영화 ‘명량’ 보셨죠? ‘명량’ 그 영화가 사실 진짜 그랬을까? 명량해전의 실체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자 합니다. ‘충무공의 생애와 리더십’이라는 제목으로 이게 2시간짜리 강의안입니다. 생애에 대해서 과연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을 했는지에 대해서 역사가 바라보는 성공 리더십의 요인, 이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자, 21세기 벽두에 이순신이 왜 떴는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역사는 개항 이후 지금까지 위기 상황의 연속입니다. 조선시대 가장 위기의 순간이 임진왜란이었습니다. 200년 동안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었었는데 그러다가 전쟁을 맞으니까 완전히 나라 전체가 흔들흔들했어요. 그때 나라를 구한 장수, 리더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IMF 이후에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맞아서 진짜 나라가 흔들흔들 할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에게서 어떤 리더십의 표본을 한번 보자, 그런 의미에서 아마 21세기에 이순신이 주목을 받았고 우리나라는 사실은 계속 위기가 진행될 거 같습니다. 최근의 위기는 북핵 위기였죠. 그렇죠? 요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는데 그런데 참 저한테는 다행이고요, 우리나라 전체로 봐서는 불행인데 충무공 이순신을 전공하는 역사학자가 몇 명이나 될 거 같습니까? 적어도 수백 명 수십 명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훌륭하신 분인데.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경우에 미국에서 링컨에 관련되는 책이 2만 권이 나왔다고 합니다. 2만 권. 링컨만 연구하는 학자가 500명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짜 우리나라에서 1번 2번이 세종대왕하고 충무공 이순신인데 그 전공자가 없어요. 박사학위 쓰고 현역에 남아있는 사람이 접니다. 저하고 몇 명, 우리 해군사관학교 출신. 저보다 선배들. 저는 굉장히 불행하게 생각합니다. 이거 바람직하지 않다. 전쟁사 연구하는 거하고 충무고 이순신 연구가 앞으로 굉장히 많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여러분들이 충무공에 대해서 아시고 계시는 것 중에 오늘 두 가지만 틀을 깨고 지나가겠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충무공 위인전기를 읽고 자란 세대거든요. 위인전기를 다 읽죠. 50권 사 오면 1권 세종대왕, 2권 충무공이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사주셨기 때문에 미안해서라도 1권 2권은 봅니다. 또 이순신이 싸움한 이야기잖아요. 전쟁사. 통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이들 보죠. 그런데 그 시대에 만들었던 충무공 위인전이 담고 있는 이순신의 실제 모습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충무공 이순신의 집안은 굉장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허균이라는 사람이, 홍길동전으로 유명하죠? 허균이라는 사람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자기가 자란 동네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 건천동. 남산 밑에 조그마한 동네인데 가구는 한 30여 가구밖에 되지 않지만 각 시대별로 우리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 세종대왕 때 정인지, 아주 유명하죠. 그렇죠? 시기별로 한 세 사람씩을 나열하면서 우리 시대, 내가 살던, 허균이 살던 시대에 건청동 출신으로 유명한 사함이 서애 유성룡, 그다음에 충무공 이순신과 원균, 그다음에 자기의 형이었던 허봉, 이렇게 네 사람을 들었습니다. 건천동 출신, 서울 출신이었고요. 할아버지 때에 여기 보면 7대조 변 할아버지 때, 이순신의 고조할아버지 위의 할아버지입니다. 현조(玄祖) 할아버지 검을 현(玄)자 써가지고 고조할아버지 바로 위의 할아버지인데 이 양반이 30살에 문과에 급제해가지고 83세에 돌아가셨는데 50년 넘게 관직에 있었어요. 50년 넘게 관직에 있었고 세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세조 편에 들었어요. 정치적 감각도 있었죠. 그래서 세조 때 이후에는 20년 넘게 장관 직책에 있었어요. 그래서 이순신 집안을 사회 경제적으로 벌떡 일으켜 세우신 분이 이순신의 할아버지 변(邊)이 되겠습니다.

사실 그 앞에 중시조라고 해서 이돈수라는 분이 있는데 고려 말에 중랑장(中郞將)이라고 무관 벼슬을 했어요. 이순신 집안은 이 이돈수로부터 이순신이 12대째인데 3대까지는 고려 시대의 장수들입니다. 무반(武班) 집안이었어요. 무반 집안이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양반 사대부로 전환되는 집안이 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그 시대에 굉장히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이순신 중시조는 고려시대의 중랑장이었다. 고려시대 중랑장은 현재 계급으로 따지면 제 계급 정도 됩니다. 연대장. 부하가 천명. 대령이죠, 대령. 고려 시대에 중앙군이 상장군(上將軍) 8명 대장군(大將軍) 8명, 16명의 장군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에. 그런데 그 상장군, 대장군 밑에 중랑장이 2명씩 있었어요. 2명씩 있는 중랑장이 천 명씩 거느렸습니다. 실제 병력을 거느린 지휘관들이에요. 그래서 고려 시대에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켰던 주역들을 보면 전부 중랑장입니다. 이의민, 이고, 이런 사람들이 실제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에 들어가서 집권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이순신의 중시조 할아버지도 고려 시대에 무장벼슬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양반 사대부 그러니까 과거시험을 보고 문반가문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 첫 번째 성공한 인물이 변입니다. 세종 대를 대표하는 외유관이었습니다. 계유정난 이후에 판서로 20년 이상 지내면서 굉장히 세조가 좋아하는 신하였어요. 그래서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어전통사(御前通事)라고 그래가지고 임금하고 명나라 사신하고 대화할 때 옆에서 통역하는 사람. 그 통역관을 오랫동안 하셨어요. 한번은 명나라 사신하고 접견을 해야 하는데 통역관이 안 오는 겁니다. 이변 할아버지가, 30분이나 늦게 들어온 거예요. 큰 결례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세조가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더니 이변 할아버지가 “아침에 출근하는데 말 타고 오는데 말이 더위 먹고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뛰어왔는데 이렇게 늦었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렇죠? 그래서 세조 임금이 “궁궐에서 키우는 가장 좋은 내구마(內廐馬)로 두필 줘라” 지금으로 따지면 최고급 세단 2대.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준 거죠. 조선 시대 세단은 자체 생산되었습니다. 새끼도 낳았어요. 이순신 집안이 굉장히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다. 이변 할아버지의 손자, 이거라는 분이 있는데요, 이거라는 분이. 이름이 외자죠. 이순신 집안이 이름 짓는 게 참 재미있어요. 한 대는 외자, 한 대는 두자, 외자, 두자 이렇게 갑니다. 이순신 두 글자죠? 아버지는 ‘정’ 한 글자, 아들들은 ‘회, 열, 면’ 이렇게 한 글자. 재미있죠? 이름 짓는 게. 그런데 주로 외자들이 문신에서 아주 출세를 했고요, 그다음에 두 글자 된 다음에 이순신이 최초로 무과에 가면서 무과의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두 글자에서.

증조부였고 과거에 합격하고 난 다음에 연산군의 스승을 합니다. 연산군 세자 시절에 스승을 해요. 세자의 스승은 곧, 잠시 후 세자가 뭐가 되죠? 예, 왕의 스승이죠. 그래서 연산군 8년까지 생존했어요. 연산군이 살아있을 동안 8년까지 생존했는데 연산군이 굉장히 어려워하던 선생님. 굉장히 꼬장꼬장하던 선생님. 이순신도 성격이 꼬장꼬장한 면이 있었거든요. 그게 다 할아버지들 한테서 다 물려받은 겁니다. 이유 없는 건 없습니다. 이거 할아버지가 굉장히 강직한 인물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출세하기 위해서, 진급을 하기 위해서 조선 시대에는 3품에서 2품 올라갈 때, 반드시 외직을 한번 해야 합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한 번씩 지방관을 하고 들어와야 해요. 그게 이제 목사(牧使)하고 그다음에 들어와서 2품에 있다가 관찰사하고 들어와서 1품으로 올라가는 그렇게 돌아가면서 하게 되는데 3품에서 승진하려고 지방관을 가야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지방관들이 월급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을에 가을걷이 쫙해서 세금을 걷어가지고 그중에서 일부 국가에다 내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거예요. 연봉제죠. 연봉제. 그러니까 조선 시대 가장 인기 있는 지방관 자리, 어디가 될까요? 그렇죠. 평야 지대. 그래서 일제시대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얼굴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 하지 마라. 이게 일제시대 버전이고, 조선 시대 버전은 순천 가서 돈 자랑하지 마라 에요. 순천에 옥토가 있고, 평야 지대니까 굉장히 부자들이 많았던가 봐요. 그러니까 순천부사가 부사(府使), 목사 가는 자리 중에서 인기 최고였어요.

그런데 이 이순신의 증조할아버지 이거가 연산군한테, 왕한테 직접 인사청탁 합니다. 아주 상투적인 이유를 대서 노모를 잘 모시기 위해서 순천부사를 갔다 와야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연산군이 “아이고, 예. 다녀오십시오”하고 보내줬습니다. 그래서 2년을 순천부사를 갔다가 들어오는 날, 사초(史草). 여러분 TV 드라마 보면 푸른 옷 입고 젊은 신하 두 명이 계속 쓰죠? 그게 이제 왕이 죽고 난 다음에 써 놓은 것을 바탕으로 실록이 만들어지는데 그래서 역사 사(史)자 풀 초(草)자해서 사초라고 합니다. 그 사초에 보면 왕이 얘기한 거 신하가 얘기한 거 다 나오는데 가끔가다가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이 자기 생각을 써 놓을 때가 있어요. 이걸 우리는 사론(史論)이라고 합니다. 사론. 이거가 순천부사 마치고 돌아온 날 사관이 쓴 사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냐? 이거가 젊었을 대는 청직하다고 이름이 높았다. 청렴, 강직. 순천부사 가서는 자못 청렴하지 못했다. 무슨 얘기에요? 네, 남들이 해 드시는 만큼 해 드셨다. 그래서 이순신 할아버지 때도 위인전에 보면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서 죽은 걸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기묘사화에 연루는 되었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자격정지, 그러니까 과거시험을 못 봤죠.

할아버지가 조광조의 제자였다. 굉장한 겁니다. 조선 시대 유교를 공부하는 그 학맥(學脈)에서 그러니까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 집안에 대해서 왕이 물어봅니다. “야, 이순신 집안 괜찮냐?” 왕이, 선조임금이.. “글은 좀 아냐?” 조선 시대의 무장들이 다들 좀 짧았나 봐요. 그러니까 “글은 좀 아냐?” “예, 잘 압니다” “이순신 집안은 어때?” “명문가입니다” 명문가, 딱 세 글자로 답을 했습니다. 집안이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벼슬을 안 한 걸로 나오는데 아버지가 벼슬을 다 안 하고도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고 매일 낚시를 했다. 괜찮았다는 거죠. 그렇죠? 처갓집이 상주 방 씨 방진의 무남독녀 외동딸하고 결혼합니다. 상주 방 씨 방진은 무과 출신에 보성군수를 지냈어요. 지방관을 지냈어요. 지방관을 지냈다는 얘기는 뭐니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있다 이렇게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래서 처갓집도 굉장히 부자였다.

여러분 현충사 가보셨죠? 현충사의 이순신 고택(故宅). 이순신 고택은 원래는 방진 고택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이순신 고택에서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이순신의 셋째아들 ‘면의 무덤’이라고 해서 굉장히 잘해놨죠? 그렇죠? 계단으로 올라가서 해 놨는데 ‘면의 무덤’이 고택에서 한 100m 떨어져 있는데 고택과 면 무덤 사이에 자세히 보면,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방진의 무덤이었습니다. 이순신 장인, 방진의 무덤. 그러니까 이순신 집안이 본가, 처가, 외가. 외가는 할머니, 이순신의 어머니 할머니가 두 분 다 초계 변씨, 초계 변씨 가문의 현감(縣監)을 지낸 변수림이라는 분의 따님이신데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읽은 위인전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이순신 집안이 할아버지 때에 몰락해서 어머님이 삯바느질하고 빨래하고 이렇게 해서 이순신을 진짜 잘 키웠다. 이거 완전히 소설 쓴 겁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이순신의 어머님은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손에 물을 안 묻혔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최소 은수저. 금수저였을 수도 있고요. 굉장히 집안이 좋았다. 이순신 집안, 처가 외가 할 것 없이. 그래서 이순신은 제가 강의에 가서 드리는 말씀이 뭐냐면 ‘조선 중기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이 만든 인재다’ 조선 중기에 조선 성리학 교육을 가장 제대로 받은 충과 효의 아주 표본이 되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게 뭐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이런 분들이 조광조의 제자였고 할아버지가 아버지는 벼슬을 안 했지만, 이순신은 건천동에 살면서 역시 조선 시대에도 교육은 서울에서 받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동학이라는 학교에 다녔는데 이순신의 형님이 두 분 계시는데 요신, 희신 이렇게 두 분이 계십니다. 제일 큰 형님이 희신인데 두 번째 형 요신이 서애 유성룡하고 동갑 친구입니다.

하나는 이순신 집안은 절대 가난하지 않았다. 몰락한 집안이 아니었다. 잠시 과거급제자가 나오지 않는 상태였을 뿐이다. 장인이었던 방진이 이순신을 제대로 뽑은 거죠. 사람 제대로 본 거죠. 그래서 이순신을 무과로 돌려서 10년 준비를 해서 무과에 급제를 했습니다. 그 장인이라는 분의 방진이라는 이름이 역사책에 어떻게 남았겠어요? 이순신 때문에 남았지. 그러니까 사위 잘 본 거죠. 그거 하나 하고, 또 하나는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하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상관들하고 트러블, 너무 강직해가지고 상관한테 덤비다가 파직, 또 뭐 덤비다가 파직, 계속 파직되는 상관들과의 트러블만 강조를 해놨어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전기를 쓰실 때, 그런데 그건 사실 소설가가 갈등 구조를 만든 거고요. 강직한 거는 할아버지들 때문에 할아버지들한테 물려받은 품성이 상당히 강직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계급에 맞게 처신을 굉장히 잘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강직한 면만 있었던 게 아니라 실력과 능력으로 자기 상관들한테 인정을 받는 분이었다는 거예요. 과거 급제하고 난 다음에 제일 처음에 갔던 자리, 초임지가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이라는 자리로 갑니다. 저쪽 함경북도 삼수갑산. 저희가 어렸을 때 옛날에 그 배삼룡, 이기동 나와서 아오지 탄광 얘기 많이 나왔거든요. “종간나새끼 마음에 안 들면 아오지 탄광에 보내버리갔어” 그 아오지가 그 근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춥고 먹을 거 없고, 임금이 신하들 귀향 보낼 때 제일 미운 놈 보냈던 데가 그쪽이에요. 그쪽으로 보냅니다. 그냥 약 먹여서 죽이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할 때 그쪽으로 보내는 거예요. 가다가 죽어라, 가서 죽어라. 뭐 이런 뜻이죠.

그런데 거기에 GP 소대장으로 간 거예요. 육사 나와가지고 제일 전방 초소 대장으로 간 거예요. 이순신이, 갔는데 당시에 함경도 관찰사가 함경도에 있는 모든 군사 진영을 다 순찰을 하면서 순시를 하면서 병력, 무기, 성 쌓은 거 이런 것들 다 점검을 해가지고 하나라도 걸리면 엎어 놓고 곤장을 쳤어요. 그래서 함경도에 있는 모든 장수들이 곤장 안 맞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순신이 있는 동구비보에 와서 이순신하고 악수를 탁 한 다음에 “음, 잘하고 있구만” 하고 그냥 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순신이 거꾸로 물어본 거예요. “사또, 온 도내 장수들이 전부 혼이 나고 그랬는데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청련 이후백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분이 그럽니다. “흠잡을 데가 없구만. 다 통과됐어. 내가 이유 없이 장수들을 괴롭혔겠는가?” 자네는 합격이야 그런 소리죠. 그러니까 처음 가서 관찰사한테 인정을 받은 거죠. 하나만 더 얘기할게요. 여러분 오동나무 사건 기억하시죠? 수사 성박이 이순신이 발포만호(鉢浦萬戶) 시절에 이순신에게 전화를 해가지고 “야, 그 발포만호영 뜰에 오동나무가 좋은 게 두 그루 있다는데 한 그루만 끊어서 보내라. 내 사랑하는 기생한테 가야금(거문고) 만들어 줘야겠다. 끊어 보내라” 지금 같았어 봐요. 저만해도 “옛썰!” 쫙 다듬어 가지고 드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로 두 그루 심어 놨습니다.” 보통은 이랬을 텐데 이순신은 어떻게 했어요? “사사로이 쓸 수 없다, 관품을”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상관이었던 성박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그렇죠? “짜식 그거 잘라서 보내고 새로 심어 놓으면 될 텐데” 그래서 이순신을 혼내줄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아, 그 기회가 안 오는 겁니다. 갑자기 전출 명령이 떨어졌어요. 딴 데로 전근을 가게 됐는데 그냥 가나요? 뒷담화를 남겼죠. 뒷다마가 아니라 뒷담화. 관찰사 손식한테 가서 이순신 그 건방지고 싸가지 없고 이놈 좀 혼내 달라고, 나 대신 내가 딴 데 가는데. 그래서 손식이 성박의 말만 믿고 이순신을 혼내 주려고 고흥반도에 있는.. 고흥반도가 나중에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 할 때 오관 오포인데 그중에 일관 사포가 있습니다. 거기 절반이 고흥반도에 있는데 그때 고흥반도 끝에 있는 발포만호를 했어요, 이순신이. 그러니까 이순신 혼내 주려고 그 고흥반도에 있는 장수들 다 모아다가 테스트를 하는 거예요. 뭐 활쏘기 테스트, 탈락자 곤장, 무경, 무예 경전 이런 거 테스트 해가지고 걸리면 혼내 주려고, 이순신 혼내 주려고 테스트를 했는데 이순신만 빼고 다 맞았어요. 그러니까 “그래? 이건 못 하겠지?” 마지막으로 테스트를 한 게 해도(海圖)를 그려봐라. 그래서 이순신이 붓을 잡고 해도를 그리는데 해도를 그린다는 것은 직접 바다에 나가서 다 봤다는 거죠. 가봤다는 거죠. 그렇죠? 구글어스입니다. 구글어스. 위성 지도에요. 위성 지도. 그러니까 손식이 무릎을 ‘탁’ 치면서 “야, 이거 좀 이상해, 성박이 잘못 얘기한 거 같아” 이순신 조상이 어떻게 되냐고 막 묻고 이렇게 해가지고 손식이 이순신을 혼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너랑 나랑 잘 지내자” 이러면서 인정하고 끌어주고 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순신이 파직도 여러 차례 됐지만, 복직도 여러 차례 됐어요. 계속 금방 복직되고 금방 복직되고 이랬던 것이 이순신이 모셨던 이용이라든지 임진왜란 초기 전라 관찰사였던 이광희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전부 이순신을 끌어주고 당겨주고 하던 상관들이에요. 그러니까 강직한 것도 맞지만 실력과 능력으로 상관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자, 두 가지 기억하시면 돼요. 가난하지 않았다.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제가 강남 8학군 출신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강남 8학군 출신이고 그리고 강직한 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력과 능력으로 상관들로부터 인정받는 장수였다.

이순신의 성공 리더십, 첫째, 지장(智將)이다. 뭐 덕장(德將), 복장(福將), 맹장(猛將), 용장(勇將) 이런 거 많죠? 지장입니다. 지장. 공부를 많이 했어요. 연구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선비 가문 출신이고 문과를 준비했었다. 20살 때까지.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왜란 나기 전 일주일 전 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당시 좌의정 유성룡의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전달받았다.’ 이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면 더할 증(增), 뺄 손(損), 싸울 전(戰), 지킬 수(守), 싸우거나 지키는 방법. 싸우거나 지키는 방법을 더하거나 뺀 책. 최신 정법서. 전쟁 교본. 요즘 말로하면 ‘작계 5027 최신판’ 이런 걸 명나라로부터 수입을 해가지고 이순신한테 보내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순신이 어떻게 해요? 밤새도록 참모들하고 부하들하고 연구를 해보니까 정말 훌륭한 책이더라. HOW TO FIGHT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런 것들이 다, 작전 이런 것들이 다 나온다. 이순신은 좌의정 유성룡이 책을 보내주니까 “그래 좋은 책이겠지” 하고 연구를 했겠지만, 같이 밤새웠던 참모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렇죠? 참모들은 밤새웠을 거 아니에요? 같이. “어휴, 저놈의 영감은 잠도 없나?” 이러면서. 밤새도록 같이 연구하고 전술을 익혔던 그런데 이순신의 부하들이 임진왜란 끝나고 통제사 되고, 수군절도사 되고 군의 핵심으로 다 성장을 합니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없다’ 그런데 이순신이 실력을 갖춘 전략 전술의 귀재였다. 굉장히 공부를 많이 했더라는 겁니다. 그냥 된 건 아니라는 거죠.

두 번째, 솔선수범(率先垂範). 난중일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장면. 활쏘기.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활쏘기입니다. 왜 그럼 활을 많이 쐈느냐? 임진왜란 때 육전(陸戰)에서는 아주 그냥 막 거의 대응을 못 하고 무너졌거든요. 20일도 안 되어서 서울이 무너지고 2달도 안 되어서 개성, 평양, 다 무너졌어요. 육전에서 그렇게 밀렸던 이유가 뭐죠? 조총이죠. 조총.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의 조총의 성능을 보면 지금 봐서는 되게 웃기는 무기였습니다. 아주 조악했어요. 분당 발사속도 2~3발. 3발 쏘려면 재장전 하는 데에 20초 걸리죠. 그렇죠? 그런데 조준해서 쏴서 맞춰서 죽일 수 있는 유효사거리. 50m에서 100m. 재수 없이 맞아서 죽을 가능성이 있는 거리. 200m. 그럼 200m 밖에서 쏜, 한 250m나 300m 밖에서 쏜 조총이 운 없이 맞았다 칩시다. 여기 째지고 깨지고 피도 좀 나겠지만 기분은 나빠도 죽지는 않는다. 그렇죠? 200m 밖에서 쏘면. 자, 활. 분당 발사 속도. 예, 제원에 없습니다. 힘 닿는 데까지. 한 10발까지는 쏘지 않았을까요? 그렇죠? 그런데 화살은 곡사 무기죠? 위로 쏘죠. 45도로 위로 이렇게 날아가다가 밑으로 떨어질 때 가속도가 붙어요. f=ma. 갑옷을 뚫고 들어갑니다. 아파요. 피도 납니다. 그리고 잘 죽으라고 약도 발랐어요. 개인용 살상 무기로 오히려 제대로 대응만 했으면 조총보다 활이 뒤떨어지는 무기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 시대에. 육전에서는 훈련받은 상비군이 없었고 전투 경험이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다 농민들이에요. 농민들. 100년 동안 싸움만 했던 일본 사무라이들이 쳐들어오니까 그냥 허물어 진 거예요. 대책 없이 진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바다에서는 조총이 우리 판옥선(板屋船)의 두께를 뚫지를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 판옥선에는 일본 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총통(銃筒)이 있었습니다. 대포.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명량해전에서 봤던 불나고 터지고 날라가고 이런 무기는.. 그러니까 명량은 전투장면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되는데 한 시간 전체가 다 사기에요. 19세기 서구에 가서야 탄이 터지는 로켓 폭탄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16세기 말 최초의 화약 무기 단계에서는 그냥 쉿 덩어리, 나무 덩어리, 이런 것들이 가서 깨트리는 겁니다. 목재를. 그러니까 불 내는 것은 다 불화살입니다. 불화살. 화살이에요. 그러니까 화살이 개인용 살상 무기로도 굉장히 중요하고 전투에서 적의 적선을 태우는데에도 중요하니까 이순신이 훈련을 시키는데 거의 난중일기에 보면 에브리데이. 별일 없으면. 아침에 동원에 나가서 공무를 잠깐 보고 사정에 올라갑니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훈련하는 거 봅니다. 그리고 본인도 직접 쏩니다. 이순신이 얼마나 잘 쐈을까요? 100점 만점에 어느 정도 쐈을까요? 그걸 기록을 해 놨어요. 50발을 쏜 것을. 50발 쐈는데 몇 발 맞췄다. 이게 기록에 나와요. 제가 100점 만점에 점수를 매겨 봤거든요. 50발 쏴서 42개를 맞췄어요. 잘 쏘신 거죠. 왜 그렇게 쐈느냐? 그러니까 판옥선에 120명이 탔는데 그중에 20명은 활 쏘는 사부(射夫)입니다. 사령관이 맨날 활을 쐈으니까 실제 활 쏘는 애들은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쏘지 않았겠어요? 그래가지고 내기도 하고 이긴 팀한테 술도 내려주고 이런 게 솔선수범입니다. 목적을 공유하고 몸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사령관부터 열심히 쐈다는 거죠.

세 번째는 경영 마인드, 안되면 되게 하라. 요즘 경영학에서 이순신을 공부합니다. 제 책을 보고 경영학에서 세계 자원 위기, 외환 위기 이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뚫고 성공할 수 있을 거냐? 이순신의 전쟁 시기에 위기 상황에서 부대를 이끌고 조직을 관리하던 이런 것을 경영술에서 배우겠다는 거죠. 군수, 군량의 자체 해결. 소금을 구워서 팔고 고기를 잡아서 팔고, 무기개발 이런 것들 전부 다 국가에서 해줘야 되는데 이순신이 직접 했다는 겁니다. 예, 안되면 되게 하라.

네 번째는 인사운영에 아주 귀재였어요. 적재적소에 부하들 중에서 장점을 딱 뽑아가지고.. 예를 들어서 광양현감 어영담은 나이가 많은데 이 양반은 경상도 해역에서 수군 생활을 오래 했어요. 그래서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잖아요. 이순신의 본부는 어디에 있었죠? 전라좌수영 여수죠 여수. 어영담은 광양현감으로 왔는데 이순신의 전라좌도 함대가 경상도 해역에서 첫해 해전을 다 했거든요. 전라도 해역에서 첫해에는 싸운 게 없어요. 첫해 해전은 전부 다 경상도 해역에서 싸웠어요. 그 경상도 해역의 물길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어가지고 이순신의 작전참모. 그다음에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2살이 더 많았는데 이순신보다 더 터프가이에요. 성격이 급해가지고, 이력서 보면 되게 간단해요. 웅천판관, 현감과의 불화로 파직. 대전판관, 현감과의 불화로 파직. 파직... 그러다가 임진왜란 앞두고 이순신 밑에 녹도만호로 온 거예요. 이순신보다 나이가 2살이 많고 무과 선배인데 이순신 밑에 들어와서 돌격장을 합니다. 마지막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죠. 순천부사 권준, 이런 사람은 문과 출신인데 이순신의 참모장 역할을 해주고 하여튼 약졸이 없었다. 정경달, 이 양반은 문과 출신의 임진왜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 시대에 문과 출신의 목사, 부사들이 장수들 보기를 지렁이 보듯 했다고 그래요. 굉장히 하찮게 봐서 이순신도 밑으로 봤을 사람인데 오히려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고 난 다음에 부사령관, 종사관으로 정경달을 지목했어요. 그러니까 정경달이 한산도에 들어옵니다. 갑오년 1594년 1월에 들어오는데 첫날 들어와서 이순신하고 하루종일 얘기했다. 둘째 날 이순신과 하루종일 얘기했다. 이틀 동안 하루종일 얘기했다. 삼 일째 되던 날 술 한잔 먹고 출발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출전해 있을 동안에 여수 본영에서 군량 준비해주고 군사 뽑고, 이런 행정, 군수 이런 것들을 다 뒤에서 해줬던 사람이 정경달입니다. 이 정경달이 난중일기를 썼어요. 호가 반곡인데, 그래서 반곡 난중일기에요. 그런데 자손 중에 너무 훌륭한 자손이 있는 것도 흠입니다. 그냥 놔뒀으면 제가 볼 수 있는 1차 사료(史料)로써의 가치가 높을 텐데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자기 할아버지 일기를 편집을 했어요. 그래서 3차 사료로 떨어져 버렸어요. 그 잘난 자손이 다산 정약용입니다. 유능한 참모 운영, 그다음에 신상필벌(信賞必罰). 이거는 우리나라에서 잘 안 되는 건데 상 줄 사람은 반드시 상 주고 벌 줄 사람은 반드시 벌 준다.

여섯 번째, 먼저 인품이 되어라, 인성이 되어라. 인품, 유교에서 얘기하는 충과 효의 교육을 제대로 받고 실천한 사람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었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기 여섯 가지를 얘기했는데 여섯 가지 말고 진짜 이순신은 OO의 달인이었다. 이순신의 가장 큰 장점. 소통의 달인입니다. 소통의 달인. 왕이 유서(諭書)로 지시하고 왕에게 장계(狀啓)로 분명한 것들을 다 얘기했어요. 왕이 하지 말라는 것도, 해야 됩니다, 해야 됩니다. 해야 됩니다. 왕하고 소통했고요. 유성룡을 비롯한 중앙의 고관들하고 편지로 주고받고 다 했습니다. 그리고 천민들이 전투상황을 와서 “장군!” 하면서 보고를 합니다. 한산대첩 이길 때 먹동 김천선이 와서 하루 전날 적의 위치하고 규모를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레이더가 없던 시절에 이순신이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쌀말이나 줘서 보냅니다. 그러니까 천민들한테 “이야~ 조선 수군 이순신 장군 오면 얘기해 그럼 쌀말이나 준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소통의 달인이었습니다.

진도대교 건너기 전에 오른쪽에 보면 ‘우수영 국민관광지’라고 해서 명량대첩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이번에 가시면 아마 저기 가셔서 아마 한 시간 정도? 구경하실 겁니다. 이쪽은 해남이고 이쪽이 진도입니다. 해남하고 진도 사이에 낀 바다가 명량입니다.그래서 명량대첩 기념제를 한 해는 해남이 주최하고, 한 해는 진도가 주최하는데 지금까지 유적 공원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 해남 쪽에 있었거든요. 우리도 뭐 하나 만들자 그래가지고 이 ‘우수영 국민관광지’ 건너편에다가 이쪽에 승전공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최초, 최대 이런 용어를 좋아하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충무공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최대. 동사 크기만 15m. 좌대 포함 30m. 그쪽은 지나가면서 “저겁니다” 그러면서 지나갈 거 같아요. 들리진 않을 건데, 이거는 녹진이라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우수영 국민관광지’ 바로 건너편인데 지금 거기에다가 7층짜리 빌딩을 하나 예쁘게, 전망대를 세워가지고요. 입장료도 받습니다. 1000원씩이나 받는데 거기서 보시면 명량 저 끝에서 이 끝까지가 다 보여요. 그래서 이번에 가시는 곳이 바로 이 사진에 있습니다. 명량, 여기가 이제 양도라는 섬이고요. 여기 이 마을이 조선 시대 전라우수영이 있던, 오늘날도 우수영 마을이라고 합니다. 여기 우수영 마을 앞에 판옥선하고 거북선하고 한 척 갖다 놓았고요. 전라좌수영, 성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어요. 요즘은 호남이 개발을 안 했기 때문에 유적 유물이 굉장히 잘 남아 있어요. 그것이 아마 큰 자원이 될 거 같아요. 앞으로는. 좌수영은 여수에 있는 좌수영은 진남관밖에 없어요.

정유재란 시기에 두 번째 있었던 해전이고요.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졌죠. 원균이 조선 전세력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확하게 두 달 후에 펼쳐졌던 해전이 명량해전입니다. 그래서 영화 ‘명량’에서 굉장히 그 하나에 아이템으로 뽑았던 게 조선 수군의 두려움입니다. 조선 수군의 두려움.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 근데 그거는 역사적으로 사실입니다. 왜? 칠천량해전에서 다 져서 죽고 그랬기 때문에 수백 척이 몰려오는 일본 함대에 대해서 열 몇 척 가지고 싸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두려운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순신이 그 두려움을 어떻게 바꿨냐 뭐 이런 식으로 아들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이죠. 영화에서는 뭘 이렇게 뽑아서 소재로 할 것이냐? 근데 그 소재는 틀린 소재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가장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33 대 13척 가지고 열 배가 넘는데 거꾸로 31척을 깨뜨린 해전이 명량해전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이게 끝입니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해전이다. 난관에서 빛나는 리더십, 어려울 때 나를 따르라 했던 리더십. 이게 명량해전입니다. 결과적으로 굉장히 잘못된 오류, 인식의 오류가 굉장히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칠천량해전 무리한 출동이었다. 원균이 이순신하고 똑같이 못 간다 그랬는데 선조가 출전을 명령했고요. 곤장까지 쳤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갔다가 졌다. 절대 무리한 출동이었다. 원균의 지휘체계 장악 실패. 이순신의 휘하 관료들, 장수들과 알력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장병의 도망. 굉장히 급조된 함대였고 징병된 다음에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나갔다가 일본 수군이 첫해 해전에서 진 거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해서 보복 전쟁을 한 거죠.

거기에 일본의 그 전법대로 녹아버린 것이 칠천량해전입니다. 아쉽죠. 4년, 3년 반, 2년, 5년 반. 현장에서 지휘관하고 있는 이순신을 왜 바꿔? 칠천량해전에서 졌고요. 그래서 10척 정도 도주한 전력 외에 전멸했다. 제해권을 상실했다 바다를 제패하는 바다를 관리할 수 있는, 바다를 뭐라 그럴까요? 맘대로 쓰는 권한. 이게 제해권이거든요. 일본 수군은 근데 천만다행이 일본 수군의 해양 전략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일본 애들이 말로는 수륙병진(水陸竝進)을 얘기했어요. 수륙병진이 뭡니까? 육군은 육지로 가고, 수군은 바다로 가고 그래서 같이 서울 한양으로 가고 뭐 북경으로 가고 이렇게 갈 수 있는데 같이 간다 그랬는데 칠천량해전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일주일 동안 잔치했어요. 잔치. 일주일 동안 잔치하고 본국에 전황 보고하고 뭐 이렇게 누가 수공이다. 이런 거 정하고 그다음에 이순신 잔여 함대를 추격했으면 되는데 추격을 안 하고 남원성 전투에 같이 참여해요. 섬진강 따라서 올라와서 두치진에서 상륙해서 남원성 전투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조선 수군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되고 난 다음에 척 수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작은 척 수를 거느리고 사람들 다 불러 모으고 군사를 불러 모으고 병기, 군량 이런 거 준비할 수 있는, 이순신이 다시 제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 거죠. 일본 애들이. 천만다행이죠. 저도 처음에는 남원성 전투에 왜 뛰어올라 갔을까? 이해를 못 했어요. 근데 얼마 전에 일본 가 가지고 일본 교수한테 물어보니까 그 얘기를 해 주더라고요. 일본 육군이 1차 출병 때, 16만 명 정도가 왔는데 조총을 몇 자루나 들고 왔을까? 문제입니다. 손들고 몇 퍼센트 말씀하시면 바로 책 한 권 날아갑니다. 10%, 예 정답입니다. 10%. 나중에 한 권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10%입니다. 그런데 일본 수군은 20% 예요. 일본 수군이 화력이 좋았다. 그래서 명나라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남원성을 공략하는데 일본 수군이 선봉에 있는 거예요. 선봉. 그래서 간 겁니다. 그렇게 거기를 가니까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재임명 받고요. 8월 3일 진주 수곡에서 임명을 받은 즉시 호남 쪽으로 가서 군량도 준비하고 병력도 모집하고 이런 준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서 병사들의 도망이 아니라 장병의 도망이다. 장병의 도망이라는 건 장수 장군들도 같이 도망갔다는 거거든요. 원균이 제대로 지휘를 못 했다. 조선 수군이 다 제 살길 찾아갔다. 그래서 되게 재밌는 거는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고 난 다음에 호남에 와가지고 다 집합시키니까 첨사(僉使)·만호(萬戶)가요 전라도 경상도 있던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 없어요. 다 들어와요. 이순신 휘하에 한 사람이 못 온 사람이 김완. 이 사람은 칠천량해전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에 잡혀갔어요. 이 사람 빼놓고 죽은 사람이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함대 사령관급 세 명이 죽었고 한 사람이 이끌고 도망가죠. 배설. 기록을 보니까 배설이 배를 못 타요. 함대 사령관이 파도가 치면 멀미 때문에 기절을 해버리는 거예요. 근데 칠천량해전 할 때 첫날부터 계속 굉장히 파도가 많이 쳤어요. 그러니까 가자마자 배설은 그냥 누워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배설 밑에 있던 참모들이 우리끼리라도 살자 해가지고 배설을 모시고 도망을 간 거예요. 배설이 주도적으로 도망간 건 아니죠. 그래서 배설은 안 죽었죠. 근데 문제는 칠천량해전에서 패전을 했을 때 통제사가 죽고 사령관들이 다 죽었는데 그 책임, 패전에 대한 책임은 최고 지위 높은 사람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높은 사람이 배설이에요. 배설은 그냥 살아도 죽은 목숨이었어요. 처음부터. 그래서 이순신한테 가서 “내가 배를 못 탄다. 몸이 안 좋아서 좀 쉬어야겠다.” 그러니까 “그럼 육지로 내려가서 쉬어라” 그랬는데 육지에서 쉬다가 잡혀 죽을 거 같으니까 고향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이순신이 도망갔다고 보고를 하니까 전쟁 끝나고 그다음 해에 상주에서 잡혀서 처형당합니다. 배설. 그러니까 명량에서는 배설이 도망가면서 거북선 불 지르고, 이순신한테 화살 한 방 먹이고 막. 그런 일은 없거든요. 그건 이제 우리 후손들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소송을 했었는데 무혐의. 그건 창작이다. 소설이고 영화다.

8월 3일 진주에서 두치진, 구례 갔다가 곡성, 옥과, 순천, 보성, 강진 이렇게 돌면서 군량을 모집하고 병력도 모집하고 8월 19일 날 회룡포에서 배설로부터 열 두 척을 인계받습니다. 그때 선조 임금이 “야, 12척 가지고 수백 척 하고 어떻게 싸우냐? 그냥 안 될 것 같으면 수군 포기하고 육지로 나와서 도원수(都元帥)와 같이 연합작전해도 된다. 네가 임의 판단해서 해라” 그래서 그 편지를 받고 이순신이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한다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죽지 않았다고 하면 적들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2척밖에 없습니다가 아니라 아직도 12척이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이순신의 어록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어록이 명량해전에서 다 나와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 명량 해전 전날 훈시문입니다. 죽을 각오로 싸우면 혹시 살 수도 있는데 살려고 하면 다 죽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라. 그 얘기를 명량해전 전날 하신 거예요. 금신전선상유십이는 명량해전이 있기 한 달 전에 임금하고 주고받은 상소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진주에서 구례 갔다가 곡성, 옥과, 순천. 순천, 보성, 강진 이쪽이 곡창지대거든요. 여기 돌면서 이쪽 회룡포에서 이순신이 전력을 인계를 받게 됩니다.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2진에 주둔할 때 이때가 가을이거든요. 과로한 거죠. 계속 배 타고 다니고 나이가 53세니까 이때 53세. 조선 시대 평균수명이 50이 안 되거든요 40대 중반밖에 안 되는데 이미 살 만큼 살은 나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근데 추우니까 소주를 한잔 드링킹을 하신 거예요 이게 잘못되신 거예요. 체한 거예요. 소주 먹고. 토사곽란(吐瀉癨亂) 하나만 해도 안 되는데 토는 뭐죠? 토하는 거. 사는? 설사. 이걸 같이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곽란은 배가 뒤틀린 거거든요. 그래서 인사불성. 인사불성은 현대 말로 하면 의식불명. 코마 상태가 된 거예요. 쓰러진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틀 동안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안 되겠다. 이거 부하들이 “이거 통제가 되고 난 다음에 한 달 만에 과로사 하겠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서 2진 동네에 들어가서 하루 치료하고 그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야 오늘이 며칠이냐? 안 된다 출항” 그래가지고 거란포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2진에 있는 3박 4일 동안 정신 차린 건 몇 시간 안 돼요. 가자마자 아파 가지고 이순신이 참 고생 많이 하신 거 같아요.

이쪽으로 갔다가 이제 진도로 갑니다. 진도에서 한 보름간 주둔을 합니다. 이번에 가시면 진도에 들어가셔서 여러 가지 유물, 유적을 보거든요. 진도가 우리나라 민속학의 보고입니다. 천리 밖에 유배를 보내는데 임금이 이거는 뭐 죄가 너무 중해서 천리 밖으로밖에 보낼 수 없는데 임금이 제일 사랑하는 신하들을 보내는 데가 진도에요. 왜냐? 바닷길이 안전해요. 바로 앞이에요. 300m밖에 안 되니까 나룻배 타고 가요 그런데 진도에 딱 가면 진도는 농사가 잘돼 가지고요 해남 군민까지 먹여 살린다고 그랬거든요. 진도가 논밭이 많아서 굉장히 부자 동네에요. 거기에 또 수산물 이거는 덤으로, 그러니까 먹을 게 많아요. 먹을 게 해결이 되니까 문화가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남종화(南宗畵)라고 수묵산수화 있죠? 운림산방(雲林山房). 소치 허련, 미산 허영, 남농 허건, 지금 임전 허문이죠? 4대, 5대까지 내려가고 있어요. 거기 소치 허련부터 이렇게 그렸던 운림산방에 가실 겁니다. 현장에서 설명할 것은 제가 그때 가서 설명 드리고 맛보기니까. 진도가 굉장히 풍부하고 그래서 병력도 모으기 좋고 군량도 모으기 좋으니까 거기에서 보름 동안 준비한 거예요, 벽파진에서. 그리고나서 명량해전 하루 전날 우수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9월 16일 날 명량에서 일본 함대를 맞아서 명량해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아침 일찍 적이 들어온다. 그래서 출전하자마자 포위됐다. 300척 기록이 있는데 300척이 다 오긴 왔는데 명량이 협수로죠. 굉장히 좁은 수로인데 배가 한 길로만 다닐 수 있어요. 300m 중에 한 200m가 저수심 지역이라 배가 못 다녀요. 해남 쪽으로는 이쪽만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그래서 그 길목을 지킬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바닷길이 너무 험해서 일본 애들이 임진왜란 때는 조그만 배가 많았거든요, 일본에서는. 세키부네, 관선(関船)이라고 한 게 주력선이었다고 하면 정유재란 때는 우리나라 판옥선에 너무 크니까 아타케부네라고 해서 큰 배들을 일본에서 많이 만들어요. 그래서 정유재란 때 큰 배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문제는 명량해전 할 때 큰 배들은 명량해협 물살 때문에 못 들어오고 바깥에 200척이 대기하고 133척의 세키부네, 작은 배들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순신은 13척으로 상대가 됐던 거예요. 31척을 깬 거죠. 그게 실록에 나와요. 실록에.

“야, 칠천량해전에서 왜 졌냐?” 이랬더니 병조판서가 “일본 애들이 우리 조선 수군에 맞대응하기 위해서 큰 배를 많이 만들어서 왔답니다. 아타케부네가 많아졌습니다.” 그 얘기를 해요. 그런데 2달 후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거꾸로 이겼거든요. “어떻게 이겼냐?” 다시 물어봅니다. 선조가. 그러니까 또 병조판서가 “일본의 배가 작았답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그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굉장히 고민을 했어요. 그러니까 울돌목(鬱陶項)에서 일본의 큰 배들은 바깥에 대기하고 있고 진도 섬을 밑으로 돌아서 북상한 거고 명량해전 때는 133척이 일본의 작은 배들 위주로 들어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척 수가 아무리 많아도 이순신이 12척 가지고 견딜 수가 있었던 거죠. 결론적으로는 그래서 31척을 깨뜨리고 명량에서 이긴 거죠. 일단 한번 저지를 시킨 거죠. 무방비상태에서 쭉 올라갈 수 있는 거를 거기서 막은 거예요. 그 이후에 제가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좀 잘못 썼는데 학자들도 잘못 쓰는 게 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뭐라고 썼냐면 명량에서는 이기고 난 다음에 일본 애들이 바로 돌아서 갔다. 영남 쪽으로 후퇴했다. 아닙니다. 이순신을 추격해서 10월 초순까지 무안 앞바다까지 올라옵니다. 근데 문제는 진도를 딱 지나는 순간 그 앞바다가 어떤 바다입니까? 서남해 바다가 무슨 바다죠? 다도해 맞습니다. 섬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이순신이 후퇴를 했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니까 섬 하나하나 조사하고 올라오다 보니까 세월아 네월아 되어가지고 2주 동안 무안 앞바다까지밖에 못 올라간 거예요. 거기에서 일본 육군이 직산에서 전투에서 지고 난 다음에 후퇴하고 오다가 수군, 육군 같이 회의 해가지고 안 되겠다, 후퇴하자. 그래서 10월 초순에 후퇴를 하게 됩니다. 그거를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고군산열도까지 올라갑니다. 선유도까지 올라갑니다. 지금 새만금 있는데 있죠. 거기가 5일에 걸쳐서 후퇴를 합니다. 제가 교재에도 써 놨는데 그렇게 후퇴한 거는 명량해전에서 자기의 전투력을 다 쏟아부은 겁니다.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조선 수군이 회복을 해야 돼. 화약도 더 만들고 뭐 해야 되는데 그럴 시간이 없으니까 후퇴를 한 겁니다. 후퇴를 해 가지고 피난선들한테서 의복도 받고 군량도 받고 뭐 이런 거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근데 그 명량해전에서 한판 싸움의 승리가 첫해 해전에서 한산대첩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일본의 주력 수군들을 막은 그것 이상의 칠천량 해전에서 지고 난 다음에 제일 긴장했던 데가 명나라예요. 우리 서해를 통해서 명나라 북경 앞바다까지 일본 애들이 다이렉트로 갈 수 있는, 그래서 명나라 조정에서 수군을 급히 징발해가지고 명나라 북경 앞바다부터 신의주까지 그다음에 신의주부터 우리 서해까지 이렇게 두 사람의 총병(總兵)을 세우게 됩니다. 진린, 이순신하고 같이 연합했던 진린이 바로 우리나라 서해를 담당했던 총병이 되겠죠. 그런데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겨버린 거예요. 일단 일본군이 맘 놓고 올라갈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명나라 양호라는 사람이 너무 기뻐서 이순신한테 은냥도 내려 주고 막, 승리의 어떤 세러모니를 해줘야 하는데 비단도 내려주고 뭐 그런 그래서 이순신이 받은 선물이 대부분 다 명량해전 이후에 명나라 장수한테 받은 선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투 개시 11시 전후로 해서 이겼다. 일본의 서해안 진출을 차단했고 수륙병진 전략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서남해에서의 제해권 회복의 신호탄이었고 조선 수군이 재건 할 수 있게 된다. 그 재건하기 위해서 겨울을 나기 위해서 들어갔던 데가 요번에 우리가 이제 열차 타고 가서 처음으로 가는 고하도입니다. 그런데 잘못 알려진 게 해전 장소가 현재까지 알려진 곳은 조류 때문에 해전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그냥 불가능하다고 그랬는데 제 후배 장교 하나가 국방대학원에서 공학적으로 뭐 이렇게 계산을 해 가지고 근데 뭐 저는 문학도가 되가지고 수학책을 보니까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하여튼 공학도가 계산을 해 보니까 철쇄를 걸 수 없다. 공학적으로도 그렇게 해서 내가 그냥 전화해서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고맙다 그렇게 얘기를 했었습니다. 추정 위치는 우측과 양도 사이 바다 어귀. 난중일기 내용과 합치한다. 이게 무슨 얘기냐? 좀 보여드리면 지금 일본 1924년에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戦史. 朝鮮役)이라는 일본인들이 쓴 책에는 여기로 나오거든요. 해전 위치가. 그런데 여기는 절반 이상이 해남 저수심 지역이고 이쪽만 배가 다닐 수 있어요. 이쪽에는 너무 물살이 빨라서 전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바다 어귀 딱 돌자마자 앞에 너른 지역 이쪽이 명량해전지가 아니겠느냐. 근데 이것도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많습니다. 아까 제가 사진 찍은 건데 여기 지금 포말(泡沫)같은 게 보이죠? 이쪽으로만 다닐 수 있고 이쪽은 굉장히 수심이 낮아 가지고 배들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배가 못 다닙니다. 그래서 출전하자마자 이쪽에서 해전이 펼쳐지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다음에 철쇄. 이거는 설화입니다. 이중환이라는 분이 실학자인데 택리지(擇里志),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인데 여기에 18세기 말에 할아버지들한테 막걸리 사 주면서 들은 얘기. 전쟁의 영웅담. 베트남 전쟁에 우리 아버님 또래가 갔다 오셨는데 아버님 보다 조금 늦게 다녀가셨는데 거기 보면은 행정반에서 휴가증 쓰던 사람도 베트콩 몇 명 죽였다. 그러면서 뻥을 치죠. 특공 작전에 내가 나갔다 왔다. 전혀 아닌데, 그런데 그런 거죠. 현무공실기(顯武公實記)라고 해서 김억추라는 사람이 전라우수사로 왔는데 김옥추가 온 날 일기에 이순신이 김억추 욕을 엄청 해댔어요. 이순신이 그렇게 욕 한 사람이 원균, 난중일기에 원균 욕 많이 해놨어요. 미쳤다, 저거 또라이다 이런 식의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대부분 다 술 먹고 주정을 많이 피워서 술주정하는 것 때문에 좀 사이가 많이 안 좋았던 거 같고요. 다음에 유일하게 김억추. 얘는 만호도 될똥 말똥한데 어떻게 수사로 보내냐 이놈 보낸 놈 나쁜 놈.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 김억추가 힘이 무지하게 셌답니다. 그래서 김억추 자손들이 자기 할아버지가 명량해전의 참전 한 거는 확실하니까 자기 할아버지의 공적을 뻥튀기하는 과정에서 설화를 만들었는데 무슨 설화를 만들었느냐? 조선 수군 500명이 끌어도 들리지 않았던 철쇄를 김억추가 한 손으로 달랑 걸었다. 이게 현무공실기에 나와요. 택리지에도 철쇄를 걸어서 일본 배 500여 척을 깨트렸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명량해전에 참전한 일본 장수는 2m가 넘고 스무 살도 안 된 놈이 온몸에 철 비늘이 있고 학자가 보면 100% 설화다. 아, 이거 처음부터 설화다. 이걸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철쇄 소리 아직까지 현지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제가 거기 가서는 주장을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부르지를 않아요. 일본 논문, 일제시대 관인 학자들 사료 비판 능력이 없다. 우리나라 자료를 봤는데 우리나라 18세기 말 이후의 자료다. 전쟁 끝나고 철쇄 이야기가 나오는 게 150년 이후에 나온다는 거예요. 전쟁 당대에서는 전혀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 이순신의 보고서도 없고 실록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가 18세기 말에 갑자기 뜬금없이 나오는 철쇄설입니다. 설화라는 거죠. 설화, 전쟁 설화. 설화만 가지고도 왜 그런 설화가 생겼는지 역사적 의의를 둘 수가 있죠. 거북선 참전 명량해전에는 거북선이 없었습니다. 영화에는 나오는데 거짓말이죠. 영화는 영화일 뿐, 소설은 소설일 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그래서 혹시 궁금하시면 이순신 평전을 보시라. 그래서 노량해전 이후에는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 년 몇 달 뒤에 마지막 해전에는 모르겠는데요. 명량해전에서는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라는 겁니다. 혼신을 다한 전투였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일기 말미에 차실천행(此實天幸). 이는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나와요. 영화 마지막에 이순신이 아들하고 가면서 “하늘이 도운 것이다” 이런 얘기 하잖아요. 난중일기 맨 마지막에 차실천행. 진짜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충무공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