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닫기

이 콘텐츠는 flash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콘텐츠를 보려면 flash player(무료)가 필요합니다.

그림 속의 음식 이야기

미술과 음악, 풍류, 그림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릴 것은 그림 이야기인데요. 한 30년 가까이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뿐 아니고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서 연구하고 있는데요. 제가 그림을 오늘 들고 나온 것은 입구에서 보셨겠지만, 제가 쓴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쓰게 된 이유는 미술사나 미학적 감각이 뛰어나서 쓴 게 아니고요. 저도 소싯적에는 붓글씨를 좀 써서 상도 받고 했지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요. 음식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게 올해로 딱 30년입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는 한국에 선생님들이 없죠. 인문학 쪽에서 음식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은 연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30년 전 한국의 사정이었습니다.

저는 역사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음식의 역사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료가 거의 없어요. 조선왕조실록에 검색해 보세요. ‘김치’라고 쳐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김치가 안 나옵니다. ‘떡’ 하면 나오긴 나와요. 번역한 떡. ‘떡 병(餠)’이라는 한자를 쓰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요리법이 안 나오고요. 제사 때 세종실록 오례(世宗實錄 五禮)라는 부분 중 제사 항목에 ‘음식에 올리는 재물’로의 명칭만 나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뭘 좋아하셨는지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아시죠? 승정원일기라는 책은 인조 때부터 남아있어요. 비서실에서 기록하는 거니까 인조 때 이전 것도 계속 있었는데, 그게 다 이인좌의 난(亂) 때 불타버려서 결국은 그 이전 걸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평소에 뭘 잡수셨을까 알 수 있는 기록이 유일하게 승정원일기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승정원일기에 요리법이 나와 있는 게 아니고 거의 매일 같이 일기처럼 왕의 이야기들이 쓰여 있거든요. 그런데 이틀, 삼일에 한 번씩 의관이 왕을 제일 먼저 아침에 만납니다. 그래서 어제 잠은 잘 주무셨는지 그 다음에 대변은 잘 보셨는지, 색깔은 어땠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게 됩니다. 그 내용을 보고서 유추할 수 있어요. 제가 ‘영조가 왜 그렇게 오래 살았을까? 83세까지 어떻게 살았을까?’를 가지고 책을 하나 썼는데요. 그 책을 쓸 때도 영조 편 승정원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면, 영조가 좋아했던 음식이 나오고 그 다음에 영조가 싫어했던 음식도 나오고요. 영조에 여름에 입맛이 없어서 보리밥을 먹으면서 “지난번에 먹었던 고추장이 좋았는데, 어제 올린 고추장은 맛이 별로 없더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밑에 내관(內官)이 직접 얘기하지 않고, 의사들의 팀장인 내의원(內醫院)의 도제조(都提調)가 이른바 지금의 부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부장은 의사가 아닙니다. 일반 양반 관료가 만든 역할이에요. 그러니까 그 도제조가 물어보죠. “지난번에 잡수셨던 거하고 어떻게 입맛이 다릅니까?”라고 물어봐요. 그때 먹었던 게 굉장히 맛있었다고 해요. 그랬더니 그 양반이 “그건 궁에서 만든 게 아니고 사가(私家)에서 가져온 겁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래, 그 사가가 어느 집 거지?”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멈칫 멈칫 해요. 조종부의 아버지가 영조를 되게 싫어했거든요. 영조가 왕 되는 걸 반대했던 사람이라서 신하 입장에서는 그 이름을 괜히 이야기하기 싫은 거예요. 그렇지만 조종부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조종부가 누구의 아들이지?”라고 하니까 그냥 얼버무립니다. 그러고 나서 서울에 사는 순창 조가네 고추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정도로 추측해서 알 수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왕이 12첩 반상(飯床)을 일상 식으로 잡수셨다는데, 어떤 자료에도 기록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너무 궁금한 거죠. 그리고 한국의 일반 대중들은,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그렇고 문화적인 현상보다는 역사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세요. 재미있어 하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식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이 많아서 그 공부를 해야 되겠는데, 물론 다 정리가 되는데 실제로 상상이 안 되는 거죠. 어떤 모습으로 어떤 걸 어떤 자세로 먹었을까 궁금해진 거죠. 그래서 그림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요.

보통 우리가 이 그림 자료들을 ‘풍속화(風俗畵)’라고 이야기합니다. 풍속화라는 말을 한자를 가지고 일본의 교토나 도쿄나 나라 같은 오래된 도시의 고 서점에 가셔서, 일본어는 못하는데 한자로 ‘풍속화’를 써서 “이 책 주세요.” 그러면, 일본인들은 ‘풍속’이라는 말을 야한 책, 야한 그림들을 그려놓은 것을 풍속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왜 우리는 그러면 풍속화라고 부를까?’를 알아봐야 하는데요. 이런 류의 그림들입니다. 풍속화라는 게 주로 이런 류의 그림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그냥 산수화풍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산수화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행사 이런 것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사진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기준으로 하면, 거의 기록 사진에 가까운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사진처럼 명쾌하지는 않죠. 다만, 제가 존경하고 좋아했던 돌아가신 오주석 교수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깝지만 그 분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류의 그림을 볼 때도 옛날 사람들은 오른쪽 제일 위에서부터 이렇게 글을 썼죠. 그래서 종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지금 어떻게 봅니까? 여기에서부터 이렇게 보죠.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조선시대 그림들을 보실 때는 여기서부터 이렇게 대각선을 그려놓고 멀리서 보시고 그 다음에 작가도 여기에서부터 일단 구도를 잡고 그 가운데에 앉힌다는 거예요. 그래서 조선시대 산수화를 비롯해서 풍속화를 보실 때는 눈은 먼저 여기로 가는데, 하지만 여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류의 그림들을 풍속화라고 하는 겁니다. ‘풍속화’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때 주로 ‘속화(俗畵)’라고 하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이 ‘속(俗)’ 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중국하고 다른 것을 속이라고 붙였어요. 그래서 ‘조선적인 것이다.’라고 할 때 ‘속’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중국의 산수화를 조선 초기에 거의 흉내 내며 그려서 조선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하다가 ‘진경산수(眞景山水)’라고 하는 화풍을 담아내서 조선의 모습의 그려내는 거죠. 그게 여러분이 아는 금강산을 그린 그림들이나 이런 그림들이 나와요. 분명히 그림은 조선 사람이 그린 거 같은데, 사람이 중국사람 옷을 입고 집도 중국집이고 나무도 중국 거였어요. 그런데 조선 중기가 되면, 진경산수화들이 나타나는데요. 그것에서 연장되어서 그다음에는 ‘속화’라고 하는 것을 그립니다. 세속의 모습을 옮겨서 그리는 거죠. 그리고 강장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 말과 행동 그 다음에 길거리, 나루터, 가게, 시장, 시험장, 연회장 등을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손뼉 치고 신기하다고 하는 걸 그리는데, 그게 누구냐? 김홍도다.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 속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덕무라고 하는 서울 출신인데, 정조 때 서얼(庶孽)을 폐지하면서 창덕궁 안에 규장각(奎章閣)을 만들 때 거기에 검서관(檢書官), 지금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들같이 되서 들어갔던 이덕무가 쓴 책에 보면, 조금 이따가 볼 건데 관아제 조영석이 그린 ‘동국풍속(東國風俗)’이라고 하는 말도 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풍속화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요. ‘이언(俚諺)으로 평했다.’라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일반 백성들이 말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거 같다.’ 이 시기가 언제입니까? 18세기죠. 18세기는 조선이 굉장히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이미 안대회 선생이나 이런 분들이 여기에서 강의했을 건데요. 사실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 다음에 병자호란이 끝나면, 조선이 역사에 가설은 없지만 망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버텨낸 거죠. 버텨내면서 조선적인 경제 개발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을 다시 개간도 하면서 새로운 양상의 모습을 가지게 되고요. 기왕 조선을 세우고 권세를 가지고 있던 양반들이 힘이 좀 빠지고 그 다음에 지방에 있는 사림(士林)들, 지방의 선비들이 서원을 기반으로 해서 세력을 넓혀 중앙 정치를 하게 되는 시기죠. 그리고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오는데, 과거시험을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많고 서울에서 있는 사람도 많은데요. 학원을 다니는데, 학원이 있었어요. 과거시험 과제가 대부분 서울에 사는 관료들이 문제를 내요. 그러니까 안동이나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 보러 오면 우선 글의 풍치(風致), 글 쓰는 글의 묘미가 너무 촌스러운 거예요. 대부분 낙방을 해요. 정조가 서울 화성을 세우면서 화성에 입주시킬 사람들을 문중(門中)별로 선택합니다. 문중별로 무슨 성 씨는 이 블록에 살게 하자, 살게 하자 해야 하는데 살게 하려면 직업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직업을 주려면 과거시험을 봐야 하죠? 과거시험을 한양에서만 보지 않고 지방마다 다니면서 보기도 해요. 그래서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조선시대 때는 내가 서울 사는데, 실력이 안 돼요. 그러면 천안에서 과거시험 있으면 거기로 가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경쟁자가 약해요. 그렇게 되기도 해요. 수원에서 정조가 과거시험을 열었어요.

그런데 누구를 주로 불렀느냐 하면, 해남 윤 씨들을 불렀어요. 윤선도가 인조부터 해서 위에 스승이었고, 윤선도가 고생했지만 정조는 되게 좋아했어요. 윤선도는 정치적인 맥락을 잘 정리했던 사람이라서. 다음에 윤선도 고택(故宅)에 갑니다. 그 윤선도를 좋아해서 정조가 윤선도 집안사람들, 해남 사람들을 불러서 수원 화성에 안착시키려고 과거시험을 내요. 과거 문제를 내기 전에 과거시험 보러 오라고 해요. 미리 만나요. 면접을 해요. 요새 같으면 부정청탁인데, 그렇죠? 정조가 불러요. ‘너는 누구고 어느 집에서 왔느냐 그리고 글도 써봤냐, 공부 했냐, 어디에서 한문을 공부 했니, 어디에서 했니’ 쫙 물어봐요. 그런데 요새 같으면, ‘너는 어느 학원 다녔니. 어학연수는 갔다 왔니’ 이렇게 물어본 거예요. 물어보고서 문장을 한번 써보라고 해서 정조가 보니까 정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학문이 높은 최고의 학자 임금이죠? 보니까 정조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써놨어요. 한문으로 말이 나와요. 정조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의 문장은 촌스럽기 그지없다.”라고 얘기해요. “한양에서 1년 살면서 공부 좀 다시 해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안 된다.”라고 합니다. 해남에서 올라온 가장 문장 잘하는 윤 씨 중에서 한 명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한양과 지방의 풍속이, 사람 사는 모습이 달라지고요. 그래서 양반들은 이제 어떻게 해요? 지방에 자기 집이 있어서 관료가 되면 서울로 올라오거든요? 특히 남자는 혼자 옵니다. 부인하고 식솔을 안 데리고 옵니다. 부인을 안 데리고 와요. 부인은 시골에서 시부모 모시고 살림을 하고 제사도 해야 하잖아요. 혼자 올라오면, 친구가, 성균관 다녔으면 성균관 동기가 노비를 하나 줍니다. 밥 해주라고 어린 여자 노비를. 그런데 한 20년 지나면 어떻게 돼요? 애도 낳고 같이 살아요. 그리고 진짜 부인은 만날 시골 종갓집에서 일만 하고 있고, 화가 엄청 나요. 주고받은 편지도 있어요. 편지도 남아 있어요. 화가 엄청 나요. 그래서 부인이 보낸 편지는 남아있는데, 남편이 답장 보낸 건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아마 부인이 받고 다 불태운 거 같아요. 열 받아서 찢어버리든지. 그래서 그렇게 왔다 갔다 하기 싫으니까요

안동이나 지방의 거주자들이 지금의 강북 북촌에 와서 거주지를 형성합니다. 그 사람들을 경향, ‘경향신문’의 경향. 경향사족(京鄕士族)이라고 부릅니다. 서울의 양반들이에요. 그게 북촌의 성균관 대학 있는 언저리 대학로에서부터, 중림동 아시죠? 중림동에서 아연고개 넘어가기 전까지 그 일대에 쫙 모여 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중인들이 중간에 끼어 살고요. 그러면서 17세기가 되면, 이른바 한양, 지금의 강북. 청계천 북쪽은 최고의 관료와 최고의 학자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는 동네가 되고요. 돈이 좀 없고 집도 잘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산 밑 필동에서 삽니다. 필동에 살면서 청계천을 넘나들어야 하니까, 청계천 주변은 비가 조금만 와도 거의 젖은 땅, 그래서 나막신을 신고 다녀서 딸깍발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시기가 되니까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불행한 건 뭐냐 하면, 지금 하고 비슷하게 양극단이 되는 거죠. 부자는 부자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고, 서울 사람은 잘 살고. 그리고 중인이나 노비 중에서. 중인(中人) 중에 역관(譯官), 의관들은 또 돈을 많이 벌어요. 특히 역관. 중국 말 할 줄 알고 만주 말 할 줄 아는 역관들은 1년이 2번씩 가는 사신들을 따라다니면서 비단도 팔고 사오고 인삼도 팔면서 돈을 엄청 벌어요. 그래서 18세기 때 일상에서 가장 밥을 잘 먹고 사는 사람은 역관하고 의관입니다. 의관도 공식 의관인데, 누가 아프면 봐줘야 할 거 아니에요?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누가 지었죠? 허준 선생이 지었어요. 허준 선생을 평가한 양반들의 글에서는, 허준이 제 몸매하고 비슷해요. 통통해요. 그런데 허준을 두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저 놈은 나쁜 놈이다. 중인 주제에 세상 높은 줄 모르고 지가 왕인 줄 안다.’ 이렇게 써놓은 양반들 많습니다. 왜냐하면, 허준 선생한테 우리 집에 누가 아프니까 왕의 의관임에도 불구하고 “너 와서 좀 고쳐줘.” 요새는 주치의가 빨리 가겠죠? 막 고쳐달라고 하면, 실세들한테 갈 거 아니에요. 그런데 허준이 안 가요. 그래서 욕을 많이 먹어요. 허준이 안 간 이유는 뭔 줄 아세요? 동의보감 책을 써야하기 때문에. 자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안 간 거예요. 욕을 많이 먹었지만, 진짜 서울의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 와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겠다고 애걸복걸하고 부탁을 하면, 가서 진료를 해줬어요. 그걸로 일단 이해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시기가 속화라고 하는 거나 풍속을 그려놓은 그림들이 굉장히 많았던 시기고요. 한편에서는 민중에 대한 관심, 일반 백성에 대한 관심 혹은 삶에 대한 관심,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기입니다.

이제 윤선도 집에 갈 때 가장 먼저 만나야 될 이유는 윤선도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고 공재 윤두서를 보러 가는 거죠. 윤두서라는 사람이 그린 자화상입니다. 윤두서는 실제로 윤선도의 직계 증손자는 아닙니다. 원래 해남 영동에 살던 사람이 아니고요. 같은 해남 윤 씨인데, 먼 친척이에요. 그래서 해남의 영동에서 떨어진 마을에 살다가 윤선도의 아들 때에 양자로 들어와서 증손이 되었고요. 그 다음에 다산 정약용이 외증조인 거죠 윤 씨와 다산 선생님 집안과의 혼인관계가 있고요. 혹시 해남 윤 씨 계세요? 해남, 영동의 해남 윤 씨 가는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국부(國富)라고 불러요. 나라에서 몇 안 되는 부자. 해남의 모든 땅, 바닷가 땅을 다 가지고 있어서 소작을 받는 대신에 계절마다 나오는 전복, 미역 이런 것들을 갖다 바쳐서 자기의 노동 없이 땅 빌려주고 품삯을 받고 해결할 정도로 집에 창고가 엄청날 정도로 국부의 집안이 해남 윤 씨, 영동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지금도 남아 있죠? 그런데 남인(南人) 계열에 속하고 당파가 어려우니까 ‘집에 돈 있겠다, 굳이 한양 가서 내가 고생 해.’ 그리고 또 양자로 왔으니까 자기 집을 떠나는 순간 양자가 팽을 당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냥 진사치에 동네에서 합격하고 남자.’ 그래서 집에서 남아 한 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한 거예요. 스스로 자습을 한 거죠. 자습한 거예요.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고 스스로 자급해서 온갖 그림, 불교와 관련된 그림도 그리고 인물도 그리고 했는데,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은 일단 문장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고요. 그 다음에 붓글씨라고 하는 예술적 서예를 잘 해야 하고요. 그 다음에 또 뭘 해야지 선비답다고 칭송 해주었을까요? 그 정도는 다 아시죠? 할 줄 알아야 할 게 또 있어요. 택일(擇日)도 잘해야 돼요. 주역(周易)도 잘해서 날짜도 잘 잡아야 해요. 날 잡는 것도, 특히 손자나 아니면 아들이 결혼했을 때 언제 합방을 해야지 아들 낳는지도 달과 우주의 기운을 보고 맞춰요. 또 있어요. 이거까지 하면 완벽해요. 의서(醫書)도 통달해서 사람이 아프면 어떻게 약재를 써야 된다는 것도 알려주면, 가장 존경받는 시골의 사족입니다. 옛날 분들은 다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지 존경받아요.

왜냐하면, 시골 지방에 의사가 없기 때문에 책을 볼 수 있는 선비가 의학적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약재도 써야 하고 심지어 요리법도 알고 있어서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래서 요리책을 쓴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문으로, 윤두서가 그린 그림을 볼까요? 속화를 그리게 된 사람으로 가장 앞선 사람은 윤두서입니다. 이 복장은 중국의 복장입니다. 그렇죠? 이렇게 그렸던 이유가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나온 아주 좋은 책이 있습니다. 천공개물(天工開物)이라고 ‘하늘 천(天)’ 자에 공대할 때, 공인 할 때 ‘공(工)’ 자 그 다음에 ‘열 개(開)’ 자, ‘물건 물(物)’ 자.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준 기술로 물건을 바꾸는 법, 천공개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세상 사람한테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의 방법을 적어놓고 그것을 그림으로 다 그려놨어요. 그래서 소금 만드는 거 그 다음에 철 만드는 거부터 시작해서 집 짓는 거부터, 중국 버전입니다. 농사짓는 거까지 다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게 뭐예요? 보이세요? 각종 나무그릇들이죠. 나무로 된 목기그릇. 이건 함지박. 이것을 이렇게 원통으로 만들어서 여기에 나무로 된 원통을 꽂아요. 지금 같으면 고무줄이 있지만, 또 방앗간 생각하면 어때요? 넓은 천, 튼튼한 천을 가지고 이렇게 하고 양쪽으로 돌리면 어떻게 돼요? 이게 동글동글 돌겠죠. 그러면 세로로 된 걸 가지고 여기에 나무를 잘 꼽아서 버드나무 같은 딱딱한 나무도 잘 깎을 수 있는 이 도구를 대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깎이죠. 힘듭니다. 지금 자동으로 돌아가는 데에 대고 하는 거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든데,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이죠.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윤차도라고 해서 돌리면서 그릇을 깎는 거예요. 목기,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식기로 쓴 그릇들은 주로 재질이 뭐였을까요? 어떤 걸 가장 많이 썼을까요? 밥그릇 하면, 뭐였을까요?

- 재기.

- 재기? 그러니까 밥그릇 하면, 도자기, 도기, 자기, 놋그릇, 목기도 있고 이런 게 있잖아요. 어떤 걸 주로 많이 썼을까요? 질그릇이요? 요즘 사극에 많이 나오죠. 서민들은 주막에 가면, 옹기, 유약 바른 오지그릇이라고 하죠. 질그릇은 유약을 안 바른 것이고, 유약 바른 걸 쓰고 있죠. 그렇게 썼으면 아마 조선시대 때 옹기점(甕器店)이 굉장히 많았겠죠. 별로 없었어요. 옹기점은 주로 항아리, 유약 바르지 않은 항아리를 주로 쓰는 것이고요. 놋그릇을 가장 많이 쓸 거 같지 않으세요? 놋그릇의 재료는 뭡니까? 구리예요. 구리가 나려면 구리광을 찾아야 하잖아요. 조선시대 때 구리광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일본에서 수입했어요. 그러다가 엽전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엽전도 구리로 만들거든요. 간신히 엽전을 만들어서 유통시켰는데, 엽전을 녹여서 놋그릇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래서 영조 때 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자가 잡히면, 곤장 100대’ 곤장 100대 맞으면 어떻게 될까요? 한 49대쯤 되면 죽습니다. 그래서 너를 죽이겠다는 거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수입한 왜동(倭銅)을 녹여서. 지금 같으면, 10원짜리 동전을 녹여 비싼 걸 만들어서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에 문제가 있잖아요. 국가에서 운영하는 돈이 안도니까. 그래서 놋그릇 구하기는 너무 어렵고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도자기의 자기를 불러서, 자기는 온도가 가마에서 1,100℃ 이상에서 구워지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1,100℃ 이상에서 구워지려면, 그냥 점토만 있으면 안 돼요. 백토(白土), 고령토(高嶺土)라고 하는 게 있어요. 일본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전까지는 고령토가 어디에서 나는지 몰라서 질그릇만 만들었어요. 유약도 안 바르는. 그러다가 이삼평이라는 도공을 잡아가서, 나가사키 위에 아리타 라는 곳에서 이삼평이라는 조선 사람이 백토가 있는 산을 발견했어요. 지금도 나가사키 아리타를 기차 타고 가시면, 신사(神社)가 있어요. 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이 이삼평이에요. ‘조선 이삼평이 와서 자기를 만들게 해주었다.’ 그 1,100℃의 이상의 자기를 다른 말로 ‘사기(沙器)’라고 합니다. 사기 치는 사기 말고 ‘모래 사(沙)’ 자를 붙여서 사기입니다. 이건 잘 안 깨지고 주로 백자(白瓷), 청자(靑磁), 분청사기(粉靑沙器), 청화백자(靑華白磁) 이런 것이죠. 서민들은 뭘 썼을까요? 목기를 쓰는 거죠. 그리고 양반 집에서 목기 쓰는 것 중에서는 함지박이나 이런 것들을 목기로 씁니다. 무겁죠. 목기가 일본 목기는 가벼운 데 비해서 조선 목기는 무거워요. 여기 있죠? 항아리도 있죠? 항아리도 있고 접시들이 있죠. 접시들 보이죠? 제가 이 그림 전체를 보고 나서 이걸 봅니다. 제 관심사는 음식 이야기라서. 이게 처음에 잘 안 보여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사진을 인쇄해서 연구실 벽에 붙여놔요. 그럼 매일 보잖아요. 매일 보면 어떻게 돼요? 옆에 같이 한 20년 내 살면, 얼굴이 사람으로 안 보이죠. 부인이나 남편이 머리 잘랐는지 파마를 했는지 관심이 없어서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림을 붙여놓고 매일 보면,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면, 자꾸 안 보이는 게 보여요. 처음에는 안 보였는데, 자꾸 보여요. 처음에는 이미지만. ‘저건 나무 깎고 있구나.’라고 했다가 이것도 보이고, 이거 보이세요? 나무가 깎여서 나온 톱밥도 보이고요. 그렇죠? 톱밥, 나무찌꺼기가 보이죠. 저는 이걸 만들어봤어요. 제가 박사 논문 쓰면서 중국 소수민족 지역에서. 형태가 똑같아요. 그 다음에 의자도 그렇죠? 중국 스타일이에요. 중국풍의 그림을 옮겨와서 그린 거예요.

그 다음에 많이 알려진 그림입니다. 자주 보셨던 건데, 이것도 누가 그린 거라고요? 윤두서. 낙관(落款) 붙어 있고요. 제목을 ‘쑥을 캐는’, 노래가 뭐가 있죠? ‘콩밭 메는 아낙네’하고 같은 스타일의 것입니다. 옷이 조선 풍으로 왔죠. 그렇죠? 조선의 밭에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나무를 캐고 밭일을 하는 일은 부인들이 가장 많이 해야 될 식량 확보의 방법입니다. 시골에서는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양반 부인들도 밭을 일굴 수밖에 없는데요. 이렇게 밭을 일굴 때 제일 중요한 게 이 시기에는 이미 고구마는 성공 못했고 감자가 들어 왔으니까 밭일을 많이 한 거죠. 이게 윤두서의 그림입니다. 여기에서 이거 보이세요? 쑥을 캐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도구죠. 쑥은 조선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만병통치약입니다. 음식 재료도 되고 그 다음에 쑥 즙을 내서 먹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쑥을 말려서 초가 없어서 급할 때는 쑥으로 뜸도 들지만, 잠시 불을 지피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쑥불도 지피고요. 쑥은 만병통치뿐이 아니고 용도가 너무 많아요. 쑥떡을 만들기도 하고 쑥이 약이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쑥이라는 게 굉장히 유행하는데요. 이걸 유행시키게 했던 분이 허준입니다. 동의보감을 쓰면서. 동의보감은 어떻게 보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나오는 약재는 중국 약재니까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약재가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향약이라고 하는데, 그 약재를 가지고 뭔가 질병을 예방하든지 낫게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때 약재를 쓰는 것은 병이 났을 때 쓰는 게 아니고 우선 처음에 병이 나기 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쓰든가. 그럴 때는 약으로 먹지 않고 음식으로 먹는 거예요. 그래서 예방의학이에요. 그걸 먹어서 병이 안 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병이 낫잖아요? 그럼 쑥이 약이 돼요. 그러다가 병이 계속 잘 치료가 안 되고 악화되면, 편안하게 돌아가시도록 처리하는 거죠. 그러니까 한의학이라는 것은, 중의학도 마찬가지인데 예방의학이다. 그런데 예방에 식이요법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인데요. 죽을 먹는다든지 이런 게 다 그런 거예요. 도구가 다르죠? 쑥을 캐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조영석. 관 아재는 호(號)입니다. 조영석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반 출신이고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냈고요. 이 사람이에요. 자기의 초상.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이라는 사람. 자기 형제의 초상이에요. 되게 닮았을 거예요. 조선의 화원(畵員)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목표는 관료로 등용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임금의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초상을. 고려시대부터 유독 중국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선조들이 자기 얼굴 그리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왜요? 자기 얼굴 그리고 돌아가시고 나면, 그 얼굴 화상을 부처님처럼 집에 모셔놓고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거예요. 지금은 명절, 설날하고 추석에만 제사를 모시죠? 고려시대 때는 설날, 정월대보름, 삼월삼짇날, 단오, 거의 명절마다 하는 일이 조상 제사를 모시는 겁니다. 그때 화상(畫像), 초상화를 모셔놓고 합니다. 대한제국 때 강화도조약 하고 나서 19세기 말에 사진기가 들어왔어요. 사진기를 처음에 서양 사람이 들고서 아프리카나 원주민 사회에 가면, 유리판이 펑 터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전부 다 폭탄인 줄 알고 다 도망가요. 그런데 유일하게 도망 안 가고 좋아한 사람이 조선 사람들, 그것도 조선의 관료들. 고종황제부터 시작해서 사진에 완전히 뻑 간 거예요. 왜인 줄 아세요? 어진을, 초상화를 그리려면 이렇게 앉아서 며칠을 꼼짝도 안 하고 있어야지 완성이 돼요. 그런데 사진기는 1시간만 있으니까 금세 자기 모습이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사진기를 너무 좋아하는 황제와 조선 지식인들’이라는 글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초상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데요.

전주에 가면, 전주 이 씨 왕의 어진(御眞)들이 쭉 걸려 있는 곳이 있죠. 어디죠? 전주 어디죠? 경기 전에 있잖아요. 그쪽에 있는 건 진짜가 아니고 대부분 모사품이지만, 그래서 왕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종묘에 모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왕의 어진을 그립니다. 그런데 고지식하신 분이에요. 세조 어진. 어진을 한번 그려놓고 오래 되면, 망가지잖아요. 그러면 후대에 다시 덧칠해서 그리기도 해요. 덧칠을 해서 그려야 해요. 다시 모사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랬더니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그림 잘 그리는 기술로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해서 거부했어요. 거부하면 어떻게 돼요? 잡혀가죠. 그래서 옥살이를 했어요. 옥고를 치르고 나서 절대 그림 안 그리겠다고 고집을 세웠죠. 그랬는데 1748년에 숙종 어진, 영조가 “숙종 어진을 그려라” 했더니 그때는 이미 나이가 들어서 30대 때만 그러지 60대 넘어가면 힘들잖아요. 그래서 일단 영조 좋아하니까 영조 편들어서 숙종의 어진을 그렸습니다. 이 사람이 그린 그림 중에, 유치해 보이죠? 별로 수준 높아 보이지 않죠? 아닌가요? 수준 높은 그림이에요. 사람 얼굴 묘사한 걸 보세요. 거의 조선 사람의 얼굴에 가깝게 그렸어요. 농부들이 땅바닥에 모여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갓을 쓴 양반도 있고 대부분 농부들이에요. 무명옷을 입고 있죠. 그러니까 미술사 하는 분들하고는 대화가 안 돼요. 저희는 ‘그림은 좋다.’ 그러고 나서 옷이 뭘까, 신발은 뭘까, 머리는 왜 이럴까. 밥그릇 보이세요? 밥 주고 있죠? 밥상이 별로 없이 바닥에 앉아서 먹는 것을 아무 때나 풀썩 앉아서 먹는 것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어요. 요새는 좀 덜한 거 같아요. 농부들은 아무데나 주저앉아요. 여기 보세요. 요사이 말하는 양반다리 앉은 사람이 있나요? 이 사람은 양반다리인가요? 비슷한데, 양반다리인가요? 이 양반이 양반다리죠. 원래 70년대 이전까지 양반다리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시고 아시죠? 책상다리죠. 이렇게 앉다 보니까 책상다리라는 말에 어폐가 있으니까 양반다리로 바뀐 거예요. 책상다리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앉는 자세의 가장 올바른 자세가 아니고 약간 편하게 변형된 자세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원래 어떻게 앉아야 되느냐 하면, 일본 사람들 앉듯이 무릎을 꿇고 이렇게 경서를 읽어야 제대로 된 선비의 자세라고 했어요. 그런데 조선에는 온돌방 대청마루에 무릎 꿇고 있으면, 여기 양 무릎이 까지죠. 그래서 퇴계 선생이 “우리는 그다음으로 말씀하신 책상다리로 앉는 걸로 바꾸어도 된다.”고 주자께서 말씀하셨다고 해석하는 바람에 그렇게 앉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앉을 수가 없죠. 이렇게 편하게 앉는 거죠. 밥그릇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음식 이야기에서 조영석이 그린 그림으로 가장 흥미 있는 그림입니다. 이건 제가 옛날 한국조학연구원에서 각 명문가에 가서 고(古) 문서들을 수집해 온 게 올해로 32년째예요. 고문서 수집을 이 집안 가서 했어요. 이 집안의 후손인 조동재 종손이 있을 때 그 집에 가서 했어요. 책을 가지고 왔는데, 책을 쭉 넘기다가 종이쪼가리가 하나 나온 거예요. 이 사이즈가 28.5cm예요. A3 정도는 안 되고 B4 정도 되는 사이즈예요. 거기 사이에 끼어 있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걸 펴봤더니 이 그림이 나온 거예요. 사람 얼굴은 상세하게 안 그렸지만. 처음에는 다들 ‘이게 뭐지? 뭐하는 거지?’ 이게 뭐하는 거죠? 젖 짜는 거죠. 자세히 보세요. 뒷다리를 묶었죠? 이걸 묶는 이유는 뭐죠? 얘가 발로 차니까. 그리고 앞에서 짜고 있죠? 그리고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은 갓을 쓴 걸 보니 양반이나 중인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도포의 색깔이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걸 보면, 내의원(內醫院)에 있는 내관(內官)들입니다. 의사들이 젖을 짜는 겁니다. 이 젖을 짜서 뭘 만들려고? 타락죽이라는 걸 만드는 거예요. ‘타락’이라 것은 ‘낙타 타(駝)’ 자에 ‘락’이라고 하는 것은 ‘우유 락(酪)’입니다. 그러니까 우유라고 하기 보다는 약간 묽은 요거트 같은 건데요. 낙타의 우유로 만든 요구르트라고 부르기도 하고 타락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타’를 빼고 락죽 이라고 합니다. 만들기 쉽습니다. 댁에 가서 남자 선생님들, 만들어보세요. 쌀가루 사서 가셔야 해요. 맵쌀가루. 그 다음에 우유. 저지방 우유 사면 더 좋고, 더 비싼 거 사야 해요. 순 원액에 가까운 걸 사 가서 죽 끓이듯이 끓이면, 타락죽은 금세 만들어집니다.

왜 의관들이 이걸 짰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조 2년, 영조가 왕이 되어서 2년째 되는 1726년에 승정원일기에 타락장이라고 나옵니다. 아까 타락이라는 게 ‘낙타 타(駝)’ 자에 요구르트 같은 ‘락(酪)’ 자. 죽을 끓이면, 이 요구르트 같은 형상이 돼요. 요구르트를 한자로 ‘락(酪)’이라고 부르거든요. 12월 7일 날을 주목하십시오. 타락죽, 락죽은 음력으로 12월부터 그다음 해 3월까지 4개월 동안 반드시 왕과 왕비, 왕세자, 왕세자비 그다음에 대비들까지 반드시 그분들만 매일같이 먹어야 합니다. 보양식입니다. 왕세손도 먹습니다. 그래서 타락죽을 누가 하느냐? 타락죽의 밀크를 짜는 일은 내관이 하고 타락죽을 만드는 사람을 타락장이라고 불렀어요. 이건 제가 발굴하고 제가 책에 썼습니다. 사복시(司僕寺)에는 타락장이 3명 이상. 사복시는 소나 말 같은 것들을 관리하는 부서입니다. 그 부서에 요리사가 한 명 있는 거죠. 타락죽 잘 만드는 명 셰프죠. 프랑스에서 셰프는 그냥 요리사예요. 그런데 미국이나 다른 데 가서는 요리 잘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로 바뀌었는데요. 3명이 있사온데, 최근 며칠 동안 내의원에서 명의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 전(殿)에, 각 전은 왕세자, 왕비, 대비가 머무는 집을 전이라고 부릅니다. 전에 진상할 타락죽을 끓여내서 바쳐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에 유동이, 성은 유 씨고 이름은 ‘동이’입니다. 남자예요. 박개궁지. 박 씨라고 성을 붙여준 거예요. 원래 성이 박 씨 아니고 유 씨 아니에요. 창덕궁에 들어와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성을 붙여준 거예요. 하나 던져준 거예요. 이름은 동이하고 개궁지죠. 동이 하니까 저 생각나시나요? 영조의 엄마 부른 드라마 동이 누가 나왔죠? 한효주가 나왔네요. 그 동이하고는 좀 다른 글자입니다. 두 명이 봉상시(奉常寺)로부터 숙수로 일하라는 재가를 받았습니다. 봉상시는 각 릉에,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릉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맡은 부서입니다. 이 봉상시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어요. 12월 달에 바쁜데, 타락죽을 매일같이 끓여야 하는데. 그래서 “이 일은 풋내기가 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오로지 유동이나 박개궁만이 숙수(熟手)”, 지금의 셰프, 남자 요리사를 숙수라고 부르죠. “숙수의 일을 대신하려 하오니 그만두게 하십시오.”라고 영조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조가 뭐라고 했겠어요? “오케이.” 그럽니다. 그다음에 봉상시에서 또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럽니다. 그러면 영조가 또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오케이.” 그럽니다. 그러면 사복시에서 또 올립니다. 그러면 또 “오케이.” 서로 조정할 때까지 왕은 판단을 안 하는 거죠.

승정원일기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번역이 고종 거는 다 됐고 인조 거는 한글로 번역이 됐어요. 읽어보시면 너무 재미있습니다. 특히 영조 편은 아직 번역이 안 됐는데, 영조 편은 되게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쓰면서 절대 누구 편을 안 들고 자기들끼리 조정할 때까지, 조정할 때까지 오케이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오케이 했으니까 사복시로 갔다가 다시 며칠 있다가 오케이 하니까 봉상시로 갔다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한 거죠. 이 두 사람은 괴로웠는데, 하지만 왕이 한 편을 안 들고 조정을 잘한 거죠. 이 그림에서 우유를 짜는 모습, 밀크를 짜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조선시대에 왕만 먹을 수 있었는데요. 영조 말쯤 되면, 모모한 세도가, 높은 관료들이 겨울에 타락죽 먹는 것을 너무나 탐을 냈어요. 그래서 타락장들한테 부탁해서 아니면 내의원한테 부탁해서 이렇게 젖을 짜면, 일부 달라고 뇌물을 바칩니다. 그래서 내의원들이 줍니다. 권력이 세니까 줘요. 그래서 집에서 끓여먹어요. 그래서 규합총서(閨閤叢書)라는 책에는 민가에서, 한글로 된 책인데요. 1800년대에 나온 책인데, 출판된 게 아니고 그냥 필사한 거예요. 집에서 타락죽 끓이는 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법이 아니고 ‘그것은 내의원에서 끓이는 법이다.’ 그러니까 왕처럼 사가에서도 먹었던 거죠. 하지만 안동에서는 못 먹습니다. 서울 살아야지 사복시에서 짜서 주는 거죠.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숙종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거예요. 지나다가 젖 짜는 모습을 현장에서 본 거예요. 숙종이 굉장히 연민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영조 엄마하고도 좋아하게 된 건데요. 이 모습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송아지한테 몹쓸 일이다.’ 그래서 갑자기 ‘올해는 타락죽을 안 먹겠다.’라고 선포를 합니다. 영조 그럽니다. ‘너무 불쌍하다.’ 그리고 소가 앓는 병이 뭐죠? 소가 병이 나면, 요새도 나오잖아요. 광우병 말고요. 광우병은 요새 생긴 병이고요. 광우병은 소한테 풀을 안 먹이고 고기를 먹여서 생긴 병이고요. 역이 생기잖아요. 전염병. 소 전염병이 감기, 소가 침을 흘리는 병. 소가 침을 흘려서 드러눕는 병. 요새에도 간혹 생기잖아요. 광우병 때문에 줄었는데, 조선시대 때 우역(牛疫)이라고 합니다. ‘소 우(牛)’ 자로 우역. 우역이 생기는 순간에는 이 소들도 우역이 생길 수 있으니까 타락죽을 금지시킵니다. 그러니까 이 타락죽을 그린 유일한 장면입니다. 이게 밀크를 짜내는 겁니다.

본인 스스로 그린 본인의 모습이에요. 김홍도의 모습입니다. 강세황, 아까 풍속에서 속화라고 했던. 강세황이 천거(薦擧)해서 도화서 화원이 된 사람입니다. 나중에 신윤복을 보겠지만, 신윤복은 집안 자체가 화원의 집안이고요. 거기에 비해서 김홍도는 그림을 유별하게 천부적으로 잘 그려서 화원이 된 거죠. 29세 때 영조의 어진도 그리게 되고요. 왕세자인 정조의 초상도 그리게 됩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렸죠? 어진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수준 높은 데 도달한 거죠. 호(號)를 자기도 짓고 싶었던 거죠. 원래 중인 출신이니까 호를 지을 수 없지만, 문장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호를 지었는데, 명나라의 문인 화가였던 이유방이라는 사람의 호를 빌려왔어요. 그래서 이 사람도 단원이었는데, 단원이 된 거죠. 정조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림 그리는 일에서는 모두 홍도에게 맡겨라. 홍도가 모든 것을 책임지게 하라.”라고 했어요. 도화서 화원이 조선시대 때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일단 배웠죠? 어진. 월급 받으니까 어진 그려야 하죠? 그다음에 또 뭐가 있을까요? 의궤(儀軌) 그림. 수준 높으시네요. 의궤 그림도 그려야 하고요. 또 뭐가 있을까요? 군사요충지의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영화로 나왔지만, 김정호가 그렇게 박해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국가가 인정하는 화원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 그리려면 변방에 군인들이 주둔하는 지역, 해안가에 반드시 1명의 화원이 배치됩니다. 그려야 돼요. 그래서 화원이 그리는 일은 지도를 그리는 일이 있고요. 그 다음에 한양에 있으면서 화원중에서 또 해야 될 일이 있어요. ‘그림 그릴 사(寫)’ 자예요. ‘글자 쓸 사(寫)’ 자에 사자죠? 사자관(寫字官)이라고 하는 직책이 있습니다. 사자관. 조선시대 때 화원중에서 발탁이 돼요.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이유는 구텐베르크처럼 동시에 여러 책을 인쇄 돌려서 많은 사람이 읽게 하려고 만들었던 게 아닙니다. 금속활자로 책을 20번만 찍고 나면, 금속활자에 붙어있는 아교와 밀랍이 다 떨어져서 구텐베르크의 활자하고는 달라요. 금속으로 책을 찍으면, 한자가 굉장히 힘이 있게 보입니다. 나무로 찍은 것보다. 딱딱하겠죠? 동을 녹여서 한 겁니다. 나무는 뭉뚝해요. 그래서 금속활자로 찍었느냐 나무 목판으로 찍었느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겁니다. 그런데 그 멋있는 것을 금속활자로 계속 찍어내고 싶은데, 왕실에서 책, 특히 임금이 보는 책은 한 5권정도 만들어요. 그런데 한 권은 임금님이 보시고 나머지 책은 왕이 마음에 드는 신하에게 선물로 줘요. 그래서 5권을 찍는데, 그걸 하기 위해서 돈을 엄청 들여서 금속활자를 만들 수 없죠. 그래서 사자관이 마치 금속활자로 찍은 책처럼 보이도록 글씨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있는 서울대학교에는 규장각(奎章閣)이 있고요. 그다음에 제가 있는 판교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장서각(藏書閣)이 있습니다. 장서각에 영조 때의 책들이 굉장히 많이 있고요. 고종 때의 책은 대부분 다 가지고 있고 영조 책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몇 분들의 책이 너무 정성스러워요. 화원들이 쓴 글씨가 기가 막혀요. 그런 글도 쓰는 화원이 별도로 있고요. 그래서 화원들이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사가에 불려가서 사가의 그림들을 그려줘야 해요. 병풍 그림, 이런 것들을 다 관료가 그려줘야 해요. 왜냐하면, 조선시대는 지금하고 달랐어요. 그냥 한번 창덕궁 노비면, 창덕궁에서만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온갖 관료 집에 불려가서 일을 해요. 화원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제가 ‘두루 주(周)’, 상주 주가인데, 제 고향은 경남 함안이에요. 오늘 우리 집안이 거기에 힘이 센 집안이었어요. 그래서 어쩐 일인지 서울에서 화원을 한 명 불러들여서 온갖 그림을 다 그리게 한 거예요. 그게 저희 집안에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집안마다 한 명씩 차출해 가는 거예요. 밥은 먹여준다고 하고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예요? 일종의 집사 같은 그림쟁이들을 한 명씩 데리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것도 왕실에서 그냥 파견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김홍도를 보고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조희룡이라는 사람이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발해서 마치 신선과 같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퇴직하고 물러나서. 정조로부터 너무난 총애를 받았고요. 그래서 정조가 살아있을 때는 정조로부터 벼슬을 받았죠. 그러니까 사또가 된 거예요. 지금 수안보 넘어가는 데, 염풍이라는 곳에 염풍 현감으로까지 높은 벼슬을 받았습니다. 정조가 죽고 나서는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신선이 됐을 거 같아요. 정조한테 총애 받던 사람은 정조 사후에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그렇고 전부 다 귀향을 가든지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았죠. 정조가 돌아가신 게 1800년입니다. 이렇게 하면 역사의 연호가 중요해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아이들한테 역사의 연호를 가르치면 애들은 역사가 지겨워지는 거예요. 1392년은 무슨 해인가요? 조선 건국. 14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 1592년은? 임진왜란. 그게 다 맥락이 있습니다. 그 100년, 100년의 연관이. 가톨릭 신부님들을 통해서 조총을 받아서 콜럼버스 갔다가, 예수회 신부들이 조총을 또 인도 고아에서 왔다, 선교하기 위해서 일본의 가고시마에 갔다가 망원경, 조총을 소개했고 그게 임진왜란에서 우리한테까지 오게 된 거죠. 역사적으로 그렇게 전 세계가 움직이는 거죠.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려놓은 그림인데요. 이 전체의 그림,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이라는 것은 김홍도가 다니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그려놓은 거죠. 행려, 여행을 하면서 풍속을 그렸는데, 그 6첩의 그림을 가지고 도병은 병풍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병풍에 붙어있는 그림을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지고 있는데요. 위에 화지를 쓰고 낙관을 찍고요. 주막이에요. 보통 이런 주막은 점촌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여기 보세요. 대장간 보이세요? 치고 있는 거 보이시죠? 여기에서는 또 뭘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수공업 장인들이 모여 있으면서 주막도 있는 쪽을 점촌이라고 불렀어요. 경상북도 점촌만 점촌이 아니고 각 곳에 그런 점촌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동하는 십자로 같은 곳에 있어야지 사람들이 이동하든지 장을 보러 가든지, 어디 가면서 여기에서 만든 호미를 산다든지 담뱃대를 산다든지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점촌이 형성돼 있는 거고요. 낫을 갈고 칼 갈고 있고, 대장간이죠? 그리고 일하고 있다가 옆에서 쳐다보고 있고 양반이 밥을 먹고 있어요. 그냥 돌바닥에 앉아서 사각 반을 놓고 밥을 먹고 있는데, 주모가 생긴 모습이 거의 할머니, 아줌마 모습이에요. 이게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에요. 김홍도가 그린 후원유연(後苑遊宴)이라는 것은 양반집의 후원에서 기생하고 노는 모습인데요.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려놨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요. 이 모습을 저는 주목하는 거죠. 저는 여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잘 놀긴 하지만. 제가 이 그림의 여기에 관심이 있는 거죠. 후원에서 꽃이 피었는데, 놀고 있는 이야기를 써놨고요. 여기 집에 있는 여자 어린 아이가 상을 들고 서빙을 하는 거죠. 이걸 뭐라고 불러요? 소반인데 이렇게 빨딱 커져 있으면, 개다리 모양은 이게 개다리 같아요? 이게 개다리 같아요? 개의 다리, 강아지 다리 모양. 어떤 게? 이게 강아지 다리 같죠? 이건 구족반(狗足盤), 이건 호족반(虎足盤). 조선 초기부터 중기로 넘어오면, 이런 소반. 소반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형태의 상. 나무로 만든 이 소반을 이렇게 들고 다니는 것처럼 양반 남자들은 이렇게 혼자서 1인 식사를 합니다. 요새 1인 식사 한다고 난리지만, 맥락이 다르긴 한데 1인 식사를 합니다.

이건 실제로 100여 년 전에 프랑스 사람이 찍은 사진을 프랑스 사람이 파리에 돌아가서, 이 옆에는 아프리카 원주민, 이 밑에 조선인. ‘Core, 밥 먹다.’ 아무 의미는 없어요. 그냥 밥 먹는 모습을 그려놓은 거예요. 이게 신기한 거죠. 이 상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 이걸 왜 구족반, 개다리소반이라고 하고 이건 호족반이라고 할까? 이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래요? 상을 들 때 이 양쪽을 손으로 붙잡고 부인이 자기 눈썹에 맞춰서. 그래서 ‘상 안(案)’ 자, ‘들 거(擧)’ 자를 써서 ‘거안제미(擧案齊眉)’라고 합니다. 상을 들기를, ‘거안(擧案)’, 들다. 거수할 때 거(擧), ‘상 안(案)’, 거안. 그 다음에 맞춘다. ‘맞출 제(齊)’ 자에. 어디에? 눈썹에 맞춰서 올린다. 그래서 이 거안제미로 해서 상을 갖다 바치는 부인의 모습은 가장 착한 부인, 양첩(良妾)인데요. 한나라 시대 때 만들어진 고사가 있어요. 남편은 공부만 열심히 하고 돈은 안 벌어오는데, 부인은 남편을 삼시 두 끼. 세 끼가 아니라 두 끼. 옛날에는 두 끼 먹었으니까. 두 끼를 항상 이렇게 소반을 눈썹에 올려서 남편한테 식사하라고 갖다 주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부자가 감동을 받아서 자기 집을 내어줬다는 설화가 있는데요. 그게 거안제미예요. 조선시대 선비들, 고려 말 때 선비들 문집에서 ‘우리 집사람이 거안제미해서 오늘 맛있는 걸 주었다.’ 이런 걸 엄청 써놨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어 봤어요. 이렇게 차려놓고 들면, 이것은 눈썹까지 못 올려요. 이 정도 해서 들고 가야 해요. 이렇게는 절대 못 들어요. 무거워서. 상도 무겁고, 이 그릇 보세요. 사기 그릇. 이 밥 양하고 국 양을 보세요. 그래서 들고 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들어요? 이렇게 드는 거죠. 이렇게 드는 게 제일 상놈 같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상놈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침이 음식에 떨어질 수도 있고 머리카락이 떨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사이 우리보다 훨씬 더 계명(啓明)한 사람들이죠. 다만, 부인을 괴롭히니까 문제죠. 혼자서 이렇게 먹는 거예요. 안방, 사랑방 구분해서 부부는 절대 같은 방에서 자면 안 돼요. 같이 자면 안 되고, 같이 목욕도 하면 안 되고, 같이 밥도 먹으면 안 돼요. 밥도 따로 따로 먹어야 해요. 그 모습을 그려놓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볼 이 그림들은 누가 거렸어요?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져 있죠? 사실 김홍도가 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95%. 이게 한진우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1884년경, 그러니까 강화도조약 이후 고종 때 살았던 사람입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이 사람이 그린 삽화본이 있는데, 이 그림 많이 보셨죠? 다른 그림이잖아요. 김한준이라는 사람이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서 구입해서 그냥 자기가 이 한 첩을 묶어서, 25점이 있는데요. 김홍도의 풍속 도첩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지금 보물이에요. 문제는 여기 앞에 그림을 안 보이지만 기억하시고요. 이 그림을 보세요. 사람 얼굴이 김홍도가 그리는 스타일이 아니죠. 안 그러세요? 여기도 그렇죠. 여기 사람 얼굴, 여기 주막에 있는 사람 얼굴. 그렇죠? 풍이 달라요. 그리고 미술사학자들이 엄청나게 논쟁을 했어요. 그림이 좀 조잡하고 유치한 게 많아서 김홍도를 내세워서, 정조가 돌아가신 이후 19세기에 와서 조선에서 붐이 일어난 게 뭐냐 하면, 그림 수집하고 그림을 고가의 골동품화 시켜서 판매하는 붐이 일어났고요. 그다음 신윤복 이후에 이런 풍속화를 서로 선물로 많이 주고받는 풍조가 일어났어요. 그러다 보니까 단원 김홍도는 유명하잖아요. 정조가 “홍도한테 물어봐라” 그랬으니까. 지금 일반인들은 잘 몰라요. 참 국립중앙박물관이 어려운 입장이에요. 왜냐하면, 이게 보물이잖아요. 김홍도 그림이 보물이고요. 이렇게 보물로 지정하고 귀중하게 봤는데, 많은 학자가 이제 이 도장하고 다 했는데, 이 중에서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 있다면, 한 5점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부터 ‘전부 다 아니다.’라고 주장까지 팽팽하게 논쟁이 붙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이 그림들을 보여드린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김홍도가 그렸을 거라고 알려졌다고 해서, ‘전할 전(傳)’ 자를 써서 ‘전(傳) 김홍도’라고 하는데요. 김홍도의 그림뿐이 아니고 이런 류의 그림이, 김홍도 시절에 정조가 그리라고 했어요.

이 25점의 그림들을 보면, 각각의 직업군들이 다 나오고 세상 살아가는 모습이 나와요. 그래서 아마도 도화서에서 화원들이 그림 공부를 할 때 일종의 모본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도장이나 낙관들이 다 25첩 안에 들어있는 게 조금씩 다 달라요. 낙관이 없는 것도 있고요. 이건 있죠? 이것도 후대가 찍었을 수 있죠. 밥그릇 보이세요? 사기그릇이에요. 보부상인데, 부상이에요. 보부상 중에 부상. 남자 등짐장수인데요. 이렇게 앉아서 혼자 밥 먹죠. 만약에 이게 19세기라고 하면, 이 시기가 되면 양반 남자뿐이 아니고 일반 서민 남자들도 독상으로 밥 먹는 것을 그냥 일상적인 관례로 여겼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밥그릇은 대부분 다 사기그릇이죠. 그러니까 지금 여기 옹기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1988년을 넘어가면서 옹기가 이른바 민중주의를 드러내는 상징물처럼 바뀌어버렸어요. 사실 옹기를 많이 만들어서 각 읍·면 소재지에 옹기 공장이 생기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부터고요. 1912년부터 일본 조선총독부가 주세법(酒稅法)이라는 걸 발동하는데요. 이제 세금을 걷습니다. 대한제국 때도 주세령을 내는데 법령을 만들면, 연세 드신 분들은 아시죠? 그냥 ‘내일부터 무슨 법 시작!’ 이렇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을 감시할 공무원들 숫자가 필요하잖아요. 대한제국도 주세법을 턱 냈는데, 돈이 없어서 관원들이 없어요. 그래서 서울 만리동 너머에 술도가들이 많아서 거기 가서 한번 검사하고 끝났어요. 그런데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나라에서는 서양의 법인 주세법을 수용 안 했어요. 주세법을 실시 안 하고 조선에서 실시했어요. 1912년에 실시하면서 ‘세금을 어떻게 끌어 모을까?’ 소비량, 생산량을 봐야 할 거 아니에요. 생산량을 체크하는 방법을 가만히 보니 너무 좋은 게 술독이 있는 거예요. 세무서에서 지정하는 술독을 사용토록 하는 거죠. 그래서 요사이에도 골동품 가게에 가면, ‘경기 제 몇 호’ 이렇게 있습니다. 옹기 어깨 주둥이 밑에 운두라고 하는 곳에 글자까지 파서 아예 옹기를 만들어요. 그리고 옹기가 김칫독이나 간장독보다 훨씬 두껍고 무거워요.

그래서 그걸 보고서 정기적으로 와서 거기에 술이 담겨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며칠 전에 술이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 냄새 맡으면 알 수 있죠? 그걸로 세금을 매긴 거예요. 그러니까 개인이 못 만들고 술도가가 읍·면 소재에 생기기 시작한 1920년대 되면, 온 읍·면 소재지의 술도가 옆에 옹기 공방이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 공자기라고 불렀어요. 그게 서민들의 그릇으로 바뀌고 놋그릇 없어지면서 옹기로 만든 각종 뚝배기 그릇, 온갖 그릇들이 다 생긴 거예요. 그래서 양념도구도 생기고 막 생긴 거예요. 그랬는데 조선시대 때 그렇게 생기려면 국가가 옹기점을 직접 운영하든지 공급해야 돼요. 하지만 국가에서는 옹기점은 많았어요. 많았지만 항아리 정도를 주로 만들고요. 항아리 하나 팔면, 간장독 하나 팔면, 회전률이 좋아야지 장사가 될 거예요. 요사이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런데 하나가 잘 안 깨져. 김장도 지금처럼 많이 할 수 없어요. 김장도 비싸서. 짠지 만들고 하니까 잘 안 깨져요. 그러니까 한 마을에 가서, 한번 산에 가서 나무 하고 공방에서 옹기 쫙 그 지역에 팔고 나서 또 옮겨가요. 옹기장이 천민들이니까 옮겨가는데, 쫙 만들고 나면 그다음에는 한 20년 있다가 와야 해. 그래야지 대환영을 해요. 그러니까 천민들이고 결국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다니면서 이동하면서 판매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는 없잖아요. 사극에 나오는 건 순전히 80년대 후반부터 생긴 ‘민중은 옹기그릇에 밥을 먹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우리의 막연한 추측이 그렇게 만든 거고요. 실제로는 사기그릇이 조선시대 때 가장 국가가 공급해 주고 그 다음에 17, 18세기 되면 국가가 그 공급체계를 안 해요. 그러니까 개인들이 사형, 가마들이 생겨서 사기그릇이 가장 유행했고요. 실제 1960년대까지도 집에서 쓰시던 그릇 보면, 사기 그릇 아니에요? 그렇죠? 제가 분당 신도시 개발할 때 조사를 했는데, 창고에서 안 쓰는 거 나오는 게 전부 사기그릇이에요. 사기그릇 몇 개를 다 버리고 가셨어요. 그러니까 조선의 밥그릇은 사기그릇이에요. 그리고 이걸 부르는 말이 사발이죠? 국그릇은 여기 나오죠? 김홍도가 그렸을 거예요. 아까 봤던 거와 다르죠? 농부들이 점심 먹는 모습인데,

애 먹는 밥그릇 보세요. 엄청나죠? 숟가락 사용하고 있는데, 나무 숟가락이에요. 숟가락의 형태가 바뀝니다. 고려 중기에는 이렇게 쓰다가 이 시기가 되면 지금하고 약간 유사하게 굽지 않고 직각으로 돼요. 입도 넓어지고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밥그릇이 깊잖아요. 그리고 혼자 밥을 먹잖아요. 그렇죠? 여기도 혼자 먹죠? 여기도 밥그릇 들고 혼자 먹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코앞에서 먹는데 길쭉하면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직선으로 해서 퍼먹으려고.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숟가락으로 밥을 많이 안 먹죠? 대부분 젓가락으로 먹죠. 이때는 현미, 보리. 쌀도 현미밥, 보리밥. 이런 잡곡이었기 때문에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어요.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건 일본 쌀 품종의 차진 쌀밥에 아끼바리나 이런 벼에 찹쌀을 또 몸에 좋다고 넣고 맛이 좋다고 넣고, 그걸 또 전기 압력밥솥에 하니까 밥이 뭐가 돼요? 떡이 되잖아요. 그걸 맛있다고 비빔밥을 해먹고, 문제예요. 압력밥솥 쓸 때가 있고 안 쓸 때가 있잖아요. 연세 드신 분은 아시겠지만, 통일벼 막 억지로 먹을 때는 안남미니까, 남쪽 인디카는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으면 밥이 맛있어요. 지금 전기 압력밥솥 한국 걸 가장 많이 사가는 사람들이 중국의 상하이 이남 사람들이에요. 인디카, 안남미라고 하는 걸로 밥을 짓는데, 전기 압력밥솥으로 밥 지으니까 너무 맛있는 거예요. 지금 난리예요. 매일 사가요. 우리는 그렇지 않았던 거죠. 이렇게 숟가락의 모양이 바뀝니다.

- 저 때는 두 끼 먹었나요?

- 저 때는 전 세계가 두 끼 먹었어요. 공장가, 직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영국 런던 사람은 두 끼만 먹었고, 왕도 공식으로 두 끼. 그 다음에 다섯 끼라고 하는 건 잘못된 거고요. 두 끼 먹고 왕이나 부자들은 간식을 먹는 거죠. 아침에는 죽 먹고, 아침 10시에 아침 먹고 12시나 1시 사이에 점심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간식이고요. 5시에 저녁 먹고, 밤 해질 때도 안자고 계시면 9시에 별다식 이라고 다식이나 다래 이런 것들을 먹었던 거죠. 하지만 이 시기에 농부들은 다섯 끼에 가까운 식사를 했죠. 모내기하고 김매기 하면, 새참을 먹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다섯 끼 넘는 식사를 했죠. 실제로 농민들이 일할 때는 다섯 끼를 먹어야 되죠. 그리고 두레패 해서 서로 도와줄 때는 한 집이 토지가 많은데 노동인력이 없으면, 좋은 거 안 해주면 안 오죠. 일 열심히 안 해요. 무료로 서로 두레로 품앗이한다고 해도 계산을 하니까. 얘한테는 젖을 먹이고 있잖아요. 젖을 먹이고 있나요? 얘도 젖을 물고 있어요. 그런데 얘하고 얘 사이에 말은 못하고 돌 지나서 밥 먹일 때 우리 할머니들이 애 밥을 어떻게 먹여요? 막 먹이잖아요. 마구 비벼서 먹기 좋게. 걔가 밥을 많이 먹었는지 “배부르니?” 그러면 애가 보고 아~ 벌리고 있죠. 그러면 어떻게 해요? 아시잖아요. 이거 숟가락을 뒤집어서 애 배를 콕 눌러보고 쑥 들어가면, ‘더 먹이자’ 먹이고, 그다음에 또 눌러봐서 톡 튀어나오면 ‘다 먹었구나.’ 쌀밥은 아닙니다. 현미밥, 보리밥. 보리하고 섞인 잡곡밥입니다. 1960년대까지도 한국이 자급자족을 쌀만 하고 있지만, 다른 건 못하잖아요. 보리를 거의 생산 안 하고 있죠. 그런데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1960년대만 해도 보리 생산을 통해서 남한 사람들은 쌀이 부족하면 보릿고개를 넘기고 그다음에 중부 지역 사람들은 메밀을 심어서 식량 부족 상황을 해결했고, 제주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제주도도 쌀밥 안 먹고 원래 보리밥을 주식으로 먹었고요. 보리를 우리가 잃어버린 거죠. 보리밥을 잃어버리고 일본식의 차진 쌀밥을 먹고 있는 거죠. 그래서 숟가락이 이때는 굉장히 유용한 도구였다는 걸 알 수 있죠.

그 다음에 김득신. 김득신은 화원 집안의 사람이에요. 생몰(生沒) 연대가 약간 모호한데, 사실 김득신의 그림은 풍속화에서는 가장 수준 높은 그림이라고 미술사학자들은 평합니다. 당대에도 그랬고요. 김홍도의 그림보다는 훨씬 더 해학적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김홍도가 게 아니고, 이게 김홍도 거라고 생각한다면, 김홍도는 상당히 정취한 풍속화를 그린 거고요. 거기에 비해서 김득신은 굉장히 유쾌하고 발랄한 그림을 그린 거죠. 그래서 이렇게 투절하고 있고, 저는 이 소반의 술병 때문에 보여드리는 거예요. 김득신이 그린 그림 중에 이게 있습니다. 행주산성 나루에서 어부들이 일하고서, 조선의 배는 가장 재미난 것은 배 안에 이렇게 집을 짓고 여기에 솥을 걸고 밥도 해먹을 수 있는 서해안의 배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고려도 때도 마찬가지고 생선을 잡는 이런 한양에 오는 대부분의 생선은 서해안 생선이고 남해안의, 전라남도 연안의 생선이에요. 날로 오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말려서 옵니다. 그다음에 젓갈로 옵니다. 그게 18세기가 되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게 되니까 쌀, 포, 콩으로 세금을 받게 되고 자기들 동네에서 나는 특별한 걸 안 바치도록 해서 그걸로 대신하게 하고요. 군대에도 양반이 가게 하면서 군대를 안 가는 대신에 군포라고 해서 옷감을 내게 하고요. 국가가 영조 때 재정 방법을 바꿨어요. 바꾸면서 이 어부들이 마포까지 올라와서 새우, 소금부터 판매를 해요. 그래서 마포 배꾼들이 부자가 되는 길을 걷게 되는데요. 여기도 밥그릇 보이시죠? 옹기 안 나오죠? 술병, 물병 있죠? 숭어. 서해안을 따라서 한강으로 올라오는 게 3월 달에는 뭐가 올라올까요? 황복, 복어. 복어가 올라오고요. 그다음에 조금 있으면 숭어가 올라오고 그다음에 조금 있으면 바다에서 살다가 민물에 사는 게 있죠? 그게 올라오는데요. 행주산성 밑에서 주로 많이 잡았습니다. 낚시 그물은 나일론 그물이 아니었죠. 다 명주실하고 무명실로 만든 그물이라서 물고기 잡기 굉장히 힘듭니다. 전어는 언제 먹죠? 전어 떼가 몰려다니는데, 조선의 이 배 가지고는 못 잡아요. 전어 떼가 쏜살같이 멸치 떼처럼 다가오면, 이 배가 넘어지죠. 그 사이에 끼어 있다가 사람이 죽어요. 나일론그물도 없는데 어떡해요. 전어가 떼를 지어서 알아서 암놈이 산란을 하려고, 여기가 여러분이 있는 바다예요. 여러분이 전어예요. 그러면 산란하려면 해안가로 몰려 와야 해요. 오는 때가 음력 3월 말에서 4월 초입니다. 그게 어디? 지금의 삼천포, 남해 지역에 옵니다. 그러면 바글바글 하잖아요. 무명천, 삼베 천으로 만든 큰 망을 가지고 가서 퍼 올리는 거예요. 말려서. 아무나 못 먹어요. 하동 현감하고 사철 현감은 경상도 관찰사한테 말려서 보내야 하고요. 관찰사는 거기에서 좋은 걸 일부는 자기가 먹고 좋은 거는 또 골라서 한양에 보내야 됩니다. 숙종 때 전어가 안 나타나는 거예요. 해안가에 사천하고 남해에. 잡아서 올려야 하는데, 천심이라고 하죠. 새로운 먹을 게 생기면, 종묘에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항상 햇것은 왕에 먼저 바쳐야 해요. 그런데 전어가 알아서 오질 않는데 어떡해요? 잡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두 사또하고 경상도 관찰사가 연합으로 숙종한테 편지를 씁니다. “전하, 저희들을 죽여주십시오. 관찰사는 중징계를 내리시고 사천 현감과 하동 현감은 잘리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그랬더니 숙종이 하는 이야기가 “안 나오는 걸 어떻게 해. 그게 무슨 죄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때는 고등어 많이 못 먹었어요.

일본 아이들이 와서 서양 식 기술로 생선을 잡아서 우리가 동해안의 생선들을 먹기 시작하는 거예요. 멸치 떼가 우연히 강릉 경포대로 방향을 잘못 잡아서 아침에 나가봤더니 바다가 멸치 떼로 반짝반짝 거리면, 그때 멸치를 잡는 거고요. 그래서 가장 잘 잡는 방법은 밀물 차이를 이용해서 물이 빠졌을 때 돌을 쌓든지 싸리나무를 꽂든지 아니면 대나무를 꽂든지 죽방염, 방염을 만들어서 자기가 들어왔다가 나갈 때, 나가고 나면 많이 잡혀 있죠? 그래서 바닷가 사람들은 그걸 생으로 먹고, 유통하려면 말리는 거죠. 그래서 말리는 생선이 주로 한양 사람들이 먹었던 거고요. 생으로 된 것들은 먹을 수 없었고요. 명태는 겨울에 나잖아요. 함경도 함흥에서 잡아서, 명태는 모여 뛰어다니기 때문에 큰 망태 가지고 잡든지 아니면 낚시로 잡는데요. 낚시로 주로 잡았는데, 그걸 잡아서 함경도 관찰사가 한양에 보내야 돼요. 한겨울 동안 몇 달을 걸려서 한양에 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얼었다가 녹았다가. 그래서 덕장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산 넘어오다가 날씨가 갑자기 너무 따뜻해져요. 그럼 어떻게 돼요? 명태 안에 구더기가 생겨요. 그래서 그게 한양에 도착하면, 구더기가 생겨서 잘린 함경도 관찰사도 있습니다. 기후 덕택에. 그런 이야기가 여기 있죠. 김홍도가 그렸을 거라고 전해지는 조기잡이. 조기도 이렇게 잡는 거예요. 조선시대 때는 이런 배로. 화덕 보이시죠? 화덕에 밥 해먹고 나가면서 이렇게 죽방, 싸리나무 같은 걸로 미리 물이 빠졌을 때 꽂아놓고 있으면 물이 들어와서 여기에 그거 잡아먹으려고 갈매기가 오잖아요. 생선 보이시죠? 퍼 나르는 거죠. 그런데 이런 배에 실을 항아리의 모양은 배가 불룩하면 안 돼요. 배가 불룩하면 서로 부딪혀서 깨지죠. 그렇죠? 새우젓 모양 아세요? 역삼각형처럼 생긴 새우젓. 새우젓은 여기에 안 나오는데, 새우젓 모양이 그런 이유는 배에 실고 나가서 새우를 잡고 바로 배에서 새우에 소금을 뿌려 절이는 거예요. 그래서 큰 새우젓 독이 역삼각형으로 생기고 여기 항아리 어깨에, 전이라고 했죠? 전이 두꺼운 이유가 여러 개를 겹쳐 놓아도 배는 공간이 있죠? 배가 흔들려도 안 깨지겠죠. 생활의 원리예요. 과학도 아니고요. 그래서 새우젓 모양이 생기는데요.

혜원 신윤복. 이 사람이 혜원 신윤복일지 아닐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람이 혜원 신윤복일 거 같다고 저 혼자 생각하는 게 아니고 부산대학의 강명환 선생님도 생각하고 여러 사람이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신윤복 같다.’ 화원 집안의 출신이고요. 주로 한량 기녀, 도시의 모습을 그렸고요. 그래도 가장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고 짤막한 자기의 감상 글을 쓰고요. 그다음에 도인을 찍어서 있는데, 다만 언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이른바 연보가 없습니다. 거배(擧杯)를 하는 거죠. 달밤에 거배를 하는 모습입니다. 여기 이 꽃은 뭘까요? 철쭉이나 진달래 중에 뭘까요? 그냥 말씀하셔도 돼요. 진달래면 몇 월 달이죠? 북촌의 민가집이죠? 옆집이 있고 그 집의 모습입니다. 달이 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주사는 서울 한양 북촌에 있는, 아까 그 주막에 있는 주모하고는 다르죠. 굉장히 야시시하죠? 이때는 이렇게 짧게 저고리를 올려서 허리를 날씬하게 했어요. 다만 애기를 낳고 아들을 낳은 부인들은 이걸 좀 헐렁하게 하고요. 가발이에요. 이때 가발 정신을 가지고 70년대에 진짜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아서 우리가 잘 살게 된 이유 중에 하나죠. 그런데 하여튼 이 모습이에요. 이게 기생이에요. 물러난 퇴기 기생이고요. 양반, 양반, 양반이죠? 그다음에 여기는 양반 아니에요. 별감(別監)들이에요. 그러니까 하급관료들이죠. 얘가 아까 봤던 그 친구죠. 이 친구죠? 이제 아시겠어요? 안면 있으세요? 신윤복이 그린 그림 중에 몇 가지가 이래요. 삐딱하게 그린 거예요. 마치 이 친구 눈빛이 어때요? 다시 크게 볼까요? ‘아이고, 인간들아.’ 그러고 있는 거 같지 않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혜원 신윤복의 눈을 볼 수는 없고, 그렇죠? 여기 보세요. 얼굴이 빨간 사람이 뭐죠?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고 있고요. 얘는 한 잔만 더 하고 가자고 하고 털보는 얼굴이 뻘개요. 아주 고위직이에요. 이게 뭘까?

영조가 술을 못 마시게 했어요. 누구한테?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지금의 김영란법은 조금 범위가 넓어요. 이때 금주 대상은 당상관(堂上官) 이상, 지금의 중앙부처의 국장 이상만. 그러니까 여기가 국장 이상 사람들이에요. 국장 이상은 한양에서 금주를 해야 하는데, 이 두 사람은 하급이니까 해당 안 되죠? 제가 하는 뻥이에요. 제가 하는 소설이에요. 이 둘을 족쳐서 세 명이 와서 몰래 술을 먹고 가는데, 들킬까 싶어서 얘하고 얘 둘은 빨리 가자고 하고, 서서 먹는 주막이에요. 그리고 얘는 “내가 그래도 검찰청 하위직인데, 괜찮아!” 그러고 있고요. 여기 둘은 슬쩍 묻어서 한 잔 더 먹고 가려고 하는 모습이라고 제가 소설을 썼어요. 그럴 거 같은 이유가 이거 때문입니다. 영조는 심지어 한양에 있는 당상관 이상의 양반들한테 어제(御製), 스스로 글을 썼어요. 한문으로 쓰고 한글로 만들어서 ‘계주윤음(戒酒綸音)’ 윤음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말씀입니다. 어제는 직접 지은 것이고요. 직접 지어서 ‘술을 끊어라’라고 하는 왕의 말씀입니다. 윤음을 하신 거죠. 그리고 책을 한문으로 쓰고 한글로도 다시 써서 한양에서 반포식을 했어요. 왜 이걸 했느냐 하면 첫 번째,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나라들이 잘 살다가 망할 때는 천자가 술에 빠졌어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 아시죠? 주지육림 때 나라가 망해서 공자 때부터 유학자들은 성군이 되려면 술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술을 많이 먹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겨요? 조선의 술은 뭐로 만들어요? 재료가? 쌀이죠. 그게 불행한 거예요. 백성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술을 만든다. 이때 가장 인기 있었던 술은 증류주예요. 막걸리 잘 끓여서 위에 빨간 술을 떠내면, 청주가 되죠? 그럼 막걸리 한 말에서 청주 얼마 안 나오죠. 술 찌꺼기 빼면 나면, 그렇죠? 그 맑은 청주를 또 증류기에 넣고 여러분이 집에 가서 냄비에 맥주 넣고 냄비 위에 냄비뚜껑을 거꾸로 세워서, 물이 새면 안 돼요. 찬물을 부어놓으면 수증기가 올라와 녹으면서 그게 위스키가 되는 거예요. 만들 수 있어요. 쉬워요. 증류기의 원리만 아시면요. 그렇게 하면 똑똑똑 떨어지는 이슬, 참이슬, 진로. 그게 소주예요. 지금 여러분이 사먹는 술은 주정 96%에 물 탄 거예요. 증류주, 발효주가 아니에요. 그런 정유주, 발효주를 너무 좋아하니까 낮에도 관료들이 밥 먹을 때 낮술을 먹어요. 싸워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밥으로 먹을 양을 증류주, 소주로 마시면 어떻게 돼요? 고열을 짜내는 거 아니에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을 가지고 이 만한 1L짜리 소주를 만들어서 그걸 즐겨 먹는 것도 문제라고 해서 금주령을 내리는 겁니다.

혜원 신윤복이 그런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당히 포위망을 벗어나는 모습을 삐딱하게 보고 그린 거예요. 여기도 있죠? 윤복이. 여기도 있어요. 여기도 담 넘어서 보고 있죠. 양반 대갓집이에요. 아들 낳아달라고 하는 건지도 몰라도 이렇게 제대로 삼현육각(三絃六角)의 악사를 거느리고요. 이 악사의 모습을 보면, 왕실 악사일 가능성이 많아요. 왕실 악사까지 대동하고 무당을 불러서 서울의 외곽 지대에 와서 굿 당 에서 굿을 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무당도 사대문에 살았거든요. 사대문에 살 때 무당한테 세금을 받았어요. 무세. 무당 영업세를 받았어요. 그러다가 마음에 좀 안 들면 무당을 또 다 쫓아내요. 무당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이 동대문 밑에 무슨 작은 문이 있죠? 광희문 바깥이 시체를 버리는 곳이죠? 그러니까 무당들이 무세를 안내면 잡아내고 또 무당들이 사대문에서 번성을 하면, 유학자들이 또 몰아냅니다. 하지만 집에 우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무당을 불러서 물어보고요. 특히 여자 무당이 아니고 남자 박수무당. 이렇게 아들 낳아보려고 며느리가 왔는지도 몰라도 뭔가 벼슬을 위해서, 집안의 흥쇠를 위해서 굿을 하고 있는데, 궁악원까지 불러서 하고 있는 모습을 동네 총각 윤복이가 삐딱하게 보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은 거예요. 거기에 재물은 간편해요.

신윤복이 그린 그림 중에 이제 생선을 판매하는 여자와 채소하고 할머니.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떻게 보이세요? 쓸쓸해 보이죠? 안 그래요? 여기는 뭔가 꽤 장사가 될 거 같고요. 신윤복의 생각을 제가 읽어보면, 야한 젊은 생선장수가, 채소도 팔고 하는 장수가 북촌 골목을 다니면 인기가 있었을 거예요. 나이 드신 할머니는 별로 인기가 없을 거예요. 그걸 빗대서 부른 거고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라는 책에 보면, 석수어(石首魚), 조기로 국을 끓여먹고 황조개로 국을 끓여먹어요. 밴댕이는 안산 앞바다에서 나고 웅어는 사람들이 위어라고 부르고 한강 고양의 행주에서 나고 사옹원. 이 그물은 나일론 그물이 아니고 망태기 같은 그물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웅원들이 그물로 던져 잡아서 수위어, 웅어가 잡히면 말을 타고 창덕궁으로 갑니다. 그래서 주방에서 비늘을 싹 벗기고 날로 된 회를 먹습니다. 어회(魚膾)라고 합니다. 어회와 육회, 소고기 날 것을 왕들이 즐겨 먹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날 육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중국의 주나라 시대 때 예기(禮記)나 주례(周禮)에서 천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사시미 때문에 우리가 회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사시미 전에 회를 먹을 수 있다, 날로 된 생선의 어회나 육회를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계급이 높다는 거죠. 그리고 복사꽃이 필 때 복어를 즐겨요. 복어 먹고 많이 죽었어요. 독 때문에. 조선시대 때도 그랬고 6·25 이후에도 많이 죽었어요. 도미를 주로 먹기도 했어요.

기산 김준근인데요.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1880년대에 생활했던 사람이고요. 주로 이런 그림들. 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는 서양 사람들 기독교 이야기의 삽화를 그린 사람입니다. 두부 자르는 모습이라고 두부 자르는 모양 보이세요? 독일에서 수집해 와서 독일말로 했습니다. 두부 자를 때 이렇게 자르는 겁니다. 이렇게 눌러줘야지 물에 녹은 식물성 단백질이 투명하게 물에 녹아있는 것에 간수 라든지 석회나 포도당 같은 걸 넣으면, 고체가 돼요. 딱딱해져요. 수분이 남아있죠. 수분이 눌러서 거의 대응가할 때처럼 힘을 주고 있죠? 그렇죠? 돌도 올려주고요. 간수를 부었죠. 이런 모습을 그린 사람이 기산 김준근 이라는 사람입니다. 냉면 내리는 모습입니다. 일본 사람이 그린 그림하고 다르죠? 냉면 내리는 모습이고요. 그런데 ‘이게 진짜 기산 김준근 한 사람의 작품일까?’라고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이 사람의 작품은 국내에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한 100점이 있고 나머지는 다 외국에 있어요. 왜냐하면, 외국 사람들이 조선에 이런 류의 사람들이 와서 많이 사갔어요. 그래서 해외에 유사한 그림이 1,000여 점 넘게 각 박물관에 있거든요. 그런데 먹는 것뿐이 아니고 각종 연속적인 게 있는데요. 글자가 다 달라요. 비슷한 모양인데, 그림인데. 그래서 외국인들한테 조선 민속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서 판매한, 일종의 기념엽서같이 판매한 사람이고요. 여러 사람이 같이 그렸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기록화(記錄畵)라고 하는 게 있어요. 조선시대의 왕들의 생일잔치를 할 때 기록화의 그림. 의궤(儀軌)에 나온 그림이죠? 남자, 여자 구분해서 있을 때는 같이 구분하고 왕의 자리는, 왕은 그리지 않습니다. 왕이나 왕세자는 그리지 않고요. 기축진찰의궤(己丑進饌儀軌)라고 하는 것인데요. 시간관계상 넘어가고요. 술을 따르는 행사로 잔치가 일어나요. 1작, 2작, 3작, 4작, 5작, 6작, 7작 이렇게 해서 왕한테 술을 올려요. 9작이 가장 수준 높은 큰 잔치고요. 1작 올리고 술 올리고 그 다음에 술을 올리기 전에 왕세자가 아버지, 임금님 만만세 하면서 이야기하고 술 올리고 안주 올리고 해요. 이렇게 하니까 시간이 엄청 걸리는 거죠.

그 다음에 작자 미상의 조찬소라고 하는 게 있는데요. 이게 대장금 이야기는 원고를 좀 보시고요. 여기 원고에 있습니다. 대장금에 남자가 요리사예요. 그래서 이렇게 적색 구이 담당, 밥 담당, 술 담당, 떡 담당까지 다 있었습니다. 풍속화, 기록화 등을 통해서 음식을 연구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겠죠. 그렇죠? 그림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유물, 사료, 문서. 오늘 여러분, 저한테 들으셨죠? 수많은 고문서 이야기를 들으셨죠? 그림만 보고는 절대 이야기를 펼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림 자료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이게 사실일까? 아닐까? 언제 그렸을까?’라고 하는 것도 증명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류의 풍속화를 생활문화와 관련된 물질문화 연구로 이야기하면, 두 가지가 겹쳐져야 하는 거죠. 유물, 사료, 문집, 고문서와 그림 자료. 그다음에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제가 잘하는 거. 두부를 만들어 봐요. 그래야지 아까 봤던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문서를 봐도, 냉면을 만들어보고 메밀을 갈아서, 메밀은 글루텐이 없죠? 글루텐 성분이 없으면 반죽이 안 돼요. 그러면 감자 전분이나 녹두 전분이나 물을 녹인 것을 해서 반죽을 억지로 하면, 야구공만큼 단단해져요. 던지면 다쳐요. 그런데 그걸 여기에 넣고요. 밑에 쇠로 돼 있어요. 53kg 되는 사람이 열심히 눌러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 딱딱했던 돌덩이 같은 메밀 반죽 덩어리가 부드럽게 녹아서 메밀국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메밀국수는 가위가 필요하다? 안 필요하다? 필요 없어요. 여러분이 먹는 건 메밀이 거의 안 들어갔어요. 그걸 메밀이라고 하고 먹고 있으니까 가위가 필요한 거죠. 아니면 함경도처럼 메밀을 별로 안 심어서 감자 전분으로 삭히고 삭혀서 면을 만들면, 그것은 가위가 필요해요. 가늘기는 지금 함경도 냉면처럼 그렇고요. 이런 걸 그려놓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려면, 실제로 만드는 것도 공부해야 돼요.

그림을 보시더라도 사물을 보실 때 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멋있게 그리는 게 중요하지만, 사물을 잘 관찰하도록 훈련받는 겁니다. 사물을 잘 관찰하면 삶이 풍부해지겠죠. 그림도 하나를 선택하셔서 집에 부엌이나 어디에 그림 붙여놓고 1년 내내 보세요. 남편 얼굴 보는 대신, 부인 얼굴 보는 대신에. 그러면 그 그림에서 뭔가 살아서 말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제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