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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조선여성의 예술세계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도 가장 조선시대 여성하면, 여성하면 어떤 인물이 떠올라요?
조선시대 여성하면 나는 제일 이 인물이 떠오른다. 누가 있죠?
-신사임당.
-신사임당. 아주 교양 있으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우동 이렇게 이야기해요, 많은 사람들이. 어우동, 폐비 윤씨. 장희빈. 약간 그런 인물들이 많이 실제로는 사극의 주제가 많이 됐고 그렇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실제 우리 어르신은 품위 있으셔서 신사임당 이렇게 대답을 하셨는데 사실은 우리 조선시대의 여성을 삶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기록도 적고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 보니까 오히려 스캔들의 주인공이 더 기억 속에 많이 일어나요. 어우동이라든가 장록수라든가 약간 이런 좀 그런 인물. 그래서 실제적으로 학문으로나 이론적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 또 상대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유교 국가에서 여성은 정말 나중에 확립된 개념이지만 삼종지도 (三從之道)라고 해서 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올인해라. 이런 시대적인 어떤 제약 때문에 여성이 활동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적었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나름대로 자신의 이름을 날린 인물. 바로 허난설헌하고 신사임당.

또 왜 이렇게 여성들은 이름이 네 글자야. 이렇게 또 생각하시는 분. 이거는 호죠, 그렇죠? 원래 이름은 허초희고 이제 난설헌은 호입니다. 당호(堂號)라고도 해요, 당호. 그래서 여성들은 자기가 거처하는 그런 공간에다가 이제 자신이 지향하는 그런 것을 이름에 담습니다. 난설헌 같은 경우도 난은 난초고 설은 눈이죠. 거기에 더해진 이미지가 난초처럼 맑고 깨끗하고 눈처럼 희고 곱고, 약간 이런 개념. 난은 난초와 눈을 좋아하는 곳에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설헌. 우리 헌(軒)이라는 곳이 집을 뜻하는 그런 경우 무슨 무슨 헌. 그래서 이것도 오죽헌이잖아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집 당(堂) 자를 씁니다. 그래서 사임당도 사임당이 되는 거고. 그래서 예전에 여성들을 호칭할 때는 그런 당호를 많이 붙였다. 여기 어르신들 많이 기억하실 거예요. 그러다가 한때 우리 보면 한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집안의 어르신, 할머님을 부를 때도 이때는 택호라고 기억하세요? 택호(宅號)라고 해서 그분 출신을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죠? 죽산 출신이면 죽산댁, 백산이면 백산댁. 이런 식으로 또 우리가 호칭을.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요즘 세상은 당당하게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그래도 많이. 그런데 지금도 조금은 여성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뭐라고 하죠? 누구 엄마. 이런 걸로 지금 또 많이. 이게 보면 아이가 특히 학교 다닐 때는 주로 이제 자기 아이 이름으로 누구 엄마 이런 식으로 많이 불리죠. 그러다가 아이가 다행히 분가를 하거나 이러면 다시 본인의 이름을 되찾는. 이런 것도 우리가 흐름으로 보면 그런 사연들이 있다.

먼저 이 허난설헌에 대한 삶과 평가를 하면 일단 사실은 되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는데 생몰년(生歿年)은 1563년부터 1589년. 우리 나이로 27살. 정말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한창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본관은 양천 허씨고 그 다음에 아명(兒名)이 초희였어요, 초희. 초희도 이름 예쁘죠? 허초희. 그리고 이제 자(字)가 경번이라는 자를 가졌는데 여기서 보면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예부터 전해지는 여자 신선 번부인 이라고 있었다고 해요. 이 번부인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본인의 이름이 있고 또 편하게 부르는 이름을 우리가 자라고 해요. 그리고 대부분 우리 학자 같은 경우는 호가 있어서 또 그 사람의 호를 써요, 그래서 대표적으로 우리 율곡 이이 선생 같은 경우는 자는 숙헌이라고 해요, 숙헌. 호는 유명한 호 있죠? 율곡 이이가 되는 거고. 그 다음에 돌아가신 후에 붙이는 호칭, 시호(諡號)라고 그러고. 그래서 왜 이렇게 이름이 뭐가 이렇게 많냐, 조선시대에는. 자를 두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 지금도 약간 그렇지만 선생이라든가 이런 사람들 이름을 잘 못 부르죠. 우리가 보면 저 보고도 제자들이 신병주 이렇게는 잘 못 부른다는 말이죠. 그랬을 때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극복하기 위해서 호를 붙였죠. 호는 존중의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퇴계 선생, 율곡 선생.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호를 부르고 자는 주로 그러면 어떤 때 사용하냐. 왜 또 하필 자가 있냐. 자는 주로 동년배들끼리. 약간 친구끼리 할 때도 그때도 약간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이름 막 부르는 게 부담되니까 숙헌 이런 식으로.

우리도 가끔씩 지금 보면 요즘도 보면 그런 식으로 호를 하나씩 지어서 옛 전통을 이어서 부르는 그런 대학사회에서도 우리 교수들 보면 특히 역사라든가 철학 전공하시는 분들은 그런 분이 많아요. 창성 그 다음에 난옥 이러면서 자기들까지 그렇게 부르는. 그래서 저도 우리 팀 같은 거 세미나 팀 같은 거 있으면 이럴 때 되게 약간 소외감 느껴요. 자기 이름 안 부르고 예를 들어 단국대 김무식 교수 자가 호가 창성인가 그래요. 창성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우란 그러고 자기들끼리 이러니까 나도 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느낌을 가지는데 저는 아직 없습니다. 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그렇다. 그리고 또 자기의 호. 여성 난설헌 아까 말씀드린 난초와 눈이 있는 집. 뭔가 살고 싶죠, 난초와 눈이 있는 집. 그래서 난설은 여성의 미덕을 찬미하는 그런 옛날부터도 이미지가 난초, 눈 당연히 고결한 그런 이미지를 품고 있었던 그런 이름이었다. 그래서 허난설헌의 부친이 정말 빵빵한 사람이에요. 누구냐 하면 허엽이라고 해서 화담 서경덕 선생 아세요? 우리 개성을 근거로 했던 황진이하고 스캔들로 유명했던. 그런데 실제로는 서경덕의 기상을 높이는. 황진이와 같은 그 당시의 최고의 기생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그런 화담 서경덕 선생의 제자였어요, 제자였고. 그리고 이제 우리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소위 말하는 최초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눠질 때 동인의 영수(領袖)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게 정말 처음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눌 때 여기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요. 처음에는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총무처, 국가안전행정부 인사팀 여기에 요직을 누구로 둘 것인가를 둘러싸고 김효원이라는 사람하고 심의겸이 대립을 했는데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건청동, 여기에 있다 해서 동쪽에 있다 해서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에 있다 해서 서인 이렇게. 그래서 우리 그 당파의 영수의 동네 이름으로 붙이는 거 이거 정도 뿌리 깊죠. YS 상도동 사니까 상도동계, DJ 동교동 사니까 동교동계. JP 청구동 사시니까 청구동계. 이런 식으로 동네 이름 붙여서 당파를 구분하는 거는 그 전통이 뿌리가 깊다. 그렇게 견해가 동인, 서인으로 나눠지면서 그때 학문적으로는 동인 중에 제일 학문적인 명망(名望)이 높았던 사람이 바로 이 허엽이라는 인물이에요. 허난설헌의 아버지. 그리고 서인 쪽에서는 박순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또 서인 쪽에. 이게 흥미로운 게 같은 화담 선생의 제자였지만 당은 달랐다는 거죠. 동인, 한 명은 서인의 영수.

그리고 이제 부인은 강릉 김씨. 이 허엽이라는 인물도 강릉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관직 생활할 때는 개성하고 서울에서 주로 살았지만 바로 고향인 처가가 있는 강릉에서도 기반을 가졌기 때문에 강릉에서 생활을 했고 그때 낳은 자식이 허균, 허난설헌. 바로 이 남매를 낳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가면 강릉에 가시면 허균, 허난설헌 생가라는 생가 터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10월 8일 답사 가실 때도 여기를 할 겁니다, 갈 거고. 여기서 또 유명한 음식 하나 있죠, 뭐죠? 초당두부. 바로 허엽이라는 사람의 호가 초당이에요. 그래서 이 집안에서 허엽이 살 때부터 두부를 잘 빚었는지 이 집안에서 유래한 게 바로 초당두부 이렇게 되는 거죠. 허엽에 대한 평가인데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과 조행(操行)에 볼 만한 점이 있었다. 처음에 경덕을 따라 배우던 자가 많았으나 경덕이 죽자 모두들 배반을 하고 떠났는데 오직 허엽과 박순만이 변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허엽은 동인의 영수, 박순은 결과적으로 서인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담의 제자를 말할 때는 이 두 사람으로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학문적으로 아주 명망이 있었고 또 정치적으로도 한 당파의 영수가 될 만큼 이름이 있었던 인물이 바로 허엽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처가가 강릉에 있었고 현재에도 허엽의 호를 따서 초당 마을. 그래서 우리도 초당두부 지금도 많이 있고. 아마 이것 답사를 가면 여기서 밥을 먹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초당 마을. 지금도 두부로 유명한 그런 동네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은 한씨였는데 한씨와의 사이에서는 두 딸과 아들 허성이라는 사람을 두었어요. 그래서 큰오빠 허성과 허난설헌은 15살 차이였고. 그런데 이 허성이라는 인물도 상당히 유명한 학자였어요. 우리가 보면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해요. 우리도 저쪽의 최고 권력자가 바뀌었으니까 동태를 알아보러 조선통신사를 파견했어요. 이때 파견된 대표 3명 중에 정사(正使) 황윤길, 부사(府使) 김성일 그리고 서장관(書狀官)에 이 허성이라는 사람이 사실 갔어요. 허성이 상대적으로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그때 황윤길이라는 인물이 분명히 조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들어온다고 이야기했고 김성일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기억하세요? 그래서 김성일이 욕바가지로 얻어먹어요. 그런데 허성도 쳐들어올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3명 대표로 치면 2:1이거든요. 그런데 결국 선조는 김성일의 입장을 지지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왕이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신하들은 침략의 우려를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그게 좀 불리하니까 거의 김성일에게 그냥 뒤집어씌운 측면도 있어요. 쟤가 잘못 보고 그랬다. 그때 따라갔던 사람 허성, 이거 기억해두시고요. 그리고 허성하고는 이복형제가 되는데 결과적으로.

둘째 부인인 강릉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허봉. 허봉도 문장가로 유명했고요. 그 다음에 이제 그 허봉 그 사이에 있는 인물이 허난설헌, 허균의 누나입니다, 누나. 그리고 허균. 그 유명한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 허균 하면 우리가 뭔가 가지는 이미지 같은 게 있는데 바로 이 허균. 그래서 이 둘째오빠 허봉과는 12살의 차이였고 허난설헌이.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6살 어린 동생. 그래서 우리도 그렇지만 지금도 약간 그래도 워낙 이쪽은 이 오빠들은 너무 나이가 많고 하니까 이쪽보다는 동생인 허균하고 이 누나가 되게 친밀했다. 그리고 실제 어린 시절부터 그 당시에 이달이라는 스승에게 학문과 시를 배웁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여기 사실 보면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났어요. 허엽과 네 자녀를 지칭해서 '허씨 5문장'가다 이런 말을 한 거예요. 허엽부터 시작해서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이상하게 조선시대에도 그렇고 옛날부터 허 씨들은 특히 양천 허씨 들은 이름에 외자를 씁니다, 외자. 그렇지 않아요? 외자 쓰는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서 우리 동의보감 쓴 허준. 그리고 지금 농구감독하고 있는 허재. 전부 보면. 그리고 지금 MC로 유명한 허참까지도 전부 다 허씨는 한 글자 아니에요? 허씨는 왜 이렇게. 그래서 이런 견해도 있어요. 허씨가 옛날에 양천 허씨부터 시작해서 예전에 김해 허씨도 약간 그런 전통이 있는데 예전에 이거는 이제 확실하게 일부 견해예요. 허씨가 이름이 두 글자가 돼버리면 휘하기가 힘들다는 거죠, 우리가 보기에는. 이름 자 같은 거 할 때 이게 선택의 폭이 두 글자가 돼버리면. 그래서 이름을 휘하지 못하도록 한 글자로 만들었다. 이런 견해도 있는데 허준 이런 이름. 그러니까 허균의 형제들도 보면 우리 조선후기에도 보면 대표적인 정치가로 윤유하고 남인(南人)의 송시열하고 맞섰던 대표적인 정계 아세요? 허목이라는 사람이 있고요. 허적이라는 사람도 있고. 전부 다 허씨들은 이름... 보통 세 글자로 이름 좀 유명한 인물 당장 떠오르는 사람 허구연 해설위원 정도? 이 정도 약간 떠오르고 대부분 한 글자가 많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이제 그쪽에서 했으니까 허난설헌은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특히 둘째오빠 허봉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의 문학적. 이게 되게 중요한데 서얼(庶孼) 출신의 스승 이달에게서 본격적으로 시를 배우면서 그 재능을. 이달이 그 당시에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해서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중국의 당나라의 시를 잘 모방을 해서 시를 썼던 그런 학자라고 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호가 손곡인데 손곡 이달은 서얼이에요, 서얼. 그래서 이 서얼 출신 학자였지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보면 그 당시에 허난설헌과 바로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이런 사람한테도 공부를 배우게 했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가 뭔가 개방적인 사람이야. 그렇잖아요, 옛날 같으면 신분 미천하고 그러면 그 사람한테 배우는... 소위 말하면 신분보다는 실력을 높이 산 거예요. 약간 이런 캐릭터 있죠. 우리 대표적으로 얼마 전에 드라마가 끝났던 장영실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이 장영실과 같은 신분이 미천했지만 끌어내서 과학자, 최고의 과학자 만들고. 그래서 이거 보면 그러면 그 뿌리가 사실 어디로까지 거슬러 올라 가냐 하면 허엽의 스승인 서경덕이라는 인물이 상당히 개방성이 많았던 인물이에요. 그래서 서경덕이 여러 제자들을 키웠는데 그래서 서경덕의 문하(門下)에 황진이도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경덕과 황진이의 스캔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결과적으로는 그거는 서경덕이라는 인물이 그만큼 기생에게도 어느 정도 능력 있는 기생에게는 문호(門戶)를 개방했던 그런 전통이 이어져서 바로 허엽이라는 인물도 자식들도 실력만 되면 되지. 우리도 약간 그런 사람 있잖아요. 저 사람한테 배우면 된다. 그래서 이 이달에게 공부를 배웠고 이것이 상당히 이들이 시에 재능을 발휘하는데 큰 영향이 돼요. 그래서 이게 나중에 허균도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을 서얼로 설정한 게 이거는 바로 스승을 염두에 둔 거다. 자기 스승처럼 서얼이지만 능력 있는 사람이 제대로 뭔가 신분제 사회에 막혀서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서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라는 서얼을 주인공으로 설정을 했다 이런 해석을 한다는 거죠.

허난설헌은 8살 때 이 시를 짓고. 여기 보면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이 시가 되게 허난설헌의 시제(詩題)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하는데 8살 때 이 시를 짓고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요. 신선 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 받아. 우리가 이렇게 궁궐 같은 거라든가 이런 데서 건물이 완성이 되면 여기에 상량문(上樑文)이라고 해서 기둥을 올리는 글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기에 요즘으로 치면 완성된 것을 완공 기념글 이런 뜻이에요. 상량문을 8살의 어린 나이에 이걸 지으면서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 이 시제를 발휘하면서 이달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뭔가 이렇게 재능을 꽃피우는. 그래서 여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허난설헌이 이렇게 시제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집안의 영향. 특히 아버지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거. 우리 나중에 신사임당 이야기하겠지만 신사임당 같은 경우도 아버지도 어느 정도 개방적이었지만 특히 신사임당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러니까 이런 재주를 이렇게 요즘으로 치면 여자가 바느질이나 잘하고 빨래 잘하고 밥 잘하면 되지. 이런 콘셉트가 아니라 상당히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주는 그런 집안의 분위기도 두 여성에게 공통점이에요.

사실은 이게 신사임당하고 허난설헌도 보면 그 시절로 치면 되게 개성이 강한 사람이에요. 약간 센 여성이에요. 특히 두 사람의 공통점이 남편하고는 사이가 안 좋아요. 본인은 허난설헌도 만만치 않은 여성인 것도 맞고 남편 김성립도 조금 무능했던 그런 인물이었어요. 자가 여견 또는 여현이라고 하고 호가 서당인데 15세 때 허난설헌과 혼인을 했어요. 한 살이 더 많은 인물이었고. 보통 조선시대 혼인할 때 10대 초반에 합니다, 10대 초반. 특히 왕실 같은 경우는 더 빨리해요. 왕실 같은 경우는 대표적으로 우리 사도세자하고 혜경궁 홍씨가 혼인할 때는 나이가 10살이었어요, 10살. 우리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이잖아요. 그리고 지금 드라마 주인공인 박보검은 11살 때 한 살 연상인 신정왕후하고 혼인을 해요. 그런데 지금 드라마에서는 결혼 아직 안 하고 있죠, 그렇죠? 저거 보면 생긴 것만 보면 이미 견적이 한 20대 이상인데 지금 벌써 결혼했어야 하는데 드라마를 뭔가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제가 그래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에는 지금 홍 내관이라는 인물이 홍경래의 딸로 설정이 돼 있습니다. 바로 19세기 세도정책의 문제점을 두고 이걸 폭발한 발원이 홍경래예요. 그리고 이 홍경래의 난하고 또 연관검색어가 누구냐면 김삿갓이죠. 왜냐하면 김삿갓의 할아버지가 홍경래 난 때 지방 요즘으로 치면 군수. 바로 투항해서 욕바가지로 얻어먹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김삿갓이 시험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 시험 문제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거예요. 그런데 김삿갓은 자기 할아버지인 줄 모르고 진짜 문제 많다고 쫙 답안지를 써내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너무 조상에게도 미안하고 내가 이거 몰랐다. 그래서 삿갓을 쓰고. 그래서 이 드라마에 김병연이라는 인물이 또 등장합니다. 그래서 보면 저도 이런 거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드라마 작가들 진짜 머리 좋다. 그런데 그런 것도 우리가 유의해서 봤을 때 역사적 사실하고 드라마의 상황하고 많이 다르다는 걸 잘 고려를 해야 해요. 허난설헌 같은 경우는 드라마 같은 데도 할 만한데 왜 허난설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잘 못하느냐면 일단 너무 빨리 돌아가셨어요. 27살밖에 안 되니까 이게 뭐 할 게 없잖아요. 이렇게 쭉 하다보면 돌아가시니까. 그래서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인물들은 오래 사시거나 또 갈등 관계가 뭐가 많아야 해요, 되게. 그래서 아마 이 신사임당 드라마는 어떻게 엮을지 모르겠는데 뭔가 신사임당 제가 판단했을 때 약간 시대에 맞서서 저항도 하고 예술가. 그리고 이렇게 약간 그림 초충도(草蟲圖) 이런 게 그림 그리면 일단 화면에 뭔가 화면발은 나잖아요. 이영애 씨가 얼마나 잘 그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런 요소들이 갖추어져야 해요.

그래서 이 김성립은 안동 김씨 집안이고 5대가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도 당색(黨色)으로는 남인에 속하는 그런 집안이었고. 그러면 왜 이 두 사람이 혼인 했냐 라는 것에 추정을 해볼 때 아까 오빠인 허봉하고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사가독서(賜暇讀書) 동기라고 했어요. 사가독서가 뭔지 아세요? 사가독서가 임금이 하사하는 휴가라는 뜻이에요. 사 자가 하사할 사(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표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사약을 받아라 하면 사약이 죽을 사 자. 먹으면 다 죽으니까 죽을 사 자라고 알고 있는데 하사할 사 자예요. 임금이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 너를 죽일 수밖에 없지만 이걸 은혜로 생각해라. 약간 이런 개념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사약 받으면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내가 그래도 인정받았구나.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게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속편했을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 하사하는 휴가라는 뜻이고 이 사가독서를 한 현장이 어디냐면 지금 우리 동호대교라고 아시죠? 그래서 사실은 이 독서당을 호당이라고 칭했고, 동쪽에 이것은 독서당이라는 뜻으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그 흔적을 살려서 한강다리 이름 정할 때도 이 지역이 동호 지역이다 해서 그래서 다리 이름이 동호대교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마 조금 공부 열심히 하신 분들은 율곡 이이 선생이 저술한 책 중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는 책 혹시 기억하세요? 동호문답이라는 책이 동호독서당에서 사가 독서했을 때 쓴 책이에요. 그런데 이분이 티를 냈죠. 보통은 사가독서하게 되면 임금이 하사하는 휴가니까 주로 배 타고 어디 놀러 가냐 하면 압구정으로 가요. 지금도 보면 옥수역에서 쭉 보면 압구정역 나오잖아요, 3호선 지하철. 그런데 그 독서당 생활을 하는 그 생활 속에서 율곡 이이 선생님은 정말 범생이 답게 과거에 9번 장원급제 했잖아요. 범생이 답게 거기서도 책을 쓴 거예요. 친구들이 우리 배 타고 놀러가자 그럴 때 거기서 그냥 나는 안 갈래 이러면서 쓴 책이 동호문답이고 독서당 생활 끝나고 선조에게 그 동호문답이라는 책을 바쳤어요. 그러니까 선조는 칭찬하죠. 정말 당신은 이렇게 항상 나라를 걱정하면서 그 휴가를 줘도 이렇게 책까지 써서 당신 정말 대단한 학자다. 이렇게 이제 선조의 칭찬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주변에 있는 동료들은 어우, 쟤 또 저런다 막 이렇게 했을 책이 동호문답이라는 책이에요. 사가독서하면 당연히 지금으로 치면 약간 연수원 생활 같이하는 동기들이에요. 그러다 보면 우리 누이 있는데 너 괜찮네, 너 한번 만나 볼래? 결혼할래? 이런 이야기 지금도 오갈 수 있잖아요. 바로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됐는데 이 오빠가 별로 책임을 못 지는 그런 남자를 소개시켜준 거죠. 그래서 허난설헌과 불화했던 일화들이 여러 기록에 많이 전하는데 특히 동생 허균이 쓴 ‘학산초담(鶴山樵談)’에 보면 살아서는 부부 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를 받들 자식이 없었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있다. 허균도 되게 안타까워했던 것 같아요. 보면 아주 나쁜 평가죠, 부부 금슬이. 그리고 거기서 불화를 가지고 그래서 그런지 자식도 없었고. 그래서 이 불행한 가정생활을 보면 시어머니하고도 불화했고 남편하고도 사이가 안 좋고 학대를 받았고 질시를 받았고. 그래서 슬하에 두었던 남매를 모두 잃고 임신 중에 아이까지. 정말 한 여인으로서는 매우 불우한 생활을 보냈던 여인이 바로 이 허난설헌입니다. 결국은 이제 31세에 요절을 하게 되고 난설헌이 죽고 난 후 그는 후처로 남양 홍씨를. 또 보면 김성립이 되게 책임감 없는 게 바로 후처 맞이해버려요. 그래서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때 이제 김성립이라는 인물도 사망을 해서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렀다. 김성립도 후처를 맞이했지만 금방 난설헌의 뒤를 이어 사망을 했다는 거죠.

이렇게 보면 어릴 때는 그래도 명문가의 집안에서 오빠들의 후원을 받고 또 뛰어난 스승에게 시제를 배우면서 탄탄대로의 길을 들어섰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상당히 남편과도 불화하고 시댁에도 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뇌 속에서 많은 시들이 탄생을 합니다. 그래서 이 허난설헌의 시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가 꿈입니다, 꿈. 이것도 또 우리가 그러잖아요. I have a dream이라는 ABBA 노래도 있고 그런데 뭔가 우리도 잘 안 될 때 꿈을 꾸잖아요. 나는 저렇게 되고 싶어 하는. 그래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여자라는 이유로 뜻을 펼 수 없었던 그런 세상에서 뭔가 꿈의 세계를 그리워하다 27살, 남편은 31살에 사망했고. 그리고 또 이게 주목되는 게 허난설헌, 우리 조선시대 여성 중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집을 가진 최초의 여성입니다. 난설헌 시집도 중국의 명나라에서 평가 받았다고 하니까 이후에 조선에서도 유명해지는 바로 그런 시집이 됐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집을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었고 한 번 배워 익힌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을 만큼 총명했다는 그런 기록. 그러다 보니까 시를 쓰려면 기억력도 되게 좋아야 해요. 기억력, 감수성, 문장력 다 이런 건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00편이 넘는 시를 지은 천재라는 평을 받았고 중국에서 먼저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래서 이거 보면 대단한 다작가이기도 하잖아요. 대략 27살에 요절했는데 5살, 아까 8살에 유명한 시를 남겼고 한 8살부터 27살. 한 20년 동안 1,000여 편 넘으려면 한 해에 최소 50편 이상. 물론 시는 소설보다는 쉽지만 그래도 심혈을 기울여서 쓰는 시, 이거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당히 다작을 했고 숨겨졌던 그녀의 재능이 이제 발휘된 거죠. 그래서 보면 그러면 허난설헌이 왜 이렇게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가 남편이나 시댁의 지원을 받지 못한 점도 있었고 또 동생 허균이 1618년에 우리 허균 하면 어떤 허균의 최후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허균이 역모 죄를 했다는 것으로 혐의를 받아서 결국 역모 죄로 처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 허균에 대해서는 아마 저도 조선시대 인물 연구하지만 우리 역사 속 인물 중에 최악의 평가를 받는 인물 중에 한 명이 허균이에요. 허균이 왜 그러면 그런 최악을 평가를 받느냐면 성리학 중심 사회에서 너무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성리학 이외에 불교라든가 도교에도 관심이 많고 심지어 중국 갔다 올 때는 천주교 서적까지 가지고 오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삶 자체가 엄청나게 자유분방해요. 특히 스캔들이 너무 많은 사람이에요, 기생들하고. 그래서 허균은 나중에 공격당할 때 상중(喪中)에도 기생을 끼고 놀았다. 이게 이제 사람들 입장에서는 모두가 허균은 약간 싫어하는 그런 캐릭터가 돼버린 거예요. 그러면 허균이 어떻게 해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느냐면 허균의 글방 동문이 이이첨이라는 인물인데 그 당시 광해군 정권의 실세예요. 그래서 이 허균이라는 인물이 상당히 정치적으로 성장을 할 수 있었고 도승지(都承旨) 형조판서(刑曹判書)까지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자유분방하니까 개혁 성향은 분명히 있었던 사람이에요. 뭔가 이 세상을 바꾸고 홍길동전에도 그런 게 나오잖아요. 홍길동이 서얼이 잘못된 부정부패한 그런 사회를 한번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그런 건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너무 과격하고 너무 막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러니까 다 적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허균이 역모 죄로 처형을 당할 무렵에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완전히 어떤 면에서 보면 개성으로 똘똘 뭉쳤던 그런 인물이에요. 그래서 이 허균이 그렇게 또 허난설헌의 시집을 명나라에 유포했는데 이게 허균이라는 인물 때문에 누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가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 허난설헌의 시에 대한 여러 평가의 기록을 보면 심수경이라는 인물이 쓴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면 부인 가운데 글 잘하는 사람이 옛날에는 조대가, 반희, 설도 등 다 적기 어려울 정도로 중국에서는 이게 나와요. 기이한 일이 아니나 우리나라에서는 참 드물다. 우리도 보면 아마 여기 기억하시는 분들 우리나라의 여류 시인? 거의 없죠. 신라에도 없고 고려시대에도 없고 조선시대에도 겨우 생각나는 사람이 허난설헌 정도밖에 없는 거예요. 그거는 바로 그런 문화가 이제 조선시대의 어떤 유교 문화 속에서 여성들의 활동 같은 게 제약되는 그런 시대상이 나오죠. 문사(文士) 김성립의 처 허씨는 곧 재상 허엽의 딸이며 허봉과 균의 여형제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있거니와, 그 누이 허씨는 더 뛰어났다. 대단한 시인이었다. 호는 경번당이며 문집이 있었지만 세상에 간행되지 못했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외워서 전하였고. 그때도 이미 이런 시가 유명해서 우리도 보면 유명한 시 한두 시 정도는 외우고 다니잖아요. 보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그리고 김소월의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런 거 외우잖아요. 유명한 시는 구전돼서 전해옵니다. 시 또한 절묘한데 일찍 죽었으니 슬픈 일이다. 문사 조원의 첩 이씨와 재상 정철의 첩 유씨 또한. 이런 사람도 있기는 있었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이나. 여기도 나오죠. 밥이나 하고 술상차림 같은 거 하면 되는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이 사람은 허난설헌은 변호를 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시대의 대세는 이게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라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허봉이 쓴 글에는 경번의 글재주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대체로 이태백과 이장길. 이태백까지 비교를 하고 있죠. 이태백은 우리 대표적으로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시선(詩仙)이라고 하죠, 이태백은. 그리고 중국의 시성(诗圣). 시의 성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두보. 그래서 중국에서는 가장 시의 쌍벽은 이태백 하고 두보예요. 그런데 이 차이점은 이태백은 약간 감정이 있는 그런 시를 많이 썼다면 두보는 현실 참여시를 많이 썼어요. 그 당시의 어떤 중국의 당나라가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릴 때 전쟁에 피폐해진 그런 사람들의 삶 같은 걸 많이 쓴 시가 바로 두보 시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 하곡은 허봉이에요, 허봉. 허봉이 갑산에 유배되는 것을 전송하며 라는 바로 그런 시예요. 그래서 갑산으로 귀향을 간 오빠를 전송하며 지은 시인데 머리 귀양 가는 갑산의 나그네 함경도 가시느라 행색도 바쁘시네. 오라버니야 가태부와 같다고 하지만 임금은 어찌 초나라 회왕이리오. 한강물 가을 속으로. 이거는 추나라 회왕은 이제 항우에 의해서 결국 쫓겨난 그런 왕이에요. 상당히 역사도 허난설헌이 알았다는 걸 보여주죠. 한강물 가을 속으로 찬찬히 흐르고 변방의 구름에 석영이 물드네. 서릿바람 불어와 기러기 날아가니 중간이 끊겨 갈 길을 완성하지 못하네 하는 이런 귀향을 가는 오빠를 전송하며 지은 시에도 역사를 이야기하고 이런 자연도 적절하게 조화시킨 그런 시를 지었죠. 허균은 누이의 시 '보허사(步虛詞)'와 '유선사(遊仙詞)'는 작은형과 손곡까지도 흉내 내어 지었지만, 모두들 누이의 울타리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 허난설헌의 시를 딴 사람들이 비슷하게 쓰고 했지만 그거를 벗어나지 못했다. 누이는 참으로 하늘에서 내린 선녀의 글재주를 지녔다. 허균이 정말 누이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인물 중에 한 명이었어요.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난설헌과 그의 남편 김성립의 금실이 좋지 않았다고 전제한 후, 허난설헌의 시 두 편을 소개했는데 그 뜻이 방탕하다 할 정도이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 이게 약간 요즘으로 치면 깎아내린 거죠. 그래서 이때 보면 그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허난설헌의 시를 오히려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었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갈수록 이게 허난설헌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보는 그런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런 시가 그렇다는 거예요. 제비는 처마에 비끼어 쌍쌍이 날고 지는 꽃 어지러이 비단 옷에 스치네. 방에서 기다리는 이 봄 마음 슬픈데 풀은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 돌아오지 않네 하면서 뭔가 좀 제비의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그런 시고. 이 남편 김성립이 한강변 서재에서 공부한다고 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기생들과 어울려 노느라 글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이 상황을 약간 비꼰 거예요. 봄풀은 푸르러도 소식이 없는 그런 님을 생각하며 읊은 이 시는 이수광과 같은 그런 학자들에게는 이게 이제 소위 남편을 떠받들며 살았던 그 시대에 괜히 남편 기생하고 어울린다고 남편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고 해서 오히려 허난설헌에 대해서 좀 비판하는 그런 시각을 보였다는 거예요.

신흠이라는 학자는 17세기 학자인데요. ‘난설헌집(蘭雪軒集)’에 고인의 글이 절반 이상이나 전편으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그의 아우 균이 세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시들을 이런 의혹까지. 표절 투입시켜 그 이름을 퍼뜨렸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시를 퍼뜨릴 때 허난설헌의 시가 아닌 걸 집어넣어놔. 우리도 가끔씩 문단에 표절시비 있죠. 그것까지 이렇게 제기를 한 장면이고요. 우리 박지원 잘 아시죠? 연암 박지원의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허난설헌을 소개하는 글에서 규중 부인이 시를 읊는다는 것 자체가 아름답지 않다. 이때도 비판이 들어간 거예요. 이름이 잘못 중국에 알려지기도 했는데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 말 속에는 여성이 주제넘게 시를 써서 세상 밖으로. 조선후기에 와서도 대부분은 허난설헌을 많이 비판을 하고 있다. 우리 대표적으로 이렇게 정말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조차도 허난설헌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었다는 거죠. 오히려 중국에서는 대형 시집에 지속적으로 난설헌의 시가 수록되었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난설헌집'은 허균이 공주 목사로 있으면서 난설헌 사후 20년 만에야 간신히 세상에 나오고 그녀의 사후 100년이 넘은 시기인 1692년에 와서야 두 번째 시집이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오히려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았다. 난설헌의 시는 중국 문단에서 끊임없는 찬사와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폄하와 표절시비가 그치지 않았고 사대부가 여성의 글쓰기 자체에 대한 우려와 비판도. 오히려 이런 모델을 자꾸 이렇게 높이 평가하면 안 된다고. 여성들은 그냥 살림이나 하고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갔다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점은 당대뿐만 아니라 최근의 연구에서도 정말 그 당대에도 표절시비가 있었는데 지금도 허난설헌에 대해서는 표절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고. 그러나 어쨌든 분명히 시제는 뛰어난 것은 분명한데 허균이 그거를 좀 더 과장했다 이런 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거죠.

그러나 이제 크게 본다면 우리 문학사에서 여성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정말 소략(疏略)한 데에 비추어보면 정말 이런 인물이 배출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고 이것도 크게 보면 우리가 답사를 가는 강릉이라는 공간도 그거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유교 문화라든가 이런 거에서 더 덜 구속적일 수 있다는 거죠. 옛날부터 사실 강릉은 약간 독립된 그런 성격이 있었어요, 예전에 우리 신라시대부터도 그런 게 아마 작용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분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그녀가 남긴 200여 수의 한시는 여성 작가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세련미가 넘치는 것으로 앞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더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래서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함께하는 강릉의 역사와 문학. 그리고 이제 강릉은 앞으로도 이런 인물들을 부각시켜서 우리 여성들의 삶과 문학을 잘 조명하는 코스. 그래서 이번 답사에서도 경포 주변을 이렇게 한 1시간 정도 트래킹 하는 걷는 코스를 만들어놨어요. 그러면 우리가 분명히 그 길도 신사임당이든 허난설헌도 그 주변을 분명히 걸어갔을 거라는 거. 그러면 느낌이 다를 거라는 거죠.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이 시와 그림을 구상하면서 걸어갔던 그 길을 우리도 아주 날씨 좋은 가을날에 쭉 가면 아마 분위기고 좋지 않을까.

그래서 이 신사임당의 생애, 또 효녀로서의 신사임당, 어머니 신사임당. 율곡의 어머니, 또 이원수의 아내로서의 신사임당.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 그리고 나중에 결국은 율곡의 어머니,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탁 씌워진 그런 신사임당. 그리고 관련 유적지 이런 순서로 한번 보겠는데요. 신사임당의 초상화도 후대에 그린 거예요. 최근에 그린 거고 이거 그 당시 모습은 아니다, 율곡 이이 선생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지금 지폐에 나오는 인물 중에 원래의 얼굴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세종대왕, 퇴계 이황 다 후대에 그려진 거예요. 그러면 진짜 조선시대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왕의 어진(御眞)은 지금 다섯 분이 현존합니다. 태조 이성계, 영조, 철종, 고종황제, 순종황제. 그리고 조선시대 원래 진짜 얼굴 보실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이항복,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런 사람들은 왜 이게 원래 초상화냐? 그때도 공신으로 책봉(冊封)되면 공신화상(功臣畵像)이라고 해서 요즘으로 치면 화원(畵圓)들이 가서 우리 지금도 청와대 같은 데 가면 사진 찍어놓듯이 그때 화원들이 공신화상을 그려놔요. 그런 경우 바로 후손들에게 잘 이어지면 이게 소위 말하는 진품이에요. 그래서 오성으로 유명한 이항복. 이항복 초상화 기억하세요? 보면 딱 얼굴도 약간 개구쟁이처럼 생겼죠? 눈 좀 착 찢어지고. 그래서 그 초상화 이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면 멋있는 그려진 것보다 약간 이상하게 그려진 그림이 진품일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이 진품이 훨씬 더. 왜 그러느냐면 그때는 진짜 민낯을 그리니까. 우리 지금 지폐에 있고 이런 사람들은 다 세종대왕도 그렇고 미남 이렇게 그리잖아요. 그런데 그때 당대로 그릴 때는 지금 아마 태조 이성계도 그렇고, 영조 어진 보신 분들이나 보면 아주 미남 이런 스타일 아니에요, 상당히 날카롭고. 그런데 그때는 정말 어진이라고 해서 참 진 자를 써요. 왕의 진짜 얼굴. 정신까지도 옮긴다 이런 뜻으로 터럭 한 올 이런 거 다 그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정확한 게 제일 생명이지 지금처럼 포토샵은 절대 허용이 안 된다. 지금은 약간 포토샵 하잖아요. 우리도 약간 사진 같은 거 찍으면 보정하고 이렇게 해서 훨씬 제 얼굴처럼. 그래서 그런 특징이 있다. 사임당도 후대의 사임당의 모습. 그래서 이거 가지고도 여러 논란이 사실 있어요. 머리가 진짜 이렇게 됐느냐 부터 시작해서. 그건 사실 정확하게 다 해석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어요.

1504년 출생입니다. 연산군 10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 지금 오죽헌이 있는 북평촌에서. 아버지가 신명화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도 참 이 부인 특히 어머니 이씨가 되게 구박 많이 받았을 거예요. 딸만 5명. 정말 조선시대에 참 힘든 그런 경우죠. 그래서 안견의 화풍을 받아 어릴 때부터 7살 때부터 산수화, 초충도를 그리기 시작했고 1522년 19세 때 3살 연상인 이원수. 이름이 기억하기 좋죠? 결혼했고 11월 초7일에 자신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아버지 신명화가 돌아가시고요. 이때 1524년 21살 때 한성으로, 이제 서울로 시집가서 시어머니 홍씨 부인께 신혼례를 드리러 갔고 한성에서 맏아들 선을 낳았고. 그리고 이제 처음에는 우리가 보면 조선시대에 처가살이도 하지만 또 남편이 관직 생활을 하면 관직 따라가기도 해요. 왔다 갔다 해요, 사실은. 강릉에서도 있었다가 서울에서도 있었다가. 그래서 1529년 맏딸 매창. 그리고 율곡 이이가 셋째아들입니다. 1536년생이고 그리고 이때 또 중간에 강릉에 오셨다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수진방에서 지금 현재 청진동이고요. 지금 청진동 인사동 거리 이렇게 가시다 보면 백상빌딩이라는 데가 있어요. 여기에 보면 표지석이 있습니다. 율곡 선생이 살던 곳 이런 표지석이 있어요, 지금도 백산빌딩 앞에. 1550년 남편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서울에서도 여러 군데 옮겨 다녔죠, 그렇죠? 청진동에서도 계시다가 삼청동으로도 갔고 5월 17일 새벽 48세의 나이로 이제 결국 병으로 돌아가시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오랫동안 삶을 사시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이때 신사임당이 돌아가시던 1551년에 율곡 선생이 1536년생이니까 16살이잖아요. 이때 어머니 죽음에 상당히 충격을 받아요, 영향도 많이 받았고. 특히 아마 충격을 받은 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가 바로 그냥 서모(庶母)를 들이니까 여기도 이제 충격이 있었고 해서 이때 율곡이 금강산으로 출가를 했고 나중에 그래서 율곡 이이 선생을 요즘으로 보면 비판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 중 됐던 사람이라 그러면서 되게 비판을 많이 해요. 마치 현대사회에서 약간 좌익 경력하게 비슷하게 그렇게 흠집을 냈지만 이게 그래도 그때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간 건 맞지만 불교에 대해서 빠지지는 않았다 이런 식의 변호를 받죠.

그래서 효녀로서의 신사임당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신사임당의 시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런 시가 되게 많이 남아 있어요.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북평촌을 말하는 거고.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래서 이게 아들인 율곡전서(栗谷全書)라고 해서 율곡의 문집에 이렇게 어머니의 시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사친(思親), 이 시도 되게 유명한데 어머님 그리워 라는 시인데 산첩첩 내 고향 천리연만은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약간 여기는 저런 느낌 나요. 우리 가곡 가고파 하면 내 고향 남쪽 바다 그리워... 그런 느낌 딱 나는 그런 시인데요. 꿈에도 우리 뭐, 우리 이런 노래 많잖아요. 꿈에 본 내 고향... 뭐 있죠? 우리 노래 중에. 내 고향은... 이런 예전에 소위 말하는 뽕짝 노래 중에도 있고요. 약간 그런 콘셉트들이 있어요. 대비죠, 한성종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그래서 그런 시를 기억하고 이번에 경포대 갈 텐데 강릉답사에서 경포대 앞에 가면 이 시를 한번 쫙 읊으면 뭔가 느낌이 신사임당 선생이 사임당 신씨가 우리 옆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보면 이런 상식을 알고 정보를 알고 가면 훨씬 느낌이 좋다는 거예요.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이건 바닷가니까 지금도 바로 경포 앞바다. 강릉 앞바다죠.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이 장면이 정말 짠하죠.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정말 아마 이 시 전에 국어책 같은 데서도 꽤 언급이 됐고요. 사임당의 시를 대표하는 어머님을 그리면서 마지막 장면이 정말 옛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거죠. 우리도 이런 느낌 많이 갖잖아요.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이런 시에 정말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어린 시절 자기가 바느질하던 그 모습까지. 그리고 여기 보면 이 장면에서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강릉을 잘 묘사해요. 갈매기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이런 내용들. 유명한 사친이라는 시.

그래서 보면 율곡이 쓴 '선비행장(先妣行狀)'은 어머니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글입니다. 어머님께서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며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지으며 우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강릉에 대한 신사임당은 정말 강릉을 그리워하는 이런 시와 아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어머니가 항상 고향을 생각했던 그런 모습들. 그리고 이제 '율곡전서'에 보면 사임당 부친이 사위된. 이게 정말 이것도 보면 진짜 신사임당이 다섯 딸 중에서도 특히 사랑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인데 내가 여러 딸을 두었지만 네 처만은 내 곁에서 떠날 수 없다. 우리도 되게 예쁜 딸 있잖아요. 그래서 신사임당을 사위한테 보낼 때도 우리도 보면 약간 신명화가 딸 바보 같은 그런 표현을 한 장면이죠. 사위에게 이 딸은 정말 내가 옆에 두고 싶은. 우리도 요즘 보면 그런 경우가 최근 생겨요. 요즘 보면 우리 흔히 말하는 약간 혼자 사는 사람들. 소위 한 30세까지도 시집 안 가고 이런 경우 가끔씩 보면 정말 특히 아버지가 딸을 아주 좋은 데 아니면 나 그냥 안 보내고 너 내가 잘 끼고 살겠다. 지금 우리 약간 그런 분위기 있지 않아요? 얘, 시집보내지 말고 그냥 나하고. 그러니까 옛날 같으면 되게 적극적으로 야, 너, 시집 안 갈래? 이렇게 되는데 요즘은 그냥 뭐 정말 다른 데 가서 어렵게 사느니 그냥 우리하고 살자. 이것도 제가 판단할 때 우리 요즘 그런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우리나라는 제가 봤을 때 혼자 사는 시스템이 너무 잘 확립돼 버린 거예요, 어느 순간에. 편의점 같은 데 가면 다 해결되지 않나요? 그리고 요즘은 정말 혼자 밥 먹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정말 우리가 혼자는 정말 너무 외로운 거예요. 밥 먹으러 갈 때도 계속 눈치 보이고 그런데 요즘은 너무 그런 게 쉬워진 것도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우리가 결혼을 장려하려면 혼자 사는 사람들이 엄청 불편하게 하는. 그런 사회를 좀 만들어야 어느 정도 극복되지 않을까.

사임당의 호 아까 나왔지만 사임(師任). 그래서 여기서도 보면 이 사임이라는 이런 글자도 있는데 이 사임이 실제 정답입니다. 문제 맞혀봤는데 태임(太任)이라는 인물을 스승으로 삼다 이런 뜻이에요. 태임은 중국 고대 문왕이라는 우리 보면 주나라를 세운 인물, 기억하세요? 중국에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이렇게 있어요. 거기서 주나라를 세웠던 문왕의 어머니가 되게 뛰어난 인물이에요, 아들을 잘 키웠던. 그래서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스승으로 삼겠다 해서 나온 호다. 사임당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당호 개념이고. 그다음에 이제 사임당이 특히 자식들에게 효를 강조한 대목인데 어느 날 이웃집에서 홍시 한 쟁반을 가지고 와서 율곡에게 선물하였다. 그때 마침 율곡은 손님과 마주 대하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손님이 무척 시장해 보이므로 홍시 한 개를 주고 자기도 한 개를 든 다음 남은 감을 쟁반째로 서모 권씨에게 보냈다. 보냈는데 자기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두 개를 덜어내었다고 해서 야단을 치며 노한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율곡은 그 소리를 듣고 곧 손님에게 사과했다. 서모와의 약간 갈등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곧 손님에게 주었던 감과 자신이 먹으려고 집었던 감 두 개를 곱게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빌고 간신히 서모 권씨의 노여움을 풀어드렸다. 이게 결과적으로 율곡이 서모에게도 효를 다하는 이런 모습인데 이게 사임당의 가르침이었다. 이렇게 해석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저런 콘셉트죠. 나 죽거든 저. 그때 사임당도 알았어요. 알았던 것 같아요. 서모한테도 너무 그렇게 하지 말고 잘해 줘라 이렇게 했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형 된 자가 아우된 자를, 이런 표현을 많이 썼다고 해요. 아우를 우애로써 대하고 아우 된 자가 형님을 공손하게 공경하면 즐겁고 기쁨이 넘칠 것이다. 가족 간의 우정과 화합 같은 걸 강조했던 가르침이 있습니다. 율곡은 맏형 선이 일찍 돌아가시자 율곡은 홀로 지내는 형수 곽씨를 정성껏 어른으로 모시고 두 조카와 두 질녀의 뒤를 성심껏 돌보아 주었으며 둘째 형 번은 당상의 벼슬에 있는 율곡을 마구 불러 곧잘 잔심부름을 시켰으나 율곡은 아버지나 형님 앞에 벼슬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냐 하면서 부형 앞에서 지나친 공손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게 결국은 율곡 선생이 이제 어머니의 그런 가르침을 잘 이어받아서 형제들하고 잘. 자기가 벼슬도 더 높고 그랬지만 형님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해 준 그런 사례들을 기록을 하고 있는 장면이에요. 이 신사임당은 입지를 되게 중요시 했다고 하는데 뜻을 품은 자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가르치고 모든 일에 뜻을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교육을 했으며 뜻이 있는 자에게만이 학문이 탄생되고 덕이 탄생되고 공이 탄생된다. 이게 다 율곡이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신사임당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율곡이라는 인물이 잘 어머니의 행적을 기록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점도 분명히 있다는 거죠. 우리 보면 최근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되게 영향을 준 인물 중에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있어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갇히게 될 때 되게 당당하게 대처하라. 이렇게 이야기했던 어머니가 조마리아라는 분인데 되게 당당했던 그런 모습. 그래서 최근에 안중근 의사도 이 어머니가 대단했다는 걸 강조하는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율곡도 그런 경우죠.

이제 아내로서의 신사임당 이야기인데 남편이 이원수인데 공의 친척 이기는 영의정에 올랐으며 높은... 그러니까 이걸 보면 덕수 이씨 집안이고요. 우리 율곡 이이 선생도 덕수 이씨고 우리 유명한 이순신 장군 덕수 이씨입니다. 그래서 공의 친척 이기는 영의정에 올랐으며 높은 벼슬과 부위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기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고 주도한 인물이었어요. 신사임당은 이원수 공에게 이 사람 우리 집안 친척이지만 집 출입을 삼가라 이 사람 너무 평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출입을 삼갔고 이후 이기 일파가 화를 입었지만 이원수 공은 화를 면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사임당의 지혜를 보여주는 장면이고요. 지금 을사사화 이야기는 MBC 주말연속극 옥중화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바로 거기에 보면 명종하고 문종왕후 또 을사사화 이야기. 옥중화가 바로 지금 을사사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렇게 현명한 부인 진짜 의리 없이 사임당 죽자마자 권씨를 후처로 맞아요. 보면 여기에 대해서 아들 율곡도 상당히 불만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금강산에 출가를 해서 그 인생무상 이런 거 느끼잖아요. 어머니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았고 또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 이런 게 겹쳤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금강산에서 출가를 해서 사실은 3년 만에 돌아와요. 3년 만에 돌아온 그런 자료가 있고요. 그때 율곡도 어떻게 보면 우리가 보면 아주 순탄하게 사실 율곡은 13세 되던 해에 문과에 장원급제해요. 어릴 때부터 아주 똑똑하다고 인정을 받았는데 이때 한 번 좌절의 시기가 있었고 그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과거 시험 준비를 해서 그 각종 시험에서 총 9번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에 뭐라고 불렸죠?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율곡 이이 선생하고 거의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이이가 싫은 거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우리도 약간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 하고 다닐 때 꼭 전교 1등 맨날 하는 걔는 밉단 말이죠. 걔 때문에 아무도 못해, 걔는 맨날 그냥 3년 동안 약간 그런 캐릭터가. 그런데 정말 공부는 진짜 잘했던. 우리도 보면 시험에 귀신같은 그런 인물이 있어요.

특히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이 정말 그래서 최근에는 사실 신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라는 관점보다는 정말 예술가로서 아주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인물이다. 그래서 여기 기록에도 나오는데요. 사임당 화첩발문에 보면 나의 집안 어떤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에 율곡 선생의 어머니가 그린 풀과 벌레의 그림 한 폭이 있었는데 여름에 뜨락에서 햇볕을 쪼이다가 닭이 쪼는 바람에 종이가 마침에 뚫어졌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 기이하게 여겼으나 진본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일단은 너무 생생하게 그렸대요. 이 장면에서 누가 생각나요? 우리 삼국시대 아주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 솔거가 바로 황룡사 벽에 노송도 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정말 새가 진짜 소나무인 줄 알고 거기 내려왔다가 부딪혀서 죽었다. 이 일화 기억하시죠? 여기는 보면 이번에는 버전이 닭입니다. 결국 뛰어난 그림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멍청한 새와 멍청한 닭들이 뒷받침해 줘요. 똘똘하면 똘똘한 새나 닭은 이런 우를 범하지 않죠. 뭔가 좀 멍청한 어리바리한 닭이 이렇게 신사임당의 뛰어난 그림을 뒷받침해 줬죠. 지금 정종지의 이 화첩을 보니 꽃과 오이 등의 여러 물건이 하나하나 정밀하고 오묘하게 표현되었다. 벌레나 나비 등은 더욱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니 이게 정말 극찬을 한 거죠.

신사임당은 정말 풀과 벌레, 초충도라고 해요. 이 그림 정말 잘 그렸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 보면 그래서 제가 오늘 특별히 이렇게 돈도 준비를 해왔습니다. 돈도 제가 5만 원짜리, 5천 원짜리. 신사임당의 초충도 그림이 여기 있죠, 포도 그림 있고 여기 뒤에는 이거 되게 오해하시는 분이 많은데 뒤의 그림은 신사임당이 그림이다, 아니다? 신사임당의 그림이 아니에요. 누구의 그림이냐면 이 대나무 그림은 이때 이 시대에 대나무를 제일 잘 그렸던 사람이 이정이라는 사람인데 이정이 그린 대나무의 그림이고요. 여기에 이 매화 그림은 누구 그림일까요? 이 당시에 또 보면 어몽룡이라는 사람이 매화 그림을 아주 잘 그렸어요. 그 사람의 그림이에요. 그러면 왜 신사임당 그림은 왜 못 그렸냐? 이때는 5만원권에 신사임당이 등장할 줄 모르고 율곡 이이 선생 지폐 그릴 때 여기다가 어머니 그림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마 신사임당의 그림이 이렇게 화폐의 표지 모델로 될 줄 알았으면 이걸 아껴두었을 건데 이걸 써먹어버렸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거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그러면 비슷한 시대에. 사실은 약간 저는 약간 이거 반대예요. 다른 그림 연고지가 있었던 그림이 좋은데 대부분 당연히 신사임당 그림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죠. 약간 이게 다음에 할 때는 뭔가 도안을 너무 빨리 써먹었어. 그때는 정말 5만 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거고요. 우리가 이런 지폐 본 김에 보시면 바로 여기도 이것도 사실 신사임당이 써먹어도 되잖아요, 오죽헌.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나신 곳. 그래서 이 앞은 오죽헌 뒤는 너무 빨리 써먹었어요. 선행학습을 해서 율곡 이이 선생의 어머니 사임당의 그림을 여기에 확 집어넣는 바람에. 차라리 여기에는 율곡 선생이 배양된 자운서원(紫雲書院) 같은 거 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는 거죠. 그래서 두 모자의. 결과적으로 모자가 함께 지폐의 주인공이 되는 기록을 세우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대표 그림이 초충도고요. 이 초충도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 중에 약간 신사임당 그림하고 비슷하게 초충도를 전문으로 그린 화가가 있어요. 누구일까요? 간송미술관에서 그 그림 정말 많이 남아있습니다. 겸재 정선 그림 보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도 그렇지만 겸재 정선이 초충도 그림 그린 거 기억나세요? 막 수박도 있고 쥐도 막 지나가고 이런 거 있는데 그런 그림을 많이 그립니다.

어숙권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지금 동양 신씨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포도와 산수. 그래서 아까 보셨잖아요. 여기 앞의 그림 포도잖아요, 포도 그림. 포도와 산수는 한 때에 절묘하며 평하는 사람들이 안견 다음 간다 하였다. 아, 어찌 부인의 필치라 해서 소홀히 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산수화는 안견 하면 정말 대표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있잖아요. 그 그림 다음에는 신사임당. 되게 극찬입니다, 극찬. 이처럼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인가. 어숙권은 긍정적으로. 보면 사임당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허난설헌도 그렇고 동시대 사람들은 꽤 높은 평가를 했는데 후기로 갈수록 평가가 박해져요. 왜 그러냐 하면 16세기 초반까지도 해도 그렇게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 같은 게 약해지다가 후대로 갈수록 소위 말하는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여성을 더 낮게 보는 이런 경향이 커지는 것하고도 맞물립니다. 신사며 당의 묵포도도(墨葡萄圖). 신사임당의 초충도 수병 8폭 병풍 중 일곱 번째. 가지 그림을 여기다가 집어넣었다. 이거 꼭 기억하세요. 뒤에는 신사임당 그림 아니다 라는 것까지.

사임당 신 씨는 이건 이제 아버지 이름은 이렇게 휘를 해서 이렇게 써놓은 거고 율곡 이이 어머니인데 특히 여기도 나오죠. 포도와 풀벌레. 이게 전공이었던 포도 그림. 먹으로 그린 이 포도 그림 정말 먹고 싶죠. 요즘이 특히 포도철이잖아요, 포도철. 제가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신사임당이 포도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제가 그때 그렇게도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집에 포도나무가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아요? 저도 제가 어릴 때 안동 살았는데 우리 집에 포도나무가 있어요, 포도나무. 완전히 제가 진짜 포도나무 하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 엄청난 포도철에는 완전히 특권을 누렸습니다. 애들이 포도 하나 얻어먹으려면 저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저도 그게 되게 자랑스러웠어요. 포도나무가 있다는 것, 우리 집에 포도나무가 있다는 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저는 그림은 못 그리지만 그래도 그거를 항상 보는 거예요. 익숙하다. 그래서 제가 그런 견해를 제시했어요. 그건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런 기록까지는 없으니까. 우리 집에는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이런. 아마 있지 않았을까. 우리도 그렇지만 그림의 대상이 되는 거는 자기에게 익숙한 소재를 잘 그린다는 거죠. 글씨도 잘 썼어요.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썼어요, 초서. 우리 보면 우리 한석봉과 같은 인물을 해서(楷書)라고 하죠. 정자체 글씨. 그래서 우리 어릴 때 한석봉을 되게 좋아하는 것 중에 이유가 어머니하고 떡 썬 경쟁, 이런 소리도 나오지만 일단 한석봉 글씨는 알아보기 좋아요. 반듯반듯한 정자체잖아요. 대표적인 한석봉 글씨가 지금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가면 도산서원 이런 글씨가 한석봉 글씨인데 반듯반듯해요. 그런데 이 초서는 솔직히 알아보지 못하잖아요. 대강 써도 진짜 잘 썼는지 못 썼는지 잘 모르니까 하여간 신사임당도 초서에 능하셨던 그런 분이었다. 그래서 이 신사임당이 이런 예술가로서의 그런 재능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 신사임당에 대한 이미지는 현모양처로 기억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생존 시나 그녀 사후 가장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16세기 지식인들에게 사임당은 어머니나 부인이 아니라 화가 신씨였다는 거예요, 화가. 예술가였다는 거죠.

그러면 왜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언제부터 기억되고 있느냐면 신사임당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세기에는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신사임당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누구 부인, 신부인. 거기다가 이제는 이공 부인, 율곡의 어머니, 이렇게 이제 기억이 되기 시작한다는 거죠. 17세기 중엽 바로 이렇게 만든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라는 인물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실 우암 송시열은 우리가 보면 율곡 이이 다음에 그 율곡 이이의 제자 중에 유명한 인물이 있어요. 사계 김장생이라는 인물이 있고 또 김장생의 제자가 바로 송시열입니다. 그래서 우리 흔히 말하는 서인의 계보의 정통 라인이에요. 사계 김장생은 광산 김씨고 그랬는데 이 우암 송시열이 조선 후기에 사실 서인, 또 노론의 영수가 돼서 조선후기 최고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우암 송시열입니다. 이 송시열은 서인을 결속시키기 위해서 이때 서인의 영수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 율곡이에요. 사실 율곡은 살아생전에 본인이 당파적 아주 입장을 그렇게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제보합(調劑保合)이라고 해서 조정자 역할을 했는데 결국은 그 제자들이 대부분 서인이 되면서 율곡 선생이 선인의 영수로 그냥 돼버린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은 아까 김장생부터 해서 완전히 요즘 표현으로 하면 율곡 이이를 상당히 높이는 작업을 벌여나가요. 그 대표적인 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만양병설 같은 경우도 원래 율곡 이이 선생이 평소에 문자에는 십만양병설이라고 구체적으로 안 나와요. 그냥 국방을 준비를 해야 하고 우리가 전마를 길러야 하고 이런 말은 평소에 많이 하지만 그런데 나중에 이 김장생이라는 인물이 율곡 선생의 행장(行狀)을 쓰면서 십만양병이라는 말을 아예 딱 박아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그 김장생의 뒤를 잇는 우암 송시열도 율곡 선생의 십만양병설 이야기를 쫙 그냥 기록에 율곡에 대한 기록에 딱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십만양병설은 그래서 이거 가지고 진위논쟁을 많이 하는 거예요. 정말 율곡 선생이 십만양병이라는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 상당히 논란인데 실록에도 보면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전혀 십만양병설이 이야기가 없고 선조수정실록은 나중에 서인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 다시 실록을 수정한 작업. 거기에는 십만양병설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단 말이죠. 율곡 선생의 아주 선견지명 같은 걸 강조하기 위해서 썼다. 그러니까 십만이라는 숫자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그만큼 율곡 선생이 항상 국방이라든가 군사 준비에 항상 신경을 썼다. 이런 점을 우리가 중요시해야 한다. 이렇게 이제 저도 그 정도가 가장 어떻게 보면 맞는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비슷한 과정에서 우암 송시열이 이제는 율곡 선생 같은 이런 정말 대학자, 대정치가를 낳은 어머니라면 이건 정말 마땅히 현모양처이고 마땅히 정말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이렇게 되면서 신사임당. 그랬을 때 유교 국가에 있어서는 예술가 별로 안 쳐줍니다. 그림 잘 그리고 이런 거는 그런 능력은 많이 사라지게 하고 율곡 선생의 어머니로서의 입지가 올라간 거. 사실 크게 보면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이런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과장에서 율곡 이이, 그리고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 그래서 율곡 이이 어머니 신사임당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완전히 예술가. 그렇기 때문에 원래 신사임당이 평가받는 것은 사실은 예술가로서의 능력이고 지금 보시면 당대에 엄청나게 예술가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는데 후대에 가서는 그 이야기들이 많이 사라져버렸더라. 그래서 최근에 와서는 예술가로서의 사임당의 능력을 재평가하는 그런 흐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고 크게 보면 정말 시대에 맞서서 뭔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던 이런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는 조선시대의 어떤 여성사를 더 풍부하게 하는.

그래서 이 허난설헌하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절묘하게 또 두 사람이 강릉이라는 이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 이 강릉에 가시면 오죽헌(烏竹軒), 율곡 이이 선생과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았더라. 그래서 이것도 보면 결과적으로 조선시대는 처가살이가 조선전기까지 관례가 돼 있었어요. 그러니까 시집을 오는 게 아니라 조선전기까지는 장가를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원수가 신사임당의 처가에 장가를 가서 이곳에서 살 때, 생활할 때 낳은 아들이 율곡 이이. 그래서 율곡 이이는 우리가 또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강릉 사람이 아니라 태어난 곳은 강릉이 분명하지만 선대로부터 살아오던 곳은 어디죠? 경기도 파주의 율곡리. 밤골이에요, 밤골. 그래서 호가 율곡입니다. 거기에 밤이 많이 났다는 거죠. 그래서 율곡 선생이 이곳에도 연고가 있고 지금도 파주에 가면 아마 이번 10월에도 무슨 파주에서 축제 같은 거 한다고 하더라고요. 율곡 선생 무슨 축제. 여기에 보면 몽룡실(夢龍室). 꿈에 용꿈을 꿨다고. 그런데 보면 웬만한 위인 나올 때 대충 용꿈 꿉니다. 대충 용꿈을 꿨다라는. 그래서 이 용꿈을 꾼 방 해서 몽룡실이고 사임당 묘는 여기 나오지만 이건 지금 파주에 있어요. 파주에 율곡 이이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자운서원(紫雲書院)이고 그리고 여기에 모시게 된 연고가 선대로부터 살아왔던 곳이기 때문에 율곡 선생의 가족묘가 다 파주 자운서원. 그래서 서원도 이 자리에 들어선 거예요. 여기 지금 가족묘가 조성이 되어 있는데 특징은 여기가 사임당 묘가 아니라 사임당과 이원수 묘가 아니라 이 밑이 사임당 묘소다. 왜 그러죠? 역장(逆葬)이라고 해요, 역장. 원래는 선조가, 대수가 높은 분이 위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때도 또 생각해야 할 게 의외로 조선시대가 유교 국가 같지만 한편으로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것이 어떻게 보면 사정에 따라서. 율곡 이이 선생이 훨씬 높은 벼슬도 했고 이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장이라고 해서 요즘 표현으로 하면 후손이 아주 잘나면 더 높은 곳에 위치할 수 있다. 그래서 율곡 선생도 가족묘는 또 이런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이 파주에 가시면 지금 자운서원하고 율곡 이이 선생 묘를 통해서 이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의 자취를 볼 수 있고 또 이 앞에 있는 강릉 여기는 정말 율곡 선생의 자취. 그리고 아까 시에도 나왔지만 경포호 라든가 이 주변 다가 신사임당. 그리고 초당 마을에 보이는 허난설헌. 거기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는 정말 잘 복원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거기 가면 진짜 뭔가 아직까지 한옥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10월에 저도 지금 생각하니까 잘 가게 됐다고 생각을 해요. 10월에 정말 날씨 놓을 때 강릉에서 조선시대에 정말 시대에 맞서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던 두 명의 여성. 신사임당, 허난설헌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강의 내용 잘 기억하시고 기회 되시는 분들은 답사에 참여하시고 그게 여의치 않으신 분들은 아까 제가 소개해드린 역사저널 그날에서 신사임당, 율곡 이이 편 이런 자료를 보시면 좀 많이 얻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의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