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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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국악의 향기에 젖어서

박연 선생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고민을 해보고 이분이 왜 그렇게 엄연하게 과거에도 급제를 했고 고위 관직까지 다 지내셨는데 우리는 왜 이분을 음악가로 더 많이 기억을 하고 있을까? 이런 걸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고 그렇다면 이분이 왜 음악가일까? 이런 지점도 한번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자료에 처음에 일단 이분이 어떤 분인가? 우리가 박연 선생 하면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에 하나다. 이거 들어보셨죠? 3대 악성 중에 하나인데 난계 박연 선생, 그다음에 왕산악, 우륵 이 분이 3대 악성이라는 거 알고 계셨죠? 서양 음악가 말씀해보실래요? 아시는 분? 서양 음악가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하이든 줄줄이 한 100명쯤 나올 것 같아요. 우리나라 한국의 음악가 박연, 왕산악, 우륵 그다음 세종대왕. 또? 김수장 중요한 음악가죠. 홍대용도 문인이지만 음악가의 역할을 하죠. 정말 어렵죠. 여섯 분만 지금 말씀하셨고 전적으로 그 중에는 음악만 전문으로 한 분이 자유롭게 나오지는 않았어요. 세종 임금이 나왔고 홍대용 지식인이고 정말 음악으로만 일생을 산 분에 대한 정보는 여러분한테는 적어도 안 들어와 있는 거죠. 제 책 홍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음악의 거장들’이라는 책에 52명의 음악가를 제가 소개를 했습니다. 각종 문헌에 숨어있는 음악가들. 그 문헌에 숨어 있으면서 나 좀 제발 빛을 보여줘라고 막 목소리를 아우성을 치고 있는 그 목소리를 제가 받아서 음악가 52명을 책으로 만들어서 일단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박연 선생이 포함돼 있지 않고요. 제가 추천도서를 처음에 ‘한국 음악의 거장들’ 추천을 했다가 '조선의 오케스트라 우주의 선율을 연주하다'라는 책으로 추천도서를 바꿨는데요. 거기에 난계 박연 선생에 대한 것이 짤막하게 소개가 돼 있습니다. 길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 분의 음악가가 이제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조명이 되는데 일단은 저의 생각은 이래요. 우리나라의 수많은 음악가들이 온갖 시기에 고조선 시대부터 지금 이 시대까지 한국 음악가들이 엄청 많이 존재를 했는데 우리는 지금 여러분이 앉아계신 그런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의 평균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때 여섯 분만 말씀하셨단 말이죠. 그 여섯 분 중에 한 분을 지금 저희는 공부를 하는 거고 다행히도 여러분이 알고 계신 분을 여러분하고 지금 같이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박연 선생을 공부하는 것을 기회로 혹은 핑계로 해서 앞으로 이후에 우리나라 음악가들에 대해서 좀 전에 서양 음악가에 대해서 막 나오듯이 그냥 줄줄줄 나올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서양 음악가들이 남긴 작품이나 음악 내용이나 음악 업적이 대단한 건 맞지만 우리 한국 음악가 작곡가들, 연주자들이 남긴 것들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다만 이제 우리나라 한국 사람이 한국 문화를 너무 모르는 현실에 대해서는 조금 이 시간을 통해서 계기가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난계 선생을 이분이 저는 이제 음악가로서의 모습을 먼저 보여드려야 하는 건데요. 3대 악성의 하나다. 그러면 난계 선생을 빼고 나머지 두 분은 어떤 정도인가? 거문고를 만든 왕산악 그다음에 가야금을 계속 지금 이 시대까지 전파할 수 있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우륵. 이 두 분이 3대 악성 중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난계 박연 선생이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이 두 분의 음악가하고는 조금 차원이 다른 부분이 있어요. 이 두 분은 악기를 발명을 했고 그다음에 엄청나게 많은 곡을 작곡을 했고 그다음에 아주 오래된 악기 1,600여 년 이상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 그런 악기를 지금까지 이렇게 전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한 분인데 그렇다면 난계 박연 선생은 음악가라고 했지만 어떤 사명을 가진 음악가일까 이런 거하고 그러면 이분이 음악가라면 악기 연주를 했을 수 있나? 이런 것들이 다 이 시간을 통해서 조명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박연 선생을 한마디로 3줄로 요약을 했는데 사실 이분은 고려시대 고려 우왕 때 태어나셨거든요.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는 걸 보셨고. 그리고 조선의 왕 일곱 분이 이분 살아계시는 동안 지나갔어요. 태, 정, 태, 세, 문, 단, 세. 그렇죠? 태조부터 정종, 그다음에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까지. 세조 때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래서 조선 전기의 격동의 변화하는 그런 시기에서 44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그 업적 중에서 음악과 관련된 업적 위주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이분이 활동하는 조선 전기라고 하는 시기가 고려조(高麗朝)가 무너지고 그다음에 조선이 세워졌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질서로 나라가 세워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나 개인의 입장을 생각하면 내가 어제는 고려시대였는데 오늘은 조선시대가 된 거잖아요, 그렇죠? 그랬을 때 건국을 하고 나면 나라가 요구하는 또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질서들이 엄청나게 많이 대두가 된단 말이죠. 그 질서에 적응을 해야 하는 시기에 삶을 살면서 과거도 급제를 하고 그다음에 관료로 일하면서 이 나라를 어떻게 정비를 해야 하는지 이런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는 그런 와중에 음악 업적이 나오는 거라는 거 이걸 말씀을 드려야지 박연 선생의 업적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가 하실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바로 예(禮)와 악(樂)을 잘 아는 신하가 요구된 상황이란 말이죠. 그런데 보통 이제 예를 잘 아는 신하는 많이 있어요. 그런데 악이라는 것은 예하고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훨씬 더 기능적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도 있고 또 예라는 거 하고 맞물려서 이해하는 차원도 있고 그래서 이해해야 하는 차원이 좀 더 넓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아는 신하는 많은데 악을 아는 신하는 많지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예와 악에 관해서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는 논의들이 계속 끊임없이 일어나고 굉장히 어렵게 유지를 시키거든요. 그런데 바로 세종대왕은 박연이라는 분을 만났기 때문에 세종대가 음악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가 될 수 있도록 해 준 그런 분이에요. 그래서 그런 걸 위주로 말씀드리려고 하다 보니까 연보 중에서 아주 중요한 연보, 음악과 관련돼서 이분이 이제 남긴 업적이 어느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는지 이런 걸 볼 수 있는 그런 거를 정리를 해봤거든요. 여러분 프린트물에도 있지만 이분이 고려 우왕 4년에 태어나셨는데 부친이 먼저 타계하시고 모친이 나중에 타계하셨어요. 이 부분은 이제 기록이 정확하게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어떤 기록을 보면 모친이 먼저 돌아가셨다, 이렇게 돼 있는 기록도 있어요. 그런데 부친이 먼저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이서구라는 분이 척제집에 상세하게 내용을 기술을 해놨어요. 그래서 그 기술 내용을 통해서 부친, 모친 돌아가신 거 그걸 좀 정리를 했는데 이분이 여묘(廬墓)살이를 6년을 했습니다. 그래서 태종 임금이 효자비(孝子碑)를 1402년에 내립니다. 그래서 그 효자비가 최근에 2015년에 발굴이 됐어요. 조선 전기 가장 오래된 효자비로 발굴이 돼서 신문에 한번 크게 나왔었던 그런 기억이 있고. 약간 그 충청도 지역에서 지금 효자비를 어디에다 설치를 할 것인가를 가지고 지금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정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2016년 영동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2016년 7월 18일 기사에 지금 최종선정이 아직 위치가 결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그 후손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 효자비도 받았고 그다음에 28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을 했고 이분이 이제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업적을 내는 시기가 바로 문과(文科試)시 이미 합격을 하고 또 악기도감(樂器都監)에서 악기를 제작하는 업적도 내는데 악학별좌(樂學別坐)로 일하면서 그 이후시기에는 정말 혁혁한 공이 일어나요. 그 이전시기에도 음악과 관련돼서 박연의 일이 업적이 굉장히 많은 것들이 나왔지만 이 세종 7년 이후 세종 6년 그 무렵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나와요. 그래서 이제 이분이 보통 이제 음악이론가다, 음악학자다 하면 저분이 실기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의심을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조선시대에 문인들은 대부분은 다 거문고를 필수로 했어요. 그래서 교양으로 악기를 하나씩 다 연주를 했거든요. 그래서 거문고는 공부하다가 잡된 생각이 나거나 그럴 때 사랑방에 놓고 있다가 당겨서 음악을 연주를 하다 보면 그 잡된 생각이 다 사라진다. 그래서 '거문고 금(琴)'은 금야라고 있거든요. 금은 금하는 것이다. 삿된 생각을 금하게 하기 위해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다라고 해서 많은 문인들이 거문고를 연주 했어요. 그런데 관악기를 주로 연주하지는 않았어요.

문인들은 관악기를 연주하는 문인들은 좀 특별한 경우였는데 바로 박연 선생은 어려서부터 피리 혹은 대금. 지금 문헌에 보면 적, '피리 적(笛)' 자라고 나와요. '피리 적' 자가 나오면서 전부 그것을 피리라고 번역을 하는데요. 그것은 자전에 '피리 적' 이라고 돼 있어서 그렇게 번역을 하시거든요. 그런데 그 적 자가 피리일 수도 있다 대금일 수도 있어요. ‘적’을 한글로 ‘저’라고 읽거든요. 저는 젓대이기도 하고 젓대는 대금이거든요. 그래서 박연 선생은 대금 연주에 굉장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셨고 아마 피리도 연주하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박연 선생이 어렸을 때 이웃에 악공(樂工) 출신의 노인이 계셨어요. 대개가 장악원(掌樂院)이 있는 음악기관에서 은퇴를 하잖아요. 그러면 은퇴한 다음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고향 사람들한테 악기도 가르치고 하면서 노악사(老樂士)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박연 선생의 이웃에 그런 노악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박연이 어렸을 때 ‘저’를 배웠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 자료 프린트물에도 소개를 해놨습니다. 척제집에 있는 내용하고 그리고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어린 시절의 상황을 많이 기록을 해놨어요. 그래서 저 혹은 젓대 혹은 대금, 피리일 수도 있는 그 악기를 어려서부터 연주를 했는데 이분이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과거 시험을 보고 나서 당시에 음악기관이었던 여러 음악기관이 있었어요. 조선 전기에는 음악기관이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나중에 세조대에 이거를 장악원(掌樂院) 하나로 일원화시켜요. 그런데 박연 선생이 이럴 때는 여러 음악 기관이 있었는데 그런 말씀은 조금 이따가 드릴게요.

일단 연보에 있는 내용을 잠깐 보시면 48세 때 박연 선생의 업적 중에 음률(音律)을 소리 낼 수 있는 율관(律管) 제작의 업적이 있어요. 율관을 제작하려면 율관이 기준 길이나 기준 사이즈가 나와야 하는데 그 사이즈의 기준을 거서(秬黍)라고 해서 곡식이에요. 일종의 곡식의 일종인데 이 거서가 발견이 되고 이걸 발견함으로써 율관을 제작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이 무렵이 바로 악학별좌로 있었던 시기인데 그리고 또 하나는 경석(磬石)이라고 해서 경돌이라고 하는데 편경(編磬)이라고 하는 악기를 만들 수 있는 경돌이 지금 저기 수원 옆에 남양이라고 있잖아요. 지명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남양에서 경돌이 발견이 돼요. 편경이라는 악기는 저 시절 이전에는 전부 중국에서 수입을 해왔어요. 왜냐하면 원래 저 악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온 악기이고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그런 악기인데 이 시점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메이드 인 조선의 편경이라는 악기는 만들 수가 없었어요, 재료가 없어서. 그런데 이 시즌에 경돌이 발견이 돼요. 그래서 이걸 발견하고 나서 편경 제작이 굉장히 활발하게 진행이 되는데 그때 박연 난계 선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래서 528매까지 만들었어요. 이때 메이드 인 조선의 편경을 선언하고 나서. 그래서 해주에서 거서가 발견되고 남양에서 경석이 발견된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예요, 음악사적으로. 그리고 이제 주종소(鑄鐘所)라고 하는 종을 제작하는 곳을 설립해서 우리나라의 편종(編鐘)이라고 하는 이것 역시 중국에서 수입된 악기인데 편종을 만드는 업적도 우리나라가 지금 직접 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이런 편종이라고 하는 종으로 된 거죠. 주물을 해서 만든 거죠, 이런 업적들. 그다음에 이제 계속 연이어서 박연 선생의 50대의 업적들인데 근정전(勤政殿)에서 조회(朝會)나 회례(會禮)를 하는데 그때도 음악을 연주를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박연 선생이 보기에 그 음악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됐다. 그러니까 새로 만들어서 음악을 연주를 하는 그런 거사(巨事)도 이때 박연 선생에 의한 업적인데 이 부분에 대한 건 뒤에서 조금 더 설명을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제 21세 때 악학제조(樂學提調)로 일을 하시고 그다음에 계속 예조참의(禮曹參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그다음에 악학제조를 겸직하는 76세 단종 1년 때 사실은 이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죠. 아마 계유정난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다른 기회에도 많이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때에 박연 선생의 셋째 아들이죠, 막내아들이죠. 박연 선생의 아드님이 세 분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첫째 아들은 우리가 맹중삭, 맹중계(孟仲季)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첫째 아들이 맹우, 둘째 아들이 중우, 셋째 아들이 계우거든요, 막내라서. 계우인데 이 박계우가 바로 박계우 선생이 이때 처형이 돼요, 단종 때. 계유정난라고 연루가 돼서. 그리고 박연 선생도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 거죠. 이제 집안이 몰락하게 되는 거죠. 굉장히 비극의 시대가 열리게 된 거고 그 후손들도 이후로 굉장히 많은 고생을 하는 시기가 이때. 그런데 이분이 사실은 관직 생활을 44년을 했거든요. 지금 우리가 공무원 분들도 계실 수 있는데 공무원을 44년을 했다. 그러면 몇 살 때 직장에 들어가서 몇 살까지 해야 하나. 30세 때 들어갔다 쳐도 74세까지 하잖아요. 30세에 들어가서 74세까지 공무원. 맞나요? 44년. 4, 5, 6, 7 그렇죠? 74세까지 엄청난 거죠. 지금 공무원 하시는 분들 당신 나이 계산해서 내가 그때까지 돈을 벌어도 괜찮을까. 이분은 44년 동안 관직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분이 그만큼 뭐라고 할까요? 많은 분들한테 신임을 얻었고 물론 박연 선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 부분 대개가 당 세기나 역사적인 사실하고 관련돼서 만들어지거나 그런 것들도 사실 있어요. 고산에 유배 가 있을 때 이분이 가훈(家訓)을 쓰셨어요. 가훈이 17조가 있는데 저는 그걸 가만히 읽으면서 이분이 정말 강직하게 사신 분이다. 그다음에 자녀 교육을 확실하게 하신 분이다. 우암 선생의 계녀서(誡女書) 도 있고 딸을 교육하고 있는 그런 거. 이 가훈 계열의 글들은 조선 시대의 많은 분들이 쓰는데 박연 선생의 가훈은 짤막해요, 길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뒷부분에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아마도 유배 시절에 유배 생활을 하시면서 인생을 정리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면서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 아이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정립이 되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 한번 총체적으로 정리를 해보시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연로하신 분들도 아마 내가 자식들한테 뭘 남겨줄까 할 때 사실은 재산이나 재물보다는 저는 정신적인 자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재물이나 재산은 기회가 돼서 거부는 하늘이 낸다고 하잖아요. 거부까지 안 되고 그냥 먹고 살만큼 되면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재산은. 그냥 굶지 않고 소박하게 사치 안 하지만 얼마만큼 살 수 있는 만큼. 그런데 자식들한테 남겨줄 것 중에 정말 중요한 덕목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과목이, 그런 덕목(德目)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박연 선생이 남긴 가훈에 그런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어요. 뒷부분에 정리하는 시간에 조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 이제 귀향을 해서 영동지역 고당리에서 타계를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가 8월 13일인가요? 답사를 하잖아요. 답사를 하면 오늘 이 강의 시간에 했던 내용들이 아마 가는 곳곳마다 새록새록 생각이 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말년이 굉장히 안타까운 그런 분이라서 지금 우리가 역사적으로 말년에 유배를 떠나셔서 많은 것들을 남긴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있잖아요. 그분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 다산 선생의 18년은 학자로서 마무리할 수 있는 18년이었거든요. 그래서 18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지었어요. 제가 최근에 다산의 악서(樂書), 악서 고전가지고 특강을 한 번 했는데 굉장히 숙연해지죠. 공무원으로 계속 일을 하시다가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연루되고 해서 귀향을 가셨는데 귀향을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신 거예요. 여태까지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실컷 하신 거예요. 아마도 다산 선생이 그냥 한자리에서 끝까지 공무원으로 일을 하셨다면 그 많은 저술 못 만들거든요. 당시 생전에는 참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는 그 많은 저술들을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거잖아요. 이제 똑같은 비유는 안 되지만 난계 박연 선생의 경우도 마지막에 그런 비운을 겪었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고 했기 때문에 이 가훈 안에는 그런 아픔들이 절절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삶을 사셨는데요. 난계 선생이 효자비를 태종한테 받았다고 했잖아요. 이게 태종 2년 난계 선생 25살 때 인데 여묘살이를 6년 동안 했다는 걸 계기로 해서 이 비를 받았는데요. 아까 잠깐 말씀드렸는데 사실은 이 난계 선생의 효자비 이건 조선 전기의 모습. 연봉(蓮峰), 연꽃 모양의 봉우리가 이 위쪽에 달려있고 그다음에 효자 박연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 '연' 자는 '그럴 연' 자입니다. 지금 박연 선생은 '빈 터 연(堧)' 자 쓰거든요, '흙토 변'의. 그런데 초명이 '그럴 연(然)'자를 썼어요. 초명으로 효자비가 돼 있고 높이가 한 117cm 한 이 정도 아주 높지도 않고요 폭이 한 30여 cm 두께가 10여 cm. 화강암에다가 각자(刻字)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아마 이제 어느 곳에 둘지 확정이 되면 혹시 답사 갈 때 볼 수 있게 되면 좋겠는데 모르겠습니다. 지금 문중사당(門中祠堂)인 세덕사라든지 난계국악박물관 입구 아니면 박연 동상 앞에다 세우자. 이렇게 3가지 설이 제시가 되고 있는데 그 역사라는 게 간단하지 않지 않습니까? 어디에다가 정하느냐 이것도 간단하게 잘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도 이렇게 어디 놓을지 논의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설치를 하게 되면 한 번 볼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난계 선생의 초상화입니다. 부부 초상화예요. 부부 초상화가 있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굉장히 귀한 건데요. 이건 현재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고 몇 년 전에 이거를 복본(複本)을 만들어서 영동에다 기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도 복사본이 지금 있고 원본은 국립국악원에 있는데요. 지금 예전의 초상화는 거의 실물 그대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거 지금 조선 후기에 만든 거긴 하지만 아마 그 후손의 얼굴이나 이런 걸 다 종합해서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이해를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글자는 잘 안 보이시겠지만 난계 선생에 대한... 저도 글자가 잘 안 보이는데 ‘차는 난계 문헌공의 상이다.’ 이렇게 나오고요. 난계 선생에 대한 여러 중요한 것들 그런 것들을 기록을 해놨는데 지금 이 두 분이 굉장히 어떤가요? 어울리나요? 부부는 닮으면 잘 산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두 분이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 이 여산 송씨예요. 부인이 여산 송씨인데 부인은 세종 어머니 원경왕후의 외6촌이에요. 집안이 굉장히 좋은 집안이었고 그런데 일찍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하여튼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이 박연 선생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초상화를 소개를 해드렸고요. 보존 상태가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박연 선생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음악가 개인의 박연이 아니고 조선 전기의 건국된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주 중요한 문신 역할을 하는 박연, 이걸 생각을 해야지 박연에 대한 업적이나 음악가로서의 면모가 이해가 잘될 것 같은데요. 바로 이제 박연은 지악지신(知樂之臣)입니다. 악을 잘 아는 신하. 조선의 지악지신은 굉장히 중요해요, 악을 아는 신하의 존재는. 왕의 주변에 악을 잘 아는 신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이거에 따라서 그 왕 때의 중요한 음악 업적이 나느냐, 안 나느냐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바로 이분은 박연 그리고 맹사성도 역시 중요한 지악지신인데 이 두 분이 세종 곁에 있었기 때문에 세종 대가 음악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됐고 그다음에 비교를 해보자면 여러분이 조선시대 그러면 음악적으로 제일 중요한 업적이 나온 때가 성종 대, 정조 대 이렇게 대개 아시고 계시죠, 상식적으로. 그 이유는 성종 대에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지은 성현이 있었고요. 정조 대에는 정조 임금의 동궁(東宮)시절부터 스승이었던 서명응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조선이 음악적으로 굉장히 부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조선 전기에 문물 정비기에 박연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역할을 했습니다.

문물 정비기하고 정조 같은 경우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하는 문물 완비기라고 하거든요. 문물 정비기에 놓여있는 박연하고 문물 완비기에 놓여있는 서명응하고는 할 일이 굉장히 많이 달라요. 아무것도 안 갖춰졌는데 다 갖춰야 하는. 혹은 너무나 틀린 게 많은데 고쳐야 하는 그런 시기의 박연이라고 한다면 이 정조하고 서명응은 갖춰졌지만 제대로 해야 하는 그런 책무(責務)를 가지고 있는 그런 시기거든요. 그래서 이 박연하고 정조, 성현 이런 분들은 시기적으로 약간 업무가 차이는 있지만 음악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시대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되도록 했던 분들이라고 보시면 되고 음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한 시기는 기본적으로 잘 다스려진 시기예요. 그게 왜 그러냐면 음악과 정치의 관계는 굉장히 긴밀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조선이 이제 건국이 되잖아요. 그러면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 임금이 천명을 해요. 이제 지금이야말로 우리 조선을 예와 악으로 다스려야 할 가장 적합한 시기이다 이렇게 천명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고려가 무신정권, 고려는 멸망했단 말이죠. 그런데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은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이고 성리학(性理學)으로 무장이 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성리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예악정치(禮樂政治)의 기치예요.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그래서 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바로 그 내용이 나와요. 예악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전거가 우리가 예악형정(禮樂刑政)이 잘 갖춰져야 한다 이런 말씀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거기 보시면 전거(典據)가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데 예의 기능, 악의 기능, 정의 기능, 형의 기능 이게 이제 다 제시가 되어 있는데 사실은 형은 안 쓰는 게 제일 좋아요. 형은 안 쓰는 게 제일 좋고 형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다스려지면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최후로 형을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그런데 예와 악으로 다스리게 되면 형은 별로 필요가 없게 된다고 인식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이걸 잠깐 소개를 해드려 보면 예이도기지(禮以道其志) 예로써 그 뜻을 인도하고, 악이화기성(樂以和其聲) 악으로써 그 소리를 조화롭게 하고, 정으로써 그 행동을 하나로 하며, 형으로써 그 간사함을 방어하니, 방지하니, 예와 악과 형과 정은 그 궁극은 하나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이다. 그 하나가 뭐냐 하면 소이동민심이출치도야(所以同民心而出治道也)라 민심을 하나로 하여서 뭐를 내냐면 치도를 내는 것이다. 치도라는 것은 가장 잘 다스려진 사회를 말합니다. 가장 잘 다스려지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예악형정의 궁극입니다라고 예기 악기에 나오는데 바로 이 예악정치 실현의 전거가 예기 악기에 나오는데 조선경국전에서 그걸 강조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예와 악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시기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물론 태조대왕의 시기에 천명을 했고 정종 지나고 또 태종 지나고 그다음에 세종이 나라를 다스리게 됐지 않습니까? 태종이 왕위를 그냥 물려줬어요. 돌아가셔서 간 것이 아니고 세종대왕한테 물려주셔서 세종이 즉위(卽位)를 한 거거든요. 원래 즉위를 할 때는 선왕이 돌아가셨을 때 대개가 돌아가신 다음에 왕위로 나아가잖아요. 조선의 즉위 형태를 잠깐 옆으로 나가서 말씀을 드리자면 4가지 형태가 보통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왕이 돌아가신 경우, 그다음에 선왕한테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경우. 지금 태종이 세종한테 물려준 경우. 이 경우는 아주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되죠. 그다음에 뭐가 있냐면 반정(反正), 중종이나 인조반정 쿠데타 일으켜서 왕이 되는 경우. 그다음에는 등극(登極)이라고 해서 조선의 제후가 황제로 등극하는 경우. 고종이 황제를 선언했잖아요. 그래서 다시 황제로 등극을 하죠. 황제 등극을 작년에 저희 국악원에서 재연을 한 번 했었습니다. 그 4가지 형태로 왕이 되는데 세종대왕 같은 경우는 이제 이렇게 자연스럽게 물려주셨기 때문에 즉위의례를 굉장히 화려하게 거대하게 했어요.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신 상황에서 즉위의례를 하면 일단 돌아가셨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즉위의례를 크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전(殿)에 나가지도 않고 문에서 해요. 인정문(仁政門)이다, 근정문(勤政門)이다, 문에서 하고.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극대화해서 보여줘야 해요. 내가 저 자리에 아직 못 나간다. 어디 감히 아버지 자리를 내가 갖느냐, 그런 마음. 그래서 문에서 하고 의례할 때 잠시 상복을 벗었다가 의례 끝나자마자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그래요. 그러니까 즉위는 사위(嗣位)라고 하는 거잖아요. 이어받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그런데 세종은 선위(禪位)를 받았기 때문에 즉위의례 같은 경우는 굉장히 나중에 세종 대 즉위의례를 재연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것도 하나의 자료가 될 건데 그런 시기에 계신 분이 박연 선생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왜 박연이 무슨 조회아악(朝會雅樂)을 만들었고 회례아악(會禮雅樂)을 만들었고 제사를 정비했고 이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게 생각을 하실 수 있어서 이런 세종 대 상황에 대해서 같이 이해를 하시면 단순하게 음악 기술적으로 큰일을 했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는 차원에서 들어온 그런 업적이라고 이해를 하실 수 있는 거죠.

지금 말씀드리는 그 내용에 조금 더 보충이 되는 내용인데요. 아까도 예악으로 다스린다고 했잖아요. 정도전이 전문(箋文)을 올릴 때 바로 그 얘기를 해요. 정치하는 요체가 곧 예악에 있다. 그래서 예와 악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든 제대로 만들어서 통치를 제대로 해야 한다. 그랬을 경우 형벌도 시행이 적게 되고 그다음에 인위적인 행정도 덜 생기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해를 했던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시기였고 그다음에 왜 그렇게 음악이 중요하냐라고 하는 전거에 대해서도 조금 이해를 하셔야지만 박연의 업적이 더 부각이 되는데요. 실제 잘 다스려진 시기의 음악은 굉장히 화평하다. 그러면 이제 역으로 이렇게 지금 이 시대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거예요. 우리 시대 음악은 참 들을만했고 정겹고 참 향수도 자극하고 그랬는데 요즘 음악은 도대체 들을 수가 없고 무슨 얘기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제 조선시대에는 잘 다스려진 시대의 음악은 굉장히 평화롭다, 화평하다. 정치가 잘되니까 백성들이 시름을 겪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한탄의 소리보다는 노래가 먼저 나오고 하는 거다라고 기본적으로 인식을 하기 때문에 조선의 역대 왕들은 적어도 내가 통치하는 시대에는 내가 통치하는 시대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나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뭐가 먼저냐면 통치를 잘하는 게 먼저죠. 그래야지 음악이 잘 나오는 거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박연 선생하고 하는 공부 이야기는 국가의례에서 사용하는 음악 이런 것들이 그런 거는 모범이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잘 다스려지는지 안 다스려지는지가 나라의 의례를 할 때 하는 그 음악들에서 지금 증명이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잘못된 거 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것도 역시 전거가 예기 악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운데 왜 그러냐면 그 정치가 화평하기 때문이고 어지러운 세상의 음은 원망하고서 노기를 띠니 그 이유는 정치가 어긋나 있기 때문이고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고 시름겨우니 그 백성이 곤궁(困窮)하기 때문이다. 성음의 도는 정치와 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기 악기에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정말 잘 다스려지는 사회에는 음악도 자연스럽게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조선 전기에 문물을 다 정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음악이 안 돼 있다. 지금 고려가 넘어갔고 이제 몇 왕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정비해야 할 내용이 굉장히 많다. 태조 대에도 많은 정비를 해요. 그다음에 태종 대에도 많은 정비를 해요. 여전히 세종 대는 더 큰 정비를 해야 하는 시기라고 인식을 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세종대왕이 통치를 오래했고 그다음에 주변에 좋은 신하들이 많이 있었고. 그중에 하나가 박연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오늘 박연과 같이 연구를 하는 시간이고요. 이 박연 당시에는 국가 음악 기관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아악서(雅樂署), 전악서(典樂署) 이거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기관이에요. 기능들이 다 달라요. 종묘나 제사 음악을 주로 담당을 했고 전악서에서는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연주하는 연향(宴享)을 위한 기구였고 그다음에 종묘제례(宗廟祭禮)의 일무(佾舞)라든지 악장(樂章) 이런 것은 봉상시(奉常寺)에서 담당을 했고 그다음에 악학(樂學)은 연구 기관이었고 관습도감(慣習都監)의 경우는 여악(女樂), 여성 연주인들이 연주하는 그런 음악 연주를 여기에서 많이 담당을 해서 이런 음악기구들이 나중에는 국가 기관은 사실은 이렇게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화하고 작은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 상식이죠. 그래서 이제 조선 전기에도 그런 논의가 결국은 이루어지다가 세조 대에 장악서(掌樂署)라고 하는 것으로 폐합했다가 장악원(掌樂院)으로 확정을 해서 조선조 내내 장악원이라고 하는 국가 음악기관이 존속하다가 지금은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조선조 장악원하고 지금의 국립국악원하고는 신분제가 다르기 때문에 내용은 달라요. 그렇지만 그 뿌리는 굉장히 오래된 뿌리라고 이해를 하시면 되고 그런 과정에서 이렇게 복잡한 기관들이 있었고 전악서라고 하는 곳이 이제 연향을 위한 음악을 담당을 했다고 했잖아요. 박연 선생이 과거 시험을 보잖아요. 그래서 생원시에 합격을 했을 때 28세 때 생원시에 합격을 했는데 이분이 어렸을 때 주변에 노악사한테 피리 혹은 대금을 배웠다고 기록에 나오잖아요. 저를 배웠다, '피리 적' 자. 그런데 자기가 열심히 배웠는데 동네에서는 정말 이분 실력이 좋다. 누구나 다 우리 박연 선생의 피리, 박연의 대금 연주는 최고다라고 동네에서 아주 소문이 자자했어요.

그런데 이제 중앙 입장에서는 시골이잖아요. 중앙 입장에서 보면 서울 입장에서 보면 지방이잖아요?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울과 지방 차이가 좀 나죠.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동네에서 모든 사람이 칭찬을 하니까 이제 서울에 올라와서 음악기관 이 전악서에 소속돼 있는 사람이 향악이나 당악이니까 피리나 대금 연주자가 있거든요. 전악서 악공을 찾아갔어요. 내 실력을 좀 봐 달라. 이제 연주를 해보라 했던 거죠. 그래서 연주를 했단 말이죠. 여러분 프린트물 11쪽에 나와요. 거기 인용문에 제가 소개를 해드렸는데 앞의 인용문 용재총화에 나오는 기록이에요. 성현, 성종 대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박연 선생 얘기가 나오는데 그 앞의 인용문을 보니까 대제학 박연은 영동의 유생이었는데 향교에 수업할 때 이웃에 저를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독서하는 여가에 그 악기를 배웠더니 지역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다라고 칭찬 했다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두 번째 인용문을 보세요, 용재총화에 나오는. 과거 보러 갔다가 이원, 아마 전악서일 거예요. 전악서에 저를 잘 부는 음악인 앞에서 이걸 불고서 교정해달라고 하니까 그냥 비웃은 거죠. 크게 웃으면서 음절이 비루(鄙陋)하고 절주(節奏)에 맞지도 않고 옛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다시 고치기 어렵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악기라는 게 여러분 배우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도 사실 어렸을 때 저는 이제 제가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집에 오르간이 있었어요. 그다음에 초등학교 가서 피아노를 샀거든요. 저 어렸을 때는 서울에 피아노가 많지는 않았어요. 그랬는데 제가 오르간을 제 마음대로 막 쳤어요. 저는 이제 귀가 열려있는 편이어서. 그런데 제가 막 치고 싶은 대로 쳐도 음악이 잘 만들어졌거든요, 들을만했고. 그리고 언니도 열심히 잘 쳤고, 언니가 오르간에서 연주를 하면 굉장히 잘하는 줄 알았어요, 저 어렸을 때. 우리 언니가 최고로 연주 잘한다 이랬는데 제가 나중에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면서 내가 얼마나 나쁜 습관이 들었었는지를 알았어요. 그러니까 악기라는 건 초창기에 손 모양이나 이런 게 제대로 안 잡히잖아요? 그러면 끝까지 고치기가 어려워요. 박연 선생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전문가가 보더니 나쁜 습관이 있고 옛 습관이 굳어져서 고치기 어렵겠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결국은 박연 선생이 찾아가서 나를 지도를 해 달라. 그래서 일정 기간 레슨을 받아요. 요즘 표현으로 레슨을 받는 거죠. 그래서 실력이 굉장히 좋아진 걸로 그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분이 선배는 가르칠만하군요. 그리고 규범이 이루어졌으니까 나중에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라는 평가까지 들었고. 그리고 더 지나자 악공이 그래요. 제가 도저히 못 미치겠습니다, 실력이. 그러니까 이분은 제가 생각하기에 음악성을 타고난 분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성을 타고나잖아요. 그러면 남들 10시간 배울 때 1시간만 배워도 확 실력이 좋아져요.

우리 조선의 왕 중에 세조 대왕이 그래요. 세조 대왕이 사실은 무인인데 이분은 절대음감을 타고난 분이에요. 그래서 음이 하나 딱 나오면 그 음은 어떤 음인지 탁 알아맞히고 그러는 분이에요. 그런데 여러 대군들이 같이 있을 때 세조대왕은 자꾸 밖으로 나가서 말 타려고 하고 활 쏘려고 하지 악기 배우려고 안 해요. 그런데 연습도 별로 안 하고 그런데도 딱 앉아서 연주를 시키면 훨씬 잘했대요. 그게 이제 타고난 음악성 때문에 그런데 박연 선생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비록 습관은 잘못 들었지만 연주를 몇 번 교정해 주고 하니까 실력이 확 좋아졌다는 게 기록에 나오고 악공이 내가 못 미치겠다 이렇게 하고. 아마 여기 앉아계신 분 중에서 음악성 좋은 분들은 이해하실 것 같아요. 좀 빨리 배우는 거. 그래서 그런 거가 장악원 음악 기관의 관리들은 음악을 아는 사람을 보내야 해요. 조선조 내내 장악원의 제조(提調)라는 것이 제일 높은 직급이거든요. 요즘으로 2급 공무원 혹은 3급 정도 1급 후반 종1품, 정2품 그 정도 관리가 장악원 제조를 맡거든요. 수장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조선조 내내 이런 논의를 해요, 왕들이. 장악원 제조는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악이 잘못됐는지 수장이 잘못됐는지 잘됐는지도 모르면서 음악을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연주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박연이 아주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되는 거죠. 악학별좌, 악학제조를 하면서 음악을 본인이 그렇게 잘 알기 때문에. 세종 대는 음악이 잘되게 돼 있어요, 바로 박연 선생 때문에.

그래서 용재총화에 어린 시절의 기록 때문에 우리가 세종의 업적을 세종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이해를 할 수가 있고요. 지금 이제 박연 선생이 세종실록의 기록에 굉장히 많이 나와요. 많이 나오는데 그 기록의 내용 중에 거의 대부분은 상소문(上疏文)이에요. 음악이 잘못돼 있습니다. 이거 고쳐야 합니다, 저거 고쳐야 합니다라고. 그렇게 상소를 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 상소문을 모아놓은 것이 난계 선생 유고(遺稿), 후손이 순조 대에 박심학이라고 하는 후손이 간행한 책이에요. 난계 선생 유고에 상소문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나와요. 그래서 거기에 나오고 그리고 세종실록에 있는 거가 상소문에 빠진 것도 있고 또 그 반대도 있고. 그다음에 세종실록의 상소 내용 하고 난계 선생 유고의 약간 다른 것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거의 대부분 음악과 관련된 건데 이걸 정리해서 오늘 저하고 같이 말씀을 나눌 내용들이 전부 여기 들어가 있어요. 보면 궁중음악이 전반적으로 다 정비를 해야 한다. 그 얘기가 제일 많이 나오고 그다음에 제사음악 지금 잘못된 것이 많다. 이것도 정비해야 한다. 그다음에 회례라고 해서 회례라고 하면 뭐냐 하면 정월 초하루하고 동지에 군신들이 전체가 모여서 하는 그런 의례를 회례라고 해요. 그래서 정식 회례를 하고 회례연(會禮宴)까지 하거든요. 그런데 정월 초하루, 지금은 동지가 그렇게 중요한 절기가 아닌 것처럼 인식을 하는데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하고 동지가 가장 중요한 절기였어요. 그래서 왕실에서 동짓날 할 게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동짓날은 우주의 음기가, 어두움이 가장 긴 날이잖아요. 동짓날이 지나면서 하루하루 양이 조금씩 해서 하짓날이 해가 제일 긴 날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동짓날이 마치 새로운 계절이 시작하는 걸로 인식을 했거든요. 그래서 동짓날의 의식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정월 초하루하고 동짓날에 하는 게 회례의였거든요. 그런데 그때 의례를 할 때 다 음악을 연주를 했어요.

아까 예와 악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예가 의례고 악은 의례 때 연주하는 음악들이란 말이죠. 동지는 양기가 가장 성해야 하는 경사스러운 날이고 또 정초는 정월을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때에 연주되는 음악 정비해야 한다. 논리가 다 있어요. 조금 이따 다 말씀드릴 거예요. 그다음에 조회를 할 때 조회는 매달 하게 되는데 신하들이 월별로 모여서 하게 되는데 그때도 음악을 연주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음악을 아무거나 연주를 하면 안 돼요, 안 되고 1월에 조회를 한다고 하면 1월에 해당하는 그 선율, 2월에 해당하는 선율,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음악이라는 것은 기의 반응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지금 그런 걸 정비를 할 것을 주장을 하고. 그다음에 악기가 계속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악기를 만들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율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황종(黃鍾)이라고 하는 기준음을 만드는 율관을 재정을 해야 하는데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율관 재정을 하기 위해서 난계 선생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해요, 여러 노력을 그런 거. 그다음에 악기가 없어졌거나 또 수정을 해야 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 악기들 많이 제작을 한 거죠. 그래서 이 상소문에 바로 이런 내용이 주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내용을 박연이 어떻게 실현했는지 실현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가 저하고 공부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될 테고 그래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박연이 음악을 잘 아는 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그러면 이제 박연 선생의 업적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제 제사음악이나 회례, 조회. 특히 회례, 조회 음악의 경우는 아악으로 연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러니까 메이드 인 조선의 아악. 중국의 아악이 아니고 조선에서 만든 아악을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요, 조선의 아악으로. 그래서 그때 어떤 것들이 만들어지는 건지 보시면 되는데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음악사에서 박연을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분은 저분은 사대주의 대표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는 분이 있어요. 왜 중국에서 만든 음악만 다 수입 해다가 향악이나 당악보다는 아악이 중요하다고 하냐.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그것만 주장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수많은 음악곡을 향악을 수집을 하고 정리를 하고 조가 잘못된 거 바꾸고 하는 노력도 굉장히 많이 해요.

그 대표적인 걸 제가 소개를 여기다가 해놨는데 향악곡(鄕樂曲)을 40여 곡을 수집을 하고요. 그다음에 거문고곡의 곡조가 있어요, 최자조(嗺子調), 탁목조(啄木調)라고. 이 연구자들이 연구를 다 해놓은 그런 주제들인데요. 가야금곡 정비하고 그다음에 가사나 곡조별로 그 풍을 다 정풍이냐, 변풍이냐 나눠서 정리를 하고 이런 업적들도 하기 때문에 아악만 한 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제 박연이 실제로 지금 앞에서 이런 저런 배경을 말씀드렸는데 음악을 정비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데 잘못됐다. 바꿔야 한다. 이런 걸 전체 상소문을 통해서 주장을 하고 또 많은 것들이 받아들여지거든요. 어떤 주장을 하는지 이제 하나하나 보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먼저 조회아악을 재정하는 업적. 이게 처음 거론된 게 53세 세종 12년에 조회아악을 재정해야 한다. 조회를 할 때 연주되는 음악을 아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인데요. 이 주장 중에 여러 주장이 나오는데 그 주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세종 13년에 논의가 구체화 되는데 그 해당하는 달에 맞는 음악 선율을 써야 한다. 예를 들면 그걸 수월용율(隨月用律)이라고 해요. '따를 수' 자, 해당하는 월에 따라서 율을 사용한다는 뜻이죠. 수월용율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게 우리 음률이 12음이잖아요. 1년이 전부 12율하고 같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11월이 황종(黃鍾)이 되고요. 12월이 대려(大呂)가 되고 태주(太簇), 협종(夾鍾), 고선(姑洗), 중려(仲呂), 유빈(㽔賓), 임종(林鍾), 이칙(夷則), 남려(南呂), 무역(無射), 응종(應鍾)까지 해서 12음이 전부 해당하는 월로 인정을 해요, 인식을 해요. 그래서 11월에는 황종률로 되는 선율을 연주해야 한다고 해요. 그게 기에 응하는 거로 설명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관습이 여러분이 문집을 보면 예를 들면 11월에 서문을 썼다고 하면 황종월에 서하노라 이런 게 나오거든요. 황종월 하면 그게 11월로 이해를 하셔야 해요. 문집 많이 보신 분들은 이 음이름을 모르시면 이제 대려월이러면 대려월이 도대체 뭐야? 그런데 이건 상식적으로 사실 알고 있었어요. 조선시대 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은 모르실 수 있죠, 이걸 안 배우시면. 그런데 조선시대는 상식이었어요. 그래서 황종월에 서하노라, 태주월에 서하노라 그러면 아 1월이구나, 11월이구나 이걸 알 수가 있는데 그래서 이 해당 되는 월에 해당하는 조를 사용해서 연주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11월에 조회아악을 주장을 하는데요. 이건 노래로 안 할 거예요. 한번 그냥 소개를 해드린 건데요. 여러분이 이런 악보를 놔두면 노래를 하실 수 있을까요? 옛날 분들은 다 하셨어요, 음높이가 있기 때문에. 조금 이따 악보를 보여드리면서 실제 노래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볼 겁니다. 조회아악을 사용해야 한다 할 때의 핵심은 해당하는 월의 선율을 써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고 그다음에 이제 회례악무(會禮樂舞)를 재정한 일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지금 조회아악을 정리한 것도 중요하지만 회례라는 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동지하고 정월 초하루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데 그 시기에 음악을 연주를 할 때 아무거나 하면 안 되는 건데 이분이 주장하는 것이 이제 처음으로 회례연에 아악을 사용한 해가 지금 15년, 세종 15년 1433년인데 세종 15년 1월 1일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어떤 거를 써야 하는지를 잠깐 소개를 해드리면 이 회례연의 공연 종목은 굉장히 많아요. 지금 드린 아악 선율도 나오지만 아악 선율 말고도 이게 가장 중요한 연향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궁중정재(宮中呈才), 몽금척(夢金尺), 오양선(五羊仙), 하황은(荷皇恩), 포구락(抛毬樂) 이거 지금도 다 국립국악원이 연행하고 있어요.

혹시 포구락 이런 거 보신 분 계시나요, 국악원에서? 지금도 연향을 하고 있어요. 보셨죠? 엄청나죠? 몇 백 년, 천 년 뒤 이건 고려시대부터 연행 되던 거 지금도 하고 있다는 거. 물론 전승이 정말 100% 그대로 됐느냐? 이거에는 의문은 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전승이 되고 있는 그런 정재들이거든요. 그다음에 일무(佾舞)도 춰요. 쭉 서서 추는 춤을 일무라고 하거든요. 지금 일무는 제례악(祭禮樂)에만 쓰고 있어요. 회례악무(會禮樂舞)으로는 안 써요. 회례악무도 원래는 줄 지어서 추는 일무를 췄거든요, 조선시대에는. 그다음에 등가(登歌), 헌가(軒架)에서 악곡을 연주를 하는데 이때 여러분이 회례라고 하는 의례를 잠깐 생각을 해보시면 왕이 이제 입장을 하시고 퇴장도 하실 거 아니에요, 끝날 때. 그다음에 왕의 입장에서 앉아 계시면 신하들이나 왕세자들이 다 절을 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또 그다음에 음식도 올리고. 그런 모든 순서들이 의례가 있는데 그 순서마다 다 음악을 연주를 하는데 그때 이제 이런 음악을 연주를 한단 말이죠. 예를 들면 왕이 출입할 때 융안지악(隆安之樂)을 연주한다, 왕세자나 신하가 절할 때는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한다. 헌수(獻壽)를 하고 상을 올릴 때는 휴안지악(休安之樂)이다. 이러이러한 음악들을 연주를 했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음악을 박연이 이제 재정을 한 거예요, 선율을. 그래서 일단 그 회례아악 선율 중에 휴안지악이라고 하는 음악을 여러분이 맛보기를 하고 같이 노래를 해보려고 해요. 그래서 이런 악보는 지금 한글로 해드린 거는 이제 여기 나이 어린 친구들이 혹시 있을까 해서 여러분들은 이 한자, 율자를 다 아시겠지만 그분들을 위해서 한글로 해놓은 거고 요즈음의 계명을 같이 한번 소개를 해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한번 했는데 이런 악보를 율자보(律字譜)라고 얘기를 합니다, 율자보. 율자보라고 하는 악보는 음높이만 알면 노래 부를 수 있는 음악에는 굉장히 좋은 악보예요. 그러니까 리듬 길이가 기냐, 짧으냐는 거기서는 그냥 정하면 되기 때문에 음 하나하나가 그냥 일정한 길이를 가진 그런 음악은 이렇게 율자만 써놔도 충분히 다 연주가 돼요. 한 박자를 하나를 할 거냐, 아주 길게 하나를 할 거냐 이것만 정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이 회례아악의 선율 하나를 여러분이 한번 저하고 같이 노래를 불러볼 거예요. 불러볼 건데요. 또 시키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 잠깐 이제 이걸 잠깐 보시면요. 12율려, 율려라고 하잖아요. 우리 12음은 음양으로 만들어져요. 그래서 홀수 부분에 있는 것은 양률(陽律), 짝수 부분에 있는 것은 음려(陰呂). 그래서 율려(律呂)라고 해요. 12율려라고 해서 12율려 하면 양과 음과 양과 음 계속 번갈아서 음이 12음이 출연하게 되는데 이렇게 홀수 위치에 있는 것을 양률이라고 하고요. 짝수 위치에 있는 것을 음려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음악의 음 시스템이 중국 계통에서 수입된 음악은 대부분이 황종음이 이렇게 C황종. 여러분 피아노 보시면 열쇠 있는 부분에 도 음이 있잖아요. 그 음이 황종음하고 똑같고 그다음에 이제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악기였던 대금이나 거문고, 가야금 이런 악기들의 음높이는 조금 높아서 황종음이 E플랫이나 이거보다 조금 낮거나 조금 높거나 이래요. 그래서 어떤 음악 계통이냐에 따라서 조금 높고 조금 낮은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이따가 저하고 같이 노래를 불러봐야 하는데 부르시기 전에 이제 연습으로 도, 레, 미, 파, 솔. 도, 레, 파, 솔, 라. 다섯 음만 알면 금방 다 노래하실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한 번 맛만 보시기 위해서 이 노래를 하시기 전에 연습을 좀 해야 하는데 지금 여성분들이 좀 많은 편이니까 음높이를 절대 음을 안 하고 제가 상대음으로 잡아드릴게요.

-(노래)황 태 중 임 남 임 중 태 황.
-하고 중 하고 이 음이 하나 더 나와요. 그리고 지금 제가 노래 부를 때는 여러분하고 할 때는 7음이 나와요. 중국 7음계가 나오는데 우리 음악을 할 때는 지금 부른 황, 태,중, 임, 남 다섯 음만 하면 대부분 해결이 되는데 중국에서 수입된 음악이나 중국 분위기는 내는 음악에는 7음을 다 써요. 그래서 이 유빈음까지 써요. 그래서 황, 태, 고, 중, 유, 임, 남, 응까지 써요. 그래서 지금 저하고 노래할 음악에는 7음이 다 나와요. 그래서 조회, 회례할 때 쓰는 그 아악의 선율을 지금 율자보로 돼 있는 것을 한번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지금 이 유빈음이 나오잖아요. 이게 이제 파# 음이에요. 이게 조금 어렵게 느껴질 테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일단 계명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한번 해보실래요? 시작.
-(노래)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그건 내실 수 있죠? 솔 한번 내보실래요?
-(노래)솔~
-미.
-(노래)미~
-시.
-(노래)시~
-파.
-(노래)파~
-레.
-(노래)레~
-미.
-(노래)미~
-라.
-(노래)라~-
-솔.
-(노래)솔~
-시.
-(노래)시~
-라.
(노래)라~-
-파#.
-(노래)파~
-미.
-(노래)미~
하시겠죠? 이거 같이 노래 부르실 수 있겠죠? 바로 이게 조회아악 노래예요. 이제 노래 선율에다가 가사만 이제 갖다 붙이면 돼요. 그래서 한번 일부이긴 하지만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전체입니다, 일부가 아니고. 그래서 황종음으로 시작을 해서 황종음으로 끝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아악의 특징인데 이게 기조필곡 원칙이라고 해요. 시작한 음에서 끝나는 음도 일치하게. 기조필곡(起調畢曲) 원칙이라고 하고. 그다음에 노랫말을 붙이는 원칙은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 한 글자에 음 하나. 노랫말 하나에 음 하나.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면 그렇게 해야지만 노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이 돼요. 가사 하나에 음 하나를 붙이면 노래 내용이 확실하게 전달이 돼요. 그래서 이게 아악의 원칙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도록 해야 하고 선율이 복잡하면 의식을 하거나 의례를 할 때 너무 복잡한 음악을 하게 되게 귀가 팔려버려요, 음악에. 그래서 지금 뭐 했지? 이렇게 돼버리거든요, 음악에 빠져버려서. 그래서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해요. 그러니까 음악이 아주 재미있어도 안 돼요. 그리고 가사도 한 글자에다가 만약에 여러 가사를 붙이면 뭐라고 하는지 주워섬겨서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회례아악을 이런 원칙을 가지고 만들어요. 그러니까 아악을 써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논리가 거기서 나오는 거거든요.

황, 태, 한번 해볼까요, 같이? 지금 다 계명 연습하셨죠? 아마 이 음 빼고는 다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혹시 계명을 커닝하시고 어르신들은 이 한문으로 노래를 해 주세요. 황, 태, 응, 남 이렇게. 한 박자를 하나, 하나 이렇게 해서. 시작.
-(노래)황 태 응 남, 응 남 태 황, 응 황 응 남, 임 남 황 임, 유 임 남 고, 황 고 태 황. 잘하시네요, 생각보다. 지금 여러분이 노래만 하셨잖아요. 선율 노래 내용도 없이 노래만 하셨는데 이제 여기에 여기 악기가 다 들어온다고 생각하시고 근정전(勤政殿)이라고 생각하시고 넓은 공간이라고 생각하시고 많은 악공들이 제대로 된 반주를 하면서 노래한다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장엄한 음악이 되죠. 그런데 이 음악이 막 춤추고 싶고 재미있고 이건 아니죠.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의례음악은. 그래서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고 선율은 조금 현대음악처럼도 느껴지시죠? 그러니까 7도 음정 도, 시 이런 거는 7도 진행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진행 잘 안 해요. 그런데 중국에서 들어온 음악 중에 이런 선율 진행이 있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분위기로 이해하시면 되는데. 황종음은 모든 음의 시작이고 절기. 모두 다 절기를 반영하고 있고요. 그 절기에 맞는 의미가 다 부여되어 있어요. 악학궤범을 한번 참고를 하시고 제 책에도 일부 그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회례아악을 맛을 보셨고요.

그다음에 이제 악기를 제작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가 됐는데 편경이라는 악기는 조선에서 계속 수입을 해서 제작을 해야지만 연주할 수 있는 그런 악기였는데 제작을 못하니까 편경을 완성을 해야 하는 과제가 박연한테 부여돼 있는데 박연 이전 시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소리 좋은 돌이 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박연 시대에 이 돌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다라고 정확하게 이름은 안 나와 있는데 박연의 역할이 굉장히 컸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돌을 찾도록 유도를 했거나. 그런데 돌이 어디에서 발견이 되냐면 남양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규장각(奎章閣)에서 악기조성청의궤(樂器造成廳儀軌)를 해제를 하다 보니까 거기에 지명이 나오더라고요. 남양에 곤달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어요. 지금도 그 명칭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기록에 나오더라고요. 남양의 곤달산에서 돌을 캐온다. 그래서 대개 악기조성청의궤 같은 게 왜 만들어지냐면 대부분 겨울철이 되잖아요. 그러면 궁중에서 화재가 나요. 화재가 나면 중요한 장소마다 악기 창고가 있어요. 악기고라고 하는데 거기에도 악기다 다 보관이 돼 있는데 편종이나 편경 같은 악기는 크기가 크기 때문에 그 악기고에 반드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면서 보관이 돼 있는데 예를 들면 인정전에 불이 났을 때 그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다 타잖아요. 그런데 인정전의 악기고에 보관돼 있던 악기도 다 타버리거든요. 그런 식으로 이제 겨울철에 화재가 나면 악기까지 다 타버려요.

그런데 편경은 돌이잖아요. 돌이 탈까요? 안 탈까요? 안 타요? 탑니다. 돌도 타요. 돌도 타서 불이 붙어서 그게 반파되거나 전소되거나 아니면 온전하거나 이래요. 그래서 악기고에 화재가 나면 편종, 편경 같은 거가 어떤 거는 다 타고 어떤 거는 조금만 남아있고 어떤 거는 온전하게 남아있고 그래요. 그래서 황종부터 12율명 아까 말씀을 드렸잖아요. 12율 중에서 어떤 거는 유빈음만 탔고 어떤 거는 황종도 타고 임종도 탔고 어떤 거는 반파되고 어떤 거는 전소되고 막 이래요. 그러면 이제 비어있는 음이 있잖아요. 비어있는 음을 제작을 해야 해요. 예를 들면 임종, 솔 음이 타버렸다. 그러면 솔 음에 맞는 돌을 캐다가 사이즈를 재서 만들어서 해야 하는데 경돌이 나기 전에는 조선에서 불이 나버리면 와경(瓦磬)이라고 해서 '기와 와' 자 와경이에요. 이게 진흙으로 구워서 하는 소리가 제대로 날 수가 없죠. 그러니까 결국에는 피아노 건반 소리 안 나는 거랑 똑같은 거죠. 우리 피아노 건반 소리 안 나면 치다가 먹먹하게 나는 똑같은 식의 음악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를 지낼 때 그렇게 음악을 엉터리로 하면 안 되거든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한 상황에서 남양에서 경돌이 발견됐으니 얼마나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이제 경돌을 다듬어서 여러 악기를 만들었는데 이게 528매까지 만들었다는 것이 세종 15년 기록에 나와요. 그런데 이제 이 경돌을 제대로 편경을 만들기 전에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뭐였냐면 율관 제작입니다.

율관 제작의 업적이 여러분 제가 나눠드린 책의 14쪽에 율관 제작의 여러 업적이 나오는데요. 이 율관이라는 것은 일종의 기준음을 만드는 거예요. 기준음을 하나 딱 만들어 놓으면 그 기준음을 가지고 12음을 추출해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12율관의 제작 역사는 사실은 이제 우리가 박연 이전에 12율이라는 거가 처음에 12음의 시스템이 만들어진 건 고대 사회에서 만들어졌어요. 동양하고 서양하고 똑같아요. 기원전 한 500년 정도 그때에 서양에서도 피타고라스가 12음을 만들었고 우리 동양에서도 그 이전에 이미 12음의 시스템이 서경시대에 기록이 돼 있기 때문에 훨씬 전에 있는 음율 시스템이에요. 12음을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황종율관이라는 길이에요.

황종율이라고 하는 기준음이 되는. 그 율관을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느냐면 이 율관을 자연에서 채취한 기장쌀을 1,200알 들어가는 사이즈, 그거를 황종율관으로 재정을 하거든요. 그런데 중국 역사적으로 보면 황종율관을 재정하는 기준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바뀌는데 가장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했던 방법이 1,200알 쌀이 들어가게 만드는 그 황종율이 가장 정확하다 혹은 가장 모범이라고 인식을 했어요. 그래서 조선시대도 그런 제도를 이어서 해주에서 난 기장쌀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처음에 딱 만들어놨더니 중국에서 수입된 악기인 편종이나 편경 소리보다 높은 소리가 나와요. 황종음을 쳤으면 지금 황종율관을 만드는 것을 보니까 황종음보다 조금 높은 음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황종율관을 만들어놔야지 나머지 11음이 나오는데 기준음이 높아지니까 이건 망한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냐? 그리고 왜 높으냐? 알고 봤더니 중국에서는 양두산이라는 곳에는 나는 기장쌀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그 산에서 난 쌀은 우리 조선에서 난 쌀보다 조금 알이 커요. 알이 크니까 그 기준음이 조금 더 긴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 조선은 그거보다 땅이 덜 비옥해서 쌀이 작기 때문에 음이 높게 나온다는 이야기예요. 이해하시죠, 무슨 얘기인지. 그렇죠?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실패. 2차로 그러면 어떻게 해보냐? 그러면 중국음하고 유사한 중국 편종, 중국 수입 편종하고 유사한 음높이를 낼 수 있도록 밀랍으로 쌀알 크기를 조금 키워서. 왜냐하면 쌀이 나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수확하는 절기 기다려야 하니까 그러면 약간 크게 만들어서 밀랍으로 1,200알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너무 길어서 낮은 음이 나오는 거예요. 결국은 마지막에 율관도 대나무로 안 하고 동으로 만든 율관으로 만들고 여러 차례 시도하다가 결국은 중국에서 수입한 음에 맞도록 사이즈를 조정해서 결국은 율관을 기준율을 만들어서 실험을 해요. 그렇게 해서 이제 지금 여기 말씀드린 펀경이라든지 편종이라든지 기타 여러 악기들을 제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율관이라는 것은 기준이 되는 음인데 기준음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모든 악기가 제대로 음률을 낼 수 있다는 원칙 때문에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그래서 이 고민이 몇 년 동안 이어져요. 결국에는 원래 소리 나던 중국 수입 악기 거기에 맞는 음으로 항복하게 되는 거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음을 찾아서 만들고자 하는 시도, 그 시도가 중요하고 어쨌거나 율관은 제작을 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율관을 기준으로 해서 여러 악기들을 만들 수 있었고 정확한 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거. 그것이 이제 박연의 중요한 업적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 조선에서 많은 악기들이 만들어질 때는 전부 그 기준음을 따라서 악기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528매이기 때문에 이 매수라는 것은 뭐냐 하면 편종이라는 악기가 지금 이제 여러분이 국립국악원에 오시면 12율 4청성이라고 해서 두 단에 8개, 8개 해서 16개의 음을 매달거든요. 세종 대에 처음 만든 펀경은 12음만 매다는 악기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중성만 만드는 그런 악기였는데 나중에 16개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 528매라는 것은 한 개, 한 개 다 따졌을 때 528매예요. 그러니까 한 30 몇 대 정도. 개수로 따지면 그렇게 될 거라고 보시면 돼요.

그거 말고도 이제 여러 가지 악서(樂書) 편찬의 업적들이 있는데 이 악서 편찬 중에서 이때 굉장히 많은 음악들이 악보로 만들어지는데 박연 선생의 업적 혹은 어느 만큼 이런 책을 만들 때 박연 선생이 작용을 했을까? 그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많은 역할을 하셨다. 왜냐하면 음악을 잘 아시는 분이니까. 그래서 제가 악서 편찬 중에서 이런 흔히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소개를 한 번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제 세종 대에 정간보(井間譜)라고 하고 악보가 세종대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요. 이 악보 같은 경우도 여기 보시면 율명이 있잖아요. 아까 노래 불러 보신 율명을 이렇게 여기에다가 이렇게 써놓으면 이 정간 하나를 한 박으로 보통 했다고 의식을 한다면 이 한 획을 노래하면 32박까지 노래를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세종 대에 만들어졌는데 이 세종 대에 만들어진 이 악보를 세조 대에는 이렇게 절반으로 나눠서 16정간으로 만드는 방식을 바뀌어요. 이게 세종 대 업적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악보에 대한 해석은 사실은 설이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그래서 이 한 칸이 한 박이냐 아니면 이 정간, 대강을 한 박으로 해야 하느냐? 이런 설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서 여기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처음 제정 당시에는 한 정간에 한 박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실 수가 있고요. 이렇게 해서 이제 조회아악, 그다음에 회례아악을 정비를 했다.

그다음에 이제 상소문에 많이 나오는 것 중에 제사음악을 정비하는 업적이 나와요.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을 지금 이대로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중에 가장 논의를 많이 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양률을 써야 할 때하고 음려를 써야 할 때 이것을 구분해서 써야 한다. 그래서 이걸 정비하는 그런 일을 많이 하게 되는데 특히 이제 종묘제사(宗廟祭祀), 사직제사(社稷祭祀), 문선왕묘(文宣王廟) 지금 종묘, 사직제사 아시죠?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의 제사 왕과 왕비. 사직제사는 국토, 토지신 하고 곡식신한테 제사지내는 거, 문선왕은 누구죠? 공자. 그렇죠? 그래서 지금 성균관 대성전에서 제사를 하죠? 매해 두 차례 상정일(上丁日) 봄 하고 가을에 상정일에 제사를 하고 있죠? 농사신에 제사를 하는 건 선잠신(先蠶神), 그다음에 풍운뢰우신(風雲雷雨神). 그다음에 비 내리게 하는 신 이런 제사에서 제례음악을 정비해야 한다고 박연이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방법으로 사례로써 사직제례악을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음악을 연주할 때 악대가 높은 곳에서 연주하는 악대가 있고요. 낮은 뜰에서 연주하는 악대가 있어요. 높은 데서 연주하는 것을 등가(登歌) 혹은 전상이라고 하고요. 전상악(殿上樂)이라고 하는데 제사음악에서는 보통 등가라고 얘기를 해요. 그다음에 낮은 데서 연주하는 것은 헌가악(軒架樂)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등가, 헌가에서 연주할 때 그 음양을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요. 그런데 이제 박연 당시에는 등가, 헌가 다 똑같이 태주궁(太蔟宮)을 D음을 기준으로 하는, 레 음을 기준으로 하는 선율만 연주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음양이 나뉘지 않은 거로 보는 거죠. 그래서 높은 데에는 양률을 써야 한다. 태주궁을 사용하고 낮은 데서 연주할 때는 음려인 응종궁(應鍾宮)을 써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결국 이것을 지금 재정을 합니다. 지금도 박연이 주장한 이 내용을 그대로 따라서 사직제례악을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사음악 지금 사직제례의 선율을 정비를 박연 선생이 한 거가 지금까지 계속 연주가 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박연 선생이 정비한 이 선율이 사직제례만이 아니고 지금 문묘제례(文廟祭禮)를 하고 있거든요, 성균관에서. 거기서도 여전히 그때 정비한 선율이 계속 연주가 되고 있어요. 굉장히 뿌리가 오래 된 거고 업적이 굉장히 큰 거라고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보시면 아까도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 아악 선율의 특징은 노랫말 하나에 음 하나. 그리고 시작음과 끝음을 일치하게 하는 기조필곡 이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건데 사직제례악에서 그 원칙이 이제 나오는데요. 지금 사직제례악의 태주궁, 등가에서 연주하는 태주모음 선율을 한번 노래를 할 건데요. 이렇게 한글로 다 써드려서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한자 다 아시는데. 이제 노래를 아까 노래한 거 하고 크게 어려우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런 임시표가 많아서 좀 어떤가요? 어려우신가요? 여러분이 지금 저하고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낼 때 단 위에서 부르는 태주궁의 선율, 일자일음식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처음 시작하는 음하고 끝나는 음이 똑같은 선율. 아악 선율을 이제 한번 불러보시는 겁니다.

-(노래)태응남유, 고유응남, 태응이유, 응남태고, 태응고대, 태응태유, 고태응남, 응유고태.
-어때요, 음악이? 느낌이? 우주의 음악 같아요? 익숙하시진 않죠? 생소하시죠? 그런데 식상하거나 그렇지는 않죠. 뭔가 장엄한 맛이 있고 그래서 지금 이 음악은 여러분이 지금 이제 사직제례악이라는 음악이 조선시대 내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내내 사직대제가 실어졌었는데 지금 일제강점기가 들어오고 그다음에 6.25전쟁이 치러지고 하면서 일정시기 중단이 됐어요. 그리고 없어졌어요. 그러다가 1980년대 제 논문에 있는데 정확한 해를 기억을 못하네요. 80몇 년도에 지방자치제가 언제 시행이 되죠? 지방자치제가 시행이 되면서 우리나라 온 지역이 우리 지역에서 했던 옛날 중요한 전통을 찾아서 한번 올려보자 할 때 사직제례악도 그때 올려 졌어요. 다시 복원이 돼서. 그런데 처음 복원되던 당시에는 이 사직제례악의 이 음악을 연주를 안 하고 종묘제례악을 연주를 했었어요, 음악을 복원을 못해서. 그런데 다시 지금은 사직제례악 연주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것도 역시 일련의 좀 있으면 가을되면 할 거예요, 사직제례를. 그때 한번 가서 사직단에 직접 가서 들어보시면 되고 홈페이지에서 찾으면 정보가 나오거든요. 그때 한번 가서 이 음악을 들어보실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 음악의 느낌은 이 정도면 아악의 느낌을 충분히 여러분이 세례를 받으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익숙하지는 않으나 나름 장엄한 멋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 이해하시면 잘 이해하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래서 이제 등가에서 이제 헌가에서는 응종공인데 이거는 여러분이 굉장히 어려워 보이실 것 같아요. 이게 사실 오선보로 해놓으니까 어렵죠. 이것만 보면 쉽거든요, 사실은 쉬운데 오선보로 해놔서 지금 어려운 느낌으로 지금 다가오죠. 그런데 이건 나중에 여러분이. 왜 이렇게 박연이 제사음악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이거는 바로 제사의 의미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보본반시(報本反始), 나를 돌이키게 하는 행위거든요. 내가 지금 이 땅에 서 있는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 행위거든요. 그래서 하늘이 있고 땅이 있어서 하늘에서 볕을 내려서 땅에서 곡식이 있어서 내가 먹고 자랄 수 있고 그다음에 내 조상이 있어서 나를 낳으셔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고. 그다음에 나의 성현(聖賢)이 나를 가르쳐서 내가 인간처럼 살 수 있게 하고, 이런 거를 생각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왕실에서 조선에서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마찬가지죠. 제사가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음악을 이렇게 기에 응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재정을 해야 하고 그 재정한 음악을 가지고 연주를 해야지 만이 하늘에 혹은 땅에 조상의 그 내용이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라고 인식을 했기 때문에 바로 제사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그래서 적어도 여러분이 아마도 댁에서도 제사를 지내시겠지만 적어도 제사할 때만은 다시 한 번 나를 돌이키게 하는 그런 기회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 맥락이 제사의 근본 이유이기도 하고. 역시 박연 선생도 제사음악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는지에 대한 맥락이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3가지를 얘기를 보통 하는데요. 땅에 붓는 술 그다음에 음악 그다음에 춤 이 3가지를 얘기를 하는데 바로 이제 음악 부분에 대한 것을 지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직제에서 제가 지금부터는 악기, 제 프린트물에도 악기가 있습니다만 그 악기가 지금도 여전히 연주가 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악기를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악기 하나하나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할 거고 또 박연 선생이 지냈던 이 화면은 지금 재작년에 국립국악원에서 사직대제를 재연을 했었어요. 그래서 이것도 음반으로 만들었어요. 저희가 만들어서 이렇게 샘플로 있는데 이것도 역시 한번 유투브에서 감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노래했던 거 여기에 들어가시면 유투브에서 음악 들으실 수 있거든요. 의례의 전반적인 상황하고 같이 박연 선생의 뜻을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제사 지내는 모습까지도 다 도병에다가 그려서 지금 보존이 돼 있습니다. 지금 노래 부르셨던 바로 그 노래가 바로 사직단에서 연주가 됩니다. 사단, 직단 두 가지가 있고 사단, 직단에 다 제사를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제 세종 대에 이미 사직제를 지낼 때 등가, 헌가에 악기 편성을 이렇게 다 제시를 했는데 이건 지금 성종 대의 자료인데요. 성종 대의 자료를 보시면 엄청나게 많은 악기들이 동원이 돼서 연주를 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등가에서는 금(琴)하고 슬(瑟), 그다음에 노래가 24명 그다음에 여러 관악기들이 다 동원돼서 연주가 되는데 세종 당시에 악기가 지금 여기를 보시면 편종(編鐘)하고 특경(特磬) 이런 것들 3면에다가 그 악기를 다 둘러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기가 많이 필요한 거죠. 그러니까 악기를 제작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노력을 했는데요. 이건 제가 빨리 보여드리는 건 실제 악기 제작 해놓은 걸 보여드리려고 지금 빨리 넘기는데요. 지금 이 국립국악원에서 2014년에 한번 18세기의 상황까지 재연을 해서 연주를 해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한번 보여드리는 거고요.

이제 악기 실물, 세종 대의 여러 가지 악기를 만들었던 그 악기들을 한번 하나하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게 일무 추는 거. 아까 회례악무를 재정했다고 했을 때 회례악무에서도 제사처럼 이렇게 줄서서 추는 춤을 추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회례악무가 없어졌어요, 지금은. 그러니까 이제는 이렇게 일무는 제사 지낼 때만 볼 수 있어요. 여러분이 종묘나 사직이나 문묘 제사를 보러 가시면 이 일무 추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일무가 여기를 보시면 여기 6줄하고 여기 6줄 해서 36명이 추는 거로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건 제후국(諸侯國)의 질서고 천자국(天子國)의 경우는, 황제국(皇帝國)의 경우는 64명이 추게 돼 있어요, 8x8=64명이.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는 이제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국이 선언을 했고 그 이후는 현대가 됐지만 우리는 황제국으로 어쨌든 전통시대가 마감이 된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팔일무(八佾舞)를 추고 있습니다. 종묘에서도 그렇고 사직에서도 그렇고. 그런 자원인데 이때는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육일무(六佾舞)를 추는 그런 모양이고요.

상징적 악기인데요. 이 박연 선생이 대부분의 지금 제가 소개해드리는 악기들을 다 제작을 했거나 정비를 했거나 하는 악기들이에요. 그런데 여러분한테는 그 악기들이 전부 생소한 악기일 텐데요. 노고와 노도 사람 제사 지낼 때 쓰는 악기예요. 그런데 지금 4면북을 쓰고 있습니다. 숫자가 사람을 제사를 지낼 때의 4라는 숫자를 가지고 쓰고요. 흔드는 북입니다, 이게. 그래서 보시면 노고라고 하는 것은 사람 제사할 때 쓰는데 이 '노(路)'라는 것이 인도를 의미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사람 제사할 때 노고를 가지고 쓰고 그다음에 '고(鼓)'가 있고 '도(鼗)'가 있어요. 그런데 '고'라고 하는 것 북이라고 하는 것 치는 것은 조절한다고는 의미가 되고요. '도'라는 것은 아까 보시면 흔드는 북 있었잖아요. 흔드는 북 이렇게. 여기에 귀가 달려있거든요. 귀가 옆으로 이렇게 흔들면 귀가 서로 부딪칩니다. 그래서 우리 아기들 딸랑이도 그런 장난감 있잖아요. 그런 원리예요, 흔드는 북. 흔드는 북은 조짐을 보인다. 제사 지낼 때 '고' 하고 '도'를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은 '고'로 조절하고 '도'로 조짐을 보인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박연이 그 악기 정비할 때도 이런 의미 하나하나가 다 굉장히 생생하게 새겨지면서 악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그다음에 땅에다가 제사하는 악기는 8면북을 씁니다. 땅의 근원은 어디에 있냐면 주례, 주례대사악(周禮大師樂)이라고 하는 부분에 나와요. ‘악이 팔변하여야 지기가 강림을 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래서 그 숫자를 8으로 상정을 해놨습니다. 그래서 땅 제사할 때는 8면을 가진 악기를 연주를 하게 돼 있습니다. 국립국악원이 가지고 있는 영고, 영도 똑같죠? 옛날 자료하고, 그렇죠? 이런 악기들은 연주를 어떻게 할 것 같아요, 혹시? 8면을 어떻게 칠까요? 돌아가면서? 한 부분만 쳐요. 그러니까 저건 상징이에요. 저거는 수가 중요한 거지 8개를 다 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고도의 문명일수록 상징체계가 발달해 있습니다. 숫자의 상징, 모양의 상징, 위계(位階) 이런 것들이. 그래서 저희가 사직대제를 재연할 때 이걸 썼는데요. 색깔도 땅이기 때문에 황색을 씁니다. 색깔도 그냥 아무거나 쓰지 않고요. 다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하고 연주하는 절차도 따로 있습니다. 그다음에 하늘제사 할 때는 이제 면수가 6면이 되는 그런 악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악이 육변하여야 신이 강림한다 이렇게 상정을 하고 있죠. 아까 편종 말씀을 드리다가 악기를 안 보여드렸잖아요. 그런데 박연 당시 처음에 만든 악기 중에는 12음만. 그러니까 여기 6개, 여기 6개만한 중성으로만 한 옥타브 안에 있는 편종만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그 이후에 16개까지 12율 4청성이라고 하는 악기를 이후에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세종 대에는 이 두 악기가 다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종 크기가 같으면 음높이가 어떻게 조절이 돼요? 음높이가 다 지금 도, 도#, 레, 레# 이렇게 16음이 나와야 하는데 이게 크기가 같으면 조절이 어떻게 될까요? 두께로 해야 하죠. 그래서 편종이 주종소에서 만든 편종 그다음에 남양에서 발견된 경돌을 가지고 만든 편경. 이 두 악기는 크기는 다 똑같습니다, 우리나라 제도는. 그런데 두께를 가지고 소리를 조정해서 만듭니다. 편경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러면 편경이 두꺼워야지 높은 소리 날까요? 얇아야지 높은 소리 날까요? 얇아야지 높은 소리요? 그럴 것 같죠? 틀렸습니다. 두꺼워야지 높은 소리가 나요. 왜냐하면 체명, 몸울림악기 체명악기(體鳴樂器)는 지금 밀도, 몸을 때리잖아요. 그러면 촘촘해야지 높은 소리가 나요, 밀도가 진동수가. 그런데 얇은 거는 진동수가 성겨요. 그래서 낮은 소리가 나와요. 현악기나 이런 건 현악기는 조이면 팽팽하면 높은 소리가 나지만 여기 밀도를 가지고 하는 것은 두꺼워야지 높은 소리가 나요. 그래서 지금 여기 보면 12율 4청성이 여기부터 나오는데 도, 도#, 레, 레#, 미, 파, 파#, 솔, 솔#, 라, 라#, 시, 도, 도#, 레, 레#까지 해서 황, 대, 태, 협, 고, 중. 유, 임, 이, 남, 무, 응, 청황, 청대, 청태, 청협까지 해서 12율 4청성 음악이 이렇게 연주가 돼요. 16개 음이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아까 제가 사직제례악 노래를 같이해봤잖아요. 거기 해보시면 그 하나의 선율가지고 조 옮김을 계속해서 연주를 하게 돼요. 왜냐하면 그 태주가 필요한 음악이 있고 황종이 필요한 음악이 있고 하잖아요. 그러면 12음을 다 조 옮김을 해서 쓸 수 있게 되는데 조 옮김을 할 경우에 만약에 여기 이 음 이상 높아지게 될 경우에는 한 옥타브 다운 시켜서 노래하면 돼요. 그러니까 선율이 조 옮김 할 때마다 다른 음악처럼 들릴 수 있는 이유는 더 이상 높아지는 음을 한 옥타브 낮춰서 노래하기 때문에 조 옮김한 음악이 다 새로운 음악처럼 들려요. 그래서 이제 그런 악기 질서를 보셨고요. 또 아까 보신 편경이나 편종을 하나만 매달아 놓은 것을 특경이라고 합니다, 특경. 그래서 특경이라는 악기도 아까 악현도(樂懸圖)라고 해서 오케스트라 진열해놓은 악기 3면에 둘러놓잖아요. 둘러놨을 때 각 음을 맞춰서 황종 특경을 대려 특경 이렇게 다 맞춰놨습니다.

그런데 조선후기로 가면서 우리나라가 전쟁이 많아지고 했잖아요. 그래서 악기가 굉장히 많이 없어지고 전쟁이 나면 이 악기를 지금 편종, 편경 같은 악기는 아까 말씀드렸지만 한 번 만들려면 굉장히 어려워요. 화재가 겨울철에 나고 이러면 그다음에 이제 누가 왜적이 쳐들어왔다. 다 부수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제 보통 연못에다가 넣어놓고 가거나 아니면 땅을 깊게 구덩이를 파서 묻어두고 하거나 그래요. 그래서 악공들이 이 악기를 잘 보관해서 승급을 한 사람도 있고 그래요. 상을 받은 사람도 있고. 그런데 이런 악기들은 조선후기가 되면 많이 상해서 정조 임금이 즉위한 이후 몇 년 안 돼서 장악원의 모든 음악인들을 모두 불러 모으거든요. 불러 모으는데 장악원 제조가 그래요. 왜 황종 특경을 쓰지 않느냐라고 하니까 지금 황종 특경이 없어서 그냥 편종, 편경에 황종음을 대체해서 쓰고 있습니다. 황종음을 지금 이 음을 그냥 지금 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음이 나오니까. 그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조선후기 쪽으로 가면 악기가 많이 없어지거나 그래서 다시 복구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게 되죠. 박연 선생이 기초를 마련해놓은 거가 뒤로 갈수록 이런 전란도 겪으면서 그런 상황이 되는 거죠. 이것도 특경이라고 합니다. 종 하나를 매달아놓은 것.

박(拍)이라고 하는 악기. 음악을 시작할 때 하고 끝날 때 그리고 중간 진행을 알릴 때 연주하는 악기들이죠. 지금 제 프린트물에도 있지만 아쟁(牙箏), 대쟁(大箏) 이것도 악기도감에서 만들어요. 요즘의 악기지만 아쟁, 대쟁. 이건 아쟁이라는 악기고요. 거문고도 역시 악기도감에서 만든 사례가 있죠. 여러분 프린트물에도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비파(琵琶)인데요. 지금 여기를 보시면 목이 어떻게 돼 있어요? 꺾어져 있죠? 곡경비파(曲頸琵琶)라고 합니다. 곡경비파는 당비파(唐琵琶)라고 해요. 그리고 줄은 4줄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비파가 2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당비파, 향비파(鄕琵琶). 당비파는 중국에서 수입된 거고 향비파는 사실은 서역(西域) 지방을 통해서 삼국시대 아주 먼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건 그냥 향악기(鄕樂器)가 돼 있어요. 향악기로 돼 있는 악기이고 중국 악기인 금(琴). 고려시대에 수입이 돼서 우리나라에서 계속 제사음악을 연주할 때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문묘제례악이나 사직제례악을 연주할 때 이 악기를 쓰고 있습니다. 박연이 악기도감에서 정비를 하고 악기를 만듭니다. 금 연주하는 모습. 그다음에 슬라고 하는 악기입니다. 금슬이 참 잘 어울리는 악기잖아요. 여러분이 부부가 사이가 좋을 때 금슬이 좋다고 얘기하다가 슬이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금실이 좋다 이렇게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도 금실이 좋다 하니까 그것도 표준어로 인정했어요. 금슬이 좋다 해도 되고요, 금실이 좋다. 실 다음에 이가 나오니까 그냥 같은 발음이 돼서 지금 두 개 다 맞는 표현이에요. 그런데 바로 이 두 악기가 금슬입니다.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악기인데 이런 악기를 가지고서는 빠른 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아요. 장엄하고 그런 음악을 연주를 하고. 제사음악에서 많이 연주를 하는데 금과 슬이 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국악원의 연주자들이 재연해서 지금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소(簫)라고 하는 악기인데요. 서양에도 있죠? 팬플루트 같은 거. 파이프를 골고루 해놓고 그 음률을 일정한 음을 낼 수 있도록. 이것도 지금 국악원에서 재연해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잠시 단절이 되던 시기도 있고 그렇지만 지금 다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연주하는 모습이죠.

적(笛)이라고 하는 악기고요. 지금 국악원에서는 지금 보여드리는 악기들은 전부 세종 대에 소실돼서 또는 상해서 다 재연을 해놓은 악기들이지만 계속 지금까지도 전승이 되고 있어서 지금도 여전히 제사지낼 때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사직제례악 연주를 할 때 모습입니다. 그리고 관(管)이라고 하는 악기인데요. 관이 두 개가 붙어있어서 쌍관이 붙어있어요. 이것도 제사음악 연주할 때 쓰고 있습니다. 이거는 훈(塤), 도자기처럼 구워서 8음 중에 토부(土部) 악기예요, '흙토 자' 해서 도자기를 구워서 만든 악기인데 이거 구멍 보이시죠? 여기가 취고 부는 부분이고 여기 손으로 막고 뚫고 해서 음을 낼 수 있는 악기입니다. 역시 제사음악이고 박연 시대에 악기도감에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봅니다. 시간이 다 돼서 이건 지(篪)라고 하는 악기죠. 지라고 하는 악기는 여기에 부리가 있어서 따로 삽입시켜서 부는 곳을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연주하는 악기고 역시 제사악기고요. 빠른 속도로 보여드리면서 시간 마무리하겠습니다.

훈지상화(壎篪相和)라고 해서 훈과 지와 시가 아주 잘 어울리는 악기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형제간에 우애가 좋으면 훈지상화. 부부간의 사이가 좋으면 금실이 좋다, 금슬이 좋다. 전부 악기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경(詩經)에도 나오죠, 훈지. 아까 비파 중에 향비파를 못 보여드렸죠. 향비파는 곡경이 아니라 직경. 목이 곧고 줄이 5줄이에요. 당비파하고 조금 다르죠. 역시 세종 대에 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악기도감에서 만들었던 악기입니다, 박연 중심으로. 그다음에 이건 제가 그냥 아악기(雅樂器)로 보여드리려고 가지고 왔는데요. 어하고 축. 여기 지금 어떤 분이 굉장히 잘 아는 분이 계시네요. 딱 나오니까 적이다, 지다. 어떤 분이세요? 아, 책 보고 아신 거예요? 커닝을 하셨군요. 저는 그냥 야시는 줄 알고 굉장히 우리나라가 확실히 지금 굉장히 세련돼졌구나. 너무 좋아하고 있었는데 커닝하신 거였어요? 다음에 저 만나실 때는 커닝 안 하시고 탁 아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시면 제가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다음에 이제 생황(笙簧) 계열의 악기인데요. 생우화라고 해서 꽂는 관수가 달라요. 그리고 약간 고음역, 약간 저음역을 내고 여러 음을 내고 덜 내고. 그래서 이 생우화를 세종 대에 박연이 보완을 해서 만듭니다. 그런데 이게 조선후기에는 못 만들어요, 우리나라에서. 세종 대에는 만들었는데. 지금도 수입해서 써요. 만들 수는 있는데 우리나라 생황이 질이 떨어져요. 중국에서. 이 생황 수입 역사는 할 말이 많은데 이제 시간이 다 돼서 마무리하고 일단 한번 보여드리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국악원에서 만들어놓은 악기들인데요. 지금 한글로 지금은 표기를 합니다. 예전에는 태(汰)다, 응(應)이다 한문으로 표현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표현해서 한글세대에 맞게. 여의주 부분도 나오고요. 이렇게 해서 얼른 보여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편경치는 모습. 그다음에 예전에는 이 끈이 지금은 이제 이렇게 폴리에스테르지지만 예전에는 가죽으로 만들어놓기 때문에 이거를 다 풀어놓습니다, 연주할 때는. 가죽으로 해놓으면 이게 시간이 지나면 다 떨어져버려요. 끊어져버려요. 그래서 지금 다 푼 다음에 연주할 때 다 매서 연주를 합니다. 이렇게 지금 만들 때는 이렇게 음높이를 기록을 해놓습니다. 묶은 모습을 보여드리고요. 그다음에 이제 일무를 출 때 손에 들고 추는 도구예요. 약(若)과 적(篴)인데요. 그다음에 무무를 출 때는 도끼하고 방패. 업신여김을 방어하는 의미예요. 도끼와 방패는 모순 관계이긴 한데 방어하고 막고 치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는데 일무 모양까지 보여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문묘제례 재연한 모습 연주하는 모습이고요. 일무를 추는 모습까지 보여드리고 문묘제례를 국악원에서 연주하는 모습이에요. 각각 손에 드는 모습, 어떻게 전부 다 의미들이 있어요, 하나하나가. 동작도 의미가 있고. 그런데 한번 지금 이것은 제사 지낼 때 추는 모습이지만 박연이 회례악무로 재정할 때도 일무를 추도록 했어요. 그런데 이것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무 그러면 제사 때만 쓰는 걸로 그렇게 돼버렸지만 조선시대에는 회례악무로도 썼습니다. 이 정도면 박연 선생의 업적이 엄청나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런 상황까지 여러분이 같이 이해하신다면 박연이라는 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실 수 있을 것 같고. 시간이 지나서 여기서 강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