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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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우리시대의 시인

경북 김천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고 제 문학의 대부분 태생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경북 김천 이쪽 지역입니다. 저는 김천시 지금 이제 통합시군으로 김천시로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금릉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금릉군 봉산면 태화 2리라고 해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져 있는 곳인데 거기에서 거의 바깥세상을 잘 모르고 골짜기에 갇혀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었고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하고 계속 그 기간 동안 제가 보아왔던 어떤 자연이라든지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이라든지 이런 어떤 관계나 느낌, 이런 것들이 시로 나중에 시어로 창작되는 그런 과정들을 거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천은 포도가 굉장히 유명합니다. 포도 산지이고 그리고 또 자두 산지이기도 합니다. 7월부터 자두가 나기 시작하는데 곧 이제 포도도 하우스 포도가 이제 출하가 될 텐데요. 7월초부터는 본격적으로 김천 지역에서 나는 자두가 출하가 전국적으로 많이 되고 산지로써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김천에서 저희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자두 과수원을 하셔서 자두를 7월 한 달 내내 자두를 땄던 기억이 있고요. 8월 내내는 이제 포도를 땄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우스 포도는 이제 7월 초 정도 되면 초, 중순 정도 되면 본격적으로 출하철을 맞게 되는데 저희 동네도 지금 김천이 유명한 포도산지여서 그런지 저희 동네도 포도 농사를 짓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포도밭도 보실 수 있으실 거고 그리고 저희 동네 저수지라든지 한 차례 둘러보실 수 있고. 그리고 김천에는 큰 절이 두 군데가 있는데요.

직지사라는 절이 아주 고찰(古刹)입니다. 황악산 직지사인데 직지사 뒤쪽에 있는 이 산도 굉장히 큰 산입니다. 그 직지사라는 절이 한 군데가 있고 이제 둘러보게 되는 절은 직지사를 둘러보시게 되고 김천의 또 다른 절 가운데 한 군데는 청암사라고 했습니다, 청암사라고. 이 절은 이제 비구니 스님들이 많이 출가하시기도 하는 곳인데 청암사에 승가대학(僧伽大學)이 있습니다. 청암사와 김천의 직지사 두 군데가 유명한데 직지사를 좀 둘러보시게 되고 직지사 중에서도 암자가 지금 굉장히 직지사 산의 암자가 굉장히 많은데 그 중에서도 중암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중암, 중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이 중암이라는 곳은 직지사의 큰 스님이셨던 관응스님이라고 계세요. 관응스님이라는 스님께서 주석(駐錫)하셨던 절인데 이 관응스님은 굉장히 경전(經典)에 밝으셨던 분이셨어요. 그래서 한국 불교 큰 스님들 가운데서도 경학(經學)에 밝으셨던 분이 이 관응스님이셨는데 관응스님께서 거처하시던 곳이 중암이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가시게 되면 중암에 거쳐하고 계시는 관응스님은 시봉(侍奉)하셨던 스님 가운데 도진스님이라고 계시는데요. 도진스님이 지금 여기 중암에 주지이신데 암주(庵主)라고도 하고 주지라고도 하는데요. 주지스님으로 계신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공개가 안 되는 곳을 이번에 아마 스님께서 특별하게 공개를 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 시에 대해서 오늘 중점적으로 제가 어떤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고 그런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94년도에 등단을 했으니까요. 대학교 4학년 때 등단을 했습니다. 4학년 때 등단을 해서 지금 이제 등단한 지는 23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시집은 6권을 펴냈고요. 그리고 시집을 펴내는 일 외에 언론사라든지 신문이라든지 이런 데에 칼럼이라든지 이런 것을 많이 연재를 했었고 지금은 모 신문에 '가슴으로 읽는 시' 조선일보사인데요. '가슴으로 읽는 시'라는 코너를 3년째 지금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도 시를 알리는 지면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그런 지면에 참여를 하려고 했었고요. 그래서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 집배원이라고 있습니다. 문학 집배원으로 시를 소개하는 그런 집배원 활동도 1년 정도 했었고 다른 신문에서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에 '이 아침에 시'라든지 이런 지면도 같이 참여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쓰고 한국의 시들을 소개하는 역할들 이런 것들을 하려고 애써왔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시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지는 나라, 많은 분들이 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나라도 드문 것 같아요. 지금 근래에 제 또래 저와 동갑이고 잘 알기도 하는 친구입니다만 한강이라는 작가가 큰 상을 받아서 많은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만 소설가뿐만 아니라 좋은 시인들 저희 또래의 선후배, 제 또래의 동료 시인들뿐만 아니라 위의 선배님들이라든지 아니면 지금 젊은 시인들도 한국 시단이 아주 왕성하게 지금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수준도 굉장히 높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의 시인들의 시들이 대상문화재단이라든지 한국문학번역원이라든지 이런 데의 도움을 받아서 시집으로 다른 언어의 세계 독자들을 많이 만나는 그런 일들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어서 한강 씨가 받은 어떤 그런 영광스러운 상을 시 분야에서도 머지않아서 누군가 받는 그런 날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한국 시가 아주 섬세할 뿐만 아니라 세련된 한국 시들을 세계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그런 기회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13페이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인쇄물을 제가 보니까 가끔 저도 이 사전 강연에 참여를 하게 되는데 같이 읽지 않으면 사실 가지고 가셔서 다시 읽기는 굉장히 어려우실 것 같아요. 잘 안 읽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얘기니까 이 시의 태생지라는 산문을 먼저 읽어가면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전북 금릉군 봉산면 태화 2리 794번지입니다. 이 번지는 제 아버지께서도 사셨고 저희 큰아버지도 이 번지에서 사셨고요. 큰아버지께서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작고(作故)하시고 한 분의 큰아버지가 계신데 저희 794번지는 아버지의 두 분 형님네 가족도 794번지를 쓰고 있고 저희 집도 794번지를 쓰고 있고. 옛집도 794번지고 이사를 해서 조금 밑으로 이사를 왔는데 아직도 거기가 794번지입니다. 참 희한하고 아버지도 이 794번지를 떠나신 적이 없고 저도 이 본적지가 794번지입니다. 그래서 이 794번지에 사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희 큰아버지 가족 분들도 계시고 또 그 위의 큰아버지 가족 분들도 사시고 했던 곳이 794번지입니다. 지금은 김천시에 편입되어 있는데요. 저는 이제 위로 누님이 두 분 계시고 밑으로 여동생이 두 명이 있어서 제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외아들이어서 많이 애지중지 하시기도 하셨습니다만 엄하기로는 동네에서 입소문이 날 정도로 엄하셨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아버지께서 천수답(天水畓) 두어 마지기로 시작을 하셨는데 그래서 다른 집 농사를 돕는 일로 품삯을 받으셨습니다. 논일과 밭일뿐만 아니라 이 누에를 치는 일로 돈을 벌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보면 안방과 건넌방에 잠박(蠶箔)이라고 아시죠? 잠박이 가득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이 잠박에 있던 누에들의 몸이 막 커지면서 뽕잎을 갉는 소리. 누에가 뽕잎을 갉는 소리들이 자주 들렸고요. 또 잠박을 벗어나서 누에들이 막 기어 나와서 잠박 밑에 자고 있으면 누에들이 기어 다니면서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제법 몸이 굵어졌을 때 누에들의 뽕잎을 따오는 것은 누나와 저의 몫이었는데 소와 염소를 몰고 가서 야산이나 풀밭에서 풀을 먹이는 일도 하게 됐었죠. 친구들하고 골목을 뛰어다니고 멧등을 타고 산길을 뛰어오르는 일.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저녁에는 쇠죽을 끓이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가난하게 사셨기 때문에 이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셨어요. 농한기가 오면 아버지는 공사장 인부로 전국의 각지로 가셔서 예를 들면 터널 공사라든지 고속도로 공사라든지 이런 공사를 하러 다니셨고요. 어머니는 농한기가 되면 담배공장에 다니셨습니다. 담배공장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KT&G 한국담배인삼공사 지금 KT&G가 이 담배공장인데 저 어릴 때는 KT&G도 모르고 그전의 전신인 한국담배공사 이런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담배공장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몸에서 담배냄새가 그렇게 많이 났었어요. 하루 종일 담배 만드는 그 일을 하셨기 때문에 돌아오시면 몸에서 담배냄새가 가득 있었던 그런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어린 저에게 멀리멀리 바라보는 이런 일과가 많았는데 그 멀리멀리 바라보다 보면 동네에 깊은 산이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시골에 가서 마당에 서서 멀리 있는 산을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 산은 너무 깊어서 사람들이 사실은 동네 분들도 잘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산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호랑이를 봤다는 그런 분도 계셨는데 그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다 이장 분이셨는데 동네 이장 분이 젊었을 때 산에 가서 나무를 하러 가셨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그 혼비백산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한나절을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가 내려와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런 얘기도 있는데 사실 뭐 호랑이가 있었겠습니까만 아마도 그게 살쾡이나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진짜 호랑이를 봤다고 그러셔서 그만큼 이제 깊은 산이었고 멧돼지는 굉장히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래서 멧돼지를 잡을 수 있는 철이 있고 그거를 허가를 받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분들이 사냥개와 같이 저희 동네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데 실패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굉장히 잦다고 해요. 그리고 같이 간 사냥개들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굉장히 잦은 곳이 저희 동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깊은 산에서 먼 산에서 지금과 같은 장마철이나 여름철이 되면 소낙비가 막 시작이 돼서 저 끝에서 소낙비가 몰려오는 장면, 이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산그늘이 내려오지 않습니까? 산그늘이 동네로 이렇게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 그런 것들도 굉장히 좋았고 겨울 한철에는 눈보라가 치는, 눈보라가 막 치는 장면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멀리 멀리 먼데서부터 이렇게 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멀리 멀리 오는 산에서 먼 산에서 오는 비가 막 후두둑후두둑 덮기 시작하는 거라든지 참 그런 것을 요즘 이 도심에서는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보기 어려운데 저 어렸을 때만 해도 비가 막 덮기 시작할 무렵 막 소란해지는, 자연이 막 소란해지는 이런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바람이 살짝 일지 않습니까? 바람이 이는데 그때쯤 되면 어머니께서 마당을 한 차례 깨끗이 쓸게 하셨어요. 비가 오기 전에 마당을 한 차례 깨끗하게 쓸게 하셔서 그 마당을 쓸 때도 희한하게 집에 마당에 있는 쓸려나가는 것들. 그런 것들이 대문을 통과해서 저희 어렸을 때는 삽작문이라고 합니다만 대문을 통과해서 길가로 나가는 방향으로 쓸게 하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이 나요. 늘 항상 대문 쪽에서 거름을 모아두는 거름자리 쪽으로 집 안쪽으로 마당을 쓸게 하셨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차례 쓸고 나면 비가 후두둑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죠. 저 멀리서부터 비가 막 오는데 저는 그것을 시간에도 육체가 있다고 생각을 어느 순간 하게 됐어요. 시간에도 육체가 있구나. 저기서부터 시간의 몸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닌가. 우리가 시간이 경과하는 걸 잘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네 이렇게 얘기는 많이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는 걸 보기는 상당히 어려운데 뭔가 저기서부터 어떤 움직임이 지속되어서 이쪽으로 이동해오는 걸 보면 이것이 시간이구나. 이것이 시간의 실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굉장히 제 어렸을 때 많이 봤죠. 누군가를 마중 나갔을 때나 누군가를 배웅할 때도 보면 꼭 그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그 사람을 계속 배웅해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늘 먼저 가신다고 해서 인사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사람은 늘 그분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안 보일 때까지 끝까지 배웅하던 거, 이런 것이 저희 동네 어르신들께서 혹은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어떤 것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면 누구를 배웅하더라도 바로 작별인사를 끝냈다고 해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시야로부터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배웅을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저에게 가르쳐 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동네 이제 도둑골이라고 있었는데 여기 전설 같은 얘기가 많습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런 얘기도 있었고 거기를 호랑이가 같이 능선을 타고 다녔다 이런 얘기도 있는 곳인데 도둑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태화리 도둑골’이라는 시가 제 시 편에 있습니다. '리꽃이 피면 도둑골에는 모가지가 올에 걸려 노루가 운다지. 반나절 가웃 노루가 군다지. 이게 '봉산댁'이라고 쓴 것이 있고 ‘딱따구리 한 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이런 시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노루가 올에 걸려서, 올가미 같은 것을 설치해 놓은 것에 걸려서 노루가 막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요. 딱따구리가 이제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는 소리. 이런 것들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생각이 듭니다. 14페이지 밑쪽에 보면 미친 여자 얘기가 좀 있는데 동네마다 이런 분들이 꼭 더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살기 힘들고 그리고 또 자식을 잃게 되는 경우들, 이런 경우들이 시골에서는 드물지 않게 있어서 그런 경우들이 있는데 제가 어렸을 때도 보면 한 어른이 늙은 소를 몰고 다니면서 소를 풀을 먹이면서 늘 보면 무덤가에 소를 풀어놓고 앉아서 이제 동네를 향해서 혼잣말로 말을 하는데 그런 장면들도 많이 어렸을 때 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제 사는 게 신산(辛酸)했다는 그런 의미로도 보여요. 15페이지 보면 상여(喪輿) 나가던 얘기들도 제가 썼는데 외지에 살다가 저희 동네로 돌아오셔서 이제 장지(葬地)로 가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일요일 같은 경우에 보면 고향을 찾아서 돌아가신 분들이 오게 되면 동네의 형님들이나 어른들이 상여를 직접 짜서 상여집이라고 있었습니다, 상여집이라고. 상여를 만드는 자재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는데 그런 곳의 문을 열어서 상여를 만들고 그리고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런 날이면 묏자리를 파러 많이 다니셨어요. 그렇게 해서 일당을 벌고 그러셨는데 묘혈(墓穴)이라고 하죠.

사람을 묻을 묘혈을 파는 일들을 하고 그렇게 지내는데 늘 보면 상여가 일요일에 나가고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널어놨던 빨래를 다 걷게 하시고 창문을 닫게 하셨는데 그 의미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하셨고 아버지께서 묘혈을 파시고 동네 어른들이 상여를 지고 나가고 그렇게 하면 이제 해질 무렵이 되면 산에 그렇게 새로 만든 무덤이 하나 생기죠. 무덤이 하나씩 생기는데 아버지께서 그런 일들을 하고 오시면 떡을 얻어 오셨던 기억이 많습니다. 떡을 얻어 오셔서 그것을 쇠죽을 끓이고 있으면 장작불에 숯불만 빨간 숯불만 남았을 때 꾸덕해진 떡을 시루떡 같은 것을 구워주셨던 그런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망인'이라는 시에 그렇게 썼습니다. 중간쯤에 있는 시인데요. ‘관을 들어 그를 산속으로 옮긴 후 돌아와 집에 가만히 있었다. 또 하나의 객지가 저문다. 흰 종이에 떨구고 간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이 사그라진다’, 이렇게 썼습니다. 햇무덤이 생긴 것을 보기도 했고 그리고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돌아가셨을 때 아내 되시는 분이 저희 집 바로 옆에 있는 산이었는데 아침마다 그렇게 곡을 하셨던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을 장례 치른 후에 새로 생긴 무덤에 가서 아침마다 그렇게 식전에 곡을 하고 내려오셨어요. 그것이 아주 여러 날 곡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게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밥을 먹기 전에 식전에 시골에는 밥을 또 일찍 먹지 않습니까? 그보다 훨씬 더 일찍 날이 밝으면 죽은 남편의 무덤에 가서 곡을 하고 그리고 그걸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아주 여러 날 곡을 하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래서 쓴 시가 이 ‘햇무덤’이라는 시입니다. ‘까마귀가 한 마리 또 두 마리 울며 날아가 죽은 나무에 나무의 폐에 흉탄처럼 내려앉는 슬픈 구천. 여자는 식전바람에 곡을 하고 내려갔네. 누군가 치대다 급한 일 보러가 덩그러니 남겨진 반죽처럼 또, 마르는 햇무덤’, 이렇게 썼는데 붉은 흙으로 무덤이 만들어졌는데 거기서 이렇게 아침이 식전바람에 밥 먹기 전에 곡을 하고 내려가면 아침의 해가 그 무덤 위로 무덤을 비추면서 마치 무덤이 꾸덕꾸덕하게 다시 마르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곳입니다.

포도 농사 얘기도 있는데 그 밑에 시가 있죠? ‘시골집에 가 포도송이를 만지면 새로이 꽃모종하고 싶네. 하느님을 향해 둥근 종고 치고 싶네. 들바람을 안은 나직함 오므림. 얹힘 위에 얹힘 수긍하는 모양새 뒤도 매끈하지. 이것은 우리가 듣고 싶은 대답. 빛과 물과 노을과 공기의 합작. 입에 먼저 넣어줄 자식을 둔 어미처럼 손바닥으로 고이 받쳐드네.’ '8월의 포도원'이라는 시인데 이 포도송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송이를 한번 써봤습니다. 시골집에 가서 포도송이를 만지다 보면 이 포도송이가 꼭 들바람을 안은 그런 나직한 오므림 같고요. 얹힘 위의 얹힘, 포도송이 위의 포도송이, 포도알 위에 포도알이 있는 그런 모습을 본 거죠. 수긍하는 모양새. 뒤가 아주 매끈해 보이고 빛과 물과 노을과 공기가 만든 것이 이 포도송이다, 그런 얘기를 썼습니다. 사실 저희 동네에 제가 어렸을 때 이 포도농사를 짓지 않았으면 더 오랜 기간 가난했을 텐데 포도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동네 형편이 조금씩 좋아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포도농사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포도순을 일일이 다 만져줘야 하고요. 그래서 순이 너무 많으면 잘라줘야 하고 포도가 꽃이 펴서 아주 작은 열매를 맺기 시작할 무렵에 날씨가 아주 잘 맞춰주지 않으면 실패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송이도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몇 송이를 매달 것인가를 잘 계산을 해야 했습니다. 송이를 너무 많이 매달게 되면 포도가 익지 않아요, 여름 볕에도 포도가 익지를 않으니까 너무 욕심을 내면 포도가 익지 않습니다. 익지 않고 장마를 잘못 만나거나 여름비를 잘못 만나면 포도송이에서 포도알이 다 흘러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농사를 실패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적당하게 포도를 매달아야 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조금 포도를 많이 매달려고 하셨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자꾸 잘라내셨어요, 송이를. 그래서 아버지께서 낮에 가서 포도송이를 잘라내면 어머니께서 식전에 가셔서 한 번 더 잘라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많이 달려고 하셨고 어머니는 덜 달게 하려고. 빨리 익고 너무 많이 달면 익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 포도송이 같은 경우는 송이를 이렇게 잡아서 알을 다 골라줘야 합니다. 이게 참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보통 한 그루의 포도송이에 30송이 정도를 단다고 하면 30송이를 다 만져줘야 합니다, 이 송이를 만져서. 왜냐하면 비가 많이 오고 그러면 이 송이가 자꾸 커져요. 처음에는 아주 작게 돼 있다가 이것이 물을 먹고 알이 굵어지면서 이게 꽉 차게 됩니다. 차게 되면 너무 헐겁게 해놓지 않으면 터져버려요, 서로 부딪혀서 터져버려요. 그렇게 해서 실패를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조금 헐렁헐렁하게 맞춰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알을 다 빼줘야 해요, 적당하게. 너무 꽉 차지 않도록. 그런데 이것을 송이를 이렇게 앞을 보면서도 빼주고 송이를 살짝 틀어서 또 알을 다 빼줍니다. 그래서 작은 철사로 갈고리 같이 이렇게 만들어서 이것을 포도알과 알 사이에 넣어서 당겨서 다 빼줘요.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한 차례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포도를 출하할 때까지 익을 때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해줘야 해요. 그리고 포도도 처음에 너무 많이 달리지 않도록 포도송이를 잘라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잘라주는데 또 익지 않으면 어느 정도 또 나중에 또 한 차례 또 잘라줘야 해요. 너무 많은 포도송이를 매달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일하시는 분이 욕심을 부리다 보면 포도도 익지 않고 포도도 잘못하게 되면 포도나무도 아예 죽어버립니다. 시들시들해져요, 병도 오게 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데 하루 종일 서서 작업하셔야 하니까 포도 농사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셨고.

자두 농사도 많이 지었습니다만 자두 농사는 비교적 좀 수월했던 것 같아요. 자주는 사실 농약을 많이 치지 않지 않습니까? 산자두도 많이들 드실 텐데 자두는 그렇게 약을 치거나 그렇게 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거의 약을 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의 친환경 수준으로 그렇게 자두를 재배했던 것 같은데 자두나 포도나 지금은 박스가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과일 박스로 해서 나 나오는데 예전에는 일일이 궤짝을 다 짰어요. 이것을 일일이 못질을 해서 아침 식전부터 가서 포도를 따거나 자두를 따고, 이것을 서울이라든지 이런 데로 보내지 않습니까? 트럭들이 와서 큰 청과상(靑果商)으로 보냅니다. 아니면 추풍령으로 경운기를 몰고 수확한 자두나 포도를 싣고 직접 가서 내다 팝니다. 내다 파는데 저도 이제 대학교 때 이런 일들을 많이 했어요. 여름철이 되면 지금 이제 대학생들은 방학인데 방학이 되면 바로 내려가서 포도 궤짝을 일일이 다 짜야 하고 자두 궤짝을 일일이 다 짜야 합니다. 이렇게 궤짝을 만들 수 있는 송판 같은 거 있죠? 그거를 일일이 다 받아서 궤짝을 옛날에 사과 궤짝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점심을 먹은 이후부터 해질 때까지 계속 궤짝만 짜는 거예요, 못질을 그러니까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하루 종일 못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후 내내. 그래서 보면 뒷마당에 궤짝이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궤짝을 오후 내내 궤짝을 짰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그렇게 자두를 팔고 포도를 팔아서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부고(訃告)가 오는 장면도 아주 기억에 선명합니다. 누군가가 돌아가셨다고 부고를 하얀 봉투에 넣어서 부고가 옵니다. 부고가 오면 이것을 이렇게 아버지께서 보시고 그 부고를 저한테 주세요. 지금은 전화라든지 문자를 통해서 어느 분께서 별세하셨다 이렇게 알리지만 예전에는 이 부고를 다 돌렸지 않습니까? 부고를 돌려서 아버지께서 보시고 그러면 저한테 주셔서 그 부고를 지금은 이제 시골에도 재래식 화장실이 많지는 않지만 재래식 화장실에 그걸 두게 하셨어요. 그 이유도 잘은 모르겠어요. 쿰쿰한 변소에 부고를 걸어두게 하셨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하시는 이런 독특한 어떤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상여가 나갈 때 창문을 다 닫게 한다든지 빨래를 걷게 한다든지 부고가 들어오면 부고를 쿰쿰한 뭔가를 우리가 배설하는 곳인 그런 곳에 부고를 걸게 한다든지. 어떻게 보면 이게 굉장히 불교적이기도 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불교에서 화장실을 뭐라고 하죠? 해우소(解憂所). 해우소에 가면 그, 왜 해우소 가면 하는 진언(眞言) 같은 것들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우소에 들어갔을 때 뭔가를 선적인 깨달음을 갑자기 깨달음 얻으시는 분들도 더러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낙숫물에도 깨달음을 얻으신다고 하는데 해우소 같은 데서도 그러는데 그런 것들이 아마도 뭔가를 비우는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해우소라는 게. 몸을 비우는 공간이고 그러다 보니까 진언 같은 것들이 뭔가 비운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욕심을 버리고 그런 거잖아요. 공양할 때도 진언을 공양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뭐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가 받기로는 이것이 과분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뭔가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 음식을 받는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받을 때도 그렇고 몸을 통과해서 뭔가를 버릴 때 그런 곳으로써도 이 화장실이라는 곳이 있으니까 해우소라든지 변소가 있으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 부고를 걸어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적잖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뒤에 있는 산문을 그냥 한번 쭉 읽어보고 제 시를 좀 더 같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횔덜린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횔덜린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습니다. 횔덜린은 ‘젊은 시인들에게’를 통해서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알려주면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 횔덜린이 자연의 광희를 찬하면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그렇게 소원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횔덜린이 쓴 시 가운데 '내가 소년이었을 때'라는 시가 있는데 여기 보면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 식물들이 당신을 향해 가느다란 팔을 뻗을 때면 당신은 식물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무척 즐거워했지요.’ 참 멋진 말이지 않습니까? 여러 식물들이 당신을 향해서 우리들을 향해서 가느다란 팔을 뻗을 때면 우리들은 식물의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무척 즐거워한다는 거죠. 이게 실제로 식물들이 이런 얘기를 하지는 않겠죠. 그런데 그렇게 느낀다는 거죠. 자연에 대한 자기의 입장이라든지 그런 것이 이렇게 드러나 있는 겁니다. ‘당신을 기른 것은 속삭이는 작은 숲의 편안한 소리들이지요. 꽃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어요,’ 이렇게도 횔덜린은 썼습니다. 저는 이 횔덜린과 같은 마을에서 소년의 시절을 보낸 것이 아닌가 이런 시 드는데 횔덜린의 추억 속에는 어떤 쾌적함이 계속 들려오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프랑스 시인 가운데 프랑시스 잠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 프랑시스 잠이라는 시인도 피레네 산맥의 아주 산골에서 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가 전 세계적으로 많이 당시에 알려져서 많은 작가들과 시인들이 이 피레네 산골에 살고 있는 프랑시스 잠을 찾으러 옵니다. 만나기 위해서 오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만큼 프랑시스 잠의 시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는 거죠. 이 프랑시스 잠이 쓴 세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는 가리라. 당신이 좋다면, 당신이 좋다면, 단조로운 들판으로 가리라,’ 이렇게 쓴 시도 있고. 저는 이제 시를 쓸 때마다 자연의 세계로 간다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자연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화평한 세계고 균형이 잡혀 있는 세계고 조화와 친밀함의 세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 속에 있는 생명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존중 받는 세계다. 서로가 존중받는 세계가 자연의 세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 마을에 작은 동산이 하나 있는데 오후에 저는 이 동산에서 노는 때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제 또래들이라든지 이 또래들이 염소들을 몰고 온다든지 소를 몰고 온다든지 이 동산에 모여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동산에 염소도 풀어놓고 소도 풀어놓고 우리는 우리들끼리 노는 거죠, 놀고 있으면. 이 동산은 그래서 오후 내내 제 또래들이 노는 소리하고 짐승이 우는 소리, 소가 우는 소리 그다음에 염소가 우는 소리 그리고 오후의 빛이 막 동산에 내리는 풍경들, 이런 것들이 막 어우러져서 오후의 어떤 시간들 속에 있었는데 이 장면들도 굉장히 선명합니다. 지금은 이제 가보면 동산이 아주 작죠. 어렸을 때 초등학교 운동장이 얼마나 넓어보였습니까? 그리고 학교 건물이 엄청나게 커 보이는데 지금 가보면 운동장 한 바퀴 도는데 금방 돌아버리지 않습니까? 제 초등학교 때는 1학년도 한 반, 2학년도 한 반, 3학년도 한 반. 학년마다 한 반씩 있었습니다, 한 반씩 있었고. 지금은 이제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이 한 200명 정도 됐었는데 지금은 수십 명 정도로 아주 작은 학교가 돼버렸는데 그 초등학교가 태화초등학교인데. 아버지께서도 나오시고 저희 큰누나도 나오고 작은누나도 나오고 저도 나오고 제 동생도 나오고 막내도 나오고 그 초등학교를 다 같이 나왔습니다. 제 아버지가 1회 졸업생인데. 그래서 초대 총동창회장? 이것을 저희 아버지께서 하셨습니다. 총동창회의를 하고 그럴 때 보면 보통 이제 운동회 때 모임을 하시더군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공책에다가 반은 엎드리셔서 평생 농사만 지으시던 분이 빼뚤빼뚤하게 뭘 쓰세요. 축사(祝辭) 같은 걸 쓰시려고 뭔가를 하시고 뭔가 중얼중얼 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연필을 들 때는 연필을 들어서 무슨 꼭 새 공책이라든지 아주 깨끗한 백지 이런 데 뭘 쓰시는 게 아니라 빈 공간 있잖아요. 그리고 뒷면에 뭔가 안 쓰여 있으면 그거를 활용하셔서 꼭 그런 데다 쓰세요. 아니면 시멘트 같은 거 있잖아요. 시멘트 포대 같은 데 그런 데에 있는 누런 종이 같은 데 딱딱한 종이 그런 데다 쓰시고. 그래서 축사를 위해서 쓰실 때 있고 연필 드실 때가 한 두세 차례 있으신데 보면. 그런 경우가 1회 졸업생으로서의 축사 준비를 하실 때 그리고 또 한 번은 보면 경조사비에 당신의 이름을 쓰실 때 그렇게 볼펜을 드세요, 볼펜을 들어서 쓰시고. 또 한 번은 유행가 가사를 쓰실 때. 동네에서도 관광을 가시지 않습니까? 농사일이 어느 정도 조금 끝나실 때 되면 관광을 가시잖아요. 저기 바다도 한 번 가시고 유명한 정치인들이나 작고하신 분 대통령의 사저 같은 데 있으면 그런 데도 가시더라고요, 가실 때 있으면. 가시는 내내 관광버스에서 노래도 하고 그러시잖아요. 그러시면 노래를 하기 위해서 유행가 가사를 외우셔야 하니까 그거를 외우는 차원으로 유행가 가사를 쓰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쨌건 초등학교도 작아지고 동산이나 이런 것들도 굉장히 작아지잖아요. 지금도 가보면 동산이 아직 남아있는데 작은 구릉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경주에 가면 한 대왕릉 하나 정도. 그런데 어렸을 때는 이 동산에 굉장히 커보였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제 시는 이 동산의 이미지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동산에 제 또래들이 막 떠들고 신나서 소리 지르고 하는 높은 음 있죠? 높게 떠드는 소리, 목소리. 이것도 동산에 남아있고요. 또 하나는 염소하고 소가 우는 소리. 그다음에 소가 우는 소리. 그다음에 오후의 빛, 오후의 햇살, 바람 이런 것들이 다 같이 있는 곳으로써의 공간에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이 동산이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자연과 사람, 이런 것들이 한 군데 같이 조화를 이루면서 시끌시끌하고 그렇지만 시끄럽지 않고 쾌적하고 듣기 좋은 무슨 잔칫집에서 나는 소리 같은 그런 소리들을 소음입니다만 소음처럼 들리지 않는 행복한 소리들로 들리는 그런 곳이 이 동산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동산도 끝은 별로 좋지 않죠. 동산에서 다 헤어질 때쯤 되면 한 명씩, 한 명씩 동산에서 집으로 불려갑니다. 저기 멀리서 집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집에서 누나들이나 남동생들이 옵니다. 멀리서 제 이름을 불러요, 누구야, 누구야 하면서. 준아, 준아 이렇게 부릅니다. 준아, 이걸 길게 불러요. 저기서부터 누나가 혹은 동생 같은 경우는 오빠 하면서 멀리서 소리를 지르는데 시골에서 자란 아이가 목청도 굉장히 멀리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멀리서 동생이 저를 부르는 소리. 그런데 거기에 보면 음색이 느껴져요. 걱정하는 음색이 딱 느껴지죠. 오빠 이제 큰일 났다. 집에 가면 큰일 났다, 이제.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집으로 불려가고 그러면서 동산도 밤 속으로 들어가서 동산도 쉬게 되는 밤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동산이 있었죠.

제 아버지가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 자연으로 가셨고 날이 저물면 자연에서 나오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지게에 가득 가족을 먹일 곡식과 짐승을 먹일 풀짐을 지고 오셨고 제 어머니는 식구들이 저녁에 먹을 채소와 다음해에 심을 씨앗을 이고 오셨습니다. 저녁이 되면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연의 품에서 얻어올 것이 무엇일지를 몹시 궁금해 했고 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연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 나이 서너 살 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나가 저를 업고 있었기 때문에 누나와 저의 관심사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누나와 저는 집 밖에 있는 골목까지 나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들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캄캄한 어둠의 커튼을 밀쳐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연의 들과 자연의 골짜기로부터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하루 종일의 노동으로 인해서 몹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저희를 보시는 순간 환하게 웃으셨고 물론 왜 집 밖을 나와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느냐는 꾸중을 한차례 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를 쓸 때마다 자연의 세계로 간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 자연의 세계는 공동의 물품을 사용하는 생명들이 함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산의 기슭 그리고 산의 봉우리를 공유를 하고 구불구불한 곡선의 산길과 구불구불한 들길을 공유합니다. 평온한 저수지를 공유를 하죠. 수로의 깨끗한 물을 공유합니다. 들판 곳곳에서 솟는 샘물의 맑음을 우리는 공유합니다. 햇빛을 공유하고 빗방울, 눈보라, 천둥, 토양, 흙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선물로 들꽃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고 서로의 언어를 서로의 말을 불어가는 바람에 실어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위처럼 아주 침묵할 때는 물론이고 덤불 속에 사는 새떼들처럼 많은 말들을 수다를 주고받을 때에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이제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만 제가 자연 속에서 있었던 일들은 마치 어머니께서 자연으로부터 이고 오던 씨앗과도 같아서 제 기억 속에서 새순이 돋고 또 자라납니다. 제가 쓴 시는 대게 그 씨앗들로부터 자라나는 새순이고 줄기이고 열매며 다음해에 심을 씨앗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다음에 심을 씨앗이 사라지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씨앗은 언제나 쾌적한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썼는데요.

앞에 보면 제가 이제 쓴 것 중에 ‘지게’와 같은 산문도 한 편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평생 지게를 지셨기 때문에 지게를 지고 어둑어둑할 때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를 마중 나가던 그런 일들이 많이 생각이 납니다. 풀짐을 지고 소고삐를 몰고 소를 몰고 오시죠. 그러면 제가 아버지가 오시는 길로 마중을 나갑니다. 마중을 나가면 아버지께서 소 받아라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러면 소고삐를 이렇게 넘겨줍니다. 그 말이 참 멋있는데 소 받아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소 받아라. 소를 받아라. 소를 몰고 저한테 이제 가라는 얘기죠. 그러면 저는 소를 몰고 옵니다. 어디, 어디 이런 얘기 소 모는 소리 잘 아시죠? 워, 워, 어디, 어디 이렇게 막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를 몰고 오는데 가끔씩 보면 여름날에는 소를 몰고 또 아버지께서 지게를 지고 지게 작대기 끝에 뱀을 잡아서 뱀 한 마리를 대롱대롱 지게 작대기 끝에 매달고 오셨던 것도 가끔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뱀을 잡아서 오면 그것을 뱀을 사가는 사람들이 동네에 꼭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팔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 풀짐을 지고 오거나 그럴 때 꼭 아버지께서 한 차례 쉬시던 곳이 있으세요. 비석 앞이었는데 비석 앞에서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다시 집까지 지게를 지고 오시던 그런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지게질이 굉장히 어렵잖아요. 저도 어렸을 때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서 뭔가 좀 해보고 싶잖아요. 남자가 되고 싶고 어렸을 때부터 뭔가 남자가 되고 힘도 막 기르고 싶고 그래서 제 동네 친구들이랑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지게를 한번 지고 만난 적도 있습니다. 집에 있는 아버지의 지게들을 다 지고 산 밑에서 만나서 풀도 베서 그 지게에다가 지고 오기도 하고 했는데 지게 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무거운 것을 지게 위에 실어놓고 일어서는 것 자체가 어렵고요. 그리고 몸이 작기 때문에 지게가 들어지지도 않고 이게 바닥에서 들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좌우로 균형을 잡아서 지게를 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참 용기백배해서 다들 남자가 한번 되어 보겠다고 초등학교 때 고학년이었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각자 자기 집에 있어도 지게들을 하나씩 다 지고 초등학교 5, 6학년들이 다 모여서 산으로 간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혼났죠. 너는 지게를 지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하시죠. 그런데 지게도 보면 시골에서는 집 쪽으로 지게를 받쳐놓지 않게 하셨어요. 집 쪽으로 지게를 받쳐놓으면 그 지게가 그 집을 떠메고 간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지게가 집을 지고 간다는 것이.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만큼 집이 불안해진다는 거겠죠. 집의 살림이 불안해진다 이렇게도 생각하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지게를 집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세워놓도록 하셨어요.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지게는 써레 같은 거 아시죠? 써레도 지고 나가고 쟁기도 지고 나가고 그러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때가 되면 지게에서 풀짐을 아버지가 지고 오시잖아요. 풀짐을 지고 오셔서 그것을 풀어놓으면 염소라든지 소를 먹이기 위해서 풀을 베서 오시잖아요. 그러면 그 풀냄새가 여름철에는 풀냄새가 그렇게 많이 납니다. 우리가 왜 한강변이나 이렇게 보면 가끔 풀을 베는 날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초기 같은 것으로 풀을 베고 나면 풀냄새가 진동하듯이 나잖아요. 그것처럼 풀짐을 부려놨을 때 그 풀냄새가 흘러넘치는 것 이런 것들도 마당 가득 풀냄새가 흘러넘치던 것 이런 것들도 기억이 납니다.

시를 조금만 보겠습니다. 이 '가재미'라는 시부터 보겠습니다. '가재미'라는 시는 2005년 정도에 제가 발표를 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 있는 시입니다. 이 시인데요. 제가 한 동네에서 같이 사셨던 큰어머니에 대한 시입니다. 큰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쓴 시인데 제가 큰어머니께서 암투병 하실 때 그때 김천 의료원에 가서 병문안을 갔는데 돌아가시지 바로 직전이었던 것 같아요. 병실에 계시는데 완전히 깡마르셨고요, 암투병을 하셔서. 하얀 시트가 있는 병실에서 누워계셨는데 너무 깡마르셔서 마치 한 마리 가재미처럼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요. 가재미가 치어에서 성어가 될수록 큰 물고기가 될수록 한쪽 눈이 한쪽 눈으로 옮겨 붙는다고 해요. 그런데 큰어머니께서 저를 보시자마자 손을 꼭 잡으시면 우시더라고요. 우시는데 저는 이제 젊고 그런 때여서 죽음이란 걸 잘 모를 때인데 큰어머니는 그런 이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계셔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세계를 좌우로 균형되게 보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통 큰어머니의 시야는 한쪽으로 쏠려서 죽음과 작별과 이별 쪽으로 쏠려 있었던 그런 때가 아닌가 해서 쓴 시가 가재미라는 시입니다. 조금 넘겨보겠습니다. 문성식이라는 화가가 그린 드로잉 작품입니다. 문성식이라는 화가는 25살 때 베니스 비엔날레에 최연소 한국 작가로 최연소로 한국 작가로서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 받은 작가입니다. 굉장히 젊은 화가인데 유명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제 조카입니다. 그래서 저 하고 같은 동네에 어렸을 때부터 나고 자랐고 이 문성식이라는 화가의 할아버지가 제 큰아버지가 되겠죠. 그리고 할머니가 이 '가재미'라는 시에 등장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보면 영정사진이라는 것을 지금 그린 드로잉 작품인데 지금 저기 서 계신 분은 큰아버지로 보입니다. 큰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큰아버지고 그 옆에 체구가 각고 왜소하시면서 지팡이를 짚고 계신 저 분이 '가재미'의 주인공인 큰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굉장히 선하신 분이셨고 남의 말을 하실 줄을 모르셨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한 차례도 하실 줄을 모르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집 오셔서 평생 사시면서 점점 연세가 많아지면서 몸이 자꾸 왜소해지셨는데 저희 집에 쌀이 떨어지면 오셔서 몰래 쌀을 부어놓고 가시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어디 가시고 안 계시면 어린 저희들만 누나들이나 저희들만 있으면 오셔서 같이 집에서 주무시고 가셨어요. 어른들이 없는 집에 와서 대신 어머니 대신 주무시고 가셨던 분인데 이게 다 제 시의 배경이기도 하면서 문성식 화가가 그린 드로잉 작품들의 배경이 됩니다. 늙은 아버지와 더 늙은 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큰아버지의 모습을 문성식 화가의 아버지가 병색이 짙어 보이는.

‘목련과 문조’인데 이 그림도 저는 굉장히 좋아합니다. 큰집에 있는 목련나무입니다. 목련나무인데 문성식 화가의 아버지, 제 사촌형님께서 새를 아주 잘 기르셨어요. 그래서 한때는 김천에서 그걸 뭐라고 하죠? 화원도 아니고 새를... 새 장사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새를 이렇게 분양해서 팔기도 하시고. 굉장히 이런 데 능수능란했던 분이에요, 제 사촌형님이. 뭔가 화훼도 잘하시고 그리고 동네에서도 김천에서도 거의 최초로 포도농사를 시작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마 새마을 지도자라는 직책이 그런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일본에 가셔서 포도영농법 같은 걸 배우고 오셨어요. 그래서 김천에는 거의 처음으로 포도 농사를 시작하신 분이 사실은 문성식 화가의 아버지인 제 사촌형님입니다. 재주가 많으셔서 이렇게 새도 기르시고 그런 일도 한 차례 하시고 또 꽃도 아주 화훼 같은 것도 잘하시던 분이었는데 큰집에 목련나무가 있고 목련나무 가지에 새장이 있고 거기에 문조가 있었던. 문조, 카나리아 이런 새들이 큰집에 굉장히 많았습니다. 시골에서 완전히 깡촌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깡촌에서 생계수단으로써 새를 치는 분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상당히 쉽지 않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런 쪽에 아주 재능이 많으시고. 그래서 문성식 화가가 있고요. 그다음에 문성식 화가의 위에는 옻 공예 하는 형이 있습니다. 문성식 화가의 형이라고 문영식이라는 친구인데 이 조카는 또 옻칠 공예에서 아주 유명한 친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기 불이 들어오는군요. 여기 새장에 있는 예쁜 문조가 저도 기억이 납니다. 이 작품이 이제 저희 동네 가면 굴이 있습니다. 이렇게 굴이 있는데 이 위로 이렇게 경부선이 지나갑니다. 저희 동네에 경부선이 지나갑니다. 경부선이 지나가서 이쪽 편에 굴 입구 쪽하고 저쪽 굴 끝의 너머의 세계. 들이 있습니다. 들이 있어서 이 위로 철길이 지나가기 때문에 사람들과 리어카라든지 경운기라든지 아니면 소라든지 전부 다 이 굴을 통과해서 저쪽 편에 들일을 갈 수가 있었습니다. 참 독특한데요. 그런 굴이 별로 남아있지 않을 텐데 저희 동네는 굴이 이게 두 군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가시게 되면 이 굴을 한번 보게 될 텐데 지금 여기는 이렇게 통째로 사람이 다니게 돼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이 정도까지 한 반 정도 수로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저수지에서 들어오는 물들이 이 굴을 통해서 지나가게 되는데. 그래서 한 반 정도 통로가 있는 거죠. 반 정로 이렇게 통로가 있는데 어렸을 때는 늘 컴컴해진 이 굴을 지나갈 때 벽을 따라서 이렇게 작대기를 긁으면서 지나갑니다. 안 그러면 이 수로 쪽으로 빠져버리게 되니까요. 턱이 꽤 높아요. 턱이 높아서. 왜냐하면 물이 지나가야 하니까. 물이 이만큼 지나가야 하니까 소가 빠지는 경우는 굉장히 많습니다. 소가 안 가려고 해요. 어른들은 늦게까지 일을 하지 않습니까? 해질 때까지 일을 하고 아침에 식전에 또 일을 한 차례 나가시잖아요? 소를 몰고 나가시거나 그러면 소가 안 오려고 해요. 수로가 물소리가 콸콸콸 수로가 지나가고 하니까. 그러려면 꼭 소고삐를 바짝 잡아서 작대기로 벽을 긁으면서 지나가게 되는 곳이 이 시골 마을의 독특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쓴 시가 '가재미'라는 시가 연결이 돼 있는데요. 이 시를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이 시는 큰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썼는데 한동안 쓰지를 못 했어요. 시를 쓰려고 새벽에 깨어있으면 한 세 달 정도 그랬던 것 같은데 계속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한 줄도 쓰지도 못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쓰게 된 시가 '가재미'라는 시입니다. 그래서 가재미는 가재미1, 가재미2, 가재미3 이렇게 해서 연작인데 가재미2는 상여가 나가는 풍경을 썼고요. 큰어머니의 상여가 나가는 풍경을 썼고 가재미3은 큰어머니가 사시던 집에 재를 다 끌어내는 거. 왜 아궁이에 재가 있지 않습니까? 재를 다 꺼내버려서 치워버려서 불의 기억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재를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어렸을 때 저희 집에 큰어머니가 오시면 제일 먼저 하시는 게 이 어른께서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이렇게 만져보세요, 훑어보세요, 이렇게. 아이고, 방은 따뜻한가 해서 윗목 아랫목을 다 한 번 만져보시는 거죠. 저희 집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온기가 있나 집에 온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걱정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도 당신의 방으로 가셨을 때 그렇게 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 방의 온기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들도 다 잊어버리고 좋은 세상에서 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궁이에 있는 재를 다 끄집어내버리는 의식 같은 걸 했다는 겁니다.

이 시는 '아침'이라는 시인데 제 지금 시골집에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살고 계세요. 살고 계시고 집을 몇 년 전에 새로 두 분이서 지내시도록 지었는데 마당에 '아침'이라는 시가 새겨진 큰 돌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동네가 예술인 마을로 선정이 돼서 시비(詩碑)라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저희 집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데 감나무에 작게 이렇게 이 정도로 해서 거기다가 작은 글씨로 몇 구절만 이렇게 새기고 그 감나무 밑에 사람들이 앉아서 있도록 돌을 하나 놨으면 좋겠다 이렇게 건의를 했는데 그게 잘 발아 들여지지가 않았어요. 왜냐하면 뚜렷하게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저희 집 가면 '아침'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 시 중에 굉장히 밝은 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뭔가 돌에다 시를 새기는데 어둡고 슬픈 시를 새기기는 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중에 제 시 중에 밝은 시 중에 하나를 쓴 시가 '아침'이라는 시입니다.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 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 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이렇게 쓴 시인데 왜 나무 이렇게 보면 딱딱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냥 흔들림도 없고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날 이렇게 봤더니 새가 새떼들이 앉았다가 참새 떼들이 막 앉았다가 확 다른 데로 날아가니까 이 나무가 출렁 하더라는 거예요. 물 길러 많이 다녀보신 적 있으시죠? 제가 여기 오신 선생님들께서 시골 체험이 많은 것처럼 자꾸 얘기하는데 전부 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셨을지도 모르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물 뜨러 많이 다녀서 겨울에는 수도가 꽝꽝 다 얼어버리기 때문에 물을 길러 많이 다렸습니다. 양동이라든지 그런 통에다가도 물을 받아오던 기억이 납니다. 물이 혹은 물통을 이고도 오지 않습니까? 물 양동이 같은 걸 이고도 다니는데, 물동이 같은 걸. 그랬을 때 출렁출렁하는 물 이것처럼 나무가 출렁출렁하더라는 거죠. 그것은 아마도 굉장히 좋은 징조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뭔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나무의자처럼 성격이 나무의자 같은 분. 성격이 탁자 같은 분, 성격이 벽돌 같은 분 이런 분보다는 성격이 좀 출렁출렁한 한 양동이의 물 같은 이런 분들이 좀 더 매력 있지 않습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으신가 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처럼 사람의 마음이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좀 출렁출렁하고 여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여지가 있어야지 너무 저기 서 있는 교탁 같은 걸 한번 보세요. 도무지 말이 없지 않습니까?

'겨울 달'이라는 시인데 겨울에 아버지께서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서 오시는 장면을 쓴 시입니다. 시골에서 무를 수확하고 나면 지금이야 저장하기가 아주 좋습니다만 땅을 파지 않습니까? 땅을 파서 거기다가 무를 넣어두잖아요. 무를 넣어두면 겨울 내내 무가 싱싱하지 않습니까? 싱싱하고 움막처럼 그 위에 집도 작은 집도 지어줘서 사람이 거기 들어가서 손을, 팔을 이렇게 넣어서 구덩이에 있는 무를 하나씩 들고 나오잖아요? 그 아주 추운 날 눈도 막 오고 아주 추운 날 무 2개만 무 구덩이에서 가지고 오라고 하면 아랫목에 있다가 얼마나 가기가 싫습니까? 서로 막 미루잖아요. 그런데 그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던 밑동이 흰 그 무를 꺼내던. 그런데 겨울이 다 가도록 무가 싱싱한 상태로 있잖아요. 땅이 그렇게 그 상태로 유지를 시켜주는 거죠. 그런데 그 무에서 싹이 나는 거 보신 적 있으시죠? 그거 얼마나 참 신기합니까? 파랗게 부드러운 싹이 나잖아요? 무를 꺼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쓴 시가 이겁니다. 꽝꽝 얼어붙은 세계가 하나의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너무 춥다는 거죠. 세계가 꽝꽝 얼어서 꽝꽝 얼어붙은 세계가 하나의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아버지가 무 구덩이에 팔뚝을 집어넣어 밑둥이 둥글고 크고 흰 무 하나를 들고 나오시네. 찬 하늘에는, 이건 겨울 하늘이겠죠? 한동이의 빛이 떠 있네. 시래기 같은 어머니가 집에 이고 온 저 빛, 이게 이제 겨울 달이라는 거죠. 겨울 달의 모습과 겨울 달은 꼭 어머니가 집에 이고 온, 뭔가 머리에 이고 온 것처럼 느낌. 그런데 이 부분을 쓸 때는 굉장히 슬펐어요. 시래기 같은 어머니라는 표현. 이게 시 쓰는 사람은 어떤 한 구절이 뚜렷하게 부각되고 거기에 읽는 분들의 시선과 마음이 이 부분 같은 데 쏠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만 시래기 같은 어머니라고 쓴 다음에 저는 굉장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때 이 무렵이 또 저희 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신 때여서 깡마르고 항암을 하시다 보니 한 8차례에 걸쳐서 항암을 받으시니까 뭔가 몸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 어머니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서 쓴 시가 이 시래기 같은 어머니였는데. 어쨌든 겨울에 아주 추운 날 산의 능선 위로 흰 빛, 달빛 이것과 아버지가 이 땅 속에 묻혀있는 흰 무를 탁 들어올린, 하나 집어들어 올린 순간 이것을 연결시켜서 쓴 시가 이 '겨울 달'이라는 시입니다.

'나는 내가 좋다'라는 시인데 이 시들은 지금 선생님께서 읽은 이 시들은 제 여섯 번째 시집에 주로 실려 있는 시인데요. '나는 내가 좋다' 제 눈에는 이 눈에 보면 눈동자 옆에 볍씨 자국 같은 상처들이 많이 나있습니다. 어렸을 때 타작을 하지 않습니까? 나락 타작을 하거나 보리 타작을 하거나 아니면 콩 타작도 하잖아요. 콩 타작도 하고 그럴 때 검불들이 많이 들어가죠. 타작하는 일을 돕고 있으면. 보리 타작은 또 얼마나 까칠까칠합니다. 나락 타작에 비하면 보리 타작은 막 많이 날아오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뭔가 들어가면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눈을 막 비비잖아요. 그럴 때 하면서 생긴 상처들이 있는데 그럴 때 어머니께서 눈을 못 뜨고 아파하고 있으면 바가지에다가 찬물을 한 그릇 받아오셔서 어머니가 바가지의 물로 당신의 입을 막 헹궈요. 입을 헹군 다음에 저한테 갑자기 오셔서 왜 그러셨는지 네 눈을 이렇게 벌려서 어머니의 혀로 검불을 빼주겠다고 눈을 핥으셨어요. 그렇게 하셨는데 그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골에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신 거겠죠. 흐르는 물도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셨어요. 깨끗하게 당신의 혀를 헹구시고 자식의 눈동자의 검불을 빼주기 위해서 하셨던 거죠.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 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물을 실어 만든다는 것은 물을 가둔다는 애기입니다. 물을 가둬서 물꼬를 열어 물을 논에 받아들여서 못자리를 만들지 않습니까?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좋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상처 있는 눈이 좋다고 쓴 시입니다.

'두 소년'이라는 시인데 이것도 제 어렸을 때 체험이 바탕이 돼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겨울철이 되면 산에 가서 나무들을 하십니다, 땔감용으로. 죽은 나무들 있잖아요. 고사목(枯死木) 같은 걸 베서 나무를 해오는데 그렇게 해서 보면 저를 이제 같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되면 겨울에 저를 같이 데리고 다니셨는데 늦가을부터. 그렇게 하면 나무를 해서 쌓아둡니다. 마당에 쌓아두면 이만큼 높이로 해서 나무를 여기서 이만큼 정도 잘라두면 여기서 저 끝까지 그리고 한 번 더 길이가 되는 정도로 나무를 막 쌓아둬요. 그러면 보육원에서 와서 겨울 내내 쓸 땔감으로 저희 집에서 사갔어요, 나무를 사갔습니다. 그런데 트럭이 한 차례 저희 집에 왔는데 아이 2명이 따라왔어요. 보육원에 있는 아이 2명이었는데 이 아이들이 제 또래였어요. 제 또래였는데 얘네들이 와서 그러니까 운전하시는 분하고 아이 2명이 왔어요, 제 또래. 그리고 저 하고 아버지하고 나무를 실어드리면 아이들과 그 보육원에서 온 분들이 트럭에 나무를 챙겨서 쌓아서 실어갔는데 막 가는 순간에 저희 집에서 싣고 나가는 순간에 굵은 눈이 막 내리는 장면이었어요. 그 장면을 보고 쓴 시가 이 시입니다. ‘굵은 눈이 막 올 때는 두 소년이 생각난다. 어느 해 어느 날인지는 가마득해 잊었지만 땔감을 사러 보육원에서 트럭이 온 날이었다. 산 밑 우리 집에 따라와 땔나무를 싣던 두 소년. 트럭 짐칸에 타고 굵은 눈 속으로 멀어져간 두 소년은 나와 또래라 했다.’ 이 아이들이 앞에 타는 것이 아니라 나무들 막 쌓여있는 짐칸에 타서 밧줄로 묶어서 그 위에 이렇게 타고 가는데 눈이 갑자기 막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굵은 눈이 막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 트럭이 집을 나가는 풍경, 그 장면 속에서 제 또래였던 두 소년이 보육원에서 있는 보육원에서 온 두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목련'이라는 시인데 이거는 목련을 보면서 쓴 시입니다, 그야말로. 목련을 보면 뭔 들밥이 생각납니다, 들밥. 목련이 피는 때가 아마 논과 밭에 일이 시작될 즈음이라서 그런지 들밥 나가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나는 봄의 들의 일꾼이고 싶다. 단 하루도 흙물이 빠진 적 없는 열 개의 발톱을 가진 무논 쪽으로, 무논은 무를 가둔 논을 무논이라고 하죠. 싸리광주리 행상을 하는 어머니가 오늘은 뜨거운 들밥을 내신다,’ 이게 꼭 목련이 하얀 봉우리가 핀 목련이 들밥처럼 느껴졌어요. 시골에 이 들밥이 많이 나가지 않습니까? 광주리에다가 국수라든지 뭐든지 들밥을 많이 내잖아요. 모내기할 때도 들밥을 내고 다른 사람의 다른 집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 집의 일을 할 때도 들밥을 내주지 않습니까? 새참이 나가는 거죠, 새참이. 나가서 그분들이 들에 나가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집에 와서 식사를 하실 수 없으니까 밥을 지어서 어머니가 광주리에 담아서 이고 가시는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 집에 일하시는 분만 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분들도 다 부릅니다, 들밥을 같이 먹자고. 그래서 누구 아부지요 이렇게 오라고 하고 밑에서 일하시는 분이 있으면 또 오셔서 같이 조금씩 나눠 드시고 그러던 풍경인데 목련을 보면 이 들밥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망실'이라는 시인데 이 시는 조금 슬픈 시입니다. 내력이 있는 시인데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한동안 계속 오가셨어요. 그래서 병원 가실 때 제가 모시고 가서 끝나면 다시 또 모셔오고 그랬었는데 어느 날은 봄날이었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운전을 하면서 이렇게 오는데 어머니께서 그러는 거예요. 당신이 아주 오후 내내 퍼질러 앉아서 운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운 적이 있었는데 그 무렵이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그 이듬해인가 그러셨대요. 그런데 쑥을 캐러 들에 가셨는데 쑥을 캐러 가셨는데 봄풀이 막 올라오지 않습니까? 봄풀이 올라오고 그러는 걸 보면서 외할아버지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후 내내 그렇게 우셨대요. 봄풀이 이렇게 새로 봄이 와서 볼품이 돋는데 왜 돌아가신 분이 그리워지신 건지, 생각이 많이 나셨던 건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해서 어머니께서 가끔 얘기하실 때가 있는데 아버지를 어머니께서 이제 어렵게 사시다 보니까 농사를 짓다 보니까 텃밭 같은 걸 작은 채마밭 같은 걸 집에서 드시려고 농사를 짓는 일을 밭을 잘 매지도 못 하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남의 집 일이 바쁘니까. 그런데 희한하게 풀이 짙을 만하면 가서 매야겠다 해서 가보면 밭이 깨끗해져 있다는 거예요. 풀을 누군가 다 뽑아가고 밭이 깨끗하게 돼 있대요. 그래서 참 희한하다 해서 다음에 또 풀이 짙어졌겠지 해서 가보면 또 밭이 깨끗하고. 그런데 알고 봤더니 외할아버지하고 외할머니가 옆 동네에서. 어머니께서 옆 동네에서 우리 태화 2리 794번지로 이사 오셨는데 그 식전에 딸보다 먼저 와서 밭을 매놓고 가시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도 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쓴 시가 '망실'이라는 시입니다. 망실이라는 것은 뭔가를 잃어버리는 거죠, 잃버리는 거. 무덤 위에 풀이 돋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오늘은 무덤가에 제비꽃이 피었어요. 나뭇가지에서는 산새 소리가 서쪽 하늘로 휘우둠하게 휘어져나가요. 양지의 이마가 더욱 빛나요. 내게 당신은 점점 건조해져요. 무덤 위에 풀이 해마다 새로이 돋고 나는 무덤 위에 돋은 당신의 구체적인 몸을 한 바구니 담아가니 이제 이 무덤에는 아마도 당신이 없을 거예요, 이렇게 쓴 시가 이 시인데 좀 슬프죠?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이거 지금 살구철이잖아요? 살구 좀 드셨습니까? 살구가 아주 좋던데 요즘에. 시골에 가면 살구밭에 노랗게 잘 익은 살구가 살구나무 밑에 떨어져 있고 그런 걸 많이 보잖아요. 제가 사는 동네가 행신동 쪽인데 저금 사는 곳이. 고양시 행신동에 살고 있는데 저희 아파트에도 이 살구나무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살구가 막 떨어져 있는데 살구를 주워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 한번 이 낙과한 과일을 보면서 쓰게 된 시가 이 시입니다.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우리가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아주 몸을 굽혀서 앉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없고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도 없고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거죠. 이 자줏빛 아이리스 꽃 보신 적 있으시죠?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얼마나 예쁩니까? 고흐라는 화가가 해바라기 다음으로 가장 많이 그린 그림이 이 아이리스 꽃입니다. 자줏빛으로 예쁘잖아요.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제가 보기에는 석양 무렵 미지근한 어스름, 해지는 무렵 그 어스름도 태양이 몸을 굽혔다는 거죠. 태양이 몸을 굽혀서 어스름이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떨어진 과일처럼 우리도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나 자신도 낙과한 과일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좀 더 눈을 낮추고 겸손하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막 힘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낙과된 과일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자기 자신도 주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묶음'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이제 시골에 가서 쓴 시인데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하나의 시간 단위를 얘기하는 겁니다. 시간 단위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이런 것들을 묶는 거죠. 묶음이라고 하는 거죠.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꼭대기의 새가 날아와서 울다가 사라지는, 날아가는 그 시간. 새의 우는 시간을 한 묶음으로 묶었다는 겁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골짜기의 귀에 두어 마디 소곤거리는 봄비를 묶었다. 난과 그 옆에 난 새 촉의 시간을 함께 묶었다. 난이 있고 그 옆에 새로 움튼 새로운 촉에 난 촉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시간을 함께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어 묶을 한 단, 이 참 마음에 들어요.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묶을 한 단. 마음에 든다는 것은 이 시구가 마음에 든다는 게 아니고 미나리를 씻는 장면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어른들이 이 미나리꽝이라고 하잖아요? 미나리꽝 같은 데서 미나리를 물에 흔들어서 흙을 털어내는 그거 생각나시죠?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빨래터 같은 데서 흐르는 물에 빨래를 막 헹구는 것. 그런 것도 좋아하고. 바지락 씻는 거 보셨습니까? 바지락. 갯벌이 가까운 곳에 가면 바지락을 막 씻잖아요. 바지락 씻는 소리 한번 들어보셨어요? 자갈과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 같은 그런 소리가 나는데 그런 소리들도 참 좋습니다. 미나리를 흐르는 물에 씻는 것. 모를 찌는 것도 저는 기억에 선명하게 잘 남아 있습니다. 어른들께서 못자리 가서 모내기 위해서 모를 찌잖아요. 찐다고 하는데 모의 뿌리를 못자리에 있는 것을 쪄서 그것을 한 묶음씩 묶잖아요. 그래서 모 심을 곳에다가 듬성듬성 모를 던져놓잖아요. 그러면 그거를 풀어서 일일이 손으로 다 모를 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를 찌는 풍경, 미나리를 씻는 거, 바지락을 씻는 것, 빨래터에서 흐르는 물에 빨래를 헹구는 것, 이런 것들이 참 좋은 거죠. 그리고 샘가 같은 데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물통이나 양동이 같은 데다 쏟아 붓는 장면 이런 것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외할머니 시외는 소리'라는 시인데 아까 말씀드린 조금 전에 말씀드린 어머니의 어머니. 저에게도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있죠. 그 외할머니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제가 저희 집에서 최초로 읽은 시는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입니다. '나그네'라는 시인데 누나가가 아마 태화초등학교에서 서예 시간에 쓰신 것 같아요. 글씨가 그때 굉장히 반듯하게 잘 쓰여 있는 걸로 봐서 아마 선생님께서 쓰신 거를 누나가 얻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화선지라고 하나요? 화선지에다가 붓글씨를 쓰나요? 거기 써서 그거를 흰 종이 위에 쓴 붓글씨를 벽에 붙여놨어요. 붙여놨는데 제 기억으로는 고구마를 캐서 먹으려고 방 한쪽 귀퉁이에다가 고구마의 쌓아두지 않습니까? 다들 고구마를 안 드시나 본데요? 저는 겨울 내내 고구마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잘 안 먹는 음식 중에 하나가 고구마와 감자입니다. 고구마를 겨울 내내 먹고 쪄서도 먹고 삶아도 먹고 구워도 먹고. 이렇게 잘라서 단면을 잘라서 그걸 구워먹지 않습니까? 다들 드셨군요? 그렇게 했는데 그 '나그네'라는 시를 벽에 붙여놨는데 할머니께서 어느 날 오셔서 외할머니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그거를 읽으시는 거였어요. 그런데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할 때 단박에 읽으시는 게 아니라 기역, 가, 강 이런 식으로 읽으셨어요. 옛날 어르신들께서 읽는 게 그렇잖아요. 바로 강 이렇게 발음을 못하시고 끊어서 읽으시는 거예요. 끊어서 읽어서 '강'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기역, 가, 강 이런 식으로 읽으셨는데 그 읽는 소리가 생각나서 쓴 시가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라는 시입니다. 이거는 제가 마지막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 내 어릴 적 어느 날 할머니의 시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 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샘물이라는 겁니다, 천수는.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 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고는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웬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이렇게 쓴 시가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