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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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한려수도 따라 걷는 아트로드

오늘 얘기는 크게는 백석이라는 시인하고 우리 잘 아시는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될 텐데요. 그 두 분의 공통점은 통영으로 모아지는 거는 아마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백석은 고향이 통영인가요? 그렇지는 않죠? 어디로 알고 계세요? 평북 정주 출신이죠. 그래서 고향은 통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박경리 선생님은 고향이 통영이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실 고향은 통영이지만 박경리 선생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통영에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원주에서 살고 계셨죠. 그리고 이 백석 같은 경우에도 통영과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연애를 할 때뿐이었습니다. 뭐 거기서 살았다거나 그랬던 거는 아니고요. 그런데 백석도 통영을 좋아해서 또는 통영의 여인을 좋아해서 통영의 시편들을 만들고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석 사진을 지금 보고 계세요. 이게 고등학교 선생님 할 때의 사진인데요. 1936년 사진이라고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이렇게 모던보이처럼 외모와 영어 실력과 러시아어 실력과 시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인기가 많았다고 하죠. 그때 신문에 나와 있는 사진 설명을 보면 고흐의 보리밭 같은 머리 스타일로 영어 강의에 열중하고 있는 백석. 1937년이라고 나와 있네요. 함흥에 있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영생고보인가요? 그런데 이 37년 사진 이전에 36년쯤에 편지라는 산문을 하나 발표하는데요.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남쪽 바닷가 어느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키가 호리낭창한 건 어떤 건가요?

남쪽 바닷가 어느 낡은 항구가 당연히 어디가 되겠습니까? 통영 얘기를 하는 거죠. 이 구절은 시가 아니라 산문이었는데요. 이 산문 편지를 발표한 시점 앞뒤로 해서 통영과 관련된 세 편의 시를 백석이 발표를 합니다. 통영2입니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도 좋고 새벽녘의 거리에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는 뿡뿡 빼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 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에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에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의 뱃사공이 되어 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그 백석의 시어들이 사실 지금 현대어가 아니어서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이나 내지는 이제 평안도 사람이니까 평안도 사투리가 좀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완벽하게 보시기에는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여기 보시면 조금 전에 제가 읽었던 통영시가 다 적혀있습니다.

구마산은 이제 통영에 있는 산 이름이고요. 통영의 문화예술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수공예나 장인들 많다는 얘기는 들어보셨죠? 그리고 또 유명한 것 중에 뭐가 있죠? 나전칠기도 있고 소목(蘇木)도 있고 소반(小盤)도 있고 갓도 있습니다. 요새는 갓 안 만들지만 통영 갓이 그렇게 유명했대요. 그래서 갓 나는 고당이라는 거는 갓, 머리 갓. 그 고당은 이제 고장이죠, 고장. 마을. 가깝기도 하다.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도 좋고. 호루기가 아마 꼴뚜기 비슷한 거라고 제가 알고 있는데. 그것도 이제 평안도 사투리 쪽에 가까운 말입니다.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통영에 가서 대구 드셔보신 적 있으세요? 대구 말리는 거 보신 적 있으세요? 저도 이제 통영은 저한테는 타지니까 제가 고향이 그쪽이 아니니까 몰랐다가 1, 2월에 통영을 한번 놀러갔더니 그렇게 정말 담벼락에 널어놓고 말리더라고요. 엄청나게 큰 놈들을.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거죠. 황화장사는 아마 방물장수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다. 방물장수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아마 당시에는 어장주가 최고의 부자였던 모양이죠. 산 너머로 가는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이 난이가 문제입니다. 이 난이가. 그 당시에 백석을 포함해서 문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들을 난이라는 표현으로 암호처럼 썼대요. 왜, 여러분도 문학 청년 시절이 있으실 테고 또 예전에 좋아하는 여자를 어떻게 표현하는 단어들 있지 않습니까? 이 백석의 경우에는 난이었던 거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통영에 있는 마을. 혹시 여기 통영 분 계세요? 고향이 통영이시거나. 통영이신데도 손을 안 들고 계신 것 같은데. 명정골이 있습니다.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흐르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입니다. 지금도 저 샘은 울타리를 쳐놨더라고요. 샘터에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이 오구작작도 평안도 사투리인데 어떤 건지 아세요? 이게 아이들이 어울려 뛰어놀 때 그 즐겁게 삐약삐약하는 그 느낌을 오구작작이라고 표현을 한답니다.

그래서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그녀가 나를 버리고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 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녯이라는 말은 이제 옛, 옛날. 이 녯 장수가 누구일까요? 이순신 장군입니다. 거기 왜 충열사(忠烈祠) 있잖아요. 그 충열사가 이순신 장군의 위령을 모신 사당이죠. 그래서 그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을 울 듯 울 듯. 통영으로 내려갔는데 그 난이라는 여인을 못 만났어요, 백석이. 그래서 그 충열사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주저앉아서 지금 이 시를 끄적끄적 적고 있는 겁니다. 한산도 바다의 뱃사공이 되어 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녕이라는 말도 지붕. 평안도 사투리예요. 지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이게 1936년 1월 23일이라고 적혀 있네요. 그때 이제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를 했었는데 백석이라는 시인은 지금 말씀드렸듯이 평안도 정주 사람으로 1912년 출생이에요. 그러니까 1936년이면 대략 스물네 살 정도 된 거죠. 신춘문예를 조선일보로 등단을 했는데 그게 18살 때. 그러니까 1930년에 등단을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젊은 나이에, 요새로 치면 피도 안 간 나이에. 아까 대구 표현할 때 그런 표현이 있었죠. 그 나이에 등단을 하고 조선일보 기자가 됐었는데 한 1년 정도, 2년 정도 일을 하다가 가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합니다. 이때는 아직 신문사에 있었던 시절이고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랑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이 사랑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백석이라는 시인과 박경리라는 소설가가 여러 가지로 대비가 되는 점이 있으면서도 그게 예술이라는 지점에서 만나고 또 동시에 통영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양쪽이 겹치고 갈라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1936년쯤 그러니까 1936년이 이 시가 발표됐을 때인데 그러니까 1935년에 자기하고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한 명인 허준이라는 사람이 결혼식을 해요. 그래서 이제 결혼 축하하려고 결혼식에 갔다가 그 통영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박경련이라는 이름이죠. 당시에 이화여고에서 무슨, 이화여고를 다니고 나와 있었다는데 그런데 첫눈에 반해서 쫓아다니는데 그 통영을 이제 갑니다. 통영을 가서 첫 번째로 그 시를 쓰죠. 이거는 이제 통영 두 번째 시편이고. 이 통영 두 번째 시편보다는 굉장히 짧아서 제가 그냥 간단히 읽어드리면 될 겁니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이게 첫 번째 통영 시입니다.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 통영은 어떤 말이 줄어서 통영이 됐는지 혹시 아세요? 통제영(統制營)입니다, 통제영. 그러니까 이 조선시대 때 지금으로 말하면 해군사령부인 거죠. 삼도수군통제사가 있는, 수군통제사가 있는 그 마을이 통영이 된 건데. 통제영 이래서 이제 제 자 줄이고 통영이 됐는데 그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천희. 그게 어떤 분들은 국문학 하시거나 내지는 어원 연구하시는 분들은 이 서울에서는 처녀라는 말을 쓰지만 남도에서는 천희라고들 많이 했다라고 많이들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녀들이 많았는데, 이 표현이 되게 슬픈 것 같아요, 저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요새는 그런 처녀들은 아마 찾아도 없을 것 같은데. 아, 있습니까? 저쪽에서 있다고 강력히 얘기를 하시네요. 그래서 미역처럼, 굴껍질처럼 말라서 사랑하다 죽는다는 그런 처녀들이 통영에 많다. 이 처녀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그것도 생선 가시가 있는 그런 마루방에서 만났다. 이렇게 반해서 프러포즈를 했는데 우리의 박경련 여사께서는 마음을 별로 안 주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가슴앓이만 하다가 두 번째로 통영 방문을 하는 겁니다.

지금이야 뭐 통영 내려갈 때 어떻게들 내려가세요? 운전하시는 분들은 어떤 고속도로 타고 가세요? 대전에서 진주까지 고속도로가 뚫린 지 꽤 돼서 그거 타고 가면 예전보다 훨씬 빨리 가시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때는 당연히 그런 고속도로는 없고 육로보다는 수로가 더 편리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래서 통영으로 들어갈 때 진주 쪽으로 가서 그쪽에서 이제 걸어 들어오는 방식의 길이 있어서 지금 그쪽에 걷기 길 개발하시는 분들이 백석이 그 당시에 통영을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렇게 통영을 다시 가서 두 번째로 박경련 여사를 만나러 갔는데 못 만난 겁니다. 그러고 이제 충열사 돌계단에 앉아서 이런 시나 쓰고 있었던 거죠. 한심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이런 연애시 따위나 쓰려고 젊음을 탕진하며 통영까지 내려가서. 그 당시에 뭐 4시간이면 내려가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때가. 거의 1박 2일은 갔어야 했을 텐데. 아마 그런 점에서 백석이라는 시인을 굉장히 한심하게 생각하는 뭐랄까요? 어떤 비즈니스 논리로 따져본달까요? 내지는 합리의 논리로 따져본달까요? 이런 분들은 굉장히 안타깝고 한심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백석은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시편으로 갈 때 이 사안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때 이제 시 중에 아까 맨 처음에 썼던 편지라는 산문이 그 사이에 나오죠. 산문 편지는 1936년에 2월 22일이네요. 그러니까 이걸로 한 달쯤 뒤였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멋있는 그냥 다른 문장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문단부터 갑자기 자기의 사랑을 다시 끄집어와서 고백을 하기 시작하는데.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박경련의 아버지가 실제로 그렇게 젊어서 죽었답니다. 서른 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이 백석의 시편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내지는 연모의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이렇게 써놓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사랑이 그냥 어떤 미학적이고 문학적인 언어들을 다 빼고 나면 되게 앙상하고 왜소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됐죠? 이 이야기는 사실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여서 아시는 분들 많을 거예요. 백석의 친구가 박경련하고 결혼을 했죠. 그리고 그 친구는 사실 백석 입장에서는 굉장히 믿었던 친구였고 그리고 같은 신문사에 근무했던 사람이었고 그랬었죠. 백석이 신문사를 때려치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갔을 때 이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함흥에 가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을 할 때, 그러니까 친구한테 배신당했다. 이것도 시편에다 하나 남겨놔요. 그 구절도 잠깐 한번 같이 읽어보죠.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지금 앞에 보시면 거기 같이 있을 겁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시집갔어요.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라는 시편인데 자기의 연애와 자기의 배신당한 기록들을 다 시로 남겼으니. 그런데 백석 자체도 사실 그다지 할 말은 없는 것이 그다음 해에 또 누구랑 사랑을 하죠? 자야라고 불리우는, 지금 저 서울 길상사, 그 길상사가 그전에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지 않습니까? 만나서 그 처음 만난 저녁 자리에서 이제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라며 고백을 또 하죠.

그러니까 시인이라는 분들은 저는 이제 그런 표현을 기사에다가 한 번 써본 적이 있는데 순간의 진정성이랄까요? 그 순간에는 진심이라는 거예요. 그 순간에는 정말이랍니다. 자기 마음에서. 거짓말이 당연히 아니고 자기의 모든 진심인데 너무 자주 바뀌시니까 우리가 문학이건 미술이건 또는 음악이건 간에 모든 예술이 사실, 물론 그걸 구분하는 기준에 따라 나누는 분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잣대로 얘기할 수 있지만 예술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라고 얘기를 할 때 그게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나 또는 사회에 봉사하거나 이럴 필요가 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고 또 하나는 예술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예술이다. 그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예술이다. 그리고 때로는 승리나 정의나 이런 것들보다도 아름다움 그 자체가 그만큼 중요하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는 주장이 있는 거죠. 제가 볼 때는 백석은 그런 시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시어 속에서 무슨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거나 또는 사회 정의를 부르짖거나 내지는 어떤 반드시 우리가 같이 해야 할 공동체의 어떤 가치를 이야기하거나 이러지 않거든요. 그냥 자신이 느낀 감정의 아름다움, 풍광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역할이 작은 역할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백석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요새 문학하시는 분들이 창작을 하시는 분들이 있고 이론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이론을 하시는 분들이 특히 시 공부를 하실 때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이걸 내가 석사 논문으로 써야겠다. 또는 박사 논문으로 써야겠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주제로 잡는 시인이 백석입니다. 제가 2011년인가요. 그때 이제 백석에 대한 기사를, 특집 기사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조사를 해봤었는데 그 당시 한 500편 정도가 논문으로 나왔었어요. 백석에 대해서만. 그러니까 격차가 너무 커요. 두 번째가 아마 정지용 선생이었던 것 같은데. 또 윤동주, 정지용들을 포함해서 너무나 큰 격차로 백석이 가장 앞서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던 그런 어떤 예술의 가치와 관련해서 당연히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고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을 할 수 있지만 백석을 좋아하는 분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 이유로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고요.

백석이 세상을 떠난 게 지금 남아있는 기록으로 1995년이다, 1996년이다 이런 얘기들이 있습니다. 정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북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게 정확하지 않은데 1912년생이라고 치고 1995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어느 정도 살다 돌아가신 거죠? 80살은 넘기신 거죠. 1945년에 해방이 되고, 광복이 되고 1950년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서울에서 있었던 백석은 북을 선택합니다. 또 고향이 평양 정주이니까요. 그런데 거기 가서 당연히 문학과 동맹, 사회주의에서는 무슨 동맹이라는 표현으로 같은 일들을 하니까 거기 들어갔는데 말씀드렸듯이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와는 안 맞았기 때문에 그게 강요되는 분위기 속에서 계속 밀려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먼저 탈퇴하지는 않았는데 계속 한직을 주고 너는 저리 가서, 저리 가서, 저리 가서. 이러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어디까지 갔냐면 양치기가 됐답니다, 양치기. 저 함경도 변방으로 쫓겨나서 양을 치는 임무를 수여받고서 거기서 쓸쓸히 늙어갔다고 그래요. 아마 그런 어떤 개인적인 비극적인 스토리 같은 것들이 백석에 대한 연민이라거나 내지는 그를 알아보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일반 대중들에게도 굉장히 많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제가 특집 기사 준비할 때 그때 이제 백석의 아까 처음 보신 사진이 그렇게 멋있는 모던보이잖아요. 그래서 백석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다들 신문들이 크게 기사로 쓰고들 하는데 그때 새로운 사진이 나왔었거든요. 뭐 그 고등학교 교사할 때 강의하던 모습과 또 뜻밖에도 그 고등학교에서 축구반 지도 선생님이었답니다. 그래서 축구부 친구들하고, 제자들하고 같이 있었던 사진. 뭐 이런 것들이 나오고 또 아까 말씀드렸을 때 영어 선생님인 동시에 러시아어를 그렇게 잘했다는데 그때 새롭게 나왔던 주장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 다들 아시잖아요? 굉장히 유명한 시고 저희 또래 때는 책받침에다가 프린트해서 그걸 책받침으로 쓰고 그랬었는데. 그 시를 우리나라에서 그런 표현으로 처음 번역한 사람이 백석이다라는 주장이 제기가 됐었어요. 이게 공인이, 그다음에 구체적인 자료가 그런 증거가 있어야 공인이 되는데 그때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만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 같이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백석이 북에 남아서 작가동맹에 들어가서 했던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소비에트 문학을 번역을 해서 책으로 낸 겁니다. 그러니까 러시아의, 소련의 위대한 시인들. 위대한 문인들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그때 이제 나왔던 주장이 푸시킨의 이 시도 번역을 했는데 그래서 시집을 냈는데 그 남아있는 책에는 없었어요, 자료가. 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그런데 그 시는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아시지만 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는 맞지 않는 시편이잖아요. 그래서 당 중앙에서 뺏을 것이다라고 하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백석의 얘기를 굉장히 오래했습니다. 그러니까 통영이라는 키워드로 좀 이제 통영에서 있었던 연사와 그리고 백석이라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같이 했고요. 박경리 선생 쪽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이제 말년 사진 중에 한 장인데요. 이런 방법을 쓰는 걸 해량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경리 선생님이 몇 년생이시죠? 1926년생이실 겁니다. 그리고 2008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백석하고 치면 한 10살 정도 터울이 나시는 거고 2008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박경리 선생님이 이제 팔순은 넘기셨던 거죠. 아마 오늘 안내로 나갔던 책 중에 하나가 ‘김약국의 딸’들일 텐데요. ‘김약국의 딸’들의 처음이 이렇게 시작하죠. ‘김약국의 딸’들 맨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통영 자랑을 하십니다. 조선의 나폴리, 그러니까 지금 통영을 나폴리로 비유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아마 기원을 이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선생님한테서 찾는 분들이 많죠. 그 아래 제가 적어놓은 거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마 현대문학이었던 걸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거기에 이제 시를 발표하셨는데요. 많이 화제가 됐던,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기억했던 구절입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그 백석의 젊었을 때의 삶은 연애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우리 박경리 선생님의 이 생애는 참 잔혹사였던 것 같아요, 잔혹사. 그러니까 통영에서 태어나서 1926년이니까 일제강점기를 거쳤는데 결혼을 일찍 했다고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제 6.25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리고 세 살 먹은 아들이 사고로 죽습니다. 참척(慘慽)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쓰죠. 자식이 먼저 죽는데. 그러고 이제 통영이라는 곳은 경상남도잖아요. 경상도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가부장제와 보수성의 정도라는 것은 아마 다들 동의가 되실 거예요. 결혼을 한 번 더 하죠. 우리 박경리 선생이. 그런데 정말 능력자이신 게 총각 선생님하고 결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에서 말이 너무 많은 거예요. 재가하는 여자가 아들도 죽었는데 총각 선생하고 결혼을 한다. 이래서 그 동네에서 살 수가 없게 된 거예요. 거의 쫓겨나다시피 합니다. 그렇게 통영을 떠나요.

그렇게 통영을 떠나서 거의 제가 알기로는 들었던 말들도 있고요. 이제 한을 품는데 통영에 안 가요, 그래서 고향에. 그 2004년인가 처음 가셨어요. 거의 50년 만에 가신 겁니다. 2004년에 가신 게. 그래서 2008년에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박경리 기념관이나 내지는 앞으로 어디서 모시느냐고 했을 때 굉장히 의견들이 갈렸습니다. 원주에 모셔야 한다는 주장도 굉장히 많았었거든요. 그러다가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서의 어떤 그 화해랄까요. 이런 부분들의 목소리가 더 커지면서 통영에 박경리 기념관을 문학관을 짓고 또 거기다가 산소도 모시고 그렇게 됐는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서로들 좁았으니까. 문학을 하실 때 김동리 선생의 부인하고 진주여고 동창이었다고 하죠, 박경리 선생이. 그런데 이미 그때 김동리 선생은 한국문학의 대단한 권력이었기 때문에 이 양반한테 이제 눈에 들면 등단을 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지는 거예요. 지금처럼 무슨 신춘문예가 되는 방식하고 문예 개간지. 그때는 현대문학하고 문학사상도 아직 없었을 때인데 거기에 추천을 받으면, 김동리, 황순원 이런 양반들의 추천을 받으면 등단을 할 때인데 그런 식으로. 김동리 선생님이 작품을 봐야 하죠.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서 당시 김동리 선생이 명동에 있는 한 다방에 항상 나오신다니까 거기로 가서 작품을 보여드리려고 갔더니 거기서도 또 통영 비슷한 일이 벌어져버린 거예요. 뭐 다방에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 박경리 선생하고 김동리 선생 만나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야, 이거 뭐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소문도 내고. 이래서 이제 너무 부끄러우셔서 그동안 갖다 줬던 작품 다 가지고 오라고 그래라 이랬는데 김동리 선생님이 작품 보고 좋아서 그거하고 전혀 상관없이 추천을 하시고 그다음부터 이제 작품 발표를 하면서 이 작가의 길로 들어서신 건데 통영에서 있었던 쫓겨난 과정과 자신이 여자로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여자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가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산문이 있습니다. 그걸 제가 잠깐 볼게요. 이게 1990년 ‘지식산업사’ 책에서 나왔던 얘기인데 본인의 자서전 내지는 에세이 같은 고백적인 산문인데요.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이 허무한 세상에 왜 내가 태어났으랴 하는 따위의 뜻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에 찬 감정으로 시종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줍시사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박아 주고야 말았다. 그 신념을 무릇 강한 힘에 대한 반항이 되었고 그러한 반항 정신이 문학을 하게 한 중요한 소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나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본인의 유년시절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의 유년시절이 이런 식으로 본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거예요. 그러고 나서 썼던 작품들이 여러분들 잘 아시는 ‘토지’라거나 ‘김약국의 딸’들이라거나 내지는 그 모든 작품들이 사실 그 이면에는 어떤 이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분노, 저항,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 이런 얘기들이 점철이 된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칠순 넘어가셔서는 사회하고 직접 대결하는 식의 작품을 쓰지는 않으셨지만 마지막에 왜 환경 문제에 굉장히 천착(穿鑿)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이 양반한테는 문학을 한다는 것이, 예술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무슨 연애하는 즐거움, 내 안의 개인적인 기쁨, 욕망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의 어떤 불합리한 것. 우리 공동체가 조금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닌가. 내지는 아직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가 있다면 그다음 단계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얘기들을 계속 쓰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런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런 생각들을 했던 거죠. 오늘 와서 제가 여러분들한테 어떤 말씀을 드릴까 생각을 하다가 통영이라는 고향, 지역, 이 공통어를 가진 두 분이 있다. 백석과 박경리 선생. 한 분은 고향은 아니고요. 단지 연애하는 여자 때문에 통영을 방문하고 그거에 대한 시편을 쓴 분이고 박경리 선생은 고향인 분이죠. 그러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50년이나 떠나있어야 했던 분이었습니다. 백석은 자기가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크게 대의명분과 어떤 목소리 큰 거대담론과 이런 것들을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거대한 욕망, 즐거움, 슬픔, 내가 힘든 것, 이런 것들을 문학예술로, 언어예술로 표현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훨씬 더 크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박경리 선생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내지는 우리 공동체가, 내지는 이런 어떤 모순과 이런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그런 것들을 단순히 정치적인, 구호적인 이런 것들로 하는 게 아니라 문학예술로서 사람들에게 공감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아까 통제영, 통영 얘기했었는데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나오는 말이다. 맨 처음에 이제 통제영이라는 걸 만든 거는 통영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원래 한산도에 먼저 했대요. 그런데 이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한산에 있는 통제영이 거의 피폐화되고 폐허가 되다시피 해서 1603년이라고 그랬나요?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 이게 이제 현재의 통영 문화동이라는데 거기를 정해서 여기다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고 그리고 이런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렇습니다. 세병관(洗兵館)이라고 한자로 여기 적혀 있는데 이 한자를 보시면 세병관이 어떤 의미인가요? 병기를 씻는 곳이라는 거죠. 세수할 때 세 자. 씻을 세 자에 병기를 씻는 곳이라는 건데 지금 세병관은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규모여서 그때 표현 용어로는 9칸, 6칸짜리 건물이고 지방 관아(官衙)로 썼을 때 아마 가장 큰 규모로 남아있는 지금 지방 관아다라는 설명들이 적혀 있습니다. 지금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1895년까지 통제영이 유지가 됐다고 하는데요. 이제 왜 통영인가. 왜 통영에서 이렇게 문화예술이 발달했는가. 이런 얘기들을 할 차례입니다. 그러니까 통제영이 거기에 설치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 당연히 기본 제1의 목적은 방위를 위해서죠. 군사적인 목적이고요. 그런데 통제영의 통제사는 한양에서 내려갑니다. 임기가 2년이었대요. 2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사람이 내려가는 거죠. 그러면 한 사람만 내려가겠어요? 식솔들 다 따라내려가야죠. 그러니까 한양 당시에 가장 최고의 문화가 통영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해군사령부가 설치가 되고 군인들을 먹여살리고 거기에 장비들이 필요하니까 군수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군수품이라는 큰 덩어리 안에는 당연히 삶의 라이프 스타일까지도 다 포함되는 것이어서 전국 최고의 기술자들, 장인들이 통영으로 몰려들었다는 거죠. 통영 갓 얘기 나오고요. 소목, 소반, 나전(螺鈿), 두석(豆錫). 두석장(豆錫匠) 얘기 들어보셨어요? 두석장. 지금은 이제 아예 우리가 이런 가구들을 쓰지 않기 때문에 저도 전혀 익숙하지 않은데요. 심지어 자개장도 저한테는 익숙하지 않은데 이제. 그 놋쇠 장식 있죠? 장 하거나 이럴 때. 그거를 두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거를 얼마나 예쁘게 만들어내는지 그 장인들이 그쪽에 그렇게 유명하게 있으십니다. 그래서 12공방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통영 12공방. 조선 최고의 명품이었다죠. 그래서 이제 그런 공예품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사대부도 통영 소목을 구하려면 기다려야 했고 통영 소반 아닌 것도 통영 것이라고 속여서 파는 소위 짝퉁까지 등장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 왜 목수들 우리가 부를 때 소목, 대목 이렇게 표현하는 건 아시잖아요. 윤이상 선생의 부친도 통영에서 굉장히 유명한 소목장이었다는데 그렇게 통영이라는 고장이 어떤 장인들의 고장이면서 동시에 문화예술의 고장이다라는 얘기를 다음 대목에서 하겠습니다.

우리 이제 일본과 가까우면 현대 문물, 근대 문물 들어오는 거는 유리한데. 그래서 이제 부산도 근대기에, 일제강점기 때 문물 들어올 때는 유리했던 곳이고요. 뭐 우리나라 제1의 극장을 단성사라고 본다면 두 번째 극장으로 꼽히는 봉래극장이 통영에 세워진 게 1914년이었답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영화제작사가 두 곳이나 있었다는데 이거 또 곁가지로 잠깐 샐게요. 통영 다룬 영화 하나 있는 거 아세요? 최근 영화 중에? 통영에서 찍은 영화. 홍상수 감독 영화인데요. 홍상수 감독이 뭐 그렇게 아주 많은 관객을 모으는 그런 대중영화 감독은 아니지만 왜 무슨 베니스 영화제니 칸 영화제니 하면 초청 받아서 가는 예술 영화감독이잖아요. 그 양반 모친이 전옥숙 여사라고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양반이 정말 밤의 여자 대통령 같은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나이 있으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양반이 전성기 시절에 한 번 부르면 YS도 오고 DJ도 오고 그리고 뭐 김지하 선생도 오고 선우휘 선생도 오고 이랬던 실력자였어요. 그리고 굉장히 여러 가지 일을 한 사람인데 그중에 대한민국 최초의 외주제작사, 이름이 씨네텔서울이라는 게 있는데요. 예전에 왜 MBC에서 베스트 극장 이런 거 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 베스트 극장 맨 처음에 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송사에서 자체제작한 게 아니라 외주 제작사에 처음 맡겼을 때 그 첫 번째 외주제작사가 이 전옥숙 씨가 했었던 씨네텔서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통영과 영화는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광복 후 축적된 역사와 문화적 지층을 기반으로 예술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때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름들이실 거예요. 청마 유치환, 시인 김상옥,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다 당대 같은 시절에 통영에서 청춘을 보냈던 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통영문화협회라는 것을 결성을 했고요. 그때를 이제 본인들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통영 르네상스다 이렇게 인정을 해줬던 시절입니다. 그 유치환 선생 시편 중에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는 그 왜 ‘사랑하는 것은 행복’ 그 시 기억하시죠?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생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자, 박수 부탁드릴까요? 그 유치환 선생의 행복을 지금 같이 들으셨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가지고 계시는 이 자료집 9페이지에 보면 통영에서 나고 자란 문인들에 대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거기 잠깐 같이 한번 볼까요? 청마 유치환 1908년생이시죠. 지금까지 등장한 분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네요. 일찍 태어나셨어요. 약국을 운영하던 부친 유준수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이 극작가 동랑 유치진, 차남이 바로 유치환이다. 청마 유치환. 유치진, 유치환이 형제인 거죠, 그러니까. 일찍이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진명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권재순 여사와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식에서 꽃을 든 화동이 훗날 시인 김춘수였다. 너무 재미있죠? 김춘수는 청마를 따뜻하고 소탈한 인물로 기억한다. 미당 서정주과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청마는 통영으로 돌아와 1945년 당대 예술가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 초대 회장을 지내며 문화 운동을 펼쳤다. 또한 청마는 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는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지만 거쳐 간 학교마다 학생들의 신임이 높았다고 한다. 시조 시인 이영도를 애정하여 수천 통의 연서를 보낸 일화로 유명하고 1967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여담이지만 유치환이 이영도와 사랑의 연서를 주고받는 기간에도 또 다른 여인과 5년 여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영도가 다른 여인이 먼저 책을 내기 전에 유치환의 명예를 위해 서둘러 유치환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은 시집을 출간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어느 계열 예술 하시는 분인지 아시겠죠? 순간의 진정성 계열. 그래서 지금 유치환 선생의 시편을 같이 들으셨어요. 김춘수 선생이 화동이었다는 게 너무 재미있는 그런 구절입니다. 그다음 초정 김상옥 선생은 1920년생. 2004년까지 사셨네요. 한 팔순 넘겨서 사셨는데 지금이야 시조들 많이들 같이 안 읽으시지만 시조시인으로 아주 유명하시죠. 부친은 갓을 만들던 장인이었다. 역시 통영인 거죠. 초정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점차 집안이 기울어 인쇄소 등에서 일하며 문학청년 시절을 보냈다. 현재의 초정거리는 김상옥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 1926년에 시조동인지 <참새>가 발간된 곳이기도 하다. 거기 가면 기념비 있습니다. 통영에. 초정은 <참새>를 나로 하여금 시에 눈뜨게 한 첫 횃불이라고 회상했다. 총명하고 감각이 뛰어난 그는 시조는 물론 서화, 전각, 도자기 등 여러 분야에 두루 출중했다고 한다. 강인하고 올곧은 성정으로 일제강점기 때 세 번이나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되는 해에는 유치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는 등 평생 다양한 문화사업을 펼치고 교육과 예술에 인생을 바쳤다.

통영에 이순신 시비(詩碑) 건립을 주도했던 것도 초정이다.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던 시인은 2004년 부인이 사망하자 먹고 마시는 일을 중단했으며 엿새 만에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뭐 지금 앞줄에서 이런 이야기 나왔습니다. 정말 둘이 비교된다. 이거 누구죠? 잘 그렸나요? 비슷해요? 김춘수 선생이고요. 이분은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이분은 김용익이라는 분이고요. 역시 통영 출신의 소설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이 안 알려졌는데 그 시절에 굉장히 예외적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발표하셔서 미국의 유력 신문들이나 이런 데서 평을 다 받았을 만큼 굉장히 인정을 받았던 작가예요. 우리나라 초창기 외무부 장관 중에 김용식 장관이라고 기억하십니까? 형제였어요. 그 페이지를 잠깐 볼게요. 10페이지. 1920년생이시고 1995년까지 사셨네요. 태평동에서 태어난 김용익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형 김용식은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외무부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냈다. 김용익은 해방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문학을 공부하며 습작을 하다가 1956년 하퍼스 바자에 영어 단편소설 The Wedding shoes, 꽃신이죠, 우리말로. 가장 아름다운 단편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해녀, 푸른 씨앗 등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그의 작품은 미국과 영국, 독일,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주목을 받아서 교과서 17군데나 등재가 됐고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안타까운 작가다. 1976년 미국 최우수 단편으로 선정, 미주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자료는 통영의 문화연대라는 곳이 만든 자료인데요. 그러니까 당연히 애향심에 불타오르는 그런 자료들을 보고 계신 겁니다. 물론 이제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으나 당연히 팔이 안으로 굽는 그런 자료들인데. 그런데 이제 저는 문학 담당을 오래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노벨문학상 후보다라는 표현이 되게 뭐랄까요. 그러니까 실제로 후보를 어떻게 뽑는지를 여러분이 아시면 후보라고 얘기하는 게 되게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전국의, 전 세계에 있는 노벨상 추천 위원들이 있고 그 추천 위원들과 이런 분들을 추천을 하라고 하고요. 그걸 가지고 이제 그쪽에서 하게 되는데 그걸 공개를 안 하기 때문에 후보가 됐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러니까 우리가 뭐 지금 고은 선생이 후보네, 또 박경리 선생이 후보네, 이문열 선생이 후보네 이렇게 얘기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다 근거가 없는 얘기들이에요. 그 작품들을 우리가 좋아해서 애정한다는 의미 정도로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영어로 발표된 소설이지만 몇 구절 정도가 지금 여기 제가 가져온 게 있는데. 그런데 시가 아니고 소설의 한 구절입니다.

[지금 저 판자 위에 꽃신 다섯 켤레만이 피난민으로 가득찬 시장의 공허를 담고 있다. 그것이 다 팔려가기 전 한 켤레 신발을 위해 돈주머니를 다 털어버리고 싶지만 결혼 신발 아닌 슬픔을 사지나 않을까 두렵다.] 이게 꽃신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김춘수 선생 차례네요. 1922년생이니까 청마 유치환보다는 몇 살이 어린 건가요? 14살 차이가 나네요. 뭐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하면 화동할 만한 나이죠. 한 10살 소년이 24살에 결혼하는 큰형님 가서 화동 역할을 하는 거니까. 동호동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던 진명 유치원에 다녔다. 호주 선교사에 대한 기억은 김춘수의 유년 시절을 비롯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김춘수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릴케의 시를 통해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 일본에서 불경죄로 구금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통영문화협회의 총무로 일하며 문화운동을 펼쳤다. 청마는 일찍이 후배 김춘수를 눈여겨보았다가 해방 후 그가 문단에 발을 들여놓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결혼식 화동이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죠. 실제로 김춘수가 통영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김춘수의 시 ‘꽃’은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해평동에 김춘수 유품전시관이 있다. 그 고향에 관련한 시편이 하나 있었어요. 이게 지금 앞에 보시면 ‘앵오리’라는 시편이 있는데 잠자리를 통영에서는 앵오리라고 한다네요. 그래서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 고치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통영을 토영이라고 한다. 박경리 선생을 통영 내부에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놓고 있나 잠깐 볼까요?

1926년생이시니까 지금 우리가 계속 얘기했던 분들보다는 한 네 번째, 다섯 번째로 밀리십니다. 본명은 이제 박금이.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와 함께 충렬사 앞 명정동 일대에서 유년을 보냈다. 한국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항남동에서 수예점을 운영했다. 30대 초반 꽃다운 나이였던 그는 당시 통영 충렬학교의 한 총각 선생님과 재혼했는데 세간의 눈총으로 이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산여중에서 교편생활을 잠깐 했던 박경리는 힘겨운 시기에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잃은 후 고향을 떠났고 이후 오랫동안 통영을 찾지 않았다. 딸 김영주는, 그거 아시죠? 김지하 선생님이 사위잖아요. 그러니 자기의 유년 시절도 그렇게 박복했는데 사위까지 그렇게 또 독재정권에 항거한다고 감옥 들어가서 옥바라지 또 엄청 했거든요. 하여튼 박복하신 분이셨어요. 딸 김영주는 훗날 김지하 시인과 결혼하였다.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것은 2004년 11월 5일,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오랜 세월 통영을 떠나 있었지만 고향에 대한 박경리의 추억과 그리움은 ‘토지’, ‘파시’ 등의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특히 ‘김약국의 딸’은 작가가 나고 자란 공간을 배경으로 생생하게 고향에 대한 기억을 그려내고 있다. 거기 통영문화연대나 통영 길 이렇게 만드시는 분들이 이 김약국의 딸들 코스를 다 개발을 해놨습니다. 다 팻말들이 있어요. 우리 왜 요새 서울도 걷는 길들 잘해놔서 이정표, 표지판 다 있잖아요. 굉장히 잘되어 있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은 1963년에 흑백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소설의 배경인 통영에서 촬영을 했다.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8년 화사한 봄날에 눈을 감은 박경리는 고향 땅 통영의 양지바른 곳에 잠들었다. 산양읍에 묘소와 박경리 기념관이 있다. 두 번째 챕터가 이제 백석이 들어가는 챕터인 거죠. 통영이 고향은 아니지만 통영을 애정해서 그런 어떤 작품을 남긴 작가들. 요새 왜 어제 텔레비전 자막 뉴스들 보다 보니까 통영의 케이블카. 이게 무슨 천만 명을 돌파했다고 자막 뉴스가 나오더라고요. 그게 한 7~8년밖에 안 됐을 텐데 엄청들 가신 모양입니다. 그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면 당연히 한려수도가 쫙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좋잖아요. 고생들 안 하시고 올라가시니까 많이들 이용하시는데 사실 또 직접 걸어서 올라가면 훨씬 더 보람도 크기는 한데 뭐 쉬운 얘기는 아니죠.

그런데 거기 올라가면 시비 하나 있잖아요. 그 시비가 바로 정지용 선생 시비죠. 정지용은 1950년에 서정주 등과 함께 통영을 방문했다. 정지용은 유치환의 안내를 받아서 미륵산 등 통영 곳곳을 돌아본 뒤에 그 감상을 연작 기행문으로 남겼다. 미륵산에 정지용의 문학비가 자리하고 있다. 말씀드린 대로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면 바로 있습니다. 그 앞서 이영도 시인 얘기가 나오는데요. 그러니까 시조시인 이호우 선생 이름을 많이 알고들 계실 텐데 그 이호우 선생 여동생이자 마찬가지로 시조시인이었던 이영도는 일찍 남편을 잃고 29세의 나이에 딸과 함께 통영으로 내려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나중에 통영여중이라는 이름이 된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꽃다운 29세, 지금은 꽃다운 29세 맞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꽃다운 29세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곳에서 유치환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까 그 수천 통의 편지가 왔다 갔다 했다는. 청마는 이영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무수한 연서로 남겼는데 1967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치환이 사망하자 편지 일부를 엮어서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출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통영의 예술가들 중에 이영도 선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영도 여사. 굉장히 마음씨 좋은 할머니처럼 그리셨어요. ‘모란’이라는 시조가 있는데 여기 있습니다. 앞에 보시면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이영도 선생 모란. 백석에 대해서는 6줄로 묘사를 하고 사랑 이야기를 여기 또 따로 해놨네요. 본명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그 사안들이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신현중이라는 이름이었죠. 같은 신문사에 있었던. 지금도 거기 쌈지공원에 시비로 남아있어서 아까 거기 왜 통영 시편 두 번째를 보면 명정골, 명정샘 이런 지명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 지금도 남아있고요. 시비들이 거기 다 있습니다. 가시면 보실 수가 있어요. 통영 르네상스라고 부를 만큼 이렇게 그 당시를 빛냈던 위대한 시인들, 작가들 이런 분들이 같은 당대를 사셔서 그렇게 놀랐던 부분들이 있는 겁니다. 그때 뭐 지금 나온 어떤 충렬학교, 통영여중 이런 데 다 국어선생 김춘수, 미술선생 전혁림 이래서 그 당시 그 학교 다녔던 제자들은 참 그게 무슨 복인지 그런 보신 분들이 있었던 거죠.

그 이후에 1940년, 1950년, 1960년대에 그렇게 화려했던 통영 르네상스가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가 됐느냐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이후에는 대부분 다 서울로, 서울로. 그래서 뭐 그게 산업이 됐건 예술이 됐건 다 이제 서울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런데 지금 한 몇 년 전부터는 다시 또 지방, 지역 내려가는 움직임들이 좀 있는 것 같거든요. 통영에서 제가 최근에 관심 깊게 보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이런 겁니다. 거기 <남해의 봄날>이라는 작은 출판사가 생겼어요. 3년 전쯤에 제가 책 담당이다 보니까 어떤 우수한 출판 기획, 이런 것들을 응모를 받아서 뽑아서 시상을 하는 프로그램이 출판문화진흥원에서 있었는데 거기 심사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1등으로 뽑힌 출판사가 서울의 그 큰 출판사들 다 제치고 통영의 출판사였어요. 그 출판사 이름이 <남해의 봄날>이었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통영의 아티스트들을 두 부류로 나누지 않았습니까? 태어나신 분하고 통영이 좋아서 가셨던 분하고. 이 출판사도 후자 쪽인데요. 서울 사람인데 통영으로 간 거예요. 40대 초반의 여성이었는데 거기 좋아서 가서 기획을 해서 무슨 이런 책들을 내요.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 또 뭐 가업을 잇는 사람들. 어떻게 보면 역행하는 것 같죠, 이 거대한 흐름에는. 그런데 굉장히 책들을, 잘 사람들을 발굴하고 잘 만들어서 지금까지 어떤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남해의 봄날> 이후에 다른 지역 뭐 논산, 진주, 또 뭐 영천 이런 데서 출판사 하시겠다고 시작하시는 분들이 생겼어요. 1인 출판사 또는 뭐 2인, 3인 출판사. 굉장히 작은 출판사지만 기획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해보겠다고 욕심을 내시는 분들이 생겨서 그분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고 새로운 방식의 출판과 서점과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의미 있는 기획들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우리 인문열차를 같이 가시든 아니면 개별적으로 통영 여행을 하시든 추천을 좀 드리고 싶은 게 이 역사적인 인물들.
1940년대, 1950년대 통영 르네상스의 분들만 보고 오시지 마시고, 다 물론 보시고 그다음에 지금 얘기한 <남해의 봄날>이라는 출판사가 거기에다가 서점도 만들었거든요. 단순히 출판사뿐만 아니라. 굉장히 작은 서점이에요. 그 전혁림 미술관 가보신 분 계세요? 전혁림 미술관? 그 바로 옆집에 생겼어요. 그러니까 전혁림 미술관 보러 가실 때 옆에 있는 서점. 아, 이게 요새 젊은 사람들이 통영 와서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구나.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오늘 보신 자료집이나 지도 같은 것들도 그 집에서 만들었어요. 기획을 하고. 통영 사람들하고 같이. 통영과 관련해서 제가 준비한 자료들은 대략 여기까지입니다.

이런 시간들이, 물론 저는 제가 강연을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거나 이거는 아니어서 더 민망하고 부끄럽습니다만 이런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요새. 제가 이런 생각들을 요새 더 하는 이유가 뭐냐면 이세돌, 알파고 때문이에요. 인공지능 시대 이후는 너무들 이제 디스토피아로 걱정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바뀔 것인가. 오늘 유발 하라리 얘기도 그랬습니다만 이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기술이 어디까지 왔냐면 농업혁명이 일어났건 인지혁명이 일어났건 산업혁명이 일어났건 지금까지 유사 이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혁명이 일어나도 인간 자체는 바뀐 적이 없다. 사람의 뇌, 사람의 신체, 사람의 마음, 사람의 감정 이런 것들은 바뀌어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이게 지금 바뀌려고 한다는 거예요. 화학용어를 써서 안 됐지만 이 모든 것들은 유기물인데 기계는 무기물이란 말이죠. 진화는 유기물로 이루어져 왔었어요. 그런데 지금 그게 무기물로 넘어가려고 해요. 무기물에는 생명이 없는 거잖아요, 원래. 그건 의식이 없는 거잖아요. 감정이 없는 거잖아요. 하라리 선생이 예로 들고 있는 게 2011년에 인공팔 하나를 양쪽 팔에, 그러니까 사고로 팔을 잃은 어떤 미국 사람이 있었는데 인공팔을 달았대요. 인공팔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건 뭐 영화에서도 많이 봤고 버튼 누르면 이렇게 올라가고 버튼 내리면 내려가고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팔이 움직이는 겁니다. 인공팔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자기 팔인 거죠. 내가 생각하면 내가 생각한 대로 팔이 움직이는 거예요. 버튼 누르는 게 아니에요. 그럼 이건 우리가 휴대전화를 2년마다 바꾸는데 얘도 2년마다 바꾸면서 더 좋은 팔로 바꾸는 거죠. 젊은 분들은 ‘공각기동대’라는 영화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인터넷 네트워크 세상이 발전하면 사람의 뇌도 와이어리스로, 와이파이 되는 거예요. 와이파이 돼서 접속해서 나는 여기 있지만 무선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미국에 있는 어떤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거예요.

이러면 인간이 도대체 뭔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일자리 없어진다는 얘기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다 기계가 하는데요, 뭐. 예전에도 기계가 나타나면 사람 일자리 줄어들 것이라고 걱정을 했고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지 않냐. 새로운 일자리 생기면서 큰 문제는 없지 않았느냐라고 얘기하는데 지금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하는 얘기는 조금 다릅니다. 정말 걱정해야 할 때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고 또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기계가 모든 걸 다 해내고 부가가치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놀고먹어도 될 거다. 그래서 가상현실 게임이나 하고 컴퓨터 안에 들어가서 놀고. 그거 돈 안 들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어떤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단순히 주어진 외부의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사람이 산다라는 건 자기가,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의미 부여가 돼야 사실 사는 건데 그게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외부적인 가상 세계 즐거움, 게임, 이런 거 한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게 사람일까. 이런 생각들을 알파고, 이세돌 AI 시대에 지금 가장 큰 걱정 중에 하나고 많이들 하는 생각입니다. 되게 소극적이고 무력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게 정말 작은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 시간을 자기가 결정해서 이 공부를 하겠다.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이 강의를 듣는다. 와서 그 시간이 자기한테 풍성해지고 자기 마음이 이만큼 커지고 새로운 궁금증이 생겨서 추가로 어떤 질문을 하고 책을 찾아보고 또 공부를 하는. 이거는 AI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사람이 느끼는 즐거움이기 때문에 걔가 뺏어갈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는 즐거움. 그리고 그걸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는 것.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기 때문에 누구도 그게 어떨지는 솔직히 모릅니다. 저도 당연히 모르고 전문가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얘기를 해요. 하지만 남아있는 시간 속에서 자기가 인간으로서 의미 부여를 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요. 책읽기와 공부야말로 사실 가장 돈 안 들면서 가장 즐거울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이게 통영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 여러 이야기들을 했었지만 구태여 그것이 꼭 통영이어야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주제면 모든 게 가능하겠죠. 마지막은 그런 식으로 맺음을 할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