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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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명문가의 한옥 고택을 찾아서

오늘 소개해드리는 지역은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고택(故宅)이 되게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영주 삼판서 고택이라고 해서 우리 바로 지난해 드라마로 아주 명성을 떨쳤던 정도전. 삼봉 정도전 선생이 유년기를 보냈고 정도전의 아버지가 사위에게도 물려줘서 3대에 걸쳐 판서를 역임했다고 해서 삼판서 고택이에요. 그래서 이 삼판서 고택하고 안동에 학봉 김성일 내앞마을이 있습니다. 김성일이라는 인물 잘 아시죠, 그렇죠? 임진왜란 때 처음에는 잘못 보고 해서 욕 엄청 얻어먹었다가 나중에 그래도 임진왜란 때 아주 크게 활약을 하셨던 인물, 학봉 김성일. 그 집을 가고 그다음에 닭실마을이라고 해서 봉화의 권벌이라는 인물. 이 인물도 되게 아주 학자로서 한때는 또 정치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그런 인물이 모여 있는. 특히 경상도 여기는 고택들이 사실 더 많아요. 그 이후에도 안동의 군자마을이라든가 지난해에도 한번 거기 잠깐 다녀왔는데 영주의 무섬 마을이라고 해서 여기 전통 마을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해서. 오늘 제가 하는 주제는 이런 고택을 탐방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인물을 아는 게 되게 중요하죠. 그래서 그 인물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 고택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삼판서 고택의 주인공은 바로 이제 정운경이라는 인물이에요. 정운경은 바로 정도전의 아버지입니다. 1305년부터 1366년까지 고려 충렬왕부터 고려 공민왕 때까지. 고려 후기를 살았던 인물이고. 사실은 따지고 보면 이 시대가 되게 힘든 시대예요. 왜냐하면 고려가 몽골족의 침입을 받아서 40년 동안 전쟁하다가 결국 항복을 합니다. 항복을 해서 고려라는 나라는 몽고의 부마국(駙馬國) 체제. 고려왕은 몽골 황제의 사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왕의 호칭도 전부 '충' 자 붙잖아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예왕... 이러다가 그 틀을 깨는 인물이 공민왕이에요. 그런데 사실 공민왕도 왕이 되기 전에는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는 인물이에요. 공민왕의 부인이 누구죠? 노국공주. 그래서 국정은 원나라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우리가 사실은 몽골 간섭기라고 해서 몽골에 실질적으로 많은 간섭을 받고 왕도 왕자 때 인질로 가기도 하고 또 대표적인 게 공녀(貢女)라고 해서 고려 여인들이 많이 몽골에 끌려가서 몽골의 허드렛일 같은 것에 종사했던 그런 아픈 역사가 있어요. 우리 사실 일제 강점기 지금 뉴스에 많이 떠들고 있는, 이야기 되고 있는 정신대 할머니. 정말 어떻게 보면 그 원조격. 그러니까 역사에서 다른 나라에게 침략을 당하면 아픈 역사를 당한다는 그런 사례를 보여주는 경우예요. 공녀도 그렇고. 공녀 중에 정말 원나라 갔다가 출중하게 정말 스타가 된 인물이 있죠. 누구죠? 기황후죠. 우리 하지원 씨가 있는데. 그거는 역사 속에서 기황후는 사실은 그렇게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거기 가서 너무 원나라 입장을 위해서 일을 했던 그런 인물이에요. 이런 것도 우리가 보면 묘한 거예요. 노국공주는 국적은 원나라인데 반대로 고려를 위해서 일한 그런 여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도 약간 그런 인물 있죠? 그래서 기황후가 정말 고려의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고려를 위해서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를 괴롭히지 말고 고려 좀 잘해달라고 이런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미 5만 원짜리의 주인공은 신사임당이 아니라 기황후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 그런 어떤 역사에서 보여주는 공녀라든가 이런 속에서 공민왕이 이제 등장하면서부터 반원 자주화 정책을 폈죠. 바로 이 정운경,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우리 역사 속에서 몽골 간섭기에서 벗어나는 그 시대. 국제정세가 아주 긴박하게 변하는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들이에요.

정운경의 삶을 살펴보면 집안의 뿌리는 향리(鄕吏) 출신입니다. 대대로 지금은 영주지만 예전에는 경북 봉화에 속했던 곳이에요. 경북 봉화의 향리 출신에서 이제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라고 해서 고려 후기에 뭔가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진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런 신흥사대부의 뿌리가 되는 사람. 그 핵심이 되는 인물은 바로 아들 정도전이 되는 거고. 우리 역사에서 신흥사대부라는 것이 되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역사를 바꾸는 세력이 되는데 그래서 오늘 정운경 그리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후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그들의 삶과 또 우리가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살았던 그 현장이 남아있다는 것이 되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보면 아, 이런 곳이 있구나. 우리 요즘 이순신 장군, 작년에 대세였던 분이시지만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아산 현충사에 있잖아요. 그런데 찾아가면 좀 느낌이 다르잖아요. 우리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도 이 땅을 살아갔던 분이구나. 이런 걸 느끼게 하는 정운경, 정도전이 이곳에서 살아가셨구나 하는 것들을 보여주죠. 그래서 정운경도 사실은 정도전만큼은 아니지만 이분도 고려후기에 상당히 높은 고위직을 지낸 관리입니다. 그래서 고려사에 양리전(良吏傳)이라고 해서 아주 어진 관리에 대한 전기라고 해서 고려사에 아주 뛰어난 관리를 기록한 전기에 이 사람 기록이 있어요.

정운경은 1305년에 영천(榮川). 이 '영(榮)' 자 써놓은 것은 영주예요, 그때 우리 고려 조선시대까지는 영천이라고 했어요. 지금 우리 경상도에 있는 영천(永川) 은 '길 영(永)川' 자 쓰고 영주할 때는 이 '영(榮)' 자를 씁니다. 구성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봉화고 증조부 공미는 봉화 고을 호장(戶長). 호장이라는 게 향리의 직책이에요. 그러니까 이 신흥사대부로 성장되는 이 집안의 뿌리가 되는 것은 다 지방의 행세하는 향리 출신. 호장을 지냈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부 영찬은 비서랑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추증되었다. 부친 균은 검교(檢校) 군기시감정(軍器寺監正)을 지냈고. 그래서 좀 더 약간 서서히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이런 집안이에요. 뿌리는 향리 출신이었지만 모친은 순흥 안씨로 안상열의 따님이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이모님의 집에서 자랐다. 하면서 고려사의 양리전에 정운경의 생애를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이 이제 10살 때 영주에서 안동 복주에 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주보다는 조금 안동이 크니까 안동으로 유학하는 이런 모습. 그래서 이 복주 목사가 훌륭한 재주와 기국(器局)을 지녔다고 인정을 했고 22살 때 사마시(司馬試)라고 해서 1차 시험에 합격을 하고 1차 시험에 합격을 하면 진사(進士)가 부여가 돼요. 우리가 보면 고려시대부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실시된 것은 아시죠? 우리 역사에서 과거제도가 처음 실시 된 고려시대왕은 누구일까요? 광종.


광종이 처음 실시하게 된 계기는 광종 때 중국의 후주(後周)라는 나라에서 쌍기라는 사람이 와요. 쌍기라는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이 되게 똑똑한 거야. 그러니까 광종이 옆에다 두고 이제 막 자문을 받는 거예요. 이런 저런 정책 자문을 받다가 이 사람이 아이디어 낸 게 고려시대에도 과거제도 실시하십시오. 그렇게 건의를 받아서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과거제도가 실시가 돼요. 그때 쌍기는 광종이 워낙 똑똑하고 그러니까 당신 중국 가지 말고 그냥 여기 머물러. 내가 잘해 줄게 이렇게 하니까 이 사람도 워낙 광종이 잘해 주고 그러니까 눌어붙은 거예요. 눌어붙으니까 아예 그러면 너 우리 국적도 바꿔. 해서 고려에 귀화(歸化)를 합니다. 우리 역사 속의 귀화인으로서 가장 먼저 역사 속에 선명한 이름을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 쌍기. 그리고 이제 그다음에 우리 조선시대 가면 지금 징비록(懲毖錄)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오는데 왜적의 선봉장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조선에 투항해가지고 귀화하는 인물 누가 있죠? 김충선. 보셨죠? 사야가. 원래는 사야가인데 김충선. 그래서 그 뿌리가 그 맥이, 흐름이 이어져서 지금도 보면 얼마 전까지 한국관광공사 사장하셨던 이참. 독일인, 귀화인이죠. 그다음에 ‘한뚝배기 하실래예’하는 로버트 할리. 이분도 미국 변호사 출신이죠. 은근히 귀화인이 우리나라에 이제는 되게 많아요. 우리 또 요즘 다문화 이럴 때 그런 원조쯤 되는 사람이 쌍기인데 과거제도는 이거 잘 기억하세요. 원래 초시(初試)가 있고, 초시는 소과(小科)라고 해요. 1차 시험이 있고 2차 시험이 있어요. 1차 시험이라는 건 '자격부여'를 하는 거예요. 1차 시험에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는 거예요. 생원은 주로 유교 경전을 시험보고 진사는 문장, 논술 시험 같은 거. 그래서 드라마 같은 데 보면 허 생원, 최 진사, 맹 진사 이런 말 하는 게 그 사람들은 1차 시험까지만 합격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1차 시험을 합격하면 2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고 거기에서 합격하면 관리가 되는 거예요.


정운경도 동진사(同進士)로 먼저 급제한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에 진사가 되었다가 과거에 급제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관직에 진출해서 상주 목사(牧使)라든가 복주 판관(判官)이라든가 전주 목사 같은 지방의. 요즘으로 치면 시장, 전주 시장, 상주 시장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 중앙에 들어와서 조선시대하고 고려시대가 관직이 약간 다른데요. 병부시랑(兵部侍郞), 영록대부(榮祿大夫), 형부상서(刑部尙書). 형부상서가 조선시대로 치면 형조판서(刑曹判書)하고 같은 거예요. 뭐죠, 지금의? 법무부장관까지. 상당히 요직을 지내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자기가 본인이 잘나가니까 나중에는 아들도 너도 서울에 와. 유학시킵니다. 그게 이제 바로 정도전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정운경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고 그때 당시 정운경이 사신으로 갔을 때 기황후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하는 그런 장면을 이 사람이 목격을 하고 와요. 그리고 이제 이때 기록에 보면 이들이 정운경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몹시 거만하게 대했을 때. 뭔가 고려를 얕잡아 봤다라는 거죠. 그때 정운경이 정색을 하면서 베풀어주신 대접은 옛 임금을 위한 것이다라고 해서 고려인의 정체성을 지키라고 기황후에게도 일갈(一喝)을 했고, 이때 근신들이 크게 놀라 수재가 정운경을 말하는데 우리를 가르쳐 주셨소 하면서 뭔가 이제 이미 이때부터 뭔가 당당한 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는 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1365년에 병이 나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고 1366년 1월 23일 항년 62세로 바로 그 집. 지금 우리 이번 답사에서는 가겠지만 삼판서 고택에서 돌아가신 거죠. 그리고 나중에 문계서원과 문천 모현사에 배향했던 인물이 정운경인데 정운경의 시호(諡號)에 관한 이런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요.


정운경이 서거하자 친구 성산사람 송밀직과 복주사람은 안동사람. 권검교가 서로 의논하기를 '벼슬이 호를 받을 수 있는 품계가 못 될 적에 친구가 시호를 지어주는 법이다. ' 라고 해서 도연명의. 이게 이제 우리가 시호를 내려줄 때는 아주 고위직에 올라갔을 때만 시호를 내려주는 거예요. 시호라는 것은 보면 그 인물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정도전하면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峰)이거든요. 또 시호가 있고. 그런 것은 호는 살아생전에 이 사람을, 특히 제자들 같은 경우에 요즘도 그렇지만 이름 막 부르기가 힘들잖아요. 그랬을 때 우리는 지금 많이 붙이는 호칭이 그분의 직책 같은 걸 많이 붙여요. 교장선생님, 아주 고위직이면 총장님 우리 총장까지 역임 하시고 이런 식으로 부르듯이 조선시대는 그런 걸 제자들이나 아랫사람이 부르게 하기 위해서 지어주는 경우를 '호' 라고 하고요. '자' 는 친구들끼리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 이게 '자' 예요. 율곡 같은 경우는 '호' 는 율곡이고 '자' 는 숙헌이라는 '자' 가 있어요. 그리고 이제 시호는 돌아가신 이후에 이분을 나라에서 주로 정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 문신들은 '문' 자를 줘요. 그래서 '문' 에다가 문정, 문숙. 율곡 이이 같은 경우는 문숙, 문헌, 이런 식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무신들 같은 경우는 대부분 '충' 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은 충무공 이렇게 되는데 사실 나중에 찾아보시면 충무공 되게 많아요. 이순신 장군이 워낙 유명하셔서 그렇지 웬만한 무인들은 '충' 자에 약간 용맹스럽다 이렇게 하려면 다른 거 줄 게 별로 없거든요. 충무 아니면 충장 아니면 충렬, 이런 걸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많이 섞이게 되는. 그래서 '자' 와 '호'그리고 이제 인물에 따라서는 호가 되게 많은 경우가 많죠.

우리 다산(茶山) 선생 같은 경우도 다산 정약용 선생 같은 경우도 호가 되게 많죠. 아시는 호, 다산. 다산은 유배지 귀향 갔을 때 그곳에서 차가 많이 나는 산이라고 해서 다산이에요. 그리고 정약용 선생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서 여기 눈썹이 3개로 찢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뭐라고 한다? 삼미자(三眉子)라고 해요. 그리고 이제 정약용이 정조 때 관직 생활 하다가 시골 고향, 경기도 마재로 돌아오죠, 양수리. 저기 돌아와서 내가 좀 더 조심스럽게 살아야겠다. 그때 상당히 견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겨울 시냇물을 걸을 때처럼 조심조심 하는 것을 '여' 라고 해요. 그다음에 '유' 도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유' 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지은 당호가 뭐죠? 여유당(與猶堂)이 되는 거고. 그다음에 자신의 업적이 나중에 때가 되면 이게 뭔가 빛을 발할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호가 '기다릴 사' 자를 써서 사암. 뭔가 기다리는 바위라고 해서 '사암(俟菴)' 이라는 호가 있고 또 하나 중요한 호가 '열수(洌水)' 라는 호도 있어요. 열수는 한강을 뜻해요. 다산이 주로 살았던 데가 한강 쪽이에요. 이런 인물에는 그런 호가 자신의 연고지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특징 같은 거. 이런 것들을 가지고 호를 짓는 경우가 되게 많다는 거. 시호를 받을 수 있는 품계(品階)가 못될 적에는 친구가 지어준다고 하면서 도연명의 정절(靖節)이라는 시호와 서중거의 절효(節孝)라는 시호가 이런 전례에 속한다고 하면서 도연명도 시호 받을 만한 관직을 받지 못했지만 이 친구들이 이런 시호를 지어줬다면서 지어준 시호가 염의(廉義), 청렴하고 의리 있는 사람. 이런 뜻으로 시호가 지어졌다는 거. 그래서 보통은 이러면 이제 항상 염의 선생, 염의 선생 이렇게 많이 불렀던 것이죠, 돌아가신 후에. 그리고 정운경이 지었는데 이름을. 이름도 뭔가 이 사람 때부터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데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진 거예요.

우리가 성리학이라는 것은 고려후기 처음 우리나라에 수용이 돼요.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곧 '리' 다. 성즉리(性卽理), 이거 예전에 배우신 것 같죠, 그렇죠? 그래서 성리학이고 이 성리학을 완성한 사람이 중국의 주자이기 때문에 뭐라고 하죠?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하는 거예요. 완성은 중국의 남송 때 완성이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원나라 때 처음 도입이 되고, 이때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해 온 인물이 누구죠, 성리학을? 안향. 이게 상당히 국립도서관에 역시 강연 들으러 오시는 분들은 수준이 좀 있습니다. 거의 대답이 착착 나오는데. 안향이라는 인물이 처음 도입을 해와서 그 당시로 치면 당시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센세이션을 일으켜요.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특히 도덕, 왕도, 민본. 이런 사상이 그 당시에 고려후기 사회가 너무 특권층이 권력을 많이 차지하고 특히 이런 게 비슷해요, 역사는. 몽골 간섭기 때 우리 일제 강점기 친일파 생이죠? 몽골 시대에는 부원세력이라고 해서 원나라하고 결탁하는 세력들이 또 특권을 형성해요.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이념적 무기로 성리학 이념을 상당히 수용을 하는, 이런 문화가 형성되고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신흥사대부라고 하는 거예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도 이런 모습을 띠었는데 이름도 보시면 도전, 도를 전하는 사람. 도를 존승하는 사람. 도를 회복하는 사람. 아들 이름도 이렇게 짓더라는 거죠. 성리학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가 보면 이것도 아실 것 같은데 이순신 장군 형님 이름 아시는 분? 이순신 장군 형님 이름이 뭐죠? 요신(堯臣), 정답 나왔습니다. 요신이죠, 요신. 이순신 장군 형님이 왜 요신이냐면 중국의 이상 시대가 요순시대(堯舜時代)예요. 그러게 요 임금의 아들 요신. 순 임금의 아들 순신. 동생 이름은 뭘까요? 요 임금, 순 임금 다음에 또? 중국 성인이 우 임금이에요, 우 임금. 그래서 우신(禹臣)이 되는 거예요. 그런 것도 보면 그 시대에도 이순신 장군 집안에 뭔가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거예요. 도전(道傳), 도존(道存), 도복(道復). 이것도 바로 이제 유교 이념이 들어가 있다는 거.

그리고 워낙 잘 알다시피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의 최대 공로자였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사석에서는 이성계가 워낙 정도전을 좋아해서 나의 장량이다, 장량이다 이런 평가를 해요. 장량이라는 것은 중국의 한나라 고조의 대표적인 참모가 장량이에요. 그런데 정도전은 술 마시고 와서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할 때는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거다. 결국은 실제 이성계가 왕이지만 왕을 다 주무르고 이런 사람은 나다. 이런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에요. 그게 결국은 화근이 돼서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이 결국 정도전을 살해하는 원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사실 정도전은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잘 아시겠지만 한동안은 정도전 이름조차 잘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 국사책에서도 정몽준은 다 알아요. 단심가(丹心歌) 나오고 해서 이몸이 죽고 죽어. 뭐 충신의 대명사. 마르고 닳도록 외웠는데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그렇게 잘 알지 못했다가 이 이름 석 자가 딱 본격화된 것은 1997년에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 기억하시죠? 김흥기 씨라는 탤런트가 정말 연기를 잘했어요. 그러면서 정도전? 우리 역사에 저런 사람이 있었어? 하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이후에 정도전에 관한 대중서들이 많이 나왔어요. 정도전을 위한 변명. 이러다가 바로 작년에 정도전이라는 드라마. 처음에는 과연 이게 성공할까는 의심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이제까지 이런 KBS 대하사극의 주인공은 대부분 왕입니다. 대왕의 꿈, 태조 왕건, 아니면 최소한 왕비쯤은 돼야죠. 명성왕후 아니면 여인들 떼거지로 나왔던 여인 천하. 이 정도는 나와야지 시청률이 보장이 되는데 이거 뭔가 이제 하나의 그래도 아주 뭐 지명도가 있지도 않은 인물을 과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썼을 때 성공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결과는 속된 말로 대박 터있습니다. 정도전이라는 드라마는 왜 그러면 생각보다 흥행에 성공을 할 수 있었느냐? 우리가 고려 말 조선 건국을 둘러싸고 인물 간의 이런 대립이 되게 선명하더라는 거죠.

정도전 드라마 보시면 항상 끝 장면은 두 주인공이 째려보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는 정도전하고 이림이 째려봅니다, 그렇죠? 그다음에는 최영하고 이성계가 째려보고. 그다음에 정도전하고 정몽주가 째려보고. 마지막에는 누구하고 누가 째려보죠? 정도전하고 이방원이 째려보죠.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마지막에 그런 요소는 결국은 그만큼 고려후기 조선후기 이 사회가 아주 격동의 시대였다는 것을 반증을 하는 거예요. 정도전은 1342년에 출생을 했고 1398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걸쳐 살았는데 정작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는 가장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건국 후 7년 만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죠. 아버지 정운경. 어머니가 단양 우 씨이고. 여기도 약간 논란이 있는데 호가 삼봉인데 한동안은 계속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호를 지었다. 보통은 그 인물이 호를 뜰 때 자신의 연고지에서 호를 따 와요. 우리 율곡(栗谷)이라는 호도 율곡 선생이죠. 선대로부터 파주 율곡리에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율곡이라는 호를 쓰는 거고 연암(燕巖) 박지원이라고 했는데 연암 박지원은 젊을 때 황해도 금천에 연암협이라는 계곡에서 살았어요. 제비바위라는 뜻이죠. 그래서 연암인데. 당연히 도담삼봉이 단양 옆에 있고 단양에 외가니까 정도전의 호 삼봉은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도전 연구를 더 해보니까 정도전이 쓴 시라든지 이런 거 보면 정도전이 묘사하는 삼봉은 이 삼봉이 아니라 오히려 서울의 북한산 자락이라는 거죠. 북한산도 삼봉 맞죠? 그렇죠? 삼각산이라고 불렀잖아요. 그래서 이거가지고 지금도 좀 논란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부친의 근거지가 있었는데 아까 영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거기가 삼판서 고택이죠? 그다음에 부친이 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개경에 올라와서 이때 당대의 지성을 대표했던 이색이라는 사람의 문하에 들어가서 정몽주하고 이때 동문수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에도 계속 두 사람이 절친으로 나오죠, 그렇죠? 정말 그런 사이였어요. 가장 이때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하고 공부할 때도 제일 서로 우정을 교환했고 정말 친했던 친구인데 역사의 길은 두 사람의 길을 확 갈라놓게 되는 건데 1362년에 문과에 합격합니다. 그리고 이색의 천거(薦擧)를 받아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또 이게 중요한데 공민왕의 후원에 힘입어. 아까도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공민왕 시대가 이제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반원 자주화 운동을 펼치는 그런 시기예요.

공민왕이라는 왕은 원나라 연경에 가서 고려로 오면서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호복(胡服). 오랑캐 복장을 벗어던져 버렸다고 해요. 왜 우리가 계속 몽골에게 질질 끌려가야 하느냐, 이러면서 소위 말하는 독립 선언을 해요. 그렇게 사실 그게 가능한 게 공민왕도 정말 완전 뱃심이 좋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이때가 마침 중국 대륙이 그 강대국이었던 원나라가 서서히 멸망하고 명나라가 흥기(興期)하는 국제 정세의 변동을 어느 정도 활용을 한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원나라 정말 계속 따라다닐 필요가 없다. 신흥강국 명나라하고 교류를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거 우리 현대사에 비교하면 우리 한때 1992년에 중국하고 수교하기 직전에 어디하고 수교했죠? 대만하고 했죠. 대만하고 수교하다가 어느 날 우리가 딱 보니까 대만 시장은 요만큼밖에 안 되고 중국 시장은 이렇게 큰데 우리 중국하고 수교하면서 사실 그때 대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아주 충격을 받죠, 대만에서는. 우리 한국하고 교류도 안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 처지에서는 이제 대만하고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사실 그런 것하고도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공민왕이 친명 정책을 쓰면서 반원 자주화 정책을 펼치는 거죠. 이러면서 공민왕이 내부 정치 세력 중에서도 원나라하고 결탁하고 있는 그런 세력들을 다 쳐버리는 거예요. 그때 공민왕이 숙청한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하면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라는 사람이에요. 기철 세력을 칩니다. 그러니까 기황후는 공민왕에 대해서 완전히 요즘 표현으로 하면 거품을 품는 그런 경우예요.

그렇게 공민왕이 반원 자주화 정책을 펼치면서 기존에 원나라하고 결탁하고 있는 세력 대신에 참신한 젊은 세력. 그런 세력이 바로 신흥사대부들. 이들을 적극 후원을 하는 거예요, 공민왕이. 그래서 정도전이 시기는 잘 맞은 거예요. 신흥사대부로 성장할 때 공민왕이라는 정말 탁월한 왕을 만나서 뭔가 잘나가는 듯한 이렇게 보였던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이런 데서도 보면 역사라는 게 몽골제국 보면 한때는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러시아 남부지역까지.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 있죠? 크림반도 저쪽까지도 몽골이 차지했던 때가 있었어요, 한 150년간 세계대제국. 그런데 지금 몽골 보십시오. 이런 거 보면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우리가 한때는 몽골에 복속된 나라였지만 지금은 우리 국력이라든가 여러 가지 정치력, 경제력 모든 걸 비교해보세요. 이렇게 우리는 정말 그래도 이 정도 성장한 거 비교하면 그래도 우리 민족의 저력이라는 거. 이런 거는 우리가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 불운이 닥칩니다. 공민왕이 시해(弑害)당해요. 공민왕이 자저의 공간이라고 해서 자기가 그렇게 믿었던 젊은 군관들에 의해서 시해를 당하고 이때 공민왕이 시해 당했을 때 권력의 공백에서 정권을 잡고 탁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인임입니다, 이인임. 그래서 이인임이 정도전 드라마 초반부에 딱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예요. 공민왕 시해 후에 어수선한 정국에서 딱 최고 권력자가 돼요. 그리고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을 왕으로 올리는데 아주 공을 세우면서. 그래서 정도전이 결국은 이때 이인임이 권력을 잡으면서 공민왕 때 키워졌던 신흥사대부들이 대거 숙청을 당합니다. 정도전도 유배길에 올라요. 그래서 유배 간 데가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의 거평부곡이라는 곳이에요. 그래서 정도전이 유배 가는 장면도 드라마에 나오죠. 나주에 유배를 가서 오히려 이것이 정도전에게는 혁명가 정도전을 만든 거예요. 직접 현장에 가보니까 정말 백성들의 삶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거 확인을 하고 이 세상을 바꾸겠다. 이렇게 판단을 하고 바로 이성계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성계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가 보면 고려후기 상황에서 또다시 주목되는 것은 신흥사대부 성장이라는 축이 있고 또 하나의 축은 왜적의 침입을 그렇게 잦았던 시대예요. 북쪽에 여진족(女眞族), 홍건적(紅巾賊), 또 원나라 잔당 나하추(納哈出) 세력, 남쪽의 왜구(倭寇). 전쟁이라는 상황은 무장 세력을 성장시킵니다, 그렇죠? 그때 짠하고 등장한 무장세력 투톱이 누구냐 하면 최영과 이성계.

그런데 정도전이 유배에서 풀려보니까 최영은 이때 나이도 많고 상당히 친원적인 장군이에요. 이 사람하고는 기대할 게 없다. 그래서 이성계를 찾아갔고 이성계와 정도전의 이때의 만남이 바로 역사 속에서 문과 무가 결합이 되면서 역사를 새로운 혁명의 길로 들어가게 했죠. 그리고 이때까지 NO. 2 장군이었던 이성계 장군이 NO. 1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 사실은 어떻게 보면 군사 반란의 성격도 있는 거예요. 자신에게 명을 내렸던 우왕과 최영을 공격해서 결국 NO. 1 장군으로 성장을 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브레인이었던 정도전이라든가 또 조준, 남은 이런 사람의 후원을 받아서 마침내 형태도 마지막 왕, 공양왕이 스스로 왕위를 물려받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면 이성계도 무력으로 혁명을 하는 게 아니에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 사실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성공시키고 난 다음에 이성계가 공양왕은 고려의 왕 중에서도 창왕의 아들도 아니에요. 저기 왕계(王系)에서 멀리 있는 사람을 딱 왕위에 올려놓은 거예요. 이거는 나중에 왕위를 양보 받을 때 좋게. 정통성 있는 왕이 들어서면 양보 받기 쉽지 않죠. 그래서 우리 역사에도 이런 사례들이 몇 개 있어요. 대표적으로 헌종 때 순헌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할 때 어떤 왕을 업어오죠? 철종을 업어오죠, 강화 도령. 그렇게 해서 얼굴 마담으로 보여 놓고 실질적으로 정치는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이 다 하는 거예요. 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그런 장면들이 많아요. 그래서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그래서 이 기록도 보면 이렇게 나와요. 이성계 옥새(玉璽)를 가지고 관리들한테 불 같이 화를 냅니다. 왜 이런 걸 나한테 가지고 오느냐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이제 대비마마께서 옥새를 전해주러 왔습니다. 하니까 이놈들 가지 않을까! 하면서 내가 조금만 나이가 젊고 몸이 건강했더라면 내가 말을 타고 달아났을 텐데 할 수 없이 이거 받는다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뺨치는 연기를 합니다. 이때도 다 연기를 합니다. 내가 정말 하기 싫은데 남들이 다 하라고 하니까 내가 할 수 없이 한다. 형식상으로는 그래요 그런데 그때 정말 옥새 들고 온 사람들이 이성계가 그러면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냥 가져가겠습니다. 이러면 그다음 날 바로 처형당합니다.

1392년 7월 공양왕의 양보를 받아서 이성계가 즉위식을 올리는 곳은 개성에서 올려요, 개성의 수창구. 이거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양왕의. 그러니까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아직까지 수도는 여전히 개성이에요. 이성계 입장에서도 개성이 마음 안 들어요. 왜? 이거는 고려의 수도 개성도 약 500년 도읍이에요. 475년간 도읍이었고 개성 귀족들이 일단 이성계를 되게 싫어해요. 저 함경도 시골에서 활 좀 잘 쏘던 사람이 우리 왕이 됐다? 정서적으로 우리도 잘 안 맞죠. 그러니까 개경에 있는 대표적인 지식인들 두문동에 살았던 지식인들은 다 출사(出仕) 거부합니다. 뭐라고 하죠, 사자성어로?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렇게 돼버려요. 이성계 입장에서도 이 판을 확 바꾸고 싶어 하는 거예요. 정도전도 처음에는 반대해요. 새롭게 왕조가 건국되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궁궐도 만들어야 하고 이것저것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거 도읍까지 천도를 하게 되면 이거 너무 복잡해집니다. 이거 조금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그때 개성 인구가 50만, 한양 인구가 10만이에요.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다고 가정을 했을 때 한양에 가면 학교도 없고, 병원도 없고, 이마트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는 공무원들은 출, 퇴근 거리 늘어나는 거, 제일 싫어해요. 그래서 안 가려고 해요, 공무원들이. 정도전도 공무원이죠, 안 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태조 이성계가 불같이 화를 내서 이거 꼭 미션 추진해. 이렇게 돼서 정도전, 무학대사 등이 노력을 해서 천도하는 게 1394년 10월 28일. 그래서 우리가 한양 천도는 1394년이고. 혹시 여기 기억하실 분. 1994년이 한양 정도 600주년 기념이라고 해서 서울시에서 대대적인 행사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행사 중의 상징물 뭐가 남아있죠, 지금? 남산에 가면 있는데. 타임캡슐을 그때 심었다는 거예요. 1000년 뒤에 개봉한다, 2394년.

그리고 1395년 9월에는 궁궐. 북한산 남쪽 자락에 755칸 규모의 새 궁궐. 경복궁, 이것도 이름 붙인 인물이 정도전입니다. 경복궁이 완성되고 아주 태조 이성계가 기분이 좋아져서 술을 교환하면서 정도전 보고 궁월 이름 한번 지어보라고 하니까 이때 이성계가 술이 취한 모습에서 딱 착안을 해서 시경(詩經)의 대아(大雅)편이라는 구절의 보면 '이미 술을 마셔서 취하고 큰 은덕으로 배부르니 군자께서는 만 년토록 큰 복, 경복(景福)을 누리리라' 는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지금 전하가 술이 취해서 기분이 좋고 더불어 배부른. 이렇게 해서 백성들이 큰 복을 누리는 상황을 경복이라 했습니다. 경복궁으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까 좋다. 술김에 바로 OK가 됐습니다. 이렇게 정도전은 경복궁을 완성하고 거기에 있는 궁궐 정각 이름도 짓고 한양 도성의 종묘사직 등 모든 것을 진두지휘해 나갔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이념도 좋아요. 정말 600년 전 사람이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전제가 능력 있는 재상의 선택이다. 정도전의 생각은 왕은 세습되는 존재예요. 그러니까 재수 좋으면 세종 같은 왕도 나오지만 재수 없으면 연산군 같은 왕도 나온다는 거죠. 그러면 그걸 방지 하려면 한 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재상을 하나 뽑아서, 자기와 같은. 이 사람의 보좌를 받으면 된다는 게 정도전이 지향한 정책.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처음 출발했을 때 결국은 그 뼈대가 지속이 되는 거예요. 왕권을 상당히 견제하는 왕조국가가 조선이에요. 그래서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舘)이라고 해서 언론 기관 같은 게 되게 활성화되어 있고 왕이 함부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하는 시스템이에요. 궁궐 같은 경우도 근정전(勤政殿) 같이 이름에도 '부지런할 근(勤)' 자를 쓰는 거거든요. 왕이 항상 부지런하다는 것은 백성을 위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해라. 상당히 왕을 압박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이게 그게 싫으니까 이방원은 결국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왕권 강화론으로 나가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도전이 구축했던 뼈대는 그대로 이어지는 거예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러니까 연산군과 같은 독재 군주가 나타나면 그를 바로 쫓아 보내는 거죠. 그래서 우리 드라마 같은 데 보셔도 조선시대에 이제 신하들이 제일 많이 하는 발언 중에 하나가 뭐죠? '아니 되옵니다. '그게 바로 그런 문화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니 되옵니다. ' 왕한테 되게 아니 되옵니다 많이 해요. 항상 왕이 어떤 잘못 같은. 그러니까 기록이 발달해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모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적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 상당히 조심을 하고 뭔가 부정, 비리 이런 거에서 더 왕이 자기 스스로가 그런 걸해서는 안 된다 의식을 가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관료도 그러다 보니까 조선 시대 관리들은 청백리(淸白吏)가 가장 명예의 상징이에요, 청렴한 관리. 그리고 가장 부정적인 관리가 '장리(贓吏)', 뇌물 받은 관리. 이 조선시대는 보면 경국대전(經國大典) 법전에도 장리의 자손은 영원히 과거를 금지한다. 이런 규정이 있어요. 뇌물 받은 자손은 자기에게만 그치는 게 아니라 그 후손들도 영원히 과거 금지가 되어 버려요. 이러니까 뇌물 문화는 훨씬 지금보다 엄격한. 이런 시스템. 이런 것들을 기본적으로 만들어가요.

그 목표는 백성이다. '대개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인 것이다. 인군(人君)이 된 사람이 이러한 뜻을 안다면 백성을 사랑함이 지극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설파해라. 왕은 항상 목표가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그래서 현명한 관리를 선택해서 백성을 기르게 하고, 관리의 책임을 중히 여겨 백성을 책임지게 하고. 이런 것들 공무원은 좋아하실 것 같은데 관리와 녹을 풍족하게 하여 백성을 총애하게 하고. 공무원들 봉급 많이 줘라 이거죠. 결국은 백성을 잘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바로 이런 논리를 600여 년 전에 이런 논리가, 정도전은 또 중요한 게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그런 시스템을 다 만들어나가요. 토지제도에서도 과전법(科田法)이라는 토지제도가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확 줄이는 그런 제도거든요. 그러면서 그게 가능한 게 뭐냐 하면 시스템을 철저하게 공 개념으로 하는 거예요. 기존의 양반이라든가 특권층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상당히 제한하고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이런 시스템을 주로 확보를 해서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이런 시스템을 계속 구축해나갔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라든가 경제문감(經濟文鑑)같은 저서를 통해서도 피력을 했고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합리화한 역사책도 쓰고, 불씨잡변(佛氏雜辨)과 같은 불교이론체계를 비판한 책도 쓰고. 이 사람 정말 만능이에요. 진법(陳法)이라고 해서 군사 훈련 지침서까지. 이런 것도 책으로 만들어요. 그래서 정도전 드라마 보면 마지막 부분에는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정도전의 모습이 착 나와요. 병사들 모아놓고 막 이거. 이걸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죠. 그래서 그때 이번 정도전 드라마에서는 이성계가 17년 전 용의 눈물에서는 아들이었던 유동근 씨가 그때는 태종 역할을 했죠.

이번에는 아버지 태조가 되면서 또 하나 무기로 장착한 게 함경도 사투리입니다. 그 드라마 아마 기억날 거예요. 정도전이 요동정벌 추진하는 그 과정에서 이성계가 주원장 이놈 간나새끼!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게 이제 주원장. 우리도 명에 대해서 무조건 굴복할 게 아니라 군사를 키워서 한번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맞짱 뜰 수도 있다. 그걸 진두지휘하는 인물이 바로 정도전. 그렇게 정말 여러 가지 면에서 능력을 보였던 정도전이 결국은 이방원에게는 참 또 안 됐어요. 이게 우리 역사에서, 저는 우리 역사 속에서 최고의 킬러를 꼽으라고 하면 이방원으로 꼽습니다. 고비고비마다 정말 최고의 인물들이 이방원에게 정말. 우리 이번에 그런 사람 있잖아요. 왕 중 왕쯤 되는 사람. 고려의 최고 충신 정몽주 죽였죠. 조선 최고의 건국공신 정도전 죽이고 또 방석, 이복동생. 정상적이었으면 태조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두 번째 왕이 될 동생 방석을 죽입니다. 이런 킬러 본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왕이 되어서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처남들을 다 죽입니다. 드라마 많이 보신 분들은 최명길 씨 동생들을 다 죽여 버려요. 원경왕후 민씨라고 해서. 그리고 이제 노년에 마지막 꿈틀거리는 킬러 본능. 아들 세종을 왕위에 올려놓고 이번에는 누구를 죽입니까? 세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까지. 대단한 킬러입니다. 이런 태종이 바로 눈에 딱 걸린 게 정도전이죠. 신권 강화론. 이거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판단을 해서 결국 정도전이.

정도전의 집터가 어디냐 하면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예요. 거기서 한 지금도 한 3~4분 올라가면 옛날 한국일보사 자리가 있어요. 거기가 정도전의 절친이었던 남은이라는 사람의 첩의 집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정말 그때 정도전도 정보를 입수합니다. 이방원이 궁궐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해서 남은의 첩 집에서 술 한 잔 하고 있다가 이때 이방원은 정보망을 다 돌리고 있어요. 그 정보를 입수하고 궁궐을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와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정도전을 죽이는 거죠. 그리고 정도전에 이어서 바로 이미 세자로 책봉되었던 이복동생 방석까지 죽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고 이때 이방원은 뒤끝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도전을 제거하고 난 다음에 정도전의 집을 몰수를 해서 이것을 사복시(司僕寺)라고 해서 조선시대 말 먹이는 관청으로 삼아요. 정도전의 집에서는 짐승이나 길러라 이거죠.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시죠? 덕수궁 정동에 가면 원래 계비 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이 있었어요, 그렇죠? 이성계가 워낙 왕비를 예뻐해서 무덤을 파격적으로 궁궐 한복판에 만들어준 건데 태종이 왕이 돼서 딱 그 왕릉 보면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왕 못될 뻔했는데 그래서 저 무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해서 옮긴 게 어디죠?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 그러고는 그 무덤 옮겨놓고는 청계천 공사를 하죠. 태종 때 청계천 공사를 했는데 청계천에 있는 나무다리가 떠내려가니까 큰 돌이 필요하다고 해서 태종이 정릉에 가면 돌 많지? 이러니까 신하들이 알아서 그 돌로 청계천 다리 석축을 만듭니다. 지금 광통교 가면 그 장면 볼 수 있어요. 이런 거 보면 이방원 뒤끝 많은 사람이구나. 이런 걸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도전 최후의 장면도 보면 우리가 그렇게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고 삼무 정신. 진법훈련도 하고 이런 사람 맞아? 라고 할 정도로 실록의 최후의 부분은 정도전이 남은의 첩 집에서 술 마시고 있을 때 주변을 포위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방원의 지시로 불을 질러요. 그러니까 이 정도전이 도망을 나오다가 민부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요. 이 민부가 배가 부르고 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여기서부터 정도전 이미지가 뭔가 좀 전쟁 준비하면 되게 날렵하고 이런 사람인데 배가 불룩한 사람. 정도전인 줄 알고 사람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침실 안에 숨어 있어. 정도전 같은 사람이 숨어있어? 숨어 있어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했다. 엉금엉금 기어 나와. 이것도 굴욕적인 장면이에요. 정도전이 기어 나와서 말하기를, 이 마지막이 최대의 굴욕이에요. 청컨대 죽이지 마십시오. 나 좀 살려주세요. 왜 이렇게 됐을까? 이것은 태조실록은 태종 때 편찬되는 겁니다. 태종 때 최고 요주 인물이 정도전이에요. 정도전에 관한 기록은 좋게 쓰일 가능성이 아주 낮아요. 이런 거는 감안하고 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 보셨나요? 최후의 장면이 이렇게 안 나갔죠? 이제까지 눈빛 착착 맞추고 혁명가로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저 살려주세요. 이렇게 드라마가 끝맺으면 시청률 확 떨어지고 되게 허망합니다.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방원하고 정도전이 최후의 담판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방원이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 정도전이 희롱하는 건가? 웃기지 마라 이겁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웃기지 마라 이러니까 마당에 끌려 나와서 참형을 당하는 것으로 그렇게 드라마에서는 처리를 했다는 거. 이런 건 우리가 감안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정도전이라는 인물 캐릭터를 봐도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토론할 때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山房)에서 시를 짓는 거다. 권근은 따뜻한 온돌방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 가장 보편적인 케이스이고 정도전은 첫 눈 내리는 겨울 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들판에서 사냥하는 거다. 이런 정말 기상을 가진 사람이 저런 최후를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오히려 정도전의 최후는 다행히 죽기 직전에 남겼다는 이 시가 남아 있어요.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공을 세워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 나는 고려, 조선왕도 다 열심히 노력했다. 삼십 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정말 이 사람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많은 것들을 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정말 많은 업적을 남겨요. 우리 이런 케이스로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 선생. 정약용 선생이 정말 많은 업적을 남겼잖아요. 책이 한 500여 권이라고 하는데 정약용은 약간 그런 게 밝혀졌어요. 정약용이 유배 생활할 때 똘똘한 제자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이 사람들이 밑 작업을 많이 했어요. 연구 보조원 역할을 많이 했다는 거. 그것이 물론 그래도 연구 책임자가 잘해야 하는데 정약용 선생이 도움을 받았다는 그런 내용들이 지금 확인되고 있어요. 정도전은 그러지도 않았는데 정말 멀티 플레이어처럼 다 한 거예요. 삼심 년 동안, 이 마지막 이 짠합니다.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다.

송현 정자가 바로 피습당한 남은의 첩 집이에요. 거기가 소나무 고개. 제가 강연하면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옛날에 여기 정말 소나무가 많았대요. 실제 한국일보사에서 올라간 자리가 고개처럼 약간 높아요. 그리고 그때 한동안은 거기에 송현 클럽이라는 클럽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거기에 아직도 송현 포럼이라는 포럼도 지금도 존속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이 이렇게 짠한 장면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정도전의 삶은 조선 건국 이후 그의 삶은 극히 짧았지만 그가 제시한 그 모델은 500년 조선왕조의 기본 골격이 되었고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이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정도전은 연고지가 꽤 많아요. 바로 경복궁을 비롯해서 아까 피습당한 남은의 첩 집 유배 갔던 나주. 그리고 그 이외에 유년기를 보냈던 삼판서 고택. 여기 지금 영주 봉화. 이번 인문 열차에서 가는 코스가 되는데 이집은 3명의 판서가 연이어 나와서 이름이 붙여진 거예요. 정운경 공조판서, 황유정 이조판서. 어? 왜 정도전은 빠져있지? 정도전은 이곳에 살진 않았어요. 주로 개성하고 서울에 살았고 그러니까 정운경이 결국 누구한테 이집을 물려줬냐면 사위한테 물려줬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자녀가 균분상속(均分相續)이고 사위에게 집을 물려주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그래서 보면 우리 의병장 곽재우 같은 사람을 보면 의병을 일으키잖아요. 조선시대에게 의병을 일으키려면 뭔가 경제적인 기반이 있어야 해요. 깃발만 꽂는다고 다 오는 게 아니에요. 먹여도 주고 무기도 있어야 하는데 곽재우 같은 사람 우리 가만히 생각해보면 벼슬살이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 왜 이렇게 의병 모을 때 엄청나게 부유했다고 해요. 처가가 잘 살았어요. 처가 덕을 본 사람이에요. 그런데 바로 우리 보면 지금도 필운대(弼雲臺)라고 아세요? 배화여고 뒤편에 가면, 서울에. 필운대는 이항복의 집터인데 그 집의 원래 주인은 누구냐 하면 권율 장군이에요.

권율의 사위가 이항복입니다. 그리고 저기 보면 창의궁이라고 해서 경복궁 서쪽에 보면 백송 자리가 있어요. 거기가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인데 그 집이 누구한테 물려주느냐면 역시 사위였던 김한신이라는 사람한테 물려줘요. 화순옹주거든요. 딸에게 물려준 거예요, 결국은. 그런데 이 김한신의 증손자가 누구냐면 추사 김정희예요. 그래서 추사 김정희 집이 거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위가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여기도 결국은 그런 집이 되는데 삼판서 고택은 귀성공원 남쪽에 있었다. 고려 말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이 살던 집으로 그 사위 공조전서(工曹典書). 이게 조선시대로 치면 판서(判書)예요.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이 살다가 이번에는 외손자에게 물려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외가 쪽으로 쭉 가는 거예요. 외손자 이조판서 김담문절공에게 물려줬다. 하며 삼공이 다 판서에 올랐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고택을 삼판서 고택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이게 지금 사실은 한동안 좀 가려져 있다가 2008년에 제대로 복원이 됐어요, 2008년.

제가 이 삼판서 고택 복원하는 날 그때 정말 저도 여기에 한번 강연 오라고 해서 간 적이 있어요. 간 적이 있는데 정말 이번에 정도전 드라마가 뜨는 바람에 여기 찾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생기게 된 거예요. 이게 정말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죠. 딱 복원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뜨니까 바로 이 지역 여기에도 표지판 붙었죠. 삼판서 고택이 있고 저도 작년에 가니까 문화유산 해설사가 설명도 하고 상당히 지금은 이런 고택의 모습, 단청(丹靑)도 돼 있는데 제가 2008년에 처음 집 완성되고 갔을 때는 거의 단청 같은 것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때 저도 갔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지금은 상당히 잘 되어 있고 이들 삼판서 고택의 주인공이었던 정운경은 설명을 드렸고 황유정은 정운경의 사위입니다. 그러게 정도전의 처남이 되는 거고 고려 말에 예조(禮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전서(典書)를 지냈고 조건 건국 후에 전서가 판서. 요즘으로 치면 문화관광부 장관, 법무부 장관, 건설교통부, 국토교통부 장관 이렇게 한 사람이고. 또 황유정의 외손자였던 김담은 과학자로도 되게 유명해요. 천문, 세종 때 우리 천문과학 이런 기구 같은 거 많이 발명하잖아요? 그때 공헌한 사람이에요, 김담이라는. 그리고 1463년 이조판서에까지 올랐고. 그래서 이 외조부에게 삼판서 고택을 물려받은. 이런 게 바로 경북 영주에 지금 가시면 삼판서 고택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이렇게 사위가 재산을 물려받은. 즉, 딸이 재산을 물려받은 경우는 율곡 선생 분재기(分財記)에도 나와요. 이게 율곡 선생 분재기인데 이건 우리 건국대학교 박물관의 소장품이에요. 건국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자료인데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주로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가 여자 집에 가는 거예요. 장가가는 거예요, 장가. 그러다가 조선 후기되는 이게 시집 오다로 바뀌는 거죠. 이게 왜냐하면 성리학적인 이념에서는 이제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는 무조건 남편 집으로 가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보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결혼하게 되면 완전히 소위 말하는 자신의 처가. 여자 같은 경우는 친가하고 단절하고 완전히 남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이런 논리는 사실은 한 200년 정도 지속된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정말 지금 보면 지금은 또 이런 게 조선전기처럼 돌아가고 있어요. 지금 아마 이모 집하고 훨씬 친하지 고모집하고 친한 사람 별로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놀러 가도 이쪽 딸 식구들끼리는 놀러 많이 가는데 처가, 이쪽하고는 잘 안 가요. 그게 지금 절묘하게 지금은 오히려 이게 아주 새로운 풍속이 아니라 크게 보면 오히려 옛날 전통을 회복하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지금은 딸하고 더 가깝죠, 그렇지 않나요? 결국 조선후기에 들어가면 어떤 이념적인,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사람이 그냥 본능적으로 딸하고 가까운 관계를 그렇게 흘려놨다가 지금은 자연스럽게 원상회복이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도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에 삼판서 고택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 정운경, 정도전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그 다음에 봉화에 가면 닭실마을이 있어요. 한자로 쓰면 '유곡(酉谷)'이라고 해요. 우리가 보면 이게 정말 재미있는 게요. 안동에 가면 온갖 동네 이름이 양반 마을이면서도 정작 이야기를 할 때는 순 우리말로 해요. 양반 마을 같으면 대개 한자 막 썼을 것 같잖아요. 안동 지역의 내앞 마을도 원래는 천전(川前)이에요. '내 천' 자에다가 '앞 전' 자. 그런데 여기서는 내앞이라고 하고 오히려 천전 마을이라고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 듣고. 이것도 경북 봉화에 가면 한자로 치면 '닭 유' 자에 '계곡 곡' 자인데 유곡 마을이라고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 듣고 닭실 마을이라고 해요. 오히려 또 경상도 사투리로 경상도는 닭을 뭐라고 해요? 달이라고 합니다, 달. 달 봐라, 달 봐라. 달실마을이라고 하기도 해요. 경상도 사투리는 되게 특이한 게 많아요. 닭 보고 저 달 한 마리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저도 사실은 제가 안동에서 살았어요. 경북 이쪽 안동 마을은 잘 알아요. 안동 쪽은 주로 쓰는 게 껴, 맞니껴. 그러니껴. 완전히 반말 쓰는 것 같아요. 저도 보면 안동 양반이라고 하는데 말투는 완전 반말이거든요. 밥 묵니껴? 이런 식으로 쓴다는 거예요. 약간 표현도 한자 표현인데 유곡 마을. 그리고 예전에 우리 지난번에 갔을 때도 무실마을 이런 것도 수곡(水谷) 이런 표현을 써요. 그런데 실제로 할 때는 무실 마을 이렇게 쓰는 거죠. 그리고 닭실마을. 여기 정말 좋습니다. 황금 닭이 알을 품은 지형이라고 해서 '금계포란' 형 지형이라고 해요. 닭실마을 '금계포란(金鷄抱卵)' 형 지형. 예전에 우리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왕릉 편을 했어요. 왕릉 편을 했을 때 이 금계포란이 나왔어요. 왕릉이 조성되는 지역은 금계포란형 지형이다. 이렇게 해서 자손들이 번성하고 재산도 많이 늘어날 것을 의미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고.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풍산 하회마을과 함께 봉화의 닭실마을. 여기는 한번 꼭 가보세요. 지금 양동마을하고 풍산 하회마을은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됐고 그래서 정말 관광객 많이 가고. 이번에 우리 인문 열차에서 닭실마을하고 안동 내앞마을하고, 이 두 군데. 문화유산이 지정되지 않은 이 두 군데 마을을 가는 겁니다. 택리지에서 정말 이곳은 좋은 마을이라고 조선시대부터 극찬을 해놓은 마을이고. 이 닭실마을의 중심인물이 충재 권벌이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도 기억을 해놔야 하는데 연산군 중종 때 살았던 학자인데 1478년 안동 도촌리에서 출생했고 1496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04년에 문과 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때 이 사람 답안지가 정말 그 당시에 상당히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연산군 때 연산군이 정말 포악한 군주라는 걸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모셨던 내시를 죽입니다. 그 내시가 누구죠? 김처선을 활을 쏴서 정말 잔인하게 죽이는데 그래놓고 왜 죽였느냐면 그때 연산군의 폭정에 아무도 제대로 말 못할 때 김처선이 바른 말 하거든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네 놈이 그러면서 쏴 죽입니다. 그러면서도 분이 안 풀렸는지 앞으로 내 앞에서는 '처' 자 절대 쓰지 마.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그런 거 있죠. '처' 자는 꼴도 보기 싫다. 그래서 그때 정말 어떤 해프닝이 있었냐면 우리 24절기 중에 처소 있죠, 처서(處暑). 처서도 처서라고 못 쓰는 거예요. 조서라고 쓰고 막 이래 버리고. 그런 식으로 완전히 문자탄압 하는 거예요. 그런데 권벌이 답안 쓸 때 '처' 자를 쓴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잘 모르고 합격시켰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도 그런 거 있죠. 투서 비슷하게 들어오면서 저 사람이 '처' 자 썼다 이거죠. 그게 확인이 돼서 결국 합격 취소당합니다. 그런 인물이에요. 상당히 연산군 시대의 해프닝을 보여주는데. 그러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중종반정 후에 다시 문과 시험에 합격을 해서 관직에 진출해서 김종직의 신원과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인데 현덕왕후의 무덤이 소릉이라는 무덤이 있는데요. 이것도 보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난 다음에 아마 기억하시는 분 많을 거예요.

세조가 꿈에 단종의 생모입니다, 이 사람. 꿈에 나타나서 세조에게 침을 확 뱉었는데 세조가 그거 때문에 피부병이 나고 이러니까 화가 나서 이 현덕왕후 무덤을 안산 바닷가 쪽에 그대로 옮겨버려요. 제대로 왕릉으로도 인정 안 해 주고 그거를 복위시켜야 된다는 요청을 하는 거예요. 이게 보면 이런 의식이 사림파적인 마인드예요. 뭔가 곧은 학자로서 우리 때가 되면 훈구파(勳舊派), 사림파(士林派) 이야기하죠. 권벌이라는 인물이 사림파 학자로서 이런 요청을 하면서 사림파의 길을 걸으면서 뭔가 성장을 해나가다가 마침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일파로 분류가 돼서 결국 파직이 되고 난 다음에 고향인 닭실마을에 돌아와서 이곳에서 오랫동안 거처를 하죠. 그러다가 다시 1533년에는 복직을 해서 경상도 관찰사라든가 병조판서와 같은 여러 직책을 역임하고 명나라까지 다녀왔고 또 명종이 즉위했을 때는 국가 원로로서 활약을 했지만 또 이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요. 을사사화가 일어나니까 이에 반대했다가 또 고향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양재역 벽서(良才驛 壁書)사건으로. 이게 을사사화로 계속 이어지는 사건인데 양재역에 그 당시에 문정왕후 수렴청정을 했을 때예요. 여주가 나라를 망친다는 식으로 그 당시에 대자보가 붙은 거예요. 이게 빌미가 돼서 그 당시에 사림파들이 대거 희생당한 사건을 우리가 을사사화. 이 해는 정미년이지만 그게 보면 을사사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이제 유배되었던.

전형적으로 사림파의 길을 걸었던 학자가 바로 권벌이라는 학자인데 이 사람의 고향땅이 바로 닭실마을이라는 거. 그래서 닭실마을에 정착을 했다가 계속 관료 생활을 할 때는 서울 갔다가 다시 파직되고 이러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 되자 고향인 안동으로. 원래 고향은 안동 출생이죠. 안동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서 이사를 가는 거죠. 1520년 안동부 내성현에서 유곡으로 거처를 옮기는 거죠. 여기가 처가가 있어서 유곡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완전히 정착해 살면서, 이 사람이 정착해 살면서 그 후손들이 계속 집성촌을 이루어서 오늘로 치면 닭실마을하면 항상 우리 시조라고 하죠. 그 인물이 바로 권벌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1526년 서쪽 작은집에 '충재(冲齋)'라는 편액을 달고. 이 사람 호가 충재입니다, 충재. 그리고 청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기에다가 후학들을 양성하고. 이 청암정은 아주 경치가 좋고 바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정몽주와 정도전이 만났던, 술잔을 기울였던 촬영지로도 활용될 정도로 많이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활용이 되고 있어요. 그러다가 권벌 이후로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발전했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도 헌신해서 충절의 마을이라는 별칭도 얻었고 마을 전체가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이 되어 있어서 답사를 가면 이 지역 닭실마을 전체 마을을 쭉 둘러볼 거예요. 여기에 고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마침 2007년에 충재 유물전시관이 개관이 돼서 이 지역이 고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러 문서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다 지금 박물관에 전시를 해놓고 저도 박물관 가니까 이 권벌의 후손이 박물관을 설명을 하시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청암정이 마을의 중앙에 있고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정자를 건축한 이게 청암정이에요. 그리고 이 밑으로는 연못이 잘 조성이 되어 있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권벌이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을 했고 이후에도 이 후손들이 지금도 서당으로 활용이 되고 있고 바람의 화원, 동이. 특히 최근에 정도전 드라마 촬영지로까지 인기를 끌었던 곳이 바로 이 청암정이라는 정자입니다. 그리고 이제 닭실마을 입구에 있는 석천 계곡은 기암괴석과 금상 소나무 숲 사이로 내성천의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고 이 일제강점기의 신작로가 세워지기 전 닭실마을의 입구였다고 합니다. 석천, 이 밑으로 계곡이 보이고. 석천정사는 1526년 건립했던. 이것도 공부하는 공간이죠. 그래서 곳곳에 이런 고택 같은 데 가보면 곳곳에 정자라든가 사당이라든가 또 보면 문중에서 입향조(入鄕祖) 이외에도 대표하는 집안의 종택(宗宅) 같은 게 잘 구성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서원이 바로 뒤에 있는데 권벌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조 때 세운 서원이고 추원재(追遠齋)는 마을의 서쪽 끝에 위치해서 선영의 묘소를 둘러보고 제사를 지내던 곳. 이런 곳이 지금 대부분 이제 마을에 잘 남아 있어서 고택을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 닭실 마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닭실 한과입니다, 닭실 한과.

권벌의 제사와 마을 구성원의 혼례 등에 사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한과로 지금까지 전통 시대의 기법이 전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걸 만들어서 파는데 이게 이 지역 마을사람들이 만들어서 팔아서 상업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보면 저도 여기 몇 번 가서 사려고 하면 없다고 해요, 물건이. 미리 주문해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 되게 정성을 들여 만들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때는 안동 분들이 그렇게 말씀이 친절한 말씀이 아니에요. 없어요, 이래서 관광객들을 되게 당황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살살 말하지도 않고 없어요, 이렇게 해서. 이거 사려면 미리 아마 주문을 해야 되고. 인터넷 주문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닭실한과. 하여간 또 가면 괜히 먹고 싶어요.

영주의 정도전 삼판서 고택. 그다음에 봉화 닭실마을에 이어 안동 내앞마을. 안동의 내앞마을은 안동의 대문벌 내앞과 항상 경쟁 관계예요. 내앞 마을의 대표 주자 김성일, 학봉 김성일. 하회 마을의 대표주자 누구죠? 유성룡. 우리 지금 징비록 쓴 누구죠? 유성룡 김상중 씨로 나오고 있는데 그래서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이라고 했어요. 내앞, 천전이니까 내앞의 김씨는 아주 쟁쟁하고 하회 마을의 유씨들은 아주 청청하다. 푸르고 푸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 이런 것들을 대비했다. 내앞은 한자 천전을 우리말로 풀어쓴 거고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사실 흘러가요. 택리지에서도 영남의 4대 길지로 '완사명월형국(浣紗明月形局)'. 고운 비단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치는 그런 형국이다, 이렇게 표현이 돼요. 정말 맑은. 지금은 사실 이게 임하댐 만들어져서 물이 흐르지는 않는데 이쪽은 지금 임하댐입니다. 안동에 크게 안동댐이 있고 임하댐이 있는데 그래서 옛날 낙동강은 맛은 덜한데 어쨌든 예전에는 고운 비단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치는 그런 형국이었고. 내앞 마을은 의성 김씨의 집성촌입니다.

의성 김씨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고려 태조에게 이 지역을 봉지(封地)로 하사받은 김석을 시조로 합니다. 김석의 13세 손 김만근이 임하현의 해주 오씨 가문에 장가들면서 처가와 가까운 내앞에 터전을 잡은 것이 내앞 김씨의 역사의 시조입니다, 시작이죠. 흔히 내앞의 대종가를 청계공 종가라 하는데 이 청계공이 김성일, 우리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가 되는 거죠. 김진이 씨족 중흥이 그 조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청계공 종가 이렇게도 말하는데 김진은 김만근의 손자로서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김인후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했던 인물이에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에게 한 관상가가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을 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그러자 이 사람이 낙향해서 자손들의 교육에 힘을 썼고 그 5명의 아들들이 모두. 여기서도 중요한 게 이때 바로 안동 도산에 최고의 학자가 살고 있었어요,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이 1501년생이거든요. 학봉 선생 아버지 김진이 1500년생이에요. 거의 동년배죠. 그러니까 근처에 아주 뛰어난 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을 다 도산에 가서 수학을 하게 됩니다. 그중에 김극일, 전부 '일' 자 돌림입니다. 김극일, 김성일, 우리 학봉 선생. 김복일이 대과에 급제하고 김수일과 김명일이 소과에 급제해서 내앞 대종택을 오자, 5명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한 집. 우리가 불렀다고.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 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 김진이라는 청계공은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문장검, 옥피리, 문장밭을 두고 자손 중에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칼도 주기도 하고 피리도 주기도 하고 또 일부 문장으로 뛰어나니까 밭 같은 것도 떼줘요. 장학제도, 장학제도의 원조까지는 아니지만 장학제도를 아주 본격적으로. 조선의 선비들 중에도 이런 장학제도 많이 실시합니다.

이후에도 내앞 문중에는 대과와 소과 합격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으나 조선후기에 보면 이 집안이 다 남인 집안이 되니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견제를 많이 받으면서 관직 진출이 그렇게 많지가 않고 오히려 더 쟁쟁하게 학자로서, 꼿꼿한 선비로서의 처신을 하죠. 그래서 내앞 문중은 대쪽 같은 품성을 유지해 '천김쟁쟁' 이 말이 이제 유행을 했고 조선후기에 특히 반대, 조정에 비판하는 상소문을 주도했던 그런 집안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게 이런 기질이 있으니까 구한말에는 독립 운동가들을 되게 많이 배출했어요. 그래서 김동삼이 마을의 교육기관이었던 가산서당을 협동학교로 만들어 신교육의 터전을 마련하고 문중이 배출한 공식 독립유공 훈포장자만 38명에 달할 정도로 독립운동을. 그래서 지금도 내앞 마을에 가면 김동삼 가옥 이렇게 해서 독립운동했던 분들의 집들이 남아있고요. 그런 인연이 있어 그런지 지금 안동에 독립기념관을 만들어놨어요. 안동독립기념관. 그 건물이 바로 내앞마을 옆에 있습니다. 그것도 다 이 마을에서 정말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된 그런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내앞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누가 봐도 학봉 김성일 선생. 1556년 동생 복일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서경(書經), 역학계몽(易學啓蒙) , 심경(心經),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고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수학했고. 그 후에도 계속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 수학하면서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 병풍에 새겨진 명, 이렇게 되는 건데. 그러니까 퇴계 이황 선생이 사실 제일 수제자로 삼은 사람은 학봉 김성일이에요. 연배도 유성룡보다 더 많아요, 나이가. 유성룡은 1542년생입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게 유성룡이 영의정까지 올라가잖아요. 직급으로는 제자 중에 유성룡이 제일 높고 오래 수학한 기간이나 퇴계가 지목한 인물은 김성일인데 이래서 나중에 이 두 사람 간에 퇴계 선생 밑에 누가 수제자인가를 둘러싸고 집안끼리 최근까지도 사실은 다툼이 있었어요.

김성일은 156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2년 봉교(奉敎)가 되었고 사육신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는 데도 노력을 했고 상당히 꼿꼿한 학자로서의 길을 걸어갔고 그 유명한 선조대에 바로 통신사(通信使) 부사(副使)로서 1590년에 일본에 갔고. 이때 일본에 가서 돌아올 때 같이 갔던 사람이 정사와 황윤길인데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말을 했고 김성일은 이때 그렇지가 않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 김성일은 나중에 징비록에도 그런 기록이 나와요. 그때 유성룡에도 실제 그런 기록이 나와요.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왜 당신은 황윤일하고 그때 서장관으로 갔던 사람이 허성이에요. 3명이 갑니다, 사신단 책임자로. 그런데 정사 황윤길과 허성. 허성은 허균의 형님이에요. 둘은 침략한다고 했는데 왜 당신께서는 그거 침략 안 한다고 했냐. 이럴 때 나도 침략할 거 대략 생각했는데. 나까지 침략한다고 하면 이게 완전히 민심이 흉흉할 거다. 그래서 내가 못한 거라고 이야기해요. 유성룡하고 김성일은 되게 친밀하니까 징비록에서는 약간 김성일을 변호하는 쪽으로 많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다가 결국 판단 미스로 김성일이 상당히 곤욕을 치르죠. 그러다가 1592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경상우도병마. 이때도 선조가 화가 나서 처음에는 유배를 보내자. 이런 논의가 일어났는데 그때도 유성룡이 건의를 해서 차라리 이런 사람을 활용을 합시다, 경험도 많고. 그래서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겸 초유사로 전장에서 백성들 어지러운 거 막아주고 또 군사들 모으고 이렇게 하다가 병사를 합니다. 그래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결국은 파직되었다가 나중에는 병사(病死)를 해요.

그리고 서울로 수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서 곽재우 등을 돕고 의병활동을 지원을 하고 또 여러 지역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 의병을 모으면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절하는데 상당히 역할을 해요. 김성일이라는 인물은 좀 안타까운 부분도 있어요. 보고 잘못해서 계속 판단 미스의 주범으로 몰리는데 실제 그 이후에는 정말 수습하는데 노력을 많이 하다가 결국은 병으로 죽습니다. 그해 8월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의병 규합과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고 또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진주성을 지키는데도 노력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병사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마 보시는 분들은 아마 오늘 가셔서 TV 역사저널 그날. 임진왜란 1편에서 김성일 이야기를 꽤 많이 다루었어요. 그래서 드라마 징비록에도 나오지만 징비록에서도 김성일이 꽤 비중 있게 다루어졌는데 초반부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가장 당당하게 나섰던 사람이 김성일이에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쪽이 오지도 않고 계속 기다리고 하라니까 김성일이 돌아가자고 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굴욕당하냐. 제일 뭔가 당당하게 맞섰던. 그리고 일본에는 뇌물 같은 거 줄 때 이것도 다 뿌리쳤던 그런 인물이 바로 김성일입니다. 그래서 김성일이라는 인물은 사실은 상당히 평가가 애매한 부분도 있어요. 어쨌든 정세보고 판단 잘못한 거는 맞았거든요. 분명했는데 그런 부분을 그래도 씻을 수 있는 역할을 했다는 양 측면이 있습니다. 퇴계의 수제자로 꼽혔으며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을 때는 유성룡과 더불어 남인의 중심인물로 활약했고. 아까 말했지만 사후에 그와 유성룡의 배위 문제를 둘러싸고 병호시비. 유성룡을 배양한 사원이 병산서원. 김성일이 배양한 사원이 호계서원 해서 병호시비 이런 표현을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핵심은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서원의 NO.2를 누가 할 것이냐. 우리도 보면 서원 같은 데 배양할 때 제일 중심인물이 가운데고 그다음에 서율 2위가 왼쪽입니다. 왼쪽에 높아요. 그다음에 오른쪽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여기 NO.2가 누구냐를 둘러싸고 유성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건 서애 선생이 맞다. 왜? 영의정까지 했습니다. 최고의 관직까지 오르지 않았냐. 아니다, 김성일 지지한 사람은 퇴계 문하에서 제일 오랫동안 배운 사람이다. 유성룡은 관직 생활 더 오래하느라고 많이 배우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나이도 더 많다. 이렇게 해서 유성룡을 배양한 병산서원에서는 유성룡 지지. 호계서원에서는 김성일 지지. 병호시비라고 해서 이게 조선시대에도 계속 민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영조시대에도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고. 그때도 제일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하면 문중 대표 불러서 너희끼리 잘 해결해라. 이런 식으로 그때도 해요. 이게 잘 안 돼요. 우리 이번에 인문 열차 가는 지역이 경상북도인데 이 지역의 특징이에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이 영남 남인의.

그래서 지금 안동에 가보시면 뭐라고 붙어있느냐면 정신문화의 수도 이렇게 붙어 있어요. 안동의 그 자존심이라는 게 정말 대단한 거예요, 선비 문화의. 저도 사실은 어릴 때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저는 어떤 면에서는 안동이 본향이 아니고 뜨내기예요. 아버님이 임지가 선생님이셔서 안동시에서 자라서 어릴 때까지 오히려 그걸 몰랐는데 자라고 보니까 정말 이 안동이라는 곳이. 그리고 그때 기억이 나요. 옛날 우리 초등학교 친구들 보면 전부 다 누구 후손이다. 이런 게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안동이라는 도시는 대단하고 그 자존심이 지금. 그래서 안동에 국학진흥원이 생겼잖아요, 안동에. 이건 또 이런 것도 한편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게 뭔가 아직까지도 조선적인 유교문화와 그런 문중의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게 지금 사실 몰려있어요. 내앞마을 이외에도 저쪽에 보면 오천문화재 단지에서는 광산 김씨 집성촌이 있고. 안동에는 곳곳에 그런 게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게 병호시비 문제는 지금의 우리 이 시대의 유교 문화에 대한 문중의식 같은 이런 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사례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내앞마을가면 저도 작년에도 갔지만 정말 좋습니다. 강이 흐르고 고택이 다 이렇게 잘 모여 있는 게.

이중에 내앞 종가는 총 55칸의 단층 기와집이고 처음 지었던 집이 선조 때 불에 타자 김성일이 재건했다고 하고 보물 제 450호로 지정돼 있어요. 그래서 이 종가에 들어가면 좌우에 사랑채와 안채가 나오고 다른 종가와 달리 안쪽 깊숙이 사랑채가 있는 게 특징이고 사랑채가 안쪽 깊숙이. 6칸의 너른 대청 옆에 두 칸 반짜리 방이 부속 공간처럼 달려있어 대청 중심. 이게 재미있는 게 대청 중심의 사랑채. 이게 뭐냐 하면 안동 지역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제사 정말 잘 받들어야 하고 손님 정말 잘 받고. 손님 중심의 건물구조라는 거예요. 안채는 꽉 찬 ㅁ자 구조여서 시야가 트이지 않고 앞마당도 되게 좁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고요. 안채 대청은 열 칸짜리 대청 한쪽에 광이 들어선 모습이며 특이하게 동향을 하고 있고 그 남쪽으로 이어 붙은 안방은 앞에 툇마루를 단 채 남향을 하고 있어 이 집에서 채광이 좋고. 이거 내앞 종가 나중에 기회 되시면 꼭 가보시고. 이 백운정은 종가를 지을 때 함께 지은 정자로 의성 김씨 자제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 이런 곳이고 곳곳에 이런 내앞 종가 이외에 주변에 다 독립운동을 했던 그런 분들의 고택도 남아있고 이렇게 해서 내앞 마을은 뭔가 우리가 학봉 선생의 꼿꼿했던 그런 정신 이외에 그런 정신이 우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까지도 연결되고 그런 정말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했는데 그 고택들이 그대로 현장이 보존되어 있다는 게, 정말 이런 것은 저는 영구히 잘 보존이 되어야 할 것 같고 이런 쪽을 이제 그래서 이번 인문 열차 답사에서도 고택을 찾아서라는 코스를 마련한 것도 이게 좀 많이 알려져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전통의 힘이라는 게 정말 결코 적지가 않거든요.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지금 또 어떤 때 특히 여기 좀 연세 드신 분들은 다 한옥에 살아본 경험이 있잖아요. 이랬을 때 한번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요즘 저도 보니까 깜짝 놀랐어요. 한옥 고택 정말 시설 좋더라고요. 한옥의 맛을 느끼면서도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화장실이라든가 이런 건데 그런 시설들이 다 밖으로 잘 빼놔서 되게 하기 좋았어요. 그래서 기회 되시면 안동의 내앞마을이라든가 봉화 바래미마을이라든가 아니면 우리 지역은 다르지만 전주 한옥마을이라든가 이런 데가 다 고택 실제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 기회 되시면 가족들하고 그런 고택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강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