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후기그 날의 낭만과 감동을 함께 나누어요.

  •  오송역, 경주 그리고 KTX ..

    오송역, 경주 그리고 KTX ..

     경주 가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오송역도 처음 가본다. 늦을 까봐 서둘러 출발 했던 것이 너무 일찍 왔나 보다.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1시간이 넘도록 기다려야 했다. 처음 타보는 KTX 였다. 1시간 20분 걸려 신 경주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서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이 도착 하기를 기다린다. 얼마쯤 지나자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과 합류를 했다. 버스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처음 간 곳은 박목월 생가였다. 생가는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니고 복원을 했다고 한다. 생가를 둘러 보면서 박목월 시인이 남기고간 자취를 살펴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가 박목월 시 였다는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경주는 구름만 가득해 보일뿐 비는 오지 않아서 다행 이었다.  불국사가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메뉴는 쌈밥 이었다. 신선한 야채에 불고기를 쌈 싸 먹는다. 고등어 구이도 있다. 맛있게 먹었다. 경주가 관광지라서 음식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그런 걸까? 분위기도 좋았고 서비스도 친절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김동리 박목월 문학관으로 이동을 한다. 김동리와 박목월은 생전에 서로 친하게 지냈다 한다. 그런 의미로 문학관도 한 건물 안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관 내부를 둘러 보며 소설가 김동리와 박목월 시인을 생각해 봤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을 한다. 준비해간 우산을 펼쳐야 했다. 인근에 있는 불국사 까지 걸어서 갔다. 불국사의 장엄함은 천년 고찰 다웠다. 말로만 듣던 청운교 백운교도 가보고 불국사 내에 있는 다보탑 석가탑도 가봤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이 화려하게 보였다. 비 때문에 많이 둘러 보지 못한게 한편 아쉬웠다. 아주 굵고 쭉쭉 뻗어 있기도 하고 멋 드러지게 자란 소나무가 인상적 이었다. 수 백년은 나이를 먹었을것 같았다.  옥룡암으로 향했다. 이육사 시인이 잠시 묵었던 곳 이라고 한다. 작은 암자 였지만 큰 바위에 불상이 많이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바위에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라의 찬란했던 불교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는것 같았다. 일일히 사람 손으로 한 거였을 것이다. 경주 월성으로 이동을 한다. 월성은 신라의 궁궐 터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궁궐터 였으니 각종 유물도 많이 나왔을 것이다. 그 흔적만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예기소(금장대)로 발 길을 옮긴다. 예기소는 김동리의 대표작인 무녀도(을화)의 작품 배경인 곳이라고 한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가장 가까이에 근접했을 정도로 무녀도는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금장대 누각에 올라가 봤다. 호수가 보이고 그 멀리로 경주시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바로 밑에 있는 암각화가 있는 곳에도 가 봤다.  날이 많이 저물었다. 신 경주 역에 이르고 서울에서 온 일행들과 헤어졌다. KTX에 몸을 실었다. 오송역에 도착 했을 때는 어둠이 짙어질 무렵 이었다. 비는 아직도 여전했다. BRT 버스를 탔다. 전용 도로인 BRT도로를 쌩쌩 달린다. 우산을 썼는데도 빗물이 바닥을 치고 옷 깃에 스며 든다. 사는게 재미가 없어질 때면 오늘 처럼 훌쩍 떠나 보는게 필요한듯 싶다. 뿌듯함을 얻게된 기분이다. 뿌듯함 그것은 곧 행복감 이기도할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 보자.

    강형기 2018.05.16

  • 경주가 품고 있는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

    경주가 품고 있는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

          <경주가 품고 있는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                              <여        는         글 > 한주간의 미세먼지와 황사를 깨끗이 씻어줄 봄비가 차분하게 내려 말갛게 단장한 수목들의 녹색 향연이 더욱 싱그럽고 고운 아침이다. 길을 나서는데 비가 와서 조금은 번거로움도 있지만 아쉽게 가려고 하는 봄의 정취와 새들의 합창으로 배웅 받으며 모임 장소로 갔다. 오랜만에 코드가 맞는 친구와 동행하여 신중년의 일상에서 벗어나서 인문 열차을 타고이번 탐방의 주제인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천년 고도의 경주로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길을 떠나면 항상 느끼는 오밀조밀한 우리 산야는 애미품 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어 편안한 정겨움이 나른한 행복감으로 다가와 외국여행과는 또 다른 익숙함이더 좋은것은 나이 탓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도란도란 정겨운 일행들의 이야기 소리들과함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하며 오늘도 어떤 역사적 사실과 인문적 비의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며 교감할 것인지를 기대하며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이 녹아 있는 김동리 작가와 박목월작가의 모향인 경주로 향했다. <자연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우리 전통적인 율조를 살린 청록파시인 박목월 생가> 신경주역에 내려 역 광장에 나오니 광장 앞에 큰 무덤이 있고 덕천리 유적들을유리 박스안에 설치 된것을 보니 경주는 모든 곳이 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박목월 생가로 향했다. 우리에게 청록파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목월 시인 생가로 가는 주변에는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과 이미 모내기를 한 논들의 모습들이 정겨웠고 흐린 날씨이지만 봄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시인의 [나그네]라는 시에 나오는 시어중 밀밭 길을 생가 조성할 때 심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인 박목월 (본명 박영종)선생은 1915년 1월 6일 경북 경주군 서면모량리 571먼지에서 아버지 박준필씨와 어머니 박인재씨 사이에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인의 살던 어린 시절은 삶이 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시인의 유년시절은 부친이 수리조합장을 지내셔서 나름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아마도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시를 보면 서사적인것보다 자연적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세계, 우리의 전통적인 율조여서 그런지 편안한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는것 같다. 이곳 생가는 박목월시인이 유년시절을 보낸 장소로서 시인의 대표시 [윤사월]이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쓰여진 시이다. 우리 또한 이 시와 계절적으로 같은 시기에 와서 보니시의 향기에 취해서 서정적으로 더욱 공감이 가고 정겨웠다. 청록파 조지훈의 시 [완화삼]과 그에 대한 답시로서 시인의 [나그네]가 경주에서 탄생한 일화는 경주를 문학의 도시로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생가로 들어서니 시낭송장이 있었고 초가로 만든 생가는 어릴적 고향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토담 옆으로 피여 있는 알록달록한 작고 예쁜 패랭이 꽃들과 집안 화단에 피어 있는 보라와 흰색의 매발톱꽃이 앙징맞고 귀여웠다. 사랑채 옆으로 장독대가 정겨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나뭇가지로 만든 발로 출입구를 만든 변소는 우리 어릴적 모습 그대로여서 향수를 자아냈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정색과 흰색 고무신이 옛스러움을 더해 주고 집안의 방앗간 구실을 해주었던 디딜방아도 정겹기는 매한가지였다. 맷돌과, 지게, 소쿠리, 박바가지등 옛조상들이 쓰던 생활용품들이 잘 구비되어 있어 마치 민속박물관에 온것 처럼 정겨움을 자아냈다. 잠시 시인의 시어 중에 나오는 ‘나그네’를 본따서 지은 정자인 ‘나그네정’에 앉아서 시인의 아름다운 시 이 계절에 탄생했을 [윤사월]을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을 보면서읊조려 본다. 하늘과 자연과 들길을 벗삼아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 나갔셨을 시인은오른손에 펜을 끼고 두 팔을 가슴에 모은 채 저 멀리를 응시하는 시인의 배웅을 받으며 아쉬은 생가를 뒤로 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유정쌈밥집으로 향했다. <20세기의 경주에서 뿌리를 내린 목월과 동리의 삶과 문학 기리는 동리, 목월 문학관> 경북 경주시 불국로 406-3 진현동에 자리잡고 있는 [목월.동리 문학관]은 경주출신으로 현대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 선생의 예술업적과 유품을 전시하고 두분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혼미한 격변기에 우리 순수 문학을 굳건히 지키고 휴머니즘 문학의 근간을 이뤄 나간 김동리 선생과 토착 정서와 민요가락을 시와 음악으로 승화하여 전국민으로부터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박목월 시인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와 (사)동리,목월기념 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2006년 3월 24일에 건립한 문학관이다. 이 곳은 특이하게 한 건물안에 좌.우 대칭으로 사이좋게 정문에서 우측이 목월선생님의 문학관이고 왼쪽이 김동리 선생님의 문학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문학관에는 김동리와 박목월 선생의 일대기와 작품들이 있다. 각 관마다 두분의 창작활동을 했던 공간을 재연출하여 작품 탄생 과정에 담겨 있는 정신과 정서를 느껴 볼 수 있다. 김동리는 박목월보다 세 살 위이고 대구 계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서울의 경신학교로 전학해 박목월의 중학교 선배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서울의 경신학교에 다니던  김동리가 휴학해 경주로 내려와 있던 1934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1935년 이후로 김동리의 소설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이는 박목월에게 두가지 의미을 가지게 하였다.하나는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상대역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문학적 성장의 촉발자의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두분은 경주 출신으로 한국문단의 양대산맥을 이룬 거봉들로서 향토적 서정과 샤머니즘을토대로 민족문학을 세계화한 작가들이다. 이 두분을 기리고 유능한 문학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동리,목월 문학상을 추진하게 되었다. 매년 동리.목월문학관에서는 동리목월 백일장, 동요경연대회등 다양한 문학제를 펼친다. 박목월 선생님의 문학관에 들어서니 선생님의 흉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자연지향의 시를 쓰신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자연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세계, 우리의 전통적인 율조를 살린 시를 써서 매우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노래했으며 짙은 서정성과 한국어의 리듬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민요의 가락을 살린 그의 동시와 향토적 서정시 [송아지],[뻐국기], [흰구름],[청노루],[윤사월], [나그네], [그리움]등은 국민 모두가 즐겨 읽는 시로 알려져 있다. 국민들에게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고 있는 그에게 붙여진 ‘국민시인’ 이란 칭호는 매우 적절한 것 같다. 그의 시 세계를 들여다 보면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는데 초기 시는 자연의 교감과 향토적인 정서를 배경으로 하여 본원적인 고향을 추구하는 시편들이다.[윤사월], [청노루],[나그네], [산도화],등이 그의 초기 시중 가장 애송되는 시들이다. 맑고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순수한 정서로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가장 압축된 시 형식속에 무한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독자들을 사로잡는 특이한 시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의 전통적인 율조와 조화됨으로써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는말을 듣고 있으며 어린애와 같은 동심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시인들이가지지 못한 독특한 개성적 톤을 발성한다. 초기시에 해당하는 [청록집]과 [산도화]에 실린 작품들은 자연의 풍경을 서경적으로 묘사 하는 듯하면서도 서정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박목월 선생님은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그것을 베끼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한 연에 포인트를 두어 독자의 시선을 유도함과 동시에 시인의 감정의 핵심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기의 작품인 [난.기타], [청담],에서 목월은 초기의 자연 친화에서 벗어나 인간생활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시들은 시인의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뿐아니라 시인 자신의 일상사를 소재로 하고 있어 초기 시들 [가정], [밥상앞에서]과 대비를 이룬다. 그의 중기 시와 후기 시는 인생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문명비평적 경향등은 시가 시대적인 상황과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소재를 찾아 거기에서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현실적인 자연과 교감하여 시적 아름다움으로 승화하거나 문명비평적인 관점에서 형상화한 시들이다. 후기의 [경상도의 가랑잎]에서 인생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고향에 대한 향수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며 군데군데 경상도 사투리를 끌어들임으로써 구수하고 소박한 감각을 살리고 있다. 말년에 작품에 해당하는 [무순]에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회한이 사라지는 대신 대상에 대한 관조적이고 담담한 태도가 돋보인다. 고인의 육성으로 낭송되는 시의 여운을 뒤로 하고 두분이 문우이면서 경주 문학의 토대를 이룬 김동리 선생님의 문학관으로 이동했다. <소설[을화]로 노벨문학상 본선까지 오른 가장 한국적인 작가 김동리> 작가 김동리 선생님은 1913년 11월 24일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김창귀이고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작가는 서적을 스승으로 삼아 지식욕을채워갔으며 그가 중학교 4학년이던 시절에 철학서적과 세계문학, 동양고전에 심취하였고[화랑의 후예], [산화]를 통해 조선 동아 중앙일보에 당선되면서 결실을 이루었다. 경주는 고조선 이후의 무속적 분위기에 통일 신라의 불교가 접목되어 형성된 독특한정신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원천적 민족정신은 변하지 않고그대로 이어져 경주 곳곳에 남아 있다. 김동리가 자란던 때 경주는 신라 고도의 옛 분위기가 훼손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간직하고 있었다. 토속적.무속적 분위기가 짙게 감도는 경주의 분위기는 어린 시절 김동리의 내면적 정서의 기조를 이루었다. 김동리가 작품을 통해 신라문화와 신라혼에 깊이 천착했던것은그의 작품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근대의 양면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며이에 따라 새로운 문명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주장했다는 점이 빛을 발하고 있다. 김동리 선생님의 작품 소재와 정서에서 우리들은 민족정신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 본선가지 올라간 [을화]가 세계인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토착문화의 전통을 인류의 보편성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김동리의 작품 [무녀도], [황토기], [바위], [등신불], [산화], [흥남철수], [을화]등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운명적 삶의 공간을 토착정서를 배경으로 해서 구성한 작품이다. [선도산]은 경주를 사랑하는 김동리의 향수와 운명적 공간으로서 지역성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녀도], [황토기], [역마]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민적정서와 고향의식이다. [등신불]은 소신 공양으로 등신불이 된 만적선사의 인생 고뇌를 현재의 ‘나’ 의입장으로 다루어 인생의 구경적 운명을 불심으로 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깊은 감동을 준다. [까치소리]는 까치소리에 빚어지는 인간의 운명적인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6.25전쟁 무렵 제대하여 고향마을에 돌아온 주인공 ‘나’가 어쩔수 없이 겪어야 하는 절망의 비극은 무녀도나 황토기의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던 생의 구경적인 허무주의의 토착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하찮은 미신으로 치부되던 무속신앙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사로 자리 매김 하고 설화적, 민속적인 세계를 소설화 했으며 무시간성 영원성의 세계를 지향한 작가이기도 했다. 김동리의 설화적 세계는 현실공간뿐만 아니라 역사의 틈을 비집고 올라가서 전개되기도 하고 고대 동서양의 역사를 배경으로 자신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확대시키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고대 신라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소설들이 압도적으로 이들 작품중 이곳 경주(신라)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을화]로 인해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작가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우리는 김동리 작가를 통해 우리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무당의 삶을 그린 가장 민속적이고 전근대적인 그러면서 가장 민중적이고 한국적인 작품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문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문학의 세계적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드리면서 신라를 빛낸 인물관 탐방을 마치고 불국사로 향하는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려 산사의 고즈녁함을 더해 주었다. <법당과 탑이 서있는 기단위의 가람 자체가 불국을 상징하고 있는 불국사> 불국사로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울긋불긋하게 치장한 연등들이 우리를 반겼다. 비에 젖은 초목들은 더욱 싱그럽고 잘 손질한 관음송, 산딸나무,왕벚꽃나무, 백송들은 우리를 충분히 힐링하게 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데도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떨어지는 빗방울로 동심원을 그리는 연못등의 아름다운 자태로 도심에 찌든 마음과 고단함을 위로해 주기에 충분했다.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745m)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찬란한 신라 불교문화의 핵심으로 1,440년 전 신라 법흥왕 22년에 그 어머니 뜻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세워졌으며, 그 후 신라 경덕왕 (742-764)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의 면모을 새롭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물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 다보탑은 조형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통일신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다보탑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시킨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종교 미술에서는 그 이전부터 정해진 규범 안에서만 표현이 허용되기에 장인의 표현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형상은 32상 80종호를 벗어날 수 없으며, 탑 역시 지역적으로 부분적인 변화를 줄 수는 있으나 파격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명작(名作)이다. 이 두 탑은 불교의 경전 가운데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의거하여 만들어졌다. 『법화경』에서는 많은 부분에 걸쳐 불탑 공양과 공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견보탑품」은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다. 다보탑의 정식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며 석가탑의 정식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다. 다보여래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이전의 부처였다. 그는 『법화경』을 설법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탑 모양으로 솟아나 그 설법의 진실을 증명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자 다보여래가 탑의 형상으로 땅에서 솟아났다. 두 탑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와의 만남을 묘사해 놓은 것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은 『법화경』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절묘하게 건축으로 표현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바로 『법화경』에서 이야기하는 공간적장소가 되는 것이며, 각 석탑의 모습은 경전에서 언급된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독창적인 모습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므로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 높이 8.2m, 국보 제21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석가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하층기단을 짜맞추는 독특한 공간 처리 방법이다. 이는 실제로 돌이 많은 인도의 영축산에서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석가탑에서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가장 특이한 부분은 지표와 탑이 세워지는 공간 처리 방법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그랭이를 이용하여 하층기단을 자연석에 맞도록 다듬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은 실제로 돌이 많은 영축산 위에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탑 주위에는 장대석으로 탑구를 마련하고 설법할 때 불국토의 부처님이 와서 앉는 각기 다른 모양의 연꽃을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의 반대편에 다보탑이 솟아나 있다. 「견보탑품」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의 탑이 나타났다. 탑의 높이는 오백 유순이고 넓이는 이백오십 유순이며,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여러 가지 보물로 이를 꾸미되 오천의 난간이 있고, 감실이 천만이고 수없는 당번으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며, 사면에는 다마라발전단의 향기가 나와 온 세계에 두루 가득 찼다. 여러 번개는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 등의 칠보로 이루어져 그 높이가 사천왕궁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보여래의 몸을 친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석가여래는 오른편 손가락으로 칠보탑의 문을 여니 그 안에 선정에 들어 있는 다보여래를 친견하게 되었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를 보고 '잘하고 잘하십니다'하며 석가여래에게 자리를 나누어 두 여래가 칠보탑 가운데 사자좌 위에 가부좌로 앉았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법화경』 「견보탑품」에 의거한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이러한 『법화경』 「견보탑품」의 극적인 내용은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두 분의 부처가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은 돈황·용문 등의 석굴내 조각과 벽화로 수없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경전적인 해석을 탑이라는 건축물로 현실 공간에 재현한 것은 오직 불국사뿐이다. 더구나 기존에 존재하고 있지 않던 상상의 탑을 절묘한 형식으로 창안하여 다보여래의 탑을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경전의 내용과 탑의 형상은 부합되는 면이 많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기단부 난간과 지붕돌 위에 있는 사각과 팔각의 난간, 사각의 난간 내부에 마련된 감실의 형태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연꽃의 화려함 등은 경전의 내용과 직접 비교가 가능하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 높이 10.4m, 국보 제20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경전에만 나타난 화려하고 온갖 보석으로 장엄되어 있던 다보탑을 신라인의 절묘하며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다보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솟아난 다보여래의 몸을 표현·상징하기 때문에 땅에 서 있지만 실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났기에 다보탑의 구성은 상층부로부터 하층으로 원→팔각→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단 위쪽에 자리한 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탑 기단 모서리에 사자를 넣어 사자좌 위에탑이 서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화엄사사사자석탑이다. 이러한 형식의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안되어 금강산 금장암지사사자석탑, 충북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 강원도 홍천 괘석리사사자석탑 등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들의 연원은 바로 불국사 다보탑에 있는 것이다. 석가탑의 위대함이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66년 해체·수리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서였다.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해 석가탑이 훼손되어 10월 전면적인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2층 몸돌 윗부분에서 집 모양의 사리기와 사리병 등 각종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종이질이나 글씨체가 8세기 초기의 것이며, 너비가 비록 8㎝에 지나지 않지만 길이는 무려 6m에 이르는 두루마리 경전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다보탑은 1925년에 일본 사람에 의해 해체·수리되었으나 사리장치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와 관련된 보고서나 정황을 알 수 있는 간단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때 불상 두 구가 발견되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다른 사리구들에 대하여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더욱 굵어진 비를 피하려고 회랑으로 들어서는데 ‘역사저널’에 나오시는 최태성 선생님을만나서 반가웠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한 인문학 탐방에 강사님으로 오셨는데 그 특유의 소탈함과 해박함에 매료되어 잠시 청강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 현재의 석가모니부처, 미래의 미륵부처님에 대한 설명과 민간 설화로 전해 내려온 석공 아사달과 그의 연인 아사녀의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으로 더 잘 알려진 석가탑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대사의 비밀이 숨겨진 석가탑의 현존하는 목판인쇄중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고 우리나라 탑중에서 한번도 열어 보지 않은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라고 하셨다. 역시나 최고의 스타강사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선생님의 강의에 박수를 보낸다. 빡빡한 일정으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남산자락 동쪽에 위치하고 남산탑곡 마애불상군이 있으며 이육사 선생님이 한때 건강상 이유로 이곳에 피정을 오셔서 요양한 적이 있는 옥룡암으로 향했다.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 있는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는 옥룡암> 옥룡암이 자리한 남산은 수많은 불교유산의 보고로 노천박물관이라 불린다. 국립공원이면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며, 2000년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타공인의 명소이다. 요소요소에 절터, 탑, 돌에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 박물관인이곳을 보아야 경주를 제대로 본다는 말이 실감이 간다. 경주 남산 탑골에 자리한 옥룡암과 마애불상군은 경주시에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동남산 가는 길’에도 속한다. 이끼와 야생화가 예쁘게 피워 있는 계곡 길을 따라 올라 가니 소담한 규모의 동남산의 탑골에 있는 옥룡암과 함께 그 뒤에 웅장하게 서 있는 탑곡마애불상군이 있었다. 탑골마애불상군으로 오르는데 비가 와서 비탈진 길을 올라가는데 미끄럽고 힘들었지만 우리의 열정은 굴하지 않고 열공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남산 탑곡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탑의 골짜기라는 의미인데 골짜기 초입의 마애탑은 물론이고 신인사 3층 석탑이 있어 탑곡이라 하며 또는 탑을 새긴 부처바위가 있어서 탑곡이라 부른다고 한다. 옥룡암은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나 현재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들어선 옥룡암이 법등을 잇고 있다.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가 1943년 이곳 옥룡암에 자취를 남겼고, 한때는 경주지역 고시생의 공부처로 유명했던 옥룡암은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에 녹아든다고 한다. 옥룡암과 이웃한 탑곡마애조상군은 보물(제20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높이 약 9m, 둘레 30m에 이르는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네 면에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금강역사상, 승상 등 총 24구가 남아 있다. 여기에 9층탑, 5층탑, 3층탑 등도 어우러져 당시 신라인의 불교세계를 이 바위에다 담으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갖게 했다. 2기의 목탑은 세부적인 표현이 충실하게 나타나 있어 현존하지 않는 신라시대의 목탑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정확한 자료가 없으면 문화재 복원이 어려운데 이러한 기록으로 황룡사 9층 목탑도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신라시대 조각은 이미 희미해졌지만, 이 바위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오래전 석공의 정성과 바램을 생각해 보며 외적의 침략으로 떨어지고 마모된 조각품을 보니 우리 조상들의 아픈 역사와 고단했던 삶을 생각해 보며 국력이 얼마나 소중함을 깨닫는다. 바쁜 일정관계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신라 천년왕궁의 궁궐터인 월성지구로 향했다.      <1300년전의 신라시대의 궁궐터였던 월성지구> 이곳은 1300년전 신라시대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집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반월성이라고도 불려졌다. 파사왕 22년에 이성을 쌓아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으며 그 이후로 신라 역대 왕들의 거처가 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가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으며 석탈해는 나중에 신라 4대 왕이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누각과 관청, 황궁을 비롯한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시설이 되었고 동쪽과 북쪽,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문터와 성벽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인공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 21년에 궁을 만들어 ‘금성’이라 불렀으며,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금성이나 만월성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길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는 안압지와 더불어 월성 일대는 신라의 궁궐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고 한다. 경주 월성은 ‘반월성’이라고도 하는데, 반달 모양으로 구릉을 깎아 흙과 돌을 섞어가며 궁의 주위를 감싸 안도록 쌓은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신라가 망한 뒤로 궁을 보호하는 기능이 약해지면서 자연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없어진 것을 수리하거나 보존하지 않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조선 영조 14년(1738) 월성 안에 만든 얼음 창고인 석빙고는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고,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석실[돌방]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졌는데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 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지금의 경주 월성에는 아무런 건물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숲이 우거지고 텅 빈 뜰에 잔디가 깔려 있을 뿐이다. 유적의 발굴과 복원으로 그 옛날 화려하고 왕성했던 궁궐이 복원 되기를 기대하며 오늘 탐방의 마지막 장소인 예기소로 향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마지막 배경장소인 예기소와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의 부질없음을 시로 읊은 금장대와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남긴 암각화> 예기소로 가는 길에는 예쁘게 핀 노란 애기 똥풀이 지천으로 피어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예기소는 명주꾸리 하나가 다 들어간다는 깊은 소로 옛날에는 별별 전설이 다 붙어 있는 무서운 소였다고 한다. 예기소는 소설 [무녀도]의 마지막 배경이 되는 장소로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졌는데 무당 모화가 굿을 하며 넋대를 휘젓어 청승에 자지러진 목소리로 혼백을 부르며 그녀도 물속으로 잠기어 죽음을 맞는다. 예기소위에 있는 금장대는 경주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있던절 혹은 건물의 이름인 금장을 따서 ‘금장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은 그 경치가 매우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쉬어 간다고 하여 경주의 8가지 기이한 현상가운데 하나인 ‘금장낙안’이라 불리워지던 곳이기도 하다. 금장대 아래에 만들어진 예기청소는 형산강의 본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낸 것으로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자비왕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 비롯해 몇까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다. 이러한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 없음을 인식하면서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며 시를 읊조리던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이곳의 빼어난 풍광을 보며 인간의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다시 삶으로의 환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신경주역으로 향했다.                            <  맺                음                  말>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고도 경주에 와서 20세기 소설과 시의양대산맥으로 획을 긋는 두 작가와 작품의 연관이 있는 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는 소중한 인문기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고향을 사랑하며 고향과 연관된 소설을 쓰신 김동리 작가는 자기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 근대 문학에서 사상적 깊이를 추구하려고 고민하고 애쓴 작가로서 존경심을 보낸다. 끊임없이 자기 사상을 추구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고 했던 그는 정말 경주를 사랑한 작가이며 50년의 작가 생활 동안 작품 수나 분량면에서 한국 근대 최고의 소설가이다. ‘국민시인’이라 칭함을 받는 박목월시인의 시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과 정서에서  항상 기억되고 회자되는 아름다운 시로 고단하고 지친 일상의 청량제 같은 정든 고향 같은 마음을 주는 포근한 안식처다. 이번 탐방을 통해서 역사적인 유적과 유물의 도시로만 알았던 고도경주를 한국의 뿌리와정체성을 알 수있는 문학의 산실임을 알게 된것도 큰 인문적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문학 작품을 통해 인문적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인문열차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삶의 여유와 혜안을 가지게 하는 좋은 문화 발전소로 지속되기를 바라며 우중에서도 강의로 수고하신 강사님과 진행으로 수고하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인연으로 길위에서 만난 탐방에 동행했던 선생님들 같은 관심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다음 기회에도 소중한 인연으로 뵙기를 바라며.... 인문열차 화이팅!!!!!!

    김옥란 2018.05.15

  • [만복사 저포기],[최척전], [춘향전]의 고향인 남원을 다녀와서

    [만복사 저포기],[최척전], [춘향전]의 고향인 남원을 다녀와서

    [만복사저포기]와 [춘향전], [최척전]이 탄생된 소설의 고향 남원을 다녀와서                  < 여           는          글> 새벽부터 마른대지를 적시는 고맙고 감사한 봄비가 집을 나서는 여행길에는 약간의 번거로움도 있지만 그동안 미세번지와 황사로 인해 사람이나 수목들도 몸살을 알게 한 공기를 말끔히 씻어 주니 고맙고 감사하다. 봄비로 깨끗해진 나뭇잎들과, 봄꽃들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이 한층 눈을 행복하게 해주었고 연초록으로 단장한 어린 나무 잎들이 비를 맞으며 속살거리는 듯 앙징 맞은 예쁜 모습이 만물이 소생하는 이 계절에 함초롬이 어우러져 길 떠나는 설램을 더해 주었다. 우아한 여인네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자목련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일락꽃의 배웅을 받으며 만남의 장소인 용산역으로 향했다. 우리일행은 KTX을 타고 김시습의 작품 금오신화중에 [만복사저포기]와, 18세기의 사랑이 21세기인 지금도 회자되는 [춘향전]과 전란으로 인해 헤어진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상봉하는 이산가족 상봉기라고 할 수 있는 [최적전]이 탄생한 소설의 고향인 남원을 향해 출발했다. 곰살맞게 오는 봄비로 차창 밖의 풍경은 우리 마음을 더욱 차분하게 해주고 오밀조밀한 우리 산야는 늘 애미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 주고 논과 밭은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정겨운 봄 풍경들이 목가적으로 나른한 행복감을 주어 동행자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마저 정답게 들렸다. 소설 [만복사저포기]와 소설 [최척전]의 배경이 된 지금은 오층석탑과, 석좌, 당간지주, 석물입상 석인상등 유물과 초석만이 남아 있는 만복사지절터 남원역에 도착해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첫 번 째 탐방지인 만복사지로 향했다.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 때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 만복사의 터로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사찰이었다. 그 당시 스님들이 300여명이 거처하는 규모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남원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근처 남원성에서 56.000명의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이곳 만복사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될 때 소실되었고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2층법당과 오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였다고 한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와 큰 규모의 당간지주에서 그 옛날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현재 절터에는 초록융단을 깔아 놓은 듯 녹색 초지위에 고려시대 5층석탑과, 석좌,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는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바치기 위해 세운 버팀기둥인 당간지주, 천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인자한 미소로 바위에 부처의 서있는 모습을 조각한 석조여래입상, 유물과, 초석,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석인상이 그 때 탁발승들을 맞이 한것 처럼 우리 탐방객들을 맞이 했다. 비오는 절터지 뒤 쪽으로는 기린산이 있고 앞으로는 수묵화를 채색한 듯한 운무에 신비감을 자아내는 지리산자락 산줄기들이 마주보며 옹기종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같이 있어서 민초들의 삶과 함께 해온 그들의 신앙과 믿음의 고향인 가람인것 같았다. 아마도 전란속에서 민초들의 고달팠던 삶을 어루만져 주었던 그래서 [만복사 저포기]가 이곳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이 소설의 대략의 줄거리는 남원의 총각 양생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을 얻어 외롭게 지냈는데 배필 없음을 슬퍼 하던 중에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날 밤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 그 후로는 소식이 끊겼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 [최척전]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란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졌던 최척이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이산가족상봉기라고 할 수 있다. 전쟁속에서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그 시대의 조상들이 남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자기의 꿈을 실현시켜 보고자 했던 절절한 심정이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조위한은  최척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인 상상을 바탕으로 한편의 소설을  완성 시켰는데 개인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민초들의 삶과 인물들의  삶에 녹아든 역사적 사실들 결함이 있어 더욱 친근한 고마운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연대등 17세기에 이러한 글로벌한 소설이 탄생 되었음에 놀라움을 금 할 수없었다. 시공간의 변화는 이소설의 스케일을 크게 해주었고 독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공동체가 경험한 삶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중국에서 작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남편과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소중한 인연의 배를 띄워 조선으로 가는 모습에서 같은 여자로서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답고 소중한 고전이었다. 이소설이 만복사와 인연이 되는 것은 이소설의 여주인공인 옥영이가 삶의 죽을 고비를 만날 때 마다 만복사에 장륙불이 꿈에 나타나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죽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민초들의 믿음이고 종교였던 불교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해 본다. 빈 절터를 바라보며 그 때의 양생의 마음과 민초들의 도탄에 빠진 삶을 생각해보며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영원한 패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에 항상 상처받고 고단한 삶을 사는 것은 민초들의 몫인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든다. 이 만복사지가 복원이 되어서 옛날의 융성했던 자태를 찾고 뭇 중생들의 마음의 기도처가 되기를 소원해 보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지리산 흑돈 매운 갈비찜을 먹으러 황산토종정육식당으로 갔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것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맛있는 갈비찜을 먹고 빗속에서 한폭의 수목화로 변한 지리산 자락의 운무를 감상하며 그 당시의 피로 물들었을 대 참상의 현장을 보러 대승을 기념한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의 터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왜군은 1380년 8월에는 진포[금강 입구]에 5백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한 뒤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연안 지방을 약탈하고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이 때에 원수 나세와 최무선 등이 화통과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 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1376년(우왕 2) 홍산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은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결집하게 되는데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순찰사로 임명하여 이 지방의 방위 책임을 맡게 하였다. 왜군은 함양과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였다. 이성계는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왜군이 주둔해 있던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이 글을 쓰고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는데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을 모아 안치해서 파비각을 만들었다. 황산대첩사적비는 고종19년 운봉 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 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철저히 조선의 혼까지도 말살하려고 저지른 일제의 만행을 그려보며 아직도 진정한 사과가 없는 그들의 후손들을 보면서 민족의 DNA는 뿌리내림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승리감도 있지만 빗발이 더욱 굵어져 지리산으로부터 내려온 물들이 람천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 때의 참상을 그려보며 아마도 람천의 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며 왜 인간들은 이렇게 죽이고 죽는 역사를 만들어 가야만 하는지 애석한 마음이 든다.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고 불순종의 죄성을 가진 우리는 이렇듯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이렇듯 많은 슬프고 참혹한 댓가를 치러야만 하는지 만감이 교차하면서 이렇듯 승리의 앞장선 장수나 관리들의 숭고한 희생은 부각되어 지금까지도 역사에 회자 되지만 당시의 척박한 땅에서 전쟁과굶주림속에서 희생이 된 민초들의 굴곡진 삶의 모습들은 이렇듯 문학에서 회자 되는것을 보면서 문학의 사회적기능이 얼마나 크며 값진 것인 것을 느끼며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동편제를 완성시킨 국악의 성지 가왕 송홍록의 생가> 국악의 가왕인 송흥록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음악의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나 소리는 극히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고부친이 한 두 번 선창을 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고 한다.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가 소리공부에 전념하고 밤이면 글을 배우며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를 터득하였다. 또한 소리를 정리하고 집대성하였으며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철종은 이런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중국의 시중천자 이태백에 비유하기도 하며 당시의 모든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으며 동편제 창법을 창시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공적으로는 계면조의 완성과, 진양조의 완성, 경상도 민요의 메나리조를 전라도의 무가와 민요의 선율에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판소리가 전라도의 지역성을 벗어나 민족예술로서의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가 앞으로 흐르는 람천 주변으로 피어 있는 화사한 벚꽃이 우리를 맞았다.가슴의 한이 없으면 득음을 할 수 없다는 창은 삶의 자죽마다 전쟁과 죽음이공존했던 이곳 예향 남원에서는 자연스레 민초들의 삶에 배인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 자체가 고통이었고 고단했던 민초들이 글은 모르고 이렇게 자신의 한과 서러움을 소리로 공감하고 위로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귀곡성으로 유명한 동편제 판소리의 길을 연 송흥록이 비전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동편제의 가왕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 선생의 출생지가 비전마을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생가로 들어서니 음원으로 녹음된 판소리가 애끓는 가락으로 우리를 반겼다.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생가지의 정겨운 초가지붕과 돌로 만든 우물과 초가집앞에 심겨진 앵두나무가 어릴 적 고향마을을 상기시켜주어서 잠깐이나마 향수를 달래주었다. 전쟁으로 만명이 훨씬 넘는 조선인과 왜군들의 억울한 영혼들이 떠돌아 다니는 산 아래 시냇가 마을에서 태어나 귀신의 음혼과 함께 살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귀신 소리를 잘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송흥록의 소리는 고수를 맡던 아우 송광록에게 이어졌고 송광록은  송우룡, 송만갑, 송기덕으로 대를 내리면서 소리를 이어갔다.이렇게 남원의 판소리는 전승되었다. 운봉 들판을 가로 지르는 광천이 인월에서 풍천과 만나 람천이 되어 지리산 자락의물줄기를 합쳐 엄천강이 되고 이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바다로 가는 것을 보며 왜구들이 왜 이곳 남원에 결집했는지를 알 수 있을것 같았다.구슬픈 가락과 수많은 세월속에서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있는 주변의 자연을 뒤로 하고 단일 사찰로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호국불교로 나라 사랑이 넘쳤던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로 향했다. <호국불교로 나라사랑이 넘쳤던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 지리산 천왕봉를 마주하고 자리한 이 절은 통일신라 흥덕왕 3년에 홍척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도 그중에 하나이다.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숙종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경내에는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품격을 대변해 준다. 천왕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 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부처님의 자비를 보이듯 포근히 감싸 안고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맑고 투명한 반선계곡 물이 속세의 번뇌을 씻어 주려는 듯 절 옆을 돌아 굽이쳐 흐르고 있다.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4개가 있었는데 그 중 1개가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개만 남았다. 석장승의 모습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 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 영조 1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귀신을 쫒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궃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해탈교를 건너니 연꽃연못이 가람의 운치를 더하고 일주문에 들어서니 사천왕상들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강사님께서 이 절의 특징은 천년고찰이며 문화재가 많은 사찰이며 일본과 관계된 전해오는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아마도 호국 사찰로서 왜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징계하고자 했던 스님들의 나라 사랑과 연관이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 가는 것을 막도록 4천근의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3층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누르게 하였다는 전설과 함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은 현종 5년(1664)에 제작되었으며,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타종시 동경을 강타하여 우리나라의 국운을 융창하게 한다는 호국사찰이다.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일본 경찰한테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스님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절절이 느껴진다.전해지는 이야기로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쇠하고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쇠해진다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사찰로 야외 박물관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었고 정민영 작가가 만든 실상사의 소리풍경은 잠시 앉아 명상을 즐겨도 좋은 공간이었다. 현대 시각으로 재해석한 솟대의 모습등 실상사 경내에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조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비내리는 산사의 운치를 뒤로 하고 우리는 18세기의 청춘남녀의 사랑이 21세기인 지금도 회자되는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의 백년가약을 맺은 광한루로 발길을 향했다.  <사랑 사랑 내사랑 어화 둥둥 내사랑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놀이터 인 광한루> 춘향전으로 한층 유명해진 광한루는 원래 세종 조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와서 세웠다는 누각이다. 전쟁 등으로 개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누각의 이름을 처음에는 광통이라고 했다가 후에 정인지가 광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광한은 옥황상제가 산다는 천상에 있는 공간이다. 신선세계의 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늘나라 월궁을 광한루라 하였고 그 아래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놓았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속의 삼신산을 연못 가운데 조성하여 전체적인 구성이 천체우주를 상징한다.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에 들 정도로 만듦새가 뛰어나다. 선조 때 남원부사 장의국이 요천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광한루 전면 동서 양편에평호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못 안에는 삼신도를 만들어 한섬(방장섬)에는 대나무를 또 한 섬(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나머지 한 섬(영주섬)에는 연정을 지었다. 또 가운데에는 하화를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을 놓았다. 연못을 앞에 둔 누각으로 마루주위에 난간을 둘렀고 본채 동쪽에 연접된 두 칸의 부속건물은 정조 때 증축한 것이다. 기둥위의 공포양식이 주심포집에 다포집 계통을 절충한 특수한 건물인데 건축양식보다춘향과 이도령의 아름다운 인연이 얽힌 전설적인 누각으로 더 알려져 있다. 광한전은 원래 옥황상제가 사는 곳인데 이 고을에 온 부사들이나 한량들이 별세계의 이름을 붙이고 이곳 광한루에서 일상의 쉼을 가지고 시를 짓거나 풍류를 즐겼으며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관청이 주관하여 조성한 정원으로서 단아하고 정결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완월정,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그네, 전통놀이 체험장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광한루원에 들어서니 춘향가의 한 대목인 사랑가가 우리를 맞이했다. 정말로 봄날에 춘정을 느끼고 사랑의 로맨스가 싹틀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오작교 다리 밑에 양 연못에는 원앙이 짝을 지어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과 질세라 꼭붙어서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연못속에 잉어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며 소설 춘향전의청춘 남녀가 노는 모습과 겹치면서 나 또한 젊은 시절에 사랑에 몸살을 앓았던 기억에 아련함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소설 춘향전의 정확한 창작시기와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영조, 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근대 계몽기를 거치며 현재의 춘향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전래 설화들이 합쳐져 판소리 춘향가로 발전하였고 판소리 사설이 소설로 각색되어전해지고 있다. 즉 설화-판소리-소설의 변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이팔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신분이라는장벽에 의해 헤어 졌다가 다시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한편의 절절한  사랑이야기 입니다. 신선의 정원에서 운명을 만난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를 울게 하고 웃게 하며 그 속에서 한바탕 신나는 감정의 유희를 펼쳐 볼 수 있게 합니다. 춘향전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로 너무나 낯익은 이야기이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특정한 작가 없이 판소리에서 발달된 소설 <춘향전>은 옮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중 완판본 춘향전은 전라도 지방의 판본인 <열녀춘향수절가>이다. 18세기의 소녀로서 21세기 에도 회자되는 목숨을 건 춘향의 사랑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가치입니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춘향은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를 통해 현대의 캐릭터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시대에 양반과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격차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이겨낸 춘향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춘향전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춘향전의 매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출할 수 있습니다. 춘향전은 춘향과 이몽룡의 러브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고 신분제의 질곡 대한 거부와 변학도의 폭정에 대한 항거에 초점을 맞추면, 춘향전은 전근대 시대의 모순에 저항하는 문학작품이 됩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하다는점 그리고 폭넓은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춘향전은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줄길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춘향전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추구하는 당시 서민들의 꿈과 정서가 담긴 작품으로 고전소설의 최대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맺     음     말> 우리의 빛나는 고전을 읽고 그에 준하는 내용의 강연을 듣고 책속에서 읽었던 모습들을 현장속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길위의 인문학 여행은 신중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진 나에게는 행복한 호사다. 인문열차를 타고 [만복사 저포기], [최척전], [춘향전] 소설이 태어난 고향 남원을 찾아와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탐방 장소를 둘러 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 없고 공은 권력을 가진 자와 힘의 논리의 지배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래도 이러한 민초들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큼을 알 수 있는 고맙고 소중한 여행이었다. 역사란 인간이 써내려 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지만 건조한 지식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고 가슴으로 한결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이번 인문학 기행은 보람 되고 뿌듯했다. 인문학 여행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역사와, 문학, 자연과의 만남은 무엇보다도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데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나 자신을 반추해 보는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만물이 소생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월에 우리의 뿌리를 알고 역사를 사랑하는 인문열차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우중에도 강의를 해주신 강사님과 도서관의 사무관님 진행을 맡아 주신 안우상 팀장님이하 쏙쏙직원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문열차가 영원한 인문학의 발전소가 되기를 바라며!                                     인문열차 화이팅!!!

    김옥란 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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