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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삶과 죽음
작성자 최상민 작성일 2017.09.15 조회수 445
이메일 mannam96@hanmail.net
치열한 경쟁으로 인터넷 접속도 못해보고 2년을 보내다가 지난 8월31일 일찍이 인터넷을 열어놓고 09시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몇 번을 시도하니 9시에 신청이 가능하다고 하더니 수간 갑자기 인문열차 창이 열리는 것이다. 얼결에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뭇거리다가 맨 아래 신청란을 누르니 동의를 하여야 한다고 하여 마음은 급한데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동의란을 체크하고 신청을 하였더니 상당이 앞 순위로 신청이 된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경쟁률이 낮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후를 기다리다가 발표를 보니 역시 앞 순위에 내 이름이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으로, 그 동안 접속도 못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무슨 장한 일이나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9월9일 아침 8시50분까지 청량리역으로 나오라는 문자를 받고 여유 있는 시간이지만 서둘러 집을 나서서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8시30분경이다. 체킹을 하고 잠시 대기하다가 9시10분 정동진 행 기차를 타고 양평역에 이어 약 한 시간 만에 원주역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 두 대가 우리를 태우고 바로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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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그녀는 1926년 우리나라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에서 태어난 여류 작가로 대표작인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는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다. 특히 토지는 1968년에 시작하여 26년에 걸쳐 완성한 20권으로 된 대하소설로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에 완결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말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토지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작으로 기념관에 전시된 책을 보면서 그 길고 긴 세월동안 소설 쓰기를 계속하여 드디어 끝을 보게 된 작가의 땀과 능력과 노고를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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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집필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던 생가와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밤하늘의 별을 보던 돌의자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의연하고, 손수 야채를 가꾸던 남새밭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여주의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鳳尾山 자락에 자리를 잡은 물 좋고 쌀이 좋은 여주를 대표하는 사찰로 원효의 꿈에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절)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고,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안 되어 원효대사가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연못에서 나와서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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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찰의 세 가지 종류는 통도사가 중심인 불보사찰과 해인사가 중심인 법보사찰, 송광사가 중심인 승보사찰로 나누며 아미타불을 모신 곳을 극락보전이라 하고 석가불을 모신 곳을 대웅전이라 하며 관세움보살을 모신 곳을 관음전, 자장보살을 모신 곳을 명부전이라고 한다는 신 교수님의 설명과 서원에 당간지주가 있는 곳은 원래 절이 있었다는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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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는 영릉을 지키는 원찰로 우리나라의 사찰 중에서 멋진 강가에 위치한 절로는 대표적인 절이라고 할 수 있다. 1473년 정희왕후가 신륵사를 보은사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후기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왕릉 원찰 제도가 폐지되고, 이어 보은사라는 이름도 다시 신륵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물론 산 속에 있는 나웅화상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보재존자석비가 있는 곳까지 둘러보고 다음 장소인 영릉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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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은 같은 이름의 두 능이 있는 곳으로 먼저 찾아간 곳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英陵이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헌릉 서쪽 서울 강남의 대모산에 조성하였다가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이곳으로 옮겨서 합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주변의 경관이 너무 멋지고 오래된 소나무가 사방으로 진을 치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장수들이 왕을 호위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일명 달릉이라고도 하는 혼유석이 두 개가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능이 아닌가 한다. 영릉은 건원릉(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진 후 계획대로 안장되었다가 문제가 생겨서 1673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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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陵에서 700m 지점에 위치한 효종왕의 능은 부부의 무덤을 동원 상하릉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왕릉 옆에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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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둘째 부인의 딸로 51세에 낳은 늦둥이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다고 한다.
생가는 원래 숙종13년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종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는 안채뿐이라고 한다.
조선 26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가 8살까지 살았던 곳으로 여주시에서 정비하여 역사적인 명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근처에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감고당이 있다. 감고당은 인헌왕후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왕비에서 물러나 복위할 때까지 거처하였고, 명성황후가 한양으로 가서 왕비로 간택되어 책봉될 때까지 머물렀던 감고당은 원래 덕성여고 자리에 있던 것을 쌍문동으로 옮겼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으로 철거될 위기에서 2006년 여주시가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으로 옮겨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운의 역사를 한 몸에 짊어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비 명성황후. 여우냥이라는 암호를 가지고 일본이 보낸 자객에 의해서 경복궁에서 비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 그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지하에서 오늘도 지켜보며 지금의 우리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오랜만에 신병주 교수와 함께 한 인문학 여행.
여행하기에 딱 좋은 계절. 비록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재미있는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또 다음 기회를 기대해 본다.

* 등록된 댓글 2개

  • 최상민  |  2017-09-23 15:45:40

    지난 여행에 유일하게 올린 선생님의 후기를 보고 댓글을 올렸는데
    답이 없어서 궁금했는데 잘 계시죠?
    다음에 뵙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가을을 즐겁게,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김옥란  |  2017-09-21 14:58:45


    반갑습니다.
    지면에서라도 
    인사드릴 수 있어 좋네요.
    그간 뜸하시더니 
    드디어 움직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는데
    샘의 후기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간략한 설명과 제가 못하는 사진까지
    올려 주셔서 시야가 확트이는것 같습니다.
    바람맛도 다른 이 좋은 계절에 길위에서
    뵙기를 바라며 항상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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