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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1500년전의 숨결을 품고 있는 부여.공주를 다녀와서

    백제 1500년전의 숨결을 품고 있는 부여.공주를 다녀와서

    <백제 1500년의 숨결을 품고 있는 부여 공주를 다녀와서>                               <여      는     글>   집을 나서니 간밤에 늦가을을 보내기 아쉬운 비바람이 알록달록 예쁘게 치장한 나뭇잎들을 발가벗겨 거리가 온통 떨어진 나뭇잎들로 바스락 거렸고 삽상한 가을바람에 볼이 시렸지만 옷깃을 여미며 올해의 마지막 인문열차에 탑승하여 1500년의 백제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부여.공주의 인문적비의와 속살을 보기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용산역에 도착하니 마지막 가을을 만끽하려는 나들이 인파들로 북적거렸고 인문열차에 탑승하려는 우리 일행들중에 그동안 길위에서 인연을 맺은 지인을 뵈니 더욱 반가웠다.   우리는 호남선 KTX에 탑승해서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들을 감상하며 마주않은 일행들과 오순도순 행복한 마음으로 담소을 나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벼밑둥이만 남겨진 논에 하얀 비니루로 돌돌 말린 짚덩이가 퍽이나 인상적이었고 정겨웠으며 초록으로 무성하게 치장했던 옷을 벗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사위어 가는 알록달록하고 오밀조밀한 예쁜 산야를 뒤로하고 공주역에 도착했다.   <웅진시기 백제왕과 왕족들이 묻혀 있는 송산리 고분군>   공주역앞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를 타고 송산리 고분군을 향해 출발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삽상한 늦가을 바람이 솔향과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의 경계에 있는 송산의 남쪽경사면의 자리 잡고 있는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시대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다. 이곳 송산리 고분군은 2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 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네스코 백제역사 유적지구의 하나로 그중에서도 무령왕릉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두가지 무덤형태가 확인되는데 돌을 쌓아 만든 굴식돌방무덤과 벽돌을 쌓아 만든 벽돌무덤이 있는데 1호분에서 5호분까지는 굴식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이다.   인솔하신 이해준 교수님께서 간단하게 고분군 모형 전시관 앞에서 설명을 해주셨다. 항상 탐방할 때는 그 지형을 파악하라고 하셨는데 탐방 때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우리들의 좁은 시야를 지적하신 것같다. 교수님은 70학번으로 운좋게 학생신분으로 1972년 무령왕릉 발굴현장에 참석하셔서 그 경험이 지금까지 오고 있으며 20년전에는 왕릉안에 들어가서 관람했는데 지금은 고분군의 보존상의 문제로 1997년 7월 15일 문화재청의 영구 비공개 결정에 따라 내부관람이 중지되고 현재는 모형전시관을 만들어서 관람객들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고분중에서도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 배수로를 공사하던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1500년 상태로 백제시대 무덤중 도굴되지 않고 온전히 발굴 되었다.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의 생애와 매장시기를 알 수 있고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미의식 수준과 높은 공예기술을 통해 찬란한 백제의 사회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모형전시관에는 무령왕과 왕비의 출토유물이 4.600점 이상으로, 백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진품들과 국보 12점 등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분에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모형전시관을 통해 보는 것으로 달래며 솔향의 배웅을 받으며 웅진시기의 방어성이자 왕성이었던 공산성으로 향했다.           <웅진시기의 방어성이자 왕성이었던 공산성>   공산성에 도착하니 성곽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구절초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깃발이 펄럭이며 우리를 맞이했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어조로 말씀하시는 해설사님께서 간략한 백제의 역사를 말씀하셨다.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자리 잡아 성장하였는데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어 웅진 지금의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475년에서 538년 사비 지금의 부여로 옮기기 전까지 64년간을 웅진시기라로 한다. 웅진은 동.서.남쪽으로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입지였다. 또한 금강은 바다와 만나 백제가 중국등 동아시아 각국과의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는 웅진이 사비로 수도를 옮기기 전인 538년 까지 백제가 다시 힘을 기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음을 말해준다. 웅진에서 힘을 기른 백제는 중대한 결심을 하여 수도를 사비로 옮길 준비를 하였다. 웅진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지역이 협소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백제의 발전을 위해 538년 사비로 천도를 하였다. 백제는 새로운 수도 사비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하였다. 538년 사비로 수도를 옮긴 이후부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까지의 123년간을 사비시기라고 한다.   공주공산성은 사적 제 12호로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성벽을 쌓은 웅진시기의 방어성이자 왕성이었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동.서.남쪽은 가파른 성벽이 자리하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이점을 가진다. 공산성은 성안에 왕궁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어 백제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산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왕궁지에는 여러기의 백제건물지와 백제시대 왕궁내에서 발견된 인공연못이 있고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 벽주건물은 위계가 높은 건물들에 사용되는 건축 양식으로 건물의 상부를 꾸미는 다양한 기와들이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왕궁 부속시설지와 식품이나 물품등을 저장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저장시설인 목곽고터가 있었고 이괄의 반란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쌍수정사적비가 있었다. 비문을 통해 이괄의 반란 때 인조가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등이 적혀 있다.   피난온 인조임금과 연관이 있는 쌍수정과 인절미에 대한 유래가 전해지고 있었다. 성루에 올라서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천년 넘어 지금까지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펼쳐져 있고 옛날에 배다리가 있는 자리에는 금강철교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문에서 바라본 공주시가지를 바라보면 많은 유적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공산성 정면으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황새바위가 있고 그 뒤편이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이고 우측 강가 언덕에는 백제시대 제사유적인 정지산 유적이 있고 고려시대에 공주로 온 어떤 안렴사가 금강가의 정자에 들러 금강의 물줄기와 산세에 감탄하여 자신도 모르게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는데 그 정자가 바로 ‘안무정’ 이라고 한다.   안무정은 지금의 정지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자취가 없다. ‘안무정’ 자리에 정자가 만들어져 금강과, 공산성, 공주 시가지를 함께 보면 우리도 그 안렴사처럼 덩실덩실 어깨춤이 추어 지리라고 상상해 본다. 그 주변의 금강변에 공주의 옛 이름인 ‘고마‘ 의 유래가 담기고, 배가 닿았던 ’고마나루‘가 있다. 또 공산성 서문 앞 광장은 지금은 음식점과 상점이 가득 메우고 있지만 본래 공주 특산물이었던 미나리를 재배한 ‘미나리꽝’ 지대였다고 한다.   펄럭이는 사신도 깃발의 배웅을 받으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점심식사가 준비 된 ‘고마나루 돌쌈밥집’으로 가서 식당이름 만큼이나 옛스럽게 꾸며진 공간에서 맜있는 식사를 했다.   <사비도성에 위치하였던 정림사지와 정림사지5층석탑 정림사지 박물관>   정림사지는 사적 제 301호로 불교의 교리를 완전하게 구현한 사찰이자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하였던 절터로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중 하나라고 한다. 백제말 123년의 도읍기를 통털어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유적으로 백제 사비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진 왕실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 곳이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높이 8.3m의 석탑이 남아 있으며 조사결과 금당지, 강당지, 승당지 등이 확인되어 불.법.승의 불교의 3보를 모두 구비한 백제 고유의 사찰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사찰은 탑과 금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모습이 특징인데 정림사지 역시 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가지 이어진다. 정림사라는 절의 이름은 고문헌 기록에도 없었는데 1942년에 발굴된 고려시대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서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국보 제 9호인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시대 석탑으로 탑의 원형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완벽한 균형미와 비례미를 보여주며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을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구성 형식이 정형화 되지 못한 미륵사지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탑이 과거에는 평제탑이라고 불렸는데 거기에는 백제의 슬픈이야기로 탑의 1층 탑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승전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세워 백제 정복을 기념하는 글귀를 사방에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당나라와 신라가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한 이야기, 포로를 압송한 이야기등 치욕적인 내용이 적혀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660년 7월 18일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림사지석불좌상>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108호로높이 562㎝. 거불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 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3단의 팔각연화대좌이다. 상대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의 간석에는 큼직한 안상이 표현되어 있다. 하대의 윗부분에는 복련이 있고, 아래의 기단석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 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고 했다.   <백제의 꿈과 땀이 담긴 정림사지 박물관>은 백제 사비시기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의 건물형태는 불교의 상징인 ‘절’자 모양으로 중앙홀를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등이 사방으로 뻗은 날개 모양으로 상호 연계하여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다. 백제시대중 가장 화려했던 사비시기의 불교유적등 백제의 꿈과 땀이 담긴 정림사지 박물관을 보니 타임머신속의 백제을 경험하게 되어 기뻤다.   <눈과 마음을 황홀케하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 국립부여 박물관>   백제사비도성의 정림사지와 불교예술의 극치인 삼보를 뒤로하고 국립 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나른하고 다리가 아팠지만 여러번 보아도 매료되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위해 힘을 내본다.   제1전시실에는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 살펴 볼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였고 중국의 랴오닝지역과 한강유역의 문화를 받아들인 부여 송국리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확인 할 수 있으며 백제 성립의 기반이 되었던 마한의 문화를 감상할 수 있다. 그중 대쪽모양동기는 동기의 넓은 쪽 가운데 공간에 사람의 손 모양이 새겨져 제사장과 관련된 유물로 여겨진다고 한다.   제 2전시실에는 백제 사비시기의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사비천도와 왕경문화’ ‘능산리 사찰‘과 ’백제금동대향로‘, ‘돌과 나무에 새겨진 백제문화’의 세가지 주제로 전시하였다. 이를 통해 사비도성에 살았던 백제인의 일상과 정치행정, 종교의례에 관한 다양한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금동대향로 앞에는 많은 관람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향로는 향을 피워 나쁜 기운을 깨끗이 하기 위한 도구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능산리사지 발굴조사가 실시되면서 부여 능산리사찰의 공방터에서 출토 되었다고 한다.   뚜껑에는 하늘에서 날아온 봉황이 정상에 앉아있고 다섯 방향으로 쌓아올린 봉우리에는 인물들과 상상의 동물, 현실속의 동물을 묘사했다. 몸체는 연꽃 봉우리처럼 표현하였고 받침은 위로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향로는 신선들이 산다는 신산을 표현한 박산향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백제적인 요소를 담았으며 고대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도가사상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정교함과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 향로를 만든 백제의 장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제 3전시실에는 백제의 불교문화를 전시했는데 백제인의 우수한 공예 제작 기술을 보여 주는 ‘불상’과 세계적인 건축 감각을 자랑했던 ‘사찰’ 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불, 석불, 소조불,등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불상들을 전시하여 백제 장인의 예술혼으로 완성된 백제의 뛰어난 공예기술을 감상할 수 있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신체의 굴곡과 양감이 자연스럽고, 우아하고 세련된 조형성으로 백제 조각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제 4 전시실에는 기증으로 빛난 문화재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박만식 교수를 비롯한 50여명의 뜻있는 기증자들의 아름다운 선택으로 백제토기등 350여점의 기증품이 전시되어 있다.                         <맺    음    말>   올해 마지막 탐방이었던 이번 탐방도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닫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하늘빛 물빛 바람맛이 다른 이 아름다운 늦가을에 인문열차에 탑승할 수 있어 참 행복했다. 인문학 기행은 역사와 문학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나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것인가? 를 고민해본다.   3월부터 배움도 깨달음도 길위에 있다는 <인문 열차 삶을 달리다>을 통해 많은 역사의 사연속에 숨겨진 인문적비의와 속살을 찾아 우리에게 삶의 소통구이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번 공주 부여 탐방을 통해 미로 처럼 한치앞 모르는 인간의 삶속에서 소용돌이 치며 흐르는 역사의 수레바퀴속에 눈물을 흘렸을 패자도 미소를 짓는 승자도 물처럼 흐르는 세월앞에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음을 느꼈다.   사소한것에 목숨걸지 않고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고 삶의 윤활유가 되어주는 인문학 사랑과 탐방은 우리에게 삶의 자양분을 심어주니 내년에도 인문열차에 탑승하길 기대하며 더욱더 이사업이 건투하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   수고하신 강사님께 감사드리며 관계기관여러분과 쌀쌀한 날씨에도 이른 아침부터 현장에서 진행하시느라 수고가 많은 진상훈 대표님 안우상 팀장님 그밖에 모든 진행요원 여러분들께 모두 감사 드립니다. 이번 탐방에 함께 동행하신 여러 선생님들 좋은 역사여행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내년에도 길위에서 좋은 인연으로 만나뵙기를 바라며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화이팅!

    김옥란 2017.11.12

  • 조선왕조의 삶과 죽음

    조선왕조의 삶과 죽음

    치열한 경쟁으로 인터넷 접속도 못해보고 2년을 보내다가 지난 8월31일 일찍이 인터넷을 열어놓고 09시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몇 번을 시도하니 9시에 신청이 가능하다고 하더니 수간 갑자기 인문열차 창이 열리는 것이다. 얼결에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뭇거리다가 맨 아래 신청란을 누르니 동의를 하여야 한다고 하여 마음은 급한데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동의란을 체크하고 신청을 하였더니 상당이 앞 순위로 신청이 된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경쟁률이 낮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후를 기다리다가 발표를 보니 역시 앞 순위에 내 이름이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으로, 그 동안 접속도 못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무슨 장한 일이나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9월9일 아침 8시50분까지 청량리역으로 나오라는 문자를 받고 여유 있는 시간이지만 서둘러 집을 나서서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8시30분경이다. 체킹을 하고 잠시 대기하다가 9시10분 정동진 행 기차를 타고 양평역에 이어 약 한 시간 만에 원주역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 두 대가 우리를 태우고 바로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갔다. 박경리, 그녀는 1926년 우리나라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에서 태어난 여류 작가로 대표작인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는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다. 특히 토지는 1968년에 시작하여 26년에 걸쳐 완성한 20권으로 된 대하소설로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에 완결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말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토지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작으로 기념관에 전시된 책을 보면서 그 길고 긴 세월동안 소설 쓰기를 계속하여 드디어 끝을 보게 된 작가의 땀과 능력과 노고를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평소에 집필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던 생가와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밤하늘의 별을 보던 돌의자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의연하고, 손수 야채를 가꾸던 남새밭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여주의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鳳尾山 자락에 자리를 잡은 물 좋고 쌀이 좋은 여주를 대표하는 사찰로 원효의 꿈에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절)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고,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안 되어 원효대사가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연못에서 나와서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세 가지 종류는 통도사가 중심인 불보사찰과 해인사가 중심인 법보사찰, 송광사가 중심인 승보사찰로 나누며 아미타불을 모신 곳을 극락보전이라 하고 석가불을 모신 곳을 대웅전이라 하며 관세움보살을 모신 곳을 관음전, 자장보살을 모신 곳을 명부전이라고 한다는 신 교수님의 설명과 서원에 당간지주가 있는 곳은 원래 절이 있었다는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신륵사는 영릉을 지키는 원찰로 우리나라의 사찰 중에서 멋진 강가에 위치한 절로는 대표적인 절이라고 할 수 있다. 1473년 정희왕후가 신륵사를 보은사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후기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왕릉 원찰 제도가 폐지되고, 이어 보은사라는 이름도 다시 신륵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물론 산 속에 있는 나웅화상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보재존자석비가 있는 곳까지 둘러보고 다음 장소인 영릉으로 갔다. 영릉은 같은 이름의 두 능이 있는 곳으로 먼저 찾아간 곳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英陵이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헌릉 서쪽 서울 강남의 대모산에 조성하였다가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이곳으로 옮겨서 합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주변의 경관이 너무 멋지고 오래된 소나무가 사방으로 진을 치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장수들이 왕을 호위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일명 달릉이라고도 하는 혼유석이 두 개가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능이 아닌가 한다. 영릉은 건원릉(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진 후 계획대로 안장되었다가 문제가 생겨서 1673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英陵에서 700m 지점에 위치한 효종왕의 능은 부부의 무덤을 동원 상하릉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왕릉 옆에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갔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둘째 부인의 딸로 51세에 낳은 늦둥이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다고 한다. 생가는 원래 숙종13년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종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는 안채뿐이라고 한다. 조선 26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가 8살까지 살았던 곳으로 여주시에서 정비하여 역사적인 명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근처에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감고당이 있다. 감고당은 인헌왕후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왕비에서 물러나 복위할 때까지 거처하였고, 명성황후가 한양으로 가서 왕비로 간택되어 책봉될 때까지 머물렀던 감고당은 원래 덕성여고 자리에 있던 것을 쌍문동으로 옮겼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으로 철거될 위기에서 2006년 여주시가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으로 옮겨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운의 역사를 한 몸에 짊어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비 명성황후. 여우냥이라는 암호를 가지고 일본이 보낸 자객에 의해서 경복궁에서 비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 그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지하에서 오늘도 지켜보며 지금의 우리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오랜만에 신병주 교수와 함께 한 인문학 여행. 여행하기에 딱 좋은 계절. 비록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재미있는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또 다음 기회를 기대해 본다.

    최상민 2017.09.15

  • 생명의 근원 그 시작점인 평창을 다녀와서

    생명의 근원 그 시작점인 평창을 다녀와서

    <생명의 근원 그 시작점인 평창을 다녀와서>                           <여     는    글>   농부들의 애타는 마음을 달래 주려는 듯 장대비가 쏟아져 여행을 나서기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배움도 깨달음도 길위에 있다‘는 말처럼 걸으면서 공부하는 길위의 인문학은 내 나라의 역사와, 문화, 신화를 사랑하는 인문학도들에게는 매력 만점인 인문학여행이다.   이번 ‘인문열차’의 강사이신 홍인희 작가님의 탐방지에 얽힌 형형색색의 인문 지리적이야기들을 어떤 빛깔로 끝없이 풀어 내시어 ‘햇빛에 바래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어 신화’가 돤 이야기들로 우리들을 매료 시킬것에 기대을 하며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여행과 답사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인문열차에 탑승한 우리들은 들뜨고 행복했다.   말갛게 씻겨진 초목들이 그동안의 목마름을 이겨내고 차창 밖으로 한층더 싱그러움을 자랑하며 운무와 함께 고즈녘함과 차분함이 화창함과는 또 다른 매력을 주는 행복한 아침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꽃을 피우며 중간 도착지인 원주로 향했다.   <정자가 아니고 여덟 개의 바위를 가르킨 팔석정>   차에서 내리니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흥정계곡과 흥정산의 운무가 신선세계에 온 듯 우리를 맞이했다. 장마로 인해 거칠게 흐르는 흙탕물을 보니 걱정과 근심이 많은 우리나라 현실만큼이나 어지럽고 제법 세차게 흘러갔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려도 칠판을 대동한 강사님의 강의 열기는 우리들를 고무시켰다.   행정구역상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에 소재한 팔석정은 옛날에는 강릉부에 속해 있었다. 서자로 태어난 양사언은 중앙부처의 벼슬을 포기하고 주로 지방 수령생활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출생신분 때문이기도 했다. 강릉부사로 부임해온 양사언이 영동지방을 두루 살핀 후 자연경지에 탄복하여 영서지방에도 이만한 경치가 없겠냐는 생각에서 영서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던 중 이곳 봉평면의 아담하면서도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정사도 잊은 채 8일을 신선처럼 노닐며 경치를 즐기다가 팔일경이라는 정자를 세우게 하고 1년에 세 번씩 찾아와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그는 임기가 끝나고 고성부사로 전임하게 되자 다시 이곳에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하여 집 한 채를 세운 후 샘이 깊은 우물을 파놓고 ‘봉래고정’이라 하고 주변의 바위 여덟 군대에 ‘봉래’ ‘방장’ ‘영주’ ‘석태투간’ ‘석지청련’ ‘석실한수’ ‘석요도약’ ‘석평위기’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지금은 바위에 글씨들은 세월에 씻겨져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었다.   초서의 대가이기도 한 양사언은 조정에 과중한 부역, 공물. 산림세등을 면제해주도록 간청하기도하며 목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진정한 선정은 선정비가 아니고 목민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선정이 진정한 선정이라는 강사님의 말씀에 동감이 갔다.   양사언은 태산보다도 높은 어머니의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태산가>란 시조를 지어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기도 했다. 강사님께서 들려주신 양사언 모친의 자식 사랑에 대한 인문적 스토리를 들으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의 대한 에미 사랑은 한결같음을 느낀다. 계곡의 우렁찬 물소리의 배웅을 받으며 율곡선생이 잉태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판관대로 향했다.   <고시 9관왕인 율곡선생의 잉태지라고 전해지는 판관대와 율곡과 이항로를 기리는 사당인 봉산서재> 판관대는 조선조 당시 율곡 선생의 부친인 이원수 공의 관직이 수운판관이었던 데서 말미암는 것으로 강릉 오죽헌에서 서기 1536년 음력 12월 26일 탄생하신 율곡선생의 잉태설화가 전해지는 장소이다.   공사중이어서 판관대는 지나치고 우리는 지근거리에 있는 봉산서재로 향했다. 봉산서재는 율곡 선생의 부친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중종 1530년대에 이 고장 판관대에서 사임당 신씨와 4년간 거주하는동안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는데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1906년에 창건한 사당이다.   서재 경내 재실에는 율곡 선생과 조선중기의 정신적 지주였던 화서 이항로 선생의 존영을 모시고 있으며 지방유림과 주민들이 매년 9월 15일 다례제를 봉행하고 있다. 봉선서재에서 나오다가 본 화서 이항로 선생의 어록을 새긴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서 백성을 사랑한 위대한 선생의 정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율곡선생의 출생지는 파주 율곡리라는 설도 있고 평창에 백옥포라는 주장도 있다. 이중 평창은 봉평면에 한때 율곡일가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여기에 아버지 이원수의 벼슬이름을 딴 ‘판관대’가 자리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봉산서재 안마당에서 우중인데도 강사님의 열정이 넘치는 칠판강의는 계속되었다.   어머니 사임당은 율곡에게 위대한 스승이자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에도 나오는 고시9관왕 율곡에게 ‘만능탤런트인 신사임당은 분명 현모였지만 남편인 이원수에게는 양처이기보다 지처였다는 강사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율곡은 극도의 상실감으로 방황한다. 여기에 자식을 걱정시키는 아버지와 상민출신의 계모 권씨와의 심한 불화까지 겪다가 삼년 모친상을 치르고는 금강산에 칩거하며 불경공부에 심취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출사한 뒤 정적들로부터 줄곧 “유학자의 탈을 쓴 불자” 라는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대 성현으로 키우고 아들은 어머니의 팔방미인으로서의 재능과 흠모의 정을 세상에 알린 최상의 콤비 모자였다고 한다. 단비로 인해 축늘어진 밭작물들이 생기를 얻어 싱싱해진 모습을 뒤로 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나머지 탐방의 에너지를 비축하러 이곳 봉평의 별미인 메밀국수을 먹으러 풀내음으로 향했다.   풀내음 입구에 이효석의 작품 ‘메밀꽃 필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성씨 처녀가 인연을 맺었던 물레방앗간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어린시절 자랐던 정겹던 초가집과 아기자기하게 옛것으로 꾸며진 풀내음은 고향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처마 밑에 떨어지는 정겨운 낙숫물 소리을 들으며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인 2018년 동계 올림픽의 주무대인 대관령 알펜시아로 향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 열리는 하늘아래 첫동네 대관령 스키점프센타, 스키역사관과 전망대> 하늘아래 첫 동네인 대관령은 북한의 개마고원 다음으로 높은 고원지역이다. 눈의 나라이자 스키의 천국인 대관령은 우리나라 스키의 발상지이자 역사를 품고 있는 2018년 2월 9일부터 2월 25일까지 열리는 제 23회 동계올림픽이 열릴 메카이다.   이곳 주민들과 국민들의 열정과 바램들이 모이고 보태져 도전 세 번 만에 극적으로 대회 유치에 성공함으로서 우리나라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이어 다섯 번째로 동.하계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세계육성대회 등 지구촌 3대 스포츠이벤트를 개최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되었다. 미국, 영국등 전통적인 스포츠강국들도 이루지 못한 쾌거라고 한다.   우리는 이곳 문화해설사인 김관철 해설사님과 함께 360도로 볼 수 있는 통유리로 된 전망대에서 광활한 초지의 매력에 빠져들어 설명을 들었다. 겨울이면 온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히는 장관을 연출하는데 ‘아시아의 알프스’로 불린다고 했다.   내년 동계올림픽이 역대 올림픽중에서 메달 수가 가장 많고 우리나라는 자국의 잇점을 살려 종합 4위를 목표로 한다고 했다. 이곳은 남한에서 서리가 제일 먼저 내리고 눈이 가장 많이 오는 지역이라고 한다. 해설사님의 해설로 스키점프센타와 스키역사관을 둘러 보았다.   내년 개최를 대비해서 도로가 4차선으로 공사중이었다. 진부에 ktx역이 생기고 아직도 마무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아무 사고없이 치러 지기를 기원한다.  <만명의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흙과 돌이 쌓여 만든 만과봉>   진부면 간평리 월정거리가 있는 곳에 만과봉이라로 하는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다. 이곳에는 큰 만과봉과 작은 만과봉이 있는데 작은 만과봉은 길옆 논에 위치해 있고 큰 만과봉은 찻길 건너편에 있다.   만과봉으로 들어서는 밭길은 온통 대파로 물결을 이룬 모습이 장관이었다. 만과봉은 세조와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세조가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보고 고질적인 피부병를 고치게 되자 세조는 이곳을 떠나기에 앞서 월정거리에 있던 조그마한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은 단종을 죽인 세조임금의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모두 숨어버렸지만 초학자들과 강릉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물밀 듯 몰려와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이 때 응시한 사람은 전부 벼슬을 주었다고 하며 과거에 응시을 위해 도포 소매에 흙 한줌과 돌 하나씩을 갖고 오도록 하여 이것을 쌓은 것이 봉우리가 되었고 이 때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만명이었다 하여 만과봉이라고 전래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 합격은 출세의 지름길이었고 가문의 영광이며 목숨과도 같다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았다. 우리가 서서 강의를 듣는 이 장소에서 와글와글 과거시험을 보는 유생들의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전쟁과 크게 다를바 가 없는것 같다.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신화는 그 지역의 지명에 다 담겨져 있는것 같다. 만과봉을 뒤로 하고 이번 탐방의 주제에 맞는 생명의 근원 그 시작점인 오대산 우통수가 흘러 내려와 만든 월정사 금강연으로 향했다.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월정사 금강교밑에 우통수를 품은 금강연>   월정사 금강연으로 가는 길은 온통 비로 목욕하고 깨끗해진 수목들이 울창한 모습들로 우리를 맞이했다. 탐방의 주제에 맞는 생명의 근원 그 시작점인 우통수 물을 품은 금강연 계곡의 우렁찬 소리를 들으며 강사님의 노천 칠판 강의가 시작되었다.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수로 강원도 오대산 해발 1200m 쯤에 있는 서대 염불암에 위치한다. 그곳까지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우통수가 고단하게 흘러서 모인 금강연을 보고 만족해야 했다.   오대산 염불암에서 시작되는 우통수는 남한강 물줄기가 남류하며 평창강, 영월 주천강과 어울리고 충북 단양을 지나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충주 달천강, 원주 섬강 등을 끌어 안은 뒤 양평 양수리에 이른다. 두물머리에서 금강산 단발령으로부터 흘러내린 북한강과 새로이 합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강의 모습을 완성하고 서울 한복판과 김포평야를 거쳐 다시 임진강을 만나 서해로 빠져 나간다. 이처럼 천리를 훌쩍 넘는 기나긴 대장정의 물길이기에 굽이굽이마다 수많은 사연과 전설도 낳았다.   사연 많은 강들은 정선에서 떼 한바닥 타고 가서 넘겨주면 정선, 영월군수의 한달치 봉급보다 많은 돈을 받았다. 보통 뗏꾼들이 서울에 한번 다녀오면 그 돈으로 황소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서 “떼돈 번다” 는 말이 생겨났고 한다. 충주 달천강은 물 맛이 뛰어나 ‘단 냇물’ 이 ‘달래물로’다시 달천으로 변하였는데 조선의 물가운데는 충주 달천물이 제일이요, 한강의 우통수가 둘째이며 속리산 삼타수가 셋째라고했다.   오랫동안 우통수가 지켜온 한강의 발원지로서의 상징적 위치도 새로운 계측기술 등 문명의 흐름에 따라 힘을 잃게 되었다. 발원지가 되려면 물길을 누구나 알고 물길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며 최장거리여야만 한다고 한다. 인공위성이 찍은 지도를 근거로 측정한 결과 태백산 준령인 해발 1418m의 금대봉 기슭의 자리한 검룡소의 물줄기가 우통수보다 32km정도 더 길다는 점이 밝혀져 ,1987년 국립지리원에 의해 공식 인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검룡소가 새로운 명소로 각광을 받게 되었지만 이 또한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발원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나 공식정 규정이 있지 않을 뿐아니라 곡선이 아닌 직선거리로는 여전히 우통수가 바다에서 멀다는 주장에서부터 단순한 지리적 관점보다는 그 역사성, 문화성, 상징성등이 더욱 중요하다는 등의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논쟁자체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국토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지리적 사실관계의 규명이 필요한 만큼이나 우리민족의 역사와 정서에 자리잡고 있는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고 그 반대의 논리도 인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사님은 그 정도의 여유와 아량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말씀하셨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을 걷지 못하고 가는 아쉬움을 뒤로 한체 한조각 붉은 마음으로 임을 그리다 세상들 등진 명기 청심이를 기린 청심대로 향했다.   <절개을 지킨 명기 ‘청심’의 숭고한 사랑을 기리는 청심대>   청심대는 1418년 조선 태종 때 강릉대도호부사 박양수의 부실 청심이 돌연 순절 산화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청심의 정절을 기리고자 관내유지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정자를 신축하여 청심대라 명명하였다.   마평마을 높지 않은 산자락위에 청심대가 있고 아래로는 오대천이 펼쳐져있다. 지금이야 아스팔트 도로와 시멘트 교량, 식당 등으로 둘러 쌓여 정취가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오랜 옛날에는 선계를 방불케하는 별천지였다고 한다. 단원 김홍도가 정조 임금의 어명을 받고 임금께서 친히 가볼 수 없으니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진양 내금강과 외금강 회양, 평창과 강릉등 금강산 접경을 사실적으로 두루 그린 금강사군첩 첫 페이지에 그린 청심대를 보면 그 아름다움이 대단한 것만은 틀림 없는 것같다.   박양수는 ‘기회를 보아 부르겠다며’ 한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심이는 강릉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그곳에 눌러 살게 되고 매일 산자락에 올라 한양쪽을 바라 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계절이 수차례 바뀌어도 아무런 기별이 없자 해가 지나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가던 어느날 가녀린 한 여인이 높다란 벼랑에 섰다. 떠나간 정인을 그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기어이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일편단심의 연정을 마무리한 비극적인 현장이다.   청심대 옆에는 주인공이 두 남녀가 마주보고 있는 듯 두 갈래의 높다란 ‘예기암’이 솟아 있는데 주위을 9번 돌며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속설이 내려온다. 청심의 정절이 수백년 동안 전승되는 가운데 500여년이 지나 지역유지 107명이 성금을 걷어 ‘청심대’와 청심사당을 중건하고 해마다 제를 올렸다. 그러나 2001년 2월 사당내 청심의 초상화가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한 이후 마을 남자 10여명이 잇따라 죽었고 어렵사리 이를 복원하고야 흉사가 잦아들었고 한다.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우리일행은 한 목소리로 그 때의 청심이의 절절한 마음으로 청심아! 하며 큰소리로 불렀다. 통설로 여자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남자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실감으로 느껴졌다.                        <맺    음    말>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며 내 남은 생물학적인 삶을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해 본 시간이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수백년전의 사람들의 자취를 따라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어 감사했다.   탐방하는 가운데 수많은 사연과 의미를 새겨 보면서 인문적 울림에 주목하며 삶이라는 긴여정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진정 가치 있는 삶인지를 숙고해 본다. 다른 사람의 지식으로 지식인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지혜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지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무지와 불확실성과 한계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탐방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운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항상 깨어 있는 인격으로 살아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번 탐방의 강사이신 홍인희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강원도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시고 수도꼭지처럼 해박한 지식과 열정이 줄줄 흐르시는 교수님께 감사와 찬사를 드립니다. 우중인데도 칠판에 한문을 쓰시면서 열강하시는 모습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항상 건강하셔서 못다한 산하에 인문학으로 형형색색 옷입히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십시요.   세월에 인연따라 만나서 함께 동행한 모든 선생님들 함께 길동무하며 열공하면서 행복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셔서 다음에 또 길위에서 만나면 좋겠습니다. 우중에도 진행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신 안우상 팀장님이하 쏙쏙식구들 감사했습니다.   ‘명품 인문열차’가 문화발전소로 영원하기를 빌며...

    김옥란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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