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사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자료의 입수와 조직,
서비스에 바쁜 기능인으로서의 모습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삶과 일에 관련된 의문에 응답하는
‘만능 조언가’로서의 모습인가? 후자의 모습은
주제전문사서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이번 호에서는
주제전문사서 제도가 일찍 발달한 나라인 독일로
여행을 떠나보자.
독일하면 맥주와 소시지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준다.
그런데 근대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쯔(Gottfried
Wilhelm von Leibniz)가 독일의 근대 도서관학을
창시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라이프니쯔의 도서관 학자로서의
생애와 그의 도서관 사상에 대해 다루어 보았다.
근대 학문과 정신의 개척자
라이프니쯔는 인문ㆍ사회ㆍ자연ㆍ공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연구를 하고
여러 분야에서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 법학자, 수학자,
자연과학자, 신학자, 언어학자, 역사가, 외교관,
정치가, 기사(技師) 등의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법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학 분야에서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법을 창시하였으며, 해석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위상(位相) 해석도 창시하였다.
또한 그는 ‘지구 선사(先史)’를 비롯한 역사를
연구하기도 하고, 광산의 치수(治水)나 그에
따른 풍차를 설계하고 건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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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wikipedia.org/
wiki/Leibn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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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용어로 말해 ‘학제
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 ‘통섭(consilience)’1)의
대가라고 할까? 다시 말해, 그는 한 사람의
학자로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자 근대 학문과
정신의 개척자였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의
가브리엘 노데(Gabriel Naud?의 도서관 사상을
사숙하고 수용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도서관을
관리하고 편목과 분류법을 개발하는 등 사서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그를 일러 ‘독일의
근대 도서관학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프니쯔는 1646년에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였는데,
그가 6세 때 별세했다. 어린 라이프니쯔는
어린이 놀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책에
흥미를 보였다. 그가 8세에 이르자 그의 어머니
카타리나는 그가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고전이나 철학 책을 읽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를 공부하여
12세 무렵에는 라틴어에 통달하게 되었다.
13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스콜라
철학에 큰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라이프니쯔는 1661년(15세)에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였다. 가정 사정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철학에의 관심은
지대하였는데, 그는 고대 철학이나 스콜라
철학을 넘어 근대의 새로운 철학에도 눈길을
돌린다. 1663년(1712세)에 학사 논문, 「개체의
원리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구(Disputatio Metaphysica
de Principio Individui)」를 썼다.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2)
그는 1666년(20세)에 「결합법론(Dissertatio
de Arte Combinatoria)」이라는 논문을 쓰고,
이어 같은 해에 학위 과정을 끝내고 라이프치히대학에
법학박사 학위 청구논문, 「법률적으로 분규를
거듭한 판례에 대하여」를 제출하였으나 너무
젊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분한 눈물을 삼킨
그는 라이프치히대학과 결별하고 이듬해인
1667년에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Altdorf)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이 대학이
권유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양하고, 그 곳에서
연금술사의 결사(Rosicrucian Society)에 들어가
화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이러한 개인적 역정을 보면
그는 지독한 지식욕과 왕성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반항아이자 꿈꾸는 사람이었던 그는
중세 사회 및 보수적 대학의 닫힌 지식체계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분야와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연금술사의 소개로 마인츠공국의 정치가 보이네부르크(J.
C. Boineburg) 남작과 알게 되어 마인츠공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그는 남작의 요청으로
보이네부르크 장서의 주제별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로써 그는 도서관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개별 과학을 포괄하는 ‘보편학’을
정립하기 위한 학문 방법론으로 도서 목록의
작성과 분류법을 고안하였다.
도서 목록의 작성과 분류법
고안
그는 고대로부터의 기간문헌(旣刊文獻)에
대해서 주제별 목록을 만들고, 문헌마다 초록을
붙였다. 그리고 연대순으로 문헌을 배열하여
지식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편집된 목록은 백과사전과 같은 것이 되었다.
그는 당시까지 인류가 집서한 모든 지식을
통합하고 공통 언어로 기본 개념을 기호화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배열하였다. 그의 구상은
기호화한 여러 개념을 결합시켜 복잡한 고차원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3)
그는 1672년(26세)에 마인츠공국의
외교사절로서 파리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그는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힘쓰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파리와 런던의 저명한 수학자ㆍ물리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연과학 연구도 추진하였다. 1674년에는
계산기까지 발명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그의 후원자였던 보이네부르크와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별세하였다.
1676년에 그는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 후작의 초청 편지를 받고 북독일의
소도시 하노버(Hannover)로 옮겨간다. 그는
이곳을 주된 근거지로 삼아 임종까지 40여
년 간 학문 활동과 도서관 관리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는 현군(賢君)이자 그의 그릇과 인품을
십분 인정해 준 프리드리히 후작의 학문상
고문관 겸 문고장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3년 뒤 1679년에 프리드리히
후작은 별세하고, 그 뒤를 이은 아우구스트(Ernst
August)는 학문에 관심이 없어 라이프니쯔와
불화를 겪었다. 학술 작업과 출판에 열중하던
라이프니쯔는 1687년에 연구 여행의 길에 올라
뮌헨,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빈 등을
거쳐 1689년에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자료를 수집한 그는 1690년에
하노버로 돌아왔다. 그리고 1691년(45세)에
하노버家의 위촉을 받고 볼펜뷔텔(Wolfenb웪tel)
도서관의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볼펜뷔텔
도서관은 30년 전쟁의 전화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인쇄본 6만 권, 사본 7백여 권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루이 왕실문고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17세기 최고 수준의 도서관이었다. 그는 도서관
재정이 곤란할 때 관사의 빈터에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하거나 문헌을 복사(당시는 書寫)하여
유가 배포하여 도서관 운영과 신간 도서 구입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구교와 신교의 양대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1700년에는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이처럼 왕성한
학문 활동과 도서관 운영을 통하여 근대를
열기 위해 애를 썼던 라이프니쯔였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하였다.4)
1705년(59세)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프로이센의 소피 샤를롯테(Sophie
Charlotte) 왕비가 급서하자, 그는 실의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지내면서도 임종을 앞두고
『단자론』의 속고를 완성하였다. 독신의 노학자였던
라이프니쯔는 1716년에 향년 70세로 자택에서
외롭게 임종을 맞이하였다.
라이프니쯔의 도서관 사상은
만인을 위한 근대 도서관의 정립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즉, 그는 도서관은 민중을 위하여
보편적인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보편성을 갖는 것이라고 제창하였다.
또한 도서관은 ‘인간을 위한 백과사전’,
‘모든 과학의 보고(寶庫)’, ‘인류 혼의
보고’, ‘모든 시대의 위인들과의 대화 장소’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도서관은 특수계급의
소유에서 민중의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5)
이는 노데의 도서관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그는 모든 지식을 10개
분야로 분류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신학 ②법학
③의학 ④철학 ⑤수학 ⑥물리학 ⑦언어학 및
문학 ⑧민중사 ⑨문헌학 및 서지학 ⑩총서
및 잡지이다. 그는 도서관은 학술문화의 센터가
되어야 한다고 주창하고, 세계 각국에 과학학사원을
설치할 것을 제창하였다. 또한 나라마다 백과사전을
편집 출판하여 국민에게 제공하고, 그 편집에
소요된 자료를 기초로 도서관을 설치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도서관망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쯔는 치열한 탐구욕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고대와 중세의 문헌을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를 열기 위한 도서관학 원리를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백과전서 지식인이자 천재였으며, 노데의 도서관
사상을 수용하고 독일 근대 도서관학의 기틀을
다진 선구적 도서관인이었다. 또한 40년간
도서관 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의 분류
이론에 기초한 분류표를 작성하고, 자료 수집과
목록 등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학술 연구에 있어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지한
학자로서, 그의 학술도서관에 관한 구상은
훗날 괴팅겐(G쉞tingen)대학의 도서관에서
구현되었다.
라이프니쯔의 학문적 작업과
철학, 그리고 그의 위대한 도서관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러 갈래의 학문이 소통하는 길을 보여 주고,
문헌정보학과 사서직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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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ㆍ장대익
옮김. 『통섭』(사이언스북스, 2005). 2) http://www.fuchu.or.jp/~d-logic/en/gwl.html
[2007. 10. 18 인용]. 3)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한국디지틀도서관포럼,
2004), 74쪽. 4) 위의 책, 80쪽. 5) 정필모ㆍ오동근, 『도서관문화사』(구미무역,
1991),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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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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