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공공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란
남녀노소를 막론한 대중(大衆)을 가리킨다.
공공도서관을 아무나 자유롭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근대 이후 성립된
‘위대한’ 개념이다. 혹자는 이것이 무슨
위대한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고대와
중세 시기 동안 민중(民衆)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었고, 때문에 책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서양의 중세 수도원이나 대학의 도서관에 소장된
책은 양피지(羊皮紙), 독피지(犢皮紙)와 같이
귀한 재료로 만들었고,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일일이 필사해야
하는 등 그 제작에 많은 수고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 도서관의 책들은 사슬로
서가에 묶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현대인이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거닐면서 책을 살펴보거나, 빼꼭히
꽂혀 있는 장서 속에서 찾던 책이나 자신에게
맞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serendipity)’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책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근대 도서관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이
사슬에서 풀려나 민중과 만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무래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그 이전까지
소수 특권 계층(왕, 귀족, 성직자 등)의 전유물이었던
책들이 왕실문고, 귀족문고, 수도원문고 등에서
풀려나 민중에게 개방되었다.
그런데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162년 전에 도서관은 특권 계급의 소유물이
아니고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저서를 펴낸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근대
도서관 사상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가브리엘
노데(Gabriel Naudé)이며, 그 책은 1627년에
나온 『도서관 설립을 위한 의견서(Advis Pour
Dresser Une Bibliothéque: PresentéàMonseigneur
le Président de Mesme)』이다.
책을 해방시켜라! - 노데와
마자랭의 만남
노데는 1600년에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파두아(Padua)에서
의학을 전공하였고, 파두아에서는 철학자 Cesare
Cremonini의 강의를 들었다. 의사의 길을 가던
노데는 1622년에 그의 스승 René Moreau의 사망으로
면학의 길을 중단하고 파리로 귀환하여 Henri
de Mesme 문고의 사서가 되었다. 재직 4년
동안 이 문고를 당시(17세기 초) 가장 저명한
도서관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도서관의 본질을 모색한 결과, 1627년에
『도서관 설립을 위한 의견서』라는 근대 도서관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저서를 생산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로 건너가
그곳에서 10여 년을 지내며 두 개의 문고에
관여하였다. 1629년에 로마에서 Bagni 추기경의
문고를 관리하는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Bagni
추기경이 1641년에 별세하자 Barberini 추기경의
사서가 되었다. 1642년, 노데는 루이 13세의
재상인 리셀리외(Richelieu, 1585~1642)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리셀리외 재상은 사망하고, 이어
재상이 된 마자랭(Jules Mazarin, 1602~1661)의
문고 경영을 맡아보게 되었다.
인생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신명이 날 것이다. 마자랭과
노데는 여러 모로 의기투합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도서관의 문을 소수의 특권층만이 아닌
보다 많은 대중에게 열었다는 점에서, 근대
도서관 사상을 발아(發芽)시킨 업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마자랭은 재상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643년에 자신의 저택에 있는 서재와 그동안
수집해 둔 책들을 ‘연구 목적을 위해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슬로건 아래, 파리의
지식층에게 모두 공개하였다.1) 즉,
마자랭은 이전까지 도서관에 갇혀 있던 책들을
해방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위대한 사서가 없으면 위대한
도서관은 없다”
이후 10년 동안 마자랭 재상의
문고장으로서 노데는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도서를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그 결과
귀중한 장서로 구성된 ‘마자랭도서관(Bibliothéque
Mazarine)’을 만들 수 있었다. 1642년에 노데가
문고장으로 취임할 당시 문고의 장서는 5천
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그가 영국,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매우
적극적으로 자료 수집에 공을 들인 결과, 1650년에는
장서가 4만여 권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써
마자랭도서관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왕립도서관과
비교될 만한 호화로운 도서관으로 성장하였다.
도서관 장서를 구축하기 위한
노데의 수집벽은 대단하여, 그는 여행할 때마다
고물상이나 폐지상을 뒤지기도 하고, 때로는
‘책 사냥꾼’이라는 악명을 감수하며 강압적인
수단을 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집한 책들은
모두 도서관의 장서에 포함되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비록 그가 때때로
무리를 하면서 장서를 수집하였지만, 그는
책은 개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노데는 수집한 책들을 일일이
모로코 제본(모로코 특산의 유피)으로 호화장정을
해서 책마다 마자랭 가문의 장서표로 황금
문장을 찍어 도서의 품격을 한층 높였다. 노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도서관이 지속적으로 더욱
많은 책을 보유할 수 있도록 원형 회랑과 벽을
둘러싼 서가 등을 고안해 도서관 설립을 위한
도면까지 설계하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이러한 만능에 가까운 다재다능함보다는, 도서관은
반드시 공공에게 개방하여야 하고, 이용자는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서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에 그를 기려, “위대한 사서가 없으면
위대한 도서관은 없다”라는 문구가 생겨난
것이다.2)
마자랭의 장서가 프롱드의
난(1648~1653) 때 산실되자, 노데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Queen Christina)의 초대를
받아 스톡홀름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자랭이 흩어진
장서를 모아 다시 도서관을 구성하자고 호소하자
노데는 즉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여행 중이던 1653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아브빌(Abbeville)에서 별세하였다.
중세의 암흑에 빛을 던지고
근대 도서관 사상을 예비한 노데
가상디(Pierre Gassendi)를
비롯한 프랑스의 여러 자유사상가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노데는 단순한 책벌레가 아니었다. 노데는
『도서관 설립을 위한 의견서』 외에 여러
저작을 생산하였는데, 그의 책들은 그를 학자
및 해학가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비평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의 저서, 『도서관 설립을
위한 의견서』는 사서직에 대한 건실하고 자유로운
견해로 가득 차 있으며 도서관학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저작으로 간주된다.3) 이 책은
노데가 27세 때 쓴 것으로 9장 100여 페이지
분량의 논문인데, 근대 도서관의 목적, 선서(選書)ㆍ수집
방법, 도서관 건축의 조건, 배가, 색인, 목록
등에 걸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가히
근대 도서관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입론(立論)은 민중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도서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다리는 일이
없이 입관할 수 있게 하고, 휴관일에도 관장의
소개장으로 열람할 수 있게 하며, 특별한 사람에게는
3주간을 한도로 관외 대출도 고려한 것 등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는 매우 이례적인(나아가
혁명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용을 쉽게
하기 위해서 주제별 목록을 알파벳순의 저자별
목록으로 정비하는 것까지 일찍이 착안하고
있다.4) 그는 “분류가 안된 도서관은 조직이
안된 군중과 같고, 훈련이 안된 군대와 다르지
않다”라고 비유하면서 모든 주제를 12분야로
구분하는 독창적인 분류법을 개발하였다.5)
당시에는 책이란 매우 귀중한 것이어서 서가에
사슬로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책의 사슬은
일부 도서관에서는 17세기까지 계속 존재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18세기 말까지도 버텼다.6)
노데가 살았던 시대에는 갈릴레오(Galileo
Galilei), 데카르트(René Descartes), 홉스(Thomas
Hobbes), 케플러(Johannes Kepler), 베이컨(Francis
Bacon) 등과 같이 중세의 암흑을 타파하는
새로운 과학과 철학을 제시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나아가는
지식인의 전선에 노데 또한 서 있었다. 청년
시절 의학을 전공한 노데는 의사가 되지 않고
사서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근대 도서관 사상의
문을 여는 도서관학자로서 역사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도서관 사상은 “책은
만인의 것이며, 장서는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고
분류되어야 하며, 도서관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도서관에는 도서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학식이 있는 우수한 사서를 채용하여 관리하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도서관 사상을 실현하는
군주 또는 정치가는 민중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7)
이러한 도서관 사상은 1931년에 나온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을 연상하게 하고, 근ㆍ현대의
도서관 사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제시한 것은 실로 중세의
암흑에 빛을 던지며 근대를 예비한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노데의 도서관 사상은 분명
시대를 앞선 것이었으며, 당시로서는 혁명적
사고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후 노데의 사상은
듀리(John Dury) 등 후대의 많은 도서관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러한 노데의 도서관 사상은
오늘날에도 ‘만인을 위한 도서관’을 가꾸고
‘사서 정신’을 살리며, 현대 도서관의 기본을
확립하고 나아가 미래 도서관을 설계하는 데
여전히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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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정태,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한길사, 2006, 82쪽. 2) 위의
책, 85쪽. 3)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Gabriel_Naud%C3%A9
[Cited 2007. 9. 18]. 4)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 한국디지틀도서관포럼,
2004, 62쪽. 5) 최정태, 앞의 책, 84쪽.
6) 헨리 페트로스키, 『서가에 꽂힌 책』,
정영목 역, 지호, 2001, 122쪽. 7) 박상균,
앞의 책, 64~65쪽; 최정태, 앞의 책, 8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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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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