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인물탐구  

 

  필자는 지난해부터 국내외 도서관 인물의 발자취와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동시대 한국의 대표적 학자인 김정근의 일생과 사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는 우리 도서관계와 문헌정보학계에서 매우 강렬하고 치열한 이미지와 논조로 현장을 개척하고 학문을 전개한 도서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여 년간 그가 주창하고 전개한 ‘한국적 문헌정보학’이라는 화두는 우리 시대 도서관인과 문헌정보학도에게 서슬이 푸른 문제의식으로 다가왔으며, 또한 그가 최근에 전개하는 독서치료의 세계는 우리 한국인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는 데 적절히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정근의 도서관 사상은 그 간에 필자가 소개한 한국 근ㆍ현대 도서관 인물들의 사상을 이 시대에서 반추하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인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멘토와 함께 성장한 어린시절

  김정근은 1939년 경주 불국사 근처의 평동(坪洞)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냈다. 외조부 김범부(金凡父)가 민의원(지금의 국회의원)을 지낸 뒤 경주에 계림대학(이후 영남대학교와 통합됨)을 설립하여 학장으로 있을 때부터 외가에서 자라며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특히 외조부와 외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범부(본명 金鼎卨)는 동양철학자이며 한학자이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이다. 김범부는 “하늘 아래 가장 밝은 머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으며, 저서로는 『화랑외사(花郞外史)』1)가 있다. 1950년대 초 김정근은 외갓집 사랑방에서 외조부와 외숙 김두홍(金斗弘)2)의 대화를 자주 듣곤 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고담준론은 어린 김정근에게 지적인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외가가 서울로 옮기면서 그 역시 서울에서 경복고등학교를 다녔다. 1958년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으며 당시 그의 꿈은 평론가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필자가 소개하는 여러 국내외 도서관 사상가들처럼 그도 처음에는 도서관학 분야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만 당시 인기 학과였던 영문학과에 다니면서도 무엇인가 현실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과학에 대한 욕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재학 당시 육군 통역장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1962년부터 1966년까지 군 복무를 하였다. 군 복무 중 파견된 부산에서 만기 전역을 하였다. 전역 당시 28세였던 그는 생계를 위해 부산의 한 여자고등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하여 한 한기 동안 일하였다. 이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현 부인, 이유하천3)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서울의 진명여자고등학교로 옮겨 세 학기 동안 영어 교사 생활을 하고, 이 시기에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하였다.

 

도서관학과 기록학에 심취한 12년간의 북미 시절

  김정근이 도서관학 분야와 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그의 멘토 김두홍에게서 왔다. 1960년대 후반 김두홍은 당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소장이자 성균관대학교 부설 한국사서교육원 강사였다. 그는 김정근을 성균관대학교 도서관학과 조교로 추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당시 교수진이었던 이춘희, 천혜봉 등의 영향을 받으며 문헌정보학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이춘희 교수의 곁에서 학문의 길을 물었으며, 1971년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떠날 때에는 도서관학 공부를 2~3년 동안 하고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1984년까지 12년 반 동안 북미에서 ‘학문적 오디세이’를 감행하였다.  

  처음 유학을 간 곳은 미국 일리노이 주 도미니칸 대학(Dominican University, 당시 Rosary College)이었다. 이곳에서 도서관학 석사를 취득하자, 당시 북미의 여러 명문대에서 박사과정 입학 허락을 받았으며 그는 귀국을 단념한다. 학문이라는 큰 세계를 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에서 문헌정보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또다시 기록학(Archival Studies)을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건너갔다. 1977년부터 토론토대학교(University of Toronto)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방대한 교회 기록물과 면담 자료를 기초로 하여 1983년에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온타리오 주의 소수민족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7년간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북미에서 도서관학과 기록학 분야에 심취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한편으로 도서관 및 기록관을 두루 찾아다니고 도서관장 일을 보기도 하면서 현장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그는 역설적으로 서구 유학 생활을 통하여 제3세계의 현실을 자각하고 관련 문헌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귀국 후 그가 전개한 ‘제3세계 도서관학’, ‘한국적 문헌정보학’ 건설 작업에 맹아가 되었다.

 

한국적 문헌정보학의 개척자로 나서다

  ‘북미 오디세이’를 마치고 그는 1984년 부산대학교에 문헌정보학과(당시 도서관학과)를 창설하고 교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용광로와 같은 사회 변혁의 터널을 통과하던 때였다. 귀국하여 국내의 도서관 현장과 문헌정보학 강단을 접하던 그는 이내 현장과 강단의 괴리에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 “도서관 현장은 낙후하여 처연히 땅 위에 누워 있는데, 강단의 언어는 첨단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그에게 학문적 화두로 점차 구체화되었고, 이후 학계의 수입 언어와 도서관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 그에게 일생의 과제가 되었다. 또한 필자가 소개한 엄대섭, 이봉순 등 한국의 도서관 사상가들과도 문제의식을 공유한 김정근은 우리나라 도서관 현장을 개척하는 것이 한국 도서관학의 본분임을 줄곧 강조하였다. 이처럼 학문적 무기력함, 현장에 대한 안타까움, 분노 등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1980년대의 불같은 대학 캠퍼스와 학생들로부터 어떠한 희망과 해법을 찾게 된다. ‘부산대학교도서관 개혁운동’이 터진 것이다.

  1987년부터 1년 반 이상 전개된 부산대학교도서관 개혁운동은 한국 도서관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변혁 지향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청년학도의 패기와 지적 성실성으로 대학도서관의 고질적인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에 대한 대안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였다. 이후 이 운동은 전남대, 경북대, 전북대 등으로 들불처럼 파급되었다. 김정근은 학생들의 실사구시적 언어로부터 마치 계시처럼 학문적 길을 개척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서구 지식의 ‘수입상’이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한국적 문헌정보학의 개척자’로서의 여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그가 내놓은 일련의 역작들, 『한국의 대학도서관 무엇이 문제인가』, 『학술 연구에서 글쓰기의 혁신은 가능한가』, 『디지털도서관: 꿈인가, 광기인가, 현실인가』, 『학술 연구에서 문화기술법이란 무엇인가』, 『우리 문헌정보학의 길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한국 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 어디까지 와 있는가』, 『독서치료 사례 연구』 등은 이러한 학문적 화두를 가지고 꾸준히 실험하고 실천하며 동료 및 제자들과 공동 작업하여 제시한 학문적 담론이자 성과물이다. 그가 생산한 서적들은 현장의 낙후성과 전근대성,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외면하거나 방기한 관련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이러한 개척기 현장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학문적 과제를 제시하기도 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의 글은 성난 사자가 포효하는 논조로 현장 문제의 정수를 건드리고 있기에 특히 현장의 사서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또한 그의 책들은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에서처럼 사례 보고서, 참여 관찰기, 역사서, 풍자시, 수필, 서지 등의 다양한 면모를 가진다. 그의 저작들은 도서관 현장과 문헌정보학 분야뿐만 아니라 여타 사회과학에서도 쟁점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기본을 다지는 방향으로 지평을 열었으며, 학술원 및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교수신문>의 ‘올해의 책’ 등으로 선정되는 등 학문적 저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김정근의 도서관 사상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논제의 혁신’이다. 이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논제를 건져 올린다”는 것이다. 즉, 서구 추수적인 학문 행태를 지양하고, 우리의 현 단계를 주목하고 가장 기본적이고 시급한 것부터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식 연구 방법’이다. 이는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논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한 다양한 연구 방법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우리 현실의 파노라마를 깊숙한 곳에서부터 드러내고 이에 대한 적합한 처방을 내리려면 다양한 연구 방법을 동원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현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질적 연구 방법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식 제시 기술’이다. 논문을 쓰면서 내용의 맥락과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문체를 개발하고 활용한다는 것이다.

  2000년 이후 그는 ‘독서치료’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예전부터 한국인이 가진 마음의 상처에 주목했던 그는 안식년 이후 이 분야의 독서를 심화하면서 이를 도서관 현장의 프로그램으로 접목하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그는 도서관과 문헌정보학의 블루오션으로 ‘체험적 독서치료’라는 전망을 사서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김정근은 필자가 도서관 인물로 소개한 바 있는 미국의 마이클 고먼처럼 우리 시대에서 도서관과 문헌정보학의 기본에 충실하며, 그러한 차원의 난제를 학문적 화두로 삼아 치열하게 고민하는 동시에 실천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사상가이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현 시대 한국 사회에서의 도서관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고, 급변하는 정보환경에서도 기본기를 다지고 미래를 열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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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백과(http://ko.wikipedia.org/wiki/김범부) 참조. (Cited 2007.8.12)
2) 김두홍은 1950년대에 부산에서 교사, 장학사로서 활동하였지만 이후 도서관계에 몸담고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KORSTIC)의 초대 소장을 지냈으며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의 교수 및 도서관장, 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장을
    역임하였다.
3) 이유하천은 1949년생으로 1971년에 김정근과 결혼하였으며, 장편소설 『조용히 쓸어라 대지는 깊이 잠들지 않는다』,
    문화비평집 『나는 제사가 싫다』 등 여러 소설과 비평집을 내놓은 작가이다.
    “도서관 현장은 낙후하여 처연히 땅 위에 누워 있는데, 강단의 언어는 첨단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그에게 학문적 화두로 점차 구체화되었고, 이후 학계의 수입 언어와 도서관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 그에게 일생의
    과제가 되었다.

    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