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세계의 도서관 사상가들
중에는 각국의 도서관과 도서관학을 개척하고
주춧돌을 놓은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다. 그러한
인물들로는 인도의 랑가나단, 미국의 멜빌
듀이, 한국의 박봉석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서구의 저명한 도서관 사상가들이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지는 반면,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도서관 사상가들은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번 호에서는 랑가나단,
멜빌 듀이, 박봉석 등과 같은 반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도서관 인물 두딩요(杜定友)를
소개한다.
두딩요는 중국 근현대 도서관
사업의 창시자이다. 그는 민중에게 닫혀져
있던 도서관의 문을 열고 그 기초를 닦았으며,
도서관학과를 설립하고 중국도서관협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분류법을 연구ㆍ개발하고
근대적 지방 문헌 이론을 개척하였으며, 일생을
바쳐 중국의 도서관 발전에 힘썼다. 특히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도서관학 이론과 연구방법을
고찰하여 중국에 적합한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꾸준히
저술 작업을 계속하여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생산하였다.
필리핀에서 미국 도서관학을
수학
두딩요는 1898년 상해(上海)에서
사진관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광동성(廣東省) 남해현이며, 필명은 정석(丁石)이다.
9세 때 사숙(私熟)에 다니면서 글을 깨우쳤고,
11세 때 학당에 진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세 번이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14세에 상해 전문공업학교(현재 상해 교통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상해 전문공업학교
부속 중ㆍ고등학교는 새로운 도서관
설립을 계획하고 인재를 양성할 계획이었다.
두딩요는 학교의 추천으로 필리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1)
그는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미국 도서관학을 공부하게 된다.
한편으로 다른 화교들과 함께 각종 애국활동에도
참가하는 등 유학 생활을 통해서 그는 모국의
도서관 사업을 위해 헌신할 기초 실력을 연마하였다.
그는 남다른 열정으로 면학하여 2년 만에 전공과정을
마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필자가 소개하는 여러 도서관
사상가들처럼 두딩요에게도 그의 인생에 등불을
밝혀준 멘토가 있었다. 그 사람은 유학 시절
필리핀대학의 도서관학 주임 교수였던 메리
포크(Mary Polk)이다. 메리 포크는 필리핀대학의
첫 번째 사서였으며, 또한 동 대학에 도서관학과를
창설한 인물이다. 그녀는 필리핀의 도서관
사업을 위해 40여 년간 종사하였으며 그녀를
기리는 상도 존재한다.2) 그녀는 두딩요를
매우 신임하여 그를 학자로 키우기 위해 엄하게
가르쳤다. 두딩요는 일생동안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생산하였고, 특히 중국 도서관학의
기틀을 제공한 중요한 저작도 여러 편 내놓았는데,
이러한 역량을 다진 계기는 메리 포크의 엄격한
교육에 기인한 듯하다. 두딩요는 중국에 돌아온
뒤에도 동료들과 제자들에게 포크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도서관 혼(魂)을 가진 실천가이자
이론가
두딩요는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뒤 일생 동안 중국의 도서관운동과
도서관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1922년에 광동성에
사서교육을 위한 도서관 관리원 양성소를 건립하였고,
이듬 해 상해 복단대학에서 도서관 주임으로
근무했다. 1924년에 상해도서관협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전국 규모의 협회인 중화도서관협회의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협회의
집행부 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에는
상해의 국민대학에 도서관학과를 설립하여,
중국의 도서관인을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다.
당시 중국은 근대 도서관의
개척기에 있었다. 도서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론적 지식이나 실무 경험이 없었고,
국민들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 심지어는 도서관의 입관을 거절당하기도
하였으며 책을 대출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두딩요는 도서관을 알리기 위해
강연 활동, 도서관인 양성소 및 도서관학과
창설, 도서관협회 기금 모금, 도서관 잡지
창간 등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두딩요의
활동을 더듬어 보면, 우리나라에서 해방 이후
도서관학교, 도서관협회, 서지학회 등을 창설하여
불철주야 맹렬하게 활동하고 헌신한 박봉석을
떠올리게 된다. 이 외에도 전쟁 중에 도서관을
지키며 중요 도서를 자신의 집으로 옮겨 보호한
일, 초등학교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 분류법을 연구하고 개발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두딩요는 박봉석처럼 투철한
도서관 혼을 가진 실천가이자 이론가였다.
박봉석이 미국이나 일본의
십진분류표를 한국에 맞게 연구하여 ‘조선십진분류표’를
개발한 것처럼, 두딩요는 이미 1920년에 필리핀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중국과 서양의 분류법이 서로
차이가 있음에 주목하고 새 분류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미국의회도서관분류법(LCC)보다는
멜빌 듀이의 십진분류법(DDC)에 주목하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중국으로 돌아와 상해 등지에서
강연하던 중 자신이 고안한 『세계도서분류법(世界圖書分類法)』을
소개하였다. 1925년에는『도서분류법(圖書分類法)』을
출판하고, 이후 십년 간 분류에 대해 연구하여
1935년에 『두씨도서분류법(杜氏圖書分類法)』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하여 중국 도서와
외국 도서를 통합하여 분류할 수 있는 세계화를
주장하였다. 1935년 당시 중국 전역의 도서관
조사에 따르면, 두딩요의 도서분류법을 사용하는
도서관은 516개관이고 듀이십진분류표를 사용하는
도서관은 671개관으로 나타나 두딩요의 도서분류표가
DDC에 버금갈 만큼 널리 사용되었고 중국의
도서 분류 작업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딩요의 ‘삼위일체’ 이론과
‘4요소설’
두딩요의 도서관 사상은 그의
역작들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1925년에 출판한
『도서관통론(圖書館通論)』에서 그는 도서관학이
과학적인 학문이며 철학, 사회학, 경제학 등과
같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학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도서관학을 전문적 부분과
보조적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전문적 부분은
도서관학 원리, 도서관사, 행정 관리, 도서
관리, 이용자 지도, 교육 커뮤니케이션이고
보조적 부분은 인쇄술, 제본술, 통계학, 신문학,
박물관학, 문학, 철학,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발표법, 광고학, 논리학, 외국어이다. 이처럼
두딩요에 의하면 도서관학은 종합과학이며
인문ㆍ사회ㆍ자연ㆍ공학을
아우르는 교양을 바탕으로 전문 기술을 연마하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에 발표된
『연구도서관학의 이해(硏究圖書館的心得)』에서
그는 도서관이 ‘인류의 공공 두뇌’이며,
이러한 공공 두뇌는 기억의 생산, 보존, 활용이라는
기능을 가지며, 이러한 공공 두뇌의 잠재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두딩요의 도서관 사상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이론이다. 삼위일체란 첫째, 도서 등 모든
문화 기록물을 포함하는 ‘서(書)’, 둘째,
도서관을 찾아오는 이용자를 뜻하는 ‘인(人)’,
셋째, 도서관의 모든 시설과 관리 방법, 인재
관리를 일컫는 ‘법(法)’으로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도서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 이론을 1932년에
발표한 『도서관 관리 방법의 새로운 관점(圖書館管理方法新觀點)』에서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중국 도서관 사업의
토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편, 두딩요는 도서관 교육
및 시민 강연에서 도서관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인재’, ‘서적’, ‘건물’, ‘재력’의
네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4요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후에 그는
건물을 빼고 ‘시세(時勢)’를 넣었다. 시세란
‘시대적 요구’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도서관에
대한 개념과 이용자의 요구가 없다면 도서관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요소설에서
‘인재’는 도서관을 운영하고 서비스를 하는
전문 인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딩요의 이론은
이후 류궈쥔(劉國鈞)의 4요소설 및 5요소설,
황종(黃宗忠)의 6요소설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두딩요는 필리핀대학을
졸업한 1921년부터 1967년 광주에서 타계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여 방대한 저작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일생동안 생산한 저서는 86종이며, 그 중에서
출판된 책은 55종이다. 또한 작성한 논문 512편
중 발표된 것은 320편이며 그 중 도서관학
논문은 234편이다. 그의 연구 분야는 도서관학
이론, 도서의 분류 및 목록, 한자 목록 배열,
지방 문헌 연구, 도서관 건축과 설비 등으로
광범위한 연구 활동을 수행하였다.
두딩요는 필리핀에서 미국
도서관학을 배웠고 그의 멘토인 메리 포크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1926년에 도서관학의 중국화를 주장하였고
중국 고유의 학문으로 연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서구 선진국의 도서관학을 수용하면서도
중국 사회에 적합한 이론을 개발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중국과 세계를 아우르는 이론을 제시하려는
포부를 가졌다.
중국 도서관계와 도서관학계에서
양대 거장으로 평가되는 사람은 북부의 류궈쥔과
남부의 두딩요이다. 두딩요의 위치는 1988년
광동도서관학회에서 열린 ‘두딩요 탄생 9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500명이
넘는 중국의 도서관학계 관계자들이 모여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3)
우리는 두딩요에게서 한국의
박봉석과 미국의 멜빌 듀이와 유사한 인생역정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도서관과 도서관학을
개척하고 그 토대를 놓은 두딩요에게서도 우리는
한국 도서관과 문헌정보학의 기본과 향로와
관련하여 타산지석의 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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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선화, “중국 근현대
도서관 사업의 창시자, 두딩요” 이병목 기획ㆍ감수,
고인철 외저, 『위대한 도서관사상가들』(한울,
2005), 50쪽. 2) http://www.dlsu.edu.ph/library/paarl/awards.asp#polk
(Cited 2007. 7. 14) 3) 장선화, 앞의 글,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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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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