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 서평  

 

105가지의 향기로운 이야기 : 友江 한상완의 삶과 학문과 꿈

한상완 외 105명. 계문사, 2007. ISBN 9788995038413. 30,000원

  2007년 4월, 友江 한상완 박사가 정년퇴임을 기념해서 그동안 그와 지란지교(芝蘭之交)를 해온 105인의 금쪽같은 글을 모아 위의 제목으로 423쪽의 아름답고 향기 나는 책을 발간했다. 필진은 대학 총장에서부터 사계에 널리 알려진 문인, 화가를 위시해서 그의 은사, 동료 교수, 직장 친구, 옛 벗, 사랑하는 제자 그리고 자신과 그의 아내의 글까지 골고루 망라되어 있다.

  이 책에 전개되는 105인의 각기 다른 빛나는 문체를 체험하는 것도 유익하지만 그의 온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 하나만으로도 인간 한상완의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최상의 참고 도구가 된다. 나아가 아름다운 책 표지와 함께 거기에 나온 웃음 짓는 모델, 장정(裝幀) 그리고 무려 151장에 이르는 생생한 사진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넉 달이나 밤잠을 설치며 흩어진 사진을 일일이 찾아 그 글에 맞게끔 손수 편집을 해, 자신의 혼이 들어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 많은 공력을 드린 흔적이 곳곳마다 스며 있어서 도서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 봄직하다.

  무릇 한 인물을 평가할 경우, 지척에서 보는 눈과 먼 곳에서 보는 눈이 왜곡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간 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눈은 그 현상을 공평하게 감정할 수 있는 이점(利點)이 있다. 한 예로, 105인의 필진 중에 이십 수년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학문을 함께해 온 동료 교수가 중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를 보고 평가한다면 어느 정도 사실과 부합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책을 소개하는 것보다 먼저 이 책에 수록된 한 컷을 뽑아서 주인공의 됨됨이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위대한 사서, 友江 한상완>

  이태 전, 파리에 있는 마자린도서관(La Bibliotheque Mazarine)을 취재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 도서관을 조직한 가브리엘 노데를 기리며 “위대한 사서 없이 존재하는 위대한 도서관은 없다”(There exists no great library without a great librarian)라는 말이 오래 전부터 파리지앵 입으로 전해 온다.

  문헌정보학을 하는 사람은 랑가나단이라고 하면 인도를 연상하듯이, 프랑스의 도서관인들은 그보다 300여 년 전에 활동한 노데를 연상한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계에서도 박봉석 같은 위대한 사서가 존재했지만, 계속해서 21세기형 위대한 사서를 발굴해야 한다고 본다. 그 대상 1순위로 나는 友江 한상완 교수를 꼽고 싶다.

  友江과 나는 암울한 시기, 어렵고 가난한 시대에 거의 동년배로 태어났다. 자라온 환경과 고향은 다를지라도 비슷한 조건에서 정서를 같이하면서 학문을 함께 해온 절친한 친구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만난 것은 불혹의 나이가 지난 뒤이지만 만난 이후부터 끊이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연락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막역한 사이다.

  한자리에서 책상을 같이하지는 않았지만 연세동산에서 리재철 교수님, 이한용 교수님, 정형우 교수님한테 연이어 배웠기 때문에 동문수학했다고 할 수 있어, 학문 단계로 치면 문헌정보학 제 2세대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우리 밑에서 공부한 제 3세대 교수들이 학문을 본궤도에 올려 교재도 많고 관련 책들이 부지기수지만, 당시 제1세대 선생님으로부터 프린트물로 도서관학을 청강하던 나는 공부를 하면서 학문의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할 때가 적지 않았다.

  학부를 다른 영역에서 출발해서 한두 해 공부하고 섣부르게 얻어낸 결론이 이럴진대, 학부에서부터 꼬박 16년 동안 이 공부를 계속해온 友江이 이만한 고민쯤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독실한 크리스천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계속해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하지 않고 그 앞서 신학대학원을 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 학문이 못미더워서 잠시 다른 길로 기웃거려 본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해 봤다.

  어쨌거나 友江은 제자리에 돌아와 문헌정보학 석ㆍ박사를 다시 계속해서 마침내 문헌정보학계의 거두가 되었다. 그는 우리 학계의 수장뿐만 아니라 연세대학교에서 버금총장이 되어 이 대학 안에서 우리 학문을 빛내는 선봉장이 되었다. 그의 능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도서관 현장의 총수가 되어 IFLA 세계도서관정보대회를 서울에서 개최케 하고, 도서관 인사로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평양까지 날아가 북측 인사를 이끌어내는 그의 탁월하고 야심 찬 추진력을 볼 때마다 나는 혀를 내두르곤 한다.

  한마디로, 그는 도서관을 위해 태어났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대학에서 처음부터 도서관학을 공부하고, 현장에서 사서를 하고, 또 사서를 만드는 교수를 하고, 그리고 학회장을 하고, 협회장을 모두 하고 있으니 이를 위해 태어났다고 장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일에 관여한 햇수만 해도 반세기에 이르니 그 누가 이만큼 따라 올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남들이 흔히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저처럼 두각을 보이는가? 어디가 잘나서 저만큼 앞서 가고 있는가? 학자로서 차이는 어디서부터 나오며, 탁월한 지도력은 어디서 샘솟는 것인가? 그를 대상으로 연구해 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랑가나단의 이름으로 학회가 생기고, 그를 대상으로 석ㆍ박사 논문이 생산되는 즈음에 한국에서 ‘한상완’을 대상으로 몇 개의 석ㆍ박사가 나온다는 것이 무슨 대수가 되겠는가?

  고백하면, 나는 友江 한상완 교수를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한다. 안다면 그와 접촉할 때마다 받은 단편적인 언행과 가십 정도일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를 만나면 지극히 인간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믿음에 변함이 없으며, 매사에 최선을 다해 성의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수년 전, 나는 전북대학교에서, 그는 전남대학교에서 각각 도서관학과장직을 수행했었다. 호남의 두 국립대학에서 도서관학과가 창설된 후 양 대학 학과끼리 정보도 교환하고, 교수들의 친목도 도모할 겸 두 대학이 정기적으로 상대 학교를 교환 방문키로 하자고 둘이서 합의했다. 학생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학 로고가 붙은 학교버스를 어렵사리 대절하여 여행 겸 야유회 겸 상대 학교를 찾아간다. 교수와 학생들이 박수를 받으면서 그 학교에 찾아가 학생들은 족구, 축구 등으로 친선 경기를 벌이고 우리들은 멀리서 지켜보면서 가벼운 약주와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것이 그 시대에 보편적으로 치루는 일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 학과에서는 여윳돈이 없어 전남대 가족을 초대했을 때는 간단한 식사만 하고 돌려보냈다. 미안하면서도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곳을 찾을 때는 우리가 늘 대접하는 방식과 비교하면 매너와 메뉴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선 그는 광주에서 최고라 일컫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해서 거기서 제일가는 진미를 먹여 주고, 떠나올 때는 으레 교수들 손에 ‘광주-전주’간 ‘새마을’ 기차표를 쥐어 준다.

  광주에서 전주로 오가는 데는 고속버스도 많고 교통시간도 비교적 짧은 거리인데도 그는 교수의 품위를 지키라는 뜻인지 당시 최고의 교통수단인 ‘새마을’로 우리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이다. 국립대학의 같은 급의 학과장인데도 나는 그렇지 못했고 그는 이런 일을 가뿐하게 처리해 내는 것이다.

  나는 그가 쥐어 준 기차표를 들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돌아갈 기차표까지 제공해 주는 학과장과 그렇지 못한 학과장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학과에서 기차표까지 조달해 내는 학과장의 능력을 가늠하기 전에, 나는 범상치 않은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고부터 자연스럽게 흠모하게 되었다.

  몇 해 전, 그와 기록관리학회를 같이한 일도 있다. 신생 학회로서 자금도 없고, 인력도 부족한 상태였다. 무일푼의 학회를 학계에 당당히 앞세우는 그의 능력을 보면, 역시 국가나 단체에서 지도자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그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얼마 전에 만든 『기록관리학사전』도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준 그의 성심에 나는 항상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진정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행정가로서, 그리고 인생살이에서 모두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남들은 한 가지 일도 성공하기 어려운데 모두를 한꺼번에 성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일에 대한 집착과 추진력, 그리고 ‘한상완다운’ 인품이 부가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일을 다 하고 은퇴를 할 무렵, 자신도 뒤를 되돌아 볼 것이고 가까운 동학들도 그를 다시 확인 해 본다. 나 역시 友江의 발자취를 찾아 보면, 인간미 이외에 또 다른 멋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友江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말고도 산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심취할 줄 아는 그의 심미안을 발견할 때 이 또한 기쁨이다.

  그는 논문도, 책도 많이 내는 편인데 책을 낼 때마다 우편으로, 또는 만날 때 직접 나에게 건네준다. 2002년에 발간한 『북한산 솔바람 : 인문학자들의 산행기』는 연세대학 교수들의 산행기 모음집인데 이 책을 편집하고 거기에 글도 썼다. 그는 “등산 후에 기분 나쁜 일은 없다”라고 항상 산을 예찬하면서 “선경(仙境) 한가운데 서서 신선으로 착각하면서 서 있을 수 있다니 정녕 행복하다”고 읊조리기도 해서 우리는 그의 행복론과 함께 호연지기 모습을 그대로 본다.

  友江 한상완 교수가 비록 연세를 떠난다 해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도서관을 위해 무언가 일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일을 추진해 낼 것이다. 미국의 도서관학자 멜빌 듀이가 도서관에 몸을 바쳐 80년의 생을 마감하고 1931년 12월 26일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뉴욕타임스가 그를 기리면서 그의 묘비명에 다른 말은 모두 빼고, DDC 기호로 ‘025.473’(미국의 도서관 스페셜리스트)만 적어 두자고 했다. 한국의 한상완도 도서관 일을 다 마치고 언제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 우리의 사랑스런 후학들이 그를 기리며 KDC로 그의 묘비명에 ‘023.2’(한국의 도서관 전문가)로 새겨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분명코, 그는 도서관을 위해, 문헌정보학을 위해, 기록관리학을 위해 평생을 살아 왔다. 후학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인간 한상완을 ‘위대한 사서’ 범주에 넣어 연구,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만큼 헌신한 인물을 연구 테마로 삼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문헌정보학 정착 반세기만에, 이 땅에서, 이만한 인물을 발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행운이고, 우리 도서관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최정태 |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