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현재까지 소개한 우리나라
도서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 도서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봉순(李鳳順)이다.
한국 도서관운동의 맥락에서 특히 박봉석-엄대섭-이인표를
살펴보면서, 그들과 연관이 있고 또한 치열하게
도서관을 가꾸고 한국 도서관사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로 이봉순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물들의 도서관 사상과 실천은
우리 도서관계가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궤적을 더듬는 작업은 우리나라
도서관과 도서관학의 ‘토대(foundation)’와
‘기본(basic)’을 살펴보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앞장서서 도서관과
도서관학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발자취와 사상은
현 시대 도서관인과 문헌정보학자가 ‘한국적인’
도서관과 문헌정보학을 건설하는 데 큰 힘을
줄 것이다.
전문성을 가지고 도서관에
헌신한 이봉순
이봉순은 흔히 ‘도서관 할머니’라고
불린다. 이러한 별명처럼 그는 도서관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열정을 쏟아 부었다. 또한 사람들은
그를 ‘작은 거인’, ‘한국 대학도서관 현장에서
전무후무하게 장기 집권한 사람’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그는 당차고 옹골진 사람이며,
전문성을 가지고 도서관에 ‘헌신(commitment)’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그를 두고
‘자랑스러운 이화인’, ‘전문직 관장의 표본’,
‘한국 도서관계의 어머니’, ‘한국 도서관학의
선구자’, ‘한국적 도서관학을 모색한 사상가’,
‘도서관계의 외교관’, ‘시심(詩心) 가득한
문인이자 번역가’ 등의 별칭을 추가하고 싶다.
이제 그의 인생을 따라 시간여행을
해 보자. 이봉순은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함경남도 신흥(新興)의 연안(延安)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고,
외가는 제사를 자주 모시는 유교 전통이 강한
집안이었다. 기미 만세사건으로 그의 가문은
고초를 겪었다. 증조부와 조부가 주동자로
몰려 투옥되었고 가산은 전부 몰수당했다.
아버지 이규숙(李珪淑)은 당시 영생중학교
학생으로 함흥에 유학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 부모가 사는 간도
용정으로 가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 과정인
명신여학교 시절, 그 학교 교사였던 시인 모윤숙(毛允淑)을
만난다. 이후 모윤숙이 나온 이화여전에 진학할
꿈을 안고, 1934년에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이처럼 그의 성장기에는 기독교와
유교, 일제와 민족정신, 고향 생활과 유학
생활, 개화와 보수 등 극명하게 대조되는 문화가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었다.
1936년에 그는 문학의 꿈을
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지원하였다.
그의 부모는 그가 사범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시절 김상용, 이희승, 이태준, 박종홍 등 쟁쟁한
교수들 아래서 문학의 맛과 시심을 키우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말이 억압당하는 수치를 견뎌야
했다. 1939년, 이화여전에서 아펜젤러 교장이
퇴임하고 김활란이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교장으로
취임할 때 학생 대표로 축사를 하였다. 김활란은
그에게 일생의 멘토(mento)로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도서관과 맺은 인연
젊은 시절 이봉순은 시인을
꿈꾸는 영문학도였으며, 졸업 후 영어 선생이나
기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40년 졸업
후 도서관학의 ‘도’자도 몰랐던 그가 첫
직장으로 들어가게 된 곳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이었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한국
문화를 존중했던 일본인 주임 세키노 신기치(關野眞吉)
밑에서 양서 분류와 편목을 배우며 일을 시작하였다.
또한 그 도서관에서 배우자가 될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독일 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그와 함께 목록부에서 일하였다. 두 사람의
교제를 막기 위해 도서관 일까지 그만두게
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인천에서 교편을 잡게 된 남편은
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암으로 죽고 만다. 남편이
남긴 유산은 책 몇 권과 아이 하나였다.
1949년 봄부터 그는 대학으로
승격된 이화여자대학교의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당시 김활란 총장은 대학의 발전에
도서관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전문직 도서관인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김활란의
선견지명과 강압(?)으로 그는 영문학이 아닌
도서관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6ㆍ25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한
그는 김활란의 소개로 미8군 민사처에 취직하였다가,
1951년에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목적지 인디애나대학교에
가기 전에 오리엔테이션 과정을 거치기 위해
어바나-샴페인(Urbana-Campaign) 소재 일리노이대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일리노이대학교 도서관장을
맡고 있던 다운스(Robert B. Downs) 교수를
만났다. 다운스는 그에게 “도서관인이 되려거든
책을 좋아한다고 하지 말고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라”면서 이용자 봉사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이후 그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
취득 후 동 대학원에서 조교 일을 보며 도서관
실습을 하였다. 그러던 중 속히 돌아와서 환도하게
되는 이화여대의 도서관 재건에 힘쓰라는 김활란
총장의 편지를 받고 1954년에 귀국하게 된다.
조교수 겸 도서관 차장으로
부임한 이화여대에서 그는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도서관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대학에서 도서관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5년부터 도서관학 부전공 과정을
설립하고 운영한다. 이로써 이화여대는 우리나라에서
도서관학을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채택한 최초의
대학이 되었다. 이후 도서관학과(학부 4년제)가
설립된 해는 1959년이다. 이화여대에서 정규
도서관학 과정을 열었으나, 그의 주위에는
박봉석(朴奉石)과 같은 한국 도서관학 개척자가
없어 그는 도서관학 운영에 고투를 겪어야
하였다. 만약 박봉석이 6ㆍ25 당시 행방불명되지
않았다면, 이봉순은 그와 함께 한국 도서관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성실성과
노력이 인정되어 이화여대 내에서 빠른 속도로
중용되고 있었으나, 그 때까지만 해도 이화여대
안의 인물이었다.
토착적인 도서관과 학문을
고민한 도서관 사상가
그가 이화여대 밖으로 나와
한국 도서관계에 나타난 주된 계기는 엄대섭(嚴大燮)
때문이었다. 이봉순을 찾아와 한국도서관협회의
‘재건’을 주장한 엄대섭은 그에게 “당신이
이화여대만을 위해서 공부한 줄 알아요? 한국
도서관을 위해서 한 것이지요.”라고 몰아붙였다.
아무튼 엄대섭의 열정과 헌신에 마음이 움직여
그는 1956년에 한국도서관협회의 이사가 된다.
또한 이후 2년 만에 협회의 전무이사로 추대되었다.
나아가 그가 세계 도서관계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57년 인도ㆍ태평양지역 자료
교환 세미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때이다.
이러한 데뷔 이후 약 반세기 동안 국제무대에서
그는 ‘한국의 도서관 대사’였다.
한편으로 그는 공석에서 말수를
아끼고 자신을 잘 내세우지 않았지만 원칙
문제에서는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았다. 한
예로, 도서관학 교수들이 도서관학과에서 문헌정보학과로
학과 명칭을 고치자고 할 때 그것은 포퓔리슴(populisme)적
발상이며 학과의 교육 내용으로 보아 변경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 하여 반대하였다.
과연 그는 서구 기독교와
학문의 수혜자요 개화된 교양인이면서도, ‘토착적인’
도서관과 학문을 고민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현장을 가꾸고 학계에 씨앗을 뿌린 사상가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민족의식이라는 자양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도서관계의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우리 문화에
대해 질문하는 외국 학자들을 만날 때마다
정작 우리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괴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도서관학과에 한문,
일본어, 한국의 서지와 고활자 강의를 정규
과목으로 개설하였다.
이봉순은 한 대학도서관의
관장으로 약 30년 동안 봉직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사례는 서구의 선진 도서관이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지식
기반 사회라는 현재에도 비전문직 교수들이
대학의 원로로서, 또한 보직 개념으로 관장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봉순과 같은 ‘30년
전문직 관장’이 우리나라에 30명 정도 존재한다면
한국 대학도서관의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가 이대 도서관을 가꾸면서
이룬 업적 중 특히 주목할 일은 ‘이화여대
100주년기념도서관’의 건립을 준비하고 성취한
일일 것이다. 그는 한국 대학도서관의 모델을
보여 주겠다는 마음으로 총장, 건축위원회,
건축가 등 관련되는 모든 이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도서관 개념을 심는 작업을 수년간
하여 1984년에 ‘도서관다운’ 대학도서관을
세우고 선보였다. 그 후 1년 뒤 그는 46년
동안 인연을 맺었던 이화여대를 떠났다.
은퇴 후 한가한 나날을 보내던
그를 붙잡은 것은 한국사회과학도서관이었다.
이인표(李寅杓) 에스콰이어재단 이사장을 만난
그는 다시 도서관 열병을 앓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고문 역할을 맡았으나 어쩔 수 없는 ‘도서관쟁이
정신’을 가진 그는 1987년에 도서관장이 되어
이후 한국사회과학도서관을 가꾸는 데 헌신하였다.
한국 문헌정보학의 정립을
고민해 온 문헌정보학자 김정근은 이봉순에
대해 “책 100권을 쓴 것보다 더 크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현대 도서관사에서 그가 걸어간 길과 뿌린
씨앗은 현재의 연구자들과 사서들이 기억하고
창의적으로 계승해야 할 토대이자 자양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작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한국 도서관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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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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