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과학대학원(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통칭 EHESS)은 “연구와 연구자 양성”을 사명으로
하는 국립고등학술원이다. 따라서 2006년부터
석사 과정 도입을 시험적으로 실시하고는 있지만,
박사 과정 이상의 학생들과 연구원들을 위한
강의와 연구 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사회학자
부르디외, 철학자 데리다, 역사학자 브로델
같은 세계적 석학들이 몸담고 연구한 기관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는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
방법 수학 등의 ‘분과 (Division)’가 있고
그 안에 크고 작은 연구소들이 있는데 한국
연구소(Centre de Recherches sur la Core,
통칭 CRC)는 중국, 일본 연구소들과 같이 문화
분과(Division Aires Culturelles)에 속해
있다.
EHESS의 2005년도 주소록을
보면 11개의 주소가 있다. 지금은 아마 더
있을 것이다. EHESS에는 한국이나 미국 대학을
이야기할 때 금방 상상할 수 있는 캠퍼스나
울타리가 없다. 한편, 같은 주소를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EHESS에 소속된 연구소나 기관이
아니다. 학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행정직이건 교수-연구직이건 분야를 불문하고
EHESS에서, 또는 EHESS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EHESS의 직원이 아니다. 또한, EHESS
직원이라고 EHESS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이쯤 되면 무슨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게 표현하기
위해 조금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프랑스
행정 구조의 ‘따로 또 같이’, 다양성의 조화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범위를 좁혀 한국 연구소의
경우를 보면 좀 더 빨리 이해가 될 것 같다.
우리 연구소 CRC-EHESS는
에펠탑을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파리의
황금지역에 위치해 있고 건물의 이름은 ‘아시아의
집(Maison de l'Asie)’이다. 물론 우리 연구소의
주소는 EHESS 본부의 주소와 다르다. 아시아의
집에는 인도ㆍ일본ㆍ중국ㆍ동남아ㆍ티벳,
즉 아시아를 연구하는 연구소들이 모여 있는데
모두 EHESS 연구소는 아니고 각각 고등 실천
학술원(Ecole Pratique des Hautes Etudes,
통칭 EPHE)이나 프랑스 극동연구원(Ecole Franaise
de l'Extrme Orient, 통칭 EFEO)에 소속된
기관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도 각기 EFEO, EPHE뿐
아니라 파리 7대학(Universit de Paris 7),
프랑스 동양어 대학(Institut national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orientales, 통칭
INALCO) 등에 속해 있다. 이 기관들은 모두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독립 기관이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프랑스 교육부로서
모두 그 산하에 있는 국립 기관이다. 따라서
정규직으로 있는 사람들은 프랑스 국가 공무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 연구소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단지
뜻이 맞아 함께 연구만 할 뿐 아무런 행정적
연계는 없는 스터디 그룹 같은 것은 아니다.
CRC는 ‘프랑스 국립과학원 연합실험실 8173의
한국팀(Equipe Core de l'UMR 8173 CNRS-EHESS)’이라는
조금 긴 또 다른 이름이 있다. 프랑스 교육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치기구이면서 교육부와
상부상조 관계에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조직
프랑스국립과학원(Centre National de Recherches
Scientifiques, 통칭 CNRS)이 있는데, CRC의
또 다른 이름은 그 국립과학원의 인증을 받은
연구팀이라는 의미이며 여러 기관에 적을 두고
있는 우리 연구원들을 묶어 주는 동아리 역할을
한다. CRC-EHESS 이름으로 인증이 난 만큼
그 경영 책임을 우리 연구소가 담당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연구소와 나는 작게는 EHESS,
크게 보면 프랑스 교육부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교육부 산하의 다른 여러 기관들과 함께 일할
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상부인 국립과학원
산하에 있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기관의 정책
결정과 변화가 연구소의 실질적 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양성 조화에 근거한 프랑스
행정 구조에다 프랑스 한국학의 특성도 추가해야
한다. 유럽의 한국학이 일반적으로 북미와
비교하면 아직 약소하겠으나 프랑스 한국학은
유럽에서 그런대로 자리가 잡혀, 왕성하고
다양한 연구 활동을 보여 주며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동시에 프랑스한국학협회(AFPEC)와 유럽한국학협회(AKSE)의
회원들이고 각 협회의 회장 임무도 우리 연구원들이
맡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한국학협회나 유럽한국학협회의
행사는 곧 우리 연구소의 일이 되어 실제로
CRC-EHESS는 프랑스, 나아가서는 유럽 한국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어진 것 같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결국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줄타기 하듯 중심을
잃지 않고 경영하는 것이 내 업무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두 나의 고객인
것이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 그들에게
무엇이 유익할 것인지를 파악하고 최대한 제공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집’ 1층에는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도서관이 하나 있고,
이 곳에 등록을 하면 아시아 전문 서적과 자료들을
대출할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읽고 연구할
수 있다. 이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 역시 공공의
목적을 위해 함께 모여 있지만 소속은 각 연구소이고
관리도 각 연구소가 독립적으로 한다. 연구소마다
독립적인 예산을 가지고 자료 구입과 인력
관리를 한다. 따라서 책의 대출도 ‘아시아의
집’ 도서관 차원에는 안 되지만 각 연구소
차원에서는 할 수 있다. 연구소마다 나름대로의
경영 논리가 있지만 주 목적은 연구소 연구원들의
연구 활동 지원이다.
따라서 EHESS에는 대형 중앙도서관은
없고 연구소마다 아주 전문적인 주제를 기반으로
집중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전문도서관들이
연구소 수만큼 있다. 공공도서관이나 일반
대학 중앙도서관과 달리, 자료 구입도 현재
실질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구체적인 연구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자료 수집 내용의 폭이
넓지 못한 반면 집중적이고 깊이 있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자료의 특수성에 따라 관리하는
방법뿐 아니라 서지 관리에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연구소마다 다양하다.
우리 연구소의 자료들은 ‘아시아의
집’ 서고에 있고, 디지털화 된 서지는 또
다른 교육부 기관으로서 현재 건립 계획이
진행 중인 국립 (비서구) 언어문화 도서관(Bibliothque
universitaire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통칭 BULAC)에 들어가 있다. 2006년 이후 신착
자료부터는 프랑스 국가 공동 서지작성 프로그램인
Systme universitaire de documentation(통칭
SUDOC)으로 직접 입력되고 있기는 하지만 CRC의
전체 서지 목록을 보려면 BULAC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관계의 경영 관리 역시
나의 몫이다. CRC는 BULAC에게 한국 자료에
관한 전문 지식과 정보들을 제공하거나 검증하는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서라고
하는 직명 하에 도서관 경영인과 정보 관리인,
정보지기의 역할이 다 포함되는 것 같은데,
프랑스 말로는 굳이 전자를 Bibliothcaire나
Bibliothconomiste, 후자를 Documentaliste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전자가 도서관이라고 하는
그 고유의 조직 구성과 운용 방식을 바탕으로
한 기관성을 우선으로 한다면, 후자는 말 그대로
자료, 즉 도큐먼트를 다루는 직무에 초점을
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정보 관리가나
정보지기는 도서관에도 물론 있지만 도서관이
아닌 곳, 즉 법률사무소나 연구소, 기업뿐
아니라 정치, 행정, 언론 관련 분야 등 특정
전문 정보를 다루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대단히 많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 한국에서
사용하는 주제전문 사서의 정의에 근접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의 주 고객이
전문가들 내지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특징이 있다면, 만족시켜야 할
고객의 요구가 더 구체적이고 다루어야 할
주제가 더 첨예하다는 것이 과제이자 어려움이
될 수 있다.
대형 도서관 같은 경우에는
이 두 가지 업무가 구분되어 여러 개의 부서
조직에서 실시되지만 규모가 작은 도서실이나
특수 자료실 같은 곳에서는 이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경우에는
한국식 명칭인 사서가 더 합리적일 것 같다.
우리 연구소의 경우는 작은
도서실에 속한다. 도서실이 작은 규모라 해도
매년 늘어나는 도서 구입량과 축적되는 자료들로
인해 기본적인 도서관 경영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점차 가중되는 자료의 양과 내 직무의
다양성 때문에 서지 작성 등을 임시 계약직에
기탁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지 작성 규범뿐만
아니라 도서관 경영에 필요한 지식 습득이
필수적이고 변화하는 규범 내용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다양한 직무 가운데 최근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분야는 디지털 자료
부분이다. 우선 한국에서 많이 개발, 보급되고
있는 디지털 자료들을 수집ㆍ선별한
후 어떻게 유용한 자료를 우리 연구소 회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과제였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기관들의 정책과 상태를 살피고
각 기관의 정황에 적절하게 보고하고 제안하고
청원하는 업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상층의
허가와 지원을 유도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제안 기반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지만, 자료를
얻었다 해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정보 관리 분야에 계시는
분들이라면 한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혁명적
개혁을, 조용히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추세로 다가오고 있는 개혁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끊임없이 새롭게 발전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특히 정보 관리 응용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변수들은 그 자체로 이미 정보 관리인들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 주고 있다. 이것이
행정-경영 체제와 맞물리면 그 체제가 변화
수용에 얼마나 민감한지에 따라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은 다를지라도 당장 현장에서는
극복해야 할 절망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절망은 희망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또한 인지하므로 치명적인 것은 아니고,
단지 진행 과정에서 낭비나 손실을 최소화
하면서 최대의 효율성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직무자의 과제라 생각한다.
아직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지만 이 과제 수행은 그런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한국에는 풍부하게
개발되어 있으나 이곳에서는 이용할 수 없어서
그동안 그림의 떡이던 몇 가지 자료를 우리
연구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 유럽의 한국학 연구소 중에서는 최초의
시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유럽에 있는 한국학
연구소에 이런 과제에 몰두할 수 있는 정규직
사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용 권한이
제한된 한국 디지털 자료의 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연구소는 현재 유럽에서 CRC-EHESS가
유일할 것이다.
이제 이 자료들을 홍보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법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유럽의 모든 한국학 연구소들이
한국 디지털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현재 두 가지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오는 4월에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정기 유럽 한국학대회 ‘AKSE Conference 2007’
때 유럽의 한국학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디지털
자료를 소개할 것이며, 두 번째는 6월에 좀더
구체적인 사용법과 참고문헌 자료 관리 프로그램
등을 추가해서 우리 연구소 연구원과 학생들에게
소개할 것이다.
이 밖에 전문 분야 연구소의
사서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지금까지 익숙한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에 의존해 자료를 선정, 구입하고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 분야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정보를 최대한 빨리 포착하여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등대지기처럼 항상 지기를
해야 하는 것이 신종 과제이다. 특히 이 정보지기
기능의 효율적인 수행에는 ‘web2’라고 불리는
신기술군의 도움이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매일 새롭게 개발되는 수많은 도구들은
다 파악하기조차 힘들 지경이라 가장 좋은
도구를 선별하여 그 사용법을 익히고 직무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개발이 될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현재 시험적으로 한국 관련 사회과학 신간
정보와 한국학을 위한 시사 정보 두 개의 블로그를
연구소 웹 사이트에 연결하여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미숙하여 앞으로 연구소 웹 사이트의
개발 문제와 아울러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연구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연구소의 자료를 관리하는 것
이외에도 연구원들의 연구 활동 결과를 홍보하는
것이나 연구소가 소장한 자료 중 귀중한 자료들을
디지털화 하여 보급하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또한 연구원들의 연구 활동, 특히 논문 작성
등에 유용한 새로운 도구를 발굴, 소개하고
학생들과 연구원들을 상대로 그 사용법을 교육할
뿐 아니라 사용 중에 발견되는 문제들을 도구
생산자에게 전달하여 도구를 개선하도록 자문하는
것도 정보 관리자의 직무이다. 정보지기는
결국 정보의 관리자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보 생산자이며 보급자, 중개자의
역할도 함께 하는 것이다.
거대한 행정 조직들의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관계 속에서 줄타기하듯 평형을
유지하고,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신기술
개발과 그 응용물들을 놓치지 않되 무조건
여기저기 따라가다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연구하고, 날로 속도를 더해 늘어나는
새로운 정보들을 적절히 선별하여 효율적으로
구성ㆍ전달하는 정보지기는 언제나 긴장하고
끊임없이 재교육으로 무장을 해도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긴장감과 부족감이 우리를 항상
깨어 있게 하는, 그야말로 지기가 될 수 있게
하는 동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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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은주ㆍ프랑스 사회과학대학원
한국 연구소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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