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오랜 시간 나의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책 한 권을 어제 탈고했다.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 에필로그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아주 오랜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피곤함과 뿌듯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이상한 졸림이 내게 찾아들었다. 잠을 청하면서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내일 서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서점에 간다는 것은 내가 책을 쓰는 입장에서 책을 읽는 입장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입장 변화는 마치 사랑을 갈구하는 입장으로부터 사랑받는 입장으로의 변화처럼 극적인 것이다. 어쨌든 구애하는 입장보다 사랑받는 입장이 더 편안한 법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에서든 아니면 상대방을 순간적으로 유혹하려는 기술에서든, 구애하는 입장은 너무나 불리한 입장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의 반응 여부에 따라, 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책이 어떻게 읽힐까? 혹시 너무 어렵게 쓰인 것은 아닐까? 책을 쓰는 동안 내내 나의 노심초사는 끊인 적이 없었다. 책을 쓴다는 것 자체는 타자에게 말 건네는 작업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타자들이 나의 말을 받아들일지 미리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책을 탈고한 순간부터 나의 노심초사는 진정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탈고된 원고는 이제 나의 손을 떠난 것이다. 최초의 독자인 출판사 식구들의 반응도 걱정되고, 나아가 책이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의 반응이 어떨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의 지면을 채워 넣을 때,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동안 쌓였던 나의 치열한 성찰, 독서 경험, 그리고 독자에 대한 열정 등등이 나의 책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걱정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서점을 방문하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책을 쓰는 입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책을 탈고하자마자 서점에 가서, 책을 읽는 입장, 다시 말해 독자의 입장에 서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서점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많은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냥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서점을 찾아오신 분들, 학교에서 쓸 강의 교재를 사려고 연신 적어 놓은 메모를 넘기며 서가의 책과 대조하고 있는 학생들, 속칭 베스트셀러를 진열해 놓은 코너에 모여서 책들을 살펴보는 분들, 서점 직원들에게 자신이 찾고 있는 책들에 대해 문의하고 계시는 분들, 서가의 아주 후미진 곳에서 가부좌를 개고 앉아서 독서삼매경에 빠진 독자들 등등. 서점은 너무나 이질적인 독자들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이들 틈에 몸을 섞고 책을 골라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그 사이 너무나 많은 책들이 출간된 것 같아,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다. 사실 모든 독자들이 느끼는 것이겠지만, 독자로서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떤 책을 골라서 읽어야 하는지와 관련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책을 선택하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집어 들고, 아무 곳이나 무작위로 펴들고 해당 페이지를 아주 천천히 완독한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많은 사람들은 매스컴이나 아는 사람의 권유로 책을 선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물론 이것도 후회 없이 책을 선택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는 않은 방법이다. 이런 방법에 따르면 책을 선택한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서점이나 도서관에 직접 발을 들여 놓아야 한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면서 책들을 펼쳐서 최소 한 페이지 이상은 정독해야 한다. 아마 대부분은 나의 마음을 별로 자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계속 다른 책을 꺼내서 읽기를 반복해야 한다. 운이 좋다면 나는 내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어 놓는 책 한 권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미안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그 책은 서가 한쪽 구석에서 내 손길을 고독하게 기다리며 있었던 것이다.

  불행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책에 이렇게 접근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책은 우리의 애인이다.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나를 유혹하며, 급기야는 나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늘 나는 운이 매우 좋은 것 같다. 애인과도 같은 책을 한 권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나에게는 불현듯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 Deleuze: 1925-1995)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어느 책에서인가 책을 읽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책을 통해서 삶에 필요한 정보나 교양을 얻기 위한 ‘냉정하고 사무적인’ 책 읽기이다. 이 경우 책 읽기는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혹은 책 안에 들어 있는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책 읽기가 노동이나 의무처럼 이루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와 달리 들뢰즈가 권장하는, 그리고 내가 동조하는, 두 번째 방법의 책 읽기는 ‘열정적이며 강렬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나 매스컴은 어떤 책이 중요하고 유익하며, 나아가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시대에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엄포를 떠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읽기로 작정한 책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책 읽기를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을 인문학의 위기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 핵심을 살펴보면, 그것은 책의 위기, ‘열정적’ 책 읽기가 사라지는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수만큼 이 세계에는 수많은 영혼과 그들이 꿈꾸는 열정이 있다. 이것이 표현되었을 때 바로 다양한 책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마치 꽃처럼 피어나게 될 것이다.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기를 꿈꾸며 서가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맞고 있을 그 수많은 책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냉정한’ 책 읽기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책을 보며 감동에 젖어들곤 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라. 지금은 어떠한가? 명문대에서는 앞 다투어 필독서 목록을 쏟아내고 있으며, 젊은 학생들은 그것을 토대로 대입 논술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대부분의 훌륭한 고전들이 하나의 의무나 노동으로, 따라서 어떤 감동도 없이 읽혀지고 있다. 분명 여러 대학에서 제안하는 책들은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고전임에 틀림없다.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책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고전은 고전으로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오늘 나의 손에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작가가 쓴 철학책이 하나 들려 있다. 수십여 권의 책들 중 나의 가슴을 울린 유일한 책, 서둘러 집에 돌아가 한 잔의 커피 향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이 모든 사람에게 나와 같은 울림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 감동받은 부분은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열정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베스트셀러나 권장도서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책의 가치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깊은 곳을 울릴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나에게 울림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점에서 나오면서 나는 다시 뒤돌아보게 된다. 서점에는 아직도 책을 고르느라 분주한 많은 독자들이 있다. 그리고 조그만 바람을 하나 가져 본다. 그들도 나처럼 자신의 가슴을 울리는 한 권의 책을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그들도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서점을 떠났으면 좋겠다.     

  책을 들고 서점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나를 반긴다. 4월인데도 아직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갑자기 나의 마음에는 어제 탈고했던 내 책이 떠올랐다. 이제 다시 책을 쓰는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왔나 보다. 나의 책을 최초로 넘겨 본 독자는 누구일까? 그는 과연 나의 책에서 울림을 받게 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내 책의 어느 부분에서일까? 오늘 내가 선택한 책의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도 책을 탈고하며, 나처럼 노심초사했을까? 이런저런 생각 때문인지 오늘 내가 고른 책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책을 어루만지며 나는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열정적인 책 읽기가 가능한 독자에게 나의 책이 읽혔으면 좋겠다. 나의 책을 통해 그들이 자신의 영혼을 깨우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은 책을 쓰는 사람의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열정적 책 읽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 아니겠는가?

     글|강신주ㆍ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