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인물탐구  

 

  지난 호에서 필자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으로 글을 시작하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이 물음을 놓고 ‘자존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직지』(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가치를 발견하여 한국인의 자존심을 높여 준 박병선은 자신 또한 자존심으로 뭉쳐진 사람이며, 그로 인해 일생 동안 고행의 길을 걸었다.

 

『직지』를 세상에 알리다

  1972년, 박병선은 세계 학계, 도서관계, 인쇄 출판계를 놀라게 하고 이후 수많은 논란과 외교적 문제를 불러일으킨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일하던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서고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발견하고, 『직지』를 유네스코가 주최한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에 출품한 사건이었다. 『직지』의 책 끝머리에는 “선광 7년(1377년)에 청주 외곽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널리 배포했다(宣光七年丁巳七月日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고 기록되어 있다. 1377년이라면 그 이전까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42행 성서』(1455년 완성)보다 무려 78년이 앞선 것이다.

  그는 『직지』가 금속활자본임을 고증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준비하였다.

  1969년,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으로부터 “3년 후 개최되는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할 만한 동양 고서적이 있는지 찾아보시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국 책 전시가 기획되어 있어서 출품할 고서를 찾던 중, 문득 빛이 바래 남루한 서적 한 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미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한국서지』를 통하여 『직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박병선은 『직지』가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한국 인쇄사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인쇄 기술에 대한 책을 찾았으나 그런 책을 찾지 못해 일본이나 중국의 인쇄술 관련 책들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직지』가 목판이 아닌 활자로 찍은 책임을 증명한 뒤, 이어 금속으로 주조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물질을 가지고 글자를 만드는 실험도 행하였다. 처음에는 감자로 도장처럼 글자를 만들고, 다음에는 나무로 새기고, 그 다음에는 진흙으로 만들어 오븐에다 넣고 굽기도 하였다. 진흙 실험 도중 도자기를 굽듯이 열을 더 많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오븐 온도를 높여 오래 두었다가 오븐이 펑하고 터진 일도 있었다.1) 실험 결과, 이러한 활자들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진으로 확대해 보니 조금씩 달랐다. 처음부터 금속활자로 실험을 했다면 고생을 덜 했을 텐데…….  

  이후 그는 인쇄소의 옛 활자를 구하여 관찰하고 물어도 보고 하여 점차 『직지』가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해 나갔다. 즉, 금속활자에는 글자 가장자리에 티눈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이는 금속활자가 쇠를 부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활자에 붙은 ‘쇠똥’을 미처 떼어 버리지 못하고 인쇄를 하면 글자 가장자리에 먹물이 번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또한 금속활자 본에는 삐뚤어진 글자가 더러 있다. 인쇄할 때 밀려서 삐뚤어진 것이다. 이 외에도 박병선은 여러 논리와 증거로 『직지』가 금속활자본임을 고증하였다.

  전시회 이후 그는 한국의 문화재관리국에 흑백 영인본을 보냈으며, 1973년에 한국의 서지학자들은 이를 놓고 논쟁을 벌인 끝에 『직지』의 여러 특징을 고증하여 『직지』가 초기 금속활자본이라고 판정하였다.2)

  세계 인쇄사를 다시 쓰게 만든 『직지』는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박병선 덕분에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이 세계만방에 드날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서지학자의 길에 들어서다

  필자가 앞서 소개한 여러 도서관 사상가들처럼 박병선도 처음부터 사서로서, 또한 서지학자로서의 길을 가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2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밝혀져 있지 않으나, 부유한 환경에서 부모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 한 그 해 6ㆍ25가 터졌고, 그는 서울에서 몸이 편찮으시던 어머니와 함께 집을 지켰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인민군이 찾아와 협박을 하며 난리를 피웠는데, 그 치다꺼리를 감당하였다. 그러다 추방령이 내려져 서울 중구 저동에 있는 집에서 쫓겨나 아는 사람들 신세를 지며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당시 그의 가족은 부르주아지 계층으로 분류된 것 같다.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받아주기를 꺼려하였지만, 예전에 그 집안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들이 노동자로서 배급을 받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것으로 연명을 하다가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한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처럼 심한 고난을 겪은 그는 결핵성 뇌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유럽 의사들까지 불러 치료를 했으나 6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러다 기적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씻은 듯 나았다.

  회복을 한 뒤 1955년에 박병선은 소녀 시절부터 동경하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애초 그의 유학 목적은 행정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법을 배워 와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학교를 운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62년까지 벨기에 루벵대학에서 수학한 뒤, 1967년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동양의 자료 정리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여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소르본대학에서 「사적으로 본 한국의 민속학」이라는 논문으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르본에서 처음에 불어를 배운 뒤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하다가 역사민속학으로 전향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그에게 “너희 나라의 넋이 무엇이냐?”, “한국의 원시종교가 무엇인가?” 라고 묻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설명을 하다 보니 아예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연구자로서의 탐구욕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던 당시 그는 막 논문을 시작할 때였다. 무엇보다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여건이 마음에 들었고, 한편 으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책들을 국립도서관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는 또한 학자로서의 박병선의 집념과 외로운 고행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10년 동안의 외로운 연구로 외규장각 도서 해제서를 펴내다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한국 고서를 찾아보아 달라는 사학자 이병도의 부탁도 있고 해서 그는 약 10년 동안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으나 종내 찾지를 못하였다. 그러던 중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에서 일하던 사람을 만나, 별관의 파손 도서 서고에 한문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그는 1978년에 베르사이유 별관에서 조선왕조의 외규장각 도서 『왕실의궤(王室儀軌)』를 발견하게 된다. 외규장각 도서들은 발견 당시 중국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런데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최초로 밝혔기에 그는 안팎으로 박해를 받게 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으로부터는 자신들의 비밀을 밖에 알렸다고 배반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한국 정부 관계자나 학계 사람들로부터도 조용히 일이나 하지 괜한 것을 들추어내어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압력을 받은 그는 결국 1979년, 도서관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하지만 박병선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왕실의궤』의 해제서를 내는 작업을 한다. 1980년부터 시작된 해제 작업은 10년이 걸려 1990년에 끝났다. 외규장각 도서들은 한자와 조선 이두문자로 쓰여 있어, 한국의 이두 전문가에게 부탁을 하였으나 반응이 냉담하였다. 결국 암호문을 해독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이두 공부까지 하면서 한 자 한 자 해독하며 297권의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 해제 작업을 마쳤지만 상업성이 없어 프랑스에서 출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는 서울대 규장각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이태진 교수에게 전달되었다. 드디어 1992년, 서울대의 지원으로 불어판 해제서, 『Régles Protocolaires de la Cour Royale de la Cor럆 des Li, 1392~1910』이 세상에 나왔다.3)

 도서관에서의 일을 그만둔 뒤, 박병선은 콜레주 드 프랑스(Collége de France)의 동양학 전공 프랑크 교수의 연구원이 되어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오히려 냉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박병선은 고집스럽게 역사학과 서지학 연구의 길을 걸었기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이 세계 최고(最古)라는 유럽의 사관을 바꾸어 놓았으며, 풍부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 외규장각 도서를 조명하여 한국인의 문화적 긍지를 높여 주었다.

  이러한 문화적 투사이자 수도승과 같은 노력이 뒤늦게 인정되어 박병선은 1998년에 청주시에서 명예시민증을 받았고, 1999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1년에는 한국 방송국 KBS가 주관하는 ‘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고, 2004년에는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또한 그는 최근 한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었던 청사를 발견하였고, 2006년에는 프랑스 외교 고문서 발굴 작업을 하여 한불관계 자료 정리에도 기여하였다. 올해(2007년)에는 한국 대통령상인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박병선은 프랑스에서 사서로서, 또한 학자로서 평생을 보내면서 한국 인쇄 문화의 선진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고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그는 박해와 고행을 무릅쓰고 해낸 것이다. 그러나 박병선에 대한 조명은 여전히 부족하며 그는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많다. 우리나라 도서관계와 학계에서도 그를 자랑스러운 사서이자 서지학자로서 본격적으로 조명하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가 가진 기록 자산의 의미와 역사적 혼을 제대로 밝혀준 또 한 명의 도서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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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지원, 「인터뷰」 “박병선 - 프랑스 소재 ‘직지심경’, 외규장각 도서 발굴기”, 《역사비평》 2004년 봄호, 245쪽.
2.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 (한국디지틀도서관포럼, 2004), 461~462쪽.
3. 이태진, 「완조의 유산 - 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지식산업사, 1994), 48~60쪽 참조. 

     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