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인물탐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러한 물음에 필자는 ‘사랑’으로 산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세상살이에 바빠 허덕이며 살기에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 예컨대 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비로소 세상과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구두회사 에스콰이아를 세우고 40여 년 동안 경영한 고 이인표(李寅杓) 회장도 2개월 동안 병석에 있으면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7세, 1970년대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길은 도서관을 통하여 사람들을 돕고 키우는 일이었다.

  이인표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대표적인 제화(製靴) 기업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도서관인은 그를 사회과학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들을 세운 ‘도서관 할아버지’로 기억한다. 많은 도서관을 건립하여 민중에게 봉사하고자 한 위대한 기업인으로 미국에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있다면, 한국에는 ‘구두왕 이인표’가 있다.

  그렇다면 이인표의 인생행로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왜 도서관을 통하여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이제 그의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예술을 사랑한 창백한 젊은이

  이인표는 일제시기인 1922년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복사골에서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관업을 한 부모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가명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이 학교는 중리동 성당이 운영하는 가톨릭계 학교였다. 당시 신부들의 강론을 듣기도 하면서 성스러운 분위기와 세상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 감화를 받은 것 같다.

  한편, 이인표는 예술적 호기심과 기질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경성상공실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방과 후 극장에 몰래 출입(?)하며 영화 보기를 즐겼다. 또, 내성적이었던 그는 대중소설을 읽고 몽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가 예술에 대한 갈망을 실천으로 옮긴 것은 1940년, 그의 나이 19세에 실업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당시 동양극장이 운영하던 청춘좌 극단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특히 연극이 그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배우로서는 소질이 부족함을 이내 깨닫고 연출 연구생으로 극단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7년 동안의 극단 생활에서 그는 연출 한번 해 보지 못하였으며, 그에게 남은 것은 폐결핵, 천식, 자폐증과 같은 질병뿐이었다.

  스산하고 불우했던 20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미군정 시절, 그는 약 4년 반 동안 미군 공보처에서 운영하던 이동연극반에서 일하였다. 엑스트라 배우 역할이었다. 예술에 대한 갈망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예술의 아스라한 빛을 쫓아다니며 한때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젖기도 한 창백한 지식인이었던 그를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6ㆍ25 전쟁이었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다

  부산으로 피난해 있던 그는 먹고살기 위해 국제시장에서 양품장사 거간꾼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때 거래처 직원이었던 부인을 만나게 된다. 전쟁 후 이인표는 서울로 돌아와 명동에서 수도양행이라는 양품점을 열었다. 양품 중개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용을 쌓은 덕분에 그의 사업은 순항하였다.

  그런데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청년 시절의 꿈, 예술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향수가 남아 있었다. 1958년, 그의 나이 37세에 그는 친구와 동업으로 대동영화제작사를 세웠다. 이때 제작한 영화가 <고개를 넘으며>이다. 최은희, 김지미와 같은 유명 여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로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였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영화 제작은 단 한 편으로 끝나고 영화사업을 그만두었다. 비록 실패한 경험이었지만 영화를 제작하고 홍보하면서 습득한 광고에 대한 감각은 후일 사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이어 그는 1960년 4ㆍ19 혁명 후에 잡지 발행에도 손을 대었다. 《모던 다이제스트》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였는데, 이 사업도 적자 경영에 허덕이다 8호까지 내고 종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이은 좌절의 고통도 문화산업에 대한 그의 관심을 지우지는 못했다. 현실의 잔인함을 잘 견뎌내는 로맨티시스트인 그를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바로 5ㆍ16 군사쿠데타였다.

 

국산 구두를 만드는 에스콰이아 설립

  집권 군사정부는 국산품 애용을 권장하였고, 1961년 8월부터 모든 외제품 거래를 중단시켰다. 그래서 그가 경영하던 양품점에도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기 일쑤였다. 활로를 모색하던 그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미 해군 단화보다 편하고 멋진 국산 구두를 만들어 팔기로 결심하였다.

  1961년 9월 21일, 그의 나이 40세 때 자본금 150만환, 10평의 판매장, 15평의 공장, 직원 9명, 판매원 3명으로 에스콰이아를 설립하였다. 열정만으로 구두 공장을 설립하였지만, 사실 그는 구두에 대해 잘 몰랐다. 구두 생산 공정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단가는 올라갔고 기술 발전은 더뎠다. 이에 그는 죽기 살기로 구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구두를 사서 뜯고 쪼개어 살피고, 외국 잡지에서 발견한 구두를 구하여 며칠씩 껴안고 분석하는 한편, 가장 좋은 가죽을 사용하고 구하기 어려운 고무 밑창을 쓰고, 확대경을 들고 일일이 구두의 박음질을 한 땀 한 땀 들여다보는 등 품질관리에 정성을 다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명동의 멋쟁이라면 에스콰이아 구두를 신었다고 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외국순방 길에 에스콰이아 구두와 가방을 사용했을 정도로 에스콰이아는 유명해 졌다. 그의 구두공장은 날로 번창하여 1970년(그의 나이 49세)에는 1,200평 규모의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대학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생산성본부에서 주최하는 마케팅 세미나를 수강하고, 산업은행에서 교육을 받는 등 경영자 수업을 찾아다니며 받았으며, 강의를 들으면서 인연을 맺은 대학 교수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부지런히 경영에 관련된 자료와 조언을 얻었다. 그러한 열정과 연구 개발로 그는 1977년, 이탈리아 국제가죽제품 경진대회에서 오스카상을 받았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으며, 1978년 에스콰이아는 2백50만 켤레의 생산 능력을 갖춘 성남 제 2공장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기업인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또다시 인생의 대전환기가 찾아온다. 사업을 시작한 지 17년이 된 1978년, 그는 과로로 쓰러졌다.

 

병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천으로

  병원의 하얀 시트에서 2개월 동안 누워 있으면서 그는 죽음의 의미를 관조하게 된다. 어차피 사람은 죽게 마련이기에, 그는 세상에 무엇인가 의미를 남기고 떠나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수많은 도서관과 교회를 지은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 정경의숙을 지은 일본의 마쓰시타(松下) 등과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 암중모색을 하던 그는 퇴원 후 건강을 위해 다닌 체육관에서 대학 교수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전문서적과 자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연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예전에 남미를 여행하면서 원주민과 백인이 대조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고, 민족이 번영하고 나라를 지키려면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 적이 있었다.

  이에 그는 도서관을 세워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4~5년의 연구 끝에 1983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한국사회과학도서관’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사회과학 연구자들을 돕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관료나 법조인이 되고자 하는 고시생을 돕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였는데, 도서관학(현재 문헌정보학) 교수들이 더욱 건강한 의미에서 먼 미래를 보고 사회과학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지식의 국부를 이루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미래의 동량인 어린이들의 독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어린이도서관 설립을 위해 김효정 교수(중앙대 도서관학과)에게 의뢰하여 수년 간의 연구를 거쳐, 드디어 1990년 어린이날 서울 상계동에 최초로 ‘인표어린이도서관’을 설립하였다. 어린이도서관은 특히 달동네와 같은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지원하고자 설립되었다. 미국의 카네기가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을 위하여 공공도서관을 설립한 것처럼, 이인표 또한 독서나 공부를 하기 어려운 가정 환경의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이후 인표어린이도서관은 국내외 22곳에 지어졌다. 이처럼 그는 나라 안 소외된 곳곳에 어린이도서관이라는 등불을 켜고, 나아가 외국에서도 조선족 어린이들을 위하여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인간 사랑을 실천한 ‘도서관 할아버지’

  한편, 이러한 도서관 사업을 위하여 설립된 에스콰이아문화재단을 통하여 그는 소년원생들의 학비를 조달하고, 산간벽지 학교에 어린이신문ㆍ잡지를 보내고, 국립도서관이 운영하는 이동도서관에 매달 300만원 상당의 도서를 기증하였다. 어느새 그는 국내외에 수많은 손자손녀(!)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는 행복한 ‘도서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간 사랑의 실천으로 그는 1991년에 ‘올해의 독서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1992년 5월에는 색동회상을 받았고 동년 10월에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1993년에는 ‘책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제정한 ‘10월 책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또 그는 1995년에는 서울대학교에 사회과학정보센터를 기증하였고, 1999년에는 지식경영대상을 받았다. 이어 새천년(2000년)을 맞이하여 경영에서 손을 떼었으며, 2002년에 향년 81세로 별세하였다.

  기업 경영에서도 그는 항상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가 실천한 인간 사랑과 지식 사랑의 길을 통하여 그는 우리 도서관인을 비롯한 한국인의 마음에 영원한 ‘도서관 할아버지’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의 기업인 중에서 이인표 회장처럼 거룩한 실천을 하는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