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도서관에서 펼치는 독서교육
활동은 좀 더 올바른 방법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특히 사서직의 위상 제고와 지역
사회에 대한 도서관의 본질적 기여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절실해 보인다. 독서교육을
통해 지역의 어린이, 청소년, 어른의 삶에
좀 더 본격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면 사서와
주민의 관계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복원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개별 도서관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지금 관행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독서교육 방식은 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독서교육과 관련하여 독서의
본질에 기반을 둔 도서관 나름의 관점을 세우고
그를 통한 기여의 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그러한 인식이 부족한 형편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실천이 따르지 못하고 있다.
사소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국
큰 문제와 연결이 된다.
도서관의
주체적인 관점이 필요
독서교육과 관련하여 도서관
나름의 관점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사교육 시장과 학교의 관점이
그 자리에 들어와 앉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스스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남이 자기 일을 대신해 주며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도서관에서 독서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강사를 배치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대체로 사서들이 자신의 방법을
주장하며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무언가 불안한
심리 과정을 겪으며 지역의 학교나 독서학원
같은 데 연락하여 강사를 섭외하게 되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 아닌가? 바로 이것이 모순의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서 인력이
언제나 부족하여 내부에서 다 해결하지 못하는
도서관의 현실적 조건이 작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점의 부재 현상에 대한 면책의
요소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서관의 독서교육
활동에 사교육 시장과 학교의 관점이 들어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반드시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할까? 물론 전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교육 시장과 학교 내부에도
서로 다른 인자가 움직이고 있으며, 때로 독서의
본질에 근접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전반적으로
보아 사교육 시장과 학교(교육청)의 독서교육은
‘지식형’ 독서에 치우쳐 있다. 이른바 ‘학습
독서’ ‘수험 독서’ ‘기능 독서’ 일변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서가 공부 잘 하고
시험 잘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냉엄한 교육 현실에서 이러한 현상을
전적으로 평가절하 하기는 힘들지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면 잘못된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느끼고 깨우치는
‘체험형’으로 가야 할 독서 영역이 분명히
따로 있는데, 구분 없이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무리와 비효율을 낳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는다. 도서관의 독서교육이 전적으로 사교육
시장과 학교의 영향 아래에 놓였을 때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식형’ 독서와 ‘체험형’
독서
가령 지식과 정보를 주는
책이라면 ‘지식형’ 독서가 일리가 있으며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이라면 ‘지식형’으로 소화하는
것이 크게 무리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지혜와
영감을 주는 독서 영역은 어찌할 것인가? 예를
들면 법정의 「무소유」,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머리에
기억하여 지식을 축적할 목적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많이 기억하고 지식의 양이
많아지면 지혜와 영감이 따라오는가? 심히
의심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에
읽게 된 젊은 연구자의 글 한 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연구자는 독서교육 정책을
비판하면서 시중에서 흔히 보는 독서평가 문제지의
내용과 형식을 소개한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이연옥, 학교 독서교육 정책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37권 3호(2006.
9)).
김동인의
「감자」에 대한 문항 ------------------------------------------------------------------------------------------------ 문제:
복녀는 얼마에 팔려 갔습니까?
박상률의
「나는 아름답다」에 대한 문항 ------------------------------------------------------------------------------------------------ 문제
1: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세상을 껴안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문제 2: 다음
서술을 읽고 유추한 것으로 적절한 것을 고르세요.
걸핏하면
자기 엄마 눈을 피해 내 방을 찾아온다. 처음엔
참고서를 빌려달라느니, 문학서적을 빌려달라느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내 방문을 두드렸지만
언제부턴가는 그런 핑계 없이도 잘만 드나든다.
(1)주인공의
방을 찾는 아이는 엄마를 싫어한다. (2)주인공에게
호감이 있다. (3)주인공을 좋아하는 아이는
뻔뻔한 아이다. (4)주인공은 그 아이의
방문을 싫어한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선
절벽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한 마디로 이것은
「감자」나 「나는 아름답다」의 독자에게
전혀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이다.
두 작품은 단편적 정보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과
가치를 전하고 감동과 의미를 느끼게 하려고
태어난 것이다. 독서를 통해 세상을 발견하고
깨우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만약
질문을 한다면 느낌을 물어야 한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평가 문항을 만드는 어른들이 ‘지식형’으로
가야할 독서와 ‘체험형’으로 가야 할 독서를
혼동하여 저지르는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체험형’
독서의 예
‘체험형’ 독서를 조금 더
설명하는 방편으로 김용택의 시 읽기 방법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김용택은 이성선의 시
「논두렁에 서서」를 읽고 떠오르는 감상을
적고 있다. 우선 이성선의 시 전문을 옮겨
본다. (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 1」(마음산책,
2004))
갈아놓은
논고랑에 고인 물을 본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뭇가지가
꾸부정하게 비치고 햇살이 번지고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잠기고 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늘
홀로이던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누가
높지도 낮지도 않다. 모두가 아름답다. 그
안에 나는 거꾸로 서 있다.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인 것처럼 아프지
않다. 산도 곁에 거꾸로 누워 있다. 늘
떨며 우왕좌왕하던 내가 저 세상에 건너가
서 있기나 한 듯 무심하고 아주 선명하다.
다음은 같은 지면에 나타나
있는 김용택의 감상문이다.
흰서리를
쓴 쑥들은 마른풀 속에서 돋아나고, 앞산에
새 소리 새롭다.
하늘,
산, 강, 나무, 논, 밭,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오시는 우리 어머니, 그리고 강가에 서
있는 나. 세상에 봄이 오고 있다. 봄빛이 무르익어가는
논두렁을 걸으며 나는 빈다. 우리 모두에게
그 누구도 아프지 않은 봄이, 평등과 평화와
높은 자유의 봄, 사람들 사이에 향기가 나는
봄이 오길.
김용택의 이 글은 ‘체험형’
독서의 전범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시를
시답게 읽고 자신의 진솔한 느낌을 드러낸다.
시가 ‘나’에게 어떻게 와 닿았는가를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한다. 결코 시를 미주알고주알
분석하지 않는다.
독서의
본질에 닿는 도서관만의 독서교육을 모색해야
물론 ‘이 책은 ‘지식형’으로,
저 책은 ‘체험형’으로’ 라는 식으로 도식적으로
구분하여 독서하기는 어렵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도
얼마든지 ‘체험형’으로 읽는 것이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단종과 함께
울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저력을 발견하고 감동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이 있을
뿐 역사서 읽기가 전적으로 ‘체험형’으로
가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반면 이성선의
「논두렁에 서서」도 조금은 ‘지식형’으로
읽어도 안 될 것은 없다. 이 시의 지리적 배경이
농촌이며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감상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역시 전적으로
사실을 찾고(이 시에는 사실이 별로 없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은 독자가 저절로 알아서 길을
찾게 되어 있으며 인위적인 ‘지도(指導)’의
요소가 들어가면 오히려 해로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지식형’ 일변도의 ‘지도’가
의례 강조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도서관의 입장은
무엇인가? 우선 저간의 사정을 살피고 자신의
입장은 사교육 시장과 학교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일반적인
관점이 되고 있는 ‘지식형’ 독서가 반드시
도서관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한다. 좀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도서관의 길은 ‘체험형’ 독서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 생각의 배경에는
‘왜 도서관이 또 하나의 독서학원이 되어야
할까’ 하는 회의가 깔려 있다. 과연 그것이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기대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독서교육과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독서의
본질에서 이탈해 버리면 목적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독서 활동이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도서관의
독서교육은 대상이 성인이든 어린이와 청소년이든
도서관 자체의 버전에 따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서관 자체
버전은 ‘체험형’ 독서의 본질을 좀 더 연구하고
규명하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전망도 세워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기댈 만한 마땅한
외부가 별로 없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외부를 어영부영 따라가는
것은 정말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주체성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 학계와
도서관계가 이 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움직여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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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근ㆍ부산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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